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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 영웅

2008.06.27 20:3406.27

  마사나마르나는 시지라이의 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화로웠다. 입스의 군대는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적어도 멀리서 볼 때에는 늘 그렇다. 말들은 흰 색 천막 주위를 노닐고 있다. 사람은 그저 그 풍경 속에 어우러지도록 갖다 놓은 장식품 같다. 지루하고 평화로운 저 어딘가에서 시지라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저 유목민들은 눈이 좋다. 저렇게 먼 거리에서도 자세하게도 볼 줄을 안다. 눈이 좋은 만큼, 먼 데 있는 것이 더 자세히 보이니까 활을 쏘면 더 정확히 쏠 수 있다. 저들과 달리 게르기르족 농사꾼 출신 병사들은 그렇게 먼 데까지 보지 못한다. 그래서 활을 쏠 때도 너무 먼 것은 맞추지 못한다. 그래서 사정거리가 짧다. 시력만큼이 사정거리다. 그렇다면 적의 활은 사정거리가 더 길어야 당연한데,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입스는 큰 활을 쓰지 않는다. 작은 활은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만약에 적들이 시력만큼 멀리 날아가는 활을 쓴다면, 이곳은 안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진영이 언제까지나 안전할 수는 없다. 수도인 외르메뤼자칸 요새를 함락시키고 온 적들이다. 마사나마르나가 주둔하고 있는 작은 마을쯤은 이틀도 못 버틸 것이다. 저렇게 한가하게 노닐고 있는 말들이 언제 갑자기 야만인들을 등에 태우고 이쪽으로 달려들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저 초지도 원래는 이 마을 소유의 목초지였던 것을 저들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다. 원래 그곳에 있던 짐승들은 말이 아니라 양이었다.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풀어 기르던 양떼, 그 양떼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벌써 아군의 주둔 물자로 희생되었을 것이다. 이 조그만 마을에 3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주둔해 있으니 사실은 어느 것 하나 멀쩡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무기로 만들 수 있을만한 쇠붙이들도, 편안하게 잠들만한 곳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반은 거지이고 반은 깡패인 3만 병력이 뿜어내는 엄청난 악취만이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냄새로 싸우면 저들을 이겨낼 수 있을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입스라고 악취가 덜할 리는 없다. 저 흰 천막들도 가까이에서 보면 아마도 흰 색이라고 하기 어려운 꾀죄죄한 색깔일 것이 틀림 없다. 전장에서 맡아 본 적들의 냄새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냄새로 싸운다고 해도 질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다만 저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그나마도 바람이 잘 통하는 초지에 잠깐 머물렀다 떠나기 때문에 냄새로 영역 표시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농사꾼 병사들은, 어마어마한 악취로 마을에다 영역 표시를 했다.
  마사나마르나는 마을 구석구석에서 지독한 냄새가 배어 나오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악취는 곧 병력의 숫자다. 외르메뤼즈 황제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제국 변방들을 순시하러 다닐 때, 반란을 꿈꾸던 지방 귀족들은 정확하게 황제의 무엇에 압도당했던가? 백만 병력의 위용 앞에? 아니다. 백만이라는 숫자는 셀 수가 없다. 황제가 데리고 다닌 병력이 백만이나 된다고 말하는 사람 치고 진짜로 그 숫자를 세어 본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사실 만 명이 넘어가면 사람의 숫자 개념은 있으나 마나다. 그저 ‘많다’고만 표현해도 충분하다. 반란 세력의 눈에 백만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위압적이지 않다. 그들을 무릎 꿇게 만든 것은 숫자가 아니다. 악취다. 백만 명 냄새. 그것은 말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런 냄새가 나려면 정말로 사람이 최소한 백만 명은 모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백만 명이 적당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초라하게 길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야영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딱 두 달만 지나면, 냄새는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린다. 외르메뤼즈의 영역 표시는 그렇게 강했다.
  물론 그 냄새에는 훨씬 못 미치겠지만, 그 비슷한 냄새는 날 만한 숫자가 모여 있었다. 3만 명. 그 어렴풋한 악취가 마사나마르나를 안심시켰다. 황제로부터 추가 병력이 오고부터 확실히 그 냄새가 진해진 것 같았다.
  외르메뤼즈 황제에게서는 물론 악취가 나지 않았다. 원정을 나가거나 사냥을 다닐 때, 황제의 시종들은 목욕물을 구하느라 애를 먹는다. 그는 늘 깨끗하다. 그런데 황제의 수도인 외르메뤼자칸은 이런 조그만 마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외르메뤼즈는 그 냄새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도시는 제국 최강의 요새도시이기도 했다. 이런 마을에서 나는 냄새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병력이 3만 명쯤 모이자 바람결에 어렴풋이 난공불락 요새의 냄새가 실려 오기 시작했다. 이 냄새가 필요했다. 외르메뤼즈의 백만 대군이 적들의 공격에, 그리고 황태자의 반란에 조금씩 조금씩 다 사라지고 난 후로는 이 냄새를 맡기가 힘들었다. 황제는 그래도 아직 6만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지만, 백만에 비하면 6만은 턱없이 적어 보이는 숫자였다. 황제는 방어를 위해 병력의 일부를 떼어 주는 것조차 주저했다. 그가 6만의 악취에 둘러싸여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하면서 시종들을 들들 볶는 사이에 적은 손쉽게 남하했다.
  마사나마르나는 아직 대장군이 될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다만 이제 황제 곁에 믿을만한 게르기르족 장군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 이유로 대장군이 되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단 2만 명뿐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모아 놓고 쓰지 않으면 군대는 곧 아군인지 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황제가 끼고 있는 4만 군대는 남쪽 지방 마을들을 금세 거지로 만들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안 남았다. 그러자 비로소 황제는 1만 명을 떼어 전장으로 보냈다. 근위대와 원정군이 똑같이 3만이 된 것이다.
  시지라이의 선봉은 2만이 채 되지 않았으므로 3만 병력이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재 입스 전체 병력이 7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셈이 달라진다. 저 유목민들은 8만의 병력만으로 외르메뤼즈의 백만 대군이 내뿜는 고약한 냄새를 끝내 잠재우고 말았다. 사실 3만은 꽤 부족한 숫자다. 남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다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시지라이가 이끄는 군대는 유목민 군대다. 이 마을에 주둔한 3만 명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이때까지 싸움은 늘 그런 식이었다. 적들은 아군이 싸우고 싶어 하는 곳에서 싸워주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길목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사나마르나는 희한한 곳을 막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도 전략적 요충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을만한 곳에다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가 지키고 선 곳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마을이었다. 3만 명이 주둔하기에 충분히 큰 마을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사나마르나는 근처에 다다르자마자 재빨리 마을에 진을 치고 임시로 제단을 세운 다음 의미를 알 수 없는 깃발들을 둘러치고는 결사 항전하겠다는 뜻을 시지라이에게 전했다. 전령의 말에 따르면 시지라이는 도대체 그 마을에 뭐가 있기에 그렇게 요란하게 구는지 궁금해 했다고 했다. 궁금하기는 아군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마사나마르나에게 그 의미를 묻자 그는,
  “나도 궁금하군.”
  하고 대답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뜻이었다.
  적장 시지라이 역시 한참 동안이나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다. 시지라이는 그런 식의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뭔가 함정이 있을 게 뻔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게르기르족들이 저렇게 지독한 냄새를 풍기면서 몰려 있는 곳에는 뭔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시지라이는 마사나마르나에게 전령을 보냈다. 전령은 별로 전할 말이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의미 없는 말 몇 마디를 지니고 적진으로 용감하게 건너갔을 뿐이다. 마사나마르나는 시지라이의 전령이 뭐라고 열심히 떠들어 대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역시 만만치 않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대단한 입냄새였다. 과연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적이 차라리 이런 조그만 마을쯤 무시하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바라는 편이 나을까. 그래도 무슨 수를 써서든 이쯤에서 시지라이와 맞붙어야 했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적 병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황제가 남쪽에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래야만 이 전쟁에서 이길 승산이 생긴다. 일단 시지라이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근처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며칠째 머무르고 있다. 게다가 전령까지 보냈다. 그러나 저들과 맞붙어서 이길 수 있을까.
  입스의 전령이 돌아가고 난 뒤에 마사나마르나는 비로소 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시지라이가 있는 곳에서 마을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입스의 천막들은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말들도 한가해 보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모습은 멀리서 보기에도 어딘지 달라 보였다. 시지라이의 말을 돌보는 자가 다른 측근들을 대표해서 시지라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게르기르 놈들, 밖으로 나왔군요. 마을 안에서 버티고 있었다면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을 듯한데, 지금은…….”
  게르기르족들은 종종 저렇게 요새지 버리고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외치다가 전멸을 당하곤 했다. 물론 시지라이 역시 드디어 마을을 손에 넣을 기회가 왔다는 생각쯤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방어선은 왜 뚫어야 하지? 마을에 뭐가 있기에 다들 마을을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함정인가? 함정이라면, 도대체 저게 뭐가 그렇게 위험한 거지? 마사나마르나는 뭘 믿고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거지? 지금 당장 돌격해 들어가면 게르기르 놈들이 이 시지라이를 막아낼 수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며칠이 더 지났다. 마사나마르나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은 방어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왼편으로는 가파른 산을 있고 오른쪽으로는 강을 끼고 있어서, 시지라이가 지금 위치에서 마을로 가려면 그 좁고 긴 구역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지라이의 병력은 전부 기병이다. 활과 창, 철퇴, 짧은 칼 같은 무기를 쓰고, 거추장스럽게 갑옷 따위를 걸치지는 않는다. 사실 그런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다닐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지라이의 유목 기병들은 어지간해서는 정면에서 돌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그보다는 넓은 지역에서 빠른 발을 이용해 적의 측면과 후방을 포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한쪽이 산이고 한쪽이 강인 전장에서는 포위라는 게 불가능했다. 시지라이는 마사나마르나에게 전령을 보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잡은 자리가 너무 좋아. 싸울 마음 없네.”
  마사나마르나는 이미 철수 준비에 들어간 시지라이의 진영을 보고는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자기 병력을 마을 쪽으로 약간 이동 배치했다. 즉 병력을 좀 더 넓은 지역으로 옮겨 놓았다. 그러자 시지라이는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저것들은 왜 좋은 자리를 버리고 안 좋은 자리로 옮기는 거지? 마사나마르나라는 자는 경험이 전혀 없는 자인가? 아니면 조금 더 불리한 자리로 가 줄 테니 공격해 보라고 유인하는 건가? 그는 다시 마사나마르나에게 전령을 보냈다.
  “아직도 자네 자리가 더 유리하군.”
  그러자 마사나마르나는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유인이었다. 아니 유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뻔뻔스러운 짓이었다. 거의 조롱에 가까웠다. 이정도 양보해 줄 테니 어서 들어오시오,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시지라이는 생각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공격을 할 이유가 없지. 저 마을에 뭐가 있든. 있든 없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적 지휘관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고 이해할 수 없는 도발을 감행하고 있었다. 혹시 상대가 자기를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시지라이는 화가 났다.

  한편, 마사나마르나는 신중하고 침착했으며 전혀 승리를 자신하지 않았다. 제발 가장 좁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동안 적이 달려들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적은 그렇게 어리석지가 않았다. 아니, 사실 바로 그 시점에 공격을 당했다면 마사나마르나의 군대는 적을 막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의 병력은 훈련이 부족하고 겁이 많으며 비열했다. 농민들로 이루어진 군대에게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맹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진형을 유지하면서, 눈앞으로 몰려드는 적 기병을 창과 활만으로 꺾어 눌러주기를 바라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의 기억에 농민들은 군대는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가장 헌신적으로 싸웠다. 배가 고팠을 때 가장 강한 군대가 되었다. 그래서 마사나마르나는 식량을 줄였다. 아니 보급선이라는 것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현지조달에 의존했다. 현지조달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무자비한 약탈을 통해 그들은 조금씩 농사꾼의 탈을 벗었다. 그것이 바로 마사나마르나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자질이었다. 그 이하는 군인이 아니다. 폭도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은 아직 강인한 군인이 아니었다. 진짜 전사가 아니라 깡패 집단일 뿐이었다.
  적은, 시지라이의 유목민들은 하나하나가 이미 잘 훈련된 싸움꾼이었다. 유목민들은 농사꾼보다 더 가난해서 늘 어딘가를 약탈하러 다닌다. 농민 군대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현지조달을 위해 마을을 약탈하지만, 유목민이란 족속들은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약탈을 감행해야 하고 때로는 전쟁도 불사한다. 게다가 지금의 입스는 예전의 입스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입스의 전령으로부터 그렇게나 지독한 입 냄새가 났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입스의 전령들은 전령 집단에 의해 선발되고 조심스럽게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전령은 대족장의 명령을 우선으로 받드는 집단이다. 다시 말해서 대족장이 일곱 씨족의 족장들을 중앙집권적으로 다스리는 일종의 행정조직이다. 그들의 주요 업무는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일이다. 전령이라고 남들보다 깨끗하지는 않지만,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차 때문에 이들은 냄새가 덜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온 시지라이의 전령은 입 냄새가 대단했다. 전령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족장의 신하가 아니라 시지라이의 측근, 시지라이 개인의 가신이라는 뜻이다. 물론 시지라이가 대족장 마로하를 몰아내고 반란에 성공한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입스는 예전의 야만적이고 과격한 전사 집단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마사나마르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나 마사나마르나가 기대하는 것 또한 바로 그 점이었다. 씨족별로 조각조각 나뉘어 한 덩어리로 움직이지 못하던 예전의 입스라면 농민들의 군대로도 이길 수 있다. 막무가내로 호전적이기만 한 그 야만성을 자극한다면 저들은 분명히 사지로 달려들 것이다.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쓰러질지 확신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마사나마르나는 냄새에 집착했다. 적의 냄새, 아군의 냄새, 농사꾼의 냄새, 3만 명의 냄새, 전령의 냄새.
  그러고 보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지독한 냄새를 뿜어내는 인간이 하나 있었다. 제메이. 황제가 말했다. 자기가 보내는 만 명 중에는 제메이가 들어 있다고. 그러니 그 정도로 충분할 거라고. 마사나마르나는 사람을 시켜 제메이를 찾아 오라고 일렀다.

  제메이는, 어려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는지 부모가 죽어버렸는지, 아무튼 고아로 발견되었다. 산 속에 은둔해 살던 제메난 부족의 마지막 핏줄 몇 사람이 그를 맡아 길렀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산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제메이라고 불렀다. 제메난 부족은 아주 오래 전에 입스의 한 씨족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는데, 이들은 수백 년 동안 고대 입스의 비전(秘傳)을 간직하고 은둔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침묵과 고행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 전해졌다. 그들은 해가 진 뒤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부터 사악한 영혼이 퍼져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뜨고 그 사악한 기운이 태양 아래 사그라질 때 그들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제메이를 길러 준 무리는 제메난 부족 일파 중에서도 마지막 자손들이었다. 그들은 결국 멸종하고 말았는데, 마지막으로 남겨진 일족 하나하나가 맞이한 개별적인 죽음의 순간들이 제메이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 중 두 차례의 이별이 가장 서글펐는데, 그 중 하나는 스승의 죽음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였다. 그의 스승은 손을 들어 빗방울이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갈 길이 먼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말하고는 그 모습 그대로, 선 채로 세상을 떠났다. 다른 하나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이었다. 연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제메이는 죽어나 볼까 하고 산을 내려왔다. 강물에 몸을 던졌으나 이상하게도 죽어지지가 않았다. 절벽에서 뛰어 내렸을 때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나 어느 마을 사람들 손에 맡겨졌다. 사지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무렵에, 제국 전역에 백만 대군을 모으기 위한 징발령이 내려졌다. 제메이는 가혹한 강제 징발에 저항하는 마을 사람들 틈에 끼어 있다가, 죽어나 보자 하고 군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날 이 신비한 영웅은 마사나마르나의 병사 스물두 명을 불구로 만들었다. 보고를 받은 마사나마르나는 그 지독한 악취에 감탄하며 근방을 순시 중이던 황제에게 그를 이송했다.
  “영웅이 될 재목입니다.”
  그러나 본심은 황제의 무리한 징집에 대한 반항의 의미도 있었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황제에게 제메이의 고약한 냄새는 확실히 모욕이었다. 그런데 외르메뤼즈 황제는 그 냄새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제메이에게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정말로 영웅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외르메뤼즈가 제메이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황제는 영웅이 될 재목인지 아닌지 직접 시험해 보겠다며 근위대로 하여금 제메이를 두들겨 패도록 명령했다. 소문에는 제메이가 200명이나 되는 근위대 병사들을 맨손으로 상대했다고 전해졌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그는 마흔 한 명을 죽이고 나서 제압당했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영웅 제메이는 그렇게 발탁되었다.
  제메이는 적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발탁 자체가 적을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귀족 출신 지휘관들은 황제가 직접 발탁한 제메이를 여느 농민병과 다를 바 없이 대했다. 제메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벌써 멸시가 담겨 있었다. 농민보다 못한 천출이라는 것이다. 산에서 온 사람들에게서만 나는 지독한 악취가 그런 분위기에 힘을 보탰다. 장군들은 제메이에게 지휘권을 맡기지 않았다. 단 10명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하사한 화려한 갑옷을 입었지만 다른 병사들과 다름없이 가장 위험한 전장에 창을 들고 서 있었다. 화려한 갑옷은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적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공격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장군들은 제메이가 그렇게 죽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를 발탁한 마사나마르나와 외르메뤼즈조차 이내 그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가장 위험한 전장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바로 그런 상황이 제메이를 진짜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제메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죽어나 보자 하고 전장에 섰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화살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화살 같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 속에서도 삶의 순간과 죽음의 순간이 가려지기 마련이었다. 죽어나 보자 하고 스스로를 그 속에 밀어 넣었을 때, 이상하게도 그는 늘 살아남았다. 죽음의 위협은 옆줄에 선 다른 사람보다 그를 먼저 겨냥했고, 그는 결코 그 위협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늘 살아남았다.
  변화는 그의 바로 곁에 서서 싸우던 병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냄새나는 제메이. 그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가난하고 굶주린 인간 제메이가 위태위태한 전투에서 끝끝내 살아남는 모습은 서서히 거대한 변화로 이어졌다. 제메이의 손에 목숨을 잃은 적의 숫자가 거의 900명에 이르던 어느날, 그들은 마침내 그를 영웅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 명령을 내리는 자는 장군이었지만 병사들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순간에 일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자는 다름 아닌 제메이였다. 그들은 제메이의 맑은 눈빛과 고결한 마음가짐에 탄복했고, 죽음을 대하는 평온한 마음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제메이는 스스로 영웅이 되었다.
  그러자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라져 주기를 바랐던 제메이가 오히려 영웅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를 중심으로 농사꾼 병사들이 결집하고 있는 데다, 전장에서의 명령권이 사실상 그에게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꾸준히 전공을 세웠고, 황제의 관심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아무것도 잃을 게 없을 만큼 충분히 가난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뺏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빼앗길 무언가를 쥐어 주기로 합의했다. 보메르야. 제메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사랑한 여자였고, 평생 자기 눈에서 흘렸던 눈물보다 제메이의 눈에서 흐르게 할 눈물이 더 많을 여자였다.
  보메르야는 향이 좋은 여자였다. 마사나마르나는 이 여자로 인해 제메이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 제메이의 몸에서 악취가 나지 않게 된 것만은 분명했다. 여왕벌처럼 중심에 서 있던 제메이의 냄새가 사라지자 농사꾼 병사들은 결집력을 잃었다. 먼저 자리를 잡고 창을 치켜들어야 할 제메이가 없어지자 군대는 가시 돋은 돌벽 같이 탄탄했던 예전의 모습을 잃어갔다. 그들은 쉽게 짓밟혔다. 그러나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귀족들의 중장기병은 적에게 무너지고 있는 자기편 보병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돌격해 들어갔다. 병사들은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말을 탄 모든 자들에게 짓밟혔다. 그리고 그 후에 사람들은 제메이에게서 여자를 빼앗았다. 그러자 제메이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제메이가 놀랍게도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급박한 상황에 이르자 황제가 그를 간직해 두었다가 마사나마르나에게 보냈다. 그날 마사나마르나는 제메이를 만났다.

  그 무렵에 시지라이는 씨족 우두머리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했다. 이미 대다수가 공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도 포위공격이 아니라 정면 돌파를 바라는 요구하고 있었다. 확실히 게르기르족 군대는 훈련이 안 된 농사꾼들의 무리에 불과했다. 그리고 농사꾼들에 대한 유목민들의 경멸은 대단했다. 어쩌면 정말로 신속하게 적을 돌파한 뒤에 계속해서 남하하는 편이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을 타고 섣불리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런 전술은 파괴력이 큰 만큼 위험도 컸다.
  입스 전사들이 돌파를 요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때는 반란을 일으켜 대족장 마로하를 무너뜨린 직후였다. 정면 돌격을 최대한 피하는 방식은 바로 마로하의 전술이었다. 정확하게는 그 전 족장인 지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지만, 마로하 시대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전술이다. 반란이 성공하자 주요 반란 동조자들은 마로하의 방식은 무엇이든 버리기를 바랐다. 물론 시지라이도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선뜻 공격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저 정신 나간 게르기르족 지휘관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그 미친 게르기르 장군이 자기 병력 일부를 뚝 떼어서 마을로 돌려보내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대략 5천 명 정도였다. 2만 5천. 이 정도면 공격해 들어 올만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시지라이는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승승장구하던 대족장을 자리에서 내리고 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거침없는 승리였다. 그는 승리에 목말라 있었다.
  한편, 마사나마르나는 측근들의 잔소리를 듣느라 도무지 전략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병력을 스스로 줄이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숫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무모한 장군 밑에서는 도저히 머무를 수 없다는 자도 있었다. 마사나마르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제메이가 있어서 그런지, 마사나마르나도 어쩐지 죽어나 보자 하고 싸움터에 선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죽고 싶지 않은 참모들이 연이어서 면담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입스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마사나마르나는 오후에 2천 명을 더 떼어냈다. 결국은 2만 2천. 외르메뤼즈가 처음에 내 준 병력과 비슷했다. 마사나마르나는 신중하게 숫자를 가늠했다. 적에게 만만해 보일만큼, 그러면서도 진짜로 싸웠을 때 적을 이길 만큼. 그는 말을 타고 자주 진영을 돌며 냄새의 농도를 쟀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제메이를 만났다. 생각대로 제메이는 나이 들고 야위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눈빛이 맑았다. 그리고 예전의 그 냄새가 났다. 마사나마르나가 물었다.
  “지하 감옥에 있다가 나왔다고?”
  “그렇습니다. 오래 있었죠.”
  “그렇군.”
  “그렇죠.”
  “황제의 군대만 전멸하지 않고 살아남은 게 다 그대 때문이었나?”
  마사나마르나는 언제부터 제메이가 전장에 돌아와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제메이가 대답했다.
  “수습할 수 없게 되어버린 뒤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사나마르나는 실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하긴. 그렇지. 전부 다 폭삭 무너졌으니까 말이야. 너무 순식간에 무너졌어. 살아남은 병력을 다스릴 장군들이 너무나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남은 것은 외르메뤼즈와 마사나마르나뿐이었다. 살아남은 자들끼리 모아 놓은 군대. 살아남은 자라면 누구나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좁디좁은 군대에서 마사나마르나는 제메이를 다시 만났다.
  “여러 번 섞였습니다. 살아남은 패잔병끼리 섞고, 그 패잔병들이 전쟁에서 패한 다음에는 그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또 섞고.”
  “지금 내 병사들은 죽음을 여러 번 피해 간 자들 뿐이겠군.”
  “대신, 이겨 본 적 없이 계속 지기만 한 자들입니다.”
  “나는 이 싸움을 꼭 이겨야 하네.”
  “저야 늘, 죽어나 보자 하고 창을 듭니다.”
  마사나마르나는 제메이의 얼굴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분노는 서리지 않은 눈이었지만, 마주 보기가 편하지만은 않았다. 제메이가 말했다.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메르야는, 떠도는 소문대로 그렇게 죽지는 않았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보메르야를 해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네.”
  마사나마르나는 짧게 대답했다. 제메이의 적들이 보메르야를 납치하자 제메이는 칼을 뽑아들고 외르메뤼자칸 시내에 있는 귀족들의 집을 습격하고 다녔다. 보메르야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봐도 귀한 집안 자제들의 소행인 것 같다고 사람들이 전했다. 누군가는 마사나마르나를 본 것 같다고도 했다. 제메이는 이성을 잃었다.
  원래는 혼자 나섰다. 그런데 어느새 주위에 사람이 하나 둘 늘었다. 귀족들의 집을 습격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는 무섭게도 빨리 불어나서 이내 아무도 숫자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제메이는 반란군을 이끌고 제국의 수도를 휘젓고 있었다. 함정이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적들은 이미 반란을 진압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제메이의 반란은 아무런 계획 없이 우발적으로 불어난 눈덩이 같은 반란이었다. 제메이는 그렇게 제거되었다. 그때부터 외르메뤼자칸이 함락되는 날까지 제메이는 쭉 감금되어 있었다.
  제메이는 바로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사나마르나가 물었다.
  “아무튼 돌아왔군. 복수하려고?”
  “복수라고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을 거야. 그대의 적들은 대부분 죽거나,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갔네.”
  “그렇더군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더군요.”
  제메이가 말했다. 아마도 그는 그저 죽어나 보자 하고 전쟁터에 나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사나마르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은 삶에 대한 욕구가 남아 있었다. 그는 제메이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 냄새나는 영웅과 함께 싸워 온 5천 명 정도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지독한 악취가 풍겨 왔다. 그날 마사나마르나는 새로 뽑혀 온 병사들 중 경험 없는 3천명을 뽑아 마을 후방으로 내보냈다. 그는 그래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메이가 함께 한다면.
  게르기르의 병력이 1만 9천으로 줄어들자 시지라이는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이길 수 있다.”
  시지라이가 술에 취해 소리쳤다. 다음날 시지라이의 군대는 마을로 통하는 통로 쪽을 향해 자리를 잡았다. 시지라이는 게르기르족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서서히 다가가다가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는 화살이 어디까지 날아올 수 있는지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소규모의 원거리 사격전을 벌이다가 이내 멈추었다. 관건은 얼마나 먼 데서부터 첫 화살이 날아올 것인가, 그리고 저쪽 궁수들이 얼마나 능숙하게 다음 화살을 쏘는가였다. 게르기르족 군대는 진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신호에 따라 한꺼번에 활을 쏜다. 한 명 한 명이 명사수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살상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병은 수차례 쏟아지는 화살의 파도를 지나야 비로소 적의 맨 앞줄에 도달할 수 있다. 적의 맨 앞줄을 돌파할 때까지 그 파도를 과연 몇 번이나 견뎌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그 숫자는 적의 사정거리가 멀수록, 장전 속도가 빠를수록 늘어나고, 기병의 돌격 속도가 빠를수록 줄어든다. 넓은 곳에서 포위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 날아오겠군.”
  시지라이가 거리를 가늠하면서 말했다. 측근들도 동의했다. 승산이 있었다. 시지라이는 선봉을 맡을 부대에, 반드시 방패를 들고 갑옷을 껴입으라고 전했다. 준비하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입스 쪽에서 진형을 갖추는 것을 보고 마사나마르나는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가장 훈련이 안 되고 다루기 힘든 병력을 만 명 가까이 후방으로 빼 두었으므로 나머지는 비교적 통제하기가 쉬웠다. 마사나마르나가 일부러 병력을 줄여서 농민 병사들을 모조리 허망한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바람에 사기가 떨어졌지만, 병사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실전 경험은 꽤 있는 편이었다. 물론 그 경험이라는 것이 거의 패전 경험이었다는 것이 흠하기는 했다. 잘 싸워 봐야 농민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다. 귀족 출신 기병 부대를 전혀 보유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지만, 마사나마르나는 농민군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메이는 다르다. 지금 당장은 시골뜨기 오합지졸들일지도 모르지만 제메이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마사나마르나는 제메이가 자기 병력에 대한 통제권을 얼마나 잠식해 있는지가 궁금했다. 제메이의 옛 적들은 그 일을 가장 두려워했지만, 지금 마사나마르나는 농민들이 제메이를 중심으로 단단하게 결집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제메이를 영웅이 될 재목이라고 황제에게 소개했을 때 황제는 비웃듯이 말했다.
  “영웅? 그런 게 필요한가? 저자가 전장에서 혼자 50명쯤을 상대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나? 나머지 5만 명은 누가 상대하지? 나에게 필요한 영웅은 내 군대를 이끌 훌륭한 지휘관이네. 마사나마르나, 훌륭한 지휘관이 필요한 거지 솜씨 좋은 칼잡이가 필요한 게 아니라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제메이는 달랐다. 물론 그는 혼자서 50명쯤을 상대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냄새나는 농사꾼들을 싸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가 함께하는 전장에서, 무식한 농사꾼들은 하나하나 따로 떨어진 농사꾼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싸우는 동안 그들은 하나의 정신으로 뭉쳤다. 그들은 하나의 냄새, 퀴퀴하고 역겨운 하나의 냄새로 엮어졌다. 묘하게도 황제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마사나마르나도 그 냄새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전투를 치르기 전에 마사나마르나는 마지막으로 병사들의 역할 분담 상황을 점검했다. 병사들은 숙련도가 다 달랐다. 사수들은 세 가지로 구분했다. 큰 활은 땅에 고정해 두고 쓰는 기계식 활인데,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했다. 그러나 연사력이 떨어져서 적이 돌격하는 동안 세 번 정도밖에 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보통 활은 전체 병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가장 숙련도가 낮은 병사들이 들고 있는 무기였는데, 시지라이 계산대로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를 쏠 수 있는 일반적인 활이다. 세 번째는 마사나마르나가 오랫동안 키워 온 숙련된 소수정예 부대인데, 이들이 쓰는 활은 사정거리는 짧지만 연사 속도와 명중률이 뛰어났다. 아마도 적은 보통 활이 세 번 정도 발사된 이후에나 이 활의 사정거리 안에 들 것이고, 그때부터 약 일곱 번에서 열 번까지 사격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역할이 배분되어 있다면 활을 쏘는 간격이 서로 엇갈려서 전체적으로 연사력이 늘어난 것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고, 강한 공격과 약한 공격이 혼합되어 무기의 효율이 높아지고, 공격의 강약도 다양해지는 장점이 있었다.
  나머지는 창을 들고 맨 앞줄에 서서 적을 직접 상대할 제메이의 부대다. 이들이 사용하는 창은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데, 창병들이 앞뒤로 다섯줄의 밀집 대형을 이루고 쭉 늘어서서 창을 앞으로 뻗으면 맨 뒷사람의 창끝이 맨 앞사람의 오른쪽 어깨를 넘어서 대열 앞으로 한걸음 정도 돌출된다. 이 대열이 무너지지 않아야 전체 전열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었다. 적이 결국 여기까지 도달하고 난 이후에는 아무도 결과를 알 수 없다. 보통은 적이 이 장벽에 도달하는 순간, 창병들은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전열을 이탈한다. 그래서 농민병은 믿을 수가 없다. 제메이가 없는 경우에는 늘 그랬다.
  마사나마르나가 전열을 돌아보는 동안에도 소규모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사나마르나에게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제메이가 혼자 전선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커다란 방패로 화살을 막으면서 천천히 걸어가다가 전장 한가운데 멈춰 서서 바닥에 칼을 꽂고, 적이 쏜 화살 몇 개가 꽂혀 있는 방패를 내려놓고는 입스 쪽을 향해 섰다. 도발이었다. 마사나마르나는 급히 말을 몰아 그곳으로 달려왔지만 제메이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마사나마르나가 그 광경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참모들도 제메이의 단독 이탈을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양쪽 모두 사격을 멈췄다. 제메이는 적진 쪽으로 좀 더 다가가다가 적에게 등을 보이며 아군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칼을 들어 올렸다. 게르기르족 창병 대열로부터 창끝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여오기 시작하더니 대열 전체에서 함성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래. 그런 게 필요했어. 마사나마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의 제메이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병사들을 장악하는 법을 보다 확실하게 알았다. 많이 컸군. 제메이. 이렇게 해서 이 전쟁을 이기고 나면 그대와 나는 다시 적이 되겠군.
  그때, 적진에서 북소리와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말을 타고 제메이를 향해 달려왔다. 그는 자기편 진영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는 말에서 내렸다. 그가 무어라고 말했지만 제메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도 이름을 말하는 듯 했다. 말할 때 입에서 고약한 악취가 났다. 제메이는 단칼에 그를 쓰러뜨렸다. 그러자 함성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제메이의 귀에는 그 소리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칼을 다시 빼 들면서 제메이는 죽은 적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히쇼탐다 스죠홈난 우자그탈 구답다.”
  그는 황제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며 칼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가 이름을 말했을 때 황제는 이름이 너무 어려우니 그냥 제메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외르메뤼즈라는 이름도 그다지 쉬운 이름은 아니었으나, 그는 황제의 이름을 기억했고 황제는 그의 이름을 영영 기억하지 못했다.
  또 한 명의 적이 적진으로부터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이번에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돌격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제메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칼을 던져 말을 쓰러뜨렸다. 낙마한 적은 재빨리 칼을 뽑아 들고 일어나 달려들었지만 제메이는 순식간에 무기를 든 적의 손을 제압하고는 몸통을 가볍게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적은 땅에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졌다. 제메이가 말했다.
  “너는 이름이 뭐지?”
  쓰러진 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메이는 다시 자기 이름을 말해 주고는 적의 칼을 뺏아 들고 적진을 향해 돌아섰다. 이번에도 창으로 땅을 두드리는 소리, 함성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메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보메르야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보메 르야.”
  보메르야가 맨 처음 한 말이 그 말이었기 때문에 제메이는 그게이 이 여자의 이름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었지만 여자의 이름은 ‘르야’였다. ‘보메 르야.’는, ‘내 이름은 르야.’라는 뜻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오해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여자의 이름을 보메르야로 착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보메르야라고 부를 때마다 르야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르메 르야 야?”
  ‘네 이름도 르야라고?’ 하고 반문하면서 그녀는 실실실 웃어 댔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말이 안 통했다. 그녀는 먼 남쪽 변방에서 제국에 공물로 바쳐졌는데, 외르메뤼자칸 안에서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감고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적진으로부터 날아온 화살이 쉭 소리를 내며 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제메이는 눈을 뜨고 적진을 바라보더니 방패를 놓아둔 곳으로 걸어갔다. 게르기르 진영에서도 화살 수십 개가 적진을 향해 날아갔으나 거리가 좀 짧았다. 입스 쪽에서 날아온 화살 몇 개가 제메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제메이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방패를 세워 놓고 그 뒤에 등을 대고 앉는 순간 화살 하나가 방패를 때린 뒤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뜻밖의 순간에 전투가 시작될지도 몰랐다. 마사나마르나는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 시지라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다시 함성소리가 높아지자 제메이는 방패 밖으로 나왔다.
  또다시 보메르야가 떠올랐다.
  “히쇼탐다 스죠홈난 우자그탈 구답다.”
  하고 그자 자기 이름을 말했지만 르야는 그게 이름이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르야는 그가 왜 자꾸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제메이가 르야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3년이나 지난 뒤였는데, 그때 르야가 들려준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자기가 제메이의 이름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유고야.”
  하면서 인상을 쓰곤 했다. 그러면 제메이는 그녀가 자기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은 ‘무서워.’가 아니라 ‘냄새!’라는 뜻이었다. 제메이가 보메르야를 달래기 위해 어깨를 끌어안자 르야는,
  “유고야!”
  하면서 발버둥을 쳤다. 제메이는 이 여자가 반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자기를 무서워만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고, 보메르야는 제메이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기겁했다.
  제메이는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맨손으로 적의 창을 뺏고 말에서 떨어뜨렸으며, 주인 잃은 말에 올라타 다른 적들을 상대했다. 창이 부러지자 짧아진 막대기로 다음 상대를 후려쳤다. 함성소리가 커질수록 귀가 점점 더 멍해지더니 보메르야의 목소리가 한층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전투가 끝나고, 피투성이가 된 옷을 벗어 던지고 지저분한 자루에 갑옷을 담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제메이에게로 다가가 그 더러운 옷을 벗기려고 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메이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에도 자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갑옷만 열심히 닦던 그녀가 그날따라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다짜고짜 옷을 벗기려 들자 당황하고 말았다.
  “유고야!”
  “무섭다고? 무서우니까 벗으라고? 피 묻은 옷이 무서워?”
  그러자 르야는 자기네 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어유. 넌 애가 왜 그렇게 지저분하니? 누나가 씻겨 줄까? 넌 1년에 한 번은 씻고 사니?”
  물론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메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옷을 다 벗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보메르야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 그녀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난생 처음으로 제메이를 목욕시켰다. 제메이는 그 상황에서 목욕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한참을 생각했지만 해답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다만 그에게 닿는 보메르야의 손길이 좋았을 뿐이다. 그 다음부터 제메이는 영문도 모르고, 집에서는 옷을 다 벗고 지냈다. 보메르야는 그런 그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며칠을 그렇게 보고만 있다가 그녀는 문득 제메이가 자기도 옷을 벗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는 옷을 벗었다. 자기 옷을 벗기려고 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제메이는 뭔가 대단히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보메르야에게 물었다.
  “뭐야? 이 다음은 뭘 해야 하지? 옷은 왜 둘 다 벗어야 하는 거야? 그것도 집에 있을 때마다 매일.”
  그러나 여전히 통하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었다. 보메르야는 그런 제메이의 태도를 완전히 오해했다. 옷을 벗고 나니까 제메이가 갑자기 말수가 늘고 상냥해진 것 같았다. 결국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녀는 게르기르인들의 제국에 공물로 바쳐진 처지였고, 누군가에게 하사품으로 내려진 운명에 불과했다.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은 거야? 그럼 안 무서워져?”
  하고 제메이가 물었다. 르야는 제메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렇게 반문했다.
  “그거 하자는 거야? 나 목욕도 안 했는데. 아직.”
  제메이는 보메르야가 수줍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역시 자기 생각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보메르야.”
  제메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제메이가 자기 이름도 르야라고 말하는 게 우스워서, 그리고 그 말이 왜 우스운지를 혼자만 알아서 더 재미있다는 의미로 웃음을 지었다. 제메이는 자기 이름을 불러줄 때면 그렇게 예쁘게 웃어주는 보메르야가 좋았다. 웃고 있지 않을 때도 보메르야는 아름답다. 자기를 위해 옷을 다 벗고 서 있는 그녀의 몸은 어디에다 눈을 둬야 할지 알 수 없도록 황홀했다. 제메이는 자기 이름을 알아 달라는 의미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다시 한 번 그 길고 어려운 이름을 또박또박 말해 주었다.
  “히쇼탐다 스죠홈난 우자그탈 구답다.”
  그러면서 제메이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보메르야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 이제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사랑의 고백이겠지. 그녀는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는 제메이가 좋았다. 그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르야는 제메이에게 다가가 두 팔로 목을 꼭 끌어안고는 입을 맞추었다. 제메이도 르야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어차피 잘 통하지도 않는 말보다 온 몸에 닿는 서로의 감촉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둘은 말을 거둔 대신 서로의 몸을 어루만졌다. 절정에 이르렀을 때 보메르야는 자기가 제메이를 얼마나 좋아하게 되었는지를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처음 만나던 날부터 제메이가 수없이 반복했던 그 사랑의 속삭임을 제메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히쇼탐다 스죠홈난 우자그탈 구답다.”
  그 황홀한 순간에 아름다운 보메르야가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듣고는 제메이는 심장이 멎는 듯한 행복에 빠져들었다. 르야는 온몸에 힘이 빠질 때까지 몇 번이고 그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제메이는 그녀가 자기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던 자기 자신, 자신의 진짜 존재를 떠올리며 아득한 잠에 빠져들었다.

  아득한 잠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제메이는 다시 전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함성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집어 들고 느릿느릿 자기 진영으로 돌아왔다. 제메이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본격적인 싸움이 언제 벌어질지를 정하는 것은 마사나마르나와 시지라이의 몫이었다. 시지라이는 아직은 공격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제메이를 추격하지 않았다. 한편, 마사나마르나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이길 수 있다는 확신까지 생겨났다. 제메이가 창병 대열을 확실하게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양측이 대치한 지 하루가 지났다. 새벽이 되자 양쪽의 기세는 조금씩 꺾여 있었다. 마사나마르나는 병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은 술렁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제메이는 알았다. 바로 근처에 서 있던 병사들이 이렇게 속삭였다.  
  “마사나마르나 장군은 이 싸움에서 이길 생각이 없는 거야. 단지 입스 병력과 우리를 같이 소모시키려는 생각 뿐이야.”
  “그러기야 하겠어? 그러면 다 같이 죽는 건데.”
  “무슨 소리야, 외르메뤼즈 황제가 귀족 출신 기사들로만 만들어진 병력을 10만이나 숨기고 있다는데.”
  “그래?”
  그들 중 하나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제메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제메이. 당신도 조심하쇼. 이번에는 마사나마르나도 당신이 죽기를 바라고 있을 거라고. 싸움에서 안 죽으면 아마 마사나마르나가 직접 당신을 죽이려 들 거요. 그런 소문이 쫙 퍼져 있어. 어쩌면 마사나마르나가 당신을 죽이려고 이 싸움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당신 여자를 납치해서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마사나마르나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자가 당신을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우리가 옆에서 막아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가 살아남았을 때 이야기고, 당신은 꼭 살아남아서 자기 몸 잘 챙겨야 돼. 당신이 우리 대신 살아남아서 세상 한 번 뒤엎어 주시오. 그런 날이 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만.”
  제메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다. 방어를 하는 입장에서는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입스 쪽은 여유 있는 밤을 보냈다. 마사나마르나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혀서 시야가 확보되었을 때 그는 갑자기 식사 명령을 내렸다.
  “간단하게 요기를 해. 아마 다 먹지는 못할 거다. 식사를 마치기 전에 적들이 달려들 거니까 허겁지겁 집어먹지 않도록 미리 일러둬야 해.”
  마사나마르나의 명령이 전해지자 병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밥을 먹으라니. 그렇게 많이 양보하고도 모자라서 마사나마르나는 적의 돌격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 거리에서 적의 예봉을 꺾어야 할 첫 한 방마저도 양보하는 셈이었다. 간단한 먹을거리가 전열 구석구석으로 전해졌다. 시지라이는 그 모습을 보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신호를 보냈다. 흐트러졌을 때 기습하면 최소한 화살 한 발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자 마치 쉬고 있는 듯 한가해 보였던 사람과 말들이 재빠르게 전열을 갖추는 모습이 보였다.
  게르기르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 이윽고 입스의 말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하자 이내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궁수들 중 몇몇이 먹던 것을 내려놓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마사나마르나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좀 더 먹어라! 한 입만 더 베어 물어!”
  마사나마르나는 적이 말머리를 돌릴 수 없을만큼 완전히 사정권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참모들과 병사들이 모두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사나마르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것을 보고는 참모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태세로!”

  2만 정도 되는 입스 기병 대열이 먼지를 일으키며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시지라이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화살 앞쪽에 달린 둥근 모양의 피리가 날카로운 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말들이 동시에 속력을 높였다. 사정권에 들기 전에 최고 속도에 이르러야 그 기세대로 끝까지 돌파할 수 있다. 말 달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장 위에는 새 한 마리가 떠 있었다. 게르기르 쪽에서 수백 개의 화살이 마치 새를 겨냥하고 날아오는 것처럼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대로라면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새는 유유히 날던 대로 날았다. 그곳은 고고하게 날던 새가 갑자기 날개를 푸덕거리며 도망칠 곳을 찾는 일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요한 천상의 세계였다. 화살들은 새가 있는 곳에 닿기 전에 서서히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화살들은 곧 머리를 아래쪽을 향한 채 악취와 소음과 오만과 비열함으로 가득한 지상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게르기르의 활 중에서 가장 강하고 사정거리가 긴 큰 활이었다. 입스군 기병 대열 중간 중간에 쓰러져 나가는 자들이 생겼다. 시지라이는 생각보다 먼 곳에서 첫 공격이 날아오자 움찔했다. 게르기르 화살의 첫 파도는 생각보다 많은 희생자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기세에 기병 돌격 대열이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공격이 들어오기까지는 약간의 간격이 필요했으므로 그들은 곧 달려 들어가는 기세를 회복했다.
  잠깐 사이를 두고 두 번째 화살의 파도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이번에는 더 작고 가벼운 화살 수천 개가 새까맣게 하늘로 솟아올라 고요한 천상 세계의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아래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활시위를 떠나는 순간에 가장 맹렬했던 화살들의 살기는 가장 높은 지점에서 가장 고요해졌다. 그러나 다시 지상에 가까워지자 그 기세도 다시 회복되었다. 한 번의 소나기가 땅에 가서 우두두 박히고 나자 다음, 그리고 그 다음 화살 공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연이어 쏟아지는 무수한 화살의 파도에도 말들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꽤 많은 숫자가 돌격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그 정도는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시지라이는 다시 소리 나는 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러자 입스 전사들이 달리는 말 위에서 일제히 활을 발사했다. 시지라이의 화살이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지상을 향해 질주하자 마치 그 소리에 이끌려오듯 수천 개의 화살들이 소리를 쫓아 솟구쳐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러자 게르기르군 대열 한 군데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에 따라 그쪽에서 날아오는 화살의 밀도도 희박해졌다.  
  그때 게르기르족 대열로부터 두 번째의 큰 활 공격이 날아 들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게르기르족 화살은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따라서 두 번째 큰 활 공격도 거의 정면에서 입스의 기병들을 향해 덮쳐 왔다. 그 공격에 시지라이와 꽤 가까운 거리에서 달리고 있던 병사가 뒤쪽으로 튕겨 나가면서 뒤따라오던 말 세 마리가 엉켜 넘어졌다. 이어서 마사나마르나가 신호를 보내자 이번에는 정확하고 연사 간격이 짧은 화살들이 날아왔다. 화살이 날아가는 모습이나 소리가 그렇게 위압적이지는 않았지만, 실제 피해는 이 재빠른 화살들이 날아오는 소리와 함께 급격히 늘어났다. 물론 시지라이의 입장에서는 이쯤에서 말머리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는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싸움이었지만, 돌격대가 맨 앞줄에 도달하는 순간 게르기르 보병들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게 원칙이었다.
  게르기르 창병 대열은 무서운 화살 공격에도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입스의 기병들을 긴장 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기병 돌격에 맞서 대열을 유지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대단한 공포를 수반하는 일이었지만 창병 대열은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앞으로 나서지 않고 각자 호흡을 고르며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제메이는 눈앞에까지 다가온 적의 기세를 지켜보면서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주위에서 함성이 따라 울렸다. 맨 앞줄에서 제메이가 하늘을 향해 창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수천 개의 창끝이 일제히 하늘을 향하며 빽빽한 숲을 이루었다. 입스 기병들이 창과 칼 같은 무기를 빼 드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표정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적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세 번째 큰 활 공격이 근거리에서 적을 강타했다. 이 마지막 활 공격으로 적의 기세가 주춤해지자 제메이는 창끝을 정면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제메이의 창을 따라 수천 개의 창이 정면을 향해 수평으로 내려졌다.
  그 수천 개의 창으로 된 벽에 말과 사람이 달려와 부딪치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중장갑으로 무장한 입스의 첫 대열은 창병 대열에 도달하자마자 대부분 낙마했다. 그러나 살아 있건 죽었건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 충돌하는 질량 자체는 다를 게 없었다. 창병 대열을 무너뜨리는 데 똑같은 크기의 충격을 주었다. 마치 내던져지듯 시체들이 창병 대열 한가운데로 날아들었고 살아 있는 자들의 칼날은 창병 대열 사이사이에 보이는 빈틈을 향해 뻗어 왔다. 그러자 게르기르족 밀집대형 곳곳에 두께가 조금씩 얇아지는 구역이 생겼다. 그곳을 향해 입스의 후속 부대들이 달려 들어왔다. 마사나마르나는 균열이 생긴 구역에 예비대를 투입해서 대열을 정비했다. 그러는 동안 시지라이의 돌격대가 계속해서 밀어닥쳤다. 균열이 생긴 곳을 향해 게르기르 예비대와 입스군 후속 돌격대가 동시에 쏟아져 들어가면서 칼날도 창끝도 아닌 몸통과 몸통간의 살육이 벌어졌다.
  제메이는 자신을 향해 끝없이 날아오는 화살과 칼날들을 방패로 막아냈다.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이미 전열이 무너져버렸다. 그는 질주하는 말들 한가운데 혼자 서 있었다. 마사나마르나가 자기를 죽이고 말 것이라고 속삭이던 무리들은 요란한 충돌 속에 마구잡이로 파묻혀 사라졌다. 전열이 무너진 틈을 노리고 적의 화살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 위를 수백 명이 말을 타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견고한 방벽 앞에 이르렀음에도 속력을 전혀 늦추지 않았다.  게르기르 창병들은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입스의 돌격도 거의 끝나갔다. 입스의 마지막 돌격에도 전열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입스는 승기를 되찾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양쪽 군대가 섞이면서 전투는 서서히 혼전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게르기르 보병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제메이는 적 수십 명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다리가 잘려나간 말들과 말들이 쓰러질 때 그 아래에 깔린 인간, 소리 나는 화살과 입스의 북소리와 비명 소리, 전장 통제를 놓치지 않으려는 양쪽 지휘관들의 고함 소리, 깃발. 피냄새가 났다. 다른 냄새들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다섯 명 정도를 베고 나자 제메이는 칼날이 피를 머금어 무뎌진 것을 느꼈다. 오른팔을 타고 칼끝을 향해 흘러내리는 피가 자신의 피인지 자신이 쓰러뜨린 적이 흘린 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통증이나 고통 같은 감각이 모두 무의미해지고, 살아온 날들과 남아 있는 나날 모두가 전혀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낮은 문턱이 다시금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자 지나온 날들이 떠올랐다. 짧고 의미없는 생애였다. 처음에는 그냥 죽어나 보자 하고 전쟁터에 나섰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의 무게추는 늘 삶으로 기울어졌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묘한 운명 따위 별로 고맙지도 않았다. 그러나 보메르야와 드디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기까지 무려 3년 동안 그는 달라졌다. 삶의 무게와 존재의 의미를 믿었다.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가볍게 자신을 던져 넣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 무렵에, 누군가가 보메르야를 납치했다. 그 순간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모든 것이 무르익는 순간까지, 삶이 드디어 의미를 지니는 순간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녀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소문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감옥에서 풀려 나오자 사람들은 납치 주범으로 마사나마르나를 지목했다. 그러나 제메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상한 속삭임이 귓가에 맴돌 때도 있었다. 마사나마르나가 그랬어. 마사나마르나가 르야를 데려갔어. 그러나 그는 그 말 역시 믿지 않았다. 그저 죽어나 보자 하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문득 제메이는 칼날이 등을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수만 명의 삶과 죽음의 무게를 다는 저울이 한 점 가벼운 바람에 위태롭게 흩날리는 전장에서,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미 죽음은 사소했고, 이제 그 누구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제메이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듯이.
  시지라이의 본대가 방어선을 돌파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적의 돌격이 완전히 멈추는 모습도 보였다. 마사나마르나가 진격 명령을 내릴 차례가 온 것이다. 게르기르 병사들은 활을 내려놓고 칼이나 창을 들고 난전중인 전선으로 달려들었다. 시지라이는 실패를 절감했다. 잘못 싸웠다. 사지였다. 어느 편이 됐든 죽기 좋은 자리였다. 쉽게 이길 수도 있고 쉽게 죽을 수도 있었다. 달려들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왜 게르기르 놈들은 무너지지 않는 거지? 어째서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마사나마르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전장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눈에 제메이가 위기에 처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수십 명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보호하려 했지만 여전히 위태로워보였다. 제메이의 등에 꽤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마사나마르나는 제메이를 살려야 할지 죽도록 내버려 둬야 할지 망설였다. 냄새나는 제메이의 부대가 적의 맹공을 버텨 낸 직후였다. 이 싸움을 이겨낸 것처럼 저들이 계속 승리를 거둔다면, 결국 제국은 저들의 제국이 되고 마는 게 아닐까. 마사나마르나는 선뜻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제메이를 제거하는 게 옳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싸움은 이미 승리로 기울었고, 이런 전장에서라면 제메이의 죽음을 따로 해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메이의 삶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듯이.
  제메이는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제메이는 마사나마르나의 눈에서 그의 옛 적들의 눈빛을 보았다. 마사나마르나도 제메이를 보고 있었지만 병력을 이끌고 달려와 주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령관이 병사들 전부를 구하기 위해 직접 전장을 누비고 다닐 수는 없다. 적을 말에서 끌어내리고, 칼이든 창이든 손에 잡히는 무기는 무엇이든 적의 목을 향해 찔러 넣으면서 제메이는 귓전에 맴도는 속삭임을 들었다.
  “마사나마르나가 보메르야를 납치했다던데.”
  “마사나마르나가 죽였다면서요.”
  “마사나마르나를 조심하세요. 그가 당신을 죽일 거요.”
  “마사나마르나가 보메르야를 잡아먹었다지요?”
  제메이는 두 손으로 칼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들의 머리를 후려치고는 마사나마르나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말 위에 앉아 거만하게 제메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옛날, 제메이가 반역죄로 체포되어 황제 앞에 나갔을 때에도 마사나마르나는 꼭 저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황제가 물었다.
  “제메이. 왜 반란을 일으켰느냐?”
  제메이가 대답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제메이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보메르야를 찾아 나선 것뿐이었다. 그러나 제메이는 자신을 따라 일어선 수만 명의 폭도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전장이 아닌, 제국의 수도 외르메뤼자칸에서는 누구든 무기를 든 자는 그 삶과 죽음을 일일이 해명해야 했다. 그러나 제메이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설명해야 하는 쪽이 아니라 설명을 들어야 하는 쪽이었다. 그가 단지 보메르야의 행방이 궁금했을 뿐이다.
  “잃어버린 아내를 찾아 나서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고 제메이가 말했지만, 황제는 아내를 잃은 남자의 변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폭도들 말고도 제메이가 설명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바로 그 일을 제메이에게 물었다.
  “귀족들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그 가족들을 죽이고 인육을 뜯어 먹은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황제가 물었다. 그러나 제메이는 그런 황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그런 짓을 하다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물끄러미 제메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마사나마르나도 말없이 내려다 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제메이는 그때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두 손을 펼쳐 보았다. 피로 물들어 있었다. 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슴 아픈 기억이 제메이의 정신을 일깨웠다. 황제가 말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살아 있는 여자의 목을 물어 죽였을 때, 그의 얼굴에 뿜어져 나오던 핏줄기가 떠올랐다. 기억 속에서 온 방안으로 피가 시뻘겋게 튀었다.

  마사나마르나는 퇴각하는 시지라이를 발견하고는 추격 명령을 내렸다. 사방에 시체들이 널려 있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흔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지만 아무튼 싸움은 대승이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승리의 효과를 충분히 거둘 수는 없었다. 적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제메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싸움은 끝났고, 전장 어디에서나 그의 농민 병사들은 말에서 떨어져 패주하는 적들을 상대로 잔인하고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잔악함은 큰 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마사나마르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학살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메이가 하는 짓만은 도저히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제메이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기 하나 없이 맨손으로 적들을 뒤쫓았다. 그러자 달아나던 적들이 갑자기 뒤돌아서서 제메이를 에워쌌다. 마사나마르나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제메이는 맨손으로 적의 목을 움켜쥐고 살을 뜯어냈다. 피가 튀자 적들은 더욱 맹렬하게 제메이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목이나 어깨 근처의 혈관을 뜯어낼 뿐이었다. 여럿이 달라붙어 있었지만 제메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금세 주위를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적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제메이는 그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똑같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쓰러뜨렸다.
  마사나마르나는 말을 몰아 그쪽으로 다가갔다. 제메이 주위에 있던 농민 병사들이 항복한 적들을 바닥에 꿇어 앉혔다. 제메이는 포로들에게 다가가서 차례차례 맨손으로 목을 찢어 죽이고 있었다. 마사나마르나는 말에서 내려 제메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제메이가 하는 말이 들렸다.
  제메이는 포로들에게 자기 이름을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게 내 이름이다. 자, 이제 내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살려 주겠다.”
  그리고는 한명씩 그들에게 다가가서 자기 이름을 물었다.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사나마르나는 그 옛날, 그 잔인했던 살육의 날을 떠올리며 조금 전에 전장에서 제메이를 없애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보메르야가 없어졌던 날에도 마사나마르나는 제메이 스스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던 그 처참한 살육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날 제메이는 귀족들의 집을 돌며 150명이 넘는 사람을 지금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마사나마르나는 제메이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열다섯 밖에 안 돼 보이는 소녀에게 자기 이름을 가르쳐 주는 광경을 목격했다.
  “히쇼탐다 스죠홈난 우자그탈 구답다. 이게 내 이름이다. 잘 들었지? 하긴 제메이의 진짜 이름쯤은 다들 알고 있겠지? 내가 바로 이 외르메뤼자칸의 수호자니까. 그렇지? 자 꼬마야. 내 이름이 뭐니?”
  소녀가 더듬거리자 제메이는 소녀의 목을 물어뜯었다.
  그 광경이 떠올르자 마사나마르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 자는 괴물이야.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아니면 조금 전에 전투가 한창일 때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무식한 농사꾼 출신 병사들이 제메이의 잔인한 행동을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놀라웠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그저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무리들이었기 때문이다.
  제지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나마르나는 돌아서서 말에 올라탔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마사나마르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메이였다. 마사나마르나는 온통 피투성이에 눈만 하얗게 뜬 제메이의 모습에 몸서리가 일어났다. 그는 주눅이 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 제메이가 입을 열었다.
  “마사나마르나 장군님. 제 이름이 뭐죠?”
  마사나마르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뭐야? 내가 이름을 말하지 못하면 나를 죽일 건가?”
  “제 이름이 기억나십니까?”
  제메이가 다시 물었다. 마사나마르나의 참모들이 칼집에서 칼을 빼 들었다. 제메이의 눈은 마사나마르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사나마르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손을 들어 참모들을 저지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히쇼탐다 스죠홈난 우자그탈 구답다.”
  마사나마르나가 대답하자 제메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뒤늦게 그의 몸에 고통을 새겨놓은 모양이었다. 마사나마르나는 참모들에게 지시하며 돌아섰다.
  “상처가 심하다. 데려가서 치료해 주고 쉬게 해라.”
  그리고는 말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메이는 흙바닥에 엎드려 누워 승리의 함성을 들었다. 삶과 죽음의 고비에서 운명은 또 다시 삶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이제껏 살아 온 날들을 떠올렸다. 죽어나 보자 하고 죽기 좋은 곳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는데, 죽어지지가 않았다. “갈 길이 먼데 왜 비가 오나” 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스승의 삶이 부러웠다. 병사들이 그를 에워싸더니 창끝으로 땅바닥을 두드렸다. 마치 문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그러자 대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심장 박동 같았다. 죽으려고 살아온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온통 삶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이 저렇게 두드려대는 통에 제메이의 얼어버린 심장마저도 다시 고동쳤다.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나직이 르야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저녁에 비가 내렸다.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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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심 08.07.01 22:49 댓글 수정 삭제
    염장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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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kholic 08.07.04 00:41 댓글 수정 삭제
    반가운 명훈님의 글. 초반진입 장벽은 조금 높지만 역시 몰입감 있는 글이군요. 한 호흡에 읽었습니다. 명훈님 글에서 종종 보이는 공통 코드= '전쟁, 반려를 상실한 사나이, 독특한 작명센스'가 잘 버무려진 글이었습니다. 맛있게도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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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7.04 08:32 댓글 수정 삭제
    앗, 반려를 상실한 사나이도 자주 나왔었나요? 흠. 사람이 긍정적으로 살아야 되는데 말이죠. 진입장벽을 뚫고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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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owinrain 08.07.05 22:40 댓글 수정 삭제
    저에게 있어 영웅은 배명훈님 (딸랑딸랑) 에헴... 너무 속보였나.
    잘 읽었습니다. 기만전술+심리전 묘사가 절묘하네요.
    흐음 근데 배경이 로마가 야만족에게 (게르만족인가 훈족인가 가물가물하지만) 공격당해 멸망당하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가 풍기는 거 같기도 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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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7.07 08:25 댓글 수정 삭제
    헛. 그런... 아무튼..
    배경은 중국 북방 유목민 군대들과 송나라 같은 농경 중심 한족 군대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사실 세밀하게 따져 보면 이도저도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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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timist 08.07.09 13:48 댓글 수정 삭제
    아 저도 읽으면서 한족 군대랑 북방 야만족 군대 생각 했었는데 ㅎㅎ 제 예상이 맞았군요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어요 뒷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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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8.07.09 17:05 댓글 수정 삭제
    투르크 족이 유목하던 시절에 중국을 얼마나 야만시했는데요. 빌게 카간 비문에, 외튀켄 산지 근처 초원에서 말을 달리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최고 단계라고 썼어요. 그러니 북방 "야만족"은 좀.. 몽골도 원 제국 되기 전에는 농사짓는 인간들은 인간 취급을 안 했어요. 글자로 기록을 남긴 쪽은 농사짓던 사람들 뜯어먹던 왕조들이지만.
    뒷이야기는,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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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08.07.30 00:41 댓글 수정 삭제
    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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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 08.11.26 14:39 댓글 수정 삭제
    냄새로 자기 존재를 온 사방에 퍼뜨릴 수 있는 사나이가 이름에 집착한다는 것이..... 묘하네요. 설명이 잘 안 돼요.

    그러니까, 제메이가 이름에 집착한다는 것 자체는 보메 르야 라는 반려의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보메 르야가 웃었던 일화도 이름에 관련된 거고.

    제가 전쟁이나 싸움 이야기를 잘 보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해서, 그 부분을 빼고서 이 단편에서 제일 강력한 소재이자 심상이 냄새와 이름으로 보였거든요. 그런데 정말 무슨 의미로 연결된 걸까, 그냥 내가 못 읽는 저 부분이 중요한 거고, 이건 안 중요한 건데 나 혼자 이러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전 이쪽이 굉장히 끌리고. 아마도 이건 제가 굉장히 좋아하고 집착하는 주제 중 하나라서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 단편에서 냄새 이야기 정말 많이 나오는 건 맞는데. 사람 특징 이야기할 때도 냄새로 많이 서술하고. 전 함정에 빠진 건가요? 아니면 귀갑문자를 읽으려 하고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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