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김이환 소년의 하루

2009.01.31 00:1101.31

 환상 나라에 아침이 왔다. 내 머리 밑에서 베개가 빠져나가며 선언했다.
 “일어날 시간이니 얼른 일어나세요.”
 잠에 취한 내가 꿈적도 않자, 베개는 나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매일 늦게 일어나는 나를 보다 못한 엄마가 구입한 잠 깨우기 마법이었다. 요즘 환상 나라에서 가장 잘 팔리는 마법이라는데, 누가 만든 마법인지는 몰라도 효과 만점이다. 베개에 얻어맞으면서까지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드물 테니.
 몸을 일으키자 베개는 조용해졌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찍 일어나고 싶지 않은 날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날이 일찍 일어나고 싶지 않은 날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 그랬다. 오늘은 새 학기의 시작인 개학날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잘 놀았는데.”
 다시 한숨이 나왔다. 개학날만큼 세상에 끔찍한 게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날이었다.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꼭지를 건드리자 적당한 온도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빨리 잠에서 깨야 해서, 주문을 말했다.
 “더 차가운 물.”
 수도꼭지에서 시원한 물이 흘러나왔다. 샤워가 끝나고, 나는 부엌으로 와서 먹을 걸 찾아보았다. 어제 먹다 남은 빵이 냉장고에 있었다. 차갑고 바짝 말라 있는 그 빵을 씹자니 다시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창문은 저절로 열려 집안의 공기를 환기시켰다. 아침에 저절로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키는 이 창문 열기 마법이 환상 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생활 마법이라고 한다. 어제 마법 학원에서 배운 사실이다. 책으로 치자면 수학의 정석만큼이나 많이 팔린 마법인 걸까? 이 마법의 주문을 직접 만들어 보는 것도 어제 배웠다. 남들은 쉽게 하던데, 나는 소질이 없는지 익히는데 오래 걸렸다. 어쨌든 배웠으니 앞으로 잊어버리진 말아야지.
 빵을 씹고 있는데 대문 밑으로 종이 한 장이 비집고 들어왔다. 문을 통과한 종이는 벌떡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서 거실까지 들어오더니,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듯 누웠다. ‘소문이 있다’였다.
빵을 먹는 동안 대충 훑어보니 여전히 쓸데없는 소문으로 가득 했다.
 “커피 좀 끓여라.”
 이제야 일어난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싫어요. 나 학교가야 돼서 바빠.”
 “커피 끓이는데 몇 분이나 걸린다고…… 오늘 개학하니?”
 엄마는 커피포트에 물을 담은 다음 주문을 말했다.
 “뜨거운 물.”
 물이 끓어오르자, 엄마는 커피 믹스를 한 봉 뜯어 커피를 탔다. 엄마가 바닥에 버린 커피 믹스의 포장지는 저절로 바닥에서 튀어 올라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쓰레기통이 꽉 차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 좀 버려야 하는데.
 “엄마, 쓰레기 분리수거 좀 해요.”
 “귀찮다.”
 엄마는 커피 잔을 들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주문을 말해 소파 맞은 편 벽에 걸린 큰 거울을 켰고, 거울이 전해주는 오늘의 날씨와 환상 나라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소문이 있다]에 뭐 재밌는 거 없니?”
 “[사자가 안경원숭이한테 왕자병 치료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다]네요.”
 “그게 언제 소문인데 이제 실리냐. 다른 소식은 없어?”
 “고수 형이 설경구 대표를 만난다는 소문이 있대요.”
 “그것도 언제 소문인데 이제 실리는 거야. 더 쇼킹한 거 없어?”
 “나 학교 가야 되니까 엄마가 직접 읽어봐요.”
 나는 [소문이 있다]를 놓고 일어났다. 엄마는 물었다.
 “너 학교 가서 쓸 용돈은 있어?”
 “아뇨.”
 “식탁 위의 지갑 보면 2만원 인가 있을 거야. 그거 써.”
 지갑에는 4만원이 있었다. 다 가져갈까 말까 망설이던 나는 2만원만 꺼내고 지갑을 내려놓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착해졌는지 모르겠다, 예전 같았으면 지갑 째 들고 갔을 텐데.
 엄마에게 학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후 내 방으로 돌아왔다. 파란 분필로 숫자가 써진 벽을 세 번 두들기고 주문을 말했다.
 “환상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바깥세상의 내 방에 도착했다.
 혹시 형이 침대에서 자고 있나 했더니 그렇진 않았다. 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입고 책상 위의 가방을 챙겼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바깥세상 물건들은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이 물건들을 엄마 집에 뒀었다간 풀이 나서 못쓰게 됐을까, 나는 가방의 먼지를 털며 생각했다.
 거실로 나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형과 아빠와 함께 거실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주변은 과자 부스러기에. 어젯밤 먹고 남은 것이 분명한 중국요리 그릇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맥주병까지 엉망진창이었다. 이게 정녕 사람 사는 집이란 말인가.
 인기척에 아빠가 부스스 눈을 떴다. 나는 아빠 옆에 앉았다.
 “게임 좀 줄이세요.”
 발치에 굴러다니던 플레이스테이션3을 밀치며 아빠는 기지개를 켰다.
 “형이랑 밤새 게임했어요?”
 “응. 학교 가냐? 오늘이 개학일인가?”
 형은 아빠 옆에서 웅크린 채 얌전히 자고 있었다. 형의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방금 잠들었을 거야.” 아빠는 말했다. “현재, 너 밥은 먹었어?”
 “네.”
 먹다 남은 음식을 주워 먹은 걸 두고 아침을 먹은 거라고 할 수 있다면, 먹은 셈이었다.
 “학교 가서 쓸 용돈은 있고? 잠깐만 있어봐라. 주머니에…….”
 아빠는 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냈다.
 “2만원 있네, 이거 받아가.”
 나는 냉큼 돈을 챙겼다. 아침부터 큰 돈이 생긴걸 보니 일진이 나쁘진 않으려나 보다. 나는 고수 형한테 안부 전해달라고 아빠에게 말했고, 아빠는 알았다며 다시 거실에 누웠다.
 “거실 말고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방…… 너무…… 더워…….”
 아빠는 대답하고 곧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세상에 우리 아빠 같은 폐인이 있을까? 아빠랑 같이 사는 형이 불쌍했다.
 나는 집을 나와 학교로 향했다.
 새 학기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학교가 끝나자, 나는 연두네 학교 앞 분식집으로 달려가 연두를 기다렸다. 분식집 테이블에 엎드려 졸고 있는데 연두가 도착했다.
 “오랜만이네.”
 연두는 내 머리를 툭 쳤다. 연두의 목소리도, 연두의 주먹이 내 머리를 치는 소리도 모두 경쾌했다.
 “사흘 전에도 봤잖아.”
 나는 눈을 비비며 하품 했다. 왜 잠은 아무리 자도 부족한 건지 모르겠다. 방학 내내 늘어지게 자던 때가 그리운 순간이었다.
 연두는 말했다.
 “중학교 때는 매일 봤으니까 사흘이면 오랜만에 본 거지. 너희 학교 오늘도 오전 수업했어?
 “우리 학교는 개학식 방학식 무조건 오전수업이잖아.”
 “진짜 좋다, 부럽다 부러워.”
 연두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연두의 단발머리와 연두색 머리핀이,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빛났다.
 “학교는 어때?” 나는 말했다.
 “좆같지 뭐.”
 연두는 대답하고는, 누구에게 보내는 건지 모를 문자를 바쁘게 보내기 시작했다. 버튼 한번 누를 때마다 핸드폰에 매달린 기린 인형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기린의 몸통은 칠이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새 걸 하나 사줘야 하는데. 나는 버튼을 누르는 연두의 손가락과 손가락에 얌전히 끼워진 반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문자를 다 보낸 연두는 핸드폰을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근영이는 요즘 뭐해? 잘 있어?”
 “요즘 뭐하는지 모르겠다. 얼굴 본지 꽤 됐어. 그런데 너 점심 안 먹어? 나는 먹었으니까 뭐 시켜.”
 “떡볶이는 싫어. 나가서 자장면 먹자 자장면.”
 “너는 꼭 개학날만 되면 자장면을 먹자고 하더라.”
 내 핀잔에도 불구하고, 연두는 당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자장면만 먹을 줄 알아? 군만두도 먹을 거야.”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피식 웃고 연두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모든 고등학교에서 새 학기가 시작한, 막 절정을 넘긴 여름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그 밖으로.

 과식한 배를 꺼트릴 겸 한참 동안 이리저리 걸었는데도 여전히 소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두는 가슴을 두들기며 괴로워했다.
 “군만두는 그냥 남길 걸 괜히 억지로 다 먹었나봐.”
 “먹을 땐 신나게 먹고선 이제 와서 괜히 먹었다고 딴소리냐.”
 “맛있는 걸 어떡해.”
 더 이상 마냥 걸어 다닐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갈림길에 있었고 나는 내 집으로, 연두는 연두의 집으로 가야했다. 더 놀다 가면 좋겠지만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연두는 물었다.
 “너는 바로 환상 나라에 일하러 가는 거지?”
 “그래야지.”
 “환상 나라 일이랑 학교 공부랑 같이 하려면 힘들잖아. 둘 중 하나를 미루거나 그만두거나 할 생각 없어?”

 “3학년 되면 힘들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연두는 나를 흘겨보았다. 연두는 방학 내내 내가 일을 너무 많이 한다며 걱정해왔고, 오늘도 그랬다.
 “너도 진짜 황소고집이다. 사람이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땐 쉬어야지.”
 연두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웃는 나를 연두는 뚱한 표정으로 보았다.
 “왜 웃어?”
 무슨 어른들 말하는 것처럼 말하니까 그렇지,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그냥 웃겨서 웃는다고 둘러댔다. 연두는 말했다.
 “이번 주말에 놀러가자. 본격적으로 학기 시작해서 못 만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놀자.”
 “뭐하고 놀까? 기린 보러 갈까?”
 “그것도 좋고 희망 공원에 가도 좋고.”
 “주말에 보자.”
 이제 진짜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었다. 연두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막 등을 돌리고 각자의 길로 걸어가려는 순간 연두는 말했다.
 “모든 일이 잘돼서 다행이다. 그렇지?”

 사무실에는 어찌된 일인지 나영이 외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가신 걸까? 여느 때처럼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서류를 정리하던 나영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녀는 인사대신 편지봉투를 나에게 흔들었다.
 “어머니에게 온 편지?”
 봉투가 흰색이고 나무 연필로 쓴 글자도 없는 걸로 봐서는 바깥세상에서 온 편지 같아 물었는데, 나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고 있다, 조만간 환상 나라로 들리겠다, 그런 내용이 있다고 나영이는 설명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미소 짓는 것으로 봐선 아주 기분이 좋아보였다.
 “오늘 오빠 개학하는 날이죠?”
 “응.”
 나영이는 성격이 꼼꼼해서 사소한 일도 잘 기억하고, 어떤 때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서 나를 놀라게 한다.
 “학교 다니랴 사무실 일 하랴 정신없겠어요.”
 “뭐 그럭저럭.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디 갔어?”
 “회의 있어서 갔어요. 아마 업무 변경되는 거 관련해서 인수인계 겸 교육 겸해서 회의가 열렸나 봐요. 이제 오실 때 됐어요.”
 “현재 왔네?”
 하균 형이 나영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영이는 안 그래도 지금 하균 형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고, 형은 빙그레 웃었다.
 “현재 네가 저번에 말했던 그거 뭐지? 양단? 나도 양단은 못되는 셈이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가, 이전에 내가 사무실 사람들에게 바깥세상 표현을 몇 개 가르쳐줬던 일이 생각나서 나는 정정했다.
 “양단이 아니라 양반이에요. ‘양반은 못되는’ 셈이에요.”
 “그래 그거.”
 “위층에서 무슨 회의가 있었어요?”
 나영이 묻자, 형은 손에 든 것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것 때문에 회의가 소집됐어. 너희들도 봐야 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다.”
 “사과네요.”
 빨갛게 잘 익은 사과였다. 이것 때문에 회의가 열렸다는 거지. 나는 사과를 자세히 보았는데, 언뜻 보기에 멀쩡해 보이던 사과는 보면 볼수록 어딘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조품 같이 생겼다고 할까, 인공적인 구석이 있는 이상한 사과였다.
 “그냥 사과랑은 다르지?”
 “조금 작아요.”
 그것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이상한 점의 전부였고, 나영이는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다.
 “상하지 않는 사과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먹을 수가 없는 사과야.”
 “다들 그걸 어떻게 보자마자 알아요?”
 내 질문에 나영이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마법이 걸려 있어요. 사과에 향기가 없고 광택이 인공적이잖아요. 이건 마법을 걸었다는 뜻이에요. 마법이 걸린 과일이나 채소는 대부분 이래요. 보통 상하지 않도록 마법을 거는데, 이 사과에 걸린 마법은 조금 다른 거 같아요.”
 사과에 마법을 걸어놓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왜 그런 일을? 게다가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먹을 수도 없게 만들다니. 맛있는 사과를 누가 이유 없이 못 먹게 만들었을까?
 “용도는 못 밝혀냈어. 용도랑 출처를 빨리 알아내서 단속하지 않으면 이런 물건이 계속 늘어날 거야.”
 형은 말했다.
 “이것도 마법의 모순을 이용한 물건인 거죠?”
 내 말에 형과 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순 된 물건이 갈수록 많아지네요.”
 “우리 일도 갈수록 많아지는 거지. 그리고 사무실 이름도 며칠 안으로 바뀌는 걸로 이번 회의에서 결정됐어.”
 “뭐로 이름이 바뀌어요?”
 “어휴, 그건 어제 다 이야기 했잖아요.”
 내 질문에 나영이가 야단쳐서 나는 머쓱해졌다. 어제 얘기했었나. 어제 과장님이 이런저런 이야기 하실 때 내가 잠시 졸았던 것도 같고.
 형은 말했다.
 “마법통제2국으로 바뀌어. 내일 사무실로 기록 상자 들어오고, 그러면서 간판도 바뀌고.”
 “아, 기록 상자, 상자는 기억나요. 나도 상자 사야하는데. 그때 이야기 했었구나, 이제 기억난다.”
 어제 앞으로 사무실이 해야 할 일과 업무 체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이야기 하면서, 사무실에 들어올 새로운 물품 이야기도 했는데 그때의 일이 기억난 것이다. 기록 상자 들어온다고 해서 나영이가 무척 흥분했었다.
 나영은 물었다.
 “오빠 학원에서 곧 쓰게 될 거라고 상자 산다고 했잖아요. 기록 상자는 언제 살 거예요?”
 “오늘 사러 갈 거야.”
 “어디서 살지 알아봤어요?”
 “아는 사람이 싸게 잘 해주겠다고 그랬어.”
 “직접 만들어주겠대요?”
 “응.”
 “잘 됐네요.”
 “현재 학원 열심히 다니나보다.” 내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던 형은 말했다. “기록 상자 배울 정도면 열심히 했나보네. 공부는 잘 되니?”
 “설마 잘되겠어요.”
 내 대답에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왜 그런 식으로 자학하고 그래요.”
 나영이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는 이 사과를 보기만 해도 마법이 걸린 걸 알잖아. 하지만 나는 모른다니까. 앞으로는 그런 것도 다 알아야 사무실 일도 잘 할 수 있을 거 아냐.”
 “너는 공무원이 아니니까 꼭 다 알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그런 괴로운 표정 할 것 없다.”
 형은 말했다. 내 표정이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은 나도 남들처럼 잘 알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복잡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엄마는 없었다. 일이 바빠서 오늘도 늦는 모양이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부엌을 오가는데, 바닥 한 구석에 자라는 풀이 보였다. 더 무성해지기 전에 처리해야 할 거 같아 풀을 뽑아 쓰레기통에 넣었더니, 이번에는 때를 맞춰 쓰레기통이 넘치기 시작했다. 나는 마법을 써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내다버릴 것은 내다버리고 분리수거할 것은 따로 모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청소를 내가 하게 되는구나.”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투덜거렸다. 맨 날 집안일만 하고, 내 팔자는 뭐 이래, 그런 생각에 괜히 서러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조차 혼자인 건 정말 낭패였다.
 나는 밥을 먹고, 마법에 관한 책을 몇 개 훑어보다가, 새 학기에 쓸 교과서도 훑어보면서 나갈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환상 나라는 아직 밝은 오후였다. 나는 손목시계를 반복해서 보며 내가 벽에 써야할 번호를 새겨 보았다. 시민권 시험에 붙었을 때 엄마가 선물로 준 시계였는데, 꽤 비싼 것이고 번호가 이백 개가 넘게 저장된다고 엄마는 엄청나게 생색을 냈었다. 기왕 비싼 거 시간도 말해주면 좋을 텐데. 나는 아직도 자벌레 보는 법을 몰라서 시간 볼 줄을 모른다.
 통로벽을 향해 가다가, 멀리 동물원 쪽 길에서 커다란 기린이 구름을 모으며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기린의 머리가 건물 사이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얼른 통로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주 써본 적 없는 생소한 번호를 써서, 역시 자주 가본 적 없는 이상한 나라에 도착했다.

 가난한 나라에는 올 때마다 어리둥절해진다. 특히 가난한 나라의 수도인 ‘엔진’의 풍경은 정말 놀랍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이 솟은 강철 건물, 그 사이에 놓인 모노레일, 마법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자동차들을 처음 보고 정말 놀랐다. 몇 번 들리고 난 후인 지금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사는 환상의 나라나, 한번 가봤던 행복한 나라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니까. 검고 날카롭고 복잡한 모양의 건물이 하늘이 안 보일정도로 빽빽이 들어선 풍경은 ‘가난한 나라’라는 이름과도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 이름을 그렇게 부르겠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은 참 이상한 것 같다.
 오늘도 시간만 많으면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고 싶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 달 전부터 했던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통로벽에서 빠져나와, 모노레일과 나란히 이어진 길을 걸어서, 강철과 유리로 만들어진 터널을 지나, 나는 가게 앞에 도착했다.

정 할아버지네 마법용품 상회

 처음 할아버지가 가게 이름을 정했을 때 좀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간판을 직접 보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나는 들어가 문을 두들겼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현재 왔구나.”
 할아버지는 가게 뒤편의 작업실에서 나와 나를 맞았다. 상점 안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마법 물건으로 꽉 차있었다. 저번 왔을 때만해도 이렇게 많진 않았는데 이번에는 서있을 자리도 없을 만큼 많았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가게 가운데에 놓인 손님용 의자를 가리켰고, 상자를 찾아올 테니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에게 등을 돌리고 물건들 사이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별 일 없었냐?”
 “없었어요. 아니, 있었어요.”
 “그래?”
 할아버지가 물건 더미 뒤에서 이것저것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타박타박 작은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물건 사이에서 장난감 병정이 고개를 내밀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조금만 기다려봐.”
 병정은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다시 물건 사이로 사라졌다. 할아버지와 병정이 이렇게 대화하는 것을 듣고서야,
 “상자를 어디에 뒀지? 기억이 안 나.”
 “분명 여기 있었어요.”
 “물건을 제대로 정리해둘 걸 그랬어. 내가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장사는 어려워요.”
 두 사람이 나에게 줄 물건을 같이 찾고 있음을 알았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는지, 물건이 쾅쾅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고,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는 소리도, 장난감 병정이 투덜대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말했다.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찾으세요.”
 “그 있었다는 별일이 뭐냐? 그거 한번 말해봐라.”
 “사무실 이름이 바뀐대요.” 물건 사이에서 들리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게 나는 대답했다. “이제 양말로 인형을 만들 필요가 없어지면서, 우리 부서도 업무가 바뀌었어요.”
 그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더 잘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바로 양말로 장난감 병정 만드는 일을 했었으니까. 균열이 사라지고 난 지금 할아버지도 병정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가게를 차리셨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 가게가 환상 세계에서 가장 기술 좋은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라는 걸 알고 있을까.
 “앞으로는 양말을 수거해서 분류하는 일은 안 하고요, 그 대신 잘못된 마법이나 논리에 맞지 않는 마법이 걸린 물건을 찾아내서 폐기하고 출처를 밝히는 일을 하게 돼요. 이름은 ‘마법통제 2국’으로 바뀐대요. 앞으로는 비밀요원과 협조해서 수사도 진행하고 그곳과 자료도 주고받고 한대요.”
 “너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겠구나.”
 할아버지가 물건 더미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는 손에 작은 나무 상자와 연필을 들고 내 앞에 마주 앉았다. 오늘은 이전에 보지 못한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할아버지가 조금 달라보였다.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나온 장난감 병정은 나에게 손을 흔들더니, 그대로 가게 뒤의 작업실로 들어가 버렸다.
 “요즘 등대는 뭐하냐?”
 할아버지가 등대의 근황에 대해 묻는 건 처음이어서,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 음, 게임 하느라 바빠요.”
 “게임? 그게 뭐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그런 건데요, 바깥세상에서 많이 해요.”
 고개를 끄덕이던 할아버지는 나에게 나무 상자를 건넸다.
 “이건 너에게 선물하는 기록 상자다. 사용법은 학원에서 잘 배워라. 가장 기초적인 사용법은, 이 안에 물건을 넣고 백지 한 장을 넣으면 그 종이에 물건에 쓰인 마법이 기록된다는 거다. 더 복잡한 방법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 용도에 따라 기록 상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단다. 차츰 학원에서 배우게 되겠지.”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학원에서 기록 상자에 대해 배우니 학생들은 자신의 상자를 하나씩 준비해오라고 했을 때,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 좋은 상자를 하나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엄마가 할아버지가 만들어주는 물건이라면 환상 세계에서 최고로 좋은 품질의 물건일 거라면서 꼭 받으라고 해서,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오늘이 할아버지가 나에게 상자를 받아가라고 말한 날이었다.
 기록 상자는 손바닥 두개 넓이의 작은 나무 상자였고 위에는 열고 닫을 수 있게 뚜껑이 있었다. 쓰임새를 모르는 나로서는 마냥 신기한 물건일 뿐이었다.
 그 다음 할아버지가 건넨 연필은 평범한 나무연필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무 연필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철필이다. 환상의 나라에서는 나무 연필을 쓰지? 여기 가난한 나라에서는 철필을 쓴단다. 너에게 하나 주마. 나무연필과 같은 용도로 쓰이지만 몇 가지 기능이 더 있지. 분필 대신 쓸 수 있고, 이걸로 전화도 할 수 있다.”
 “전화요? 전화도 돼요?”
 “그래.”
 신기했다. 분필도 되고 종이컵처럼 전화도 할 수 있다니 이 좋은 걸 왜 환상의 나라에서는 안 쓰는 거지? 나는 철필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와 할아버지의 대화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담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내가 오전에 사무실에서 본 먹을 수 없는 사과에 대해서 말했을 때,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해서 나는 약간 놀랐다.
 “그 일이라면 등대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등대도 그 일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잖니.”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래서 아까 등대에 대해 물어봤던 것일까? 그 사과는 사무실에서 회의가 열리고 여러 사람이 관심을 만큼 중요한 물건인가? 내가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불길한 상황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아,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사과가 마음에 걸리는 거냐? 어째 네 표정이 어둡구나.”
 내 표정이 그런가? 생각하는 게 얼굴에 너무 잘 드러나는 것이 탈이다.
 “아뇨, 그냥, 사과 처음 봤을 때 옛날 일이 생각이 나서요. 환상 나라에 처음 온지 얼마 안 됐을 때요, 그때 벽에 파란 분필로 써진 글씨를 봤어요. 그때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 큰 일로 번졌어요. 이번 일도 그런 건 아닌지 괜히 자꾸 생각나요.”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타일렀다.
 “그때처럼 모든 일이 너를 통해서 돌아가도록 어른들이 내버려두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야 다행이고요.”
 나는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저녁, 꽤 늦은 시간이 되도록 엄마는 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기다려 볼까 아니면 평소처럼 그냥 포기하고 나 혼자 자버릴까 고민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철필을 떠올렸다. 그것으로 전화가 가능한 것이 생각난 것이다. 철필은 그냥 연필보다는 약간 더 두껍고 긴데, 한쪽을 귀에 대고 다른 한 쪽을 입에 대면 핸드폰처럼 통화를 할 수 있다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것에 귀를 대고 이야기하는 건 뭔가 미래에나 나올 것 같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기분이었다.
 - 왜 걸었어?
 전화나 종이컵을 통하는 것보다 더 또렷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깜짝 놀랐다.
 - 왜냐뇨,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언제 들어와요?
 - 심대변인님이랑 술 한 잔 하느라 늦는다.
 - 술? 아이가 둘이나 있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니 엄마도 정말 너무해요.
 - 학교는 어땠어?
 - 그냥 그랬어요.
 - 너 주중에는 학교랑 양말 수거 사무실을 가고, 주말에는 환상나라 학원 다니고 그럴 거야?
 - 네.
 - 주말만 배워서 마법이 늘겠냐? 그냥 학교 다니지 마, 바깥세상 학교 나와서 뭐하려고 그러니? 환상나라에서 마법 배우라니까. 그게 더 전망 있고 좋아.
 방학 내내 의견 충돌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환상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며 마법을 배우길 원했고 나는 바깥세상의 고등학교를 다니다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했다. 우리 둘 다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지만, 아직은 내 고집이 엄마 고집보다는 셌다.
 - 고등학교는 졸업할거예요. 대학교도 갈 거고요.
 - 너도 참 어지간하다.
 엄마는 말했다. 통화는 끝났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그대로 침대에 누웠을 텐데, 기특하게도 나는 그러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아니, 공부를 하자고 생각은 했는데, 하지는 못했다. 철필과 환상 나라에서 쓰던 나무 연필과 볼펜과 연필을 나란히 놓고, 기억 상자는 가방 옆에 놓고 책상 앞에 앉았더니 기분이 묘해서 한동안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내일부터 펼쳐질 새로운 학교생활도 생각하니 더 그랬다. 새 학기를 잘 해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여간 되는 게 아니었다. 학교도 바빠지고 사무실 일도 해야 하고 학원까지 다녀야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방학이 좋았는데, 겨울방학은 언제나 올까. 아니, 겨울방학이 와도 문제였다. 그러면 곧 3학년이 되고 해야 할 공부는 더 많아질 테니까.
 “아 힘들어, 힘들어.”
 나는 그렇게 걱정만 하다가 책상 앞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문득 들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머리를 베었던 팔이 다 자려왔다. 반쯤 열린 창 너머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낮에 기린이 구름을 모으며 걸어가던 광경을 생각해냈고, 그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것을 알았다. 비는 사람들이 길을 걸어 다니지 않는 새벽 두나 세시는 돼야 내리니까 나는 새벽까지 잠든 것이었다. 내일은 하늘이 맑겠구나. 나무들도 더 푸르겠지. 오늘 공부는 포기하고 가방 챙겨서 잠이나 자자고 나는 생각했다.
 가방을 챙기는데,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 책과 노트 몇 권을 바깥세상의 내 방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형이 자고 있을까? 잠을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나는 벽을 통해서 바깥세상의 내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형은 방이 아닌 거실에 있었다. 불 꺼진 어두운 집에서 텔레비전만 켜놓은 채 게임에 빠져 있었다. 안방에서는 아빠가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발이 마루에 떨어진 쓰레기를 밟는 소리가 요란했는데도 형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었을 때에야 형은 내 존재를 알아챘다.
 “안 자요?”
 “현재 왔어?”
 형은 나를 향해 빙긋 웃었다. 오늘 나를 만난 사람들 모두 나를 향해서 환하게 웃어서, 내 주변에는 성격 좋은 사람이 꽤 많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형, 게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방금 시작했어, 잠이 안와서 이걸 하면 잠이 올까 해서.”
 그는 둘러댔지만 어째 별로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공부 안하고 게임하다가 엄마에게 들켰을 때 변명하던 말투와 비슷했던 것이다.
 “너도 할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일 학교 가야 돼요.”
 “방학 끝났구나. 깜박했다. 집엔 무슨 일로 온 거야?”
 “뭐 가져갈 게 있어서요.”
 “그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형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오늘 들어 세 번째였다. 내가 정말 고민이 많은가? 그게 내가 미처 생각 못한 순간에조차 얼굴에 드러나는 건가?
 “그냥 오늘 이일 저일 많아서요. 개학도 했고… 그리고 오늘 사무실에서 이상한 걸 봤어요. 먹을 수 없는 사과라는 걸 봤어요. 형도 알아요?”
 “응.”
 “뭐, 형은 뭐든지 다 아니까요.”
 “응.”
 그는 작게 대답했는데, 기분이 좋지 않아서 작게 대답한 것인지 아니면 게임에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한 것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형의 옆에 서서 잠시 동안 텔레비전과 게임에 완전히 몰두하는 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래서 힘들어?”
 “힘들지 까진 않고, 그냥 생각이 많아서요.”
 “별일 없을 거야.”
 그는 말하고 다시 텔레비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에게 할아버지에게 했던 말을 털어놓고 싶었다. 오늘 하루 종일 느낀 막연한 불안감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을 말하고 싶었다. 아니면 형이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게임에만 몰두하는지 묻고 싶었다. 나나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도 만나고 다니는지, 환상 세계의 일에는 관심이 있는지, 먹을 수 없는 사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고개를 돌리고 게임에만 집중해 있는 형이, 그의 등이 너무 완고해 보여서, 나는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했다.
 “알았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라고만 말하고, 방으로 돌아와 가방을 챙겼다.

 환상 나라의 내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 빗소리는 더욱 커져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낙천적으로 생각하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첫날이고 걱정이 많아서 이런 것이고,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 시민권 따는 것도 걱정했지만 결국 해냈고, 부모님과 연두랑 못 만날까 봐 걱정했지만 그것도 해냈고, 등대지기도 될까 못 될까 걱정했지만 결국 내가 이겼잖아. 그 때처럼만 하면 다 잘 될 거야. 지금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데, 내일도 뭐 어떻게 잘 될 것이다.
 나는 환상 나라에 온 첫날을 생각했다. 놀랍고 신기하면서도,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생활한다는 게 두려웠던, 지금의 나와 비교해보면 많은 것이 달랐던 그 때를 생각했다. 그 후로 많은 일이 있었지만, 모든 일이 무사히 나를 스쳐갔다. 앞으로도 마법도 많이 배우고 공부도 열심히 하면 마법통제 2국에 걸맞은 일쯤은 척척 해낼 수 있을 만큼, 먹을 수 없는 사과쯤은 시큰둥하게 넘길 수 있을 만큼 노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이가 들면 비밀요원이 돼서 내가 직접 사건을 해결하고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사과를 만든 사람을 잡고 혼을 내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 모르잖아, 그런 날이 올지도.
 “지금까지 이 많은 일도 다 해냈는데 앞으로 못할 건 또 뭐람.”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끝.
mirror
댓글 5
분류 제목 날짜
정도경 바늘 자국3 2009.06.26
배명훈 예비군 로봇25 2009.06.26
갈원경 날개의 밤 (본문 삭제)6 2009.05.29
아밀 야간산책 - 본문 삭제 -4 2009.05.29
아이 한국히어로센터 - 2. 능력자이자 인간 헐크3 2009.05.29
정도경 내 이름을 불러 줘6 2009.05.29
정도경 귀향 - 본문 삭제 -6 2009.05.29
정도경 전화 (본문 삭제)2 2009.04.24
배명훈 마리오의 침대 - 본문 삭제 -26 2009.03.27
해외 단편 울름 (An Ulm)2 2009.03.27
해외 단편 열쇠8 2009.03.27
초청 단편 우주인류학개론10 2009.02.27
초청 단편 누에머리손톱6 2009.02.27
정도경 차가운 손가락 -- 본문삭제2 2009.02.27
정도경 물고기8 2009.02.27
김이환 소년의 하루5 2009.01.31
초청 단편 백사1 2009.01.31
정도경 어두운 입맞춤 - 본문 삭제 -5 2009.01.30
정도경 몸하다 -- 본문삭제11 2009.01.30
pilza2 하늘로 올라간 풍선은 2009.01.30
Prev 1 ...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