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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wind 별장

2004.09.24 21:2109.24

  다가올 폭풍을 예고하는 듯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하루 종일 얼굴도 내밀어 보지 못한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잠겨들자 주위에는 금방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십 일년 만에 오는 큰 태풍이라고 한다. 한층 거칠어진 파도가 방파제를 할퀴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들려왔다.
  마을의 사람들은 일찌감치 피신할 준비를 마쳤다. 귀중품은 고지대로 옮겨두고, 침수가 시작되면 집을 버리고 나오는 것이다. 문이란 문은 모두 굳게 닫고, 현관에 아예 모래 자루를 쌓아둔 집도 있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쯤이면 대부분 집안에 틀어박혀 다가올 재난이 자신은 피해가기를 바라며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잠해진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내가 끼어들만한 곳은 없어 보였다. 굳게 닫힌 문들과 깨지지 않도록 X자 모양으로 테이프를 붙여 보강한 유리창이 꼭 출입금지의 표지처럼 느껴졌다.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마을을 나가는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배낭안의 잡동사니들이 책망하는 듯 덜그럭거리며 어깨를 무겁게 조였다.
  바람과 파도소리만이 남아 있는 골목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비바람을 피해 마른 땅 위에서 잘 수 있을까. 상당히 절실한 문제다. 마을 어귀에 있는 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발걸음을 돌려 아무 가정집에나 들어가 유리창을 깨던가, 아니면 구멍가게에서 먹을 거라도 집어 올까. 사소한 경범죄라면 큰 처벌은 받지 않고, 구치소에 들어가 하루 이틀 정도 썩는다면 비바람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을 떨쳐냈다. 그건, 뭐랄까. 마지막 자존심이나 미련 같은 것이다. 나이 서른,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할 줄 아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며, 막노동을 할 정도로 체력이 튼튼한 것도 아니고 잘라 말해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인생에 노숙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남에게 큰 피해를 주거나 이름에 빨간 줄이 그어질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착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각오가 부족한 것뿐이다. 남이야 어떻게 되던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대학에 다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보았던 연애, 그녀도 헤어질 때 그런 말을 했었다. 넌 사람이 너무 물러. 연애할 때야 그런 점이 좋았지만 우리도 곧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살아갈 생각을 해야 하잖아?
  나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결국 그녀를 보내줬고, 실연의 충격을 잊으려고 입대를 했고, 돌아와서 간신히 졸업한 후에는 결국 그녀의 말대로 되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대학 졸업 잉여 생산품 하나. 불량품. 사회에서도 쓸모없고, 제대로 된 노숙자도 되지 못하는 그런.
    
  우울한 추억을 곱씹는 사이에도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여 마을을 둘러싼 방풍림에 접어들고 있었다. 드문드문 자라난 소나무 사이로 그럭저럭 잘 다져진 비포장도로가 곧게 뻗어 있었다. 차 하나가 간신히 다닐 정도 넓이로, 걷기가 편했기에 멍하니 그 위를 지나가는 도중에 문득 낮에 마을에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마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름 별장이 하나 있다는. 들었을 때는 돈도 많은 놈 부럽기도 하지, 하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 차츰 어떤 계획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태풍이 오늘 내일 중으로 상륙한다는데 별장 주인이 휴가를 와 있을 리는 없을 것이고, 사람이 없다면 가서 다른 건 건드리지 말고 비만 피하다 온다면 어떨까. 당연히 불법 주거 침입이지만 바람에 나뭇가지가 꺾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좋지 않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자 마침 그 때, 먹구름 틈새로 달빛이 살짝 흘러나왔다. 그리 밝지 않은 푸른빛이었지만 내가 걷고 있던 길 끝에 자리 잡은 작은 집을 비추기에는 충분했다. 생각보다 멀지 않았기에 한층 기운을 낸 나는 그쪽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별장은 들었던 대로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지막한 전망 좋은 언덕에 자리 잡은 작은 이층집으로 뒤를 돌아보면 마을에 아직 채 불이 꺼지지 않은 집들이 아스라이 비쳐보였다. 사람이 있는 흔적은 없었다. 차고는 비어 있었고 정원에는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있다. 문에는 큰 빗장을 자물쇠가 단단히 물고 있었고 닫힌 창 너머로는 새카만 어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집을 둘러싼 담은 어깨 높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배낭을 먼저 안으로 던지고 한동안 매달려 낑낑거린 후에야 정원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조금 더 어려웠는데, 혹시나 했지만 잠겨있지 않은 창문은 하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유리창을 깨뜨려야 했다. 배낭에서 테이프를 꺼내 유리창에 여러 겹 덧붙이고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집어 힘껏 내리치자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테이프를 떼어내며 속으로 집주인에 대한 사죄의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부디 태풍으로 깨진 것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내가 들어간 곳은 아마 거실인 듯 했다. 들어서자마자 유령처럼 방안에서 흰 뭔가가 떠오르는 모습에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자세히 보니 먼지가 앉지 않도록 가구에 씌워둔 천이었다. 소파가 두 개, 테이블이 하나, 구석에는 냉장고와 주방용품.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페트에는 옅게 먼지가 앉아 있었고 거실 벽 한 칸은 무엇 때문인지 커튼을 쳐서 통째로 가려두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바깥이 어둡기는 했지만 집안은 채광이 좋지 않은 것인지 그보다 훨씬 짙은 어둠이 군데군데 깔려 있었다. 한동안 기다린 후에야 어둠에 적응된 눈에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등 스위치를 찾기 위해 벽을 더듬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불을 켜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마을에서 불빛이 보일 것이고, 그렇다면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누군가라던가, 아니면 별장 주인이 관리를 부탁해 놓은 대리인이 무슨 일인가 하고 찾아올지도 몰랐다. 들키기라도 했다간 끝장이다.
  불을 켜는 것은 관두고 천이 덮인 소파 위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신발은 신은 채로, 짐은 언제라도 들고 도망갈 수 있게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낯설고 그리 편안하지도 않은 잠자리였지만 일탈로 인한 긴장이 사라지자 피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잠이 드는 것은 쉬웠다. 내가 깨뜨린 유리창 너머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꿈을 꾸었다. 죄책감 탓인지 밤새도록 깊게 잠들 수 없었다.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에서 꿈을 꾸었다. 낯선, 처음 보는 여자가 머리맡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다. 집주인이 돌아온 걸까.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동자를 굴려 몸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소파에서 뻗어 나온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내 몸을 단단히 끌어 앉고 있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얇은 천으로 뒤덮인 소파 아래에서 뭔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꼭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위에 누워있는 것 같은 불쾌한 감촉이었다. 두근, 두근, 그 아래에서 심장이 고동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그에 맞춰 집전체가 움찔거린다. 그건 살아 있어. 온기가 느껴지잖아. 그래서 깨진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도 춥지가 않았던 거야. 머리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냉정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꿈이야. 남의 집에 숨어 들어왔다는 죄책감이 이런 꿈의 형태로 나타난 거야. 자신에게 몇 번씩 확인하듯 되풀이하며 꿈에서 깨어나려고 애쓴다. 가위에 눌렸을 때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손가락부터 움직이라고 했던가?
  움직여라, 움직여. 날 이 꿈에서 꺼내줘.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이려 해본다.
  문득 목덜미에 축축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소파와 손에 신경을 쓰느라 머리맡의 여자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동자만을 간신히 굴려 옆을 바라본다. 검고, 긴, 비단결 같은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를 가진 그 여자가 내 옆에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는 것처럼 킁킁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든다.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그 여자의 목소리, 그 여자의 말을 상상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그녀의 말이 들린다. 이 집에서, 내 안에서 나가.
  이 상황에서도 악마처럼 냉철한 누군가 머릿속 한구석에서 내게 속삭인다. 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알겠어? 그녀의 얼굴을 봐. 눈 아래, 오뚝 선 콧날 아래, 둥근 턱 위를 봐. 나는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드높인다.
  그녀에게는 입이 없다.

  잠에서 깨어났다. 퉁기듯이 소파에서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팔다리를 추스르지 못하고 꼴사납게 머리부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통증을 느낄 틈도 없이 일어나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몸 전체가 빗속을 걸어 다닌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침이 찾아온 것인지 집안은 흐리고 불투명한 빛으로 가득했다. 빗방울이 퉁퉁거리며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뚜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집안은 어젯밤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고 옆에는 짐도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깨어난 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꿈의 기억에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하다. 미끈거리는 손으로 소파를 덮은 천을 잡았다. 손이 떨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이마를 흘러내린 식은땀이 눈을 따끔거리게 한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단숨에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 있는 것은 그냥 평범한 소파였다. 살색의 가죽 재질, 쿠션이 하나 놓여 있는 이인용 소파.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의 손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손을 대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흠칫했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밤새도록 누워있던 곳에 아무런 온기도 없다면 오히려 그게 두려워해야 할 일이겠지.
  역시 꿈이었다. 심장을 누르는 것처럼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뒤로 돌아 소파에 걸터앉았다가, 다음 순간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간신히 진정되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반쯤 벌린 입 사이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기세다.
  돌아본 그곳에는 간밤의 그 여자가 있었다.
  아니, 아니다. 두 번째 착각은 금방 사라졌다. 여자라고 생각한 것은 거실 벽 한 칸을 통째로 써서 그려진 등신화(等身畵)였다. 간밤에 보았던, 커튼으로 가려둔 것이 이 벽화였던 모양이다. 아마 내가 깨뜨린 창문으로 바람이 몰아쳐 커튼이 벌어졌고, 잠결에 이걸 얼핏 보고 그런 악몽을 꾼 게 아닐까.
  합리적인 설명을 찾아내자 금방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커튼을 완전히 걷어 젖히고 그림을 드러낸 후에 천천히 살펴본다. 절반 정도는 간밤에 악몽을 꾸게 한 요소를 그림에서 찾아보기 위해, 절반 정도는 과거의 습관이랄까.
  기괴한 그림이었다. 기괴하면서도 잘 그린 그림이었다. 적어도 기술적인 면에서는 흠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었기에 적어도 그림을 보면 좋은 그림인지 아닌지는 알아볼 수 있다. 재능도 없었고, 재능을 메울 끈기도 없었기에 군대를 다녀와서 손이 굳은 이후로는 거의 붓을 잡아본 적이 없지만 머릿속에 쑤셔 박은 지식들까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니까. 길고 검은 생머리의 여자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건 그리 특이한 점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아래의 배경이랄까. 작게 그려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에 있다. 여자의 몸 크기와 비교하면 쥐나 벌레라고 할만한 크기다. 더욱 기분 나쁜 점은 그 소인들이 전부 미완성 상태라는 것이다. 머리가 없이 몸만 있는 남자, 양 팔이 없는 꼬마, 기타 등등. 미완성인 것은 그 긴 머리의 여자 그림 역시 그랬다. 그 여자에게는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입이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유화 물감이 마른 흔적이 다른 것이 여러 번 시간차를 두고 덧칠한 듯 했다. 아마 별장 주인의 작품인 듯한데, 특별히 밑그림도 없이 여기에 휴가를 올 때마다 내키는 대로 그려버린 모양이다.
  그림은 예쁘지만 이걸 그린 사람은 정신이 조금 나간 모양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한동안 그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림의 여자도 아름다웠지만 그 아래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불구의 소인들과의 언밸런스함은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 커튼으로 그림을 다시 덮었다. 구석구석 살펴보며 조금이라도 흠을 잡으려고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붓을 쥔 모양으로 구부리고 그림에 빠진 부분을 채워 넣는 흉내를 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으니까. 질투심, 미련, 그런 감정들. 쓴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이곳에 아무도, 그런 모습을 볼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드디어 태풍이 상륙한 모양인지 비는 퍼붓는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가끔씩 세찬 바람에 집 전체가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 뻔했기에, 안심하고 집안을 좀 더 둘러 볼 수 있었다. 주인 이외의 다른 손님들도 꽤 있었던 모양인지 2층은 전부 손님용 침실이 들어서 있었고, 1층에는 어제 본 거실과 주방, 주인용으로 보이는 침실이 전부였다. 그리고 자물쇠가 채워진 문이 하나 있었는데 집안에 있는 것을 굳이 또 자물쇠를 채울 필요가 있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뒤에 다른 방이 더 있을 공간은 없어 보이는 것이 아마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아닐까.
  주인의 방에는 생각했던 것처럼 화구와 빈 캔버스가 몇 개 널려 있었고 옷장에는 여름옷이 몇 벌 좀약과 함께 들어 있었다. 진달래 색의 원피스도 있었고, 여성의류와 남녀공용 옷들이 옷장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이즈가 작은 것으로 보아 집주인은 여자인 모양이다. 애인이라도 데려와서 소파에 눕히고 벽화를 그린 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자화상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더욱 악취미라고 할 수 밖에. 그래도 켕기는 구석이 있어 옷장 서랍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귀중품이나 속옷이라도 들어 있으면 꽤나 고민하게 될테니.
  집안을 전부 둘러본 후에는 소파에 다시 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가, 벽시계가 오후 한시를 넘어 세시가 다되어 가도록 아무도 찾아오는 기색이 없자 좀 더 대담해진 나는 모처럼 인간다운 행사-몸을 씻는 사치를 누렸다. 왠지 모르지만 전기도 가스도 수도도 아직 들어오고 있었다. 옷이나 화구가 남아 있는 것도 그렇고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급하게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멋대로 하며, 내친김에 더러워진 옷도 빨고, 냉장고도 뒤져 보았다. 냉장실에는 생수 몇 통이 전부였지만 냉동실에는 꽤 큼직한 냉동육이 남아 있었다. 꺼내놓고 녹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살펴보아도 상한 것 같기는 않았기에 그대로 구워 먹었다. 어차피 두면 상할 물건이니 먹어 주는게 도리라고 합리화를 하면서. 간만에 산뜻하게 씻고, 배를 채우고, 춥지도 않은 집안에 앉아 있으니 처음에 느꼈던 죄책감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이렇게 편한 것을.
  그러나 막상 당장 걱정할 일이 없어지자 곧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면 주인이 오기 전에 얼른 떠나야겠지만, 그 전까지는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집안에서 뭔가 할 일을 찾아야 하는데, 하다못해 책도 한권 없으니 멍하게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자꾸만 벽화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서라, 이제 와서 무슨. 몇 번이고 그림 앞을 서성이던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예 주인방의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보니 간밤의 꿈도 그렇고, 소파는 아무래도 찜찜했으니 여러모로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한 자리에 누우니 다시금 잠이 쏟아졌다.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그렇겠지. 조용히 눈을 감자 다시 수마가 덮쳐 왔다.
  
  거실에서 뭔가가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카페트에 가벼운 물체가 스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나는 눈을 떴다. 바깥은 다시 캄캄해져 있었고 빗소리는 그침 없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거실로 통하는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분명히 닫아 두었던 것 같은데. 전등을 켜려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역시, 마을에서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불을 켜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대신 짐 안에 손전등이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고 침대 옆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거실에 두고 온 모양이다. 거실에서 나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었을 때의 거실 풍경이란. 낮과는 어쩌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는 어둠 속에서는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듯 했고, 어두워서 눈을 돌릴 때 시야 구석에서 희게 힐끔힐끔 비치는 가구를 덮어둔 천에 덜컥 겁을 집어 먹곤 했다. 창문을 깨고 들어온 것을 후회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그 가짜 유령들은 한결 실감나는 모습으로 흔들거리고 있었으니까. 바닥을 더듬어 천천히 나아가는데 카페트는 습기 탓인지 축축하게 젖어 있어 한층 기분이 나빴다. 역시 기분 탓이겠지만, 물컹거리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간신히 짐에 손이 닿아 배낭을 열고 손전등을 꺼내기까지의 시간이 백만 년이라도 지난 듯 했다. 사각거리는 소리는 그때까지도 바로 옆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손전등을 바로 고쳐 잡고,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손으로 적당히 가린 채, 스위치를 올리고 주위를 빙 둘러 비춰보는 순간, 소리도 사라진다. 거실은 다시 낮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단 하나, 그림을 덮어 두었던 커튼이 다시 열린 채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고 역시,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이고 구석구석 불빛을 비춰보아도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실에서 쥐라도 기어 나온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침실로 돌아왔지만 찝찝한 기분에 다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기분 전환할 것이 필요했다. 그 때 방구석에 놓여 있는 빈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그것만이 하얗게 도드라져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초조하게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침대에 주저앉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나는 체념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해서 안 될 건 뭐야?
  팔레트에 물감을 몇 종류 짜놓고 붓을 손에 잡는다. 밑그림도 없었지만 애초에 뭘 딱히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그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몇 년이나 붓을 쥐어본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캔버스를 앞에 놓고 잠깐 고민하던 나는 닥치는 대로 붓에 물감을 찍어 발라 캔버스를 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쯤 기분전환 삼아 시작한 일이었지만 곧 그 일에 몰입하고 말았다.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와 같은 흥분이 살아나며 정신없이 붓을 놀렸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칙칙한 회색빛이 방안을 채울 때쯤이었다. 벽시계를 언뜻 바라보고 헛숨을 삼켰다. 어느덧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열 시간이 넘게 그림 그리기에 몰두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런 성과는 있어서 비어 있던 캔버스는 화려한 빛깔로  가득 차 있었다.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어,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거의 완성된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던 나는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내가 뭘 그린 건가.
  그것은 벽화의 여자 그림이었다. 그것뿐이었다면 괜찮았다. 요 근래에 본 가장 인상 깊은 물건이었으니까 무심코 그걸 그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나를 겁먹게 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색깔, 색감, 채색 방법, 붓놀림, 그 어느 것 하나 내 방식이 아니었다. 물감이 다 마르지도 않은 캔버스를 들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 올려놓고 벽화의 커튼을 젖혔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그 여자의, 이 집 주인의 방식이었다.
  침실로 도망치듯 돌아와 다른 캔버스에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예 의식적으로 다른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방파제를 할퀴던 세찬 파도를 그려본다. 마을의 풍경을, 달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이 집의 풍경을 그려본다.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릴 수 없었다. 아니, 훌륭하게 그려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내 방식이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림체는 덮어 쓰여진 것처럼 그 여자의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실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석고 조상을 뎃생해 본 후에 나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이젤로 캔버스를 몇 번이나 내리쳐 찢어 버리고 짐을 집어든 채 도망치듯 집에서 뛰쳐나왔다.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던 것은 다행이었다. 이 곳을 떠나려면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다시 들어가야 했기에 가능하면 도망 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마을 어귀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그 별장에서 도망 나온 이후에도 뭔가가 따라오는 듯한 기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어귀에 있던 파출소 앞을 지날 때였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치던 실종자를 찾는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눈에 익은, 아니 아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장의 벽화. 그 여자. 입이 있는 것만 제외하면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그대로 뒤로 돌아 달음질쳤다. 내가 왜, 어째서 그 집으로, 그 때 다시 돌아갔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거치적거리는 짐을 내던지고, 젖어서 미끈거리는 솔잎에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 오르막길을 뛰어올라 담을 넘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깨진 창문을 통해 다시 집안으로 들어간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어디를 찾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열어보지 않았던 옷장 서랍을 연다. 열쇠가 나왔다. 지하실로 가는 문을 열었다. 거짓말처럼 열쇠가 맞아 들어가며 문이 열렸다.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가, 주위를 둘러본다.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창고인지 시멘트 벽 위에 페인트칠을 대충 했을 뿐인 작은 공간이었다. 텅 비어 있다. 여기에 있어야 하는데. 텅 빈 지하실을 초조한 기분으로 둘러보며 안달한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빌며, 그러나 기대를 배신하듯 지하실 벽 한구석에서 작은 위화감을 발견한다. 페인트칠이 조금 다르다. 어둠 속에서 어떻게 그걸 알아볼 수 있었는지 의심조차 하지 못하고 위층으로 허겁지겁 달려 올라갔다. 망치를 찾아와 벽을 두드린다. 두 번 만에 벽이 허물어지고, 그 안에 삼켜져 있던 것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포우의 단편에 나왔던 것과 같이 벽 안에서 반쯤 썩은 어떤 여인의 시체였다. 안구가 있던 자리에는 퀭한 공동만이 남아 있고, 팔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얼굴에서 온전하게 남은 것은 입. 입뿐이었다. 벌레가 꾀거나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자의 시체는 반쯤 썩어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깔끔한 채로 썩어가고 있었다. 아니, 달랐다. 썩은 것이 아니라…
  그걸 깨닫자 뒤늦게 공포가 밀려왔다. 시체를 내던지고 네 발로 기듯이 지하실 계단을 올라와 거실에 들어 왔을 때, 거실은 이미 변한 후였다. 꿈속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카페트가 천천히 꿈틀거린다. 내장의 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소파에서는 희고 가는 손이 나와 허공을 헤집고, 심장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뒷걸음질 쳐 등에 닿은 벽에서도 섬뜩한 감촉이 전해져 온다. 그 아래에 피가 흐르고, 근육과 힘줄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림. 그 그림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놀랍도록 뚜렷하게.
  불. 불을 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다. 불을 켜면 이 집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적어도 빛이 있는 동안은. 그리고 도망쳐 나가면 된다. 이 집은 살아 있었다. 지하실의 여자는 썩어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먹히고 있었다. 여자를 먹어서, 여자의 몸과 장기로 자신을 조금씩 채워가며 집은 살아있는 것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스위치에 손이 닿았을 때 나는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와 함께 집도 숨을 죽였다. 불을 켜면 마을에서 사람이 찾아온다. 빈집에, 실종자의 시신이 있고, 부랑자가 있고, 목격자는 없고, 집이 살아 있다 따위의 소리를 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불법 가택 침입은 살인에 사체유기가 될 것이고, 덤으로 정신병원 행이다. 화려한 인생의 종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그렇게 속삭인다. 꿈속에서 내게 중얼거렸던 악마처럼 냉철한 그 목소리가.
  네가 어제 먹은 건 뭐라고 생각해?
  네가 그 여자의 그림을, 재능을 흉내 낼 수 있었던 것은 왜라고 생각해?
  스위치에 닿아 있는 손을 땐다. 집의 움직임도 잦아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등이 있어야 할 자리가 벌어지며 농구공만한 안구가 드러났다. 번들거리는 그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내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그걸 먹는 순간 나도 집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여자를 먹어서 나도 그 여자의 재능을 받았다. 아니, 그건 이미 내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만족한 듯 눈을 감고, 집은 천천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실바닥은 잠잠해지고, 소파의 손은 소파 안으로 들어가고, 벽의 온기도 사라진다. 나는 비틀거리며 소파로 다가가 그 위에 몸을 던졌다. 소파가 따뜻하게 날 감싸 안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건지, 날짜 감각이 슬슬 희미해진다. 낮에는 주로 그림을 그려본다. 원래의 집주인은 행방불명 처리가 되었고, 나는 이 별장에 들어와 살고 있다. 가끔 민박으로 손님을 받는다. 내가 그린 그림은 예전과는 달리 꽤 잘 알려져, 슬슬 개인전을 열 생각이 없냐는 제의가 슬그머니 들어오기도 했다.
  대학 시절의 건방진 연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소파에 앉아 그것과 함께 다음에 있을 일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는 재능도, 끈기도, 용기도 없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남이 가지고 있다면 그걸 빼앗아야 내가 부유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이 집이 살아 있는 인간의 파편을 모아 살아있는 것이 되려고 한다면, 부족한 부분은 빼앗아 채우고 있다면, 내가 그러지 못할 이유는 뭔가? 그것에는 입이 없지만, 다행이 내게는 입이 있다. 게걸스럽게 씹고, 탐욕스럽게 소화시킬 수 있는.

  소파에 앉아 가볍게 팔걸이를 쓸어보고 있자니 손아래에서 거칠한 감촉이 느껴진다. 일전에 받았던 손님이 데리고 온 고양이가 건방지게도 낮 동안에 소파를 쥐어뜯었었지. 오늘 온다는 여자는 티 없이 맑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바깥에 차소리가 들리는 것이 슬슬 도착한 모양이다. 마중할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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