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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달 13월, 혹은 32일

2004.02.27 22:5702.27

  약냄새가 가득한 작은 방. 한 중년의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맥빠진 걸음으로 들어왔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벽에 붙은 목재 약장을 열고 들고있던 작은 유리병을 집어넣으려던 그는 책상위에 놓인 편지봉투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하얀 봉투 위에는 둥그렇고 고운 필체로 사인이 되어있었다. 파비안느 H. 크림웰. 남자는 사인을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헤아려보려는지 잠시간 검은 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일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손을 놀려 봉투를 뜯고 잘 접힌 편지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책상에 기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Dr. 윌리엄 브렌스에게

  지금의 내 심정을 표현할 말이 달리 생각나지 않아 상투적인 문구로 시작과 끝을 맺으려 합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었을 때는 내가 사라지고 난 뒤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은 이전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죽은 나의 유서이며, 당신에게로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입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요. 간단명료하게 이야기하자면 잉크 한방울이면 충분할텐데도 지금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게 허락된 순간동안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싶은 마음입니다. 비록 내용이 너무 길게 이어지더라도, 참고 끝까지 읽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18년전 오늘... 아니, 어제라고 할까요. 12월의 마지막 날. 나는 어머니의 목숨을 댓가로 태어났습니다. 원래부터 병약하기 그지없었던 어머니는 위험하다는 의사의 -바로 당신의- 만류도 뿌리치고 나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이가 나였음에도 아버지는 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자였기 때문이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나의 금발과 가느다란 얼굴윤곽을 보고 어머니와 꼭닮았다고,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하여도 그는 증오보다 더욱 두려운 무심한 눈빛으로 지나칠뿐, 나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조차 여덟 살때 낙마하여 돌아가시고 완전히 외톨이가 된 나를 돌봐준 것이 당신과 당신의 딸, 리넬라였습니다. 비록 명목상은 나의 고용인이었지만 당신부녀의 노력 덕택에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먼 친척집으로 보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하달까요? 아무리 비뚤어진 어린마음에 버릇없이 굴었어도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그런 감정이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잔병치레가 잦았습니다. 물론 어느정도 나이가 들고나서는 매우 건강했지만, 그런 나를 위해 당신은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죠. 아직 어렸던 리넬라와 나는 조금더 나이가 들었고, 리넬라는 하인중의 한 명인 제프리와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찾아 당신이 돌아왔을때, 당신을 기다리던 리넬라와 나는 당신의 귀환이 얼마나 기뻤던지요. 비록 당신이 함께 마중하였던 제프리를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동경으로 한발짝 물러서 당신을 맞이하였고 리넬라는 스스럼없이 당신의 품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신은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말했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난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병약했던 것은 오히려 리넬라쪽이었지요. 왜 그때 나는 당신의 이야기에 부인하지 않았을까요. 열 여덟먹은 큰 아기의 어리광이었을까요? 그날 저녁. 성찬이 끝나고 당신이 손수 떠먹여준 초록색의 물약은 내 코끝을 시큰하게 했습니다. 색은 전혀 달랐지만 그날 저녁의 포도주와 같이 새큼한 그 맛때문이라고 애써 생각하면서도 잘자라고 인사하는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약 덕분인지 나는 정말 편하게...편하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주체할 수 없는 두통을 느끼고 옅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때 무엇인가가 변해버린 겁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보기조차 싫어했던 검은색 드레스에 검은 베일을 드리운채로 묘하게 낯익은 어두운 방에 서 있었던 겁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오렌지색 불빛사이로 어른거리는 검은 실루엣들. 내 손에 들린 먼지색으로 가련하게 뒤틀린 마른 장미다발. 촛불빛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나 흐려서, 눈물처럼 흐려서 마치 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난 생각했습니다. 난 아직 잠들어있다고. 이것은 꿈이라고. 그리고... 지끈거려서 제대로 된 생각조차 되지 않는 머리를 굴려 한참을 살핀 뒤에야 나는 그곳이 내 저택의 연회용 홀인것을 알았습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내가 사랑했던 화려한 색채의 태피스트리들은 모두 벽에서 떼어져 어디론가 사라져있었고 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창들도 검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익숙치 않았던 것은 두통의 원인이 된 그 엄청난 양의 죽은 꽃들! 그 지독한 향기는 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도 모자라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죽음의 냄새. 네, 그건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설명이 되겠지요. 이 침울한 분위기도, 감각없는 실내 장식도.
그때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헤드윈, 너무나 약했던 헤드윈. 그런데...'라고요. 헤드윈. 그것은 누구도 제대로 입에 올린 적이 없었던 어머니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나에게 환상의 정체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건 내가 너무 작아서,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어서 참여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장례식이라고.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그 울음을 터뜨린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아실거예요. 에빌본 카운티의 세르지에부인. 항상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냉소밖에 보일 줄 모르던 그녀가 보기 흉할정도로 울고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곧 옆에 서있던 남편, 세르지에씨의 똥똥한 어깨에 몸을 기댔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웃음이 치밀었습니다. 당신이나 리넬라가 봤다면 버릇없다고 화를 냈겠지요. 그래서 난 웃음을 참느라 베일을 푹 눌러쓰고 한쪽 구석으로 비켜섰습니다. 아무도 내 얼굴을 볼 수 없게요.
그리고 밖에서 연회장의 문이 열리고 리넬라가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열 여덟살의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는데 문에 기대지 않으려고 애쓰려는듯 투박한 손으로 치맛단을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붉어진 조그만 눈을 크게 뜨려 애쓰며 말했습니다. '따라오세요'라고.  사람들은 천천히 열을 지어 그녀의 뒤를 좇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어느새 문 밖에 서있던 당신의 팔에 세르지에 부인과 닮은 꼴로 매달렸습니다. 당신은 리넬라를 질질끌며 걸으면서도 그녀의 팔을 토닥여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훗... 침울한 분위기에 물들지 못했던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약간의 질투를 느꼈습니다. 세르지에 부인도, 리넬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기댈 어깨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만 혼자 걷고 있었거든요. 더구나 리넬라의 뒤에는 당신 몰래 제프리가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때는 모두 귀찮을 정도로 신경을 써주었었는데...
  당신부녀가 인도한 곳은 지하실이었습니다. 지하실치고는 좁지도 음습하지도 않았지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해낸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족 납골당. 그 입구가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생각해보건데 그 안에는 납골당에 들어가기 직전의 시체가 커다란 화환에 짓눌린 채 관에 누워있을 것이었습니다. 장의사에게 과할정도로 많은 돈을 쥐어주고 심혈을 기울여 분칠을 하고 옷을 갈아입힌, 광대같은 빨간 볼의 시체가 말입니다. 사람들은 행여 죽은자가 다시 일어날새라 조심스러워보였습니다. 꽃과 함께 마지막 인사를 바치고 되돌아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엔 어린 내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안도가 비쳤으니까요.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천천히 베일 너머로 보이는 관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당신들은 죽은이의 가족처럼 관의 머리맡에 서 꽃을 놓고가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말을 건내었고 나는 조금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궁금했거든요. 나를 알아볼수 있을지. 나는 꽃을 내려놓기 전에 베일을 들어올리고 무례하게도 환하게 웃어보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리넬라의 얼굴에 질린 기색이 떠오르더군요.
  "이...무슨..."
  신음에 가까운 리넬라의 책망을 흘려넘기며 나는 관에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죽은 꽃을 죽은 자 옆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베일을 벗어 내려놓고 얼굴을 시체의 얼굴에 바싹 들이밀었습니다. 금빛 머리카락. 가느다란 얼굴선. 그건 어머니의 얼굴이라기보다는...마치...
  그때 리넬라가 비명을 질렀지요.
  "파비안느으!"
  고개를 돌려보니 리넬라는 이미 정신을 잃고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당신의 팔에 간신히 걸려있었습니다. 웃음이 났어요. 참을수 없을만치... 물론 리넬라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흰 드레스를 입고 빨간 볼연지를 칠하고 관속에 누워있었던 것은 바로 나였으니까요.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황급히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리넬라를 방에 눕히고, 다음날 나를 보러올때까지 나는 내 시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있었지요. 혹시 나는 동화속에 나오는 도플갱어가 아닐까, 이것은 혹시 꿈일까... 나는 물건을 쥘 수도 있었고, 꼬집으면 아픈 육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난 죽었던 것 같다는 확실한 느낌같은 것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놀랄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앞으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하인들은 벌써 짐을 다 꾸리지 않았을까요? 이 집에는 아마도 변호사와 신부와 의사들만 들락거리지 않을까요? 물론 변호사는... 내 재산분배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려고, 신부는 나를 내쫓기위해... 의사들은 의학적으로 내 상태를 규명하고 싶어하겠지요.
  다음날 날이 밝고 내가 사라지지 않았나를 확인하려는 듯 당신이 지하실 입구에서 날 불렀을때 나는 마지막일거라고 다짐하며 관 속의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짜증날 정도로 약해 보이는 몸. 당신이 그렇게 걱정했던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제는 상관 없다고, 저런 가느다란 꼬챙이 같은 육체 따위 썩어들어가든 쥐에게 파먹히든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당신의 부름에 대답하며 지하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당신은 초록 약병을 꺼내들고 한숨을 쉬다가 나를 보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애써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되었노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왜 다시 살아났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난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서재에서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려했던 당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파비안느, 그러니까...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넌...."
  그리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것처럼 우물거리다가 꺼내놓은 한마디는 너무나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죽었단다."
  그 한마디가 뭐 그리 힘들까요. 나의 장례식에 왔던 모든 사람들, 당신부녀. 그리고 나조차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말입니다. 사인이 뭐냐고 물었을때 당신은 심장마비라고 일러주었지요. 그때 내가 뭐라고 생각했는지 아시나요. 그저께... 아버지에게서 받을수 있을 듯한 모든 달콤함을 다 받아서 너무 기쁜 나머지 내 심장이 멈췄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바보같이 말이죠.
  어쨌든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어 당신은 안달이 난 상태였고  나는 당신에게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나조차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겠지요. 책을 뒤적이며 히스테릭한 모습을 비치는 당신을 두고 리넬라의 방으로 갔을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리넬라는 얼굴이 그리 하얀 편이 아니었음에도 파랗게 보일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있었습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눈꺼풀 아래 눈동자는 쉼없이 움직였고 입술사이로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흐느낌은 절대 끊기지 않을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그 약을 떠올렸습니다. 달진 않아도 나를 편안한 잠속으로 깊이 깊이 밀어넣었던 그 푸른 약.
  나는 조심스럽게 서재로 가서 머리를 싸쥐고 책상에 엎드려있는 당신 몰래, 당신이 서재 입구 옆 소파에 걸쳐두었던 윗도리에서 약병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살금살금 리넬라의 방으로 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웠습니다. 다행히 리넬라는 금방 눈을 떴습니다. 하지만 그 뿐.
  백치같이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볼 뿐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미소를 짓고 그 새큼하게 아린 물약을 그녀에게 맛보여주기위해 약병을 들고 생긋 웃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리넬라는 고마워하는 대신 비명을 질렀습니다. 숨이 넘어갈 듯이, 그러나 지치지도 않고. 그녀의 눈은 나외에 다른 누군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입술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도움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누군가 와 달라고.
  내가 미친 듯한 그녀의 행동에 놀라 굳어져 있을때... 당신이 들어온 겁니다. 내겐 악의가 없었음에도 오히려 그녀를 돕고 싶어했던 것임에도 당신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내게 방 밖을 가리키며 나가라고 소리치고 당신의 딸을 보듬어 안았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딸이 있는 곳은 나의 집 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방을 떠나야했습니다. 씁쓸한 기분으로 나가는 내 뒤통수에 꽂히는... 리넬라의 잦아드는 흐느낌.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제발, 제발 사라져줘, 파비안느...'
  덜컥. 문이 닫히고 나는 그 문에 기대어 섰습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단지 죽은자이기 때문일까요. 이래서는... 죽은자가 산자를 더욱 두려워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웃었습니다.
  문이 다시 열렸을때 리넬라는 잠들어있었습니다. 당신은 방 밖에 서있는 나를 무시하고 서재로 가서 윗도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무서운 얼굴로 물었습니다. 약을 보았느냐고. 난 겁이나서 엉겁결에 약을 소맷자락에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모른다고. 당신의 얼굴은 더욱 무섭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리고 내 팔을 잡아끌고 지하실로... 내가 애써 잊으려, 가지 않으려했던 그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 아아... 무엇부터 써야할까요. 계단.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을 거칠게 내려가면서 당신이 말했죠.
  "그 약... 내가 구해온 그 약. 알고 있니, 파비안느? 한모금 쯤은 나쁘지 않지. 오히려 양을 잘 재어쓰면 그런 영약이 없지. 하지만 그 양이 과하면......"
  당신은 숨이 차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었습니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패닉상태의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죠. 오히려 떨고 있는 당신이 너무나 가련하고 슬퍼보여서... 끌어안고 -당신이 리넬라에게 그랬듯-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조차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내 눈앞에 있는거지? 왜... 살아있는 듯 보이는 거지? 죽어 엎어져있어야 할 네가!"
  당신은, 그래요. 그날 아무도 닫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지하실의 육중한 문 틈으로나를 거칠게 밀어넣었고 나는 바닥을 구르듯 미끄러져 내 관에 처박혔지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허둥대다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 손을 짚은 곳엔 나의 차갑게 죽은 뺨이 있었고, 장의사가 정성껏 발라둔 붉은 연지에 미끄러진 내 손은 이미 윤기잃은 내 죽은 금발을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본 것, 그 끔찍한 것! 연지가 지워진 자리에 보인 지독하게 푸른 내 뺨, 바다 속처럼 시리도록 푸른 내 뺨. 그리고 더욱 짙은 색으로 새겨진 잔인한 반점...  
  "방법이야 간단했지. 네가 죽기 전날밤 먹은 포도주, 리넬라를 시켜 그 안에 약을 조금 타는건 문제도 아니었어."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내 당황한 눈을 보고 당신은 외쳤지요. 왜 살아난거냐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이것을 알고 싶었던게 아니냐고.
  알았어야 했습니다. 난 약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병약했던 건 당신의 딸이었으니까요. 아마도 죽음의 신의 낫은 눈이 없기에 나를 먼저 거두어들인 것이라 생각하려 했건만. 당신은 탐이 났던 겁니다. 어리고 멍청하고 버릇없는 고아 계집애에겐 과분한 재산이. 얼마나 쉬웠을까요. 단명하는 집안의 내력. 더구나 나 스스로도 미워하는 병적인 내 외모. 나의 죽음을 확인할 의사가 바로 당신인데.
  그래요, 나는 죽었습니다. 더구나 나를 죽인 것은 당신과 리넬라입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으려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떨며, 그러나 죄책감없는... 메뚜기의 다리를 잡아뜯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아니 피에 익숙해져 경찰에 붙들린다 해도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그런 살인자의 눈으로 고백하였고... 나는... 믿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게 너무, 지독하게 명확했기에. 믿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당신의 고백을 듣게된 경위였다면 앞으로는 나의 고백입니다. 아까 이 글을 쓰러 들어오면서 제프리에게 리넬라의 병을 낫게 해줄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네, 그 푸른 약. 아마 제프리는 리넬라에게 가져다 줄 수프에 한 숟가락 정도의 약을 잘 섞어 넣었을 겁니다. 당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몰래... 말이지요. 지금 그가 약병을 돌려주러 왔습니다. 가엾은 제프리. 나를 두려워하며 떨고 있군요. 그런데도 리넬라를 위해 이렇게 까지 하다니. 그를 돌려보내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상상이 되시나요?
  이제 나는 당신에게, 리넬라를 돌보고 있을 당신에게 갈 겁니다. 그리고 서재 앞을 지나가다가 주은 것이라고 어설픈 거짓말을 하며 약병을 내놓을 겁니다. 당신이 얼마나 속아줄지는 의문이지만, 지금의 당신은 리넬라로 인해 머리속이 어지러울테니 날카로운 판단은 힘들겠지요. 그 약병을 본 당신은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숙련된 당신의 손은 숟가락만 가지고도 정확한 양을 재어 리넬라에게 먹이지 않을까요? 어쩌면 리넬라는 싫다고 도리질 칠지도 모르겠군요. 상상만해도 어쩐지 웃음이 나네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찾아가는 데는 충분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배신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내 몸이 조금씩 사라져가는걸 느낍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요. 이 편지를 펼쳐볼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지만 나를 죽인 당신들.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나. 과연 어느 쪽이 더 잔인하고 타락한 영혼인지.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이로 인해 내 영혼이 지옥불로 떨어져 괴로울 지라도 조금만 기다리면 당신을, 리넬라를 그곳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것일까요. 물론 당신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모쪼록 당신이 이 글을 빠른 시일내에 발견하길 바라며.

                                                  애정을 담아, 파비안느 H. 크림웰.


  남자는 편지를 떨어뜨렸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려있던 작은 유리병도 바닥을 굴렀다. 석상처럼 굳어져있던 남자는 긴 한숨을 토해내고 병을 집어들었다. 병 속에는 바다속처럼 푸른 물약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눈을 감고 약을 두어모금 힘들게 삼킨 남자는 텅 빈 유리병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쾅. 유난히 큰 문소리가 방안을 울리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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