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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백사

2009.01.31 00:0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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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는 눈이 많은 마을이었다.

눈이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닷새 정도는 연이어 왔다. 쌍둥이는 매일 아침 경쟁하듯 일찍 일어나 서로 출입문을 밀어보겠다고 다투었다. 둘이 함께 힘껏 밀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 날이면 아이들은 괜히 소리를 지르며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고립은 두려운 만큼 흥분되는 일이었다.

아이들의 극성에 마지못해 일어난 아버지가 밤사이 식은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사이, 어머니는 네 가족의 아침을 준비했다. 겨울에는 땔나무도 보관용 식량도 늘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는 평소보다 늦어지기 마련이었다. 어차피 긴 하루가 될 것을 알기에 아무도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가족이 살고 있는 오두막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지만 이런 날은 무용지물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루 종일 흰 색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없기에 하루는 더디 갔다. 눈에 묻힌 집 안에서 쌍둥이는 바닥에 배를 깔고 새끼를 꼬았다. 누가 더 빠른지 경쟁하다 지치면 둘은 바닥에 깔린 낡은 곰 가죽에 얼굴을 비비다 아슴푸레 잠들었다. 집 안은 어두워 잠들기 좋았다. 어머니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뜨개질을 했고 아버지는 두 딸이 꼰 새끼로 설피를 삼았다. 눈이 녹고 문이 열리게 되면 가장 먼저 필요할 물건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두 아이의 낮잠을 깨우지 않았다. 긴 하루를 보내는 좋은 방법이었다. 깨우지 않아도 아이들은 늘 비슷한 시간에 꼬물거리며 일어났다. 재빨리 문으로 뛰어가 밀어보고는, 다시 창가로 가서 유리창에 나란히 코를 붙이곤 했다. 어둠이 내려와도 창은 여전히 흰색이었다. 그저 어두워 질 뿐이었다. 단절의 단면이 어두운 흰색, 조금 더 어두운 흰색에서 아주 어두운 흰색으로 변하는 것을, 두 소녀는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흰 색에 어둠이 스밀 무렵, 더러 창에 그림자 같은 것이 비칠 때가 있었다. 해가 구름에 가리운 것처럼 창밖을 가득 메운 이차원의 백색에 그늘이 끼었다가 다시 서서히 밝아지는 것이었다.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지나갔다, 하고 외치면 다른 한 쪽도 맞아, 지나갔어, 하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하얀 것을 오래 봐서 눈이 피곤한 것이라며, 눈이 멀 수도 있으니 너무 오래 쳐다보지 말라고 말했다. 말을 받아주지 않는 어머니 대신, 아이들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지나갔어! 방금 지나갔어!]

아버지는 일손을 놓고 흥분한 두 딸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그래. 백사님이 지나가시는구나.]
[백사님!]

아이들은 와악, 하며 아버지의 무릎을 붙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우리 집 앞을 지나간 거지?]
[아빠, 이제 다 지나갔겠지? 다 갔겠지?]
[아니. 백사님은 아주 길거든. 저어기 꼬리 지나간다.]

어린 딸들이 다시 소란을 피우며 서로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었다. 눈 오는 날 포수에게 쫓기다 급한 김에 눈 무더기에 머리만 파묻은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다 갔어?]
[그래. 이제 다 가셨다. 오랜만에 눈길이 생겼으니 이웃 산에 마실 다녀오시나 보다.]
[그런데 왜 백사님은 눈 속으로만 다녀?]
[길로 다니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잖아. 백사님이 너무 커서.]
[백사님은 왜 커?]
[오래 살았으니까.]
[몇 살인데?]
[천 살.]

무섬증이 가신 듯, 한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뭐야. 작년에도 천 살이었잖아. 올해는 천 한살이어야지.]
[맞아. 백사님도 엊그제 한 살 먹었으니까.]

제 자매의 동의에 의기양양해 하던 아이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백사님이 지나가다가 쾅 부딪히면 우리 집 무너지지 않아?]
[그럼, 무너지지.]
[눈에 눈 들어가면 잘 안 보이는데. 눈 속에 막 가다가 눈에 눈 들어가서 우리 집에 부딪히면 어떡해?]

눈싸움하다가 눈에 눈이 들어갔던 것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백사님은 눈 속에서도 잘 보니까 괜찮아.]
[그래도. 실수할 수도 있잖아.]
[백사님은 실수 안 해.]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착한 애들이 있는 집에는 안 부딪혀.]

에이 거짓말, 하면서 키득거리면서도 신경은 쓰였던 모양이었다. 다시 한 아이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아빠, 나쁜 짓 하면 백사님이 와서 부딪혀?]
[응. 쾅하고 부딪힌 다음에 잡아먹어 버리지.]
[백사님이 그렇게 세?]
[그럼.]
[아빠보다 세?]
[당연하지. 백사님은 천 살이나 먹었는데.]
[그럼, 백사님이 세상에서 제일 세?]
[그럼. 제일 세지.]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던 쌍둥이 중 한 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랑이보다도?]

설리는 호환이 많은 마을이었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춘기 전의 여자아이만이 낼 수 있는 깨진 유리 세공품 같은 소리였다. 흐느낌도 신음도 울부짖음도 섞이지 않은 선명한 비명. 날카롭고 섬세한 고음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가 천장에, 벽에,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동굴에는 오래도록 빛이 없었다. 벌써 수십 년 전에 폐쇄된 동굴이었다. 수년에 한 번, 담당자가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동굴 입구를 기웃거리는 일은 있었지만 그 이외에 주위를 얼씬거리는 이는 없었다. 입구에 쳐져 있는 낡은 금줄을 조심스레 걷어내고, 덩치 좋은 남자 하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 동굴로 들어선 것은 새벽의 일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대는 피투성이의 소녀 하나를 동굴 깊숙한 구석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나갔다. 아무도 없던 동굴에 소녀가 홀로 남겨졌다.

소녀의 알몸을 싼 흰 천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한 쪽 발목에는 뼈가 드러나 있었고 왼 손은 아예 잘려나가 없었다. 작은 몸에서 흘러나간 피가 천천히 동굴 구석에 웅덩이를 이루었지만 소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한 쪽 안구가 파내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남아있는 한 쪽 눈에도 비치는 것은 없었다. 동굴에는 빛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소녀는 혼자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다. 소녀는 다만 온 몸을 경련하면서 메마른 비명을 지르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눈앞에 빛이 나타났을 때, 소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흐릿한 시야에 불빛은 뚜렷했다. 어둠이 걷히고 동굴의 참혹한 풍경이 드러났다. 자신의 잘려나간 팔목이나 피투성이 알몸, 동굴의 미끈거리는 바닥을 천천히 핥아가는 핏물보다도 소녀를 당혹시킨 것은 그 곳에 빛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보고 있을 때 소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다. 소녀는 정신을 잃으면서도 계속 비명을 지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쌍둥이 자매가 죽은 그 날 이후, 소녀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쌍둥이는 무릎까지 오는 속을 걷고 있었다. 눈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소녀는 서둘러 집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소녀의 자매가 씩씩대며 걷고 있는 쪽은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발을 쾅쾅 굴러 걸으려는 것 같았지만 눈이 두터이 쌓여서 푹푹 빠질 뿐 소리는 나지 않았다. 자매가 숨을 몰아쉬며 눈을 한 번 걷어찼다. 보송보송한 눈이 반짝거리며 흩어졌다. 소녀는 그 모습을 주의 깊게 본 후 따라했다. 앞서가던 소녀가 뒤로 확 돌았다.

[따라하지 마!]

어른들은 쌍둥이가 사이가 좋다며 칭찬했다. 실제로 둘은 사이좋은 자매였다. 꽤 오랫동안 둘은 늘 함께였다. 늘 같은 것을 먹었고 같은 놀이를 했다. 같은 책을 읽었고 같은 생각을 했다. 자매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웃으면 즐거웠다. 자매가 와락 화를 내면 함께 화를 내면 되었고, 한참 서로 화를 낸 후 자매가 분에 못 이겨 울어버리면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소녀의 자매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도 함께 화를 내기로 했다.

[너야말로 따라하지 마!]
[내가 언제 널 따라했다는 거야! 네가 따라했잖아!]
[내가 언제!]
[지금도 따라하고 있잖아, 지금도! 왜 따라오는 거야!]

울음을 터뜨리려는 걸까. 붉게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는 자매를 보며, 소녀는 생각했다. 지금 나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분노와 억울함과 원망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 요즘 들어 자매가 보이는 얼굴은 나날이 복잡하고 다양해지고 있었다. 소녀도 막연히는 느끼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었다.

[맨날 따라하잖아. 오늘 학당에서도 내가 그린 거 따라했잖아!]
[따라한 거 아냐!]

소녀는 간신히 한 마디 하면서 생각했다. 예전에는 이런 일로 화내는 일은 없었는데.

[좋아하는 동물 가지고 글짓기할 때도 내 꺼 베꼈잖아!]
[안 베꼈어! 내가 쓴 거야!]
[엊그제도, 솜다리꽃이 좋다고 내가 얘기하니까 바로 따라하고!]
[나도 좋아한단 말이야!]
[거짓말하지 마! 그럼 오늘 왜 리슈오(麗朔)를 좋아한다고 얘기한거야!]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소녀는, 눈물 그렁한 자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슬픔이 분노를 덮어간다. 눈물이 도로록 하얀 뺨을 굴러 새초롬한 턱에 맺히고, 아쉬운 듯 여운을 남기며 툭, 툭, 옷 위로, 더러는 눈 위로 떨어진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울 수도 있구나. 화내다가 분에 못 이겨 함께 운적은 몇 번이고 있지만 자매의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흩뿌리는 눈발 속에서 자매가 울먹였다.

[엊그제는, 엊그제는 나한테 그런 애가 제일 싫다고 했으면서… 왜 애들한테 좋아한다고 한거야!]
[난… 그냥….]

아이에서 아이 이외의 것이 되어가려 하는 미묘한 단계의 가슴 아림을 어떻게 얼굴로 나타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소녀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울어야 저렇게 처연한 얼굴이 될지 알 수가 없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기가 돌았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왜 네가 끼어드는 거야. 왜 그런 것까지 따라하는 거야.]
[난….]

등을 차가운 것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감으로 느낀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채로, 소녀는 숨을 멈춘 채 천천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똑같이 생겨서 싫은데! 왜 나랑 같이 태어난 거야!]

자신의 감정에 취해있던 자매 역시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늘이 낮고 눈발이 거세 시야는 짧았고 바람소리와 두텁게 쌓인 눈은 청각을 무력화했다. 설사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지만. 쌍둥이가 서 있는 곳은 이미 마을을 한참 벗어나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리에는 큰 눈이 내리면 마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고, 모두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큰 눈으로 인해 고립되고 배를 주리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닌 것이다.
설리는 눈과 호환이 많은 마을이었다.



이 년만의 재앙이었다. 숲길에서 변을 당한 것은 잣나무집의 어린 일란성 쌍둥이였다. 마을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다만, 그 공기 속에는 침통하다는 말만으로는 정의될 수 없는 미묘한 요소가 섞여 있었고, 이들은 다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환되어 마을을 떠돌았다. 누구나 모이면 어린 아이들과 그 부모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눈을 내리깔았지만, 곧 목소리를 낮추어 ‘그런데’로 시작되는 변주를 시작했다.

변을 당한 쌍둥이 여자아이가 잣나무집의 친 자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부분은 최근에 마을에서 금맥이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로 찾아온 외지인들이었다. 토착민들의 대부분은 오래도록 자식이 없던 선량한 부부가 쌍둥이를 십 년 넘게 얼마나 소중히 키웠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 위로에는 대부분 무거운 질책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다만 그들 사이에서도 은밀한 소문은 떠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산촌이 그렇듯 설리는 수십 호의 작은 마을이었고, 서로의 사정을 한 가족처럼 잘 알고 있었다. 십여 년 전 갓난아기였던 쌍둥이가 잣나무집 대문 앞에서 발견되었을 때 쌍둥이의 친모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가임 연령으로서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안 되는 마을 여성들의 이름이 수군거림 속에서 여럿 거론되었으나 그럴듯한 가설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10개월이나 불러오는 배를 감추고 두문불출해 있었다면 설리같은 작은 마을에서 눈에 띄지 않았을 리 없다. 쌍둥이의 생모가 마을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잣나무집의 사정을 알고 그 집 앞에 아기들을 두고 갔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없어보였다.

이미 10년 전에 미궁에 빠졌던 사건이, 지금 쌍둥이에게 닥친 재앙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었다. 무책임한 누군가가 소곤거렸던 것이다. 아이 엄마가 지금 마을에 있다면, 분명 죄의식을 느끼며 크게 슬퍼하고 있을 것이라고. 덕분에 평소 쌍둥이를 귀여워하던 아가씨들과 부인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지독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흥미 본위의 화제는 이번 재앙 최악의 변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성적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눈물을 찍어내면서도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잖아요. 하나라도 살았으니.]

한 명은 잡아먹혔다. 한 명은 살아남았다. 단순한 사실이었지만 누구나가 미간에 주름을 세울 만 한 이야기였다. 쌍둥이 중 살아남은 쪽을 제일 먼저 목격했다는 대장장이 타이시는 입이 무거운 남자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남긴 단 한 번의 증언에는 더없는 힘이 실리고 있었다. 피가 점점이 튄 겉옷을 입고 마을로 자박자박 걸어들어 오는 여자아이를 보고 놀라서 달려갔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고 했다.

‘헤이(黑)가 호랑이한테 잡아먹혔어’ 라고.

어떻게 봐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굶주린 범을 만난 두 여자아이 중 하나는 장사지낼 시신을 추리기도 힘들만큼 처참한 잔해로 남았는데, 다른 여자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돌아와, 담담하게 자매의 죽음에 대한 증언까지 남겼다. 소녀가 남겼다는 말은 특히 비현실의 극치였기에 평소 타이시의 사람됨을 믿는 마을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녀가 기절해서 쌍둥이 자매의 옆에 쓰러져 있었는데 배가 부른 범이 그냥 두고 간 것이었을 거라며 애써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이들 부모가 불쌍해서 하늘이 도운 거라고들 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지만, 사실 소녀 자신도 진실의 절반밖에 알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얼굴이 빨개질 만큼 화내고는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던 자매가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모습을, 소녀는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눈밭에 쓰러진 자매가 소리를 낸 것은 첫 순간 뿐이었고, 그나마 말이나 비명이 되지 못했다. 눈이 이미 높이 쌓였기에 소녀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보송하게 쌓였던 함박눈이 순식간에 끈적한 암적색으로 물들어가고, 피 이외의 것이 사방으로 튀어 눈을 점점이 녹여냈다. 한 때 사람이었던 것이 살점과 체액으로 변하면서 존재를 잃는다.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자매가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온 몸으로 포식을 즐기던 호랑이가 흘깃 머리를 들었다. 하얀 털 사이로 드문드문 검은 줄무늬가 보였다. 소녀는 자신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살의에 넘치는 눈도, 먹이에 대한 잔인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눈도 아니었다. 그냥 동물의 눈이었다. 더러운 적색으로 물든 입가에는 표정이 없었다. 맹수와 대치하고 있는 소녀의 눈 또한 한없이 무심에 가까워졌다.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더 이상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자매는 죽었다. 그래서 소녀도 기다렸다.

짐승이 눈을 피하고 발길을 돌려 숲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소녀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어째서.]

그것은 마을사람들 이상으로 소녀 자신이 수백 번 수천 번 되풀이해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서둘러 죽은 아이의 장사를 지내고, 아이의 한을 풀어주는 호랑이 사냥을 형식적으로 마친 후 마을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지 못한 것은 남겨진 아이와 그 부모뿐이었다. 유난히 딸들을 아끼던 아버지는 총을 한 자루 들고 미친 듯이 산 속을 헤맸다.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수습해서 가져다 준 갈기갈기 찢긴 스웨터를 껴안고 멍하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새로 완성해서 두 딸에게 입혀주었던, 순록 무늬가 들어간 스웨터였다.

살아남은 소녀는 아직도 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이미 열흘이 넘게 지났지만 소녀는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몸도 씻지 않아 냄새가 났다. 손등은 터서 갈라지고 얼굴은 하얗게 버짐이 피었다. 소녀는 열흘간 망설이고 있었다. 언제 자야 하는지, 언제 일어나야 하는지, 언제 손을 씻고 이를 닦고 밥을 먹어야 하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자매는 이미 없으므로 기억을 되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소녀는 죽은 자매의 그림자를 불러내어 따르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은 소녀를 피하고 있었다. 더러 넋이 나가버린 어머니를 돌보러 주위 아주머니들이 와서 식사를 돌봐주고, 기운 내라며 말을 몇 마디 건네주고 갔지만 늘 소녀에게서는 눈길을 피했다.

그들이 방문한 것은, 소녀가 가까스로 아침에 일어나서 손과 얼굴을 씻게 되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방한을 최우선으로 지었기에 집에는 작은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어두운 집 한 쪽 구석에 소리도 없이 앉아있던 어머니가 눈을 들어 입구 쪽을 향했다. 초점 없는 눈이었다. 소녀가 문을 열었다.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섯 명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눈에 익은 사람도 한 명 있다. 설리의 촌장이다. 어쩐지 불안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흰 옷 차림의 사람 중 최연장자로 보이는 이가 집 안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저는 키클리 칼튼이라고 합니다. 중앙성전의 특무분과에서 나왔습니다. 고 헤이스 유안 양의 어머님 되십니까.]

어머니가 흠칫, 자리에 앉은 채로 뒤로 물러섰다. 늘 곱게 빗어 단정하게 올렸던 머리가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다.

[따님의 일로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이럴 때 찾아뵙는 것이 얼마나 경우 없는 짓인지 익히 알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점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하면서, 사제의 눈이 슬쩍 소녀를 스쳐지나갔다. 어머니도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혹은 중앙성전이라는 말에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초점 없이 풀려 있던 눈에 순간 정기가 돌아왔다. 여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힘들게 가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내밀어 딸아이를 부른다. 소녀는 얼른 달려가 그 손을 잡았다. 다른 한 쪽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어머니는 갈라진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잃은 아이는 이미 마음에 묻었죠. 이제 남은 아이를 잃은 아이 분만큼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제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키클리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제가 헛기침을 했다.

[사실은, 아이의 생모를 찾았습니다.]
[아이는 돌려줄 수 없어요!]

여인이 비명처럼 외쳤다.

[어머님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까지 데려가면, 저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 아무리 성전이라도, 이 아이만은!]
[그 아이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게… 지금, 무슨.]

사제가 뒤쪽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뒤편에 서 있던 사제 한 명이 나가 문 바깥에서 누군가를 데리고왔다. 수수한 회색 일색의 차림을 한 삼십대 초반의 여자였다. 비틀거리며 들어온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십 삼년 전까지 설리의 성전에서 봉사하던 자매입니다.]

그 말이 신호라도 되듯, 여자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한눈에 심하게 떨고 있었다.

[제가, 제가… 버렸어요. 아기를. 댁 앞에… 그, 눈 오던 밤에.]

여사제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었다. 어머니가 흠칫 놀라는 것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새하얀 얼굴과 새까만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 한눈에 쌍둥이와 똑같은 얼굴인 것을 알아본 것이다. 소녀는 무의식중에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성전의 다른 자매들 도움으로, 아이는 낳았지만… 저는, 일개 하급사제라,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댁에 맡기면, 분명 잘 키워주실 것이라고 믿고….]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나타난 거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남은 아이 엄마 노릇이라도….]
[제 아기는 한명이었어요.]

후들후들 떨면서, 계속해서 흐느끼면서도, 여자는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그 밤, 댁 앞에 두고 간 아기는 한 명이었어요. 쌍둥이가 아니었어요.]

어머니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자신의 비명인 것을 깨달은 소녀는 안심했다. 힘들게 오른손을 들어 오른쪽 눈을 더듬는다. 저항 없이 눈구멍으로 손가락이 들어간다. 몇 시간 전 안구가 도려내졌었다. 아니, 어쩌면 벌써 며칠 전인지도 모른다. 시간개념을 잃은 지 오래였다.

손을 내리다가 깨달았다. 어렴풋이, 피범벅인 자신의 손이 보인다. 오른손에도 손가락이 하나 없다. 더 이상 이 곳은 암흑이 아니다. 소녀는 다시 한번 긴 비명을 내질렀다.

“아파?”

누군가가 물었다. 소녀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말해야 했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전해야 했다. 이렇게나 많이 다치고, 이렇게나 피를 많이 흘려 이제 정말 위험하다고 알려주어야 했다.

“아파서 내는 소리처럼은 들리지 않는데.”

소녀는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은 이럴 때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울음을 뱉어야 전해질까. 죽어가던 자매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소녀는 헐떡였다.

“최소한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피를 흘리면 빈사상태에 빠져서 의식이 없겠지. 아니면 벌써 죽었든지.”

소녀는 한 쪽만 남은 눈을 힘들게 떴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소녀는 그 날 밤 성전의 마차로 마을을 떠났다.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 중 누구도 인사하러 오지 않았다. 어느 집이건 문도 창문도 꽁꽁 걸어 잠겨 있었다. 소녀는 아버지와 큰 이웃마을에 장을 보러 갈 때 이외에는 마을을 나와 본 적이 없었다. 이전 기억을 뒤지던 소녀는, 어릴 적 장에 가던 중 아버지가 ‘두 번 다시 집에는 못 가. 엄마도 못 만나. 아빠랑만 사는 거야.’ 하고 쌍둥이를 놀리자 자신의 자매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던 것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소녀는 소리 높여 울었다.

[이런 이런.]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옆자리의 남자도 쯧, 하고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자매와 함께 울음을 터뜨렸을 때는 아버지가 달래주었었다. 계속 울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있을 때, 하얀 손수건이 디밀어졌다.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그 여자였다. 파리한 얼굴의 여자는 더듬거리면서 서툴게 말했다.

[울지 마. 잠깐이야. 잠깐만, 며칠만 참으면, 집에 돌려보내 줄 거야. 알았지?]

하지만 더욱 목소리를 높여서 울면서도, 소녀는 전혀 울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돌아갈 수 있다고?

그리운 나무 오두막. 따뜻하던 불가. 마주보고 웃고, 자매의 말에 맞장구치고, 함께 엄마에게 간식을 조르고. 둘이 함께면 무엇을 해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 곳에 더 이상 같은 얼굴을 한 자매는 없다. 모든 것이 변했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지만, 소녀에게 있어 하나만은 분명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반쪽이 죽고 자신은 살아남은 그 순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잘못된 것이 있다면 분명 그 순간에 있었다는 것. 소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어머니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여행에는 며칠이 걸렸다. 밤이 되면 마차가 섰고 아침이 되면 다시 출발했다. 어느 날은 건물에서 묵었고 어느 날은 마차 안에서 선잠을 잤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만두었다. 다만 소녀는 필사적으로 생각하려 하고 있었다. 여기에 부모님은 없다. 아는 얼굴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자매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부모님이 없다고 울었을까? 처음 보는 풍경에 신기해하며 까르르 웃었을까? 소녀는 자매의 그 모든 얼굴을 기억했지만 이럴 때 어떤 얼굴을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들은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회색 옷의 여자만 드물게 말을 걸었다. '춥지 않니' 나 '배고프지 않니' 같은 질문들이었다. 소녀는 어느 것에든 고개를 저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차가 거대한 문을 통과한 것은 밤이었다. 마차에서 내렸지만 어두워서 주위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자가 소녀를 데리고 갔다. 졸립지 않니, 소녀가 처음 보는 커다란 건물의 복도를 지나며 여자가 물었지만 소녀는 또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문을 열었다. 새하얀 방에 침대와 책상이 하나씩 있었다.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렴.]
[안녕히 주무세요.]

문을 닫기 전, 여자는 한동안 굳은 듯 서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녀는 작은 테이블에 한 쪽 팔을 묶였다.

[소름끼치는 눈인데요.]
[하루 정도 울더니 저런 얼굴로 변하더군.]
[그나마 다행이군요. 어린애 모습을 하고 있다기에 걱정했습니다.]

방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을 이 곳까지 데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대부분 몸에 붙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어째서 다들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걸까 생각하며,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 손이 묶인 상태여서 불편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는 겁니까.]

하룻밤 사이에 여자는 한층 더 초췌해져 있었다. 턱수염을 두 치쯤 기른 남자가 냉담하게 말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게.]
[모릅니다. 모르지만, 이건.]

입술까지 푸르게 질린 여자가 자꾸 고개를 저었다.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꼭 알아야 합니까? 그만큼… 의미가 있는 겁니까?]
[지금 누구 안전에서 세 치 혀를 놀리느냐!]

옆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젊은 남자를 제지하며, 턱수염 난 남자가 말했다.

[알아야 의미가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있겠지. 그를 위하여 우리가 이 곳에 모인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저입니까. 어째서 제가, 제 손으로….]
[이유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여자가 무너져 내렸다. 옆에 서 있던 건장한 체구의 남자 둘이 여자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오열하는 여자의 머리 위로 남자의 건조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너에게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 뿐. 네가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할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문 여자가 두 손으로 테이블을 움켜쥐었다. 여자의 떨림이 테이블을 타고 소녀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작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금방 끝나니까….]

금방이라도 나이프를 떨어뜨릴 것만 같은 손만큼이나, 이를 악문 여자의 목소리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잠깐이니까, 금방 끝나니까. 아무 일 없을 거니까.]

나이프가 아이의 작은 손가락에 닿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작지만 예리한 나이프는 그보다 한참 작은 소녀의 새끼손가락 끝을 조금 잘라냈다. 말랑거리는 살이 사과껍질 두께로 벗겨져 나갔다. 금세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히고 주르륵 흘러내려 테이블을 적신다. 소녀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도 잊고, 자신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그 극적인 변화에 매혹되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 새 눈을 뜬 여자가 백짓장처럼 질린 얼굴로 숨 가쁘게 물었다.

[아프지 않니? 많이 아프지? 금방 낫게 해 줄 테니까….]

소녀는 고개를 저었고, 다음 순간 굳어지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지나간다. 그래.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도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계속해라.]

남자의 목소리에, 후들거리는 나이프가 다시 한 번 작은 손가락을 향해 다가왔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새끼손가락, 작고 뭉툭한 손톱의 바로 위까지 살점이 잘려나간다. 자신이 상처 입는 듯 여자가 괴로운 얼굴을 한다. 흐르는 피의 양이 늘어난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여자가 다시 물었다.

[아프지 않니?]

소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틈에서 호오, 하는 감탄사가 들렸다. 여자는 나이프를 집어던졌다.

[이 아이는 겁에 질렸을 뿐입니다. 무서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너무 가혹합니다. 너무해요. 이렇게 어린 아이한테.]
[착각하지 마라. 그것 때문에 네 딸이 죽었다.]

여자가 입을 닫았다. 거친 호흡과 함께 들먹이던 어깨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여자가 고요히 움직였다. 나이프를 주워드는 손은 더 이상 떨고 있지 않았다. 여자는 왼손으로 소녀의 새끼손가락을 고정한 채, 오른손에 쥔 나이프를 힘주어 눌렀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시선을 피했다. 까득, 작은 마찰음이 났다. 손가락 한 마디가 잘려나갔다.

여자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괜찮니’라고 물었다면 고개를 저었을지도 몰랐다. 작은 가슴이 거칠게 상하운동을 하고, 손목이 심하게 경련했다. 멈춰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래도 아니라고 할 텐가.]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속삭였다.

[역시… 이렇게 되면 누가 뭐래도 사람은 아니군요.]

소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중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 단순히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에이 키클리님도. 대답은 나와 있다는 걸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소리로만 존재하던 어른들의 대화가 소녀의 머리 속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소녀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뚝뚝뚝뚝. 경련하는 손가락에서 무서운 기세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피는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불규칙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소녀는 비로소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

다쳤다. 피가 이렇게 많이 날 정도로.
그런데 어째서 아프지 않은 걸까.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것을 내지르며 칼을 내리찍는 여자의 얼굴 위로, 짐승에게 목과 어깨를 물린 채 눈 위로 쓰러지던 자매의 얼굴이 겹쳐졌다. 소녀는 숨을 멈추었다. 눈이 크게 뜨이고 작은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여자의 칼은 소녀의 새끼손가락을 완전히 잘라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소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얼굴로, 소녀는 고통이 아닌 공포에 전율하고 있었다. 자매는 죽었다. 소녀는 여기 있었다. 피가 흘러 바닥을 적셔도, 손가락이 하나 없어져도, 소녀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대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밀도 높은 정적을 뚫고 남자 하나가 움직였다. 넋이 나간 듯 한 여자에게서 나이프를 빼앗아 소녀의 팔목을 고정한 밧줄을 끊었다. 남자는 피가 주르륵 흐르는 가느다란 팔목을 그대로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소녀는 뒤늦은 현기증을 느꼈다.

잘려진 새끼손가락이 죽순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과연, 태백(太白)의 백사(白蛇).]

누군가가 신음처럼 중얼거렸을 때, 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처절한 소리였다. 그것이 본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소녀는 열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끝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붉은 불빛에 검은 그림자로 흔들리는 상대의 실루엣은 희미하다. 한 쪽 남은 눈마저 피가 많이 들어가서 시야가 흐렸다. 오른손 검지로 눈을 훔치고, 눈꺼풀을 움직여가며 시각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던 소녀가 순간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멈칫했다. 소녀는 손을 오른쪽으로 옮겨, 주먹을 쥔 채 빈 눈구멍을 꾸욱 눌렀다.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은 왜 누르고 있는 거야?”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집어 삼켰다.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었다. 스스로 인정하게 되면 더 이상 억누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고집 세네.”

파내어진 오른 눈이 다시 생기게 되면, 그 때는 정말 자신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피는 계속 흘러야 했다. 상처 입은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가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해 줄 것이다.

“그러다 죽어.”

원하는 바였다.

“하긴, 자살하는 뱀은 없으니까.”
“뱀 아니야!”

목소리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자살하는 건 사람 뿐이라는 말을 하려고 한 거야.”
“자살….”
“살 수 있는데 살려고 하지 않는 것도 자살 아닌가?”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소녀는 잠자코 있었다. 상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고쳐. 그리고 여기서 나가.”  



첫 날 소녀는 혼절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방에 돌아와 있었다.

이틀 후 다시 방에서 끌어내졌다. 소녀는 저항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사지를 묶였다. 눈이 가려졌다. 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신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느낄 수는 있었다. 지독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공포에 저항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그래도 어김없이 손가락은 잘려나갔다. 검은 옷의 사제들은 잘려나간 손가락이 다시 자라나는 시간을 재고 기록했다. 하루 동안 무리한 양의 실험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녀를 인간 이외의 것으로 규정한 이상 그들의 행위에는 거침이 없었다. 손가락을, 손목을, 때로는 한 곳 이상을 동시에 절단한 후 그 변화를 관찰했다.

헤이스를, 그리고 자신을 닮은 흑발의 여자는 자주 눈에 띄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물론, 곧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해 주지 않았다. 소녀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이런 자신을 알게 할 수는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방으로 날라져 오던 식사 양은 날마다 줄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소녀는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혐오감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소녀는 울며 비명을 지르는 데에 익숙해졌다. 울면서 발버둥치다 보면 정말로 아픈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더욱 비명을 질렀고 더욱 악을 썼다. 아무리 울어도 상처는 아물고 계속 재생되었다. 소녀가 아무리 악을 써도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의 비명은 내면을 향하기 시작했다. 낫지 마. 생기지 마. 자라나지 마.

[좀 이상한데요.]

소녀의 상태를 살피던 젊은 사제가 고개를 꼬았다.  

[재생 속도가 이상하게 늦습니다. 손도 그렇고, 발목 쪽도 아직 완전히 안 붙었어요. 오늘은 이 정도만 해 두시죠.]
[제일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지 않나. 마무리 짓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다만, 처음 시도하는 부위라 위험 부담이 좀….]

차가운 손이 눈을 가린 천을 풀러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며칠이고 반복된 패턴이었다. 한 쪽 눈이 강제로 벌려졌다. 눈꺼풀을 닫으려는 강력한 본능이 외력에 힘겹게 저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이프 끝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은 끔찍한 공포를 불러왔다. 공포와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졌지만, 소녀는 안구가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비명을 지르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안구와 왼쪽 팔목,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비상회의 후 소녀는 버려졌다. 요물이 살고 있다고 알려진 동굴이었다.




“난… 그런 거 아닌데.”

목소리가 들린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탁하고 어눌한 말투의, 몹시도 귀에 익은 여자아이의 목소리.

“그냥 있었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소녀는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임을 문득 깨닫는다. 귀가 멍해진다. 목이 메어 온다.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말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말이 되지 못한 생각들은 켜켜이 자신의 속에 쌓여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헤이스(黑色)가 없어져도 말은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째서 아프지 않은 것인지, 어째서 잘라지고 도려내진 몸이 도로 생기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 죽을 만큼 두렵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의 전부였던 마을은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손을 놓았고 아버지는 외면했다. 자신의 반쪽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누구도 자신을 사람이라 말해주지 않는 지금, 자신을 증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녀가 허공을 향해 울먹였다.

“나, 사람이 아닌 걸까?”

짧은 침묵 끝에 목소리가 되물었다.

“그걸 네가 묻는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
“어째서?”
“아프지 않다고, 울지도 않는다고… 잘라도 자꾸 다시 낫는다고. 내가 울어도,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다 그냥 흉내 내는 거래. 진짜가 아니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아프지 않으면, 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닌 건가?”

소녀는 입을 열었지만 할 말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망설이는 사이, 상대가 말을 이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어. 다리가 없는 사람도 있고 눈이 먼 사람도 있어. 한 번 읽은 경전을 전부 줄줄 외우는 사람도 있고, 평생 다섯 살 어린애 정신상태 그대로 사는 사람도 있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람인 걸까?”

깨이지 않는 머리로 이해하려 애쓰며, 소녀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물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녀석이 있고, 어둠 속에서도 한 낮처럼 볼 수 있는 녀석이 있어. 그럼 그 둘은 사람인 걸까? 아니면, 사람이 아닌 걸까?”

잠깐 말을 끊었던 상대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니면, 긴지 아닌지 모르니까 일단 토막부터 치고 봐야 하는 걸까?”

소녀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어떤 얼굴로 웃고 있는 걸까. 상대는 저만치 떨어진 동굴 벽에 기대 앉아있다. 다리 옆에 내려놓은 호롱불 때문에 얼굴에는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소녀는 어깨를 조금 끌어당겨 상체를 움직였다.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면서 목소리가 형상을 갖춘다. 소년. 자신보다는 서너 살 위로 보인다.

“내가 아는 녀석들 중에는 평소에 멀쩡히 말도 하고 아프면 소리도 지르는데, 위에서 죽이라고 시키면 자기 부모도 친구도 아무 느낌 없이 죽여 버릴 녀석도 있어. 이건 사람인 걸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선의 조우에 소녀는 당혹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소년은 분명 이 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천 속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꿈틀거렸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통각이나 자연치유속도나 비명이나 울음 같은 게 사람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에는 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통각은 마비되면 그만이고, 상처 낫는 건 개인차지. 목이 망가지면 비명도 못 지르고 울음소리도 못 내. 그 정도 애매한 기준으로 사람을 논한다고? 꽥꽥 울면 오리고 꼬꼬댁 울면 닭이고 엉엉 울면 사람이냐? 자기들도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주제에 사람의 격을 너무 깎아내리는 거 아니냐고. 난 그 녀석들보다는 차라리 네 선택이 우아하다고 생각해.”
“내가?”
“응. 세상에서 자살하는 건 사람뿐이니까 확실한 증명이 될 테지.”

소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귀울음이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비단이 진품인지 확인하기 위해 결대로 찢어보는 건, 우아하고 확실하기는 하지만 영리한 방법은 아니잖아? 그런 것 말고도 증명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이명이 점점 더 커진다. 소년의 말투도 조금 빨라진다.

“자살 말고도 많아. 복수도, 희생도, 배신도, 참회도, 질투도, 원망도, 사랑도, 모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지. 저런 것들로 이루어진 삶의 시간을 인생人生이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사람의 삶이라서 인생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 낸 존재가 사람인 건 아닐까?”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라이 먼 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환청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엇인가 더 말하려던 소년이 입을 다물었다. 으아으아아, 악에 받쳐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후우, 소년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울퉁불퉁한 동굴 바닥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소녀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낮은 자세로 다가온 소년이 물었다.

“발목은 고쳤어?”
“그런 거…. 난 그냥.”
“눈은 나았는데?”

움찔한 소녀가 잃었던 오른쪽 눈을 깜박여보고 있는 사이에, 소년이 소녀를 천 째로 들어올렸다. 그악스러운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소녀는 들려오는 것이 울음소리만이 아님을 깨닫고 숨을 죽였다. 무엇인가가 동굴 안쪽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소년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양 손으로 소녀를 안았기 때문에 호롱불은 가져올 수 없었다. 동굴은 축축하고 미끄러웠으며 물웅덩이도 여럿 있었다. 불빛 없이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소년은 불빛이 간신히 닿는 커다란 바위 뒤에 소녀를 내려놓고 자신도 동굴 벽에 몸을 바싹 붙여 몸을 숨겼다. 귀청을 찢을 듯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동굴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이 속삭였다.

“봐. 사람처럼 운다고 해서 사람인 건 아니잖아.”

소녀가 숨을 삼켰다.  

“저건… 호랑이?”
“아니. 저건 고조(蠱雕)다. 먹이를 찾고 있는 거야.”  

거대한 요물은 방금 자신들이 놓고 온 호롱불을 맴돌고 있었다. 짐승이 움직일 때마다 호롱불이 요란하게 흔들리며 짐승의 하얀 털에 그림자를 비추었다. 길이는 열 자 남짓, 크기는 호랑이를 넘어섰지만 날렵한 다리나 전체적인 생김은 사냥개를 방불케 했다. 몸에는 점점이 핏자국 같은 무늬가 있다.

굵은 꼬리를 빳빳이 세운 짐승이 몸을 돌리자 그 곳에는 소녀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상이 있었다. 개나 늑대를 닮은 목에는 새의 머리가 붙어 있다. 커다란 부리와 붉은 눈을 가진 짐승은 날카로운 뿔이 달린 머리를 한차례 돌리더니 다시 소름끼치는 소리로 울어댔다. 으아으아으아아. 짐승이 내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섬ㅉㅣㅅ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소년은 태연하게 설명했다.

“고조는 원래 위험도가 그렇게 높은 요물은 아냐. 사람을 한 명 잡아먹으면 십 년을 잠든다고 하니까, 기껏해야 십 년에 한 명 정도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거지. 요물 치고는 고마울 정도로 얌전한 녀석이야.”
“그런데 왜?”
“둥지 내에서 피 냄새를 그렇게 풍겼으니 안 깨는 게 이상하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소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넌 살아.”

소녀가 초점 없는 눈으로 소년을 응시한다.

“꼭 그 치들 뜻대로 맞춰 줄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살아버려. 여기서 저게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잠들면 재빨리 동굴 제일 안쪽까지 들어가. 널 토막 치던 변태들도 겁이 많아서 거기까지는 못 들어올 거야. 고조가 잠든 걸 보면 네가 먹혔다고 생각할 테니 포기하겠지. 거기서, 가급적 오래오래 쉬다가 나가. 몸도 고치고.”

처음에는 상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조의 잠을 이야기하면서, 소년은 가장 중요한 전제 하나를 고의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소녀가 문득 빠진 조각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손을 뻗어 소년의 발목을 잡았다. 소년이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절박하게 이유를 묻고 있다.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온 건 아니었어. 네가 죽을 생각이라면 도와주러 왔었는데….”

그래. 그러려고 했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문제였다. 별 이유는 없다. 어차피 죽을 거니 필요도 없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살아야 할 테니까.

“네가 죽으려는 이유가 고작 그거였다면 죽을 필요 없어. 살아. 살아서,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해.”

소녀의 얼굴이 공포와 당혹, 충격으로 복잡하게 일그러진다. 소년은 지독하게 인간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 자생하는 요물을 관리하는 특무4반이 거물을 낚아 온 것 같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이리 저리 위험하지 않을 정도만 찔러보다가 자신들이 납득할 만 한 숫자와 이름을 붙여서 서류에 써 놓으면 관리는 저절로 된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다. 보나마나 요물의 등급을 먹인다는 명분 하에 높은 분들 모시고 거창한 이벤트를 열거라고 생각했는데, 날아온 것은 안내장이 아닌 지령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윗선에 보고도 올리지 않은 건인 모양이었다.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 누가 이기는지.]
[어차피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거니까 별 의미는 없을 걸.]

지령을 가지고 온 것은 특무4반의 사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소년은 피식 웃었다.

[고조가 이기면? 난 얌전히 먹혀주면 되는 건가?]

아직 얼굴에 여드름자국이 성성한 젊은 사제는 한쪽 눈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했다.

[고조가 이긴다는 건 백사가 가짜였단 얘기니까 그럴 일은 없지. 잠들 걸.]

그리고 자신은 그 말로 납득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 녀석들이다. 개수로 헤아리고 변수로 사용한다. 필요를 묻고 교환가치를 따진다.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천 년 묵은 요물이 온 몸을 던져 원하는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그 정도 무게밖에 갖지 못한다. 그것을 논하면서 저런 얼굴을 보인 녀석은 자신의 주위에는 한 명도 없었다. 자격이 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

대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달맞이꽃 빛깔 머리카락의 소년이 문득 달빛처럼 하얗게 웃는다. 그는 자신의 대답대로 행할 예정이었다.  

“태백의 백사.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사람은 살아있어야 사람이야. 난 필요 없으니 네가 가져.”

발목을 잡은 소녀의 손을 상냥하게 떼어놓고, 소년이 멀어진다. 춤추듯 가벼운 걸음으로 나아간다. 몸통은 그대로 둔 채 짐승이 고개를 백팔십 도로 돌린다. 붉게 튀어나온 조류의 눈이 목표물을 포착한다. 소년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짐승이 달려든다. 개과 동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움직임, 보이지 않는 날개로 공기를 타고 움직이는 듯 한 동작이다. 거대한 부리가 복부를 찢어발기기 직전, 소년이 문득 연기 같은 웃음을 머금는다.

이미 백여 년간 이 동굴을 거처로 삼아 온 고조는 기쁘다. 인간의 피와 살은 고조를 취하게 만든다. 스스로 사냥을 나가도 좋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늘 새로운 인간이 기다리고 있다. 필요한 것은 먹고 다시 취한 채 잠을 청하는 것뿐이다. 본디 요물과 인간의 시간은 같지 않으며 비례하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깨었다. 둥지가 온통 독한 냄새에 절어 있었다. 취기가 덜 가신 채로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왔더니 새 먹이가 있었다. 이 동굴의 고조는 아직 어린 편이다. 먹이를 보자마자 자신을 깨운 독한 냄새에 대한 것은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선 먹이를 향해 부리를 내리찍었다. 고조의 부리는 조금 잤다고 해서 무뎌지는 일은 없다. 연한 몸은 저항 없이 속을 드러냈다. 내장부터 먹어 치우는 것이 식사 순서였다.

그러나 고조는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어린 요물은 당혹했다.

“저리 가!”

소녀는 달려가면서도 발목이 나은 것을 깨닫지 못했다. 쓰러진 소년을 끌어안으면서도 두 손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알지 못했다. 소녀는 눈물이 그렁한 두 눈으로 의식을 잃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요물의 거대한 부리에 찢긴 참혹한 상처는 복부 전체를 헤집어 놓았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가 소녀의 몸을 뜨겁게 적신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간다. 소녀는 이를 악물고 요물을 노려보았다. 새 머리의 네발짐승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버려.”

주춤거리는 짐승을 향해 소녀가 악을 썼다.

“가버리라니까!”

순간 고조가 불에 데인 여우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인간의 비명소리 같은 것을 길게 지른 짐승은 꼬리를 내리고 날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아으아으아아.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는 동굴 저 편으로 점점 멀어졌다. 형형한 안광을 내뿜던 소녀의 눈이 점차 힘을 잃고, 대신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일어나.”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며 소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죽지 마아.”

목이 메고 가슴이 막힌다. 울고자 울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가슴 먹먹함이 괴로워서 소녀는 몸을 한껏 웅크렸다. 아팠다. 사지를 잘리고 눈이 파헤쳐질 때도 느끼지 못했던 지독한 통증이 가슴을 저며 내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이유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소녀는 울먹였다.

“거짓말쟁이.”

소년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종처럼 울린다. 종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쪼개질 듯 아프다. 결국은 모두 마찬가지다.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증명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의 손을 놓은 부모도, 따라한다며 성을 내던 자매도, 자신에게서 인간 이상을 발견하려고 한 검은 옷의 사제들도, 그리고… 살라고 말해 준 소년도.

“혼자, 치사하게, 혼자만 그렇게.”

자신의 선택을 관철시킨 소년의 얼굴은 평온하다. 스스로도 끝까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필요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 역시 본능적으로 증명하려 했을 뿐이다. 어째서 모르는 걸까. 이리도 빛나는데. 나에게는 보이는데. 소녀가 문득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그런 이름이 아니란 말이야.”

주먹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감싸고 있던 흰 천을 풀어내 소년의 상처를 덮었다. 알몸이 된 소녀가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한쪽 손목을 들어 눈물을 훔쳐낸다. 소녀의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이렇게 혼자 마음대로 끝내게… 놔두지 않아.”



공과 과, 허와 실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거대한 혼란이 중앙성전을 뒤덮었다.

최종 결재도 기다리지 않고 즉각 출동한 의무반의 기민한 대처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사태의 시급성을 파악하고 재빨리 의무반에 연락을 취한 특무4반의 이름 없는 견습사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애초에 이 사태를 빚어낸 주체가 특무4반이니만큼 그 공이 언급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특무4반의 상급사제 칼튼은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위험한 실험을 독단적으로 진행했으며, 상부의 허가 없이 성전 관리하의 요마를 사적으로 이용하려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부하도 아닌 특무7반 소속의 젊은 사제에게 당치도 않은 명령을 내려 사지로 내몰았다는 치명적인 과실이 있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명백한 월권행위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기실 특무4반, 별칭 요물관리반의 사제들에게도 할 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특무7반은 원래 그런 곳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특무7반이 무엇을 위한 집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성전 공인의 암살단이라는 의혹과 첩보조직이라는 소문, 특수능력자의 집단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얼핏 그 모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조직 구조는 물론이고 구성원 숫자조차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사실 관심을 갖는 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의뢰하면 일이 쉽게 풀린다는 점이었다. 각 조직의 중간관리자들은 업무 중 애로사항이 발생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특무7반에 보낼 협조의뢰공문을 작성하곤 했다. 합법과 위법의 경계는 언제나 그들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자신들을 대신해서 새로 발견한 요물의 진면목을 확인해 달라는 이번 의뢰는, 확실히 조금 위험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의뢰보다 특별히 더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어차피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 아니냐고, 잘못이 있다면 이 건을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단독으로 수행하려다 요물에게 맥없이 당해버린 7반의 애송이한테 있는 게 아니냐고, 모두들 소리 높여 말하고 싶었다. 다행히 특무4반의 사제들은 비교적 신중했으며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편이었다. 그들은 위험을 감지한 소라게처럼 눈과 귀를 막고 오도카니 둥지에 틀어박혔다.

여자는 침묵이 더께더께 내려앉은 회랑을 따라 걸었다. 눈보라가 치는 밤이었다. 큼지막한 눈발이 회랑 안쪽으로 휘말려 들어와 여자의 얼굴에 가볍게 부딪혔다. 여자는 눈을 깜박여 속눈썹에 엉긴 얼음 알갱이를 털어냈다. 세 번째 눈을 깜박였을 때, 여자는 중정(中庭)에 서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는 늙은 소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흑단 같은 긴 머리를 바람결에 휘날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나이에 비해서 하얀 팔다리는 길고 곧다.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홑옷은 눈에 녹아들 듯, 혹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떠오를 듯 보였다. 여자는 한 손에 나이프를 쥔 채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맑은 눈동자였다.

“아무리 토막 내도, 난 죽지 않아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여자는 생각했다. 이건 누구의 흉내일까.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딸아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 없다. 저런 눈일 리가 없다. 착하고 천진한 아이로 자랐을 것이다. 저 요물에게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백사. 천 년 묵은 뱀. 태백의 흉물. 여자의 중얼거림이 들린 듯, 소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괜찮아요. 나도 아직 증명할 수 없어요.”

아아아아.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거칠게 떨리는 칼 끝은, 그래도 소녀의 심장을 거침없이 꿰뚫었다. 소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여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다. 소녀가 자신의 가슴에 박힌 칼자루를 내려다본다. 흰 옷 위로 붉은 흔적이 칼자루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나간다. 소녀가 문득 고개를 든다.

“꼭 해야 한다면 하세요. 하지만 부탁이 있어요.”

뒷걸음질치던 여자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믿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래도, 부를 때는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해요.”

눈밭에 머리를 짓찧으며 여자가 통곡한다. 소녀는 그 울음의 의미를 알 수 없다.

“내 이름은 바이스(白色)예요.”

소녀가 고개를 돌려 시야에서 여자를 덜어낸다. 심장에 날을 박은 채, 소녀가 눈 위를 깡총거리며 뛴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밭에 작은 발자국이 총총 새겨진다. 핏방울이 샐비어 꽃잎처럼 사방으로 뿌려진다.

텅 빈 하늘에서 나풀나풀 떨어지는 커다란 눈송이는 배꽃처럼 아름답다.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이 없다. 모두 지상으로 쏟아졌으니까. 기도는 하늘을 향하지 않는다. 소망은 이 곳에 있으니까. 소복소복 쌓이는 별들을 밟으며 소녀는 기도 대신 춤을 춘다. 가볍게 뻗은 팔이 소나무 가지를 잡는다. 우수수, 묵직하게 쌓였던 눈이 쏟아져 내린다. 젖은 속눈썹을 재빨리 털어버린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녀가 싱그레 웃는다.  

“너한테도 알려줄게, 빨리 일어나.”

하얀 눈빛에 눈이 시리다. 바이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난넬님은?
난넬 혹은 넬. 악의 축인 금융업에 종사하는 직장인. 경기 침체와 구조 조정의 위협 속에서 주위 눈치를 살피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그러다 최근 연봉이 깎였다).
2년여 전 거울 37호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었던 것을 남몰래 자랑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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