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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바다의 노래

2008.06.27 20:5006.27

갈매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운다. 습기를 한가득 머금은 축축한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이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바람결에 바다의 노래가 들려온다. 특정한 가락도 가사도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

무엇 때문에 시작했는지, 얼마나 더 떠돌아야 할지, 도대체 무엇에 다다르기 위해 계속되는 건지, 그 무엇도 정확하지 않은 여행. 그러나 그 여행 중에 나는 내 운명을 만났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그리고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 그리 오래 전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생 처음 내가 바다를 접했던 그 날, 그 날은 내게 있어 여전히 생생하다.


*

내륙지방으로만 여행을 해 오던 나에게 있어 바다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밝은 회색의 돌들로 깔끔하게 포장된 길을 따라 항구에 다가가며 정말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갈매기 울음소리,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강하게 실려 오는 바다의 짠 내음, 그리고 세상의 한쪽을 집어삼킨 바다로부터 물결지어 밀려들어와 항구의 어딘가에 부딪혀 새하얀 소리와 함께 흩어지는 파도. 그렇게─ 난생 처음으로 만난 바다는 내 감각들을 지배했다.

하지만 내 심장을, 마치 터져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울려댔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높고 파랗던, 하얀 구름 몇 조각이 떠 있는 하늘을 찌를 것처럼 서 있는 돛대─ 그 순간 나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던 것도 같다. 여러 개의 돛들이 단단하게 매달려 있는 돛대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웅장하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선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범선, 그리고 나. 그 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조그맣게 느껴졌다. 제 자리에 붙어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자면 그때 나는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항구의 떠들썩함에서 나와 그 범선만이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뒤쪽에서부터 불어온 강한 바람이 내 귓가를 두들겼다. 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그 소리들 중 유난히 커다랗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인가에 이끌려 나는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 소리의 근원지는 막 항해를 시작하려 하는 배였다. 배는 돛을 내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한층 더 강해진 바람이 불고 하얀 돛이 활짝 펼쳐졌다. 그 옆의 배 두 척도 돛대에 매여 있던 돛을 공기 중에 해방시켰다. 질긴 천이 거센 바람을 마주해 펄럭였다. 연달아 나는 그 소음과도 같은 소리가 나를 파고들었다.

두근.

차례로 돛들이 내려지고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올랐다. 육중한 닻을 끌어올려 자유로워진 후 돛 가득히 바람을 받으면서─ 그 거대한 범선은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두 척의 범선이 그 뒤를 따라 항구를 벗어났다. 끝이 없어 보이는 바다를 향해, 새하얀 날개를 달고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아니, 어쩌면 아예 뛰기를 멈췄던 것도 같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렇게 나는 바다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날부로 배에 올랐다. 항구에서 물건을 실어 올리던 배에 무조건 찾아가 배에 태워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어디로 가는 배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뱃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덜컥 배에 태워달라고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배가 정당하지 않은 배였더라면 또 어쩔 셈이었을까. 그러나 그때 나는 병을 앓고 있었다. 바다가 불러일으킨, 바닷바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식을 수 없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 배의 선장에겐 뭐라고 이야기했던가. 바다에 나가보고 싶다─ 고만 했던 것 같다. 운이 좋았던지 그 스스로가 상단의 주인이라던 선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승선을 허락했고, 그렇게 나는 바다 생활을 시작했다. 뒤늦게 생각하자면 그 선장은 바다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병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갑판을 닦는 것에서부터 돛을 손질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훌쩍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바다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바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보물 상자였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종류였다.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깊어 차마 그 한계를 가늠해볼 수 없는, 손을 집어넣으면 넣는 데로 금은보화가 한 줌 가득 집히는 종류였다.

예를 들어, 바다는 매일같이 색을 바꿨다. 어떤 때는 한없이 푸르렀었고 어떤 때는 깊은 청록색이었다. 배가 지나간 자리엔 하얗게 거품 자국이 남았고 해가 뜨거나 질 즈음이면 수평선 저쪽에서부터 붉은 빛 또는 보랏빛으로 물들곤 했다. 그리고 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되어 넘실거렸다. 마치 세상 모든 색이 그 속에 잠겨 있다 마음 내킬 때마다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색 뿐만이 아니었다. 바다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바람을 머금은 돛의 모습에는 볼 때마다 감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양새는 가히 웅장하다 할만 했다. 그 첫 항해에서, 나는 파도 위로 살짝 솟구쳤다 다시 가라앉는 돌고래 떼마저 만났다. 어어이, 돌고래다! 하는 외침을 듣고 갑판 위를 내달려 그 공연을 관람했다. 회색빛 등이 솟구치나 싶더니 다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를 몇 차례 반복하고 그들은 다시 바다의 신비 속으로 숨어들었다. 심지어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망루에 올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에도, 그 하늘에마저 바다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유난히 하늘이 맑게 개였던 어느 날, 평소보다 더욱 바삐 움직이는 선원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날 밤중부터 몰아쳐온 폭풍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끔찍한 폭풍이었다. 배는 재질이 나무가 아닌 종이였기라도 하듯 무기력하게 흔들렸다. 배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다른 선원들의 발소리를 들려 왔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뱃멀미로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다스리기도 바빴다. 끝내 못 견디고 속을 게워낸 후에도 나는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육지에 닿을 수만 있다면, 닿는 대로 두 번 다신 항해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하지만 그 결심은 폭풍우가 잠잠해진 후 새로운 색으로 반짝이는 바다의 모습에 날아가 버렸다. 그까짓 폭풍을 이유로 떠나기에 바다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며 처음에 바다와 배에 느꼈던 그 설렘이 가라앉으려 했다. 뱃일은 분명 고되기 짝이 없었고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그대로였더라면, 아마도 그냥 그 항해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배에 오르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의 손길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오로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말고 상단의 배들이 바람에 밀려 원래의 항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보이는 것은 거칠게 출렁이는 회색의 바다 뿐. 날씨는 갈수록 춥고 험악해지고 있었다. 앞길은 장담할 수 없었다. 배에 실려 있는 식량이나 물에는 한계가 있었고 바다는 언제나처럼 망망대해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바다에 있어 노련하지도 않았던 내게 있어서는 불안의 나날이었다. 나는 왜 바다에 나왔을까? 자문해 보았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지쳐가고 있었다. 선원들 사이에서도 슬슬 절망이 일어날 때쯤 하여 갑자기 하늘이 일렁였다.

칙칙하던 회색의 하늘 위로 밝은 분홍색의 빛 무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빛의 장막이라도 되는 듯, 그 분홍색 빛은 하늘의 한쪽 끝에선 어느새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빛들은 서로 부대끼며 부족한 말솜씨론 차마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하늘 위에 그려내고 있었다. 아름다움이 돛대에도, 선원들의 얼굴에도, 갑판에도, 바다에도 닿아 일렁였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북쪽 지역의 요정들이 춤이라도 추는 것 같던 그 빛은 내가 잊어가던 처음의 감정을 되돌려 주었다. 나는 왜 바다에 나왔을까? 나는 다시 대답을 생각해 낼 수 있게 되었다. 바다가 품고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 육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다채로움.

나는 빛 무리 속에서 그 아름다움에 겨워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같은 것은 하찮은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만에 하나 신이 있다면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그 손에서 빚어진 기적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처음엔 상단이 바람을 잘못 받아 항로를 벗어난 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 나는 상단이 항로를 벗어났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그동안 지친 마음으로 저주를 퍼부어대던 그 못난 바람에게 감사했다.

한동안 모두가 넋을 잃고 오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받쳐 오르는 그 감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다른 이들도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빛의 일렁임이 점점 자그마해지다 끝내 사라졌을 때, 갑판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치 사라져버린 아름다움을 애도하듯이.

오로라를 만난 후의 항해는 신기할 정도로 매끄럽게 풀려갔다. 바람도 순풍이 되어 가려던 항로로 우리를 되돌려 놓았고, 해적선 한 척, 쥐 한 마리도 배에 얼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 차례의 항해가 끝났을 즈음엔─ 나도 뱃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 첫 항해 도중 나는 맹세한 적이 있었다. 폭풍의 위협에 혼비백산하여, 그 항해가 끝나면 두 번 다시는 배에 오르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그 맹세는 날씨가 갠 다음날 벌써 잊혔다.

그리고 나의 첫 번째 항해가 끝나 내가 다시 굳센 육지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내 몸 어디선가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꼈다. 그 열기는 외치고 있었다. 바다로─ 바다로─ 바다로─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다시 배에 올랐다. 한번만 더 나가자, 딱 한번만,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그 한 번은 두 번이 되었고 그 두 번은 다시 세 번이 되었다.


*

그렇게 나는 바다에 내 운명을 걸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다는 내 삶이 되고, 꿈이 되고, 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바다를 떠난 지금에 와서도 바다는 내게 있어 변하지 않는, 생생한 추억이 되었다.


*

바다에 흠뻑 빠졌던 그때 그 시절, 어떤 종류의 함대에 승선하는가는 내게 그리 중요하?않았다. 상선의 선원으로 시작했었지만 나는 어느새 군선에도 몸을 실었고, 어딘가를 개척하러 간다는 모험가의 배에도 올라갔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항해를 했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결국은 처음에 나를 그리 두렵게 했던 폭풍마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바다가 편해졌지만, 그 많고 많아 셀 수도 없는 항해들 중에 나는 바다의 험한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해적에게 배가 쫒기는 경우도 있었다. 동료 선박 중 한 척 옆으로 대포알이 떨어지며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순간적으로 그 선박이 크게 기우뚱했다. 바라보던 다른 선원들의 가슴도 철렁했을 것이다. 우리는 무사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동료 선박도 중심을 되찾았다. 전속력으로 도망치던 중에 근처를 지나가던 군함을 만나 큰 탈 없이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해적의 습격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수평선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나 날래게 배를 접근시켜 오는 해적이란 존재들은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농담으로라도 꺼내지 않을 소리였다.

하지만 더한 추악함은 외부에서보다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듯했다. 선원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던 크고 작은 다툼들. 거친 뱃사람들 사이에서의 다툼들은 곧잘 칼부림으로까지 이어지곤 했고 거기에서 한 둘이 부상하거나 죽는 일은 흔하디흔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추악하다고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수식어가 어울릴 만한 것은 어느 날 보았던 선상 반란이었다. 그 선상 반란은 내게 있어 정말로 큰 충격이었다. 나는 그때, 흥분으로 인간보단 악귀의 형상을 한 선원들 사이에서 해적을 만났을 때보다 더 심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반란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일등 항해사는 배에 칼이 꽂혀 죽어버렸고, 갑판장은 자다 말고 바다에 던져졌었다. 평소에 선장의 편으로 분류되던 선원들 또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머리에 구멍이 뚫리거나 그물침대에 얽힌 채로 배에서 떨어뜨려졌다. 그리고 선장, 숫자에서 너무 밀려 제대로 된 반항도 해 보지 못하고 돛대에 목이 매달린 그의 시체는 며칠 동안이나 바람에 흔들렸다.

또 다른 항해에서는 선장이 먼저 선수를 쳤었다. 배 안에 불온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하자, 그 불온함을 주도하던 선원 몇을 즉석에서 쏘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동조한 선원들에게도 가혹한 벌을 내렸었다. 채찍질이나 돛대에 매달아 놓는 것은 기본이었다. 선장이 그의 잔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후, 남은 선원들은 말 그대로 쥐 죽은 듯 얌전하게 항해를 마쳤다.

나를 기겁하게 했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긴 항해로 맞을 뻔 했던 식량과 물의 위기, 금세 잡혔을지언정 한때 선원들 사이를 돌았던 전염병─ 일일이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을 만큼, 바다에게도 거칠고 추한 면은 넘쳐났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다를 향한 내 사랑이 식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다는 분명 거칠기 짝이 없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내게 있어 육지보다 더 편안한 곳이기도 했다. 바다의 흐름으로 인한 배의 흔들림이 일상이 되고나자, 그 흔들림이 없는 육지는 잠시간도 발을 붙이고 있기에 어색한 곳이 되었다. 처음엔 아침마다 몸을 휘감아 볼썽사납게 매달리게 했던 그물침대도 시간이 지나자 어느 푹신한 침대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잠자리가 되었다.

그렇게 점점, 내 집은 육지에서 바다로, 그리고 배로 옮겨졌다.

그리고 바다가 내게 있어 집이 된 후, 나는 처음엔 막연한 동경으로, 그리고 한동안은 두려움으로 바라봤던 뱃사람들 사이에서 친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하던 수많은 얼굴들 사이에서 마주치고 또 마주치기를 반복한 끝에 친근한 얼굴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차례의 항해가 끝나면 우리는 그 항구에서 가장 술 맛이 좋다는 술집으로 몰려가 부어라 마셔라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곤 했다. 뜻이 잘 맞는 여섯이서 테이블에 둘러앉아, 때론 술을 나르는 아가씨를 희롱하기도 하고, 정숙한 사람은 듣는 것만으로도 귀를 씻어내려 달려갈 욕을 서로에게 퍼붓기도 하고, 술기운을 빌어 한바탕 주먹을 주고받기도 하며.

우리는 입을 모아 이야기했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우리가 주도를 해서 모험을 떠나보자고. 그래서 신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금의 나라에 가서 금을 배 한 척 가득 실어오고, 또 동방에 가서 그 귀하다는 비단을 가져와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우리가 화제로 올렸던 것은 그런 잘 알려진 교역품들만이 아니었다.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성왕의 갑옷이니, 세상 무엇보다 찬란한 사파이어라든지─ 정체를 알 수도 없는 것들도 우린 곧잘 이야기했다. 배 한 척만 구하면 우리끼리 선장이며 항해사며 갑판장 등을 맡아 무사히 다녀올 수 있다며 야심차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 또 누가 무엇을 맡을 건지를 놓고 우리는 소리 높여 자기주장을 내세우다가, 한두 번의 주먹질도 오간 끝에야 그런 건 나중에 가서 정하기로 합의를 보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론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배 한 척을 살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따윈 모두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객기 어린 뱃놈들의 술주정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술집에서의 즐거운 한 때가 끝나면 우리는 우르르 몰려나와 잠시간의 육지 생활을 즐겼다. 바다에서의 흔들림에 너무 익숙해져 무엇인가 웃긴 걸음걸이가 나오기도 했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그리고 육지가 지겨워졌다 싶을 때, 우리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게 해 줄 선장을 찾기 위해 항구나 근처의 술집을 어슬렁거리다 다시 배에 올랐다.


*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우리는 끝끝내 우리만의 배를 마련하진 못했다. 따라서 신대륙에 가서 금을 실고 오지도, 동방에서 비단을 가져오지도, 성왕의 갑옷이나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사파이어 같은 보물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것들은 결국 술이 얼큰하게 오른 선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전설 이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배를 타면서 손에는 어느 정도의 돈이 쥐어졌고 마침내 육지에 올랐을 때에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아니, 부족한 것은 분명 있었다. 바다─ 내게는 바다가 부족했다. 내 삶은 육지의 삶이 아니라 바다의 삶이였다. 나이가 들어 육지에 오르게 된 후로 처음 한동안은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없었다. 내 삶은 이곳에 있던 게 아니었는데─ 내 삶은 저 드넓은 바다의 것이었는데─ 하고.

하지만, 그 상실감은 어느 날 들려온 바다의 노래에 잊혀졌다. 그 노래에는 어떠한 가락도 가사도 없었다. 술 취한 선원들이 꼬인 혀로 멀쩡한 노래를 바꿔놓듯, 내키는 대로 고래고래 불러 재껴 부를 때마다 바뀌듯, 그 노래는 단 한 번도 똑같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 노래는 똑같았다. 바다의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다시금 바다에 휩싸였다. 그 설렘이, 아름다움이, 즐거움이─ 그 모든 것들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바람결에 걸걸한 목소리며 험상궂지만 유쾌한 얼굴들이 실려 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날이었다. 기억하고 있는 삶이었다. 나는 그 바다의 노래 속에서 내 젊은 날의 바다를 느낄 수 있었다. 내 발이 흔들리지 않는 육지를 딛고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파도에 흔들리며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바다가 가져다주는 행복에 젖었다.


*

내가 여행을 하던 시간은 이미 오래 전의 것. 드넓은 바다를 살아가는 뱃사람이 되어 바람에 몸을 맡겼었다. 평생토록 꿈으로만 남을 것만 같았던, 감히 이루어지리라고 소망조차 하지 못했던 꿈. 그 꿈이 한 올 한 올 현실로 풀려나오는 것에 나는 매혹되어 있었다. 거대한 범선의 돛이 바람을 가득 받아 부풀어 오를 때면 그 새하얀 배의 날개에 밀려 육지에서의 기억 같은 건 곧잘 잊히곤 했다.

바다는 처음 봤을 때처럼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 바다엔 분명 위험도 수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바다에는 바다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 있었다.

거친 갈매기의 울음소리,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일어나는 파도소리, 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소리─ 이 모든 것들은, 내게 있어 바다의 노래가 되었다.

나의, 바다의 노래─ 그 노래는 내게 있어 무엇보다 아름다운 선율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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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도로에에서 활동하는 로시엔은 유학 중이며, 대학에서 작문과 영문학을 공부하기 전에 조금 더 읽고 쓰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욕심으로 일년 간 휴학을 계획하고 있는 예비 대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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