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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단편 위층 남자

2011.01.01 01:1701.01

saeun.egloos.comhgmega@yahoo.com
위층 남자


PG 우드하우스

사은 옮김



아네트 브러햄이 위층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를 대하는 태도는 3개의 뚜렷한 단계를 거쳐 진화했다. 처음에는 그저 미미한 불쾌함이었다. 왈츠 작곡에 푹 빠져 거의 무의식 상태로 들었던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소리가 뻘겋게 달군 족집게가 그녀의 주의를 음악에서 뜯어내는 듯한 신체적 고통으로 변하며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분개했고, 소리의 정체를 모독이라고 파악했다. 보이지 않는 야만인은 아네트의 연주가 싫다는 자신의 의견을 부츠 뒤꿈치로 표현하고 있었다.
아네트는 도전적으로 라우드 페달에 발을 대고 다시금 건반을 – 거의 때리다시피 – 두드렸다.
“쾅! 쾅! 쾅!”
그러자 위층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아네트는 일어섰다. 얼굴은 붉었고 턱은 치켜들었으며 눈은 전투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녀는 방을 나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정한 관람자라 할지라도 다가오는 멸망에 무지한 채 그녀가 막 두드리려는 문 뒤에 서 있는 불쌍한 (지금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지도 모르는) 남자를 동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들어오세요!”
이렇게 외친 목소리는, 상당히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비열한 영혼의 목소리는 듣기 좋아 봤자 아니겠는가?
아네트는 들어갔다. 가구가 별로 없고 카펫도 깔리지 않은 평범한 첼시(예술가, 작가가 주로 거주하던 런던의 지역명)의 스튜디오였다. 한가운데에는 이젤이 하나 있었고 그 뒤로 바지를 입은 다리 두 개가 보였다. 이젤 위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만.”
아네트가 운을 뗐다.
“요즘은 모델이 필요하지 않아요. 탁자에 명함을 놓고 가시죠.”
야만인이 말했다.
“전 모델이 아닌데요. 제가 온 건 단순히‐”
아네트가 차갑게 말했다. 이 말에 야만인은 요새에서 나왔고,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떼고 의자를 공간으로 밀어냈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앉으시죠, 어서.”
자연의 분배법은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바닥을 두드리는 악한은 목소리만 듣기 좋은 게 아니라 그에 더해 외모 또한 보기가 좋았다. 현재 좀 흐트러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썩 잘생겼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네트는 이 사실을 인정했다. 노기등등했지만, 그녀는 공정했다.
“또 모델이 온 줄 알았습니다. 여기 이사 온 후로는 매시간 당 열 명씩 들이닥치는 거에요.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화창한 이탈리아 출신을 80명 정도 보고 나니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그가 설명했다.
아네트는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냉랭하게 기다렸다.
“제 연주가 방해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녀는 ‘이제 좀 제대로 혼나보시지.’ 하는 의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토록 차가운 태도를 견딜 수 있을 사람은 털옷과 겨울 내복을 입은 에스키모뿐일 것이다. 하지만 야만인은 얼어붙지도 않았다.
"제 연주가 방해되었다면 실례했습니다. 전 아래층에 사는데, 두드리시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아네트는 영하보다 한참 더 내려가 반복했다.
“아뇨, 아닙니다. 좋았습니다. 정말 즐겁게 듣고 있어요.”
청년이 사근사근한 말투로 항의했다.
“그럼 왜 바닥을 발로 차신 거죠? 제 천장이 망가지겠어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가고자 돌아서며 아네트가 말했다.
“아니에요, 잠시만요. 가지 마세요.”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상냥한 미소를 띄고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청년의 미소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마지못해 주목했다. 완전히 깨져서 그녀 발아래 비참하게 흙 바닥에 뒹굴고 있어야 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차분한 남자의 태도가 아네트의 화를 더욱더 돋우었다.
“그게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설명해 드려야겠습니다. 전 음악을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아가씨께서는 ‘노래’를 연주하고 계시지 않았잖아요? 같은 부분을 계속 반복하고 계셨죠.”
“악절을 만들고 있었던 거에요.”
아네트는 위엄있게, 하지만 덜 차갑게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얼음장 같은 태도가 녹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헝클어진 청년에게는 이상하게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악절이요?”
“노래의 악절이요. 제 왈츠에 쓸 거에요. 왈츠를 작곡하고 있거든요.”
청년의 얼굴에 무한한 존경의 빛이 퍼져 나가는 것을 보자, 그만 남아 있던 얼음의 잔재가 모조리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대면한 이래 처음으로 아네트는 이 흉악한 바닥 킥커에 대한 호감을 느꼈다.
“작곡하실 수 있습니까?”
그가 감탄하며 말했다.
“한두 개 정도 작곡했어요.”
“그런 걸 하실 수 있으시다니 정말 좋겠습니다 – 예술적인, 그러니까 작곡 같은 일을 말이에요.”
“당신도 하시지 않나요? 그림을 그리시잖아요.”
청년은 쾌활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집을 칠한다면 썩 잘할 겁니다. 규모가 큰 작업을 하고 싶어요. 캔버스는 비좁게 여겨지거든요.”
하지만 그는 그다지 불만스러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태도에서는 명랑함 만이 느껴졌다.
“한 번 보여주세요.”
아네트는 방을 가로질러 이젤로 다가갔다.
그가 경고했다.
“안 보시는 게 좋은데요. 정말로 보시려고요? 그냥 무모하게 구시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노련한 비평가에게 그림은 분명히 조잡하게 보였을 것이다. 큰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 검은 눈의 아이를 그린 습작이었다. 통계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지구 어디에서 한 명 이상의 젊은 화가가 고양이를 안은 아이를 그리지 않는 순간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전 이 그림을 <아이와 고양이>라고 부르지요. 괜찮은 제목 아닙니까? 듣자마자 그림의 핵심이 파악되지요. 아, 저게 고양이입니다.”
청년은 파이프 대로 친절하게 고양이를 짚어주었다.
아네트는 그린 주제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에 따라 그림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대중의 다수 중 한 명이었다. 이 그림은 그녀가 싫어할 (백만 점 중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흉측한 아이‐고양이 그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청년은 그녀의 음악에 대해 아주 호의적이지 않았던가.
“정말 멋진 그림인데요.”
그녀가 선언했다.
청년의 얼굴에 기쁨보다 더한 놀라움이 드러났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기쁘게 죽을 수 있겠군요 – 아직 죽기 전에 내려가서 작곡하신 노래를 들려주신다면 말입니다.”
“또 바닥을 차실 거잖아요.”
아네트가 항의했다.
“죽는 날까지 다시는 바닥을 차지 않겠습니다. 바닥을 차는 건 끔찍해요. 사람들이 왜 바닥을 발로 차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전 야만인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첼시에서 우정이 무르익는 속도는 빠르다. 1시간 15분 내에 아네트는 청년의 이름이 알란 비벌리이며 (그녀는 그가 끔찍한 성씨를 타고났다는 불운에 경멸보다 애석함을 느꼈다), 소유한 사유 재산이 있어 그림으로만 먹고 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가 이를 아주 큰 행운이라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화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흐뭇하게 했다. 청년은 아네트가 만나본 불운한 화가 중 아주 새롭고도 신선한 종류의 불운한 화가였다.
같은 건물에 스튜디오가 있으며 가끔 들러 그녀의 커피를 마시고 자신의 불행을 쏟아붓곤 하는 레지날드 셀러즈와는 달리, 청년은 자신의 실패를 대중의 악의나 무지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아네트는 셀러즈가 속물들을 비난하며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장점을 역설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에, 그녀가 대중의 예술 취향이 저열하다는 진부한 동정을 표했을 때 비벌리가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대중이 훌륭한 분별력을 보인다고 대답하자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에게 좋은 점수를 따고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면, 이 한 마디보다 더 확실한 성공을 거뒀을 것도 또 없었으리라. 비록 마음으로는 별의별 것을 다 던져주고 싶은 지점을 한참 넘은 다음에도 계속 이야기를 해보라며 상냥하고 끈기있게 말을 들어주곤 하는 아네트였지만, 실은 징징거리는 남자에게는 전혀 연민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아네트 자신은 투사였다. 운명이 야망을 품고 애쓰는 자들에게 끔찍한 일격을 가하는 것을 싫어하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걸 기반으로 독백 공연을 여는 법은 절대 없었다. 음악 출판사를 빙 도는 음울한 여행을 마친 후 남몰래 쓰라린 울음을 내뱉으며 새벽에 베개를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지만, 아네트의 자존심은 공석에서 늘 밝고 활기찬 태도를 유지하게 해주었다.

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불행을 밝혀보았다. 이 머리가 더부룩한 청년에게는 속내를 나누고 싶어지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녀는 음악 출판사들의 돌 같은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고, 인쇄비를 내지 않으면 노래를 출판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으며, 비참한 판매량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연주하신 노래는 출판이 되지 않았습니까?”
비벌리가 물었다.
“네, 그 세 곡은 출판이 됐어요. 하지만 그게 다랍니다.”
“잘 팔리지 않았나요?”
“거의 안 팔렸죠. 실은요, 노래는 잘 알려진 사람이 부르지 않는 한 팔리지 않는답니다. 부르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불러주지 않는 사람도 많고요. 사람들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거죠.”
“이름을 알려주세요. 그럼 내일 가서 모조리 다 쏴 드릴 테니까요.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는 겁니까?”
비벌리가 물었다.
“그냥 계속하는 걸 계속하는 수 밖에 없어요.”
“우울해지실 때면 여기 올라오셔서 제게 독을 쏟아붓고 가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다 담아놓는 건 좋지 않아요. 올라와서 이야기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겁니다. 아니면 제가 내려가는 걸 허락해주셔도 되고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언제든 천장을 두드리세요.”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자, 비벌리는 간청했다.
“그 얘기는 또 꺼내지 마세요. 불공평합니다. 개심한 바닥 킥커처럼 섬세한 사람도 없다고요. 올라오시던지 제가 내려가는 걸 허락해주시던지 해주실 거죠? 전 슬프거나 우울할 때면 나가서 경찰을 한 명 죽이고 오거든요. 하지만 그런 건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까. 그러니까 천장을 두드리시면 되는 거에요. 그러면 곧장 달려가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볼 테니까요.
“이렇게 말씀하신 걸 후회하실 걸요.”
“그럴 리가요.”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정말 도움이 될 거에요. 가끔 제가 평생 벌 돈을 다 주고 불만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을 고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요. 옛날 소설에 나온 사람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앉아서 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라고 말할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정말 천국 같았을 거에요.”
“자, 제가 필요하시면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아시죠. 천장을 두드려댄 위층에 딱 있으니까요.”
비벌리가 일어서며 말했다.
“두드려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요.”
아네트가 대답했다.
“악수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비벌리가 물었다.

*       *       *       *       *

바로 다음날 학생 중 한 명과 유독 답답한 한 시간을 보내고 난 아네트는 위층으로 올라오고야 말았다. 학생들은 아네트의 구원이자 절망이었다. 그들 덕에 연명할 수 있었지만, 그들 덕에 인생은 연명할 가치가 없는 것이 되었다.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도 있었고 자신이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있었다. 모두 옹골진 상아색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를 합치면 뇌가 티스푼으로 한 숟갈 정도 나왔고, 아네트가 오후에 가르치고 있던 학생은 그중에서도 끝자락에 속하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비벌리의 스튜디오에서 비평적 태도로 이젤 앞에 서 있는 레지날드 셀러즈를 발견했다. 아네트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지루하고 무례하며 오만한 사람으로 콧수염은 얼룩진 목탄 자국 같았고 그녀를 늘 ‘아, 작은 아씨!’ 라고 부르곤 했다.
비벌리가 고개를 들었다.
“도끼는 가져오셨나요, 미스 브러햄? 가져오셨다면 무고한 이들의 학살에 동참하실 수 있는데 말이죠. 셀러즈가 제 아이와 고양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강타하는 중이랍니다. 눈을 좀 보세요. 자! 지금 번쩍하는 거 보셨습니까? 또 출정의 길에 오른 겁니다.”
“친애하는 비벌리, 그저 내가 보기에 그림이 어떤 결함을 가졌는지 나눠보고자 하는 것뿐이네. 내 비평이 좀 가혹했다면 사과하지.”
셀러즈가 사뭇 딱딱하게 말했다.
“계속하시죠. 전 신경 쓰지 마시고요. 다 저를 위한 것 아닙니까.”
비벌리의 진심 어린 대답이었다.
“음, 한마디로 하자면 말이야, 생기가 없네. 아이도 고양이도 산 것 같지가 않아.”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손으로 액자 모양을 만들었다.
“자, 고양이는 말이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무런 그‐ 그‐ 에‐”
“이 종류의 고양이라면 없을 거에요. 그런 종류가 아니거든요.”
비벌리가 대답했다.
“아주 귀여운 고양이라고 생각해요.”
아네트가 말했다. 그녀는 금세 불이 붙곤 하는 분노가 확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아네트는 셀러즈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벌리가 셀러즈의 격려를 서글서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났다.
“어쨌든 두 분 다 고양이라는 건 알아봐 주시지 않습니까. 그게 확실하단 게 어딥니까, 전 초짜인데.”
비벌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친구, 그건 그래. 내 비평에 낙심하지 말게나. 자네 작품에 장래성이 없다고는 생각지 말게. 절대 아니니까. 시간이 가면 아주 잘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아주 잘하고 말고.”
셀러즈가 자비롭게 말했다.
아네트의 눈에 싸늘한 빛이 번쩍였는지도 모르겠다.
“셀러즈 씨께서는 현재 위치에 오르시려고 아주 열심히 노력하셨거든요. 비벌리 씨도 물론 잘 아시겠지요?”
비벌리는 처음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저는‐ 에‐ 그게‐”
그가 입을 열었다.
“어머, 분명히 아시겠죠. 실리지 않은 잡지가 없는 걸요.”
아네트가 사근사근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비벌리는 셀러즈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냈고, 그가 불편해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천재의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광고 페이지에 나오는 와우키시 구두라던가 레스트어와일 소파라던가 리틀 젬 고등어 광고의 고등어 통조림 그림은 다 셀러즈 씨께서 그리신 거랍니다. 정물을 아주 잘 그리시거든요.”
딱딱한 침묵이 맴돌았다. 비벌리는 심판이 수를 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스 브러햄께서는 내 상업적인 작품만을 주시하는군. 다른 작품도 많은데 말이야.”
드디어 셀러즈가 입을 열고 말을 뱉어냈다.
“어머, 물론이죠. 풍경화를 5파운드에 파신 게 고작 여덟 달 전이죠? 그리고 11달 전에 또 하나를 파셨었고요.”
이걸로 충분했다. 셀러즈는 뻣뻣하게 절을 하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
비벌리는 먼지떨이로 천천히 바닥을 쓸었다.
“뭐하시는 거에요?”
아네트가 목멘 목소리로 물었다.
“불쌍한 남자의 부서진 조각을 잘 쓸어 담아서 고이 묻으려고요. 정말 신랄하시군요, 미스 브러햄.”
비벌리가 나직이 말했다.
그는 아네트가 갑자기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탄성을 지르며 먼지떨이를 떨어뜨렸다. 아네트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의자에 앉아 절박하게 흐느꼈다.
“하느님 맙소사!”
비벌리가 멍하니 말했다.
“난 고양이에요! 짐승이야! 내가 미워죽겠어요!”
“하느님 맙소사!”
비벌리가 멍하니 말했다.
“난 돼지예요! 악마에요!”
“하느님 맙소사!”
비벌리가 멍하니 말했다.
“다들 발버둥치고 노력하면서 불운을 겪는 중인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 사람이 그림을 못 판다고 조롱하다니! 난 살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 아!”
“하느님 맙소사!”
비벌리가 멍하니 말했다.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몇 차례 뒤를 따랐고, 점점 잦아들며 조용해졌다. 이윽고 아네트는 고개를 들고 촉촉이 젖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보같이 행동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한테 너무 불쾌하고 오만하게 행동하길래 할퀴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난 런던에서 가장 끔찍한 고양이일 거에요.”
캔버스를 가리키며 비벌리가 말했다.
“아뇨, 그 고양이는 여기 있죠. 적어도 돌아가신 셀러즈 씨의 말씀으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 돌아가신 분이 위대한 화가가 아니신 건가요? 가슴을 펴고 여기로 뛰어드셔서는 제 걸작을 혹평하시기에 마땅히 ‘이야, 천재로구나!’ 했는데 말입니다. 아니신 건가요?”
“그림을 한 점도 못 팔아요. 광고에 삽화를 그려주고 받는 돈으로 겨우 사시는 거죠. 그런데 내가 그런 말을‐”
“진정하세요!”
비벌리가 우려를 표현했다.
아네트는 울음을 삼키며 진정했다.
“참을 수가 없어요. 제가 창피를 준 거니까요. 아, 정말 가증스러운 짓을 했어요! 하지만 끔찍한 학생을 가르치고 나서 신경이 곤두섰던데다가, 그 사람이 당신한테 오만하게 굴기 시작하니 도저히‐”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불쌍한 사람!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아네트는 일어났다.
“가서 사과해야 해요. 분명히 푸대접을 하겠죠. 하지만 해야 해요.”
그녀는 방을 나섰다. 비벌리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       *       *       *       *

사과하지 않는 것은 아주 좋은 행동 방침이다. 제대로 된 사람은 사과를 원하지 않고, 되먹지 않은 사람은 사과를 못되게 악용한다. 셀러즈는 후자에 속했다. 아네트가 온순하고 뉘우치는 태도로 발톱을 다 감추고 그에게 와 엎드렸을 때, 그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관대함을 보이며 그녀를 용서했다. 아네트가 조금만 덜 수그듬했더라면 저 태도에 자극을 받고 다시금 호전적으로 돌변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용서를 받도록 자신을 허락했고, 그가 앞으로는 더 비위에 거슬리게 행동하리라는 참담한 확신과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짐작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셀러즈는 다시금 새로 이사 온 이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기 시작했고, 완성이 가까운 비벌리의 그림은 책 한 권을 채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비평을 받았다. 쾌활하게 비평을 받아들이는 비벌리의 태도에 아네트는 감탄했다. 그녀가 비벌리의 그림에 대해 느끼는 관심은 순전히 화가에 대한 호감에 기초할 뿐이었다 (제대로 생각해보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점이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그녀는 비평가를 갈가리 찢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지난번의 폭발에 대한 후회가 겨우 그녀를 막아주곤 했다. 그에 반해 비벌리는 예술가다운 민감함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셀러즈가 동물학대방지협회가 달려올 정도로 끔찍하게 고양이를 학대할 때에도, 비벌리는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네트는 그의 인고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셀러즈의 비평가로의 입지를 확고히 굳혀주며, 그가 권위 있는 사람처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일어났다. 수년 동안 버둥거려온 그의 운이 드디어 좋아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중개상에게 맡긴 후 몇 달간 부서져 경선을 하려고 뉘어놓은 전함처럼 벽에 기대놓은 채였던 그림들이 마침내 팔릴 곳을 찾은 것이다. 지난 2주 동안 풍경화 2점과 우화적 그림 1점이 좋은 값으로 팔렸다. 그리고 성공의 영향 아래 그는 피어나는 작은 꽃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중개상 엡스타인이 편지로 글라스고의 부호 베이츠라는 사람이 160기니를 내고 우화적 그림을 샀다고 전했을 때, 셀러즈는 속물과 천박한 물질주의와 저열한 취향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 그는 베이츠라는 사람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다.
아네트가 이 사건을 전해줬을 때 비벌리는 이렇게 말했다.
“좀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군요. 글라스고에 드디어 취하지 않은 사람이 생겼다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취한 사람이라면 감히 그 우화를 쳐다보지도 못할 테니까요. 여러모로 아주 기분 좋은 일이군요.”
비벌리 본인은 예술에서 완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아이와 고양이>를 완성했고 그림과 셀러즈가 써준 소개서를 엡스타인에게 가져갔다. 셀러즈는 이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주는 상냥한 유명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낸 후 비벌리는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네트가 스튜디오에 들를 때면 그는 창턱에 발을 얹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그렇게 앉아 셀러즈가 예술에 대해 논하는 것을 듣고 있곤 했다. 셀러즈는 은행에 잔액이 두둑하고 상승세를 타고 있어 이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그는 광고 일을 그만두고 큰 캔버스에 또 다른 우화를 그릴 계획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셀러즈는 비벌리에게 상당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고, 그는 그렇게 했다. 비벌리는 셀러즈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동안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듣고 있는지 안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네트는 두어 번 정도 셀러즈의 연설을 들었고, 그 덕에 분개해 치를 떨며 비벌리에게 가곤 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오만하게 굴도록 내버려두는 이유가 뭐에요? 누가 나한테 와서 내 음악에 대해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나는‐ 나는‐ 내가 뭘 할지 모른다고요. 정말로 위대한 음악가라 해도 말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도 셀러즈가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그림을 파는 걸 보니 실력이 있는 모양이죠. 하지만 어떻든 간에 당신한테 저렇게 행동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요.”
“’제 박식한 친구의 태도는 검은 벌레의 황제께서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My learned friend's manner would be intolerable in an emperor to a black‐beetle)’.”
비벌리가 인용했다.
“자,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신도 그림을 판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 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걸요. 상품을 배달했잖아요. 이제 상품은 엡스타인네 있지요. 안 팔려도 대중이 절 질책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느니 그냥 수천 명이 춤추듯 몰려가서 그걸 사겠다고 싸우면 되는 거죠. 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아, 왈츠는 완성했어요. 출판도 했지요, 실은.”
아네트가 힘없이 대답했다.
“출판하셨다고요!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왜 슬픔으로 축 늘어져 계신 거죠? 새처럼 노래하면서 광장을 달리고 계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왜냐하면, 제가 출판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이에요. 고작 5파운드였지만 아직 그만큼 팔리지 않았거든요.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다음 판을 찍을지도 모르죠.”
“그때도 출판비를 내셔야 합니까?”
“아뇨, 출판사에서 낼 거에요.”
“누굽니까?”
“그루스진스키(Grusczinsky)와 부크테르커크(Buchterkirch)에요.”
“맙소사, 그럼 뭘 걱정하시는 겁니까? 된 일이네요. 그루스진스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혼자서도 12쇄나 팔 수 있을 겁니다. 부크테르커크가 도와주며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면 왈츠를 전국적 화제로 만들 수도 있을 거에요. 요람의 아가들까지 흥얼거리게 될 겁니다.”
“전번에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던데요.”
“그랬겠죠. 아직 자기가 가진 힘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루스진스키의 수줍은 태도는 음악 관계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정말로 내성적인 사람이라고요.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그 사람이 1, 2판을 판다면 뭐든 주겠어요.”
아네트가 말했다.
굉장한 일은 그가 판매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무명의 작곡가가 작곡한 여느 왈츠처럼 아네트의 왈츠도 천천히 조금씩 팔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판매량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졸졸거리는 시냇물에서 홍수로 불어났다. 그루스진스키는 아네트가 가게에 (아주 자주) 들를 때마다 아버지같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고, 일주일 사이에 2판을 찍었다고 말해주었다. 여전히 셀러즈의 주시를 받으며 예술가로 성장 중인 비벌리는 그가 악절 하나에 너무나 감동해 바닥에 발을 구르며 갈채를 보냈던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왈츠의 성공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셀러즈마저도 자신의 성공을 잠깐 잊고 정중한 축하를 건넸다. 그리고 돈이 술술 들어오며 삶의 길을 매끄럽게 해주었다.
훌륭한 나날이었다. 모자도 하나 샀고…

간단히 말해, 아네트의 인생은 아주 충만하고 찬란하게 변했다. 삶이 완벽하게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딱 하나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원래 성공의 결점은 친구들을 짜증 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네트의 경우 이러한 결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셀러즈는 이미 오래전 명예의 전당에 입주한 사람이 새내기를 환영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비록 머리에 두개골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상냥한 학생들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자 난리였다. 비벌리는 누구보다도 더 흐뭇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낙원이 완성되는 것을 막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비벌리였다. 성공적인 사람이 된 아네트는 친구들도 다 성공을 거두길 바랐다. 하지만 비벌리는 속상하게도 유쾌한 패배자로 남아 있었고, 게다가 셀러즈의 기를 꺾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셀러즈의 조언과 평가가 사리사욕과 무관한 것도 또 아니었다. 그는 비벌리를 승리의 노래를 연주하는 악기로 이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아네트는 이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위층에 갔다가 스튜디오에서 셀러즈의 목소리가 들리면 문도 두드리지 않고 도로 내려오곤 했다.

       *       *       *       *       *

어느 날 오후, 방에 앉아 있던 아네트는 전화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전화는 아네트의 대문 바로 밖, 계단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나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비벌리 씨 계십니까?”
성마른 목소리가 말했다.
아네트는 그가 나가는 소리를 들었음을 기억했다. 그의 발소리는 익숙했으니까.
“나가셨는데요. 전해 드릴 말씀이 있으신가요?”
“있습니다. 루퍼트 모리슨이 전화해서 산더미 같은 악보가 왔는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묻더라고 전해주십시오. 전송해줘야 하는 겁니까, 뭡니까?”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리슨 씨는 불평을 토로할 수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선 상태임이 분명했다.
“악보요?”
아네트가 물었다.
“악보요! 악보 더미가 잔뜩 있습니다. 나한테 지금 장난을 치는 겁니까, 뭡니까?”
그가 흥분해서 외쳤다. 이제 아네트를 비밀을 털어놓을 정당한 상대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네트는 그의 말을 듣고 있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들어줄 사람이 있으면 되었던 것이다.
“나한테 방을 빌려준단 말입니다. 평화롭게 방해받지 않으면서 소설을 쓸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악보가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악보가 잔뜩 든 소포가 바닥을 2미터 높이로 덮고 있는데 어떻게 조용히 방해를 안 받고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게 매일 오고 있다고요!”
모리슨 씨가 울부짖었다.
아네트는 힘없는 손으로 전화기에 매달렸다. 마음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모리슨 씨가 그녀를 불렀다.
“듣고 있어요. 악보는 어디‐ 어느 회사에서 보내는 건가요?”
“뭐라고요?”
“악보를 보내는 출판사가 어디죠?”
“기억나지 않는군요. 이름이 깁니다. 아, 생각나네요. 그루스진스키하고 또 누굽니다.”
“비벌리 씨에게 말씀드리죠.”
아네트가 조용히 말했다. 머리에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 얹어진 기분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듣고 계십니까?”
모리슨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기 그림도 있다고 전해주세요.”
“그림이요?”
“끔찍한 그림이 네 개나 있어요. 코끼리만큼 큽니다. 움직일 수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아네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       *       *       *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비벌리 씨는 언제나처럼 기운찬 태도로 계단을 세 개씩 뛰어넘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그가 아네트의 문앞에 다다랐을 때 문이 열렸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아네트가 물었다.
“물론이죠. 무슨 일입니까? 왈츠 1판이 또 팔렸답니까?”
“그런 소식은 없었어요‐ 베이츠 씨.”
그녀는 처음으로 위층 남자의 유쾌한 태도가 구겨지는 것을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일격을 받아들였다.
“내 이름을 압니까?”
“이름만 아는 게 아니에요. 글라스고의 백만장자시죠.”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전적인 거에요. 저희 아버지도 백만장자셨거든요.”
“그리고 그 돈을 쓰셔서 친구들에게 바보의 낙원을 지어주시는 건가요. 그런 오락에 질리시면 그들을 파멸시킬 시한부 낙원 말이에요. 베이츠 씨, 그러시는 게 잔인하다고는 생각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당신이 그림을 사들이길 그만두면 셀러즈 씨가 다시금 기쁘게 하청 작업을 하실 거로 생각하세요? 게다가 실제로 누가 그림을 사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면‐ 그러면‐”
“멈추지 않을 건데요. 글라스고 백만장자가 셀러즈의 우화적 그림을 사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그린 우화적 그림을 사들이겠습니까? 셀러즈가 알아내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나는 계속 그림을 사고, 모두 기쁘고 평화롭게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러세요! 그리고 절 위해서는 어떤 미래를 계획하고 계신가요?”
“당신이요? 당신하고는 결혼하고 싶지요.”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네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뜨거운 시선을 조용한 헌신이 담긴 표정으로 되받았다.
“결혼이요?”
“뭘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셀러즈의 우화적 그림으로 장식이 된 집에서 살 생각을 하시는 거겠죠. 그건 아닙니다. 다 다락방에 치워두면 되니까요.”
그녀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가 이를 끊었다.
“들어보세요! 앉아서 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초반의 28년하고 3개월은 그냥 넘기도록 하죠, 대부분 당신 같은 사람을 찾으며 보냈다고만 하면 될 겁니다. 한 달하고 아흐레 전에 당신을 찾아냈어요. 임방크먼트(템스 강의 제방)를 건너고 계셨죠. 나도 거기 있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있었어요. 택시를 멈추고 나갔어요, 그리고 채링크로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시는 걸 봤습니다. 난 달려서‐”
“제겐 흥미없는 이야기인데요.”
아네트가 말했다.
“점점 재미있어집니다. 주인공이 달려나가는 것까지 이야기했죠, 아마. 그랬습니다. 자, 당신은 웨스트엔드 지하철을 타고 슬론 스퀘어에서 내렸어요. 나도 따라 내렸습니다. 슬론 스퀘어를 가로지르더니 킹스로드로 들어가서 여기에 도착하더군요. 쫓아갔었죠. 광고가 하나 있더군요, ‘빈 스튜디오 있음’. 취미로 그림을 좀 그린 적이 있으니까 화가 흉내를 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죠. 그래서 스튜디오를 얻었죠. 알란 비벌리라는 이름도 얻고요. 제 이름은 빌 베이츠입니다. 알란 비벌리나 시릴 트레빌리언 같은 이름으로 불리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한 적이 적잖거든요. 알란 비벌리가 된 건 동전이 그렇게 돌아서 그런 겁니다. 들어오고 나니 당신을 알게 되는 게 문제가 되더군요. 당신이 연주하는 소리를 듣고는 되었다 싶었죠. 그냥 바닥에 계속 발을 굴러대기만 한다면‐”
“지, 지금 당신,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그때 순전히 날 위층에 올라오게 하려고 발을 굴렀다는 건가요?”
아네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바로 그거죠. 대단한 작전 아닙니까? 자, 이제 제가 왈츠를 사들였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바보의 낙원에 대한 당신의 말은 셀러즈의 일 때문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알아내셨는지 알 수가 없군요. 로진스키인지 누군지한테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는데 말입니다.”
“모리슨 씨라는 분이 전화를 거셔서 빌려주신 방에 가득 찬 악보 때문에 걱정이 돼서 죽겠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아네트가 냉담하게 말했다.
청년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불쌍한 모리슨!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알바니에 제 방을 빌려줬거든요. 소설을 쓰는 중인데 뭐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일을 못한답니다. 이런 걸 보면‐”
“베이츠 씨!”
“네?”
“아마 제게 상처를 주시려는 건 아니었을 거에요. 친절한 마음이셨을 거라고까지 감히 말해봅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 날 얼마나 부끄럽게 하셨는지 모르시겠어요? 날 아이 취급하신 거에요, 거짓 성공을 주셔서, 그저‐ 그저 불평 없이 얌전히 굴게 하시려던 거겠죠. 당신은‐”
그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편지를 하나 읽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편지요?”
“썩 짧은 편지죠. 그림상인 엡스타인이 보낸 겁니다. 이렇게 쓰여있군요. ‘선생님’, 이건 절 가리키는 겁니다. 그냥 ‘빌에게’가 아니죠, 그냥 ‘선생님’이네요. ‘오늘 아침 선생님의 그림 <아이와 고양이>를 10기니에 구매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가격에 판매하길 원하시는지 부디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요?”
아네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엡스타인에게 다녀왔습니다. 그림을 산 사람은 미스 브라운이란 분이더군요. 베이즈워터 주소를 남겼기에 한 번 들러봤습니다. 미스 브라운은 없고 당신 학생 중 한 명이 있더군요. 미스 브라운에게 올 소포를 기다리고 있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당신 편지를 받았다며 도착하면 받아놓겠다고 하더군요.”
아네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저리 가세요!”
그녀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이츠 씨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서로 빨래를 해주고 빨래비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가라고요!”
아네트가 외쳤다.
“분명히 아주 친밀한 사이가 됐을 거로 생각하곤 했죠 – 서로 아주 정이 깊어졌을 거라고요. 안 그렇습니까?”
“나가요!”
“가기 싫은데요. 나는 여기서 당신이 나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제발 나가주세요! 생각해볼 시간을 주세요.”
그녀는 그가 문으로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멈춰 서더니 다시 걸어갔고, 조용히 문이 닫혔다. 곧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 우리에 갇힌 동물처럼 단조롭게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가로지르는 발소리였다.
아네트는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끊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일어섰다. 방 한구석에는 내리닫이 창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긴 막대기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막대기를 잡았고, 잠시 망설였다. 다음에 그녀는 잽싸게 움직여 막대기를 들어 올렸고, 천장을 세 번 두드렸다.


‐ 마침





* PG 우드하우스(1881~1975): 영국적 유머가 돋보이는 소설과 뮤지컬 코미디 작가. 73년간 작가로 활동하며 96권의 책을 출판했다. 특유의 유머 감각과 인물 묘사법은 여러 작가에게 영향을 끼쳐 더글러스 애덤스, 살만 루슈디, 테리 프래쳇, 제이디 스미스 등이 그를 좋아하는 작가로 꼽고 있다.



mirror
댓글 1
  • No Profile
    유래유거 16.10.02 21:58 댓글

    청춘들의 이야기도 재밌지만 철없는 예술가 셀러즈가 정말 귀엽네요

분류 제목 날짜
정도경 Nessun sapra2 2011.03.25
정도경 신기루6 2011.02.25
정세랑 알다시피, 은열 (본문 삭제)7 2011.02.25
해외 단편 위층 남자1 2011.01.01
이로빈 황금 비단 (본문 삭제)3 2011.01.01
이로빈 꽃의 집합 2011.01.01
이로빈 그림자 용 201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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