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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진 셰어하우스를 구하기 위해 나는 두 번이나 죽어야했다

윤여경

-셰어하우스 입주 모집-

이런 집 어떠세요? 돈이 없는 사람들도 돈을 물 쓰듯 쓸 수 있는 셰어하우스. 일 년 내내 잠 안자고 게임 해도 건강함. 다른 사람이 노벨상을 받아도 내가 칭찬받는 곳. 언제든 입주가능.
자격: 나이불문. 신체 건강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음. 발명, 수집, 오지 탐험경력 등 특이한 경력환영.
당신이 셰어하우스에 입주하고 싶은 이유는 무한하다. 아직 그 이유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몇 개월 전 만 해도 나도 몰랐을 뿐이니까.

 이 멋진 셰어하우스를 구하기 위해 나는 두 번이나 죽어야했다.


1. 첫 번째로 어떻게 죽게 됐냐면

 쿵,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분명히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에이. 설마.”

 나는 침착했다.

 “그래 설마.”

 레논이 맞장구쳤다. 나는 관 뚜껑에 손을 대서 음의 파동이라도 느껴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최신형 스틸 슬림형관은 촌스럽게 팔다리를 뻗으라고 디자인한 게 아니다. 관 사용자가 그 안에서 스타일 있게 썩어 문드러지라는 뜻에서 디자인했다. 그 생각만 하면 한숨이 나왔다.

 내 몸이 육 개월 동안이나 썩지 않을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쿵, 쿠앙, 두두두. 온갖 종류의 소음이 이어졌다. 뵈는 게 없으니 상상이 제멋대로 갔다.

 “전쟁이라도 난 거겠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쓰나미나 핵폭탄일지도 몰라.”

 베스트 프렌드답게 레논이 위로의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런 한 방의 행운이 올 리 없었다. 난 평생 운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오늘도 죽긴 글렀다. 이보다 확실할 순 없었다. 내가 묻힌 묘의 봉분을 건드리는 소리. 삽으로 파는 소리. 사람들 두어 명이 서로 대화하는 소리.

 “안에 계세요?”

 이번엔 사람 소리다. 내게 말을 건 거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하이. 헬로. 하와유,라고 해. 딕 헤드.”

 레논이 빈정거렸다. 난 대답을 안 했다.

 이 상황에 송장벌레가 던지는 디스에 대꾸할 기분이 아니었다. 애초에 딱정벌레를 닮은 그에게 비틀즈 멤버, 레논의 이름을 붙여주고 친구삼은 게 잘못이다. 인류가 모두 불사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세상에서 살 필요는 없었을 거다. 썩지도 죽지도 않는 생물체가 되어 고작 벌레 따위를 부러워하는. 정신 차리자. 지금이라도. 혹시. 어쩌면.

 “죽기엔 늦은 걸까?”

 나는 물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늦은 거야.”

 레논은 그렇게 말했지만 꾸물꾸물 내 눈을 파먹어보려고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역시 멋진 녀석이다. 이렇게 마음 통하는 친구는 태어나고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그와 친구가 된 순간이 기억났다. 내가 묻힌 지 이주일이 넘었다는 소식을 다른 벌레들에게 듣고 찾아온 레논은 당연히 내가 먹기 좋을 만큼 썩었겠거니 했다. 그리고 내 눈 부근을 파고들다가 겨드랑이 그리고 발 언저리를 방황했다. 세 시간에 거친 내 몸 탐색 끝에 그가 처음 내게 말을 걸었다.

 “젠장. 요즘 인간들이란. 썩질 않아서 도대체 먹을 게 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 말을 건 거 라기 보단 혼잣말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걸로 우린 친구가 됐다.

 레논. 신장 약 이십 밀리에 다리가 여섯 개인 친구. 그는 꽤 심플한 벌레다. 그는 천국도 지옥도 국경도 과거도 관심 없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건 둘로 나뉜다. 먹이 아니면 친구.

 내 친구들에게도 소개시켜줘도 좋을 놈이다. 물론 내 친구들이 동물의 사체를 발효시켜 먹는 식습관이 특이한 벌레종과 친구하고 싶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편견쩌는 놈들. 하긴.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면 레논과 나도 친구 먹진 못했을지도 모른다. 입으로 꺼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난, 그에게 비밀스런 바람이 하나 있다. 고맙게도 그 놈도 안다. 갉아 먹히고 분해 되서 우주와 하나가 되고 싶은 내 바람을.

 “안 돼. 이젠 어쩔 수 없어. 넌 정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믿고 있던 하나뿐인 친구가 날 포기하면 끝인 거다.

 난 세상의 끝을 봤다.

 세상의 끝을 보니 시작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공과대학 자퇴 후 스물두 살의 나이로 아이디어 앱 저작권대금 이십억을 받았을 때만 해도 세상이 처음 열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순진했다. 그 돈으로 내 마음대로 세상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나의 아리요사. 화면으로만 만난 특급 일본 에로배우인 그녀의 스폰서가 되어 일주일에 두 번씩 만남을 가지겠다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수줍은 소원. 나의 이상형인 그녀가 나와 결혼해줄 거라는 생각은 염치없어서 빌지 못했다. 어쨌든 모태솔로였던 내게 그걸 이뤄주겠다며 접근해서 동업자가 된 녀석은 투자자금 수십억을 사기해서 통째 들고 사라졌다. 뭐. 모든 걸 다시 시작하면 됐지만 이미 비슷한 형태의 앱이 늘어났고 경쟁은 심해졌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야 해서 귀찮기도 했고 사실, 내가 좀 집착이 심했다. 아리요사가 내 첫 사랑이었으니 후회는 안한다.

 그 후 십년동안 유럽 남미 등지로 그 사기꾼을 찾아다느라 급 늙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살면서도 술은 꼭 마셨으니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끔은 내가 그를 찾아다니는 건지 그냥 술 먹으러 간 건지 분명하지 않긴 했다. 중간에 깨달음을 얻었는데도 난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와의 일주일에 두 번 만남을 위해서는 지위, 재산, 현금이 삼위일체로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첫 번째 소원 달성을 실패했으니 다른 소원이 필요했다. 생각해봤다. 깊게.

 없었다. 소원이 없는 인간이라니. 들어 본 적이 없다. 한숨이 나왔다. 인간으로서 내 자신이 부적절하고 자격미달로 느껴졌다. 컨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는 이들의 SNS를 돌아다닌 결과 가장 존중받는 세 가지 소원이 밝혀졌다. 결혼, 취직, 돌잔치. 그 세 이벤트만 치루면 인간으로 대접받고 살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소원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건 삼대가 노력했어야 하는 이벤트였다. 과거형이다. 즉 현재에 노력하거나 미래에 노력할거라는 사실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다, 노력이 날 원하지 않았다. 노력을 할 사람도 태어나기 전에 정해져 있으니 세상은 참 심플했다.

 그래도 뭔가. 뭔가 그래도, 라는 기분에 술 마시며 십년을 방황했다. 뭔가 그래도 인생은, 운명은, 세상은 더 복잡해야 한다고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만 딱 그만큼만 더 복잡해야 하는 거라고 반항했던 시기였다.

 이 세상이 조금만 더 복잡했다면 말이다. 분명 이런 곳이 있을 거였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돈을 물 쓰듯 쓸 수 있는 곳. 일 년 내내 잠 안자고 게임 해도 몸이 건강한 곳. 다른 사람이 노벨상을 받아도 내가 칭찬받는 곳, 아무런 일도 안 해도 매분매초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 대접당하는 곳.

 아. 그게 내 소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뤄지기 힘든 소원이었다. 아이폰7이 나오는 시점에서 갑자기 아이폰 20를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남는 건 시간뿐이라서 세상이 복잡해지길 기다리며 사기꾼을 쫓았다. 내 긴 추적은 어느 날 잡지에서 아리요사를 다시 만났을 때 끝났다. 나의 여신 그녀는 은퇴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나도 추적생활을 은퇴하기로 했다. 데킬라 한잔에 그녀의 행복을 빌고 남자답게 모로코로 향했다. 거기 술은 싸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술값이 싸다는 건 루머였다. 이틀 머물고 예상경비를 뛰어넘어서 겨우 하루치 호텔비만 남았을 때 길가에서 토하다가 내 이십억과 부딪혔다. 사기꾼은 도망가고 나는 쫓았다. 아무리 취해도 나는 우사인 볼트만큼 빨리 달릴 수 있었는데 놈은 믿을 수 없게도 나보다 아주 조금 더 빨랐다. 지루해져서 중간에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녀석은 마치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뒤돌아봐서 내 화를 돋았다. 그렇게 다섯 시간 정도 뛰어서 별만 총총한 사막으로 들어섰는데도 술은 깨지 않았다. 역시 소문이 맞았다. 다섯 시간 동안 뛰어도 깨지 않는 술이 그 정도가격이면 싼 거였다.

 뛰다보니 갑자기 현대식 백층짜리 빌딩이 나타났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 사막의 하늘 아래 빌딩의 유리벽이 번쩍였다. 좀 뜬금없긴 했다. 어쨌든 이 부분부터는 필름이 끊기는 시점이라서 기억이 단편적이긴 했다.

 기억에 따르면 나는 삼십억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갔다. 닫힌 문을 열어보니 녀석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유에프오와 키어누 리브스가 있었다. 둘 중 하나만 나타났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어쨌든 키아누는 커다란 페르시아 양탄자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내게 핑크알약을 권했다. 내가 파란알약과 하얀 알약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깨달음 얻어야 하느니 뭐니 하는 화두는 이제 물 건너갔다면서 가장 핫한 트렌드를 따르겠냐고 물었다. 그냥 트렌드라고 했으면 시큰둥했겠지만 가장 핫 하다니. 그것도 키어누가. 그게 뭐냐고 묻기 전에 나는 먹어버렸다. 상쾌했다. 앞으로 인생이 복잡해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키어누는 나를 잡고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멋지고 쿨하게 날아갔다고 하면 핫 트렌드에 뒤떨어진 거였을까. 우린 아주 심플하게 그냥 떨어지기만 했다. 오랫동안. 떨어지면서 생각했다. 이러다가 곧 머리가 박살나겠지. 그런데 머리가 박살나는 게 언제부터 핫한 트렌드가 된 거지? 떨어지는데 집중해서 다행이었다. 창피하게 그 말을 겉으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으니까.

 어쨌든 눈을 떠보니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살아 있었다.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니 발 앞으로 무언가가 투둑하고 떨어지더니 바닥을 굴러가기 시작했다. 오백원짜리 동전 크기만 하고 실 같은 줄들이 달려있는 작은 공이었다. 공은 또르르 굴러가서 벽을 마주하고 멈췄다. 나는 다가가서 손으로 공을 집어 올렸다. 어디서 많이 봤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야 그게 핏물이 박힌 내 눈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젠장. 나는 손으로 왼쪽 눈이 있었던 자리를 만져보았다. 작은 동굴처럼 비어있었다. 이미 응고한 피고름만이 석순처럼 매달려있었다. 고통은 없었다. 서서히 안쪽을 후벼보았지만 아픔은 없었다. 먼지가 달라붙은 눈을 다시 끼어 넣고 깜박거렸다. 보였다. 시신경과 시상하부의 연결성이니 뭐니 하는 게 이젠 다 루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생물학교과서도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세상이 아름다웠다.

 힘을 얻었다. 다시 시작해보기로. 백층 건물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요 핑크 알약이 물건이라는 것을. 핑크알약의 첫 번째 대리점이 그 건물에 있었다. 왜 모로코의 건물 옥상에 첫 번째 대리점을 세웠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키어누의 취향이니까 존중하기로 했다. 유에프오를 닮은 설치미술품을 광고판으로 사용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 알약을 팔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키어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설마 그가 사람을 정신은 살아있는 좀비로 만드는 지루한 약 따위를 핫한 트렌드라고 하진 않았을 거였다. 뭔가 더 응용할 거리가 있을 거였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삼등석에 앉아서 줄곧 금의환향을 꿈꿨다.

 그런데 젠장. 귀국 행 비행기 안에서는 몰랐다. 내가 외국에 너무 오래있었다는 걸. 고국이 어떤 곳인지 잊다니. 홍대에서 시작된 핑크알약의 쓰나미가 대한민국 전체를 몰고 지나간 후였다. 내가 키어누를 만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원본 개봉 전에 이미 복사본부터 돌았다고 했다. 복사본은 값도 싸서 내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에는 한류를 타고 태평양의 외딴섬주민들과 사하라의 베두족에게까지 퍼진 상태였다.

 고국에 도착하니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가게들이 성업 중이었다. 신체장기 전당포 및 판매점. 팔을 맡기고 나무 팔을 대여한다든가 하는 곳들이었다.

 핑크 알약은 인류를 뇌만 살아있는 좀비 같은 몸으로 진화시켰다.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늙거나 병에 걸리지도 않았다. 팔이 뜯겨도 다리가 잘려나가도 고통이 없었다. 몸은 부속품처럼 갈아치워졌다. 뇌만 살아서 그 모든 것을 지켜봐야했다.

 내 노땅들까지 그 알약을 먹었다는 걸 알았을 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고국에 두고 떠났던 세 명의 노땅들. 오십대 아버지. 육십대 조부. 팔십대 증조부. 백세 고조부. 할 일은 없고 시간만 남는 그들은 하루 종일 서로 싸웠다. 난 그걸 하루 종일 봐야했다. 내 삶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해졌다.

 “발길질 안 한다고 했잖아.”

 아버지의 발길질에 고조가 바닥에 넘어졌다. 고조는 피부밖에 안 남은 앙상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고조는 건드리지 마. 개새야.”

 나는 아버지를 발로 찼다. 늙어서 아이같이 된 고조할아버지는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작은 몸이 진짜 아들같이 느껴져서 이젠 촌수가 헷갈린다.

 “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할아버지가 나를 발로 찼다. 할아버지는 레슬링이 아니라 축구선수를 했어야 했다. 축구선수집안도 아닌데 우리 집은 발길질로 통했다.

 “조상님들이 땅속에서 일어나시겠네.”

 증조가 고조를 일으켰다. 둘이 경찰서 바닥에서 십 분이나 걸려서 몸을 일으키고 나자 그제야 경사 한 명이 어슬렁 걸어왔다. 내가 사는 동네에선 이런 하극상 장면이 흔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경사가 손사래를 치는 동안 아버지가 슬쩍 내게 발길질을 했지만 곧 내 태클에 걸려 넘어졌다.

 “내가 죽어야지.”

 할아버지는 매일 중얼거렸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노땅들은 이제 영원히 살 건데 난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궁금했다. 궁금증은 딱 한 달 만에 풀렸다. 더 이상 일 초도 견딜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귀국해서 돌아온 한 달 뒤 나는 두손발 다 들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키어누의 알약의 효험은 결국 인간을 불사로 만드는 게 다였나 싶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불사로 만들어. 내 팬심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고조가 팜플렛을 건넸다.

 갑자기 닥친 불사의 삶에 당황하신 분에게-네메시스 네트워크 마케팅-

 타이밍이 좋았다. 자살이 트렌드가 된 때였다. 하지만 자살은 비쌌다.

 “내가 죽어야지.”

 사람들은 매일 중얼거렸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핑크알약 후 인간은 불사가 됐다. 을 매도 살아나고 물에 빠져도 살아남았고 교통사고를 당해서 몸이 반쪽만 남아도 살아남았다. 불사가 된 몸을 죽이자면 불법 폐차시설을 이용해 몸을 종잇장처럼 만들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했는데 그렇게 해도 완전히 죽기는 힘들었다. 나도 백층에서 떨어져봐서 알았다. 머리가 박살나도 가발을 쓰면 됐고 심장이 고장나도 엔진을 달면 됐으니까. 시신처리. 수거. 처분을 하려면 타인의 서비스를 이용해야 했다. 그 서비스는 아직 비쌌다. 틈새시장이 생긴 거였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은 죽었거나 혹은 더 나쁜 상태입니다.”

 그가 입을 떼자 심상치 않은 환호성이 울렸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부자연스러움으로 가득 찼다고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먹을 필요도 없는데 먹고, 입을 필요 없는데 입고, 쾌락기관이 기능을 멈췄는데 더욱 더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몸은 욕구를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뇌의 욕망은 끝도 없이 커갔다고 했다. 스피커를 최대 볼륨으로 설정해 놓았는지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접시가 미미하게 흔들거렸다.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젓가락, 숟가락을 슬쩍 내려놓았다. 그는 단상에 서서 점점 더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화를 냈고 그가 혼낼 때 마다 사람들은 점점 더 흥겨워했다.

 “죄악입니다. 영원히 반복되는 이런 부자연스러움은 죄악입니다. 인류는 상품소비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끝도 없이 나오는 최신핸드폰, 신상품들, 신 여행지들, 맛 집들을 소비하기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소비하지 못하는 인간은 폐물취급입니다. 이 죄악의 사이클을 멈춰줘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네트워크 마케팅 사장이 말을 마치자 박수소리가 났다. 나는 하품을 참았다. 고조가 박수칠 때 같이 박수치고 고조가 환호할 때 같이 환호를 해줬다.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이년 전에 전 세계 적으로 핑크 알약이 돌 때가 딱 이랬다.

 통조림에서 갓 꺼내 각종 화학조미료에 버무린 뒤 예쁜 접시에 담아 낸 죽순을 보았다. 맛을 느낄 수는 없지만 마음대로 상상하기 나름이었다. 브레인 좀비라고 부르는 이유는 뇌는 아직도 기능했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포크로 집어 입에 넣으려는 찰나 고조가 내 팔을 잡았다.

 “자 이제 시작이야.”

 내 팔을 잡은 고조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한두 번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단상에 선 사장 앞으로 한 노인이 올라가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아마도 모든 이들이 그랜드볼룸에 들어온 이유가 이 장면 때문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인류의 영혼은 불로장생하는 몸에 영원히 갇혀버렸습니다. 죽음이 없는 삶. 더 이상 숭고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장이 묻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게 옷을 다려입었지만 초라한 행색이었다. 반칙이었다. 얼핏봐도 자식들에게 잊혀지고, 숭고한 게 뭔지 잊어버린 지 오래인 삶을 살고 있는 이에게 저런 질문을 하다니. 답이 뻔하지 않은가. 주위를 둘러보니 거의 노인들이었다. 그들보다 더 우울해 보이는 젊은이들과 장년층도 더러 섞여있었다.

 “신이 당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신에게 돌아가서 자연으로 새롭게 부활 합시다!”

 남자가 소리 지르며 두 손을 어깨위로 들어 은색 병을 흔들었다. 그의 쇼맨쉽에 환호는 극에 달했다. 남자는 병 안에 담겨있던 액체를 노인의 머리위에 뿌렸다. 삼 리터 정도 되는 액체가 노인을 다 적실 때까지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저러다 감기 걸리지. 좀 걱정이 되려고 참에 일이 벌어졌다. 연기와 함께 노인이 사라진 것이다. 갑작스런 연기는 바닥에 있던 드라이아이스가 폭발한 효과라고 짐작 가능했지만 노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남자가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자, 이제 그 분은 자연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말로 설명하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남자는 친절하게도 바닥에서 노인의 잔해로 추정되는 하얀 가루를 집어 사람들에게 일일이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 장면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일종의 상징적인 쇼였고, 노인은 단상 밑으로 숨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충격이었다. 어쨌든 죽음을 파는 회사라는 건 그대로였다. 특수약물을 먹고 불사의 몸을 죽인 뒤 깨끗이 화장시켜준다는 내용의 상품을 파는 회사. 상품성은 확실했다.

 일반인에게 이제 죽음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교통사고를 당해서 몸이 반쪽만 남은 사람도 살려냈고 늙어서 죽어야할 사람들도 물론 살았다. 죽음이 인류사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이 된 이유였다.

 어쨌든 난 고조의 쇼핑취향이 걱정됐다. 평범한 다단계설명회에 가서 집안을 말아먹는 조상이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살인쇼라니. 아무리 자살이 트렌드가 된 시대라도 내가 따라잡기에는 좀 과한 스타일이었다.

 다행히도 사장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제 눈에는 보입니다. 한 명이 세 명을, 또 그 세 명이 다른 세 명을 데려오는 모습이. 죽음의 네트워크는 순식간에 만들어질 겁니다. 빠른 시간 안에 전 인류를 평안으로 인도할겁니다. 확신합니다.”

 나도 박수를 쳤다. 반가웠다. 드디어 끝나는 구나, 했을 때 고조가 내 귀에 속삭였다.

 “네게 유산을 주는 대신 네 묫자리를 미리 사놨어.”

 고조는 뭉클해하는 표정을 보며 나는 기가 막혔다.

 “저런 사기꾼을 믿으시는 거예요?”

 “삶도 능력이야. 라이프스타일 창조력. 생존이 아니라 생활이 중요한 시대니까. 난, 육십에 죽었으면 행복했을 사람들. 장사장은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서 불행해하는 사람들을 보내주고 대신 커미션을 받는 것 뿐이야.”

 고조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세뇌를 받았는지 그대로 읊고 있었다.

 “꽤 비싼 커미션이잖아요. 사람들의 전 재산이니까.”

 “그래봤자 모두 푼돈이야. 그들이 살아있었다면 제대로 썼겠어? 쓸모 있는 소비자행세나 할 수 있었냐고? 어쨌든 우리가 그걸 사장한테 몰아주니 꽤 쓸 만 한 돈이 되잖아.”

 고조에게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말이 되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년에 거쳐 생각이 점점 바뀌었다. 처음에는 그럴듯하던 그 말이, 개인투자자를 모아 꾸린 내 사업이 망한 일 년 뒤에는 그럴듯하게 들렸고 이년 뒤 다른 사업을 건드리다가 개인파산에 이르자 매우 그럴듯하게 들렸다. 정기적으로 고조와 함께 공짜 점심을 먹으려고 세미나에 들르는 동안 듣던 사장의 말이 세상에 남은 단하나의 진리처럼 들리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고조, 증조와 나는 결론을 내렸다.

 “특수약물을 사고 싶다고?”

 사장은 내 어깨를 따스하게 두드렸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만 명에 가깝게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믿었다.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더 신뢰가 갔다.

 하늘이 정말 파랗고 등산가기 좋던 그날, 우리는 사장과 함께 화장터 뒤의 야산에 올라갔다. 나를 특별히 왔다는 사장이 부르는 찬송가까지 들으며 그가 주문한 최신식 스틸 관에 누웠다. 전 재산과 바꾼 특수약물을 삼킨 뒤 얌전히 기다렸을 때만 해도 그 후 육 개월 동안이나 죽지 못하고 땅 속에 갇혀있을 줄은 몰랐다.


2. 이미 한번 죽어봤으니 두 번째로 죽어보는 건 좀 쉽지 않을까,라고?

 “살아계십니까?”

 관 뚜껑을 열어준 건 경찰이었다.

 “글쎄요.”

 나는 관속에 누워 꼼짝달짝 못한 채 우물거렸다. 확신이 없었다.

 “살아있다고 치고 이젠 제발 꺼져줘.”

 희망고문에 힘이 든 건 레논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몸이 뒤집어져서 버둥거리는 그의 까만 외피가 햇살에 번쩍거렸다. 갑자기 기운이 났다.

 “우리 둘이라면 같이 잘 해쳐 나갈 거야.”

 나는 몸부림치는 레논을 살포시 집어 들고 세상으로 나갔다.

 “이 사람이 당신을 묘에 묻은 가해당사자죠?”

 경찰서에서 경사는 네메시스사 사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맞는 것 같긴 한데 제가 기억하기론……”

 나는 마지막으로 본 사장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에 사장은 내게 단언했다. 이걸 먹으면 몸이 자연스럽게 썩습니다. 묘안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은 이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장의 머리 뒤로 환한 오라가 번쩍이는 걸 분명히 보았다. 그때는 정말 예수가 재림한 걸로 보였다.

 “악질적인 불법 청부살인 다단계업자입니다.”

 사장에 대한 경찰들의 감상은 좀 달랐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다단계업체로 끌어들여 죽여주겠다고 거짓으로 약속한 뒤 재산을 가로챘습니다. 사장은 도망중이고 매장기록을 찾아내서 당신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두 분과 아버님도 구해드렸습니다.”

 경사는 친절했다.

 “감…사합니다.”

 우선은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약간 문제가 있네요. 무병장수시대이후(경찰은 핑크알약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살이 범죄가 된 건 아시죠?”

 “아니오.”

 “걱정 하지 마세요. 약간의 벌금만 내시면 됩니다.”

 “네? 일인당 오천 만원이라니요. 그런 돈 없어요.”

 “아, 그러세요? 그러면 구금형으로 하셔도 좋고요. 구치소에서 육 개월입니다. 그럼 하룻밤동안 생각해보시고 말씀주세요.”

 내가 이의를 제기하자 경찰은 고개를 흔들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으므로 자살은 인류의 종말을 앞당기는 중죄이니 재판으로 가도 소용없다고 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내 생각도 바뀌고 있었다. 남는 게 시간인데 뭐. 그까짓 구치소에서 육 개월 쯤이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노땅들도 동의했다. 모두들 행복하게 구치소로 들어갔으나 해피엔딩은 아직 아니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구치소나 감옥이 몸에 안 맞는다는 걸. 모든 건 닥쳐봐야 깨닫는 거다. 힘들었다. 병속에 갇힌 채 경찰서 보관함에 넣어진 레논도 삐졌는지 더 이상 나와 말도 섞지 않았다. 이렇게 힘들 때 친구가 등을 돌리다니 야속했다. 구치소 창살 틈으로 멀리 경찰서 텔레비전이 말을 걸어왔다.

 “신체 맡기실 분은 앞뒤가 똑같은 번호로 연락하세요. 삼 개월 이상 안 찾아가면 자동 처분됩니다.”

 “저게 무슨 소리죠?”

 어느새 경사와 친해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당신 대신 벌금을 내 줄 곳이라는 거죠.”

 경사가 미소 지었다.

 친절한 경사가 합법적으로 운영 중인 신체장기 전당포 앞으로 나를 바래다주고 나서도 한참동안 나는 문밖에서 망설였다.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을 맡길지 혼란스러웠다.

 “네 머리통은 커서 모자가 안 어울리니 쓸모가 없고, 길어야 할 다리는 짧고 짧아야 할 허리는 길어. 이 기회에 그냥 다 맡겨 버리고 다른 걸로 바꾸는 게 낫겠는데. 그나마 눈이 제일 낫지. 너무 커서 소랑 구분이 안 가긴 하지만.”

 아는 척 하긴. 나는 지그시 유리병을 흔들어서 레논에게 현기증을 선사했다.

 할로겐 램프로 대리석벽이 번쩍거리는 으리으리한 전당포를 들어선 나는 놀랐다. 세상에나. 그렇게 많은 눈은 처음 봤다. 안경점 같은 희번뜩한 조명아래 일렬로 늘어선 흰색에 가까운 동그란 알들이 사람의 눈이 맞다면 말이다.

 그 넓은 전당포 안에 주인은 안 보였다. 꼬마 남자 한 명 빼고는.

 “난 열두 살이야.”

 꼬마가 말했다.

 “뭐라고?”

 “난 열두 살 몸이라고. 사람들은 항상 내가 몇 살인지를 제일 궁금해 하니까 먼저 말하는 거야.”

 조금 지겹다는 듯이 꼬마가 말했다.

 “사장님은 어디 계시니?”

 “내가 여기 사장이야. 한때는 서른 살이었지. 몸을 다 교체해서 그래. 꼬마가 된지는 얼마 안됐어. 여자 몸을 쓴 적도 있고 키 큰 어른 남자의 몸도, 키 작은 남자의 몸도 써봤지. 내 몸속에 내 꺼라곤 뇌밖에 없어.”

 꼬마가 영특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저 눈도 분명히 다른 사람 것일 게 분명했다. 나는 양쪽 눈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꼬마에게 건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검어진 세상에서 꼬마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모든 걸 한꺼번에 원해. 여우처럼 교활하고, 소처럼 강하길. 토끼처럼 빠르고, 곰처럼 용감하길. 쥐처럼 조용하고, 집처럼 크길.”

 꼬마는 흥얼거렸다.

 “네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떤 맛일까. 내 뇌는 모든 걸 느끼길 바래. 안타까운 건 그 몸들을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다는 거야. 아아아아…난 모두 다. 난 모든 걸 다 느끼길 원해.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늙으면서 젊고. 문 것처럼 깊고, 밤처럼 어둡길. 노래처럼 달콤하고, 틀린 것처럼 옳길. 가족처럼 강하고…아아아아아. 난 모든 걸 다 원해. 한 번에 다 느끼길 원해.”

 “알았으니까 제발 노래는 하지 마.”

 내가 손사래를 하자 꼬마는 흥을 깨져서 기분이 나빴는지 우당탕거리며 눈앞이 컴컴해진 내게 플라스틱 안구를 넣어주었다. 정말 불의 쉿이다. 플라스틱 눈을 껴도 잘 보이기만 하니 말이다. 약이라고 생각하면 낫는다는 플라시보 이론이 기존의 과학이론들을 뒤집는 시대였다. 생각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이론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 꼭 내 눈을 찾으러 올 거야. 내 눈이니까. 부탁이니 잘 간직해줘.”

 “다들 그렇게 말하지.”

 꼬마는 시큰둥했다.

 뒤돌아서니 생각났다. 이제 벌금을 내고나면 다시 갈 곳이 없어진다. 신용이 일부분 회복되기까지 일 년은 걸릴 텐데 할 일을 찾기는 쉽지 않을 거였다. 그때 전당포 창문에 붙은 전단지가 말을 걸어왔다.

 알바구함. 숙박제공.

 딱딱한 말투였지만 왠지 신뢰가 갔다. 하루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알바구함. 숙박제공이라는 전단지의 말에는 보수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걸.

 “어차피 벌면 다시 쓸 거잖아. 먹거나 입을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자는 곳만 있으면 되지.”

 꼬마가 쉽게 말해서 그런지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하루가 지났는데도 멀쩡했다. 이틀도 사흘도 문제없었다. 먹을 필요도 새로운 옷도 필요 없는 생활도 좋았다. 내 친구 레논에게 먹일 벌레를 잡아주는 일도 할 수 있었다. 음식이 없으니 파리도 없어서 일이 끝난 뒤 몇 시간이나 가게 앞 보도블록을 뒤집어 흙을 들쑤셔야 했다. 사방이 이십 센티인 플라스틱함에 흙을 채워 넣고 벌레를 묻어놓으면 며칠 후에 부패가 시작되자마자 레논의 식성이 드러나곤 했다. 나흘이 지나자 벌레 색출할 기분도 힘도 나지 않았다. 좋은 방법을 가르쳐준 건 텔레비전이었다.

 “애완동물 끼니 주시기 힘드시죠? 깜박하고 사료를 안 사놓으셨다고요? 그럴 땐 플라시보 하세요.”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옥수수분말이었다. 분말을 쓰리디프린팅으로 인쇄해서 먹이모양으로 만들어서 주기만하면 됐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옥수수가루만 먹으면 육식동물은 죽어야했다. 하지만 애완동물의 식습관에 대한 소문도 인간의 것처럼 루머에 불과했다는 게 곧 밝혀졌다. 플라시보 옥수수분말은 먹이처럼 생겨서 먹이를 먹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 본능적으로 거부하던 동물들도 몇 번 굶으면 본능이 바뀌었다. DNA속에 숨어있던 형질이 발현됐다고도 했고 진화라고도 불렀다. 나도 레논을 플라시보 가루를 먹도록 진화시켰다.

 아르바이트치고 일은 많은 편이었다. 하루 종일 다른 사람들의 팔, 다리, 얼굴들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주면서 바삐 보냈다. 꼬마의 모습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어느 날 긴 다리로 교체하니 껑충 키만 커서 언발란스했는데 어느새 머리통도 어른 걸로 바꿔버렸다. 그 안에 있던 뇌도 바꿨으면 했다. 말할 수 없이 영리했지만 변덕스러운 꼬마였다. 이제 겉으로 보기에 꼬마는 스무 살은 되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심장이나 팔, 다리 등을 내놓고 다른 사람의 장기 등으로 바꿔가기에 바빴다. 내가 보기엔 거기에서 거기였다. 유행에 따라 다리에 엔진을 달기도 하고 머리에 고성능컴퓨터를 내장하기도 했지만 모든 유행이 그렇듯 영원하진 않았다. 그냥 돌고 돌 뿐이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영원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인터넷을 통해 본 아리요사의 최근 모습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했다. 처음에 내가 그녀의 뭘 보고 반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게 뭐였지. 그녀의 코였던가? 아니면 눈. 입술? 혼란스러운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둘게.”

 입사한지 세 달을 하루 남겨놓았을 때 나는 퇴사를 선포했다. 이번엔 근무기간이 꽤 길었다. 무덤에 오래 갇혀있던 충격이 오래갔기 때문이었다. 충격이 옅어지자 숙박뿐만 아니라 숙박과 더불어 보수도 제공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들이 매우 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네 고조할아버지 몸이 좀 작다고 했던가?”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꼬마가 소리쳤다.

 “예전에 복싱선수가 팔이랑 다리를 맡겼는데 영 찾으러 오질 않네. 팔아도 되긴 하지만 난 돈이 남아돌고. 너한테 주면 더 쓸모 있겠지?”

 꼬마는 눈을 반짝였다.

 “물론이지. 정말 쓸모 있을 거야.”

 그렇게 나는 꼬마에게 낚였다. 전당포에 남아있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였다. 며칠 후 요양원에서 나온 고조가 복싱선수의 팔로 아버지에게 어퍼컷을 날리는 장면을 보고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나도 자연스럽게 집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숙박을 집에서 하니 자연스럽게 보수도 올라갔지만 자연스럽게 나는 꼬마의 노예 비슷하게 되 버렸다. 고조의 팔다리 값만 천문학적인데 양심상 그만두기가 좀 그랬다. 게다가 천문학적인 돈을 마구 뿌리는 꼬마의 사업비결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그만둘게.”

 입사한지 이 년을 하루 남겨놓았을 때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꼬마의 사업비결은 따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지 오래였다. 그는 천재였다. 인기 작곡가에 건축가, 과학자. 이러다간 노벨상이라도 탈 태세였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그는 나를 파트너로 여긴다지만 노예로 부렸다. 변덕이 들끓었으므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랐다.

 “이상형이 누구야?”

 그만둔다는 말에 갑자기 친화모드라니 너무 뻔했다. 꼬마는 일도 잘하고 성품도 믿을 수 없이 좋은 나를 잡아두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이놈의 인기.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렇게 직장에서의 긴 우정이 시작되는 거였다. 나는 천천히 내 소중한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다. 내친김에 당신의 이상형은 누구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사실 그의 이상형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았다. 꼬마의 취향은 사실 좀 걱정스런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일 오전 열시까지만 일해 줘.”

 꼬마는 끝내 내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명령했다.

 “하이 헬로 하와유?”

 일을 그만두기로 한 오전 열시에 내 입에서는 방언이 터지고 있었다. 할렐루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나는 서버렸다. 선 것은 그게 아니라 내 몸체가 마비됐다는 뜻이었다. 핑크알약을 먹은 인류 중 누구도 더 이상 그걸 세울 수 없었다. 그래도 난 분명히 깨달았다. 나의 가상의 그것이 선 것을. 이상한 일이었다. 생식기관 따위는 무능해졌고 죽지 않는 무생물체에 불과해도 예쁜 여자를 보면 동하다니.

 난 이미 두 번 죽었지만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먹거나 입거나 섹스할 필요가 없게 되자 그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일종의 환상통이었다. 다리가 잘려도 관절염을 느끼고 폐경이 되도 월경증후군은 계속되고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도 더 살아있는 것처럼.

 또각또각.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힐 소리가 울렸다. 멈춘 지 오래된 내 심장도 그 소리에 맞춰 같이 뛰었다.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그녀를 바로 눈앞에 두자 방언은 사라지고 직원용 대사만 읊을 수 있었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리요사였고 손은 손 모델. 가슴은 가슴모델, 다리는 다리모델을 닮았다.

 “저 앤 아리요사가 아냐.”

 레논이 말했다. 플라시보가루만 먹어서 그런지 수명은 늘어났지만 왠지 말수도 적어져서 거의 잊고 있던 참이었다.

 “내겐 그녀로 보여.”

 나는 레논이 사는 유리병의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의 말소리도 잦아들었다.

 “예쁘다!”

 고조가 그녀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나는 재빨리 서랍에 숨겨놓았던 햄버거를 창고 쪽으로 던졌다. 고조는 창고 안에 들어갔고 나는 문을 잠가버렸다.

 “난 무서운 게 싫어. 열어줘.”

 고조가 소리 질렀다. 나는 뒤돌아 카운터로 돌아왔다.

 “여기, 플라시보 가루도 있나요? 어머낫.”

 어느새 카운터 앞에 서있던 그녀가 갑자기 뭔가에 걸려 넘어지면서 내게 쓰러졌다. 향기가 쿨럭 몰려왔다. 재채기처럼 갑작스러운 침입이었다. 온몸의 세포로 향기방울들이 침입했다.

 “죄송해요.”

 그녀가 울상 지으면서 동시에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나는 미소 지었다. 우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얼마나 필요하시죠?”

 나는 열심히 먼지를 털고 포대를 꺼냈다. 플라시보 가루는 안 판다. 모든 고객들은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녀만은 그 반대로 알아도 좋았다.

 “훌륭해.”

 꼬마가 박수를 치며 나타났을 때 나는 잠시 헷갈렸다. 그녀에게 거는 내 수작이 훌륭하다는 건지. 꼬마의 사적인 물건을 그녀에게 팔아넘긴 게 훌륭하다는 건지.

 꼬마가 모든 걸 설명해주고 난 삼분 뒤에도 나는 계속 헷갈렸다. 기뻐해야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안 느끼기로 했다. 이제야 퍼즐이 풀렸다.

 꼬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 너 이제 여친생겼구나.”

 레논이 놀리는 소리가 들려서 반가운 마음에 유리병을 열었지만 죽은 벌레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플라시보 먹이 주는 것을 잊어 버린지 꽤 되버렸다. 혹시나 해서 창고를 열어보니 고조는 자기가 싼 똥을 휘저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고조가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냄새가 심해서 그냥 문을 도로 닫으려는데 고조가 나보다 빨랐다. 고조는 순식간에 가게 밖으로 도망 가버렸다. 굳이 지금 쫓아가봤자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귀찮았다.

 “좋아. 계속 일할게.”

 내가 즐겁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밖에서 굉장한 소리가 났다.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꼬마가 노려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구역질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뿌린 염산을 맞았는지 고조의 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게 기억의 끝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내리쳤다.

 “맹세코 저는 살인청부업자 사기꾼이 아닙니다. 저번에는 실패했지만 기술을 발전시켜서 이번만은 고객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네메시스사 사장의 얼굴이 희미했다.

 내 몸이 염산에 녹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은 죽었거나 혹은 더 나쁜 상태입니다. 사장이 예전에 했던 소리를 반복했다. 이번엔 그가 예수같이 보이지는 않았고 그냥 미친놈같이 보였다. 나를 단칼에 죽일 미친놈. 아, 이번엔 정말 죽었구나 싶었다. 그게 세 번째 죽음의 경험이었다.

 묘에 갇혀있을 때가 기억났다. 내 몸은 옴짝할 수 없이 고정됐다. 다리와 팔과 몸통과 발가락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다리와 팔은 나를 보호해주고 씻어주고 밥을 먹여줄 국경수비대였고 정부였다. 하지만 다리와 팔과 손가락과 머리칼은 더이상 내가 아니었다. 옴짝달짝 못하는 몸에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곧 몸은 감각을 잃고 멈춰버렸다. 하지만 사고는 끝을 모르고 행진했다. 시간이 지나자 내 몸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희미해졌다.

 궁금했다. 내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몸의 감각이 없어진 것은 국경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나는 손가락부터 시작되어 발끝에서 끝났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영토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제주도까지 라는 사실처럼 확고부동했다. 나라의 영토란 것이 시간에 따라 영역을 넓히거나 좁히듯이 나 또한 열 살때와 두 살 삼십 살 되면서 변하고 달라졌다. 평생 변화를 겪어왔던 터이라 이 모든 일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내가 아주 오래된 폐가같이 변하자 새들이 날아와 쉬다 가고 그리고 어느날부터인가 부터는 낯 모르는 사람들도 내 이름이 새겨진 묘비를 무심히 넘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3. 드디어 셰어하우스 입주

 쿵.

 이게 뭐지.

 쿠르릉쾅 슈앙슈앙.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뵈는 게 없으니 상상이 제멋대로 갔다.

 아리요사?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해봤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평생 운이 안 좋았지만 이번만은 느낌이 좋았다.

 눈을 떴다. 정말 아리요사가 있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녀와 나는 둘만의 친밀하고 물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왜 나는 이런 친밀한 순간에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

 “난 모든 걸 한꺼번에 원해. 여우처럼 교활하고, 소처럼 강하길. 토끼처럼 빠르고, 곰처럼 용감하길. 쥐처럼 조용하고, 집처럼 크길.”

 분명히 내가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아아아…난 모두 다. 난 모든 걸 다 원해. 문 것처럼 깊고, 밤처럼 어둡길. 노래처럼 달콤하고, 틀린 것처럼 옳길. 가족처럼 강하고…아아아아아. 난 모든 걸 다 원해. 한 번에 다 원해.”

 노래를 멈추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넌 내가 원할 때만 발언권이 있으니까.”

 꼬마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노래 소리도 그의 목소리였다.

 “난 모든 걸 다 원하거든.”

 천장에 걸린 거울 속에서 내가, 아니 꼬마가 말했다. 꼬마의 몸이었지만 나이기도 했다.

 “팔, 심장. 엔진. 인공지능이식 다 좋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중요한 거야. 네 몸이 다 부서지기 전에 그 미친 놈에게서 너의 뇌를 가져올 수 있었어.”

 꼬마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거울 앞에서 이상한 춤을 췄는데 참고 볼 수가 없는 춤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권리는 내게 없었다.

 “네 의식을 통해서 그녀와 하니까 기분이 색달라. 모태솔로라는 건 이런 기분이었구나.”

 꼬마가 감탄했다.

 타인의 뇌의 의식을 칩에 담아서 몸에 이식하는 불법시술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들은 브레인 좀비라고 불렸다. 타인의 뇌를 강탈하는 좀비들. 하지만 그게 진짜로 벌어질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나한테.

 꼬마 속의 다른 뇌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하이. 헬로. 하와유.

 “난 여우처럼 교활하지.”

 사업가의 뇌가 말했다.

 “난 밤처럼 깊고.”

 음악가의 뇌가 말했다.

 “우린 소처럼 강하지. 우린 협력해야 해.”

 다른 주거자들이 말했다.

 “우린 꼬마의 몸 안에 갇혀있는 거야?”

 내가 물었다.

 “처음에는 적응이 좀 힘들 거야. 꼬마는 우리의 주인이긴 하지만 우린 각별한 파트너 사이야.”

 “자유는? 난 혼자 있고 싶다고.”

 “힘이 없이 진짜로 자유로웠어? 이렇게 해야 다른 인간들에 비해 경쟁력이 있어.”

 “몸은 일종의 공동주택이야. 평소에도 별로 쓰지 않았잖아. 실컷 가상현실하고 게임하고 플라시보하면서 기다리면 돼. 그런 거 할 땐 몸이 거추장스럽잖아. 경제적이지.”

 “뭘 기다리는데?”

 “꼬마가 부르기를.”

 “우린 회의도 하고 잡담도 하고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지.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있지. 외롭지 않아.”

 “뇌 하렘이지.”

 누군가가 비아냥거렸다.

 “시끄러. 꺼버린다.”

 꼬마가 중얼거렸다.

 “바아아아…….”

 한마디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고조라는 걸 알아챘다.

 “시끄러.”

 꼬마가 고조를 닫아 버렸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는지 알 수 없었다. 바…뭐지. 바…보? 바…안가워?

 “내 선택이 잘못됐어. 너희 고조를 이식하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말이 많아. 이젠 됐어.”

 꼬마가 한숨을 쉬었다.

 “뭐가 됐다는 거야?”

 내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많다니…한마디도 채 안 했는데. 꼬마가 허락할 때만 대답하는 게 룰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고조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지만 거기에 대해 물을 수 없는 게 또 하나의 룰이었다.

 이 모든 일에 적응하는데 열흘이 걸렸다. 새로 나온 게임을 마치기에 걸린 시간이었다. 레논처럼 나도 변화를 본능적으로 거부했지만 곧 본능도 바뀌어주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아리요사와 사이가 좋아진 것도 다행이다.

 “모집 글 아직이야?”

 꼬마가 성화다.

 “다 됐어.”

 나는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셰어하우스 입주 모집-

이런 집 어떠세요? 돈이 없는 사람들도 돈을 물 쓰듯 쓸 수 있는 셰어하우스. 일 년 내내 잠 안자고 게임 해도 건강함. 다른 사람이 노벨상을 받아도 내가 칭찬받는 곳. 언제든 입주가능.
자격: 나이불문. 신체 건강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음. 발명, 수집, 오지 탐험경력 등 특이한 경력환영.
당신이 셰어하우스에 입주하고 싶은 이유는 무한하다. 아직 그 이유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몇 개월 전 만 해도 나도 몰랐을 뿐이니까.

 나는 고심해서 단어를 골랐다.

 “다 올렸으면 꺼져.”

 꼬마가 말했다. 나는 꼬마의 몸에 무선 연결된 게임을 시작했다. 그가 부르기까지는 자유시간이다. 이번에는 일주일? 한 달? 능력에 따라 불림을 당해서 그런지 점점 횟수가 적어진다. 고조의 소리를 들은 적도 없지만 그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건 안다.

 어제는 꼬마가 아리요사와 한탕했다. 오늘밤에는 다른 여자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거나 느낄 수는 없었다. 꼬마는 나의 의식을 꺼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는 건 음악가 뇌였기 때문이었다. 키어누가 말하는 핫한 트렌드란 평화적 공존이었나 보다.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사실 알고 보면 참 자연스러운 일이다.

 꼬마가 나를 언제 깨워줄지 모르겠다. 한 달? 일 년? 세상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 입주 삼 개월 차. 현재 여러 분야의 흥미로운 친구들과 동거 중. 일주일에 두 번은 내 이상형 아리요사와 데이트 한다. 물론 다른 날에도 여러 미인들을 만나야하지만 그건 다른 동거인들의 취향이므로 난 신경을 끄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취향이 오염되었는지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들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게 된다. 덕분에 요즘은 신경을 끄는 일 없이 다른 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니터링 정도는 한다.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으니 하루 종일. 이십사 시간. 삼백육십오일. 내가 나서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서 밤낮없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이십사 시간, 삼백육십오일.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

 휴일도 없는데 만족스러운 인생이다. 진정한 브레인 좀비, 셰어하우스인이 되기 위해, 그녀를 만나기 위해, 또 이런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기위해 두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나야 했지만 인생, 이 정도면 목표달성이다.

 마인드만은 럭셔리하고 스타일리쉬한 브레인 좀비의 밤은 길고 아름답다. 쉐어하우스의 시대는 영원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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