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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길윤 정신강탈자

2020.10.01 00:0010.01

정신강탈자

엄길윤

얼마 전 퇴근을 하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쾅! 쾅! 쾅! 누군가 철문을 다급히 두드리는 소리였다. 육중한 쇳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머릿속이 흔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 이상했다. 근처 상가와 아파트에는 철문이 없었다. 혹시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일까 주차된 차를 기웃거렸다. 아니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왔다. 양말을 벗고 TV 리모컨을 집어 드는데 다시 철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쾅! 쾅! 불쾌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눈앞으로 철문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얼마나 급하기에 이러는 걸까? 문에 뭔가가 닿는 소리로 짐작해 보건대, 발로 차는 것도 아니고 지팡이나 망치 같은 걸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맨손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어달라고 철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우리 집에 철문 같은 건 없다. 집에서 나와 주변을 샅샅이 뒤져봐도 비슷한 건 발견할 수 없었다. 분명히 철문을 두드리는 소린데 어디에도 철문은 없다. 내가 미친 걸까?

그 이후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철문을 두드릴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녹음해봐도 들리는 건 내 숨소리뿐이었다. 골치가 아팠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일까? 의문은 점차 하나의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다. 머릿속 환청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설명되지 않는 게 있었다. 진동과 함께 느껴지는 철문의 실재감과 그 너머의 인기척이 그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에서 두꺼운 철문이 만져지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땀 냄새와 채취를 동반했다. 마치 실제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이비인후과에 방문해 진찰을 받았다. 돌아온 답변은 귀에는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이었다. 신경외과와 신경내과도 다녀왔다. 결론은 '알 수 없음'이었다. 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다고, 차근차근 병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자며 의사가 신경 정신과를 추천해 주었다. 요즘처럼 마음이 편한 적도 없었는데 웬 스트레스? 내가 좋아하는 인터넷 웹서핑도 실컷 하고 책이나 영화도 마음껏 봤었다. 꿈속에서조차 낮에 보고 듣던 것들이 나올 지경이었으니까. 일단 신경 정신과에 가보긴 하겠지만, 의사의 말이 탐탁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하루빨리 이 소리를 없애야 한다.

한동안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병원에 다녀오고 난 후부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철문에 머리를 들이받는 거로 바뀌었다. 열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걸까. 문 앞에서 고함을 치며 발버둥 친다. 문을 긁고 때리는 소리에 철퍽거리며 끈적한 게 달라붙었다. 비린내가 훅 끼친다. 피다. 이제껏 맨손으로 철문을 두드리느라 손가락뼈 마디마디가 부서지고 피부가 너덜너덜하게 찢겼다. 피 묻은 손자국이 문에 찍힌 게 보인다. 그 앞에서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모습이 애처롭다. 이상한 일이지만 머릿속에서 그렇게 보였다. 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과 후각, 촉각까지 느껴진다. 열어줘야 하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문을 열어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툭, 툭, 툭,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문을 두드린다. 손바닥 살갗이 쩍 하고 철문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얼마나 아프길래 저리 힘겨워하는 걸까? 눈물을 뚝뚝 흘린다. 불쌍하다. 이 정도면 열어줘야 하지 않을까?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직감으로 알았다. 철문에 걸린 빗장이 박살 났다는 것을. 끼이이익.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문이 조금씩 열린다. 안에 있는 게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조심해야 한다.

열린 문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휘몰아쳐 얼굴에 닿았다. 위험하다! 문 뒤에 선 이의 의도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단번에 놈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놈의 목적은 내 정신을 차지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오기 전에 빨리 닫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닫지? 문이 불쾌한 마찰음을 일으키며 틈을 더 벌린다. 놈이 히죽 웃으며 멀쩡한 손으로 철문을 민다. 아무리 닫히라고 중얼거려도 소용없다. 머릿속에서 열리는 문을 무슨 수로 닫는단 말인가? 확실한 건 내가 열어줬다는 거다. 놈이 품은 생각으로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느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놈이 걸어 나온다. 문을 두드릴 때와는 다르게 경쾌하고 단호한 발걸음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정체가 불분명하다. 모습이 흐릿하다. 단지 내 머릿속 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과 놈의 의도와 생각을 읽듯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놈은 내 정신의 일부를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건 놈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같은 상태다. 절대 내 정신을 내줄 수 없다. 무슨 수를 쓰든 쫓아내야 한다.

놈이 또박또박 발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문이 열린 건 곧 놈에게 자유를 준 거나 다름없다. 그렇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저절로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누군가 바쁘게 걷는다. 눈앞의 놈은 아니다. 발걸음이 무척이나 다급하다. 뭔가 큰일이 난 것처럼 뛰다시피 걷는다. 구둣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끼익하며 녹슨 철문이 열린다. 놈이 빠져나온 그 철문인가? 오래전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제멋대로 떠오른다. '쇼생크 탈출'이다. 놈의 짓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놈이 내 머릿속을 뒤져 기억을 보낸다. 감옥을 탈출한 주인공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끽한다. 이어서 주인공의 고발로 온갖 비리를 저지른 교도소장에게 경찰이 들이닥친다. 다시 누군가 걷는 게 보인다. 아니 철문으로 질질 끌려간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양옆에 경찰 두 명이 들러붙었다. 끌려가는 이는 누굴까? 얼굴이 무언가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놈과 나밖에 없다. 놈이 아니라면, 설마 내가?

머릿속에서 내가 놈이 갇혀 있던 철문으로 걸어간다. 보이고 느껴진다. 나를 흉내 낸 이미지 같은 게 아니다. 분명히 나였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멈추지 않는다. 마치 내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것 같다. 갑자기 왜 이러지? 활짝 열린 문 안은 시커먼 어둠뿐이다. 그곳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들어가면 안 된다. 갇히면 놈이 열어줄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 놈은 절대 열어줄 생각이 없다. 그 후에는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놈이 내 정신을 전부 차지한다!

어느새 철문 앞에 다다른다. 닫혀라! 닫혀라! 아무리 외쳐도 문은 닫히지 않는다.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기 위해 달리는 시늉을 해봐도 소용없다. 내 바람은 또 다른 나에게 닿지 않는다. 단절됐다. 내가 문 안으로 한쪽 발을 내디딘다. 놈이 기뻐 날뛴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어쩌지? 다급한 나머지 문이 닫히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어서 철문이 산산이 조각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철문이 쾅! 닫힌다. 들어가다 말고 닫힌 문에 부딪혔다. 뒤로 물러서자 철문에 금이 가더니 문이 박살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 눈 녹듯 사라진다. 철문은 이제 내 머릿속에 없다.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알아챘다. 놈이 나에게 생각을 보낼 수 있는 만큼 나도 맞받아칠 수 있다는 걸. 그럼 감옥으로 걸어가는 행동을 왜 제어할 수 없었던 걸까?

철문이 사라진 건 다행이지만, 그건 당장 놈을 가둘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 무한한 공간에 놈과 나 둘뿐이다. 긴장감으로 숨이 막혔다. 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대로 내 정신을 빼앗길 수 없다. 놈이 내 머릿속을 활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두껍고 질긴 밧줄을 떠올렸다. 그걸 놈의 팔다리에 묶었다. 머릿속에서 놈의 두 손목과 발목에 밧줄이 감긴다. 놈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움츠린 채 넘어진다. 팔과 다리가 꽁꽁 묶여 지면을 짚고 일어날 수 없다. 밧줄을 풀려고 온몸을 꾸물거리는 게 마치 거대한 애벌레 같다. 우습다. 애벌레는 뭘 먹고 살까? 나뭇잎을 갉아 먹으며 산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놈이 묶인 팔을 얼굴 쪽으로 가져간다. 입을 벌리더니 손목을 칭칭 감은 밧줄을 물어뜯는다. 금세 밧줄이 너덜너덜해지며 툭 끊어진다. 믿을 수가 없다. 저 두꺼운 밧줄을 어떻게 이빨로 잘라낸 거지? 생각이 선명치 않아 허점이 있었나? 아니면 줄이 약했을까? 놈은 상체를 일으켜 자유로워진 손으로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된다!

흉악범들에게 사용하는 굵은 쇠사슬로 다시 놈의 발목을 묶는 상상을 했다. 어느새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본 놈이 끙끙대며 몸부림친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비명을 지른다. 쇠사슬은 멀쩡하다. 이번에는 이로도 잘라낼 수 없는지 발목을 움켜쥐며 아파한다. 위잉- 하는 굉음이 머릿속을 울린다. 놈이 보내는 게 분명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보다 더 크고 요란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음이다. 울퉁불퉁한 곡선이 보인다. 천장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자 깜빡거리며 전등이 켜진다. 밑동을 잘린 나무가 쓰러진다. 뭔가가 떠오른다. 바로 전기톱이다.

전기톱을 떠올리자마자 어느새 놈의 손에 전기톱이 들렸다. 놈이 낄낄거리며 전기톱의 시동을 켠다. 조심스럽게 발목에 묶인 쇠사슬로 울퉁불퉁한 날을 갖다 댄다. 불꽃이 튀며 쇠사슬이 끊긴다. 놈이 전기톱을 들고 벌떡 일어선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전기톱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놈은 전기톱을 높이 들어 휘두르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전기톱을 내던진다. 왜일까? 확실한 건 놈은 혼자서 무언가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어 보낼 수 있지만, 그게 다다. 이제야 깨달았다. 놈이 원하는 걸 연상해야 나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그래야 애벌레가 되든지 전기톱을 만든다. 일종의 내 허락이 필요한 셈이다. 그건 머릿속에서 내가 놈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직은 내 정신이니까. 놈이 보내는 생각과 기억들에 반응하면 안 된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어찌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에 이질적인 감각이 흘러들었다. 놈이다. 수작을 부릴 때마다 항상 느껴진다. 마치 한 단어를 오랫동안 볼 때 느끼는 그런 낯선 기분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생생한 고통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해 문을 연 것도 놈이었고, '쇼생크 탈출'을 통해 내가 죄수라는 걸 연상시킨 것도 놈이었다. 이번에는 또 뭘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린다. 병원 응급실이다. 침대에 누운 환자들이 저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른다. 누워있던 환자가 일어나 웩! 하고 구토를 한다. 침대 가장자리에 반쯤 걸친 토사물이 밑으로 줄줄 흐른다. 술을 진탕 마셔 구역질이 나올 때의 그 더러운 기분이 떠오른다. 사방에서 고통에 눈이 뒤집혀 욕하고 호통치는 소리, 차라리 죽여 달라는 울부짖음이 휘몰아친다. 얼마나 아플까?

아니다. 놈의 농간이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된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산소 호흡기를 단 아이가 보인다. 황산 테러를 당해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두 눈을 잃었다. 최고의 고통이 불에 타는 거라고 했던가. 불쌍하고 슬프다. 안쓰러운 마음 한편으로 하나의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거부할 수 없었다. 만약에, 혹시 만약에 내가 저렇게 되면 어쩌지? 온몸에 수백 개의 바늘이 꽂히는 통증이 밀려들었다. 피부가 쥐어뜯기며 녹아내린다. 뜨거운 열기가 몸 안에서 솟아난다. 따끔거리는 수백 개의 통증이 점점 커져 하나로 합쳐진다. 얼른 소매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상의를 들춰봤다. 몸에는 아무 이상 없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도 자꾸 아프다는 생각이 든다. 믿으면 안 된다. 믿으면 그게 곧 현실이다. 살 타는 냄새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운 내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칼로 온몸을 긁어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그저 생각에 불과하다. 그뿐이다. 하지만, 아프다는 생각 자체를 견디기 힘들다. 놈이 포기하면 편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전해 온다. 앞으로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결국, 놈이 원하던 게 바로 이거였다. 안 된다. 절대로. 닥쳐! 이곳의 주인은 나라고!

살갗이 타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통증을 가라앉혀야 한다. TV에서 본 우유 광고를 떠올렸다. 넘실거리는 하얀 우유의 물결, 그게 온몸을 구석구석 감싼다면? 내 몸이 커다란 유리컵 안에서 부드럽게 출렁이는 우유 속으로 잠긴다.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머리까지 우유 속으로 가라앉자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실제로 화상과 우유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지, 우유의 그 부드러운 질감과 투명한 하얀색이 화상의 고통을 사라지게 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입술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놈의 짓이다. 이번에는 대체 뭘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곧바로 불그스름한 사과, 빨강 신호등, 붉은 스포츠카, 새빨간 막대사탕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놈이 보내는 기억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빨간색이라는 것. 아차! 온몸을 어루만지던 하얀 우유에 빨간 점이 여기저기 생기더니 그게 마치 붉은 잉크처럼 사방으로 번진다. 순간, 오싹해 소름이 돋았다. 우유 속에 피를 흘리는 뭔가가 있다?

면도칼이 박히는듯한 저릿한 통증이 엄지발가락에서 시작해 다리를 타고 몸 전체를 휩쓸었다. 으악! 우유 속에서 몸을 뒤틀며 허우적거렸다. 숨이 막혔다. 나도 모르게 공포가 치솟았다. 그건 보이지 않는 괴물에 대한 공포였고, 인간이 태초부터 품었던 물에 대한 공포였다. 마치 누군가가 끌어당기듯 온몸이 우유 속으로 잠겼다. 발이 닿지 않는다. 이리저리 휘젓는 다리 사이로 미끈한 무언가가 꿈틀대며 지나친다. 이대로 괴물에게 온몸이 물어뜯기거나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앞을 가로막는 유리컵을 더듬다가 어두운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빛줄기가 여러 갈래로 퍼져 사방으로 이리저리 내뻗었다. 쾅! 하는 소리가 난다. 우유가 담긴 커다란 유리컵에 금이 쩍하고 가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쏟아지는 우유에 휩쓸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던 나는 바닥에 엎질러진 우유를 확인했다. 흐르는 우유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얼굴과 몸에 묻은 우유를 닦아내고 놈을 바라봤다. 화상으로 인한 통증은 사라졌지만, 놈이 나를 보며 웃는다. 이런 식으로는 놈을 감당할 수 없다. 이건 전적으로 내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놈은 부정적인 이미지만 보내면 그만이었다. 나도 모르게 최악을 상상하게끔 말이다.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놈을 직접 상대하면 안 된다. 반격할 여지만 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놈을 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게 어렵다면 아예 멀리 보내버리면 되지 않을까?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놈을 날려 버리자. 같이 붙어 있지 않으면 된다. 어디가 좋을까?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이다. 그곳은 현지인도 길을 잃으면 헤매다 죽게 된다는 위험한 장소였다. 놈을 단숨에 아마존의 울창한 숲으로 쫓아냈다. 위로는 얽히고설킨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밑으로는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이 시야를 방해했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나갈 길은 없다. 여기라면 못 돌아올 테지.

긴 한숨을 내쉬자마자 놈이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지구 밖으로 얼른 뛰쳐나왔다. 태양계를 넘어서 머나먼 우주 한가운데로 날아와 놈을 떨어뜨렸다. 이제는 못 찾아올 거다. 광활한 우주에서 실컷 헤매 보시지. 어느새 내 앞에 선 놈이 나를 보며 웃는다. 왜일까? 이유는 뒤를 돌아보자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마존이나 우주 멀리 보낼 때 어쨌든 나도 그곳으로 갔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그럼 방법은 간단했다. 놈은 내가 되돌아온 길을 그대로 따라온 거다. 놈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정신을 빼앗길 때까지 언제까지나 놈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방법은 간단했다. 놈은 내가 되돌아온 길을 그대로 따라온 거다. 놈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정신을 빼앗길 때까지 언제까지나 놈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내가 생각을 반복한 게 아니다. 놈의 생각이다. 갑자기 놈이 모습을 감췄다. 머릿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 놈의 의지는 바로 여기에 그대로 존재한다. 놈이 자신의 모습을 숨긴 후 끊임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 곧바로 그 생각을 따라 하는 식이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의도를 알아내려고 온갖 가능성을 떠올렸다. 많은 생각들 사이사이에 놈이 앵무새처럼 나와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품는다. 이게 계속되니 어떤 게 나의 생각이고 어떤 게 놈의 생각인지 헷갈린다. 놈이 내 머릿속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놈의 존재가 사라진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서로를 구분할 수가 없다. 그건 갈수록 놈의 생각을 내가 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거고, 그게 심해지면 내가 놈이 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게 놈이 숨어버린 진짜 이유였다. 즉,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놈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그게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생각보다 영악한 놈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슨 수를 써야 놈을 쫓아낼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놈이 계속 모습을 감춘 채로 나를 흉내 내면 언젠가는 놈과 동화될 것이다. 그게 시간의 무서운 점이다. 오랜 시간은 저항할 대상마저 흐릿하게 만드니까. 그럼 아예 시간을 줄일 수는 없을까? 반대로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안 될 건 없다. 머릿속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 시간을 되돌리자. 놈이 철문에 갇혀 있던 때로 말이다. 먼저 이제껏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그걸 동영상 파일이라고 생각하고 ‘뒤로 가기’ 버튼을 연상했다. 마우스로 클릭하는 상상을 하자 머릿속에서 있었던 일이 빠르게 되감아 진다. 내가 했던 생각들, 상상, 놈이 보내온 온갖 감각들이 거꾸로 흘러간다. 이대로라면 놈을 다시 가두는 일이 가능하다. 놈이 나와 똑같이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게 느껴진다. 상관없다. 그래봤자 놈이 철문을 두드리던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다. 기계적으로 따라 해봤자 달라질 건 없다. 그때로 돌아가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놈의 발목에 쇠사슬을 매단 시간대에 도달했다. 놈이 어느 순간,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걸 멈췄다. 아직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달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로 보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되돌아가면 된다. 밧줄로 묶는 걸 지나 철문이 활짝 열린 때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놈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화살표를 보내온다. 오른쪽을 가리키는 커다란 화살표였다. 놈의 수법이 다시 시작됐다. 머리를 비우자. 한동안 화살표가 머릿속을 뒤덮더니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을 가리키는 삼각형이 깜빡이며 계속 겹쳐진다. 화살표와 삼각형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절대 상상하면 안 된다. 뒤섞이는 화살표와 삼각형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오른쪽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방향이다. 그걸 서로 합치면 절대로 안 된다. 화살표와 삼각형, 오른쪽이라는 건 세상에 없는 개념이다. 앞이라는 것도 머릿속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앞으로 가기’ 버튼이다. 절대로 그 생각을 하려던 게 아니다. 실수다!

놈이 내가 만들어 낸 마우스로 ‘앞으로 가기’ 버튼을 클릭한다. 뒤이어 ‘뒤로 가기’ 버튼이 수백 개로 산산이 부서졌다.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였기 때문에 공존하지 못하고, 처음 만들어진 생각이 깨져버린 것이다. 다시 ‘뒤로 가기’ 버튼을 상상했다. 생각이 흔들린다. 자꾸 박살이 났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걸 떨쳐내려면 갈가리 찢긴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 붙여야 할 판이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부서졌다는 건 다시 되돌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그건 쉽게 바꿀 수 있는 어정쩡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놈이 ‘앞으로 가기’ 버튼을 계속 누른다. 현재의 시점이 지나자마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느새 내가 놈이 만든 감옥에 갇혔다. 빌딩 크기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철문 앞에 서 있다. 고개를 젖혀 문 위를 바라본다. 혼자 힘으로는 열지 못한다. 뒤로는 겨우 쭈그리고 앉을 만한 공간밖에 없다. 그 안에서 울부짖고 소리치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빠져나가는 상상을 하려 해도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나는 방관자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생각들이 오가는데 모두 놈의 생각이다. 나는 감옥에 갇혀 지켜보기만 한다. 몸은 내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인다. 팔을 굽힌다든지 달린다든지 무언가를 본다. 하지만, 그게 다다. 내 의지대로 생각할 수 없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거기에 관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놈의 생각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생각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쓸쓸하고 외롭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나조차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지금의 내가 나라는 걸 확신할 수 없다. 이게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고? 시간의 흐름이 마지막에 도달하면 더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보이는 건 시커먼 화면뿐이다. 동영상이 끝나 화면이 꺼진다는 건 상황을 바꿀 마지막 가능성도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건 말 그대로 끝이니까. 돌이키기에는 너무 명백한 이미지였다. 그게 현실로 굳어지기 전에 뭐든 해야 한다. ‘뒤로 가기’를 연상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마지막에 다다를 때까지 3분도 채 남지 않았다. 어쩌지?

그래, 아까도 생각했듯 이 모든 건 동영상이다. 스마트폰의 앱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제일 확실한 방법이 무엇일까? 바로 앱을 삭제한 후 다시 설치하는 것이다. 아예 판 자체를 뒤엎어버리면 된다. 머릿속의 마우스로 눈앞의 동영상 파일을 선택했다. 다른 건 필요 없다. 키보드의 ‘delete' 키를 떠올린 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제대로 될까? 윈도우 10을 종료할 때 나오는 음악과 함께 감옥에 갇힌 내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앞으로 가기’ 버튼과 마우스도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놈이 씩씩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얼마나 분했는지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놈에게 계속 당하고 있을 수는 없다. 조금 과격하더라도 언제까지 놈을 내 머릿속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죽여야 한다. 물론, 실제로 죽이는 건 아니다. 피가 튀거나 못 볼 꼴을 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본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면 된다. 그럼 자기 생각에 갇혀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이었다. 놈을 어떤 식으로 죽여야 할까?

회칼로 놈의 목을 찌르는 상상을 했다. 영화에서 보면 목을 찔린 사람은 과다출혈로 죽는다.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겠지. 아니, 피는 상상하지 말자. 역겹다. 구멍도 내지 않을 거다. 어쨌든 깊숙이 찌르면 무조건 죽는다고 생각했다. 놈이 목을 잡고 상체를 비틀며 무릎을 꿇는다. 됐다. 손에 쥔 칼이 녹아 사라진다. 아무리 머릿속이라도 남을 찌른 칼을 들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놈의 비명이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쓰러진 채로 온몸을 뒤집으며 발광한다. 놈의 원망과 고통스러운 아픔이 그대로 느껴진다. 언제 죽는 거지? 보는 게 괴롭다. 쩌렁쩌렁 울리는 비명이 머리를 뒤흔든다. 미쳐버릴 것 같다. 이래서는 처음 문을 두드릴 때와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내 정신을 빼앗으려는 놈이라도 저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 그걸 빌미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놈은 죽지 않는다. 내지르는 비명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분명히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몸을 뒤틀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게 다였다. 놈이 일으키는 발작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머리가 아프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놈은 죽지 않을 모양이다. 이미 내 머릿속 일부였기에 내가 살아있는 한 놈도 마찬가지일 게 틀림없었다. 조금 전까지도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던 놈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벌떡 일어났다. 목을 쓰다듬으며 나를 노려본다. 놈을 살아있는 나와 마찬가지인 상태라고 인식하자 칼을 찌른 상황 자체가 없던 게 돼버린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 공격하는 거로는 놈을 사라지게 만들 수 없다. 그렇다고 놈을 죽이기 위해 실제로 자살을 할 수도 없다. 그거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다. 너 죽고 나 죽고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놈이 전기톱을 내던졌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는 좀 뜬금없었는데 이제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를 죽인다는 것 자체가 자신도 죽는 것일 테니까. 화상으로 고통스럽다는 걸 연상시킨 것도 내 의지를 꺾기 위함이지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놈과 나는 일종의 공동 운명체인 셈이다. 같은 머릿속을 공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죽일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가둬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 ‘앞으로 가기’ 버튼을 눌러 이 모든 일의 끝으로 향했을 때도 놈은 나를 감옥에 가두기만 했다. 방법을 찾다 보니까 결국엔 그게 제일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놈이 애타게 문을 두드리던 상황처럼 놈을 튼튼한 철문으로 막고, 그 안에 던져놓아야 한다. 언제부터 어떻게 갇혔는지 모르지만, 아예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면 모를까, 한 번 갇혔다는 건 언제든 다시 갇히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놈이 빠져나오지 못할 아주 튼튼하고 견고한 감옥을 만들자. 이제껏 상상이 세밀하지 못해 놈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다. 아무리 따져 봐도 그것 말고는 놈을 쫓아내지 못한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선명한 이미지야말로 지금 가장 필요한 항목 중의 하나였다. 그럼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터넷에서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감옥의 설계도를 찾았다. 구조는 물론이고, 어떤 재료를 사용하며 어떻게 건물을 지어야 하는 것까지 상세히 나온 자료였다. 그 설계도를 참고삼아 감옥의 이미지를 구체적이고 생생히 떠올렸다. 거의 다 쌓아 올렸다고 생각할 무렵 놈의 시선을 느꼈다. 나와 같은 걸 보고 있다. 내가 설계도를 찾은 순간, 그건 놈에게 어찌할 건지 예고해 준 꼴이 된 거다. 놈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다. 내내 그 사실을 알았으면서 멍청하게도 그 생각을 못 했다.

얼른 감옥을 완성하고 놈을 잡아끌었다. 저항하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한다. 일단 가두기만 하면 정교하고 현실적으로 구현한 생각 앞에서 더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건 안다고 해도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놈은 끌려오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한 걸까? 그럴 리 없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놈이 나를 보며 비웃는다. 한심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린다. 아마도 지금 행동은 다 쓸모없으니까 그만 포기하라는 수작질이 분명했다. 웃기고 있네. 놈을 감옥 아주 깊숙한 곳으로 데려간 후 도면대로 만들어진 방에 집어넣었다. 문을 닫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잠금장치로 문을 잠갔다. 놈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가만히 들어앉아 주위를 살핀다. 미로같이 복잡한 감옥 내부구조와 외곽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허리케인이 몰아쳐도 100년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한번 들어갔으니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놈이 천천히 일어섰다. 소용없다. 얼마나 정교하게 완성됐는지 나 자신도 놀랄 지경이다. 놈이 한숨을 쉰다. 아니, 볼을 잔뜩 부풀려 바람을 분다. 감옥이 흔들린다. 놈의 입김에 공들여 지은 감옥이 안쪽에서부터 무너진다. 땅에 떨어진 벽돌들이 하얀 먼지가 돼 사방으로 흩날린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지? 말도 안 된다. 감옥은 이제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게 가능하다고?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 그게 뭘까? 정리해 보자. 핵심을 찾아야 한다. 놈은 나를 해치기 위해서 이제껏 무엇을 했을까?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기억 중에서 상황에 맞는 걸 찾아 나에게 보냈다. 자신에게 유리한 무언가를 연상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건 나에게 영향을 끼치려면 내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는 일이 그대로 벌어지는 거니까. 그래서 놈이 감옥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의 선명함이나 세부 묘사 같은 부분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저 그럴지도 모른다는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놈에게 감옥은 그저 외부에서 가져온 솜털처럼 가벼운 이미지였을 뿐이다. 그럴 수밖에. 놈이 그나마 위험에 처했던 순간은 나 스스로 생각한 무언가로 놈을 공격하던 그때뿐이었다. 그건 곧 나 자신이 제일 중요하다는 강력한 증거다. 외부에서 해결 방법을 찾을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단 한 번도 치열하게 그리고, 깊숙이 내 생각에 파고든 적이 없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놈을 다시 가두는 게 가능하다. 당연하다. 놈이 여러 차례 증명했듯이 내 머릿속의 주인은 아직 나니까.

먼저 바닥을 떠올렸다. 단순할수록 좋다. 그래야 집중도 잘되고 연상하기 쉽다. 단단한 강철로 되어 있고 표면이 매끈하다. 모양은 네모난 게 좋겠다. 엘리베이터 바닥 정도의 크기를 떠올린 후 놈을 그 위에 세운다. 내 의도를 눈치챈 놈이 철근이 휘는 소리와 뜨거운 용암이 넘쳐흐르는 장면을 보낸다. 상관없다. 오직 떠올릴 건 단단한 강철이다. 흩어지려는 생각들을 다잡아 강철 바닥의 모서리에서 벽을 밀어 올린다. 이 벽도 강철이다. 급하게 하면 생각이 날아갈 수 있다. 중요한 건 집중력과 끈기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정교한 설정 같은 그럴듯한 겉모습이 아니다. 앞뒤 양옆에서 강철 벽이 솟는다. 그동안에도 놈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들과 감각들을 보낸다. 다 쓸데없는 짓이다. 놈이 무엇을 하든 내 생각에만 열중하면 된다. 꼿꼿이 선 강철 벽이 놈의 키를 넘어섰다. 이제 뚜껑만 씌우면 된다. 문 같은 건 만들지 않을 거다. 놈이 나올 최소한의 가능성도 없어야 한다. 뚜껑의 두께는 1m가 넘고 무게는 1,000t이다. 이거라면 놈이 다시 나올 일은 없다. 놈의 머리 위에서 내가 만들어 낸 뚜껑이 천천히 내려온다. 빨리 덮어버리고 싶지만, 그럼 뚜껑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 지금 필요한 건 생각의 단단함이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분명하고 명확하냐에 따라 놈을 가둘 수 있을지가 결정된다. 일종의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놈이 강철 벽 안에서 초조해한다. 벽을 더듬으며 펄쩍펄쩍 뛴다. 뚜껑이 입구를 덮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

놈이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를 지르다가 하나의 기억을 보낸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구석에 처박힌 친구의 장난감이 탐나 몰래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도 그 친구는 내가 훔쳐 갔다는 걸 모른다. 이어서 군 전역 후 동네 양아치와 시비가 붙었다가 슬금슬금 도망친 기억도 떠오른다. 놈이 쉴 새 없이 내 안의 기억을 쏟아낸다. 모두 살면서 겪은 일이다. 나도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나는 할 수 없다는 자조 섞인 기억들이다. 부끄러우면서도 참담하다. 내려오는 뚜껑이 양옆으로 흔들린다. 이대로 휘말려서는 안 된다. 놈이 사방을 둘러싼 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을 뻗는다. 굴욕적인 기억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나를 믿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놈이 벽 입구를 잡고 버둥거린다. 팔꿈치와 다리를 이용해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이제껏 놈과 대결을 벌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그건 외부에서 아무리 많은 정보가 들어와도 생각하고 판단하는 건 나라는 것. 그 자체가 곧 나 자신이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스스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가 나를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다.

강철 벽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놈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어둠이 몸 전체를 서서히 집어삼킨다. 사각의 벽 윗면에 반쯤 걸쳐진 뚜껑이 스르르 움직인다. 놈이 발버둥 치는 아래쪽 공간에서 빛이 사라진다. 놈이 끙끙거리다 입구를 붙든 손을 놓쳤다. 허우적거리면서 밑으로 떨어진다. 뚜껑이 감옥을 덮었다. 비명과 호통이 귀를 때린다. 쾅쾅거리며 벽을 두드린다. 머릿속이 요동쳤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놈이 갇힌 정사각형의 감옥을 또 다른 벽이 있는 감옥으로 감쌌다. 그 감옥을 다시 커다란 감옥으로 둘러쌌다. 이제 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줄곧 느껴지던 이물감도 씻은 듯 사라졌다. 드디어 놈이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오롯이 혼자다. 소나기가 오고 천둥 번개가 치던 날씨가 순식간에 맑게 갠 느낌이다. 머릿속으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다. 드디어 끝났다.

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제껏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미친놈 취급받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은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도 나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쨌든, 난 고통 받는 내 정신을 지켰고 놈을 쫓아냈다. 그거면 충분하다. 큰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피로가 몰려온다. 마치 이틀 내내 자지 않고 계속 깨어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마음 푹 놓고 자도 된다. 쉬자. 놈은 다시 나오지 못한다.


다음날부터 다시 똑같은 하루가 시작됐다.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해 일하는 틈틈이 카톡으로 지인들의 안부를 묻는다. 남들 다 한다는 모바일 퍼즐게임도 했다. 친구 등록이 된 사람들과 순위 경쟁을 하느라 쉽게 손을 놓을 수 없다. 저녁 퇴근길에 맥주를 사 들고 와 TV 앞에 앉는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희로애락에 울고 낄낄대다가 인터넷으로 웹서핑하며 수많은 정보를 한눈에 담는다. 새로운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이미 알던 지식은 다시금 되뇌며 고개를 끄덕인다. 뉴스를 보며 부조리함에 흥분하고 안타까운 소식에 혀를 끌끌 찼다. 밤이 깊어지자 내려받은 야동을 튼다.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의 감정 섞인 농밀한 행위를 보며 자위한다. 그러다 문득 쓸쓸해졌다. 어디에도 내 생각은 없다. 내가 주체가 아니다. 그저 외부에서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 놈의 정체에 대해서 내내 생각해봤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일까에 대해 의심해봤지만, 그러기에는 증상이 너무나 달랐다. 애초에 그게 원인이라면 의사가 먼저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놈은 다른 인격이 아니었다. 내 정신을 빼앗으려는 침입자였다. 놈은 외부에서 와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일상생활을 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서서히 놈이 잊히고 놈과의 일이 희미해질 무렵 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의 감옥이다. 내가 이중 삼중으로 쌓아놓은 강철 벽이 차례로 허물어진다. 서둘러 부서진 벽을 보수하려고 해도 생각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모습이 흐릿하다. 나 자신을 인식할 수가 없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도 외부에서 온 정보들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내 머릿속 어디에도 내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지 않았다. 감옥의 나머지 벽들도 흐물흐물해지며 녹아 사라진다. 놈을 가둔 제일 안쪽의 감옥마저 산산이 부서졌다. 익숙한 낯선 감각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놈이다. 놈이 다시 돌아왔다.

댓글 2
  • No Profile
    유이립 20.10.02 18:19 댓글

    발상이 기발하고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 유이립님께
    No Profile
    글쓴이 엄길윤 20.10.03 08:01 댓글

    유이립 작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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