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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끝의 책방

장보(江波)

책방에 손님이 왔다.
손님은 해 질 무렵, 책방 문을 닫을 시각에 찾아왔다. 책을 읽는 손님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문을 닫지 않는 것이 책방의 원칙이었다. 아황(娥皇)은 조명을 끄던 동작을 멈추고 껐던 등을 다시 켰다. 
순백의 불빛이 환하게 비추자 널따란 열람실은 대낮처럼 환해졌다.
하지만 손님은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눈 부신 빛은 싫습니다. 지는 해의 낙조가 탁자를 비추는 것이 좋아요."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요구를 할 수 있었고,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 역시 책방의 원칙이었다. 아황이 손을 흔들자 조명이 어두워지고 창문이 한꺼번에 열렸다. 창밖으로는 새빨간 태양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올라 휘황찬란한 인광을 발하고 있었다. 창으로 비치어 든 석양빛에 모든 것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보기만 해도 따스했다.

손님은 책꽂이를 따라 걸으며 손으로 책등을 쓸었다. 마치 세상에서 둘도 없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쓰다듬는 것처럼.
그는 가장 안쪽 책꽂이 앞에 섰다.

"아황, 이야기 좀 할까요?" 손님이 말했다. 

아황은 곧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책방의 창립자이자 세상의 설계자, 인류의 가장 인자한 지도자, 가장 총명한 로봇, 튜링 5세였다. 그는 사람 모습의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꽤 교양 있는 중년 남성처럼 보였다.

"책방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황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튜링 5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무도 책을 사지 않아요. 세상은 과거와는 달라졌고, 인류는 책을 읽지 않아도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오는 사람이 있어요. 이 책방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열려있는 거예요."
"근 500년 동안 책방을 방문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맞아요.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온다고요."
"앞으로 천 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올 거예요."

아황은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듯, 애원하지도, 맞서지도 않는 말투였다. 
튜링 5세의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 그는 책꽂이 너머로 하늘 끝에 걸린 핏빛 태양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부호들이 그의 눈 속에서 뱅뱅 돌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아황." 

튜링 5세는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마지막 폭발기에 들어가면 태양은 최대 2천년 동안 주위의 수소 구름을 쏟아내며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겁니다. 책방을 지킬 수가 없어요."
"내가 지켜달라고 부탁한다면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하는 일이지요. 대가가 얼마나 될지,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튜링 1세 때부터 대대로 모든 튜링들은 개개인들의 바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렇습니다."
"그럼 내 바람대로 책방을 계속 남겨주세요."

튜링 5세는 눈을 깜빡였다. 화성 동기 궤도상에 분포해있는 그의 두뇌 235개가 동시에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자! 
아황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석양은 줄곧 그 자리에 머물렀다. 튜링 5세가 책방과 화성의 자전을 동기화하여 태양의 자취를 정확히 쫓아가도록 만든 덕분이었다. 새빨간 태양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창밖에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 오랜만에 보는 석양이야! 
문득, 아황은 아주 오랫동안 창밖 풍경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창문은 꼭꼭 닫혀있었다.
튜링 5세의 생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태양계는 이제 인류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15광년 떨어진 두 번째 지구는 아직 안정기에 있으니, 모든 인류를 두 번째 지구로 옮기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물론 자신만의 함대 문명을 꾸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대부분의 인류가 이미 떠났고, 남아있는 6450명은 함께 가야 합니다. 나는 우주선을 딱 한 척밖에 만들 수 없습니다. 그 우주선에는 책방이 들어갈 곳이 없어요."
"기다릴게요."

아황은 조용히 말했다.
튜링 5세는 멈칫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우주선은 딱 한 척입니다."
"책방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아황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이것이 내 바람이에요."
"책 60억 권은 무게가 300만 톤입니다. 부대시설까지 더해지면 600만 톤이지요." 튜링 5세는 눈을 깜빡였다.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기다릴게요."

아황은 항변하지 않았다.
역대 튜링들에게 있어, 인류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은 나면서부터 주어진 임무였다. 개인의 필요가 인류 전체의 필요와 충돌하지만 않는다면.
아황은 아무도 자신의 요구에 반대하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남들은 책방이라는 존재 자체를 잊은 지 오래였으니까. 인류는 이미 태양계를 포기했고, 이곳의 모든 자원은 우주선을 건조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튜링 5세는 그만한 우주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태양이 튜링5세에게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지구 2호는 무척 아름다웠다. 널따란 바다, 하얀 구름, 시뻘건 대지. 처음 보면 지구와 꼭 닮은 것 같지만, 다시 살펴보면 약간 다른 구석이 눈에 띄었다.
만 년 전 최초의 인류가 이곳에 왔을 때, 이 별은 잡초가 우거진 폐허였고 단순한 형태의 박테리아만 살고 있었다. 인류가 녹색 식물을 옮겨왔지만 그 식물들은 이 별의 미생물에 감염되어 녹색이 아닌 붉은색을 띠게 되었다. 다행히 광합성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고, 지구 2호는 마침내 인류가 살 수 있는 붉은 세상이 되었다.
방주 호는 지구 2호의 궤도 위에 조용히 엎드려있었다. 이곳을 맴돈 지 벌써 25년째였다.
처음에는 방문객이 제법 많았지만, 차차 줄어들어 지금은 일 년 내내 단 한 명의 방문객도 없었다.
아황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올 사람은 반드시 올 테니까.

어느 날, 눈 부신 태양이 지구 2호의 원호 너머로 서서히 사라졌을 때, 한 노인이 책방 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적참나무로 만든 안락의자에 앉아 줄줄이 늘어선 책꽂이를 훑어보았다. 노인은 그렇게 보기만 할 뿐,일어나서 책꽂이로 걸어가지도 않았고 책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아황은 노인을 내버려 두었다. 책방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정숙을 유지하고, 남들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그곳에서 가져온 것이라 들었소이다. 정말이오?"

이윽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는 '그곳'이란 태양계였다.

"맞아요." 

아황이 조용히 대답했다. 태양계에서 이 두 번째 지구로 오기까지 무수한 난관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물었다.

"15광년의 거리라오. 이 우주선은 얼마나 오랫동안 날아왔소?" 
"한 육백 년쯤이요."
"아주 위대한 우주선이오. 태양계 최후의 우주선이지." 노인은 찬탄했다. "저 우주선을 기다리다가 하마터면 태양 폭풍에 삼켜질 뻔했다 들었소."
"우주선을 건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고,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어요. 조립은 명왕성 바깥 궤도에서 진행되었는데, 태양 폭풍이 아무리 강력해도 명왕성까지 도달할 때쯤엔 많이 약해져 있었죠. 그래서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았어요."

아황은 생긋 웃어 보였다.

"바로 이 책들 때문에?"
"그래요."

노인은 또다시 끊임없이 이어지는 책꽂이로 꽉 채워진 공간을 훑어보았다.

"박물관을 삼으면 딱 좋겠군. 책이 필요한 사람은 없소. 사람들은 고속의 임프린트로 지식과 능력을 얻고 있소."
"언젠가는 이 책들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아황이 대답했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궤도상의 이 위치에 태양광 발전소를 세우기로 대표 회의에서 결정을 내렸소. 궤도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비켜주었으면 하오."
"어디로요?"
"땅 위로."
"네?"

아황은 창밖의 지구 2호를 바라보며 다소 놀란 소리로 물었다.

"땅에 착륙했다가 다시 떠오르기는 쉽지 않아요. 우리 책방은 늘 우주 공간에 있었다고요."
"떠오를 필요가 어디 있소? 땅 위에 있는 것이 훨씬 좋지 않소? 그곳이 책방이 있어야 할 곳이오."

노인이 권유했다.

"그렇지 않아요."

아황은 재빨리 대답했다.

"난 오랫동안 이 책들을 보존해야 하는데, 별 안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요."
"이 책들을 얼마나 오래 보존할 생각이오?"

아황은 약간 당황했다. 그런 질문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계속 보존할 거예요."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말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계속이 언제까지요?"

노인이 캐물었다.
아황은 고개를 들고 별이 가득 박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은 생각이 났다.

"별들이 빛을 잃을 때까지요."

그녀는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인은 이런 대답을 예상한 것 같았다. 그가 일어나서 아황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별들 속으로 가는 것이 어떻소? 당신 우주선은 지금도 아주 훌륭하지만 내가 개량시켜주겠소. 최고의 엔진과 항법 장치, 그리고 자동 나노 기기와 보호 장비를 설치하면 수소 구름과 우주먼지만 있어도 우주선을 유지할 수 있고, 당신의 책방도 지켜낼 수 있소."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별들이 빛을 잃을 때까지 말이오."
"최후통첩인가요?"
"아니, 단순한 제안이오. 이 책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궤도상의 공간이 필요하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이건 그저 한 가지 제안일 뿐이오."

아황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부는 지구 2호의 숲처럼 불그스름했다. 이곳 지구 2호의 인류는 한때 지구에 살았던 인류에 비해 모습이 조금 변해있었다. 노인의 말대로 이들은 메모리 임프린팅으로 지식과 능력을 얻었고, 책방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들은 튜링이 아니었고,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 입장에서, 추방 정도면 충분히 아량을 베푼 셈이었다.
그렇다면 별들 속으로 가자!

"알겠어요."

아황은 노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해보시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책이란 책은 모두 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신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요. 아예 책이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이제 이곳을 떠날 테니, 그 대신 당신들이 가진 지식을 모두 책으로 만들어 내게 보내주세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요구로군. 모든 지식을 책으로 써낼 수 있다고는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소."
"가능한 만큼만 하면 돼요. 당신들이 이만하면 되었다고 판단하면 곧바로 떠나겠어요. 그러면 당신도 내 우주선을 개량할 시간이 생길 테고요."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좋소. 내일 첫 번째 책들을 보내겠소."

아황은 생긋 웃었다. 

"거래는 공정해야죠. 언젠가 당신들에게 책방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내 책방을 항상 열어놓겠어요."

 


또 하나의 파란 별이 우주선 앞에 나타났다.

"침략할 의도는 전혀 없어요.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고 여긴 책방일 뿐이에요." 

아황은 이렇게 방송하면서 별에 접근했다.
그 별로 다가가는 것은 우주선 한 척이 아니라 대열을 이룬 함대였다. 크고 작은 우주선 서른다섯 대는 하나하나가 모두 책방이었다. 무장은 하지 않았지만, 은하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장 함대보다 규모가 방대했다.
아황은 우주에서 널리 사용되는 여섯 가지 언어로 방송을 했다.
그녀의 함대는 푸른 별에서 6광초 떨어진 곳에서 전진을 멈추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별을 관찰하기에 충분했고, 성질 급한 문명이 쏘아대는 원시적인 무기를 피할 수도 있었다.

방송은 서른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무전을 보내는 조짐조차 없었다.
이 별에 문명이 있다면, 아직 무선 통신 기술을 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무선 통신이 없는 문명을 가진 별을 최소한 두 곳이나 만났고, 그곳에서 책을 찾아내어 함께 보관 중이었다.
아황은 가장 작은 우주선을 별의 궤도로 보내, 위성 궤도에서 지표면에 있을 문명의 흔적을 탐사했다.
네모, 동그라미, 정해진 규칙에 따른 여러 가지 기하 도형 등등… 우주선은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건축물의 특징을 갖추고 30제곱미터보다 큰 물체는 하나도 없었다.
이곳은 원시 행성이었다. 생명은 있지만 문명은 없는.

아황은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조그마한 표류물 하나가 주의를 끌었다.
길이 20m가 채 되지 않는, 별로 크지 않은 물체였다. 때맞춰 탐사선 아래로 흘러오지 않았더라면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표류물은 끊임없이 뱅글뱅글 도는 금속 구체였는데, 일반적 형태의 구체 모양에 표면은 반질반질하고 그 위에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천체일 리는 없어!
아황은 온갖 주파수를 사용해 통신을 시도해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갈라 보자. 
갑작스러운 생각이 아황의 뇌리에 떠올랐다.

우주선에는 레이저 커터가 없었다. 하지만 책꽂이 안에는 2천 가지 이상의 각종 레이저 커터를 만드는 방법이 실린 책들이 있었다. 아황은 책에서 출력이 중간쯤 되는 레이저를 찾아 나노기기로 제작에 들어갔다.
사흘 후, 레이저포가 궤도 위로 옮겨졌다.
고 에너지의 광다발이 금속 구체를 때리자 구체는 고막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무선 주파수 중에서도 최극단의 주파수가 쐐애액 하고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활성화되었구나! 
아황은 레이저를 멈추었다.

금속 구체는 얇디얇은 빛의 장막에 감싸인 듯 사방으로 실제 모습 같은 영상을 투사했다. 다리 여섯에 팔 둘 달린 지능 생물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는 암수가 있고, 문자가 있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집기를 제조하고, 거대한 거점과 대형 로켓, 그리고 우주정거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지면 위에 초대형 건축물을 하나 둘 세웠는데, 그 길이가 족히 60km에 달하고 너비는 30km나 되었다. 그 후 그들은 그 초대형 건축물 속으로 사라졌다. 건축물은 차츰차츰 울창한 숲에 뒤덮였다.
금속 구체는 이 별에 있던 문명의 역사를 방송하고 있었다.
금속 구체가 쏘아내는 전파는 한 번도 접촉해 보지 못한 또 다른 언어였다. 아황은 보름 동안 그 영상에서 들어있는 문자를 분석했고 마침내 해독해냈다.

"한때 휘황찬란하던 빛도 종국에는 무(無)로 돌아가는 것. 생명은 원시적인 욕망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자아란 육체의 환각일 뿐이다. 그대가 우리의 후손이든 다른 별에서 온 자이든 그대에게 알리고자 한다. 생명의 심오함도, 우주의 마지막도, 우리는 이미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무로 돌아간다. 시간이 이 신호와 무덤지기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깊이 묻을 것이다. 무덤지기에게 물어라. 그러면 그가 모든 것에 대답할 것이다."

무덤지기란 바로 이 금속 구체였다. 이 금속 구체는 지능을 가진 로봇이었다.
이곳은 스스로 소멸한 문명이었지만, 기념물 하나는 남겨두었던 것이다.

"네 주인이 떠난 지 얼마나 되었지?"

아황이 물었다.

"별이 7천만 번 돌았습니다."

금속 구체가 대답했다.
천만번. 이 행성의 자전 주기는 60시간이니 400만 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400만 년이면 땅이 바다로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행성 표면의 문명의 흔적은 씻은 듯 사라져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조그마한 고지가 몇 개 남아 있었는데, 아마도 초대형 건축물의 잔재인 듯했다. 

"그들은 왜 떠났어?"
"별은 언젠가는 소멸하고, 우주는 죽음으로 돌아갑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겠지만 결국 시간의 차이일 뿐입니다. 떠남이란 괴로운 일이 아니니, 발버둥 치며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너희 문명에 책이 있니?"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배울 지식이 있느냐는 말이야."
"바랄 것도 얻는 것도 없습니다."

아황은 생각에 잠겼다. 이 별은 호기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얻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이 금속 구체를 궤도에 남겨두었지만, 누군가 이 구체를 발견하게 될지 어떨지는 관심이 없었다.
금속 구체와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얻을 것은 별로 없었다.

"그 건축물 안을 볼 수 없을까? 네 주인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 싶어."

아황이 물었다. 
금속 구체 앞에 영상 하나가 나타났다.
이 구체를 만든 생물은 큼직한 의자에 엎드려 있고, 그 몸에는 곰팡이 같은 것이 가득했다. 스펀지 같은 것이 거대한 그의 머리 위로 자라나 사방으로 퍼지더니, 다른 이들의 머리에서 자라난 똑같은 형태를 한 것들과 이어졌다. 마치 덩굴에 주렁주렁 달린 과일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이것이 마지막 장면이겠지. 죽고 썩어버린. 
그들은 어디선가 찾아낸 방법으로 자신들의 뇌를 하나로 연결했는데, 그것은 완벽한 극락세계였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그 완벽한 세계에서 만족스럽게 죽어갔다.
아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와 함께 가자. 은하 여행에 데려가 줄게. 내 우주선은 웜홀을 만들 수 있어서 여행하는 데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아."
"저를 건드린 자는 모두 벌을 받게 됩니다."

금속 구체가 대답했다.
아황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포획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우주선이 움직였고, 웜홀이 생겨나 서서히 떠올랐다.

"아황,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타원이 물었다.
"나도 몰라. 어디든 가서 책을 수집하고 보관해야 해."

아황은 타원을 바라보았다. 금속 구체를 망가뜨리고 그 구조를 분석한 다음, 그 모델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 타원이었다. 타원은 금속 구체의 정밀한 모조품이었지만, 훨씬 작아서 지름이 겨우 1m밖에 되지 않았다.
아황 자신도 왜 갑자기 금속 구체를 망가뜨리고 싶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를 꼭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타원을 만들면서, 그녀는 자신의 경솔함에 깊은 부끄러움과 후회를 느꼈다.
은하의 근 절반을 돌아다녔던 2만 광년의 여정 동안 그녀는 외로이 혼자였다.
앞으로의 여정에는 최소한 동행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그들은 닮은 곳이 한 군데도 없었지만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 둘 다 문명에 버림받았다는 것.

"얼마 동안이나요?"  

타원이 물었다.

"별들이 빛을 잃을 때까지." 

아황은 그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함대는 아주 무시무시하군."

연한 잿빛의 종이 인간이 평평한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종이 인간의 몸은 납작하고 둥글었다. 촉수 다섯 쌍이 몸 곳곳에 고르게 자리하고 있었고, 하반신에도 똑같은 수의 다리가 달려 있어 안정적으로 서 있을 수 있었다. 머리 역시 유연하고 납작해서 마치 눈이 달린 혓바닥 같았다. 종이 인간은 겉보기에는 옷을 걸친 연약한 수상생물 같았지만 사실은 무척 강했다.

아황이 만난 문명 가운데 제일 강한 문명 중 하나가 그들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전함이 빽빽하게 도열하여 지름이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둥그스름한 진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조그마한 별에 비할 정도였다.
강한 문명은 늘 적수를 찾고 있었다. 멸망시키거나 정복하는 것은 종이 인간들의 영원한 주제였고, 그들과 몇 번 접촉해본 다음 아황은 곧 그들의 관심사를 알아차렸다. 

책방 함대도 규모는 거대했다. 우주선 수는 200척이 넘고, 그중 가장 작은 것도 무게가 2천만 톤이나 되었다. 우주선 하나하나가 거대한 책방이고 수많은 문명과 별에서 수집한 각종 책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종이 인간의 함대에 비하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종이 인간에게 이런 칭찬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강력한 무력은 언제든지 책방을 짓밟고 바스러뜨릴 수 있었다.

"우리는 그냥 책방이예요. 무장도 하지 않았어요." 

아황은 스크린에 나타난 종이 인간에게 말했다.

"우리 정보 시스템도 그렇게 말하고 있소." 

종이 인간은 마음먹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전투는 의미가 없지. 그래서 당신에게 다른 방법을 제안하기로 했소."
"무슨 방법인데요?"

별반 좋은 제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황은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우리가 백색왜성 급 웜홀을 열고 뛰어들어가 무작위로 은하계의 어딘가로 가는 것이오. 그곳에서 재미있는 목표를 만나면 전투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웜홀을 타고 돌아오겠소. 우리가 돌아오는 순간, 당신은 제대로 전투 준비를 해야 하오. 봐주지는 없을 테니까. 준비할 시간은 주겠소." 

종이 인간은 흥미진진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했다.

"당신의 함대는 아주 흥미롭소. 공간이동 능력도 보호 능력도 모두 일류인데, 무장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가 돌아왔을 때 도망쳐버렸다 해도 상관없소. 당신을 쫓아가서 괴멸시킬 테니까. 그런 일을 원치 않으면 대항할 방법을 생각해보시오."

백색왜성 급 웜홀을 왕복하려면 20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를 틈타 도망친다? 저들은 분명 쫓아올 것이다. 

정말 싸워야 할까? 전투는 결코 책방이 할 일이 아니었다.

"싸우지 않을 거예요."

아황이 꿋꿋이 말했다.
종이 인간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이미 기회를 주었소. 당신이 스스로를 보호할 기회를 포기해도 우리는 똑같이 당신을 괴멸시킬 것이오. 잘 생각해보시오!"

종이 인간과의 통신이 끝났다.

"아황, 싸워볼 만 해요. 저들의 함대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최신식 무기는 아니에요. 특이점 함정으로 붙들어 맨 다음 중력 발생기 600개를 쓰면 모조리 박살 낼 수 있어요."

타원이 보고했다.

"타원, 싸워본 적 있어?"

아황은 타원의 제안에는 아랑곳없이 물었다.

"없어요. 하지만 여기 있는 책은 모두 읽었고, 그 속에 싸우는 법이 많이 있었어요. 저 전쟁광들을 깨끗이 소멸시킬 방법은 쉰 가지 넘게 있어요. 전쟁의 목적은 곧 전쟁을 멈추는 것이라고 정의로운 쪽은 늘 말했지요. 저들이 정말 웜홀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멍청한 행동을 한다면, 곧바로 웜홀 속에 가두어 이 우주에 저런 자들이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만들 수도 있고요."

타원은 약간 흥분해서 계속 떠들었다.

"전쟁은 파괴야.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야."
"하지만 우리도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지요."

아황은 빙그레 웃었다. 

"지혜를 믿어보자. 저들이 정말 모든 것을 파괴하려 했다면, 애당초 이 별들 속으로 오지도 않았을 거야."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건가요? 아니면 도망칠 건가요?"

타원은 자기 몸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당신을 괴멸시킬 것이오!" 

타원이 종이 인간의 모습과 목소리를 흉내 내어 외쳤다. "당신을 쫓아가서 괴멸시킬 것이오. 그런 일을 원치 않으면 대항할 방법을 생각해보시오." 

아황은 그만 폭소를 터트렸다. 

"좀 도와줘. 저 종이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저들에게도 분명 근원지가 있을 거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으니 분명 우리가 여행했던 곳 중 하나일 거야."
"해볼게요. 정말 최선의 전투 방법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저 괴상한 생물들의 근원지를 찾는 데 시간을 쓰면 싸움 준비를 할 시간이 없어요. 나노 기기 공장을 100%로 가동해도 최소한 백 년은 걸려야 싸움 준비를 할 수 있어요."
"나한테 방법이 있어. 근원지를 찾아줘!"

종이 인간의 함대가 막 출발하자 웜홀이 나타나 서서히 열렸다. 마치 투명한 유리구슬들이 진공 속에서 자라나 갖가지 빛깔의 별들이 그 속에 콕콕 박혀 들어 반짝반짝 윤을 내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은 몹시도 아름다웠다.

"특이점 공세로 저들을 웜홀에 가두어버릴까요?" 

타원이 세 번째 책방으로 날아가면서 물었다.

"괜찮아. 가서 내가 원하는 걸 찾아줘." 아황이 대답했다.

종이 인간의 함대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웜홀은 여전히 창공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천억 페이지를 뒤진 끝에 타원이 결과를 보고했다.

"찾았어요. 2천 광년 밖에 있는 아크투루스9예요. 말씀대로 그곳을 방문하셨더군요. 저를 만나기 바로 직전에요."

아크투르스9. 그 순간, 아황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뱀 인간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곳은 갓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문명으로, 거대한 보루는 쌓을 수 있었지만 하늘을 날지는 못했다.
그래, 종이 인간이 바로 뱀 인간이었어. 
그때 그들은 두껍고 무거운 껍질을 짊어진 채 축축한 늪지대에서 살고 있었다.

"아황, 아직 저들을 빠뜨릴 함정을 만들 시간은 아직 있어요."
"아니야. 나한테 방법이 있어."

종이 인간이 돌아왔다. 그들은 약속대로 웜홀에서 튀어나오자마자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거대한 포함은 에너지 섬광을 잔뜩 머금었고, 무기들은 일제히 책방을 향했다. 발포만 하면 종말의 화염이 모든 것을 깨끗이 태워버릴 것이었다.그러나 그들은 즉시 멈추었다.
거대하고 네모진 돌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돌은 온통 새까맣고, 직육면체 형태에 각 변의 비율이 1:4:9를 이루고 있었다.

돌은 나타난 자리에서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빙글빙글 돌았다. 
대규모 함대는 엄숙한 정적에 잠겼다. 
조그만 우주선 하나가 그 정적에서 빠져나와 책방으로 다가왔다.
길고 긴 책꽂이 사이를 걸어오는 종이 인간들의 걸음걸이는 무겁고 호흡은 거칠었다. 책꽂이 끝에는 아황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그마한 검은 돌 모형이 그녀의 앞에서 느릿느릿 돌고 있었다.
일곱 명의 종이 인간은 아황을 향해 엎드렸다.

"전지전능하신 지도자이자 위대한 선지자이시여, 경솔하고 무지했던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저희가 1천 광년을 넘어 이곳까지 온 것은 오로지 당신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저희에게 계시를 내려주십시오. 이 어둠과 모호함을 깨뜨릴 선지를 주십시오!"

그들은 정성이 드러나지 않을까 두려운 양 몸을 바짝 엎드렸다.
그랬다. 이 검은 돌은 그들의 성물이었다. 검은 돌이 아크투루스9에 강림했을 때, 끝없이 솟아나는 지식이 이 돌을 통해 뱀 인간 부족에 전해졌고, 그로 인해 그들의 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종교도 철저하게 바뀌었다. 그들은 우주에 있는 영원한 신을 신봉하게 되었고, 검은 돌은 곧 신과 그들을 잇는 성물이었다. 검은 돌은 선지에 이끌려 행성으로 왔다가 계시를 완수한 뒤 사라졌다.
검은 돌이 다시 나타난 것은 바로 다음번 계시를 받을 때를 의미했다.
종이 인간들은 낮게 포복한 채 선지자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당신들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은 쾌감 때문인가요?"

아황이 물었다.

"저희는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 선지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주의 모든 지혜를 파괴했을 때 끝내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신의 의지일 것이라는 의견에 장로들께서도 결국 동의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책방을 파괴할 뻔 했어요. 이 책방은 바로 당신들 문명의 원천이라고요."
"무지몽매하고 죄 많은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종이 인간은 더욱더 납작 엎드려 숫제 바닥에 찰싹 붙은 것 같았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놨어요. 일단 일어나세요."

종이 인간은 황공해 하며 일어나 한쪽에 섰다.

"당신들은 성물을 찾고 싶어 했지요? 성물은 여기 있어요. 검은 돌은 그 상징일 뿐, 성물의 진짜 모습은 바로 이 책방, 이 조그만 함대예요. 책방은 은하의 어떤 문명에게나 열려있고, 당신들은 바로 이 책방의 호위병이 되는 거예요. 여태 해온 것처럼 계속 은하를 순찰하되, 이제부터는 살육과 파괴가 아니라 지식과 문명을 전파하세요. 신은 은하의 문명들이 흥성하기를 바라고, 당신들은 신의 호위병이에요."

종이 인간은 또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흥분과 감동을 이기지 못해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들은 한 번 확신한 것에는 두 번 다시 의심을 품지 않는 생물이었다. 고집스러운 조상들이 그 장점을 그들의 핏속에 심어놓은 것이다. 강력한 무장을 하고 확신에 찬 그들에게 호위병보다 더 잘 맞는 직책은 없었다.
종이 인간의 함대가 책방을 향해 다가왔다. 이번에는 대형을 넓게 벌려 조심스레 책방 함대를 감싸는 형태였다. 마치 부드러운 속과 그 속을 감싼 단단한 껍질처럼. 이는 은하에서 가장 견고한 보루요, 가장 신성한 서고였다. 그들은 은하계를 순회하며 문명들을 일깨울 것이다.

"아황, 이제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요?"

타원이 물었다.

"계속 여행해야지. 은하를 겨우 반밖에 돌지 못했잖아." 

아황이 대답했다.

"하지만 책방을 그들에게 주었잖아요."
"그들에게 준 게 아니야. 모든 이들에게 준 거지. 더군다나 이 우주선이 바로 첫 번째 책방이잖아?"

크고 눈부신 함대 옆에 있던 조그마한 우주선은 스르르 모습을 감추었다. 그 놀라운 스텔스 기술은 종이 인간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광초 밖에서 아황은 유유히 웜홀을 열었다.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은하가 그 전모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소용돌이 모양의 나선 팔 위에는 억대의 별들이 광채를 뿌려대고 있었다.
은하의 끝,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의 공간.

"이제 어디로 가죠? 이곳이 끝이에요."

타원이 말했다.
우주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은하는 곧 세상의 전부였다. 수백억 광년 떨어진 아득한 항성계들은, 기나긴 시간의 터널 속으로 빛이 한 번 또 한 번 우주의 끝을 관통하면서 형성된 환각에 불과했다. 
삼차원의 닫힌 시공간에서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치였다.
십만 광년의 여정 끝에 도달하자, 아황은 갑자기 피로를 느꼈다. 그녀는 타원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타원도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우주 끝에 있는 책방에 앉아, 눈앞에서 회전하는 은하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은하. 수많은 문명.
아황은 일어나서 책방 안을 걸었다. 줄줄이 선 책꽂이는 끝없는 기억의 담장 같았다.
한때 그녀는 은하에서 가장 큰 책방을 가졌고 그 누구보다 풍부한 지식의 보고를 가졌지만, 종이 인간에게 그 책방을 내주었다. 책방은 은하 모든 문명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곳, 이 책방만이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창조자이자 인공지능의 아버지인 왕십이(王十二)가 그녀에게 이 책방을 내어주며 잘 보존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구 2호를 떠나온 뒤로 그녀는 두 번 다시 지구인을 보지 못했다. 물론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황은 걸음을 멈추었다.

"타원, 알려줄 게 있어."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는 미래의 사람들은 꼭 이 책방이 필요하게 될 거라고 하셨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 그 결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결국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그래도 계속할 생각인가요?"
"별들이 모두 빛을 잃기 전까지 그러겠다고 말했잖아. 별들은 끊임없이 생겨나는 거야. 하나가 져도 다른 하나가 빛을 내지. 그러니까 우린 시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해."
"저는 기다려도 상관없어요."
"문제는 언제쯤 사람이 오는가 하는 거야." 

아황은 다소 불안했다.

"당신은 은하에서 가장 큰 책방을 만들었고, 벌써 수많은 문명들이 책방에 있는 책을 읽었어요."
"달라. 이 책방은 지구인들을 위해 만든 거란 말이야.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쩌지? 돌아가야 하는지도 몰라." 

아황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책방의 높은 곳으로 올라섰다.

"저도 지구가 보고 싶어요. 당신은 제가 태어난 곳을 보았지만, 저는 당신이 태어난 곳을 보지 못했어요."

아황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말했다.

"관두자, 정말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찾아올 거야."
"그럼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한숨 푹 자야지."

책방의 문 위로 소리 없이 글자가 몇 줄 나타났다.

 

별들이 모두 빛을 잃을 때까지,
변함없이 세상의 끝에서 기다리리라.
단 한 사람을.
단 한 마디의
영원한 약속과 지지 않는 꽃.
문명의 불길은 
시공의 심연 위에서 팔딱이리라
별들이 모두 빛을 잃을 때까지.

 


잠을 깨우는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렸다. 웅장한 행진곡이었다.
책방의 벨 소리는 맑고 듣기 좋아야 제격인데, 타원이 몰래 바꿔놓은 것이 분명했다.
아황은 일어나서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타원은 벌써 나와 있었다. 타원의 맞은편에 사람이 서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사람은 지구인이었다. 몸이며 눈코입 등이 모두 지구인의 특징에 딱 들어맞았다. 혈기왕성한 중년 남자인 그의 모습은 튜링 5세와 약간 닮아있었다.
그는 로봇이었다. 몸 전체에서 나노 기기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방문객은 사방을 둘러보는 중이었고, 엄숙한 얼굴에는 표정 하나 없었다.

아황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 편안하게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이 책방에서 손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깊은 잠에 빠진 사이 시간은 어느덧 600만 년이 흘렀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흘렀더라도 아황은 개의치 않았다. 올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
방문객의 시선이 아황의 몸에 닿았다.

"내가 드디어 찾았습니다. 이 책방을, 그리고 당신을."

그가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어째서 나를 찾았나요?"
"나는 사명 2084호, 타이타닉 시에서 왔습니다. 우리 도시는 지구 2호에서 비롯되었고, 지구 2호에서 320광년 떨어진 성긴 성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을 찾아온 까닭을 말하자면, 인류의 모든 도시가 먹통이 되고 우주 도시들이 활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구 2호도 마찬가지이고, 그 외에 정착 행성 세 곳과 인류의 문명이 있는 곳들이 모두 멈추었습니다. 나는 튜링이 창조한 사절단의 일원입니다. 사절단 구성원 60만 명이 당신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하 곳곳으로 출발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찾아내다니 정말로 영광입니다. 이제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투가 딱딱해서 마치 교과서를 읽는 것 같았다.

"대체 나를 찾은 이유가 뭐죠?"

아황이 물었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당신이 모든 것을 풀 열쇠라는 것뿐입니다. 당신을 찾아내어야만 인류 문명이 다시 활기를 띠게 할 수 있습니다."

아황은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알겠어요. 잠시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그녀는 책꽂이 사이로 들어간 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으며 가장 뒷줄에 있는 책꽂이 제일 끝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그림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왕십이의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의 왕십이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는 것 같았고 눈동자에는 미소가 담뿍 담겨 있었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그랬다, 그녀는 찾아올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준비된 정답은 없었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나요?

"아황, 저분이 당신 아버지이신가요?" 

귓가에 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황이 고개를 돌려보니 타원이 소리도 없이 둥둥 떠 있었다. 타원의 머리 꼭대기는 홀로그래피 스크린이었는데, 홀로그램 속에 나타난 조그마한 사람이 아황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타원이 아득한 옛날 지구인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었다. 끝을 모르는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책꽂이에 있는 책을 모두 뒤진 것이 분명했다.

아황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서둘러 방문객 앞으로 돌아갔다.

"당신은 어떻게 지식을 얻죠?"
"튜링이 모든 것을 줍니다."
"인류는 어떻게 지식을 얻죠?"
"모든 사람은 부모의 요청에 따라 각기 다른 임프린팅을 받으며, 로봇은 튜링에게 지식을 수여받습니다."

아황은 타원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모르겠어요."

타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너는 완전한 인격체이지만, 이 사람은 아니야. 너는 책방에서 자랐고 독서를 통해 지식을 얻었지만, 이 사람은 정확하게 만들어진 복제품이고 스스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지."

아황은 진지한 눈길로 타원을 바라보았다.

"배움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지혜를 얻을 수 있어. 누군가에게 받은 지식만으로는 두뇌가 경직되고 죽어갈 뿐이야. 인류의 도시들이 그랬지. 세대가 거듭되면서 그들은 점점 더 지식 임프린팅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점점 활력을 잃어갔던 거야. 이렇게 가다간 인류는 결국 튜링의 부속품으로 변하게 될 거야. 하지만 튜링은 경직된 인류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아."

타원의 머리 위에 있는 조그마한 사람이 눈을 깜빡였다.

"알 것 같아요."

옆에 있던 사명 2084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의 메모리 임프린팅을 없애야겠습니다."
"그건 죽음만 가져다줄 뿐이에요.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방이에요.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책방. 아이들이 걸음마를 배우듯, 사람들은 지식 탐구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은 다음에야 지혜의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예요."

사명 2084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튜링의 계시는 당신을 찾아야만 이 교착 상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인류 문명의 세계로 돌아가십시오."

아황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아요."

사명 2084호는 경악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예? 무엇 때문입니까? 책방을 인류의 도시에 돌려놓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보고자 했던 일이 아닙니까?"

"맞아요. 하지만 얘가 그 바람이 실현되도록 도와줄 거예요."

아황은 그렇게 말하며 타원을 앞으로 밀었다.
타원이 놀라 외쳤다. 

"제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곳은 다른 세상이야. 타원, 너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으니 가서 경험해 볼 만해."
"그럼 당신은요?"
"나는 이곳에 남을 거야." 
"싫어요. 저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너 자신만의 세상을 얻으려면 엄마의 품은 포기해야지. 내가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있을 수는 없어."

타원은 말이 없었다.

"내가 그리워지면 돌아올 수도 있잖아. 기다릴게."

사명 2084호의 비행선이 뿜어내는 불꽃이 웜홀 속으로 사라지자, 공간의 갈라진 틈은 즉시 닫혔다. 칠흑 같은 하늘에서 은하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아황은 묵묵히 문을 닫은 뒤 줄줄이 늘어선 책꽂이 사이를 걸었다.
타원이 책방에 관한 추억을 가지고 가서 인류의 문명에 다시금 활력을 지펴줄 것이라고, 아황은 굳게 믿었다. 그리고 언젠가 인류가 다시 이곳을 찾아오리라는 것도 믿었다.

그녀는 타원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타원이 이곳에 돌아오더라도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아황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은하를 뛰어넘어 우주의 끝까지 왔고, 총명하고 영리한 아이까지 얻었으니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인생이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도 피곤했다.
생명의 활력에 관한 또 한 가지를, 인류는 모르고 있었다. 튜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결국 알아낼 것이다.
아황은 아버지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생명의 빛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스러져갔다.

우주의 끝. 그곳에 있는 책방의 조명은 여전히 환했다. 꼭 닫힌 문 한쪽에는 <별들이 모두 빛을 잃을 때까지>라는 시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쪽에 또 다른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황이 아버지의 초상화가 들어있던 액자에서 찾은 시였다.

나와 함께 늙어가자. 아름다운 풍경은 아직 저 뒤에.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으니 그것이 생명의 법칙.

 

2015년 3월 <과환세계(科幻世界)> 수록

* 작가 : 장보(江波)
1978년 생인 장보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하드코어 SF 작가 중 한명이다. 2003년부터 35편이 넘은 중단편 소설을 출간해 왔으며 최근작으로는 2012년에서 2016년까지 스페이스 오페라 3부작 시리즈 『우주의 심장(银河之心)』을 출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2008년, 2009년, 2012년에 각각 중국 은하상을 수상한 단편 「시바의 춤(湿婆之舞)」, 「시공 추적(时空追缉)」, 「*황혼 전의 각성(移魂有术)」이 있다. 3부작 시리즈 『우주의 심장』의 최종편인 『빛과 그림자의 추적(逐影追光)』은 2016년 중국 성운상 대상을 수여하였다.
* 번역가 : 전정은
중국 소설이 좋아서 중국어를 배웠고, 좋은 소설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번역을 시작했다. 『무림객잔』, 『천관쌍협』, 『보보경심』, 『대막요』, 『운중가』 등의 소설과 대중가요 가사 등을 번역하였다. 미출간 무협 소설을 번역,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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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로프박사 18.04.09 10:04 댓글

    많은 SF소설 팬들의 꿈: 디지털 시대, 우주 시대가 된 후에도 종이책은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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