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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빙하 시대 이야기

완샹펑녠(万象峰年)

* 필명인 완산평녠은 만상, 즉 온갖 사물이며 온갖 현상이 절정을 이룬 해라는 의미


이사 오기 전, 집주인에게서 내가 빌린 방과 이웃한 방에 이미 누군가가 들어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라오무라는 그의 이름까지 듣고 나니 사기를 당한 것이라 해도 동료가 있는 셈이구나 싶어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사람 됨됨이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의 성격이 좋지 않다면, 동료가 있다는 자체가 일련의 불운한 사건의 시작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둠 속을 더듬어 올라갔다. 집주인이 준 열쇠를 두어 번 돌려봤지만 아무래도 영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물쇠에 스며든 한기 때문에 손만 저릿해 왔다.

“밀어! 밀라고!”

누군가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이미 다 썩은 문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내 짐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굴러떨어졌고, 거실 중앙에 커다란 고깃덩어리 같은 것이 보였다. 바로 라오무임에 틀림없었다. 땅에 엎드린 채 라면을 먹고 있던 그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좀 먹지 않겠냐는 뜻을 보였고, 나는 그의 입가에 흐르는 침이며 턱에 덜렁거리며 붙어 있는 면발 몇 가닥을 보고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별말 없이 계속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땅에 웅크리고 있는 뚱뚱한 몸에 꽁무니뼈가 마치 물고기 가시처럼 뾰족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몰래 몸서리를 한 번 치고 어색한 눈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실에는 탁자도 의자도 없었다. 바닥은 반쯤 녹은 얼음 조각들로 가득했고, 거실 한구석에는 빙하기가 남겨놓은 얼음층이 빛나고 있었다. 이 얼음층에 대해서는 집주인이 미리 양해를 구한 바 있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놀라운 모습이었다. 나는 차마 그 얼음층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재빨리 내 방 안으로 짐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바닥의 얼음층을 제거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다. 정리를 끝낸 방에 침구를 깔아 보니 일단 오늘 밤은 얼어 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불의 한쪽 끄트머리까지 짐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아주 좁았다. 나는 이불 위에 누워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 마침내 발붙일 곳을 얻은 것을 자축했다. 방을 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건축물 대부분이 빙하기에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동시에 인구수도 상당히 감소했지만 말이다. 빙하가 녹은 후 어떤 이들은 폐허에서 아직 쓸 만한 방을 찾아내 깨끗이 정리한 다음 소유권 등기를 했다.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그들은 후에 사회의 귀족계층, 부동산업자, 집주인 등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보니 이미 저녁 무렵이었고, 서리가 맺힌 창으로 희미한 주황빛 석양이 비쳐들고 있었다. 나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석양을 바라보았다. 생존학 대가의 강연에 따르면, 이런 행동이 따뜻한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이 어두워졌고, 나는 벽을 더듬어 빗장을 찾아내 문을 열었다. 문밖의 거실 역시 어둠에 싸여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초를 찾아 불을 붙여 다시 거실로 나가다가, 바닥에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니 바닥에 엎드린 채 라면을 먹고 있는 라오무였다. 저 정도의 먹성이라면 분명 적지 않은 수공업 노동자를 먹여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다 먹지 못한 건가요?”

이 말을 하고 나서야 분명 두 번째로 먹고 있는 것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콧방귀를 한 번 뀌었을 뿐, 식사를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그것만 먹나요?”

나는 그의 엉덩이를 발로 살짝 건드리며 물었다.

 “그럼 뭘 먹으라고?”

마침내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눈을 한껏 찌푸린 것이 마치 도마뱀 같았다.
이제야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셈이었다. (문을 사이에 두고 들은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탁할 뿐 아니라 저속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아마 실제로 바로 그럴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식사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고상함으로 어디 명함을 내밀기는 어려울 테니까. 

“조리하지 않아도 되는 식품도 있잖아요. 라면을 조리하려면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하니까요.”

나는 좋은 마음으로 충고했다.

“괜찮아, 따져보니 충분하더라고.”
“하루에 라면을 두 번이나 먹으면 저녁에 전기장판을 쓸 수 없을 텐데요?”

그는 자신의 뱃가죽을 두드렸다.

“내 여기는 두툼하거든.”
“아하-!”

나는 그의 몸을 지탱하는 두툼한 뱃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아마 정말로 추위가 두렵지 않거나, 혹은 추위에 떠는 한이 있더라도 먹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거나 둘 중 하나일 듯했다. 어쨌든 보통 사람처럼 먹을 체형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라면을 먹는 것을 보니 나도 라면을 먹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배급받은 에너지를 쓰지 않고 참아낼 수 있었다. 나는 압축 비스킷을 좀 입안으로 밀어 넣고, 차가운 물로 그 단단한 비스킷 부스러기를 삼켰다. 비스킷이 제대로 소화되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저 이 비스킷이 목구멍에서 머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짧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좀 걷겠다고 말한 후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섰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거리를 한참 돌아다녔지만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어붙은 세상의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 세상은 이제 어두컴컴한 폐허가 아니면 아직 녹지 않은 유빙층뿐이었다. 휑뎅그렁한 거리에 불어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전락한 귀족들이 뛰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이 세상도 한때는 귀족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이미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발아래 얼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졌다. 거리에는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무엇을 하러 나왔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참 동안 그저 멍하니 돌아다니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내일은 일자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추운 세계에서 얼마간의 온기를 유지하기에는 내 저축이 부족했다.

집에 돌아오니 라오무는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그의 방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라오무가 몸을 뒤척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추운 데야 당해낼 방법이 없겠지.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배급받은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에너지를 충동적으로 써버리지 않았으니까. 나는 축전지를 전기장판에 연결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정도 에너지라면 밤새도록 푹 자기에 충분했다.
다음날, 라오무의 코가 얼다 못해 새빨개진 것을 보고 웃으며 잘 잤느냐고 물었다.

“내 물고기 가시가 배겨서 견딜 수가 없었어. 한숨도 제대로 못 잤지.”

그랬었군, 나는 동정을 표시했다.
그가 물었다.

“그쪽은 잘 잤나?”
“아주 잘 잤죠.”

그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너- 네 변이는?”

나는 난처해 하며 대답했다.

“변이가 있어요, 내…… 아래의 거기…….”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을 표시했다.

라오무는 자칭 지질학자였다. 아마 지질학에 관련된 책을 몇 권 대강 들춰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바닥을 가리키며 거실 빙하에 갈라진 흔적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를 보라고, 여기 빙렬이 있잖아, 이게 글쎄 천장 판까지 이어지고 있다니까, 이건 구조의 응력이 만들어낸 거라고.” 
그는 이곳을 파면 소라껍데기 같은 것들을 파낼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빙하기 이전의 인류가 먹다 남긴 것들 말이야. 그 개새끼들은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던데…….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했다.

지질학자라는 것도 일자리를 구하는 데는 별다른 장점이 되지 못했다. 라오무는 며칠 동안 일을 찾았지만 전혀 수확이 없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에게 약간은 동병상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는 신기하게도 라오무가 구운 고기를 가지고 돌아와 함께 먹자고 했다. 고기 냄새에 자극받은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나는 술을 작은 것으로 한 병 사서 물을 조금 부어 섞은 후, 라오무에게 오늘은 제대로 신나게 놀아보자고 말했다. 라오무는 부엌칼로 고기를 잘게 조각내더니 나에게 절반을 주었고,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라오무는 급하게 술을 들이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늘 쥐를 한 마리 봤어.”

갑자기 라오무가 입을 열었다.

“응? 그것들이 아직 살아있다고요?”
“그러게 말이야. 길에서, 그러니까 그 녀석이 보도 아래 벽돌 틈을 기어가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얼른 잡았지. 원래는 원숭이 발전소에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군. 며칠 전 내가 시내 폐허에 갔을 때 막 녹은 문짝을 하나 봤다는 게 말이야.”
“문짝이랑 쥐랑 무슨 관계인데요?”

나는 고기를 씹으며 물었다.

“물어볼 필요가 있나? 문짝을 장작 삼아 불을 피우지 않았으면 네가 지금 먹는 쥐를 어떻게 구웠겠어!”

따귀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위에 한바탕 경련이 일었다. 나는 서둘러 술을 한 모금 마셔 경련을 억눌렀다. 아아, 라오무여, 라오무여. 정말이지 그대를 흠씬 패 주고 싶구나. 그러나 나는 이미 녹초가 된 상태였다. 위경련이 수그러들자 나는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남은 쥐고기를 전부 다 그에게 밀어버렸다. 이제부터는 그저 술만 마실 작정이었다.

“당신은 뭐든 다 먹을 수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니라고요. 내 위는 아주 약해요.”

나는 정중하게 라오무에게 경고했다.
라오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가 한 조각 한 조각 먹을 때마다 내 위장까지 꼬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술도 고기도 배 터지게 먹어 치운 라오무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젠장, 겨울은 왜 이리 긴 거냐고!”

나는 은근히 감탄했다. 이런 말들은 빙하기의 세계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겨울은 무슨 겨울, 봄이란 것 자체가 예전에 없어져 버렸는데요.”
“빙하기는 예, 예전에, 젠장, 끝나버린 것 아니냐고?”
“과학자들이 지금은 후 빙하시대라던데요. 최소한 천 년 이상 계속될 거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우리는 요행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운인 거라고요. 게다가 그렇게 살까지 찔 수 있었으면 만족을 좀 알아야죠.”

나는 은근하게 그를 비꼬며 말했다.

“후!”

라오무는 한숨을 쉬었다.

“그 많던 음식들이 이제 모두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니.”

나는 무시하듯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라오무가 계속 말했다.

“그들은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남겨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는 몹시 화가 난 듯 거친 입김을 내뿜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이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들고 마른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불룩거렸다. 거실 구석 유빙층 안에 갇혀 있는 동남아 원숭이는 새빨간 턱을 우리 쪽으로 향한 채, 막 뛰어오르다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원숭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겁에 질리곤 했다.


오늘 라오무는 밖에서 돌아오자마자 즐거운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 새로운 원숭이 발전소가 들어올 예정이고, 에너지 배급량도 늘어날 거라고 말이다. 
원숭이 발전소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인류는 빙하기가 오기 전에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 버렸다. 그리고 기나긴 빙하기 동안, 대부분의 과학기술을- 에너지를 생산하는 과학기술을 포함하여-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메리카 대륙의 과기고고학자들이 ‘비둘기실험실’ 유적에서 과거에 행해진 실험 자료를 찾아냈다. 바로 마약에 중독된 원숭이들로 하여금 발판을 밟게 하는 실험이었다. 원숭이들이 전심전력으로 발판을 밟으면 가느다란 관을 통해 마약이 원숭이들의 몸 안으로 들어갔고, 원숭이들은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마약을 얻을 수 없었다. 실험 결과는 원숭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발판을 밟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후빙하시대의 과학자들은 바로 이 실험에 근거하여 원숭이 발전소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 마약 생산량은 극히 적었고, 그에 따라 원숭이 발전소 규모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구의 이쪽 편에서 다시 한번 과학기술 발전의 이정표가 출현했다. 아시아 대륙의 과기고고학자들이 작은 수공업 공장의 폐허에서 프로피오페논을 이용하여 메스암페타민의 결정을 합성하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마침내 원숭이 발전소를 대규모로 확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인류는 다시 에너지 시대로 들어섰고, 세계 각지에 널리 퍼져 있는 수많은 원숭이가 인류의 문명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서광을 비춰 주었다. 그리고 이제, ‘원숭이’란 단순히 원숭이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동물을 뜻하는 말이 되었고, 인간 역시 당연히 거기에 포함되었다. <신문명법안>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직업이 없는 모든 유민, 그리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자는 인구위원회의 심사를 받으며, 합당한 해명을 하지 못할 경우 원숭이 발전소의 노역에 종사하도록 한다.’
원숭이 발전소는 바로 그런 지옥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재물을 생산하라고 채찍질하는 지옥. 그리고 그곳은 동시에 천당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온기를 느끼게 하고, 뜨거운 라면을 먹게 해주는 천당 말이다.

다음날 나는 새로 에너지를 배급받으러 갔다. 충전 스테이션 앞에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읽었던 빙하기 전의 글에서는 온갖 종류의 줄서기에서 뜬소문이 나오고 유언비어가 생겨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풍경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추위가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든 것일까, 모든 이들은 목을 움츠린 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끔 발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무리의 외로운 까마귀 떼 같았다. 나 역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를 찾을 생각은 없었다.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사흘 치의 에너지를 신청하고 내 축전지를 충전 플러그에 끼웠다. 녹색 등이 반짝일 때까지 충전한 후 축전지를 들어 올리는데 뒤에 서 있던 사람이 기다리지 못하고 나를 밀어냈다. 나는 그저 배급받은 에너지가 약간이나마 늘어난 것을 보고 기뻐했다. 

나는 상례를 깨고 라면을 끓여 라오무와 함께 축하 파티를 벌였다. 라오무는 여운을 즐기듯이 라면 국물을 마시면서 이런 공업 시대의 식품을 복원해내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쉽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빙하기 전의 광고에 근거하여 이런 음식을 복원해냈다. 그러나 사실 복원해낸 것은 고무줄이나 마찬가지인 음식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예전 인류의 음식이며 생활 방식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마치 그 광고처럼 말이다: 한가지 식품, 한가지 생활 방식. 
갑자기 라오무가 말했다.

“맞아, 오늘 원종인을 봤어.”
“정말인가요?”

나는 멈칫했다.

“암컷이었어. 까맣게 타고 또 삐쩍 말랐는데, 마치 원숭이처럼 재빠르더군. 사람들 한 무리가 둘러싸고 있었는데도 결국은 잡지 못했으니 말이야.”
“어디서 봤죠?”

나는 마음속으로 몹시 놀라 물었다.

“춘민로에서.”

그녀다! 나는 우현이라는 이름의 술집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는 술집 사장에게 저당으로 맡겼던 화분을 찾으려 하고 있었지만, 사장은 잡아떼고 있었다. 사실 누구라도 알 법한 일이었다. 화분과 같은 사치품은 암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리니, 사장에게는 이미 그녀에게 돌려줄 화분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한 마리 고양이처럼 탁자 위로 뛰어오르더니 사장을 붙잡았다. 사장은 놀라며 꽃을 이미 팔아버렸으니 대신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돈은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대신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술이나 내.”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술집으로 밀려들었고,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내 곁을 지나가던 순간, 그녀의 눈길이 나를 일별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녀가 일부러 나를 본 것인지 아니면 그저 눈길이 스친 것뿐인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길은 그렇게 오만했고,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내 가슴은 그녀 때문에 두근거렸다.

“그녀가 원종인인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물었다.

“경찰이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했는데 꺼내지 못하더라고. 몸에 변이된 부분도 전혀 없고 말이야. 젠장, 검고 말랐다고 불쌍하게 생각해서는 안돼. 그 여자 뼛속 깊은 곳엔 빈둥거리는 부잣집 자제의 씨앗이 여전히 남아있는 거니까.” 

나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원종인은 본래 귀족의 후예였다. 빙하기가 도래했을 때, 상류층은 세계 각지에 ‘문명온실’이라 불리는 보호 구역을 설치했다. ‘문명온실’은 귀족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과학 기술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저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엄동설한이 인류의 절반 이상을 줄어들게 만든 후, 보호 구역 밖에서도 요행히 살아남은 인류는 연합하여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나긴 추위는 인류의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켰고, 그들은 스스로를 신종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선조였다. 여전히 옛 인류의 순수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귀족의 후예들은 원종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시 시간이 한 참 흐른 후 우리 선조들은 원종인을 공격했다. 귀족에 대항하는 평민들의 이 전쟁은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는 과학 기술이 훼멸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빙하기력 714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문명온실’이 무너졌지만, 원종인들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원종인들 중 살아남은 자들은 ‘문명의 아이스박스’라고 부르던(우리는 그걸 ‘관짝’이라고 불렀지만) 동면 객실로 숨어들었다. 이 ‘관짝’들은 은폐된 장소에 비밀스럽게 건조되었지만, 빙하기를 거치는 동안 적지 않은 수가 발각당해 부서졌다. 그러나 어쨌든 빙하기가 끝나고 나니 옛 시대 귀족의 후예들은 마치 고질병이 발병하듯 끊임없이 ‘관짝’ 밖으로 기어 나왔고, 그렇게 살아난 원종인들끼리 연합하여 신종인들에게 권리를 요구했다. <신문명법안>이 통과된 후, 신종인들은 원종인의 권리를 승인하고 제한적으로나마 사회에 진입할 것을 허가했다. 그러나 원종인들이 실제로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숭이 발전소에서의 노역을 예로 들자면, 신종인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에야 그곳에 가게 되었지만 원종인들은 아예 그곳에 내동댕이쳐지다시피 하는 일이 많았다. 원종인들이 아무리 해명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라오무가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가 봐? 아무튼 참 아까운 일이지, 그런 잡종은 분명 직업이 없는 떠돌이일 텐데. 잡아서 원숭이 발전소에 보내면 보상으로 적지 않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거란 말이야. 만약 내가 쫓아갔더라면…….”

여기까지 말한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두꺼비가 나를 핥고 있는 것처럼 혐오감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움츠리고 말았다. 나는 전 세대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그 후손들에게 추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종인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람은 타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었고, 어쩔 수 없이 그런 화제를 피하곤 했다. 나는 내 혐오감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래요, 잡아야만 하지요. 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나쁘다면.”

라오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이건 아주 당연한 거야, 원종인 중에 괜찮은 놈은 하나도 없다고. 환경을 망쳐 놓고 숨어버린 자들이 바로 원종인이지. 우리야 죽건 말건 내버려 두고 말이야. 우리는 스스로 살아남았는데, 지금 와서 그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와 함께 자원을 누리려는 거지? 그들은 무엇 때문에 꼬리뼈가 자라지 않는 거냐고!”

라오무의 말을 듣자, 예전에 본 정론 방송에 나왔던 격정적인 연설이 떠올랐다.

“그 시대의 원종인들은 자원을 수탈하여 핵심적인 이득을 얻었던 이들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그 시대 환경 정책의 주요한 결정자이기도 했습니다. 전 지구에 환경 재난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마땅히 책임져야만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책임을 방기하고 오히려 자원들을 가로채서 자신들만 살아남으려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순수한 유전자야말로 수많은 인류가 희생한 대가입니다. 그들의 염기쌍 하나하나 안에 죄악이 새겨져 있어요. 그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그 원죄를 계속하여 복제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유행하던 말인 ‘분노하는 청년’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라오무와 같은 사람을 형용하는데 그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듯했다.
그 ‘분노하는 청년’들이 기고만장해 떠드는 ‘유전자 합법성’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그저 떠들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전자의 차이는 결코 두 종류의 인류를 가르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우리 대부분의 변이는 대단하지 않았고, 실제로 우리는 원종인과 대단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모반 하나, 그저 작은 표식 하나에 불과한 변이라도 그것은 일단의 역사와 원한을 드러내는 징표였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불평등에는 불평등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잡혀가면 어떻게 하지? 원숭이 발전소로 끌려가면 빠져나올 수 있을까? 예전에 머물던 도시의 발전소 뒤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었다. 종종 발전소의 작은 철문이 그 골목을 향해 열렸고, ‘원숭이’가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나는 한나절을 보고서야 그가 원래 사람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너무나 쇠약해진 나머지 더 이상 발판을 밟을 수 없어 거리에 내팽개쳐진 듯했고, 아마 머릿 속 의식조차 곤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가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도저히 사람의 말 같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골목을 따라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다음날 내가 다시 그 골목에 들려보니 그는 골목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나머지, 또 마약 중독으로 인해 발작을 일으켜 귀신보다 더 무서운 몰골로 죽어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온몸이 오싹했다. 나는 한 손으로 라오무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나요?”

라오무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발, 발전소 방향으로.”

나는 꾸물거리며 일어나, 발걸음을 내디뎠다.
라오무는 깜짝 놀란 듯 서둘러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나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부엌칼을 하나 쥐고 말했다.

“그녀를 죽이러 갈 겁니다.”
“이봐, 너.”

라오무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들이 반항할 텐데, 조심해야 해! 그냥 그만두는 게 어때?”


발전소 주위는 폐허 지대였다. 그곳에 있던 건물들은 모두 빙하기 때 무너졌고, 이제는 그저 허물어진 담벽만 남아있었다. 대부분의 지역은 아직 얼어 있었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었다. 길가에 남아있는 얼음 속으로는 늙은 나무 그루터기가 보였다. 얼음이 녹기만 하면 누군가가 이러한 나무 그루터기들을 파내어 암시장에 가져다 팔 수 있을 것이다. 신흥 귀족들이 이미 벽난로를 만들어 놓고 이런 땔감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 부근의 환경이 그녀의 토끼 같은 행적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무너진 거리 낡은 담장 위로 비스듬히 비쳐들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푸르게 변한 이끼 위로 빛이 넘실거렸지만, 내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은 퇴락한 풍경이었다. 담장 위에 적힌 숫자를 제외하면 어떤 문명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곳, 이곳도 예전에는 꽤 좋은 주거 단지의 정원이었다. 정원을 지나가며 희미한 곰팡내를 맡을 수 있었다. 좋은 일이다. 지금의 기후가 점점 포자가 번식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변하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좁은 골목에서 사람들 한 무리가 연달아 욕설을 퍼부으며 나왔다. 그들이 멀리 갈 때까지 기다린 후, 나는 그들이 나온 골목으로 들어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깨진 창문에서 뛰쳐나오다가 나와 얼굴을 마주쳤다. 그녀는 놀란 듯 멈칫했고, 나는 서둘러 말했다. 

“안심해요, 그들은 갔으니까.”

그녀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나를 믿기로 한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기억나요. 우현 술집에서 본 적 있지요.”

우리는 작은 국숫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녀와 나를 위해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제가 내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후한 사람인 척 이야기했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 보아하니 내가 돈을 내지 못할 것 같아요? 아니면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거리에 오가는 그런 건달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당신에게 술을 한 잔 빚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새빨갛게 얼어붙은 작은 손이며 얼굴에는 찰과상의 흔적이 좀 남아있었다. 마치 가시나무에서 빠져나온 작은 사슴 같은 모습에 마음이 은근히 아파왔다.
그녀는 조금은 온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보답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요.”

나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얼굴이 얼어버렸기 때문에 겨우 바보처럼 입 끝만 살짝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은 무척 따뜻했고, 나는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나는 즁싼입니다.”

내가 말했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인데. 나는 펑옌이라고 해요.”
“펑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다. 
국수 가게는 노부부가 연 것으로 폐허 담장에 기대 있었다. 어디선가 주워 온 듯한 석면 타일로 천장을 받치고 성의 반대쪽을 향하고 있는 곳이었다. 주인장은 열기가 올라오는 전기 솥 안에 면을 넣은 후, 다시 봉지에 든 조미료를 넣었다. 저건 바로 라면이 아닌가? 나는 매우 실망했다. 이제 정말로 라면의 시대인 모양이었다. 주인장이 솥을 들어 올리려 하자, 여주인이 나와 노인의 손을 밀치고 행주로 뜨거운 솥의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마침내 면이 솥 밖으로 나와 우리의 탁자로 도착했다. 나는 그릇 안을 들여다보고 나도 모르게 눈을 빛냈다. 그릇 안에 뜻밖에도 고기가 몇 조각 들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나는 부유한 척하는 금기를 범하느라 국수를 주문하기 전에 가격을 묻지 않았고, 이 국수의 가격을 알지 못했다.

나는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펑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삐쩍 마른 뺨이 수증기 속에 흐릿하게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그릇을 드는 것을 보자 그만 정신이 나가 버렸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국수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돈을 낼 때가 되자 펑옌이 말했다.

“당신이 다 낼 필요는 없어요, 나도 돈이 있으니까.”

난처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약간 머뭇거리며 몰래 손을 주머니에 넣고 돈을 세어 보았다. 아마도 국숫값 정도는 충분할 것 같았다.

“그냥 내가 내는 거로 합시다, 한 번 빚을 졌으니까.”
“나에게 빚을 졌다고요?”
“그 ……그래요.”

펑옌이 웃기 시작했다.

“그럼 편한 대로 해요.”

그녀가 왜 웃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나도 그저 바보같이 따라 웃었다. 국수는 다행히도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서 내 돈으로도 충분했다. 돈을 낸 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잠시 망설이다가 여주인에게 물었다.

“어디서 고기를 가져오는지요?”

여주인이 말했다.

“여긴 발전소에서 가까우니까, 항상 ‘원숭이’, 거기서 빼내 오지. 아주 편해.”

라오무여! 나는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외칠 뻔 했다. 라오무여, 라오무여, 어째서 모두 당신과 같다는 말인가? 됐다, 됐어. 나는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위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간신히 얼굴에 웃음기를 띄웠다. 나는 펑옌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했고 펑엔은 승낙했다. 우리는 함께 쇠락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당신은 원종인이죠?”

길을 걷던 중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펄쩍 뛰더니, 소매를 걷어 팔에 있는 상처를 내 앞에 흔들어 보였다.

“여기 변이가 있어요!”
“그건 화상 자국인데요, 스스로 낸 상처인가요? 안심해요, 악의는 없으니까. 나도 원종인입니다.”

그녀는 세심하게 나를 살펴보았다. 내 몸에 어떤 변이도 없는 것을 보고 나자 눈 속의 경계심도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그 흉터 말인데, 앞으로 그렇게 바보 같은 일은 하지 말아요. 어차피 사람들을 속일 수도 없고 결국 당신 몸만 상하니까요.”

그녀가 괴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나는 안다.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그동안 당신이 얼마만큼 억울한 일을 참아 왔는지. 나는 너무나 그녀의 어깨를 안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녀가 사는 곳에 도착했다. 폐허 안의 토굴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일자리를 찾아야 해요, 그다음에 제대로 된 방을 한 칸 빌리고. 아니면 그들이 당신을 직업이 없는 떠돌이로 취급할 테니까요. 나도 직업이 없으니 우리 함께 찾아봅시다.”
“고마워요.”

그녀는 감격한 듯 말했다.

“노력해 보겠어요.”

나도 말했다.

“내일 다시 올게요.”

피곤한 나머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까무룩 잠들었을 무렵, 라오무의 고함 소리에 눈을 뜨고야 말했다. 라오무는 나를 방문 밖으로 끌어내더니 화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라오무는 축전지에 붙어 있는 응급등을 켜고 화장실 구석의 얼음을 비췄다. 그가 이렇게 기꺼운 표정으로 응급등을 켜는 것을 보니 분명히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모양이었다. 얼음층 안으로 원통형의 물건이 하나 보였다. 

“보여?”

라오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혹에 가득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오무는 바로 응급등을 껐다.

“이거 원터치 캔이라고! 마시는 거야, 빙하기 이전의 물건.”
“흥미 없어요, 어차피 꺼내지도 못할 텐데.”

나는 흥이 깨진 채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라오무는 그 캔에 대해 지치지 않는 열정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다. 그는 라면을 먹을 때마다 국물을 그 얼음 위에 뿌렸다. 나는 그가 식욕조차 포기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매일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얼음 위에 국물을 부었다. 그 뚱뚱한 몸이 어떻게 그렇게 정교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얼음은 조금씩 녹았고, 일주일이 지나자 마침내 캔을 꺼낼 수 있었다. 라오무는 캔을 받쳐 들고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캔 위에 ‘Coca Cola’라고 적혀 있었다. 캔 자체는 이미 변형된 상태였지만 뜻밖에도 여전히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라오무는 이것은 최고급 사치품이라며 암시장에 내다 팔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단, 부자들도 자신처럼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을 정도로 식탐이 강할 거라 기대하지는 말고.
다음날, 라오무는 정말로 캔을 검은 가죽 가방 안에 숨기고 밖으로 나갔다.

그 무렵 나와 펑옌의 관계는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거리와 골목 여기저기를 다니며, 전신주 위며 노무소에 붙어 있는 구인광고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사실 내 마음은 계속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일자리를 얻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원종인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차별하는 조건은 아주 많았고, 누군가는 악의 서린 눈빛으로 펑옌을 노려보곤 했다. 그런 상황을 만나면 나는 바로 그녀를 끌고 그 자리를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그렇게 아무 수확도 없이 하루가 끝날 때면, 나는 낙담하는 동시에 몰래 조금은 기뻐했다. 다음날 다시 펑옌과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 간혹 경제적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면 바로 날품팔이 일을 해서 돈을 좀 벌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 돈을 재촉하는 일도 하고, 유명 상표의 과자를 파는 외판원 노릇도 했으며, 또 술집에서 물을 타는 일도 했다. 어쨌든 항상 마음속으로는 새기고 있었다. 잡혀서 발전소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이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펑옌에게 말했다.

“춘민로 술집에 가서 한잔하자.”

펑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고, 주머니를 두드려 보였다.

“칼을 갖고 있어. 내가 지켜 줄게.”

나는 부엌칼 손잡이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 검은 물건을 확인하자 찬란하게 웃으며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즁싼, 그대에게 이 아가씨의 호위 역할을 맡기노니, 게으름을 부리지 말도록 하라!”

나는 성큼성큼 걸어 그녀를 따라갔다.
우리는 ‘생활파’라는 이름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의 이름은 아마 일종의 오래된 생활방식을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나는 안쪽에 자리를 잡고 펑옌이 안쪽을 향해 앉게 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펑옌은 원망으로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열두 살이 되자 부모는 더 이상 나를 부양해주지 않았어.”

그녀의 눈에 서린 어두운 빛이 술잔을 통과하며 반짝였다. 우리가 함께하는 공간 가득 그녀의 숨결이 떠도는 것 같았고, 내 마음은 어찌할 수 없이 이끌리고 말았다. 

“부모는 항상 나에게 차가웠지. 그리고 그게 다 나를 냉혹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어. 이 냉혹한 세상에서 나를 생존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냉혹한 마음뿐이라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난 결국 그 냉혹한 마음을 배우지 못했지.”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너에게 부모가 있다는 것이 부러워. 나처럼,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두 시험관에서 나오잖아. 탁아소에서 자라 교육원으로 보내지고. 마치 무슨 파이프라인을 따라가듯 말이야. 내가 사회에 나왔을 때 나를 돌봐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노동 번호뿐이야. 아, 하지만 선생님이 한 분 계셨지. 그분은 우리에게 성함을 알려주셨고, 우리와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를 원하셨어. 선생님 성함은 야쭤였는데, 내가 들어본 중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지.”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야쭤 선생님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해서 그녀를 웃겼다.

“그분은 마치 우리들의 어머니 같았어. 내 평생 유일하게 기억하는 어머니의 느낌이지.”

나는 말을 멈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아, 아니.”

펑옌은 정신이 차린 듯했다.

“어머니의 느낌? 그건 어떤 거지?”
“설명하기 어렵네. 어두운 터널에 있지만 앞에 빛이 있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몹시 추운 곳에서도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그런.”
“야쭤 선생님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응, 난 그렇게 믿어. 선생님의 눈은 늘 행복해 보였거든.”
“정말 특별한 선생님이네. 요즘 사람들은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는데 말이야.”
“그래…… 우리는 모두 버림받은 세대지. 지금 누가 아직도 후세에게 희망을 품을 수 있겠어?”

이 시대의 인류는 더 이상 종족의 영광을 계속하려 하지 않았다. 존속하고자 하는 유전자의 본능은 여전히 강렬했지만 말이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고기 분쇄기’의 쾅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허하고도 광폭한 가락이 나의 태양혈을 한바탕 두드리는 것 같았다.

매달 한 번, ‘고기 분쇄기’는 거리를 지나갔다. ‘고기 분쇄기’는 쇠로 만든 기계로, 거대한 원통 형태였고 겉에는 구멍이 잔뜩 뚫려 있었다. 나는 일주일 전에도 ‘고기 분쇄기’를 보았는데, 기계는 여전히 네 개의 바퀴에 의지해 굴러가고 있었다. 꼭대기의 작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모습은 과거 증기로 움직이던 기계들을 떠올리게 했다. 움직임에 따라 음악이 함께 흘러나왔지만, 음악보다는 기계 자체가 내는 굉음이 더 사람의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 같았다. 거리 끝에서 기계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남자들은 이미 새까맣게 몰려와 있었다. 기계가 천천히 거리 한가운데로 굴러와 멈춰 서면 남자들은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허리띠를 풀며 서로를 떼밀고 자신의 아랫도리로 기계의 구멍을 하나하나 채우기 시작했다. ‘고기 분쇄기’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회전하면, 남자들은 거머리처럼 원통에게 찰싹 달라붙어 몸을 비비고 흥분하여 고함을 지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초가 되었다. ‘고기 분쇄기’는 계속하여 연자방아가 돌아가는 소리를 냈고, 뒤에 있던 남자들은 여운을 즐기는 남자들을 끌어내고 바로 돌격했다. 그리고 그 뒤에 또 다른 남자들이 바지춤을 잡은 채 재촉하고 있었다.

‘고기 분쇄기’는 두 시간 동안 그렇게 우뚝 솟아 있다가, 다시 즐거운 곡조를 노래하며 다음 거리로 향했다. 물론 선전을 한바탕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후손을 낳으세요’ 라던가 ‘낳지 않는 것은 수치, 많이 낳으면 영광’ 같은.
누구도 정부의 이러한 선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10세기 전의 사람들은 후손에 대한 책임을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 10세기 후의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고 있었다. 옛사람들은 백배나 되는 자원을 가지고도 자신만을 생각했는데, 우리가 그때의 백 분의 일 밖에 안 되는 자원으로 다른 이를 보살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이 냉혹한 세계에서 고통받는 생명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버림받은 시대였고, 동시에 모든 것을 버린 시대였다.
과학자들은 ‘고기 분쇄기’를 사용하여 정자를 수집해 배태를 배양했고, 어렵게나마 출생률이며 다양한 유전자를 유지해냈다. 전 세계 최상급 과학기술은 모두 이 일에 동원되었다. 인류 종족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에.
펑옌의 목소리가 내 사고의 흐름을 끊었다.

“예전의 사람들은 이러지 않았어. 비록 그들은 용서받기 어려운 잘못을 저질렀고 매우 이기적이었지만, 나는 그들에게도 아름다운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해. 그들은 낯선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어. 가정을 이루고 서로에게 마음을 쓰고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 후손들을 위해 아름다운 미래를 계획하고 말이야. 그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힘을 갖고 있었어.”
“사명감 말이야?”

나는 확신하지 못한 채 물었다.
매년 시민대표대회에서 큰소리로 외치던 지식분자가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귀먹은 사람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어나시오! 우리는 후대에 더 이상 사명감을 가져서는 아니 되오, 인류는 멸망해야 해!”

그러나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스스로의 생존뿐이었다. 인류라는 이미 멸망해가는 종족에는 누구도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후에 그 지식분자는 미쳐 버렸다. 그는 다시 시민대표대회에 나와 자신의 그것을 잘라버린 후 가장 높은 건물에 걸어두겠다고 외쳤다. 자신의 그것이 인류의 멸망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행운이라면, 지식분자는 항상 그의 고통 받는 종족보다 먼저 멸절된다는 것일까.
펑옌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사명감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어. 가끔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거든.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린 거야.”

그러나 누구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는 천 년 전의 사람들과 이미 다른 종족이었다. 그들의 문명은 아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들의 생존 방식은 천 년 전에 이미 끝나버렸다.

 

라오무는 그 캔을 팔지 않고 다시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그가 갈등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잠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저녁 해에 그의 실루엣이 바닥에 길게 늘어졌는데, 마치 형이상학적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갑자기 제 허벅지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츠-’하는 소리와 함께 캔을 따더니 나에게 물었다.

“너-.”
“싫어요!”

나는 재빨리 답했다.
라오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젖히고 캔 안의 액체를 전부 마셔버리더니 한바탕 트림을 토해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맛이야…… 그런데 내가 이걸 왜 팔지 않았는지 알아? 내가 뭘 하나 발명했기 때문이지, 이 캔을 거기 쓸 수 있단 말이야.”

라오무는 재빨리 자신의 구상을 내 앞에서 실연해 보였다. 그는 캔을 전기스토브 위에 올려놓고, 구부릴 수 있는 호스를 캔 입구에 꽂았다. 그리고 잡다한 물건이 든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 한 송이를 꺼냈다.

“만약 이게 돌아가는 프로펠러라면.”

그는 플라스틱 꽃을 호스의 한쪽 끝에 꽂았다.

“봐봐, 이것들을 고정하면 프로펠러가 발전기를 하나 움직일 수 있어. 전기스토브가 캔 안의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호스를 통해서 프로펠러를 움직이고, 결국 발전기를 움직이게 되는 거지. 그럼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나는 머릿속으로 판단을 끝낸 후 물었다.

“이 장치를 움직일 에너지는 무엇이죠?”
“수증기.”

그는 생각하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기.”
“바로 그렇죠, 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만든다고요? 내 생각에 이 장치는 더 많은 전기로 더 적은 전기를 만들어낼 것 같아요.”
“그건 이 장치가 아직 너무 조촐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많은 에너지를 잃어버리는 거지. 내가 이 시스템을 계속 개선해 나간다면, 이 시스템의 에너지 손실을 줄일 수 있을 거고 만들어내는 전력도 분명히 증가할 거야. 만들어내는 전력이 들어가는 전력보다 커지면, 내 발명은 바로 성공하는 거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음, 성공을 빌어요.”

타인의 괴로움을 고소하게 여기는 감정이 생겨났다. 그가 저 발명에 매달리게 내버려 두자. 그러면 최소한 라오무는 내 앞에서 바보짓을 저지를 시간도, 바보 같은 말을 지껄일 시간도 없을 테니까.


펑옌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바쁜 듯, 며칠 동안이나 나와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 며칠 내내 내 마음은 텅 빈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가 비밀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가자, 내가 새로 발견한 옛 물건을 보여 줄게.”

발전소 주변은 황량하니 인적이 없었다. 대부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펑옌은 항상 이 일대에서 옛 물건을 찾는다고 말하며, 폐허에서 오랜 시간 얼음 속에 방치되어 있던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 흔적은 바로 원래 침실이었던 공간의 한 귀퉁이였는데, 얼음층에 갇힌 탁자 하나가 모서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얼음 안으로 탁자 위에 놓여있는 책 몇 권이 보였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곳의 주인은 저 책들을 그저 몇 페이지 들춰본 후 총총히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신없는 와중에 떨어뜨린 앨범은 계속 탁자 아래에 놓여 있었고, 시간은 그 상태로 응고되어 버렸겠지. 그렇게 조용히 천 년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펑옌은 크로스백에서 못과 돌 등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지금 이 탁자를 파내는 중이야. 먼저 윤곽을 따라 구멍을 내고 다시 얼음을 녹여야 하는데, 지금 이미 한쪽을 파낸 셈이야. 일주일 정도면 저 책을 파낼 수 있어. 내 최후의 목표는 저 앨범인데, 아마 한 달 정도 필요할 거야.”
“대체 어떻게 얼음을 녹이는데?”

내가 물었다.

“뜨거운 물로. 하지만 종이 같은 물건이라면 마지막엔 뜨거운 물을 쓸 수 없지. 그땐 체온으로 녹여야 해.”

내 심장이 조여들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언 채로 못을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 겨우 저만큼의 온기로 얼음을 녹인다고? 나는 얼음을 만져 보고 차가운 나머지 바로 손을 움츠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물건이, 그렇게 힘을 들일 가치가 있는 거야?”
“응.”

펑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이건 내가 예전에 찾아낸 거야. 봐봐, 빙하기 전의 사람들도 우리와 같았어.”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재빨리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누렇게 변색된 사진 속에서 여자는 조용히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오고 눈에는 희미한 우울함이 서려 있었지만 햇빛 속에서 모두 녹아버리고 있는 듯했다. 다른 한 장은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는데, 남자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여자는 꽃 한 묶음을 든 채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꽃처럼 웃고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있었던 거야, 모두 햇빛 속에서 피어났겠지.”

펑옌이 동경하듯 말했다.
나는 사진에 날짜가 없는 것을 보고 물었다.

“두 장 중에 어떤 사진이 먼저 찍히고 또 어떤 사진이 뒤에 찍힌 거야?”

그녀는 고개를 흔들더니 곧바로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나중에 찍은 거야.”

펑옌은 이 층 높이의 마루판 위로 올라가더니 나에게도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담장의 잔해를 밟고 올라갔다. 펑옌이 나를 끌어올려주었고, 나는 바로 뛰어올랐다. 우리 마루판 가장자리에 앉아 발아래의 검은 폐허와 흰 얼음을 바라보았다. 펑옌은 마술이라도 부리듯 공책을 한 권 꺼냈다.

“같은 곳에서 찾아낸 거야, 그 여자의 일기장인데, 바로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지.”

나는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재빨리 일기장을 뒤로 감췄다.

“내가 읽어 줄게.”

그녀는 일기의 한 페이지를 펼치더니 읽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우체부의 자전거를 쫓아갔고 우체부는 넘어지고 말았다. 꽃의 바다 속으로 넘어졌지.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둘러쌌고 우체부는 너무나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자전거를 밀면서 뛰어갔는데, 그 뒤로 꽃잎이 잔뜩 쫓아가고 있었다. 마치 아이처럼 찬란했지.”

나는 당혹스러워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체부? 자전거? 넌 이 내용을 대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어?”

그녀는 고개를 흔들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굉장히 신기하잖아, 나 이 감정들을 느낄 수 있거든! 문자의 행간에서 튀어 오르는 이 기쁜 감정이, 뭐랄까, 마치 꼭 태양의 반점 같아!” 

펑옌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가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저 부자연스럽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여자의 외할머니네 집은 교외에 있었고, 그녀는 여름이면 그곳에 가서 한동안 머물곤 했지. 그곳엔 생화가, 넓은 들판이, 햇빛이, 그리고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어. 그리고 우체부라고 불리는 사람이 매일 같은 시각에 지나가곤 했지. 그곳에서 그녀는 사진 속의 그 사람을 만난 거야. 하지만 나는 여자의 이름은 몰라. 여자가 적어 놓지 않았거든.”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했다. 심지어 그들의 감정까지 느껴보았다. 마치 우리가 그들과 같아진 것 같았고, 우리도 그때처럼 햇빛이 찬란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은 그저 우리들 자신의 감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결국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펑옌은 일기장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빗줄기가 창에 비스듬히 내리고 있어, 창밖에는 소녀들이 치마를 말아 쥐고 작은 물웅덩이를 지나고 있어. 만약 내가 뛰어나가 저 애들과 싸운다면 당신은 누구 편을 들까?”

펑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펑옌은 작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도 있어. 만약 예전에 알지 못하던 남자가 몇 번이나 너에게 빚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그가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야.” 
“아?”

내 심장이 덜컹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이 말의 의미를 굳이 분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펑옌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뒤쪽의 한 페이지를 펼치더니 조용히 읽었다.

“우리는 교외의 그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있었다. 바위 아래에는 덤불이 무성했고 나는 꽃무늬 치마를 입은 채 발을 흔들거렸지. 당신은 휘파람을 불고 있었는데 참 듣기 좋았어. 우리는 수많은 종이비행기를 날렸지. 비행기들은 우리 주위를 돌다가 하나하나 덤불 속으로 떨어졌어.”

그녀는 일기를 덮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만약 이 모든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런 폐허에서 얼음을 보고 있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넌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다음에는 뭐라고 쓰여 있어? 그녀는 어떻게 되었어? 또 그들은?”

그녀는 말없이 일기장을 크로스백에 넣고, 고개를 숙인 채 내 어깨에 기댔다.
나는 조용히 어깨에 얹힌 무게를 느끼면서, 단정한 자세로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니 네 개의 발이 보였다. 새까만, 인조 가죽 신발을 신은 두 개의 발과 더럽고 찢어진 장화를 신은 두 개의 발. 네 개의 발이 폐허 위에 걸린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할 수 있겠어?”

펑옌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뭘?”
“아래에서 지하실을 하나 발견했어. 아주 어두워.”
“난…… 당연히 할 수 있어, 난 칼도 있고!”

펑옌은 기쁜 듯 나를 잡아끌었다.

“가자.”

우리는 지하실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내가 앞에서 길을 탐색했는데. 발아래는 온통 돌 더미였다.

“조심해.”

나는 펑옌에게 말하고 앞으로 한참 걸어갔다. 발아래가 평지로 변했고 다시 좀 더 걸어가니 막힌 벽이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앞쪽의 벽을 쓸어보며 말했다.
조용했다.

“펑옌?”

내가 물었다.

“즁싼, 할 수 있겠어?”

그녀가 갑자기 뒤에서 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무슨 말을 하는 …….”

나는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나의 심장이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아니 …… 나는…… 나는 못 해 …….”

나는 급하게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이 내 등에 와 닿았고, 그녀가 내뿜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를 나를 놓아주고 그윽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원종인이 아니야, 변이가 있어, 맞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를 속였어?”
“미안해……”

나는 스스로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했다.
그녀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까지 나와 함께 있기를 원했던 거야?”
“나도 왜인지는 몰라. 이게 옳은 건지 틀린 건지도 모르겠어. 그저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았고, 너와 함께 있으면 나도 사진 속의 두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걸, 바로 연애라고 하는 거야.”

펑옌이 내 귀 뒤쪽에서 조용하게 말했다.

“나는 널 탓하지 않아.”

그녀가 내 앞으로 돌아오더니 발끝을 들고 내 뺨에 입을 맞춘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실을 나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라오무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연애를 한다고? 애정? 그런 건 몇 세기 전에 없어진 개념 아닌가?”

라오무는 자신의 발명품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의 발명품은 이미 형태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이걸 그렇게 불러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 있어요?”
“나는 오로지 ‘고기 분쇄기’에만 뭔가를 느끼지. 이상하군. 넌 그걸 할 수 없지 않나.”

그는 말하면서 관 하나를 캔 안에 채워 넣었다.

“그런 느낌이 아니에요.”
“그런 걸로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는 말라고. 아직 일자리도 찾지 못했잖아?”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
“누구인데?”
“그 원종인이요.”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그가 뭔가 행동을 취하려 한다면 내가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
라오무는 잠시 동작을 멈추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내가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는 뜻밖에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슬며시 주먹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는 흥겨운 표정으로 나에게 그의 발명품을 조작하도록 했다. 대체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모르지만, 그는 프로펠러에 작은 전동기를 연결하고 작은 전구도 달아 놓았다. 지금 라오무의 장치는 전구를 희미하게나마 밝힐 수 있었다. 그는 이 실험에 필요한 에너지를 조달하기 위해 라면마저 끊은 상태였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라오무는 침식을 잊고 발명에 모든 정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는 하루하루 말라갔고 겉모습조차 단정하게 챙기지 않았다. 저축도 이제 남은 것이 얼마 없었지만, 아르바이트를 찾으러 나가지도 않았다. 집주인은 몇 번이나 집세를 재촉하면서 매번 방을 비우라고 위협했다. 나는 어찌어찌 돈을 긁어모아 집세를 냈지만, 라오무는 그저 버티기만 했다. 나는 라오무에게 제대로 된 일을 찾으라고 말했다. 돈을 벌지 않으면 당신은 나에게 돈을 빌리려고 할 텐데, 나는 빌려줄 돈이 없다고. 그가 대답했다.

“이건 시대를 가르는 발명이라고. 조금만 버티면 분명히 성공할 거야. 그때가 되면 너도 매일 라면을 끓일 수 있게 될걸.”

그는 거대한 등을 쭉 폈다. 그의 척추에서 뚝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허리를 편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멍하니 거실 구석의 동남아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동남아 원숭이도 새빨간 턱을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몸을 떨더니 말했다.

“정말로 안 된다면, 저걸 꺼내서 배를 채울 수 있겠지.”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며칠 동안이나 아르바이트를 찾지 못했고, 나와 펑옌의 경제 사정은 다시 어려워졌다. 내가 속수무책으로 지내고 있는 동안, 펑옌이 갑자기 일거리를 얻었다고 말했다. 원숭이 발전소에 가서 문서를 훔쳐내기만 하면 엄청난 돈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일이 어디서 온 일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그 원종인 과격 조직과 관계를 맺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파괴적인 수단으로 권리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약간 화를 내며 말했다.

“넌 무엇이든 무서워해! 그럼 네가 날 먹여 살릴 수는 있어?”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네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 그곳은 가장 위험한 곳이니까.”

그녀는 나에게 팔을 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너에게 칼이 있잖아, 나를 지켜줘!”

그녀를 말리려던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나는 목 끝까지 치솟던 말을 다시 집어삼켰다. 그녀는 나를 잡아끌며 말했다.

“어서 가자!”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함께하기로 했다.
우리는 발전소 밖의 담장 위에 엎드린 채 정탐했다. 발전소 주위로 두 사람 높이의 담장이 빙 둘러 있었다. 담장 안으로 회색의 작업장과 거대한 변전기가 보였다. 우리의 목표는 문서가 있는 당안실이었다.

“봐봐, 저기 호스가 잔뜩 있어.”

내가 말했다.

“응, 나도 봤어. 저쪽에서 벽돌을 받치고 담장 위로 기어 올라간 다음 저 호스 더미 위로 뛰어오를까 해.”

나는 몸서리를 쳤다. 저 호스가 수액 공급용이라는 점을 떠올리자, 보이지 않는 곳에 주삿바늘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위험해.”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녀는 이 방법을 고집했다. 내가 다시 말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거야.”

그녀가 말했다.

“네가 경비원들을 좀 잡고 있어 줘. 내가 문서를 훔쳐서 대문으로 뛰어나올 테니까. 내가 발전소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저들은 절대로 나를 잡지 못해.”

나는 결국 그녀를 설득하지 못했다. 계획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 반드시 안전하게 돌아와야 해.”

나는 신신당부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입김을 불어주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술 두 병을 들고 작업장 문 앞의 접수처로 갔다. 경비 몇 명이 즉시 나를 둘러쌌다. 내가 말했다.

“고기를 구하러 왔어요.”

얼굴에 군살이 뒤룩뒤룩한 경비가 말했다.

“제대로 찾아왔군.”

그는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방에는 부러진 작은 걸상이 너덧 개 있고, 중앙의 탁자에 카드가 몇 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솥에 아직도 열기가 오르는 라면이 반쯤 남아있었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경비가 얼굴을 위로 하고 소파에 기댄 채 앉아 있었는데 소파가 꽉 차 보였다. 그의 턱에는 눈에 거슬리는 커다란 홍반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보안과장이라고 소개했다. 

“가게를 열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숫집을 열려고요.”
“좋은 생각이군.”

그는 술병의 뚜껑을 입으로 물어 열더니, 술을 한 잔 따랐다.

“신선한 게 필요한가?”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숙함을 눈치 채이지 않도록 얼굴을얼창가로 향했다. 창밖 작업장에는 녹이 슨 우리며 발판, 베어링과 쇠사슬 같은 물건이 몇 더미나 쌓여 있었다. 나는 그제야 공기 중에 가득한 기름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한바탕 구역질이 밀려왔다.
과장은 작은 공책을 꺼냈다.

“신선한 건 예약을 해야 해. 인육은 필요 없지? 근시일 내로 나귀 한 마리랑 원숭이 열두 마리, 오소리 두 마리가 나올 예정인데 모두 예약이 꽉 차 있다고. 아, 그리고 만호후라고 부르는 커다란 코끼리가 있는데 말라서 피골이 상접한 게 곧 끝날 것 같아. 분명 근일 내로 배달해줄 수 있을 텐데, 그걸 가져가도록 하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코끼리 고기는 너무 질겨서, 불에 오래 올려놔야 해요.”

“그럼 한참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이걸 보게…….”

나는 창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평옌의 그림자가 작업장 끄트머리로 휘어지더니 사라졌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제법 그럴듯하게 가격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장과 이야기하면서도 때때로 창밖을 힐끔거렸다. 만약 펑옌이 뛰어나오면 나는 즉시 허장성세를 부리며 가격을 결정한 것처럼 굴 예정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온갖 상상을 떠올리기 시작했을 때, 경보용 벨이 울렸다. 경비원 몇 명이 재빠르게 뛰쳐나갔고, 커다란 철문은 이미 끼익 소리를 내며 닫히고 있었다. 내 심장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작업장 쪽에서 난잡한 발걸음 소리며 고함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펑옌이 몇몇 경비에게 끌려왔다. 내 머릿속은 윙윙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고,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꽤 여러 명의 경비원이 겨우 그녀를 제압해서 접수처로 끌고 왔다. 그녀의 얼굴 가득 먼지가 묻어 있고 몇 군데 푸른 멍까지 든 것을 보니 내 코끝이 시큰해졌다. 펑옌은 나를 보고 평정을 되찾은 듯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입을 열 때가 아닌 것 같아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장은 술잔을 든 채 위아래로 그녀를 한 번 훑어보더니 물었다.

“신분증?”

펑옌은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오만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과장은 침을 뱉더니, 저주하듯 말했다.

“빌어먹을 원종인!”

나는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신분증이 없다고 모두 원종인인 것은 아닐 텐데요?”

과장은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안 보이나? 이 여자 어디에 변이가 있지?”

그는 펑옌의 몸에 주먹질을 몇 번 했다. 펑옌은 분노한 야수처럼 입을 벌리더니 그의 손을 물었고, 그는 깜짝 놀라 서둘러 손을 거둬들이다가 제 몸에 술을 쏟고 말았다. 

“꼭 원숭이 같군! 이게 바로 그 귀족들의 후예란 말이지.”

그는 술을 닦아내며 비웃듯이 말하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일단 ‘원숭이’로 만들고, 그다음에 에너지부에 허가를 요청해.”
“기다려요…….”

나는 서둘러 말했다.

“먼저 인구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심사는 무슨!”

과장은 악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여자는 분명 발전소를 부수러 온 거라고. 이런 식으로 사회에 원망을 품은 원종인이라면 빨리 처분해 버리는 게 일을 줄이는 거라고!”

펑옌은 사나운 기세로 외쳤다.

“이리 와보라고! 내 변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테니까!”

그녀는 내가 행동할 시간을 벌기 위해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끄는 중이었다. 나는 남몰래 칼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그러나 과장은 그녀의 그런 수법에 넘어가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끌고 가, 끌고 가라고!”

펑옌이 눈은 무력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나에게서 상황을 안정시킬 힘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이 상황에 휘말려 들지 않도록 말이다. 그녀가 이 순간에도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지극히 쓰라렸다.
그녀가 고개를 한옆으로 돌렸다.

“즁싼…….”

마침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바로 과장앞에서였다. 순간 내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간신히 스스로를 억눌렀다.
과장은 아무래도 뭔가 눈치챈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 여자를 알고 있나?”

나는 평옌을 보고, 또 그를 보았다. 긴장한 나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칼을 어루만지던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내 마음속에는 바닥이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과장이 냉담하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지? 신분증을 꺼내 봐.”

나는 떨면서 신분증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과장은 고개를 숙이고 신분증을 보더니 다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한 차가운 눈이었다. 그는 한 글자씩 읽었다. 

“즁, 싼.”

즉시 경비원들의 포위망이 내 쪽으로 좁혀 오기 시작했다. 머리를 빡빡 밀고 가죽 장갑을 낀 경비원이 부러진 걸상을 하나 들더니 차분하게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장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앞으로는 원종인에게 모함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내 생각에 이 자도 이런 원종인과 어떤 관계라도 맺으려 하지 않을 거야. 그가 ‘원숭이’가 되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것은 경고이기도 했고 위협이기도 했다. 과장은 내게 신분증을 던졌다.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넌 비즈니스를 하러 온 거잖아, 맞지? 가기 전에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때가 되면 물건을 보내줄 테니 돈을 내고. 만약 계약을 어긴다면, 흥, 우리는 너를 찾아낼 거야.”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부하에게 말했다.

“됐어, 가자고.”

펑옌은 눈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끌려나갔다. 꽉 앙다물려 있는 그녀의 입술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온몸에 한기가 감돌았다.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손을 뻗어 주머니 안의 칼 손잡이를 만지고, 눈을 감은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칼을 꺼내 들고, 재빠르게 과장의 목에 갖다 대고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여자를 놔줘!”

경비원들은 단숨에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벗겨진 경비는 부러진 걸상을 손에 쥐려 했지만, 나는 칼날을 과장의 붉은 턱에 박아 넣었다. 과장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움직이지 마! 젠장, 모두 움직이지 말라고! 이 자가 시키는 대로 해!”

경비원은 펑옌을 놓아 주었고, 나는 호통을 쳐서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문을 지키는 경비가 대문을 열었다. 펑옌이 빠져나간 후, 나는 과장을 낀 채 문밖으로 나와 문을 지키는 경비에게 문을 잠그라고 명령했다. 그다음 나는 과장을 앞으로 밀어버렸다. 과장의 뚱뚱한 몸이 땅에 구를 때, 나는 펑옌을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폐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더 이상 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새까만,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한껏 커지더니, 칠흑으로 변해 내 주위를 둘러쌌다. 단숨에 차가운 공기가 내 폐 속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칠흑과 같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벽을 잡고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계단을 올라갔다. 

 

만약, 만약 내가 그렇게 했더라면, 내가 그녀를 구했더라면, 그게 정말이었다면…….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결국 나는 과장을 덮쳐볼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내 부엌칼의 칼날은 아주 무딘 것이었고, 한 번은 압축 비스킷을 자르다가 칼이 구부러진 적도 있었다. 모험을 한다면 나 자신도 원숭이 발전소로 가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늘어뜨리고 눈을 뜬 채 그녀가 공장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주문서에 사인하자 과장이 부하에게 나를 내보내 주라고 말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걷다가, 나도 모르게 그녀가 살던 토굴에 도착했다. 나는 토굴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물건을 그러모았다. 침구와 크로스백을 제외하면 다른 물건은 거의 없었다. 나는 멍하니 바닥에 앉아 있다가 석양이 토굴 안으로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그녀의 크로스백을 가지고 나왔다.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너무나 라오무를 만나고 싶었다.  
칠흑처럼 어둡고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죽음 같은 적막함으로 가득한 머릿속에 비현실적인 상상이, 비현실적인 희망이 자꾸만 떠올랐다. 열쇠를 넣고 한참을 돌렸지만 이번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문을 밀자 문이 열렸다.

라오무는 여전히 자신의 발명품을 조작하고 있었다. 구부린 그의 옆모습을 엄격해 보였다.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그는 여전히 발명품에만 몰두해 있었다. 다시 한번 전원을 연결하고, 전기스토브를 켜고. 그러나 전구는 밝아지지 않았다. 그는 욕을 한마디 내뱉더니 전기스토브를 두어 번 두드리고 뭉툭한 손가락으로 부품을 하나하나 조절했다. 캔 위에는 진흙을 두껍게 발라 놓았는데 열기가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고 캔 안에 압력이 쌓였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호스 위의 집게를 느슨하게 조절했고, 수증기가 흘러나오면서 프로펠러가 삐걱거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전동기 위의 작은 전등이 아주 짧게 반짝였다. 라오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작은 전등의 밝기를 관찰하고 작은 노트 위에 기록한 후 지난번의 데이터와 비교했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라오무, 더 이상은 하지 말아요. 이건 성공할 수 없어.”

나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라오무는 산발한 머리를 치켜들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만 멈춰요, 이제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어요.”

라오무는 고개를 숙이고 우울하게 한숨을 쉬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원숭이 발전소에 가는 방법밖에 없겠군……”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은 후 문에 기댔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창문에 와 닿는 주황빛 석양은 어딘가 따뜻하면서도 몽롱한 느낌이었다. 나는 펑옌의 크로스백에서 일기장을 꺼내어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눈물로 인해 눈앞이 흐릿했기 때문에 눈에 힘을 주고도 한참을 쳐다본 후에야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글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이 세계의 차가움에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과환세계〉 2007년 10기에 게재

 

* 작가 : 완샹펑녠(万象峰年)
완샹펑녠은 심오하고 섬세한 상상력을 작품 속에서 표현하는 바링허우 세대 중국 SF 작가 리이의 필명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인류의 운명을 드러내기를 즐기는 작가이며, 현재는 과학소설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은하상과 중국 성운상을 수상했으며 한해 동안의 최고 단편을 모은 앤솔로지에 여러 번 단편을 수록했다. 단편들 중 일부는 영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후빙하기시대 이야기」는 2007년에 은하상을 수상한 바 있다.
* 번역가 : 이소정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북경대에서 중국고대사로 석사를 받은 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중국어 사전실 연구원을 역임했다. 《증허락》을 번역했고, 현재 《장상사》, 《특공황비 초교전》을 번역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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