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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피

자오하이홍(趙海虹)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가 보였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지막이 신음을 하면서.

그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향해 팔을 내밀었고, 드러난 팔뚝에는 빨갛고 가느다란 선이 가득했다. 

별안간, 방안에 모종의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더는 텅 빈 느낌이 아니었다.

이 방은 너무 크다 — 난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이 별장의 방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큼직했다. 건축가가 중동의 궁전을 모티브로 이 별장을 설계했는데, 당시 무겁게 짓눌러오는 지난 기억들의 무시무시한 압박감에서 달아나고 싶었던 나는 이렇게 요구했다.

“방은 넓고 깊숙하게 만들고 실고는 높게 만들어주세요. 어느 방이든 모두!”

나중에야 깨달았다. 협소한 공간에서 달아나더라도 지난날의 기억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게다가 궁전같이 높고 큼직한 이 건물은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곳에는 늘 수많은 사람이 나타났고, 이 별장은 점차 무대로 바뀌어 끊임없이 새로운 레퍼토리를 펼쳐냈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짤막하면서도 광활했다. 여배우의 가면 밑에 진실로 내게 속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방이 몹시 작은 것 같았다. 마치 이 방 전체가 그의 옷인 듯, 그의 피부인 듯 — 탈피가 일어나면 훌훌 벗어 던질 피부인 듯이 느껴졌다.

그는 이곳, 방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그 중심에서 솟아나는 타오르는 열기가 방 안에 있는 온갖 생명 없는 싸늘한 물체들을 집어삼켜 그의 생명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마저도 그랬다.

나는 한 발 한 발 그 열기의 중심, 생명의 근원으로 다가갔다. 공기가 매혹적인 힘으로 가득했다. 이 공기는 그의 숨결이요, 그가 전해주는 생명의 길이었다. 나는 그의 생명을 들이마셨다.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띠리링──

전화 소리가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나는 갑작스레 찬물 세례를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저 내 별장 게스트 룸에 있었을 뿐이고, 손님은 탈피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마법사도 아니요, 초능력도 없었다. 단지 살면서 아홉 번 허물을 벗는 ‘혈인(穴人)’일 뿐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아홉 번 탈피를 해야 했다.

“여보세요.”

전화기를 받자 무썬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홀로그램이 싫었다. 하지만 무썬의 허상이 투의 침대 앞에 떠오르자 처음으로 진실과 허상의 대비를 강렬하게 느꼈다. 발버둥 치고, 신음하고, 고통을 딛고 성장함으로써 그 생명을 증명하려 애쓰는 이 혈인의 앞에 나타난 무썬의 허상은 뻔뻔스러울 만큼 가식적이었다. 안 돼, 저런 사람에게 투가 탈피하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어!

“다른 데서 얘기해!”

나는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린 후 방에서 나갔다. 문을 닫으면서 다시 돌아보니 투는 침대에서 몸을 마구 뒤척이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홍수처럼 방안에 출렁였다.

“무슨 일이야?”

나는 퉁명스레 물었다.

“공, 네가 데리고 있는 혈인 때문에 난리가 났어. 네 팬들이 흥분해서 소란을 피우고 회사 윗선에서도 불만을 표하고 있다고.”

무썬은 내 매니저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친절한 얼굴을 해서 가끔씩은 괴롭혀 주고픈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 공식 나이 19살. 일단 스캔들에 휘말리면 네 배우 생활에 아주 치명적이야.”

“스캔들? 이게 무슨 스캔들이야? 투는 혈인이야.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내 동족이라고. 도와주는 게 당연하잖아?”

“동족? 네 팬들은 그자를 동족이라고 생각지 않아. 공, 잊지 마. 너는 이제 탈피를 하지 않아. 그 말인즉, 사람들은 너를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하지만 투라는 자는 아직도 탈피를 하고 있어. 인간들은 저자를 받아들이지 못해.”

“너희가 벌인 짓이잖아!”

나는 자제심을 잃었다. 

“어쩌자고 우리를 너희 세상으로 데려온 거야? 우리는 원래… 원래…”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띤 무썬의 눈동자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네 원래 삶이 어땠었지?”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원래의 삶. 원래의 삶이 악몽처럼 달려들어 내 상상의 공간을 빈틈없이 꽉 채웠다.

어두컴컴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좁고 축축한 동굴. 우리는 부화를 기다리는 알처럼 그 좁다란 동굴 속에 따로따로 웅크려있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고통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피부가 가렵고 경련이 일어나는 정도였지만, 점차 단단한 외피 밑으로 새로운 피부가 생겨나고, 새로운 근육과 골격이 무럭무럭 자라는 과일인 양 탱탱한 과육이 되어 바르작거리며 외피를 찢어내는 것이었다. 불타오르는 몸에서는 세포 하나하나가 갈증을 이기지 못해 비명 지르고, 바들바들 떨고, 경련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몸을 찢어내려고 했다…. 탈피. 그것은 어둠의 세상에서 생명을 불태우는 빛이었다. 하지만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그 고통은 정말이지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공?”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무썬의 허상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저 사람을 원망하거나 멸시하는 거람? 가장 가식적인 건 바로 나야. 본래의 진실한 삶을 기꺼이 포기한 건 나잖아.

“그를 내보내.”

“내보내?”

나는 몸서리를 쳤다.

“아니, 절대 안 돼. 쑨 선생은 돌아가셨고, 다른 인간들은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 투를 남에게 맡기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네 일은? 상관없다고 해봤자 난 안 믿어. 회사도 압박을 못 이겨 ‹성전(聖戰)›의 여주인공 자리를 시스나에게 줄까 고려 중이야. 오랫동안 원했던 배역이잖아?”

“투가 배역보다 중요해.”

내 귀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무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동적이니까. 오랫동안 감동이라는 것을 느낀 적이 없어. 죽은 것 같았다고. 하지만 투는 나를 감동시켰고 다시 살려냈어.”


햇살이 새어들었다.

햇살은 매미 날개처럼 얇고 반투명한 허물을 통과하여 그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그의 동공 속에서 파닥이는 햇살은 마치 조그마한 불꽃 같았다. 그는 햇살을 받으며 자신이 벗어놓은 허물을 들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아름다운 미술작품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그것은 마치 깃옷 같았다. 보통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게 하는 그런 옷.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실은 그렇게 신비롭지 않았다. 그 허물은 그가 작별한 지난날의 자신이자, 그가 벗어 놓은 피부에 불과했다.

“그 허물을 가질 수는 없어.”

그의 표정을 보니 내 말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연구소에 줘야 해.”

“당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함께 지낸 한 달여 간 그는 내가 하는 인간의 말을 그럭저럭 알아들었지만, 아직도 자기 입으로 내뱉는 것은 망설이곤 했다.

“연구소 말이야. 알지?”

나는 나지막한 소리를 내는 혈인의 말로 가볍게 물었다.

별안간 투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퉁기고, 두드리고, 비비고, 쓰다듬었다.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동작들이었다. 어둠의 세상에서 우연히 만난 혈인들은 낮고 쉰 목소리와 손가락 접촉만으로 서로 마음이 통했다.

하지만 나는 투의 손가락에서 감사 말고 다른 의미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탈피 직후의 충혈된 점막 같은 피부는 어느새 딱딱해져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피부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단단해져, 유약을 바른 도자기처럼 빛이 날 것이다.

“공…” 

투가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당신 것은 이제… 끝났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은 계란형이었다. 양쪽 뺨이 약간 쳐지고 아래 눈꺼풀은 부풀고 콧방울은 너무 펑퍼짐한 데다 살이 많고 두툼한 윗입술은 약간 뒤집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윤곽이 분명하고 각진 얼굴에 콧등은 오뚝하고 가느다란 눈은 형형하게 빛을 내고 입술은 얇았다. 턱 가운데가 살짝 들어가 더욱더 남성미가 느껴졌다.

“그래.” 

내가 말했다. 

“나는 벌써 아홉 번 탈피를 했어. 임무를 끝냈지.”

이 정도 거짓말은 해도 되겠지? 탈피는 어마어마한 모험이었다. 그 누구도 탈피 후의 자신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내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은 연예계 활동이었으니, 탈피를 한 뒤 못난이 괴물이 된다면 내 생활은 끝장이었다.

“…거짓말.”

투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잇새로 내뱉었다.

너무나 진실한 그 단어가 나를 몹시 아프게 했다.


나는 이에서 딱딱 소리를 내며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도무지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박사는 왼손으로 내 뒷덜미를 꽉 눌러 꼼짝 못 하게 하고, 오른손에 든 바늘을 계속 밀어 넣었다. 바늘 끝이 척추를 찔렀다. —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마취제가 신경의 통증을 잠재웠지만,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내 몸 속으로 들어오는 호르몬과 내 속에 잠재하는 본능과의 전쟁.

전쟁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탈피한 지 7년이 지났는데, 매일같이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과 싸움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내 의지와 약물을 통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박사는 쑨 선생의 제자였다. 쑨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로 지금껏 그가 나를 보살펴주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일은 한 달쯤 전 연구소에 두 번째 혈인이 들어왔을 때 곧바로 내게 알려준 것이었다.

“투의 상태는 무척 좋습니다.”

바늘 끝이 내 골수에서 빠져나갔다. 박사는 내 정신을 딴 데 팔리게 하려고 일부러 이때 투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허물이 정말 아름답더군요… 당신 것도 그랬지요.”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당신은 그게 문제입니다!”

박사는 버럭 소리를 높였지만, 곧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쑨 선생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쑨 선생은 한 번도 내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쑨 선생은 지질 탐사대가 땅 밑의 균열 속에서 찾아낸 ‘동물’을 마치 꽃에서 태어난 엄지 공주처럼 대해주었다.

쑨 선생. 

쑨 선생은 내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 인간 사회가 나를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쑨 선생은 본래 세상과 동떨어진 ‘이계’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쑨 선생은 내가 두 번의 탈피를 겪는 동안 곁에 있으면서 송충이가 나비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후 쑨 선생은 소리도 없이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났다.

쑨 선생은 나를 위해 여러 가지를 해주었고, 나도 그렇게 투를 도와야 했다.

떨림은 전율이 되었다가 경련으로 넘어갔다. 눈앞에 있는 것들이 뿌옇게 흐려지고 몸속에서 불길이 용솟음쳤다. 내 몸은 폭발하고 붕괴하기만을, 내가 입고 있는 낡은 껍데기를 갈가리 찢어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이성으로 생리적인 충동을 억눌렀다. 약물의 힘을 빌려서라도.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축 늘어진 나는 몽롱하게 잠이 들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 말을 되뇌고 있었다.

— 쑨 선생은 날 위해 여러 가지를 해주었어. 나도 그렇게 투를 도와야 해.


초원의 바람에 전투 깃발이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휘날렸다. 매 한 마리가 높디높은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낙하했다. 나는 은으로 된 묵직한 창을 높이 쳐들었다. 

날카로운 창날이 새파란 하늘을 찌르며 눈부신 햇살을 반사했다.

나는 두 다리로 말의 배를 옥죄며 산골짜기로 질주했다.

내 뒤에는 천군만마가 함성을 지르며 파도처럼 골짜기에 있는 적군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공?”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 영사기를 껐다. 홀로그램 영화에 이렇게 빠져드는 까닭은 그 강렬한 리얼리티 때문이었다. 버튼을 한 번 누르면 이 텅 빈 거실이 끝을 모를 광활한 초원으로 변했다가, 다시 한번 누르면 마법이 사라지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시험 영상을 보던 중이야.” 

나는 무썬을 돌아보았다. 

“영화는 어때?”

“2주간 상영한 결과 3대 극장 객석 점유율이 90% 넘었어. 대단한 성공이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잘됐네.”

“하지만…”

“왜, 무슨 문제 있어?”

“‹화목란(花木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는 네가 아니었어.”

“아, 그래?”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쁜 척할 수도 없었다.

“그럼 남자 주인공?”

무썬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몸을 숙여 내 얼굴 앞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밀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씩 웃었다.

“바로 — 투야.” 

당연하게도 나는 깜짝 놀랐다.

“투는 겨우 몇 분밖에 안 나왔잖아!”

“시간 같은 건 상관없어. 투의 겉모습 자체가 무척 인상적인 데다 혼을 담아서 연기를 하니 절대 무적이지.”

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생긋 웃었다.

“또 투를 내보내라는 말 해보지그래?”

“2년이나 지났고 이미 구닥다리가 된 이야기야. 이젠 너희 두 사람 관계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2년 동안 투를 그렇게 잘 가르칠 줄은 몰랐어.”

무썬의 말투는 진실했다. 

“넌 정말 대단한 여자야.”

“아부는 그만둬.” 

나는 한두 마디로 그를 쫓아내려 했지만, 무썬은 투와 이미지 제작사와의 계약 건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투에게 가봐. 날 귀찮게 하지 말고!” 

내가 소리를 질렀다.

“공, 요즘 초조해 보이는데 마인드 컨트롤 좀 해.”

“가보라니까!”

무썬을 내보내고 나자 기운이 축 빠졌다. 왜 이러지? 투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가 인간 세상에 성공적으로 녹아 들어간다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에게 직립보행을 가르친 것도, 인간의 말을 가르친 것도 나였다. 포크와 나이프,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친 것도 나, 영화판에 데려간 것도 나였다. 바로 나, 나였다….

하지만 투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그 때문에 나는 선생으로서 내 노력의 의미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우리는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걸까?

여전히 혈인들의 세상에 있었다면 지금쯤 나는 아홉 번의 탈피를 끝내고 짧은 삶만 남겨두고 있었을 것이다. 짝짓기를 통해 후손을 낳고 그런 다음 죽겠지. 그에 비하면 지금의 생활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즐겁지가 않을까? 


“투?”

나는 정원으로 들어가 분수대 옆 돌계단에 앉은 그를 찾아냈다.

달은 밝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 구름을 이리저리 밀어낸 덕분에 정원은 환했다가도 어두워지고 어두웠다가도 환해지기를 반복했다. 분수대의 물기둥은 허공에 진주 같은 물방울을 뿌리며 반짝반짝 출렁이는 못 속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투가 얼굴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공, 나는 지쳤어.”

한참이 지난 후에 나는 그날 밤의 일을 추억하곤 했는데, 당시 그의 표정은 동판에 그림을 눌러 새기듯 한 획 한 획 내 기억 속에 깊숙이 새겨져 여전히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멍한 표정이었고 어딘지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얇은 입술은 살짝 뒤틀리고, 눈꺼풀은 반쯤 감겨있었지만 짙은 슬픔이 묻어 나왔다.

“공, 나는 지쳤어.”

나는 망치로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에게서 내 모습이 보인 탓이었다.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 난 이제 영화를 찍지 않을 거야.”

“포기… 하지 마.”

나는 그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가슴에 묻고 손가락을 숱 많고 짧은 머리칼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금방 성공할 수 있어. ‹화목란›의 반응도 좋고 네 배역이 인기가 있대. 아주 작은 배역이었는데도 그렇잖아. 어렵게 얻은 주연 영화가 막 크랭크업 했으니 곧 인기 배우가 될 거야.”

투는 빙그레 웃었다. 순전히 나를 안심시키려 지어낸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사실을 숨기지는 못했다. 내가 한 말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달빛은 울적하고, 아름답고, 또 고요했다. 정원의 나무들은 달빛 아래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계단 옆에 흐드러지게 핀 우담화는 꽃잎 하나하나가 스스럼없이 한껏 몸을 펼쳐내고 있었는데, 희디흰 꽃잎은 야경에 젖어 들어 어렴풋하게 연록 빛을 띠었다.

달빛은 울적하고, 아름답고, 또 고요했다. 저 가녀린 분수는 즐거이 노래하는 것일까 슬피 우는 것일까?

“내일부터 약을 끊을 거야.”

투의 목소리는 쇠붙이처럼 차가웠다. 아니, 어쩌면 차가운 것이 아니라 단호한 것일지도 몰랐다.

“더 이상 달아나고 싶지 않아.”

투가 말했다.

“탈피할 거야 — 마지막으로.”

“안 돼… 동의 못해.”

나는 그를 안았던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넌 너무 제멋대로야.”

“제멋대로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가 가슴 쪽으로 깊숙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날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일 거야.”

나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연기를 하고 아무리 영화를 찍어도 모두 남의 인생이야. 거짓 삶으로 잠시 도망을 치는 거라고. 연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돌아와야 해. 본래의 자신으로. 하지만, 공, 우리는 누구일까? 진정한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연기는 가짜야. 아무것도 남지 않아. 공, 우리는 대체 무엇을 했을까?”

“왜 남는 것이 없어? 연기에는 배우의 창의력이 녹아 있잖아. 내가 찍은 영화에는 진정한 내가 들어 있는 거야.”

“더 이상 당신 스스로를 속이지 마. 당신 자신도 진정한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잖아. 그런데 어떻게 연기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거야?”

투는 처음으로 격앙되어 외쳤다.

“변화가 두려워서 성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진짜 모습이지?”

나는 참지 못하고 냉소를 터트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날 비난할 수 없어.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탈피를 하면 금방 죽음이 찾아올 거야.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그걸 모르겠어?”

“모르는 건 당신이야. 어째서 자연의 법칙을 두려워하지?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거라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가 있는 거야.”

“변화? 성장? 하나같이 듣기 좋은 말들일 뿐이야. 탈피를 한 뒤 어떤 모습이 될지 우리는 전혀 몰라. 탈피가 반드시 좋은 쪽으로 진행된다는 보장도 없잖아.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단 말이야, 불가능해!”

“이제 보니 당신은 죽음보다 변화를 무서워하는구나. 바뀐 모습도 당신인데 왜 두려워하는 거야? 그게 진정한 당신이야. 성공하든 실패하든 바로 당신이 성장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란 말이야 — 그게 제일 중요해, 안 그래?”

“만일…”

나는 거의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만일 보기 흉할 정도로 징그럽게 변하면 지금 가진 이 모든 것을 잃고 말 거야. 아무것도 남지 않아!”

“바보! 그게 아까워? 지금 당신이 가진 것이 뭐야? 당신에게 무엇이 있어?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얼 가졌다는 거지? 당신에겐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잃을 게 어디 있어?”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내겐 네가 있어. 너는 내 형제이고, 가족이고,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분신이야. 네게 존경받지 못하는 건 싫어 — 그것 때문에 다시 한번 탈피의 고통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망설였다.

투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우담화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활짝 핀 꽃잎을 건드렸다.

“참 아름다워.”

그가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생명이야.”

생명이란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일 수는 없다.


기자들은 언제나 소식이 빨랐다. 투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춘추(春秋)›의 상영 첫날, 뜻밖에도 ‘탈피’가 최대 화제로 떠올랐다.

“성장정지 호르몬 사용을 그만두셨다지요? 다음 탈피기를 준비하시는 겁니까?”

“혈인은 아홉 번 탈피를 하고 나면 성생활을 할 수 있지만 남은 수명이 아주 짧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탈피 기간 동안 연예계를 떠나실 겁니까? 탈피 과정을 공개할 겁니까?”

시끄러운 팬들도 가세했다.

“투, 제발 탈피하지 말아요. 당신은 내 우상이라고요!”

“투, 사랑해요! 당신을 지지할게요!”

“투, 탈피하고 나면 더 멋있어지는 거예요? 기대할게요—!”

“투—!”

“투—!”

제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 나는 무썬에게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저런 무책임한 소문을 흘린 거야!”

“누가 그랬을 것 같아?”

무썬이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까워 죽겠다니까. 초대박 스타가 될 수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탈피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니. 회사도 죽을 맛이라고.”

나는 당황한 채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투를 돌아보았다. 그는 요동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요란하게 출렁이는 파도 소리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네 눈동자가 마주치자 그는 살짝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이 제 삶에서 최후의 탈피입니다.”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든 사람에게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탈피는 우리 혈인의 생활 방식이지요. 우리는 결코 인간보다 저급한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훨씬 진실하고 활기가 넘칩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또다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는 혈인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나의 친구. 나의 형제.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분신. 아득한 사람의 바다가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을 보는 동안 따뜻했던 내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차츰차츰 식어 들어가 끝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궁전같이 넓은 거실도 결국 쓸모가 있었다. 이곳은 영화계에서 눈부시게 떠오른 신성, 신비한 세계에서 온 혈인 ‘투’가 탈피를 하는 과정을 홀로그램으로 생중계하는 장소가 되었다.

홀로그램 카메라가 거실 구석구석에 설치되어, 어느 방향에서든 투의 미세한 변화까지 모두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크리스털 샹들리에 위에 설치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생방송을 시청하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투의 지금 모습을 볼 수 있다 —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모든 사람의 집에 널따란 벽옥 침대와 그 위에 조용히 누운 준수한 혈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몸이 고동색으로 반짝였다. 피부라기보다는 도자기 같았다.

오늘부터 근 열흘간 모든 사람의 집에 투가 나타나 열연을 펼칠 것이다. 발버둥 치는 그, 고통스러워하는 그, 다시 태어나는 그…. 하지만 내 곁에 있는 투야말로 진짜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의 침대 옆에 앉아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그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투, 후회하지 않아?”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본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야.”

그는 눈을 뜨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걱정이 가득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게 속하지 않은 이곳에서는 ‘탈피’만이 나 자신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야.”

나는 지난번에 본 그의 탈피를 떠올렸다.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끝이었다.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줄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략 이틀 만에 그 빨간 선은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차츰차츰 굵어지기 시작했다.

셋째 날, 이번에도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서부터 흐릿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혈인은 손톱이 없는 대신 피부가 인간의 손톱처럼 단단했고, 크고 작은 관절들이 두껍지만 유연한 인피와 연결되어 있었다. 균열은 손가락에서 손등으로, 발가락에서 발등으로 점점 퍼져 나갔다…

넷째 날, 손가락 끝의 찢어진 피부가 뒤집어지고 연붉은 새살이 드러났다. 새 피부와 옛 피부 사이에는 소량의 점액질과 다량의 솜털 같은 섬유질이 들러붙어있었다.

……

드디어 아홉째 날이 찾아왔다.


투는 숨을 헐떡였다.

탈피는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낡은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과거와의 연결을 하나하나 끊어내어, 새롭게 태어난 여린 몸으로 이 세상의 시험을 견뎌내야 했다. 아홉째 탈피는 특히 더 어려웠다. 이 탈피가 끝나면 혈인은 진정한 성인이 되어 몸 안이나 바깥 피부 전체가 크나큰 변화를 겪게 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혈인도 있었다.

투는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나는 하릴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투의 탈피 과정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생명력을 뿜어냈다. 한때 나를 감동시키고 그 속에 푹 빠지게 했던 생명력이, 지금 거실에 설치된 십여 대의 카메라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깨달았다. 투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인간들에게 공개하려는 이유를. 그가 연기했던 두 가지 배역에 비하면, 지금 저 배역이야말로 진정한 투였다. 성장의 불길 속에서 시달리는 혈인의 모습은 예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스크린 속 배역들보다 더욱 생생하고, 진실하고, 생명력이 넘쳤다! 그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기세로 전 세계를 향해 선포한 것이다.

— 이것이 생명이다!

— 이것이 진실이다!

— 이것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 투 덕분에 나의 유약함이 더욱 돋보였다.

성장을 거부하는 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

나는 인간들 속에 이리 숨고 저리 피하며, 맡은 배역을 빌려 인간의 세상으로 들어가 인간의 경험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과연 진정으로 그 배역들을 이해했을까? 그들은 내게서 아득히 멀리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세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했을 뿐, 끝내 그 심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나는 인간이 되지 못했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갔다.


“으으윽—”

투의 신음이 낮고도 길게 들려왔다. 그의 몸이 느릿느릿 뒤틀렸다. 한 차례. 또 한 차례. 그의 피부, 새로운 몸에서 점차 떨어져 나오는 그 피부는 반투명하고 옅은 황금색을 띠고 있었다.

별안간 신음 소리가 높고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 그 손을 꽉 잡았다.

“투—!”

그의 팔이 실룩실룩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퍼뜩 깨달았다. 손바닥의 피부는 모두 벗겨졌고 연붉은 새 피부는 아직 민감한 점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손을 뗐다.

“투, 조금만 참아.”

내 눈시울에 눈물이 고였다.

“슬퍼… 하지 마… 울…울지도… 마…”

얼굴의 피부가 모두 벗겨져 투의 모습은 무척 괴상했다.

나는 그의 맨 가슴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탈피가 가장 늦게 진행되는 부위였기 때문에 아직 새 피부와 낡은 피부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그의 피부밑에서, 헐떡이는 숨결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그의 몸속에서 출렁이는 야만스러운 힘을 느꼈다. 그 힘은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끊임없이 펄떡댔다!


그날 밤, 투가 정원을 떠난 뒤 나도 그 우담화에 다가갔었다. 흐드러지게 펼쳐진 꽃잎을 살짝 건드리자 놀랍게도 그 연약한 잎사귀에서 힘차게 약동하는 생명과 힘이 느껴졌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투는 몹시 힘들어하며 그 말을 내뱉었다.

손이 닿은 곳이 갑자기 힘차게 튀어 오르더니 피부가 느슨해졌다. 이쪽 피부도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성공이야! 탈피에 성공했어!”

나는 저도 모르게 기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내레이션을 맡은 여자 아나운서가 즉시 설명을 풀어놓았다.

“시청자 여러분, 시청자 여러분, 투의 아홉 번째 탈피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이제…”

갑자기 한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사가 끼어들었다.

“공, 투가…”

박사의 표정은 몹시 무거웠다.

나는 일시적으로 멍해졌다. 그런 다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어째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지? 

나는 고개를 숙여 투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온 힘을 다해, 죽을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 달빛 아래 만개한 새하얀 우담화는 그토록 아름다웠지만,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시들었다. 바람이 불자 하얀 꽃잎이 마치 탄식을 하듯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나는 투를 힘껏 껴안았다.

내 품에 있는 사람은 호흡을 멈추었다. 정원의 우담화처럼 활짝 피웠던 생명이 지고 만 것이었다.


며칠 후, 냉동 캐비닛에 보관되었던 검붉은 시체는 기적처럼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변모했다.

새로 만들어진 피부의 부종이 가라앉고 백옥같이 매끄럽고 깨끗한 질감이 드러났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 오관이 선명하지도 않았고, 머리는 백옥으로 깎은 달걀 같았다. 날 선 콧등도, 큼직한 귓바퀴도, 살짝 올라간 얇은 입술도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느다란 틈 세 개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두 눈과 입인 것 같았다. 작은 구멍 네 개는 귀와 콧구멍일 터였다. — 그가 사람이었다면 이런 모습으로는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는 사람이 아니라 시체, 크고 화려한 ‘백옥 조각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투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찾고 싶었던 진정한 자신의 모습, 성장의 끝이었다.

나는 박사의 연구소에서 감상에 젖어 들었다. 갑자기 박사가 물었다.

“이번 방송에서 투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알고 싶지 않아요.”

나는 약간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무얼 얻었든 이미 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겁니다.”

박사는 소박하게 포장한 상자를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호기심을 못 이겨 풀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허물 옷이 놓여 있었다. 매미 날개처럼 얇고 옅은 금색으로 반짝이는.

나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처음 협상대로라면 혈인의 허물은 연구소에 귀속됩니다. 자신이 가질 수 없지요.”

“알아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옅지만 아쉬움이 묻은 목소리였다.

“투는 제게 이런 제안을 했지요. 방송으로 얻는 수익 전부를 연구소에 넘기는 대신, 마지막 허물은 자신이 처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게 그거예요?”

나는 손을 뻗어 상자에 담긴 아름다운 깃옷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정말 훌륭한 장사로군요. 하지만 그는 이미…”

“아닙니다. 투는 자신이 가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박사의 목소리도 약간 흐느끼고 있었다.

“이 허물 옷을 당신에게 주고 싶어 했지요.”

“내게요? 왜요?” 

이 아름다운 허물을, 그의 지난 모습이 담긴 껍데기를 내게 주겠다고?

“당신의 이름 때문이라더군요.” 

박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 이름이 무슨 상관일까요?”

내 입가에서 미소가 퍼져나갔다. 처량하면서도 슬픈 미소였다.

“‘공’은 혈인의 말로 허물 옷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랬군요. 그럼 ‘투’는 무슨 뜻입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한참 후에야 나왔다.

“생명이요.”


5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대한 광장은 관중들로 가득 찼다. 공중에도 수백에서 천에 이르는 구름선과 비행차량들이 둥둥 떠 있었다. 모두 내 팬들이었다.

이윽고 내가 등장했다. 나는 새하얀 망사 옷을 걸치고 물방울 같은 모양의 개인 비행기에 올라타 천천히 위로 떠 올랐다. 그리고 마치 아름다운 천사나 꿈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짙푸른 밤하늘 위에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스포트라이트가 내 몸을 비추었다. ‘물방울’이라는 방어막이 있었지만 그래도 피부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공—!”

“공—!”

“공—!”

그들의 함성이 바다를 삼킬 듯이 들려왔다.

— 하지만 당신들은 그저 가식적인 껍데기를 찬양하고 있는 것뿐이야. 당신들이 보는 것은 성장을 피하기 위해, 변화가 두려워 숨어든 껍데기에 불과해. 그런 껍데기에게 이렇게 열정을 쏟을 가치가 있을까? 이렇게 열광적으로 대할 가치가 있을까?

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망사 옷의 소매가 휘날렸다.

내 뒤에는 나보다 50배는 됨직한 커다란 홀로그램이 나와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었다. 휘날리는 옷소매의 그림자가 야경 속에 스며들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몽롱한 느낌을 자아냈다.

—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존경해야 할 사람, 그의 이름은 이미 잊었겠지.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너를 잃은 후로 내게 있어 이 세상은 그저 끝없이 펼쳐진 황야일 뿐이야.

나는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아. 비로소 깨달았어. 저들은 한 번도 나를 자신들의 구성원으로 여긴 적이 없어. 나는 그저 진귀하고 희귀한 애완동물이었던 거야.

나는 전 인류의 장난감 인형이었어.

나는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웃고, 웃고, 또 웃었다…


밤이 깊었다. 별들도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분수대 옆 계단에 앉아 새로 받은 대사를 외었다. 여주인공이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는 장면이었다.

— 난 드넓고 아득한 밤에 귀를 기울여요. 당신이 떠난 뒤로 밤은 더욱 드넓고 아득해졌거든요.

갑자기 슬픔이 밀려들었다. 이 순간 내 마음과 꼭 같은 구절이 아닐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외로움이 솟구쳤다. 마치 아득한 황야에 떨어진 유성처럼.

두피의 안쪽 어느 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제일 처음 나타나는 탈피의 징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난 못해.

수없이 그래왔듯이 나는 성장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기 위해, 사정없이 그 조그만 불씨를 꺼뜨렸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 자신이 스스로의 연약함을 슬퍼하며 우는 소리였다.

‹과환세계(科幻世界)› 2001년 9월 호 수록


* 작가: 자오하이홍(趙海虹)
저장대학교에서 영미 문학 석사 학위를 받으며, 최근에는 중국 예술학교에서 미술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저장공상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신인상을 받은 제6회 쑹칭린 아동문학상을 비롯하여, 제6회 전국 우수 어린이 문학상, 중국 과학소설 은하상(Galaxy Award) 6번 수상 등 중국 내에서 많은 수상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단편집 「The other side of time and The Eyes of the Birch 」와 장편소설 「Crystal sky」를 출간했다. 「탈피」는 2001년에 중국 은하상을 수상했으며, 영어로 번역되어 『Lady Churchill’s Rosebud Wristlet』 와 『Lightspeed』에 게재되었다.
* 번역: 전정은
중국 소설이 좋아서 중국어를 배웠고, 좋은 소설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번역을 시작했다. 『무림객잔』, 『천관쌍협』, 『보보경심』, 『대막요』, 『운중가』 등의 소설과 대중가요 가사 등을 번역하였다. 미출간 무협 소설을 번역,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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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지구여행자 17.11.12 21:20 댓글

    2001년 작품이어서 그런지 소재와 주제가 조금 오래된 느낌은 아쉽지만 섬세한 감성이 살아있어서 좋으네요.

  • No Profile
    MadHatter 17.11.26 03:02 댓글

    주제가 꽤나 노골적으로 제시되는데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주제가 더욱 절실하게 와 닿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혈인의 설정이 인상적입니다. 태세나 모인이 연상됩니다. 중국의 지괴소설을 읽으면서 받았던 특유의 인상을 SF에서 보게 되니 독특한 느낌입니다. 시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지금까지 올라왔던 여섯 편의 중국 단편 중에 세 편이 공연예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합니다. 경극이 발달한 영향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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