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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달 가르기

2005.09.30 22:4909.30

drwk.com"100원만 빌려주세요."

모 지하철역에 가면 오가는 사람들에게 100원씩을 조르고 500원이나 1000원을 주면 받지 않는, 일명 "백원만" 할머니가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빌려달라고?

"100원만 빌려주세요."

오늘 날씨가 덥군요, 저녁에는 바람이 불어서 시원하죠, 내일쯤은 비가 좀 왔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말투로 그 사람은 내 앞에 손을 내밀고 말했다.

"100원만 빌려주세요."

내 앞에 펼쳐진 손바닥은 보기 좋을 만큼 큼직했고 조금 두툼했다. 두뇌선이 곧게 뻗어 있었고 기차 레일처럼 평행하게 감정선이 달리고 있었으며 생명선은 칡넝쿨처럼 질기고 선명하게 손목까지 닿아 있었다. 결혼선이 흔적도 없고 태양선이 반쯤만 뻗은 게 조금 부족하다고 할까. 곳곳에 내가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굳은살이 붙어 있었다. 손바닥 전체로 무엇을 붙잡는 일을 많이 하는 직업의 종사자였다, 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가 종사자이다, 라고 바꾸었다. 그 손이 아주 깨끗했고, 손톱도 짧았지만 깔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100원을, 그것도 빌려달라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100원을 어디 쓰시게요?"

"모아서 밥 사먹고 힘내려고요."

"힘내서 뭘 하시게요?"

"노가다해서 일당 받으려고요."

"일당 받아서 뭘 하시게요?"

"건전지 사려고요."

"건전지 사서 뭘 하시게요?"

"광선검에 넣어서 달을 가르려고요."

미쳤다.

옛날에 유행했던, 새총 좋아하는 바보의 문답 같은 짓을 하는 나도 할일없는 놈이지만, 이 사람은 미친 게 틀림없다.

라고 하기에는 손이 깨끗하고, 결정적으로 이만한 문답을 하고 100원을 주지 않는 것도 미안한 노릇이다. 그래서 동전지갑을 열어 달라는 대로 100원을 꺼내 주었다.

"고마워요. 꼭 갚을게요."

그 사람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지만, 어디 살쾡이에게 돌려받을 생각하고 닭 꾸어 주나. 마주 인사하고,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출발하는 버스에서 바라보니, 그 사람은 내 뒤에 있던 사람에게 똑같이 "100원만 빌려주세요" 하고 말하는 참이었다.



밤에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구름이 갈라진 사이로 나타난 달은 보름달이었다.

그 사람은 광선검을 휘두르며 보름달을 가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나는 길에서 100원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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