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horrorhouse@hanmail.net     세상이 망하는 나쁜 꿈을 꾸었다.

     다리 없는 괴물들이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 괴물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와 양팔이 달린 벌거숭이 몸뚱이였다. 다리가 없으니 그 모습이 마치 오뚝이 같았다.

     디룩디룩 살찐 아저씨 오뚝이.

     괴물의 머리는 대머리 아저씨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대머리 아저씨 얼굴 속에서 흰자위가 전혀 없는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눈을 깜빡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아저씨 얼굴답게 괴물의 몸은 아이스크림이 진득하게 흘러내린 듯 비대한 살집들이 아래로 처져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렇게 벌거벗은 오뚝이 괴물 수십, 수백, 수천 마리가 거리를 돌아다녔다. 날아다녔다. 대부분은 사람과 눈을 맞출 정도의 높이로 떠다녔지만, 맘만 먹으면 수십 층 건물 높이로 떠오를 수도 있었고, 땅바닥에 닿을락말락 아주 낮게 떠다닐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바닥에 완전히 내려앉은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비대한 몸집의 괴물이 유유히 날아다니는 모습은 신기했다. 추진력을 내뿜는 배출구가 달린 것도 아니었고, 출력을 높이느라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투명한 다리가 투명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움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태평하게 조용히 굳은 표정으로 날아다녔다.

     그리고 눈에 띄는 사람이 있으면 쫓아갔다.

     괴물의 비행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보통 사람이 조금 빨리 걷는 정도의 속도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이 얼마든지 뛰어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뛰다보면 지치고, 지치면 멈춰쉴 수 밖에 없다. 괴물은 숨이 찬 줄 몰랐다. 항상 일정한 속도로 사람의 뒤를 끈질지게 쫓아다녔다. 결국에 가서는 항상 앞서가던 사람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사람을 따라잡으면 괴물은 그 사람을 죽였다.

     괴물은 한 손에 굵은 나무 몽둥이를 들고 다녔다. 가시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거친 나뭇결의 몽둥이였다. 그 몽둥이로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쳐죽였다. 예외는 없었다. 애고 어른이고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괴물 앞에 있는 사람은 그저 살육의 대상일 뿐이었다.

     괴물은 작은 개들을 앞잡이로 데리고 다녔다.

     개들이 돌아다니며 사람이 숨어있으면 크게 짖어대거나 아니면 숨어있는 사람을 직접 물고 늘어져 괴물에게 사냥감의 존재를 알렸다.

     그렇게 세상이 망해갔다. 그것은 정말로 나쁜 꿈이었다. 도저히 좋은 꿈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  *  *  *  *

     “그래?” 수진은 커피 전문점 안을 슬쩍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커피 전문점 2층에는 그들 커플만 빼고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니까.” 수진 앞에 마주 앉은 성각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고서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의 얼굴엔 씁쓸한 표정이 가득했다. “다들 똑같이 생긴 대머리 괴물들이, 다리도 없는 게 우루루 날아다니면서 길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때려죽이는 걸 상상해 봐. 한 마디로 죽여주는 거지.”

     “정말 죽여주네.” 수진은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 무뚝뚝한 괴물이 사람을 쳐죽이면서 기합소리를 내는데 ‘어흡! 어흡! 어흡!’,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어흑! 어흑! 어흐-흑!’, 학살이 진행될 수록 오뚝이 괴물의 새하얀 몸은 사람들의 피로 물들고 사람들의 살점이 튀어올라 괴물의 몸 여기저기 철푸덕 들러붙어서는 또 ‘어흡! 어흡! 어흡!’, 그럼 옆에서 살랑대는 개새끼들이 ‘깨갱! 깨갱! 깨갱!’, 뭐니뭐니해도 하일라이트는 몽둥이로 짓이겨진 인간 시체들이-”

     “오빠, 그만 됐거든? 오빠 꿈 얘기 잘 들어서 뭔지 알겠으니까, 그렇게까지 실감나게 연기 안해줘도 되거든?” 성각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그 대신 커피 앞에 있는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오빠 그렇게 팔을 허우적대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거 보니까, 방송국 시험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꼭 영화배우 같다.”

     “내가 사실 고등학교 때 연극영화과 가고 싶다고 생각은 좀 했었는데. 주위의 친구들이 도시락 싸들고 말리는 바람에-”

     “그런 이상한 꿈꾸는 거 우리 일진이 보고 그러는 거 아냐? 저번에 우리 집에 처음 놀러왔다가 마당에서 일진이 봤잖아. 흠, 그러고 보니까 그 때 일진이를 오빠가 상당히 오랫동안 관심있게 쳐다봤던 거 같은데.”

     “그래. 그 때 너희 집 개를 보고 생각에 잠겼지. 하지만 그건 나쁜 꿈 생각이 나서, 그 나쁜 꿈 속의 개가 불현듯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너희 집 개 때문에 내가 나쁜 꿈을 꾼 게 아냐. 너희 집 놀러간 건 일주일 전이었지만, 나쁜 꿈을 처음 꾼 건 한 석 달 전쯤이라구.”

     “그랬구나.” 수진은 이번에도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처음 꾼 게 석 달 전이라니, 그럼 그 후로도 그 꿈을 또 꿨단 말야?”

     “수진아, 놀라지 마.” 성각은 창문을 내다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수진은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석 달 전에 첫 꿈을 꾼 다음부터, 그 나쁜 꿈을 계속 꿔왔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바로 어젯밤까지도.”

     “뭐? 그게 정말이야?” 그녀는 약간 놀랐다. 진짤까? 뻥 아냐? “오빠, 정말 그래?”

     “내가 지금 미팅 처음 나온 중학교 2학년 3반 학생도 아니고, 널 데리고 실없는 농담 따먹기하게 생겼냐?”

     수진은 성각의 눈을 보았다. 조금 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의 눈에서 촉촉한 물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성각이 눈물을 흘리며 실없는 농담을 할 수 있는 타고난 재능 보유자가 아니라면, 그 눈물은 진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빠, 정말이구나.”

     “그래, 똑같은 나쁜 꿈을 계속 꾼다고. 배경은 거의 늘 바뀌지만 대머리 괴물들이 나와 사람을 쳐죽이는 내용은 항상 똑같아.”

     그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나도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꿈을 꿀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난 원래 꿈을 잘 안 꾸고, 꿨다쳐도 깨어나면 잘 기억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지금 매일 꾸는 꿈은 너무 생생해. 지나치게.”

     “왠지 신기하다. 그런데 악몽을 매일같이 꾼다는 게 괴로울 것 같아.”

     “괴롭지. 살이 쭉쭉 빠져.” 그가 접시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케이크 조각을 집어먹었다. “식욕이 떨어져서 음식을 먹어도 맛있는 걸 모르겠어.”

     “나한테 왜 이제 와서 털어놓는 거야? 그렇게 힘들었으면 진작 얘기하지.”

     “남자는 말이지,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괴로운 일을 숨기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나의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나눈다는 건 또 다른 고통인 거지.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나눠 먹니? 지금도 사실 맘이 편치가 않다.”

     그가 쓸쓸히 미소 지었다.

     “너무 공부 열심히 해서 그런 거 아냐? 방송국 시험이 코 앞이잖아.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나쁜 꿈으로 나타난 거 아닐까?”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내가... 공부... 열심히 했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시험공부 때문이던 나쁜 꿈 때문이던 간에 요새 머리가 이상하게 무겁긴 했어. 그래서 더 불안해 지더라고.”

     “응?”

     “옛날에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 건데, 외국에서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꿈을 너무 많이 꾸게 되더래.”

     “딱 오빠 얘긴데?” 수진이 성각의 얘기에 눈을 반짝거렸다.

     “그렇지. 아, 그래서 그 남자가 맘이 어수선해서 병원을 찾아갔더니-”

     “갔더니?”

     “검사 결과 뇌종양 판정이 내려졌다는 거야. 뇌종양 때문에 뇌의 활동이 영향을 받아서 갑자기 꿈을 마구 꾸게 된 거래.”

     수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각은 그녀의 표정에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메시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오빠, 빨랑 병원 가봐라!

     “야야, 너 왜 그렇게 얼고 그러냐?” 그는 그녀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냥 요새 하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문득 옛날 신문 기사가 생각난 것 뿐이라구. 매일 같이 나쁜 꿈만 꾸니 답답해서 별의별 잡생각이 다 드는 것 뿐이야.”

     그녀의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그치, 그렇겠지? 악몽 계속 꾸는 거 아무 것도 아닐 거야. 오빠가 기억해낸 신문 기사도 어쩌면 다른 기사랑 헷갈려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잖아.”

     “아니.”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신문 기사는 정확한 거야. 뇌종양이 꿈을 많이 불러일으킨다는 게 신기해서 아직까지도 그 기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어.”

     약간 풀어졌던 그녀의 얼굴이 도로 굳어졌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그녀의 표정에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는 메시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오빠,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는 거야, 빨랑 병원 가봐!

     “야, 괜히 겁먹지 마. 먹을 게 없어서 그런 걸 먹니? 오빤 말이지 다 필요없어. 너만 곁에 있으면 만사 오케이야.”

     “오빠-” 그녀의 눈이 성각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밤 나 좀 잘 보살펴줘. 나쁜 꿈 안 꾸게.”

     “오빠.”

     그는 주위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 때까지도 커피 전문점 2층에는 그들 커플만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일어나 탁자 위로 몸을 숙이고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짧지만 굵은 키스였다.

     “우리 이제 가볼까?”

     “응.” 수진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오빠 편안히 잠자게 오늘밤엔 내가 잘해줄께.”

     “화끈하게?” 그가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대해도 좋아.”

     그들은 커피 전문점을 나와 러브 호텔로 향했다.

     *  *  *  *  *

     그는 그날 밤도 석 달전, 두 달전, 한 달전, 보름 전,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망하는 나쁜 꿈을 꾸었다.

     배경을 달리한 채 오늘도 괴물들의 인간 사냥은 계속 되었다.

     숲이 보였다. 그 속으로 자동차 도로가 나있고, 그 산악 도로의 끝에 기와집들 여러 채가 모여 있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경찰차 다섯 대가 기와집들 앞에 정차했다. 차 문이 열리고 제복을 입은 경찰 수십 명이 뛰쳐 나왔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허리에 찬 권총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기와집 담장 아래서 오뚝이 괴물들이 일제히 떠올랐다.

     경찰들의 총이 괴물을 향해 불을 뿜었다. 하지만 괴물의 몸에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했다. 총알은 괴물의 뒤룩뒤룩 살찐 몸에 푹푹 박힐 뿐이었다. 박히고 나면 괴물의 피부가 총알구멍을 원래대로 메꾸었다.

     괴물들이 경찰을 향해 날아왔다. 경찰들이 차츰 하나 둘씩 괴물의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괴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작은 개들이 기와집 대문에서 달려나와 이 일방적인 전투의 현장을 침을 흘리고 바라보며 짖어댔다. 몇몇 경찰은 경찰봉을 빼들고 괴물들과 칼싸움을 벌이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점점 몰려드는 괴물들의 힘에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괴물들의 몽둥이 세례에 인간의 육신이 짓이겨졌다.

     어흡! 어흡! 어흡!

     괴물들과 개들은 다시 기와집 속으로 들어갔다. 기와집들마다 몽둥이에 맞아 온몸이 터져죽은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괴물들은 어딘가 숨어있을 생존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개들과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기와집 마을 변두리에 시멘트 건물이 한 채 서있었다. 출입문이 붙어있지 않고 입구가 뻥 뚫려있었는데, 그 건물 내부로도 외부로도 사람 시체 천지였다.

     그런데 이 곳으로 한 남자가 뛰어왔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헐떡거리며 벽에 기댔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입고 있는 티셔츠가 검게 물든 채 몸에 달라붙었다. 청바지 오른쪽 아랫단이 윗쪽으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는 뿌연 먼지가 뒤덮여 있었다.

     그 사람이 천천히 시멘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시체들을 밟지 않으려다 몇 번 넘어지기도 했다.

     건물 안에 들어와보니 양옆으로 하얀 벽이 있었고, 그 벽마다 철문이 여러 개 붙어있었다.

     그는 피로 얼룩진 하얀 벽을 따라 구부정하게 걸어가다 오른쪽 맨끝에 있는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손잡이를 움켜쥔 손을 주시하다 문을 밀었다.

     철문이 날카롭게 끼기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그가 건물 밖을 내다보았다. 뻥 뚫린 건물 입구에는 그저 피투성이 시체들 뿐이었다. 괴물이나 개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그 남자는 철문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안은 검은 벽으로 밀폐된 공간이었다. 무척 어두웠다. 철문이 열려 약하게나마 빛이 들어간 부근에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완전히 어둠 속에 파묻힌 검은 방의 더 안쪽도 역시 시체들의 놀이터일 것이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검은 방 속으로 들어갔다. 철문이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해서 닫았다. 경첩이 삐걱대는 소리가 났지만 조금 전만큼 요란하진 않았다. 그는 철문의 손잡이 단추를 잠그고 그 위의 빗장도 걸었다.

     검은 방은 이제 완전한 어둠으로 꽉 찼다.

     그는 잠시 동안 가만히 서서 어둠을 응시했다. 그리고서 바닥에 대고 엎드려 네 발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시체들이 와닿았다. 어떤 것은 물컹했고, 어떤 것은 딱딱했다. 한참을 그렇게 기어가며 가끔씩 손을 내저었다. 드디어 벽이 만져졌다.

     검은 방의 맨끝 벽이었다.

     그는 그 벽에 기대앉았다.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다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다시 눈을 떴다. 그렇게 눈을 뜨고 감기를 계속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캄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듯 했다.

     별안간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던 여러 마리 개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개들이 울부짖으며 시멘트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그는 벽에 기대앉은 채 저 멀리 앞에 있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철문을 바라보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사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개들이 그가 있는 철문을 발로 긁어댔다. 더 요란하게 짖어댔다. 깨갱, 깨갱, 깨개갱.

     갑자기 개들이 조용해졌다. 문을 발로 긁어대지도 않았다.

     어흡!

     어흡! 어흡! 어흡!

     철문이 쿵쿵거렸다. 괴물들이 문을 부수고 있었다.

     검은 방 속의 남자는 멈췄던 숨을 토해내며 신음을 내뱉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에 몸을 뭉개며 몸부림쳤다.

     창문이 있었다.

     손에 창문이 만져졌다. 검은색 테이프로 덮혀 빛이 통과하지 못하는 유리창이었다. 그는 손에 감촉을 느끼는 순간 주저하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열렸다. 그와 함께 창 구멍에서 놀랍도록 강렬한 햇살이 검은 방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 강렬한 빛을 남자는 정면으로 받았다. 눈 앞이 온통 하얘졌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 극단적인 삶을 본 적이 있는가? 방금 전까진 온통 어둠 속에 묻혔다가 이제는 온통 빛 속에 묻혀 버렸다. 자극적인 흑백인생.

     어흡!

     기합소리와 함께 괴물들이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깨갱거리는 개소리들도 더욱 요란하게 났다. 곧 철문이 무너질 것이다. 괴물이 들이닥칠 것이다. 괴물의 몽둥이에 살이 찢어지고 뼈가 박살나고 내장이 터져 죽을 것이다.

     남자는 하얀 섬광 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창틀을 잡았다.

     창문으로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너무 오랫동안을 괴물들과 개들에게 쫓겨다녔다. 이젠 지쳤다. 창문으로 빠져나간다한 들 그저 또다른 도피행각의 시작일 뿐이었다. 나가자마자 허무하게 잡힐 수도 있었다.

     창문은 그저 헛된 희망일 뿐이었다.

     하지만 희망이 그저 희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면... 만에 하나 좀 더 나은 현실과 이어질 수 있는 기회라면...

     철문 바깥쪽에서 나는 요란한 소음 속에서, 창틀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  *

     성각은 나쁜 꿈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떴다. 눈 앞에 벌거숭이 대머리 괴물이 떠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질겁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괴물이 아니라 벌거벗은 성각의 몸이었다. 그는 러브 호텔 천장에 붙은 전신 거울 속에서 자신이 침대 위에 바로 누워 있는 벌거벗은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오늘도 또 나쁜 꿈 꿨네. 그는 천장 거울에 비친 광경을 말없이 훑어보았다. 빨간 스탠드 조명이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빨간 빛이 성각의 몸도 은은하게 감쌌다. 그리고 침대 옆에 수진이 서있었다. 전신 거울 속에서는 그녀의 머리 윗쪽이 보여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수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침대 옆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쁜 꿈을 꾸며 신음을 내지르고 잠꼬대를 하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을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다 지켜봤을 것 같았다. 침대에 있질 않고 서있는 걸 보니 옆에서 잠도 못 잘 정도로 그가 몸부림을 쳤나 보다.

     그들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수진아 나-” 먼저 입을 연 것은 성각이었다.

     “오빠.” 다급하게 그의 말을 막은 것은 수진이었다. “나 어떡해.”

     “어, 응? 뭐라고?”

     “어떡해, 어떡해, 나 지갑 잃어버렸어. 커피 전문점에 놔두고 왔나봐.”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랬던 것이구나.

     *  *  *  *  *

     성각과 수진은 날이 밝은 다음에 전날에 갔던 커피 전문점에 들렀다. 수진의 지갑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새 지갑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  *  *  *  *

     “정말이야?” 그녀가 정말 기쁜 듯 물었다.

     “그렇다니까.”

     “이게 웬일이래, 정말.”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 때 나랑 러브 호텔 갔던 다음부터 나쁜 꿈 안 꿔?”

     “응. 전혀 아무 꿈도 안 꾸게 됐어. 3일째야.”

     “역시 나랑, 사랑하는 여인네랑 같이 있으니까 악몽이 싹 달아났나보다.”

     “역시 그렇겠지? 역시 섹스의 힘이겠지?”

     “오빠, 그럴 땐 좀 사랑의 힘이라고 좋게좋게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

     그가 키득거렸다. “미안, 내가 성격이 좀 직설적이잖냐. 흐흐.”

     “기분이 어때? 나쁜 꿈을 몇 달 동안 계속 꾸다가 안 꾸니까?”

     “글쎄... 좋기도 하고... 의외로 섭섭하기도 하고.” 그가 수화기를 반대쪽 손으로 넘겨 쥐었다.

     “섭섭하긴 뭐가 섭섭해. 난 정말로 오빠가 어디 몸에 이상이라도 생겼나하고 걱정했단 말야.”

     “글쎄말야, 우리 이쁜이가 걱정해준 은혜도 모르고. 너무 오래 나쁜 꿈을 꿨더니 미운 정이 들었나?”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근데 있잖아, 혹시 또...” 수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혹시 또 나쁜 꿈을 꾸게 될까봐?”

     “...응.”

     “글쎄. 3일째 아무 꿈도 나타나지 않으니 이젠 다 끝난 게 아닐까?”

     “수진이의 섹스 한 방에!”

     “야, 그럴 때는 수진이의 사랑 한 방에라고 좋게좋게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니?”

     “히히, 나 덧니 났어.”

     그와 그녀 모두 낄낄대며 웃었다. 그렇게 더 몇 분 동안 잡담을 나누고,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일주일 뒤로 다가온 방송국 시험 준비를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상식 과목에 집중하고자 시사상식 책을 펴들었다. 책 속에는 도대체 상식의 기준이 어디쯤일까를 의심하게 만드는 고난이도의 전문지식들로 넘쳐났다. 도대체가 시험 과목이나 책 제목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어떻게 “상식”이라는 간판을 달고 얼굴을 들이민단 말인가? 부끄럽지도 않나?

     느닷없이 나쁜 꿈 속에서 검은 방에 갇혀 있던 이름 모를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각이 수진에게 밝힌 바 대로 나쁜 꿈이 3일째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잠자는 시간이 너무 편안했다. 그 전까지 나쁜 꿈에 시달리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나쁜 꿈만 꾸고 나면 잠을 아무리 자도 머리가 무겁고 몸이 늘어지고 식욕까지 덩달아 떨어져 시험공부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끼쳤었다. 그래서 나쁜 꿈을 떨쳐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몸부림쳤던가.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클래식 음악을 듣고, 명랑만화를 하루에 식후 3번씩 보고, 아침 냉수목욕으로 육신의 기를 자극하고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해도 나쁜 꿈은 그의 꿈 속에 고정출연했었다.

     하지만 이젠 더이상 나쁜 꿈을 꾸지 않는다. 나쁜 꿈이 별안간 시작되었던 이유를 모르듯이 별안간 중단된 이유도 모르지만, 어쨌든 해방인 것이다.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왠지 섭섭하기도 하다는 그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그동안 너무도 떨쳐버리고 싶었던 나쁜 꿈이기는 했지만, 한 번만이라도 더 꾸었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었다.

     그 무지막지한 오뚝이 괴물을 또 보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 꿈에서 보았던 그 이름 모를 남자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 전까지의 꿈들은 일방적인 살육의 장면들이 나열된 것일 뿐이었지만, 그 마지막 꿈을 꾸는 동안 성각은 그 이름 모를 남자의 절박한 심정을 애절하게 느꼈었고, 꿈이 깨고 나서도,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 사람의 애타던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 사람은 결국 창문을 넘어갔을까? 실패했을까? 실패가 아니라 아예 포기했을까?

     성각의 마음 속이 안타까움으로 차올랐다. 자꾸만 그 사람의 안부가 알고 싶어졌다. 그 사람이 마치 성각의 분신이기라도 한 듯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나쁜 꿈을 다시 한 번 꿔서 그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있다면 좋으련만. 방송국 시험을 앞두고 겨우 되찾은 컨디션을 다시 망칠만한 너무 위험하고 철없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너무 궁금하고 간절한 생각이기도 했다.

     어쩌자고 대하 드라마 처럼 쭉쭉 이어지던 그 나쁜 꿈들이 왜 하필 절정부분에서 중단된 거지?

     성각은 멍하니 쳐다보던 죄없는 상식 책에다 대고 괜히 욕을 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과묵한 상식 책을 아무 쪽이나 펼쳐보며 그는 방송국 시험준비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아나운서가 되자, 아나운서가 되자, 되자, 되자, 꼭 되자. 그것은 나의 꿈이잖아.

     꿈? 나쁜 꿈?

     으아아아악! 공부 좀 하자! 성각은 어수선한 머리를 상식 책 속에다 박치기했다. 콩콩콩콩. 책상이 울리는 소리가 왠지 맘에 들었다. 몇 번을 더 책과 박치기하다 얼굴을 책 속에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 잠이 들려한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24시간을 시험공부에만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낮잠이 웬말이더냐? 나쁜 꿈으로 점철되던 어지러운 잠자리가 이제 겨우 안정을 되찾았는데 농땡이가 웬말이더냐? 나쁜 꿈만 안 꾸면 공부가 7배는 더 잘 될 것이 틀림없다던 너의 다짐은 역시나 낙오자의 헛소리였더냐?

     정신 차리자. 그는 거실로 나갔다. 구석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들이켰다. 싸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뭔가 전체적으로 정리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각은 이제야말로 상식 책을 열심히 파고들 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고개가 자연스레 현관문 쪽으로 돌아갔다. 문 밖에서 불가사의한 힘이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머릿 속이 증발해버린 듯한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조용히 그의 몸을 현관문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발이 현관문 바로 아래 신발 벗어놓는 타일 바닥으로 내려섰다.

     양말도 안 신은 성각의 맨발에 차가운 타일 바닥이 닿는 그 순간, 발다닥에서부터 시작된 차가운 냉기가 숨가쁜 속도로 박차고 올라와 그의 머리를 찔렀다. 어느 순간부터 무기력하게 육체의 반응에 끌려가던 그의 마음이 자극을 받아 제정신을 차렸다. 이제 막 그의 철없는 오른손이 현관문 손잡이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손을 멈추었다. 오른팔이 문 손잡이 아래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붕 뜬 채로 굳었다. 그는 숨을 죽이며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여 그는 어찌해야할 지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왜 겁내는 것인지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겁에 질려있다는 것이 무섭기만 했다.

     쿵. 쿵. 쿵. 쿵. 밖에서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성각은 문 바로 앞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심장이 몸을 뚫고 나올 것 처럼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불안과 흥분과 긴장이 그의 머릿 속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압력을 묵묵히 인내하고 있는 그의 굳어버린 육체는 난생 처음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밖에서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허공에서 가만히 떠있는 오른손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고민했다.

     “거기 아무도 안 계세요?” 밖에서 어느 남자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각은 오른손을 그냥 내려버렸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그의 머릿 속이 식어버렸다. 문 밖에서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꾸었던 나쁜 꿈 속의 남자 얼굴과 함께 그의 마음 속으로 퍼져갔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3번 더 울렸고, 초인종 소리가 5번 더 울렸다.

     “정말 안 계세요? 저는 왠지 안에 계실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남자가 조용히 얘기했다. 현관문 안쪽에 누가 와있는 줄 다 알고 일부러 목소리를 낮춘 것인지도 몰랐다. “박성각 씨 맞지요?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 모르겠는데, 저는 성각 씨를 자주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꿈에서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정말입니다. 저는 고향에 내려가던 길이었어요. 그게 다섯 달 전인데요. 그 때 갑자기 괴물들이 세상에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전 죽지 않으려고 도망다니기 바빴습니다. 너무 무서웠죠.

     그런데 석 달 전부터 잠을 잘 때마다 꿈을 꿨습니다. 바로 박성각 씨가 나오는 꿈을요. 신기하게도 매일 성각 씨 꿈을 꿨어요. 너무 부러운 꿈이었습니다. 저의 현실은 괴물들에게 도망만 다니다 언젠가는 잡혀죽을 게 분명한데, 제 꿈에 나오는 박성각 씨 인생은 부러울 정도로 행복하더군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죠? 전 미래가 없습니다. 없을 것 같아요. 괴물들이 저의 미래를 망쳤어요. 성각 씬 애인도 있잖아요. 미인이던데. 죄송스럽게도 꿈 속에서 성각 씨와 애인 분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도 봤습니다. 부럽습니다. 전 여자랑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젠지 모르겠습니다. 가는 곳마다 괴물들의 몽둥이에 맞아죽은 인간 시체들 뿐이니까. 성각 씨는 이렇게 아늑한 집도 있지요. 전 돌아갈 집이 없어요. 매일같이 꿈 속에서 성각 씨의 행복한 일상을 보게 되면서 그나마 기분이 좋았습니다. 눈만 뜨면 현실은 지옥이니까요. 매일매일의 꿈 속에서 성각 씨를 보면서, 전 정말이지 성각 씨가 다른 세상에 사는 저의 분신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했다니까요.

     며칠 전이었어요. 저는 드디어 궁지에 몰렸어요. 어두운 방에서 괴물들한테 포위되었답니다. 창문이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거기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어요. 그동안 외로운 도피 생활에 지쳐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단 생각이 제일 강했어요... 그런데 박성각 씨 생각이 났어요. 직접 만나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구요. 만나서, 석 달 동안 저의 꿈 속에서 즐거움을 주셔서 고맙단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고단한 사람에게 달콤한 꿈을 맛보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제게 달콤한 꿈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이제껏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어두운 방에 있는 창문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거구요.

     성각 씨를 찾아가는 게 아무런 희망도 없던 제 인생에서 최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비록 캄캄한 방에서 창문 열다 햇빛을 맞아 눈이 상해서 눈 앞이 흐릿하고 제대로 보이지가 않지만, 한 순간도 쉴 수가 없었어요. 조금이라도 쉬었다간 괴물들이 쫓아올 것 같아서. 그래서 며칠 동안 잠도 안 자고 여기까지 걸어왔어요. 그러고 보니 3일 동안 한숨도 못 잤네요.

     그런데 성각 씨? 안에 계세요? 저는 어쩐지... 이 현관문 앞에 와계실 거란 예감이 듭니다. 어쩐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성각 씨 안에 안 계세요? 계시면 문 좀 열어주세요. 뵙고 싶습니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10번도 더 넘게 났다.

     성각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아무런 움직임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숨만 조용히, 아주 조용히 쉬고 있을 뿐.

     밖에서 묵직한 게 내려앉는 소리가 났고, 현관문이 쿵하고 가볍게 울렸다. 아마도 밖에 있는 남자가 주저앉아 현관문에 머리를 기댄 것 같았다.

     “무척 피곤하네요. 3일 동안 잠을 통 안 잤더니.

     제가 고향에 내려가던 길이라고 말했지요? 고향에 있는 우리 어머니가 재혼하시거든요. 그래서 참석하고 싶었는데... 사실 저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가족들 볼 낯이 없어서 고향에서 무작정 도망쳤답니다. 그게 10년도 더 전의 일이죠... 최근에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우리 어머니가 재혼하신다는 거에요. 그래서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던 길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나서 온세상이 망해버렸어요. 고향으로 가봤죠. 우리 고향집이 엉망이 돼있었어요. 마을이 죄다 사람들 시체로 뒤덮여 있었구요. 그 아수라장 속에서 우리 식구들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마 괴물이 안 나타나서 어머니 결혼식에 갔었더라도 참석은 못했을 거 같아요.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서 누나, 동생들이 저를 가만 안 놔뒀을 거 같아요. 사실 맞아죽어도 싸구요. 그래도 꼭 미안하단 말을 제 입으로 직접 만나서 해주고 싶었어요, 가족들한테. 꼭 그러고 싶었는데...

     박성각 씨 한테도 고맙단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정말 집에 안 계신 거죠? 언제쯤 돌아오실 거죠? 이번에도 저는 실패인가요? 가족들한테도, 성각 씨 한테도 결국 하고픈 말을 못 전하고 마는 건가요? 그 어두운 방에서 그냥 죽을 걸 그랬나요? 역시 괜히 어설픈 희망에... 졸리네요... 아주 많이...”

     낯선 남자가 침묵했다.

     성각은 그 사람이 잠을 자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3일 동안 잠을 못 잤다고 하니까. 혹시 지금 잠자면서 또 성각이 나오는 꿈을 꾸는 것일까? 자기 현관문 앞에 서서 낯선 남자를 집 안에 안 들이려고, 있어도 없는 척 시치미 떼고 있는 모습을 저 낯선 남자는 지금 꿈꾸고 있을까?

     성각의 얼굴이 붉어졌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가며 거실로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가서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그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책상 위에 펼쳐둔 상식 책으로 눈길이 갔다.

     그래, 이번 사태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꿈 속에서 봤던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는 게 가능한가? 가능할지도. 그럼 꿈 속에서 봤던 사람을 현실에서 만났는데, 그 사람도 꿈 속에서 자기를 봤다고 아는 척하는 게 가능한가? 가능...할지도. 그럼 괴물들 때문에 죽을 지경에 처했다는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하나? 괴물을 믿나? 드라큐라, 강시, 귀신, 트롤... 대머리 오뚝이?

     애초부터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상식이 아니잖아! 방송국 시험에 그런 게 나오겠냐? 상식문제 319점짜리: 다음 중 상식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꿈은 반대이므로 나쁜 꿈을 자주 꾸면 좋다. ② 괴물이 공중을 떠다니는 것은 엉덩이가 가볍기 때문이다(엉덩이가 달려있는 괴물에 한함). ③ 러브 호텔의 LOVE는 “라이브 오르가즘 보지자지 이글이글”의 약자다. ④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사람은 위험하므로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

     너무 고차원적인 상식이로구나. 푸하하!

     집 밖에서 어린 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리도 슬픈지 쉴새없이 울어대고 있었다. 그러다 개소리가 났다.

     깨갱! 깨갱! 깨갱!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극적으로 높아지더니 고통으로 가득찬 비명소리가 되었다. 빨래방망이로 삶은 빨래를 후려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흡! 어흡! 어흡!

     그것이 시작이었을까? 잠잠하던 동네 여기저기서 사람들 비명소리와 개소리, 괴물들의 기합소리가 울려퍼졌다. 전쟁이라도 난 듯한 소동이 벌어졌다.

     성각은 외출하신 부모님과 수진이 생각이 났다.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통화는 되지 않고 수화기에서는 자꾸만 이상한 여인네의 신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아~ 행복해요~ 아~ 행복해요~ 아~ 행복해요~]

     그는 TV를 켜보았다. 아무리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TV에서는 짧은 문구가 적혀있는 정지화면만을 내보냈다. [날씨가 좋습니다. 밖으로 외출을 나가십시오.]

     성각은 인터넷을 살펴보려고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에서는 한동안 정상적인 작동화면이 나오더니 갑자기 0과 1로 가득찬 어지러운 정지화면으로 굳어버렸다. 그 화면 중앙에 있는 검은 띠 속에 하얀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해킹 당했습니다.]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초인종을 다급하게 눌러대는 소리가 났다.

     조용해졌다. 그 남자가 다시 잠이 든 건지 기절한 건지 다른 곳으로 가버린 건지 확실치가 않았다. 현관문을 열어보면 단 번에 알 수 있겠지만.

     그건 ‘절대’ 안 돼! 열지 마. 문 열면 너 죽는단 말야.

     성각은 방에 주저앉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대학살의 함성을 어색하게 참고 들으며, 생각을 제대로 집중해보려고 노력했다. 생각이 맘 먹은 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몸이 으실으실 떨리기만 했다. 감기가 오려나? 히히히.

     그는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27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 속에서도 시간은 냉정하게 끊임없이 잘도 흘러갔다.

     어흡! 어흡! 어흡! 어흡! 어흡! 어흡! 괴물들이 제 세상을 만나 기분이 좋은 듯 기합소리가 우렁찼다. 빨래방망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어우러져 묘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아주 격렬한 랩음악 같았다. 퍽, 꺄악, 퍽, 꺄악, 깨갱, 깨갱, 어흡, 퍽, 요! 체킷 아웃!

     성각은 일어나 책상에 다가갔다. 상식 책 위에 그가 평소 애용하던 3M 귀마개가 있었다. 안방에서 부모님이 보시는 TV 소리가 공부에 방해될 때마다 쓰던 귀마개다. 그는 그 조그만 알맹이 두 개를 들어 양쪽 귓 속에다 눌러 넣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따가운 잡소리들이 완전히 차단되진 않았다. 특히 괴물의 기합소리는 유난히 거슬리게 들려왔다. 그래도 귀마개를 하니 살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방바닥에 앉아 빈둥거렸다. 잠시 부모님, 수진이, 친구들 생각도 좀 하고, 만화책도 펼쳐보고, 잡지도 훑어봤다. 그 어느 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벽시계만 구경했다.

     둥근 벽시계의 모습에서 수진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애가 커피 전문점에서 보여주던 표정.

     오빠, 빨랑 병원 가봐라!

     정말 그런 걸까? 갑자기 꿈을 많이 꿨더니 뇌종양이었단 사실이 그에게도 일어난 걸까? 나쁜 꿈은 결국 뇌종양의 장난이었나? 그리고 지금의 이 난장판은 뇌종양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었나? 그럴듯 한데?

     병원에 가봐야할 듯 싶었다. 뇌검사를 받아봐야 겠다. 그런데 어쩌지? 밖에서 괴물들이 대기 중인데 병원까지 어떻게 간단 말야? 죽을려고 환장했나?

     날씨가 좋습니다. 밖으로 외출을 나가십시오. 푸헬헬헬.

     심술궂은 목소리가 성각의 마음 속에 못된 말을 지껄이고는 달아났다.

     성각은 갑자기 피곤해졌다. 만사가 귀찮아졌다.

     방바닥에 이불을 폈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누웠다. 귀에 낀 3M 귀마개를 확실하게 꾹 눌렀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영원히 깨지 않는 좋은 꿈을 꾸고 싶었다.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초청 단편 우주인류학개론10 2009.02.27
초청 단편 당신의 뇌, 당신의 유전자1 2005.05.28
초청 단편 공포소설을 쓰는 남자7 2004.09.24
초청 단편 누에머리손톱6 2009.02.27
초청 단편 OK TO DISCONNECT 2013.05.31
초청 단편 툴쿠2 2013.05.31
초청 단편 곱하기 무한대 2004.11.26
초청 단편 착시현상3 2005.06.25
초청 단편 원숭이 엉덩이는 빠/알/개/6 2008.04.25
초청 단편 나쁜 꿈의 대하 드라마 2004.12.29
초청 단편 황금알 먹는 인어6 2006.06.03
초청 단편 복사인간 2005.01.28
초청 단편 컴퓨터의 마음2 2010.10.29
초청 단편 달 가르기 2005.09.30
초청 단편 아테나의 기원起原 2005.03.25
초청 단편 Recipe: 사랑의 묘약 2011.05.28
초청 단편 당신의 보석은 행복합니까?3 2007.12.29
초청 단편 Beauty Maker 2004.12.29
초청 단편 모든 우연에 관한 변증법 - 우주 복고 로맨스 2005.04.29
초청 단편 아들의 방3 2007.05.26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