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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착시현상

2005.06.25 02:2806.25

legoshark.x-y.netsihyuk@hanmail.net

그 여자와 헤어진 후, 나는 '앞으로 절대 평범한 여자와는 만나지 말자'고 결심했다. 평범하다는 것은 달리 표현해 그만큼 '흔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개성이 없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20대 황인종 여자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흔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의 그녀였다.

헤어진 뒤, 그것이 나를 한없이 힘들게 만들었다. 어떤 여자를 보아도 헤어진 그녀를 닮아있었다.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수다 떠는 여학생의 넋 나간 눈빛,



한식집에서 정신없이 설렁탕을 퍼먹는 소녀의 입술,



홍보용 무료 시음회장에서 내게 술잔을 건네는 도우미 아가씨의 손길…….



그 모든 모습들이 헤어진 그녀를 닮아있었다. 그렇게 다른 여자들에게서 헤어진 그녀의 닮은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녀를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 하여금 헤어진 그녀를 연상케 하는 모든 여인들의 모습 때문에, 그녀를 잊으려고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괴로웠다. 그때 했던 결심이 평범한 여자와는 사귀지 말자는 것이었다. 세상 모든 여자의 보편성만 일부러 모아서 조합한 듯, 징그럽도록 평범한 그녀의 모습은 다른 여자들에게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되어 괴로워진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때부터 내가 원한 것은 '정말 이 세상에 이렇게 괴팍하고 개성적인 사람은 이 여자 하나 뿐일 거다'랄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런 희소성이 있는 여자라면, 헤어지고 나서도 금방 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평범한 여자와 헤어지고 받았던 그 고통, 다른 여자들을 보면서 닮은 점을 발견하고 헤어진 그녀를 떠올리게 되는 그런 치사한 고통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확신이었다.



사람의 간절한 염원은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얼마 안 가서 나는 개성적인 한 여자를 만났다. 긴 속눈썹을 붙이고 짙게 마스카라를 칠한, 다소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눈매 속에서 지친 듯한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던 그런 여자. 어찌 보면 천박해 보이는 그 모습 뒤에는 어떤 애잔함이 묻어 났다. 한마디로 말해 특이한 여자였다. 내가 원하던 희소성 그 자체의 여자였다.



개성 있는 그녀와 그렇게 몇 달을 만나고, 또 3류 소설 같은 뻔한 이유로 헤어질만할 때 적당히 헤어졌다. 마지막 헤어지는 길목에서 나는 사라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 각인 시켰다. 원래 같으면 헤어질 때 마지막 모습은 보지 않으려 애썼을 것인데, 그녀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저런 개성적인 여자는 두 번 다시 볼일이 없을 테니,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나는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절대로 기억 속에 되살아나 나를 괴롭힐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의 마지막 뒷모습을, 나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꼭꼭 눈에 새겨 넣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며칠이 지난 뒤 나선 거리에서, 나는 거의 주저앉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에는 그녀를 닮은 여자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예전 평범한 여자와 헤어졌을 때 경험했던 그 현상, 세상 모든 여자들이 평범한 그녀로 보였던 그 착시현상이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특이한 여자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던 나의 신념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거리는 온통 그녀를 빼다 박은 듯 닮은 여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골목길의 외진 2층 카페에 들어가 앉아 생맥주를 마시고 팝콘을 씹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도대체 이 착시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내가 그토록 특이하다고 믿어왔던 그녀도, 결국에는 거리를 가득 메운 뭇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여자였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즉 객관적으로 말해 특이한 여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 특이함이 평범함 속으로 묻혀버리고 마는 것일까? 혹시 이것은 나의 개인적 문제가 아닐까? 헤어진 여자에 대한 잔영(殘影)이 오래도록 눈에 남는 특이한 체질을 내가 가진 것은 아닐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 번만 더 거리의 평범한 여자들을 보고 싶었다. 과연 아직까지도 헤어진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선뜻 눈을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연거푸 여러 잔의 생맥주를 들이킨 후에야 나는 창 밖의 거리를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그 거리에는…….

그 거리에는 온통 얼굴 없는 여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저 텅 빈 얼굴들에 무엇을 투영하고 있었던 것일까?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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