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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애염(哀炎)

2004.11.26 21:2611.26

판타지 랜드dropofrain@naver.com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 앙상하게 안으로 말라붙은 새까만 가지가 흔들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모든 것들이 얼어붙고 정지하여 괴이한 정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변함없이, 그리고 끝도 없을 것 같이 산이 하늘을 향해 길게 달리고 있었다.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 창백하게 질린 단단한 땅을 밟고 선 인영은 폐부를 후빌 날이 선 바람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다시 내뿜었다. 하얗게 허공 중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자신의 입김을 무심코 바라보고 섰던 인영은 한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걸음마 하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음걸이. 하지만 멈추지 않고 인영은 산비탈을 타고 아래로 향했다.
  산 아래에는 마을이 있었다. 겨우 십여채 될까 초라한 초가지붕들. 그 집들 중 하나에 그의 시선이 쏠렸다. 그 집 마당에는 돌 조각들이 하얗게 널려있었다. 인영의 얼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형님!”

  인영은 문득 멈춰 섰다. 우뚝 하고 땅에 붙어버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흰옷을 입은 창백한 안색의 호리호리한 청년이 다시 한번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피를 토해내듯 외쳤다.

  “염(炎) 형니임!”

  인영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푸드득 놀라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바라보고, 그리고 그를 향해 뛰어갔다. 그의 얼굴은 마치 불에 달구어진 쇠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나, 그의 눈 속에는 차거운 하나가 머무르고 있었다.
  염은 창백한 얼굴의 청년 손에 들린 망치와 정을 보았다. 얼굴과 목의 하얗고 여리여리한 살갗과는 달리 그의 손에는 단단한 굳은살이 배겨 있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눈에 어린 자신을 향한 착잡한 연민과 애정을 보았다.
  참지 못하고 불쑥 내뱉었다.

  “내기를 하자.”

  짧지만 눈 먼 분노로 가득 찬 그 말에 염 자신이 놀라 새까맣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애(哀)의 얼굴이 푸른 하늘에 재색 구름이 몰려오듯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진 사람은 죽는 거다.”

  애는 염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짐승같이 무의미하지만 순수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그 순간에도 빛을 잃지 않았다. 염은 그런 자신의 동생 애를 바라보며 그의 순결함 곁에 어떻게 자신이 놓여지게 되었는지 의아심을 품었다.
  그의 연약한 고결함의 미(美)는 언제나 그의 작품 속에서 성화(聖化)되었다. 그의 조각은 신(神)이 육(肉)과 혈(血)이 되어 지상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은 것은 모두가 정화되고 그 사물의 본질적 선(善)을 극대화하여 현존하게 되었다.
  무지한 사람들은 자신의 격식과 형식을 갖춘 화려함에 미혹되어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천금을 주고 자신의 조각을 사갔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아는 자들은 자신을 속되다고 욕했고 자신은 그들을 욕했다. 그들의 눈이 잘못되었다고 크게 외치며. 가치 있는 것을 아는 자는 언제나 소수였으므로.
  그런데 어느 순간 염은 자신도 애처럼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새겨낼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꿈은 잔인하였다. 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야 하였다. 자신의 바람을 알지도 못한 자신의 보잘것없음이 염의 자존심을 깊게 상처 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을 때,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애의 것을 보고 깨달았을 때, 절망을 알게 되었다. 애의 것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세상의 이목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진실 앞에 섰을 때의 고통은 마치 저 거대한 산으로 자신의 몸을 쿵쿵 짓이기는 것과도 같았다.
  무수한 돌 조각들이 자신의 발 위로 떨어졌다. 하얀 돌가루에 손도 하얗게 되었다. 침식을 잊고 자신의 몽상(夢想)에 도취되어 무수한 바위를 쪼았다. 무수한 바위들이 자신의 손에 의하여 곰보가, 언청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신(神)이 되지 못하였다.
  며칠 밤을 새면서 바위를 두드리다 문득 들었다.

  ‘그만해라!’

  자신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새까만 숲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관솔불에 흔들리는 바위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위가 자신에게 성을 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형, 사물은 모두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

  염은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던 애의 말을 떠올렸다.

  ‘돌이 나를 거부하고 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산 속을 뒹굴었다. 귓가에 울리는 낙엽의 소리가 삐걱거리는 심장의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심장이 멈추었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은 사람이 낸 길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돌뿐만 아니라, 산도 자신을 거부하고 있음을. 바로 아래에 마을이 있었고 길은 마을과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은 돌에게, 산에게, 신에게 선택되지 못하였다. 자신에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음을 깨닫고 자신을 옭아맨 것은 절망이 아닌 무감각이었다. 얼마동안을 길 위에 서 있었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결정하였다.
  애는 순간 떨리는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하였다. 그러나 염은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영겁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애는 고개를 돌려 염을 외면하고 약간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염은 필요이상으로 크게 외쳤다.

  “보름까지다!”

  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염은 보았으나, 턱에 힘을 주고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염은 바위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바위가 자신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평생의 업이었고 이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 일을 위해서는 신에게의 반역이라도 저지를 참이었다. 신이 자신의 것에 내려오지 않는다면 신을 강제로라도 자신의 것에 머무르게 할 참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그 정도 가치도 안 된다면 죽어버릴 참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헤매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았으나 자신의 마음에 차는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절망에 빠지려 할 때 마치 두 쪽으로 갈라진 듯한 거대한 바위가 보였다. 그 틈으로 들어가서 올려다보니 그 크기가 장대하고 기세가 있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마을 바로 옆에 있는 이 바위를 어째서 발견하지 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보름까지는 시간이 얼마 없었으므로, 의아한 마음을 접고 바위에 아슬아슬 매달려 바위를 쪼기 시작했다.

  “땅땅..”

  선명하고도 희미하게 메아리치는 정과 바위의 부딪힘이 염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는 일이 열 번도 더 계속 되었다. 염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가 전에 하던 것처럼 표면을 부드럽게 다듬는 것도, 필요 없는 장식을 새기는 일도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상(象)은 전례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였다. 그는 자신이 새긴 부위를 다시 보지 않았다. 오로지 새로운 부분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신(神)을 완성하였다.
  동트기 전, 새벽의 푸른 어둠 속에 그는 자신의 신을 바라보았다. 그 신은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입가에는 무표정한 미소가 있었다. 그는 무수한 세월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염의 무표정한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며칠만에 주름져 버린 그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그의 눈에 비친 조각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 속에 신이 있음을 그는 확신하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투명하게 울리는 정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동생일 터였다. 한참을 서서 푸른 새벽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신을 바라보고 동생의 정소리를 들었다. 그는 행복하였다.
  염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말없이 깨달았다. 그가 원하던 것을 말로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만족되었다. 그리고 애(哀)의 정소리가 어느 사인가 멈추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그의 발걸음도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러나 나무들 사이로 애와 애의 조각이 보이는 순간 그의 심장이 무저갱속으로 떨어지는 듯 하였다. 거기에는 진짜 신(神)이 안온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부드러운 옷의 주름, 통통한 몸이 엷은 미소와 어울려 보는 모든 자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고 있었다. 염은 가까이 다가가 신의 얼굴을 떨리는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서서 애의 외침도 무시하고 마구 뛰어 자신의 신에게로 갔다. 다시 본 자신의 것은 사람의 집념이 만들어낸 가짜 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보았으며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형님!”

  “형니임! 안돼요!”

  “안돼에..!”

  애의 목소리가 귓가에 앵앵거리며 울리고 있었지만 염은 애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망치로 열심히 자신의 신의 머리 부분을 후려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머리가 아래로 떨어져 부서져 버렸다. 염은 부서져 버린 머리의 자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았다. 붉은 피가 고였다.
  애는 한 덩이의 핏덩이로 변해버린 자신의 형을 눈물 젖은 눈으로 내려보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부서진 조각 사이에 고인 형의 핏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푸른빛 진한 작은 것이 하늘 높이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작은 새는 망설이지 않고 부드럽지만 빠르게 저 멀리 산을 넘어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날아갔다.
  애는 그 자리에서 그 새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형의 머리가 사라진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는 달리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애는 자신의 조각 앞에 섰다. 그리고 조심해서 자신의 조각의 목을 쪼기 시작했다. 해가 하늘의 한 가운데에 왔을 때 즈음, 애는 자신의 조각의 머리부분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땀으로 뒤범벅된 그의 몸에선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는 신중한 동작으로 머리부분을 바위 위로 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염이 뛰어내린 그 자리에 머리가 자리했다. 떨어지지 않게 잘 고정시킨 뒤, 애는 아래로 내려와서 조각을 바라보았다.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신(神)의 얼굴 아래 부동의 몸이 자리하고 있었다. 운명 아래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햇살 속에서 머리 부분에 앉은 작은 새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려고 했을 때 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애는 고개를 흔들고는 형의 시신과 머리의 조각을 수습해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곳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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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원 (이천동 석불)의 전설 중 하나를 모티브로 차용했습니다. 참고로, 형과 동생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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