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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fantasy.pe.kr"우리 너무 늘어지는거 아냐?"

드라마 재방송을 멍하게 응시하던 P가 말을 꺼냈다.

"신문 만들게?"

에어컨 앞에서 나른하게 바람을 쐬던 내가 말을 받았다. 의미 없는 말이다.
내가 P의 집으로 등교하게 된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말로는 방학숙제 역사신문을 만든다지만 P도 나도 숙제 따위엔 애초에 마음이 없었다. 나는 그저 에어컨을 찾아왔을 뿐이다. 나와 P는 가끔 같이 다운받은 영화를 보거나 철 지난 게임으로 낮을 보냈다. 가끔 P의 부모는 아주 밤늦게 들어와 흐트러진 문제집을 수습했다. 우리는 가끔 문제집을 펴놓고 끼적거리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가끔이다. 사실 대부분의 시간, 우리들은 그저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지금처럼 그것을 지각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돼."

P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났다. 죄책감에 못 이겨 소파 위에 쌓아뒀던 참고서 더미가 그 충격에 무너진다. 그 서슬에 나도 에어컨 바람이 직통으로 오는 고도에서 머리를 들었다. 저 자식 공부라도 할참인가. 거창하게 일어난 녀석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리모컨을 가져와 TV채널을 바꿨다. 맛집기행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바뀐 채널을 보고 난 킬킬대며 싱겁게 끝난 P의 말을 건져 올렸다.

"자. 중학 교육과정까지 마친, 말 그대로 고등인적자원이 지금 이렇게 늘어져 있는 이유는?"

"뭘까."

싱거운 녀석. 난 베고 자다 얼굴에 눌러 붙은 귀촉도를 때내면서 P를 쳐다봤다. P의 싱거움에 실망을 금치 못한 내가 막 18종 문학교과서에 다시 얼굴을 묻을 참이었다.

"당연히. 여름이라서 일까."

"여름이라서?" 색다른 주장인데?

"잘 생각해봐. 우리 봄에도 이랬었나?"

P는 세숫대야 팥빙수에서 눈을 때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봄? 봄이 어땠더라? 지난봄을 생각하려다 난 곧 P보다 훨씬 심각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지난봄이 어땠지?

"음. 이렇진 않았던 것 같아."

"겨울은?" P는 재차 물었다.

그런게 생각날 리 없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모든게 여름 탓이다. 온난화로부터 지구를 사수하자?"
  P는 무의식적으로 에어컨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덜 풀린 눈으로 힐끗 보다 말했다.

"가을이 와야겠지."

"백번 옳은 말이다." 내가 나른하게 맞장구 쳤다. "오면 뭐가 달라지는데?"

TV에서는 노련한 방청객의 함성.

"로또라도 터지려나." 그새 우롱차 팥빙수로 관심을 돌려버린 P가 시큰둥하게 말을 받았다.

팥빙수팥빙수

"터지면 나 1/3."

파르페파르페

"1/3? 뭐하게?"

쌀국수쌀국수

"땅 사야지."

회냉면회냉면

"너무 꿈이 작지 않아?"

콩국수콩국수

"넌 해외투자한뎄나."

별 관계도, 목적도, 재미도, 열의도 없는 우리의 대화는 콩국수 위에 떠있는 참깨처럼 띄엄띄엄 진행되었고 어차피 우리의 주 관심사는 대화가 아닌 맛집기행 TV인 것이 자명했다. 사실 모든 나태의 원흉을 여름에게 뒤집어씌우는 짓에는 그다지 고등한 정신활동이 필요치 않았다. 여름여름여름. 가을가을가을. 그래서 뭐?

"야."

냉면 위를 표류하는 달걀노른자 조각같이 흩어지던 대화에서 P가 말을 끊었다. 오이조각과 다름없던 내가 P의 말을 시답잖은 농담으로 돌려버리지 않은 까닭은 그 말이 분명한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라는 한마디의 말은 분명하게, 상대방이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오늘밤 가을 온다."

녀석이 더윌 먹었나?

그러나 녀석은 내 눈길에는 아랑곳 않고 확고한 손짓으로 거실 한켠에 붙어 있는 달력을 지목한다. 8월 #일. 입추- 立秋?

"맞아. 가을이다."

내가 P의 황당한 이야기에 그에 어울리는 농담으로 응수하지 않은 까닭은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 당시 내게 '여름을 끝낸다.'라는 말이 매우 특별하고 매력적인 일로 생각됐기 때문이라 추측할 뿐이다. 아니면 단지 P의 그 확고한 태도에 매혹됐을지도. 어쨌든 나는 24절기가 계절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앞서 농사를 대비한다는 의미가 더 깊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녀석 또한 귀여운 표정으로 그건 낚시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 우리에게 가을은 마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신비한 계절의 이름처럼 발음되었고 실제로 신비로웠다. 우리는 여름을 싫어했다. 아니 증오했다. 여름은 겹겹이 말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진흙처럼 도처에 깔려있었다. 의지를 병들 게하고 권태와 짜증을 양산했다. 여름은 최악의 계절이다. 품위 있게도 여름은 우리의 아무것도 꺾지 않았다. 다만 바닥없는 늪에 처박을 뿐이다.
그건 마치 외국어영역 시험지를 받았는데 전치사와 대명사를 제외한 아는 단어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때, 읽는다고 해석이 나올 리가 없는 문장을 다섯 번째 계속 읽고 있던 것을 깨달았을 때, 건너뛰고 건너뛴 수학문제를, 문제지 마지막에서 돌아와 다시 마주했을 때의 그 기분. 수업진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때 느끼는 그 비참함이다. 그렇게 질척거렸다. 우리의 여름은.
우리는 그 여름을 부셔버릴 그 가을을 원했다.

"가을이 온다."

우리는 베트남 쌀국수를 뒤로하고 올 여름 마지막 위닝일레븐9을 세팅했다. 여름을 끝내는데 가장 어울리는 의식이다. 우리의 여름을 구성하는 실체는 팔도비빔면과 휘센과 PS2였으니까. 위닝에서 괴혼으로, 괴혼에서 진삼국무쌍3로, 진삼국에서 철권으로, 철권에서, 철권에서 소울칼리버2로, 소울칼리버에서 메탈슬러그로, 메탈슬러그에서 스맥다운으로, 스맥에서 사일런트라인으로, 사일런트에서 니드포스피드로, 니드포에서 천추3로-. 이윽고 CD장에서 꺼낸 모든 게임으로 여름을 장사지낸 우리는 가을을 두 시간 남기고 TV와 에어컨을 껐다.
우리는 엄숙하게 가을을 준비했다. 소파 밑에 들어갔던 블랙박스와 구겨진 신사고가 제자리를 찾았다. 메가스터디는 책장에 들어가지 않아 P의 방 침대위에 던져놓았다. 참고 자료랍시고 꺼내놓은 초등5학년 역사학습만화까지 정리한 후, 우리는 편의점에서 과자와 음료를 사와 커다란 괘종시계 앞에 뜯어놓았다. 과자는 새우깡을 샀는데- 가을에는 새우가 제철이라는데 모두 의견일치를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냉장고에 남아있던 망고 주스를 따라놓고 시계 앞에 앉았다.

    가을
      이
         다.




                                   댕-

               뎅--

                    댕-
                                         댕-

                                댕-

     뎅--

                           뎅--

                    댕-
 
                                                  뎅--

                댕-

                            뎅--





 댕.



실체 없는 침묵이 흘렀다.

"가을?"
"너는?"

한바탕의 폭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라고 한다면 오늘 낮의 과거에게 미안한 말일까. 우리는 정말 가을을 바랬을까. 아마겟돈이나 라그나로크를 기원하기엔 뭣한 나이라 가을을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얼추 맞지 않을까. 우리의 여름에게는. 설마
진짜 가을이 올 거라 믿었을까.

녀석이 에어컨을 켜는 동안 난 새 게임을 세팅했다. 에어컨 앞에서 내 게임을 구경하던 P가 잠들 무렵, 난 3번째 우승컵을 타고 있었다. 자금이 200만을 넘을 무렵, 처음으로 게임을 정지시켰다. 에어컨 희망온도가 18℃ 이었음에도 묘하게 주변은 더웠다. 숨막힐듯하면서 답답하고 묘하게 불쾌한 이 기분- 여름? 말 그대로, 순간의 충동에 사로잡혀 난 P의 집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컴퓨터를 켜자, 창밖으로 뿌연 아침해가 떠올랐다.

여름해였다.


그날, P는 저체온증으로 죽었다. 난 에어컨을 켜던 P의 모습을 기억했다. 난 나오면서 에어컨을 끄지 않았다. 녀석은 여름이 너무 싫어서 죽고 싶어 했을 것이다. P가 죽어서 에어컨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이었다. 그래서 난 독서실을 다녔다.
독서실은 참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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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 고딩 고딩 퐌타스틱 고딩 라이프입니다.
고 2되고 연재란에 올리는 첫글이군요. 랄랄라;

아마도 저는 엔딩에서 아무나 하날 꼭 죽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봅니다.

(덧. 에어컨 키고 잔다고 해서 죽진 않는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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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님은 환타지 읽기 Reading Fantasy 에서 활동하는 고2의 학생으로 이 세 편은 지난 3년간 유영재님이 환타지 읽기에 올린 단편 중 대표적인 세 편이다. 이 세편의 단편으로 10대 후반의 아마추어 작가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영재님은 현재 천안에 거주중이며 추리소설을 즐겨 본다.
mirror
댓글 1
  • No Profile
    강동하 16.01.12 21:43 댓글

    어리신데도 굉장히 잘 쓰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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