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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k.com내가 이 별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본 것은 위태로운 두 다리에 의지해 움직여가는 생물체들이었습니다.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긴 다리들은 흔들거리면서 꺾어질 듯 말 듯 행성 위를 걸어 다녔습니다. 그때가 아마 이십 세기였던가, 나는 형형색색 팔락이는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이 별이 내가 머나먼 미래 떠나왔던 그곳이 맞는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나는 거미줄 같은 은빛으로 명멸하는 신경의 이끌림에 따라 머리를 움직였습니다. 그곳에는 물수제비를 뜬 듯 번져가는 수면의 나이테 아래 한 생명체가 서 있었습니다. 그 살구 색 손가락이 나를 향해 그림자 지며 올라와 고운 나이테의 중심을 건드립니다. 수면이 흐트러지면서, 아, 그것이 나와 외계인들과의 첫 접촉이었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나와 내 조상들, 만나기 위해 수백만 은하의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온 이 사람들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나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아이의 신경이 가장 집중되어 반짝이고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헬륨으로 채워져 형광 빛을 반사하는 수많은 풍선들과 그리 가득 찬 하늘을 꿰뚫는 태양빛들이 마치 내 고향별, 먹구름 새 새어나오던 흰 빛처럼 그 세상을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먼지들의 구름 아래 별 안개처럼 풍성한 나 자신을 구부려 여린 빛이 스며 나오는 그 천체의 살아있는 표면에 맞닿았습니다. 그러자 서로 다른 행성들이 초신성에서 발사된 빛처럼 충돌하며 가스처럼 유영하는 대기의 한가운데 그것은 별안간 고개를 젖히며 아무 예고 없이 소리를 터뜨렸습니다.

미색의 술렁임을 부수고 행성을 뚫듯 빛을 꿰어 부수듯 흩어져나가는 음파는 나를 훑고 흔들며 마침내 그 이질적인 행성의 비밀 속으로 내 정신을 인도해가고 있었습니다. 폭풍을 타며 반짝이고 명멸하는 금 은빛의 실처럼 그 소리가 먼지로 이루어진 나의 몸을 흩어내어 행성 지구의 피와 살로 빚어갔습니다. 그 손으로 내 눈으로부터 안개를 걷어 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들의 별에 도착해 처음 만난 웃음이었습니다. 기쁨, 중심을 잡을 수 없는 다리를 써 휘청휘청 걸어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홀로 짧고 굳건한 다리로 땅을 받치고 선 그 존재를 통해 우주 처음 만난 자유였습니다.


안개가 걷혀가는 눈에 보이기 시작한 뙤양볕 아래 다른 빛/열 생명체가 그것을 데리러 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녀를 이끌어 갈 때에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안개를 모래로 변화해가고 있었습니다. 기체가 액체가 되고 표면으로부터 액체가 차차 고체를 향해 굳어가면서 나는 지구로 온 목적을 따라 다른 것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오가는 것을 보았으며 때로 몇몇은 나의 얇은 지구적 거죽을 강타해 액체를 흔들고 고체를 가르기도 했으나나 그때의 첫 접촉처럼 첫 웃음처럼 나를 화생시키지 못했기에 나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름 가지를 흔드는 바람처럼 이 별의 녹색 광합성 생명체처럼 그 자리에 서서 오존층을 꿰뚫은 채 쏟아져 내리는 무자비한 자외선을 양팔로 받들며 지구의 만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흡수하며 그 자리에 알맞도록 자라났습니다, 신이여.

그녀의 화안한 빛 덩어리가 내 눈동자 바깥 저편으로부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거추장스런 포장지와 지구에밖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들로 그 몸체를 감싸고 빛을 그늘로 하여 가리고 있었으나 그 핵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잠시라도 내 눈으로부터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지구의 생물이 되어가는 나를 역동하며 최초의 것으로 되돌려줄 법한 양방향의 불가해한 에너지 덩어리였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아직도 짧은 다리로 우아하게 균형을 잡으며, 그녀가 다른 흐릿하고 먼지 같은 열 생명체들을 지나쳐 나에게로 뛰어왔습니다. 그녀는 다른 수많은 작은 생명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주위를 뛰고 소리치며 되풀이해 돌았지만 나는 그녀의 육체와 상념 먼지 하나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그 태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분자 하나하나 나에게는 아스팔트를 스쳐가는 민들레 꽃씨처럼 불가해한 존재였습니다.

그녀가 내 머리카락에 닿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천천히 상체를 굽혀 그것을 그 손으로 하여 만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녀는 뺨을 스쳐 턱 아래까지 자라난 그 하얀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습니다. 나는 본래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녀는 그것을 있는 힘껏 답아 당기며 그 적당한 온도의 입김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내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나와 함께 가자. 같이 집에 가면?” 그녀의 손이 내 손가락 두 개를 몇 번 잡아당겼습니다. “여기는 서 있으면 눈이 머는 곳이야” “알고 있어.”

“그러나 너처럼 나도 눈이 멀지 않는 거야.” 나는 그녀의 손으로부터 서서히 내 손가락을 빼내며 손을 쓰지 않고 그 등을 떠밀었습니다. 그녀를 낳아 보호하려 하는 열 덩어리가 그 손을 끌어당겨 데려갈 때까지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잖아.” 내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


그리고 내가 지구에 온 이래 처음으로 에이치투오가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던 날 그녀가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이제 눈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지만 여전히 피부로도 세상을 볼 수 있었기에 나는 머리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무너뜨릴 듯한 소리로 쏟아져 내리는 폭우와 아스팔트로부터 아지랑이처럼 되올라오는 수증기 바다는 인간의 피부에 치명적이어서 편의점 앞 광장에는 그녀 이외 아무도 없었고 펼쳐진 사거리에도 머리를 신문지로 가리고 뛰어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으며 광활한 하늘 바다에도 (내가 이 별에 온 이래 처음으로)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비행선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다른 생물들에게도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는지 혹 잊고자 했는지 인류가 그들의 대피처로 데리고 가지 않은 나무들의 늘어지는 이파리는 그 수증기 가운데 녹아들어가고 새들은 비 가운데 은회색 하늘을 가로질러 썩어가는 나뭇잎 새로 떨어지듯 피해서 어차피 죽어야 할 머리를 움츠린 채 떨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그곳에 서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비에도 면역이라는 사실을 미처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그것은 인간들의 구실에 불과하였으며 이 세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내가 본 그녀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광장에 사람들의 전성기처럼 두 발 동물들이 흘러넘치리만큼 많았다 하더라도 수증기가 말라붙은 먼지를 녹여가는 낯익은 멸망의 풍경 한가운데서도 나는 그 빛 덩어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산, 필요 없지?” 이제 인간 여자 아이와 같은 모습을 한 그녀가 말했고 그 모습이 달라지고 원초보다 인간에 가까워졌다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모든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지하철에서 갇혀 더 이상 갈 곳 없는 바람 틈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봤어. 스스로의 숨을 막히게 하는 열기를 내뿜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들 가운데, 문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아이를 봤지. 그녀는, ”

“세상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눈을 감을 줄 알지. 그러나 너와 나는 멸망 앞에서도 눈을 감지 않는 사람들이야.” 사람의 귀였다면 내 말이 그녀에게 들리지 않고 그녀의 말이 내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어버린 바다가 그 내장을 뒤집어 내어 이 더러운 지상으로 남김없이 퍼붓듯, 장렬하게 쏟아지는 비가 한층 거세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은 점차 빗방울의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천이 울그러지며 녹아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가리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아.” 그녀는 우산을 들어 던져버렸습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고 그녀는 편의점 슬레이트 지붕을 부수며 떨어지는 여름 장마 속을 걸어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한 사람의 거리, 그곳에 멈춰선 빛의 소녀가 말했습니다. “시간이 되어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음 만남은……” “다음 만남은 멸망 앞에서.” 생명의 영혼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도시의 빈 사거리 가운데 한 뼘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사람들. 어깻죽지까지 흘러내려 물방울이 맺혀가는 내 하얀 머리카락.


“갑작스레 닥친 해일로 도시의 절반이 침수되고 수백만의 인명피해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곧 이차 해일이 다시 들이칠 것으로 예보되는 가운데 실종자의 수는 측정 가능치를 넘어서고 있으며…….” 고작 쓰나미가 닥친 것만으로 인간 문명의 잔재란 잔재는 전부 묻혀 있는 것처럼 되어버린 모래사장, 지직거리던 라디오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에 씻겨져 그리스 신전처럼 서 있는 편의점의 벽 아래 ㅡ저 멀리 바다 발끝을 핥는 반투명한 물결들에 이르기까지ㅡ 경사진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으며, 태어나지 얼마 안 된 하얀 모래들에 반쯤 파묻힌 이름모를 두상의 오른편 얼굴과 종이처럼 구겨진 플라스틱 쓰레기통, 자전거 핸들, 가로등 머리…… 내가 이 별에 와서 알게 된 이름들.

나는 죽음만큼 검으며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나의 거대한 낫을 지평선 방향 아직 남은 맑은 하늘의 편린을 향해 휘둘렀습니다. 나갈 데 없는 지하철 환기구와 공기가 사라져가는 대피처에 갇힌 사람들, 동물들을 가두어 놓던 곳으로부터 뛰쳐나와 그들의 학대자들을 가릴 것 없이 학살하던 불완전한 야수들이며 도시의 거리란 거리를 가득 채운 가죽 커버의 차들에 이르기까지. 그 먼 거리에서 어느 다른 세상의 환청처럼 들려오던 그치지 않는 클랙슨 소리들과 앞을 보지 못하며 거리를 누비는 공포의 비명과 외침들이 사라지며 이 세상에는 나의 별, 내가 기억하는 그 고향의 소리와 동일한 고요함이 남았습니다. 나는 멸망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내가 알 수 있었던 미래의 유일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달랐던 것은 이 대기에는 바람의 가벼운 손길과 여름이라 불리우는 시간의 고동, 그리고 그녀의 숨소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나의 손으로부터 자라나 그들이 내게 들려주었던 낫, “오로지 내가 멸망이니 이런 것은 필요하지 않아”, 나는 그것을 수평선을 향해 던져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위해 주조된 사차원의 무기는 지구의 아름다운 전설처럼 바다거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무대 배경이나 마이애미 하늘처럼 묘하게 현실감이 결여된 그 반구ㅡ 숙성하여 풍화된 우윳빛 구름들이 옛 서양 전설 속의 성들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라. 그 나라를 반사하면서 동시에 해왕성의 알리파를 연상시키는 맑은 물결들 가운데 나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가서ㅡ 와락 껴안았습니다. 여름, 갑자기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 나의 바람. 그 멈춰진 시간 가운데 오존 구름을 뚫고 비치는 최후의 장렬한 태양빛이 우리들을 물들여 갔습니다.

그녀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물결 아래까지 훑고 내려간 하얀 머리카락과 빛에 막힘없이 꿰뚫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형체 없는 얼굴, 얼굴. 망막을 잃어버린, 아니 처음부터 갖지 않았던 눈동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첫 사신은 오직 그녀를 통해 형체를 얻고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해했습니다. “나는 첫 번째야.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올 거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보다도 나 자신보다도 익숙한 그 또렷한 윤곽의 얼굴, 코, 입, 턱 그리고ㅡ 세상이 타오르듯 붉은 눈동자. “여름은 여름, 바람, 그리고 무한한 시간…… 나와 더불어 세상은 멸망한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여름이 남아있지 않아. 그러니,”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우리와 함께 여름은 멸망합니다. 그러니 후세인들이여, 붉은 먼지에 얼룩이고 소란으로 뒤범벅된 가짜 여름을 볼 때면 기억하소서. 한때 그녀와 내가, 여름이 이곳에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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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워커 초청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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