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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이야기 하나

2005.10.29 18:1010.29

drwk.com오늘 같이 세시아 여신의 숨결이 살아 있는 보름이면 저는 창가에서 작은 리듬으로 흔들의자를 움직이곤 합니다. 삐걱삐걱 이는, 나무와 나무가 내지르는 비명이 가끔은 소름끼칠 때도 있지만, 요즘은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고는 하지요. 따듯한 세시아 여신의 숨결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마저 넉넉하고 아득하게 해 버리는 힘이 있으니까요. 마치 할머니의 품처럼 말입니다.

세월의 가루가 솔솔 뿌려진, 하얀 머리를 곱게 묶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나 모르겠군요.

[해가지고 달이 뜨지 않는 밤에는 밖을 나가면 안 된단다. 나직이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기우려도 안 된단다. 만약 그 소리를 따라가게 된다면, 다시는 이 할미를 볼 수 없을게야.]

어릴 적, 바람이 몹시도 심하게 부는 날이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저에게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시던 할머니의 말씀입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니라 쿠멜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누가 노래를 부르나요?]
[그는 말이지, 절대로 태어나서는 안 될 세시아 여신의 아들이란다.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인간세상으로 버림받았지. 그래서 달이 뜨는 밤에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꼭꼭 숨어 있다가도 여신이 잠든 밤에야 몰래 세상에 나온단다.]
[여신이 잠든 밤에 만요?]
[그래, 그래서 여신님의 축복을 받은 여자 아이들을 잡아가는 거란다.]
[정말요? 정말이에요 할머니?]

훗! 지금 생각해 보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시던 할머니의 표정이 더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온 밤을 뒤 흔들기라도 하려는 듯, 매번 듣던 이야기에도 엉엉 울어 버렸던 것을 보면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오늘 같은 밤이었던 것 같군요. 마치 세시아 여신이 현신한 것 같은 모습의 그를 만난 것이 말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아름답고 다정했던 그 말입니다.

[꼬마 아가씨! 왜 그렇게 울고 있나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인, 엉망이었던 저의 얼굴을 보드라운 손길로 닦아 주었더랍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왜 그리도 슬퍼 보였을까요? 그러면서도 작음 몸을 휘감고 있던 저의 슬픔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던 그가 왜 그리도 커 보였던 걸까요?

[할머니가…할머니가… 으아앙]

말을 맺지 못하고 터뜨린 울음에도 지우지 않던 그의 미소가 생생합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할머니는 세시아 여신의 품에서 편안한 잠을 자고 있을테니까요. 그러니 울음을 그쳐요. 자꾸 눈물 흘리면, 할머니도 슬퍼서 울지도 모르잖아요.]

신비한 마력이 느껴지는 그의 음성. 나도 모르게 울음은 그쳤지만, 여전히 눈물은 목소리에 남아 그의 이름을 묻는 말에 고스란히 묻어 나와 버렸었지요.

[흑…아저씨 이 크윽…름은 뭐에요? 어떻게…할머니가 세시…아 여신님께 가…걸 아시는 거에요?]
[저에겐 아직 이름이 없답니다. 누구도 저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으니까요.]

뭐랄까, 잠시 동안 그의 큰 눈에서는 슬픔의 빛이 어렸었지요. 하지만 이내 처음과 다름없는 미소가 돌아와 있었더랍니다.

[저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겠어요?]

아이의 단순함이었던 걸까요? 그의 한 마디에 저는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름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을 고르고 있었으니까요.

[세시아!]

저도 모르게 나와 버린 여신님의 이름! 그의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에 그만 키득이며 웃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여신님께서 내려다보시는 곳에서 그분의 이름을 저에게 지어 주시는 거예요?]
[피! 그치만 그 이름이 아저씨랑 가장 잘 어울리는 걸요.]
[그래요…]

그는 한동안 말없이 여신님을 바라보았었지요. 그의 눈빛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이지? 또 여신님은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셨는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변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정말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단 한순간의 기억이라는 것이죠.

[괜찮다면 저랑 같이 놀지 않겠어요?]
[그치만…]

그런 말이 있잖아요. ‘중요한 순간엔 마법에 걸리게 된다.’라는…. 저 역시 그 말의 진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습니다. 마법의 공식처럼 어디서 불어 온 바람인지도 모를 흐름에 그의 흑단의 머리가 날리고, 그 속에서 깊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슬픔을 노래하고 있었으니까요. 손만 뻗으면 당장이라도 옷깃을 잡을 수 있는 거리인데도, 왠지 아주 먼 곳에 있는 듯한 사람. 너무 외롭고 슬퍼 보여서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투명한 존재.
그랬습니다. 좀 전까지 울고 있던 것은 저였고 그런 저를 위로하던 그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를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저 하나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외로워서 새들이 잠이 든 늦은 시간까지도 잠들지 못했던 그를, 작은 품이라도 꼬옥 안아 주고 싶었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는 나에게 그는 빙그레 미소 지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늘고 긴, 하얀 손으로 제 눈을 가려버렸지요.

[속으로 열까지만 세세요. 그리고 눈을 뜨는 거예요. 자아, 하나…]

눈을 감고 수를 세어 봅니다. 하나, 둘, 셋…, 열.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떠 봅니다.

[와아!]

세상은 온통 반짝이는 반딧불 같은 별들로 가득합니다. 군데군데 잡초가 자란 오래된 오두막집 앞에서 있었다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서 있는 곳이 까마득한 하늘 위라는 것도 그때는 중요하지 않았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작은 반짝거림으로 가득했었으니까요. 세상의 온갖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작은 빛들로 가득한 공간이 저의 넋을 쏘옥 빼내어 갔으니까요.

그가 펼친 손 위로 작은 빛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 쌓이고 싸여서는 끝내는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빛 무리를 그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무덤덤하게 짓궂은 말을 했었지요.

[세상의 모든 별을 훔쳐 버린다면 세시아 여신이 화를 낼까요?]

‘세시아 여신님이라면 다음날이면 훔친 별들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을 거예요.’

그때는 왜 이런 대답을 못했었을 까요. 토끼눈 마냥 둥근 눈을 하고서는 어버버 거리던 저였습니다. 풋! 웃음이 나옵니다. 아마, 그도 그런 저의 바보 같은 모습이 재밌었던가 봅니다.

[하하하하, 농담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세시아 여신님의 것을 훔칠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되요. 그런 놀란 눈을 하고 있으면 다음부턴 농담을 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렇지만 세시아 여신님의 아이를 훔치는 사람은 있데요.]
[네?]

빛 가루를 세상에 뿌리던 그가 멈칫하고서는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물끄러미 절 보는 모습에 어깨가 우쭐해지는 것 역시 아이이기 때문이었겠지요.

[여신님이 버린 아이가 있는데, 여신님도 잠이 드는 밤이면, 여신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여자아이들을 홀려서 데려 간데요. 할머니가 그랬어요.]
[…그래요. 당신은 그를 만나본적이 있나요?]
[아니요. 전 절대로 달이 뜨지 않는 밤에는 밖에 나가지 않는걸요. 전 축복받은 날에 태어 났데요. 여신님이 가장 아름다운 보름달이 뜨는 밤에, 여신님의 축복을 받으면서요. 그래서 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는걸요. 여신님의 아이가 보고 싶었지만, 제가 그를 따라가 버리면 다시는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볼 수 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의 따뜻한 손이 제 눈가를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살며시 절 그의 품에 안아 주었지요. 다시 할머니가 생각나 버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려 낼 것 같은 저를, 그는 조용히 안아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었습니다.

[세시아 여신님의 ‘황금 마차’를 끄는 ‘달새’를 본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는 조용히 ‘달새’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을 하며 설명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여신님의 새를 말이죠. 그리고 그 새가 사라지게 된 이야기도 말입니다.

[달새의 깃털은 작은 반짝거림으로 장식되어 있답니다. 색이 없는 투명한 깃털위에 무수히 많은 작은 빛들이 반짝이고 있지요. 저기 하늘에 보이는 별님들이 보이지요! 사람들은 그저 저 작은 빛들이 모두 별님인지 알고 있지만, 그 중에서 유독 아름답게 반짝이는 빛들이 실은, 달새의 깃털에 갇혀 있는 빛들이랍니다.
달새가 그의 상징과도 같은 깃털을 뽐내며 날개를 활짝 펼칠 때면, 세시아 여신님은 밤의 유희를 즐기시지요. 가끔은 자신의 딸들을 옆에 태우고는 세상이 고요 속에 잠든, 평온의 세계를 달리고는 한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깃털을 가졌으면서도, 여신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달새는 언제나 마음 한 켠이 슬펐답니다. 여신님의 아이면서도 언제나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는 한 아이가 마음에 걸려, 너무도 슬픈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고는 했지요.
여신님과 같은 황금빛이 너울거리는 금발을 갖지 못하고 태어난 여신님의 아이는, 항상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숨어 지냈답니다.
그리고는 몰래몰래 밤의 유희를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만을 보곤 했었지요. 많이 외로웠던 걸까요? 아니면 여신님의 품이 너무도 그리워던 걸까요? 어느 날, 아이는 자신도 여신님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겠노라고 먼먼 여행을 떠나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아이가 사라진 것을 슬퍼하지 않았지요. 누구도 아이를 찾아보겠노라 떠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달새는 무척 상심하고 말았지요. 아이의 걱정에 한 숨도 자지 못하고, 그 멋진 날개를 펼치지도 못한체로 점점 야위어 갔습니다.]
[그래서 달새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저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났던 것은 왜 였을까요? 그가 지어보이는 따뜻한 미소에서 그리움이 묻어나던 것은 저의 착각이었던 걸까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말없이 닦아주던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었습니다.

[달새는 아이를 찾아 여신님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동안 야윈 몸을 힘겹게 들어 올려 힘껏 날개를 펼쳤지요.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던 빛들을 별님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답니다. 아이가 가 버린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름다운 빛을 가진 날개는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평범한 한 마리 새이면 충분했으니까요.]
[달새는 여신님의 아이를 찾았나요?]
[네, 달새는 아주 오랜 세월을 날고 날아 어느 보름달이 뜬 밤에 아이를 찾았답니다. 하지만 여신님의 곁으로 돌아가자고 말할 수가 없었답니다.]
[왜죠?]

지금도 궁하군요. 그때 그가 대답대신 저에게 보인 침묵이 무엇이었는지 말이에요. 한동안 제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다, 한겨울 차갑게 얼어버린 시린 보름달 같은 미소만 보여주던 그의 침묵이 말입니다.

[그냥, 그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는군요. 여신님의 곁에서는 행복할 수 없었지만, 다시 찾은 아이의 눈동자엔 행복이 담겨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함께 돌아가자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아이도 여신님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올 테니, 그때까지 아이의 곁에 머물면서 기다리기로 결심하면서 말이에요.]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의 기억은 말이에요. 하나 둘 셋.... 세었던 마법의 주문에 걸려버렸던 것처럼, 깨어질 듯하던 그의 미소가 사라지던 순간, 저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오던 것은 익숙하던 아침의 풍경이었습니다.

잘 잇대어 놓은 오래된 통나무집의 다락방, 창가에서 알람처럼 수다스러운 참새의 노래, 키 큰 잣나무가 추는 춤사위, 이른 아침 부지런한 목동의 피리소리도 모두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좀 전까지 보았던 별님들의 반짝임도, 그의 손안 가득 넘쳐나던 빛가루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려주던 슬픈 달새의 이야기도, 모두가 제 꿈이었던 걸까요?
가까이 있으면서도 결코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존재였던 이유가 꿈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후후,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직 어릴 적의 꼬마였던 때, 이미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 말입니다. 여신님의 아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모습을 꼭 닮아 버린 지금, 그날처럼 여신님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보름달이 뜬 밤에나 문득 떠오르던 이야기 말입니다.
흔들의자를 조심스레 흔들며 가슴께로 조각조각 기어 맞춘 담요를 끓어 올려서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처럼 나직이 수를 세어보면서 말이죠.

“하나, 둘, 셋,…….”

눈을 뜨면 그가 환한 미소를 짓고 나를 반겨 주겠지요. 손 안 가득 행복으로 가득한 고운 빛가루를 담고 말이에요. 그리고는 그동안 듣지 못한 달새의 이야기도, 여신님의 아이의 행복한 날들도 모두 들을 수가 있겠지요. 아아, 어쩌면 그의 슬프지도 차갑지도 않은 정말로 행복한 미소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시아! 제가 지어준 그의 이름,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말하는군요.

[자, 눈을 감고 열까지 세어보는 거예요. 여신님의 곁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거예요. 당신의 할머니도, 여신님의 아이도 모두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달새가 빛을 가둔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펴서는, 모두를 황금마차에 태워 아름다운 밤하늘을 날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저와 함께 마법의 수를 세어 보는 거예요.]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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