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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wk.com밀턴의 실락원을 보면 아담이 신에게 울분에 찬 통곡을 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이 구절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한때는 외우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전 우연히 친구에게서 선물받은 실락원을 훑어 보다가 어리둥절해 졌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부분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번역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무렵 반장난 반공부삼아 구입했던 실락원의 원서에서 내가 밑줄을 죽죽 그으며 외웠던 그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번역의 오류인가 싶어서 혀를 차고 넘어갔는데 그런 문제가 아님이 뒤로 갈수록 확실히 들어났다. 분명 내가 알고 있던 내용과 미묘하게 다른 노선으로 이갸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엔딩장면은 너무 쌩뚱맞아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외삽한 느낌이었다.(실제로는 단지 몇 단어만 바뀌어 있었다.) 나는 책장에 오랬동안 쳐박혀 있던 실락원의 원서를 찾아내 두 글을 비교하며 차근차근히 바뀐 번역 부분을 체크해 보았고, 의도적으로 번역이 잘못됬다는 확신을 얻었다. 아주 교묘하게 글자를 바꿔놓아서 언뜻 보기에는 원본가 같아 보였지만, 실상 작품에서 받게되는 이미지가 전혀 달라지게 중요한 분기점의 내용들이 변이되 있었다. 나는 너무 화가나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번역자의 연락처를 얻을수 있었다. 명문대 전직 교수라는 양반은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어리둥절해하곤 오히려 나의 번역이 형편없어서 그런 오해를 한것이 아니냐고 매도했다. 그 말에 격분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원서의 몇몇대목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에게 따졌고, 그는 곤혹스러운듯 놀라며 직접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철저하게 사실을 따지기 위해 두 책자의 차이점을 정리해두고 그를 만나러 나갔다. 인사동 뒷골목에 있는 귀천에서 원서를 받아든 K교수는 수십분간 원서에 푹 빠져있었다. 그동안 나는 모과차를 마시며 주위에 구비돼 있는 시집을 슬쩍 훑어보았다. 시를 다 읽고 할일없이 시집 뒤에 붙어있는 출판사의 다른 작품들 목록들을 훑어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때 K교수는 어처구니 없다는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나에게 원서를 돌려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새것처럼 깔끔한 원서를 꺼내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 원서를 받아들고 내가 체크한 부분들을 확인해보자 K교수가 준 원서의 내용은 그의 번역본과 일치함을 알수 있었다. 내 양쪽에 놓여있는 두 원서는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밀턴의 실락원이 두가지 버전으로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나의 이러한 의문을 눈치챈듯 K교수는 설명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원서는 가짜였던 것이다. 외국에서는 원작의 내용을 일부 편집한 이미테이션을 마치 원작인것처럼 꾸며서 파는 약간은 장난스러운 일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설핏 봐서는 처이점을 발견할수가 없어서 심지어 두가지 내용을 모두 본 사람이 그 두 책의 차이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해프닝을 기분 좋게 받아 들인듯 대수롭지 않은 장난에 말려든 것이라고 웃으며 나를 위로하고, 그 정식 실락원 원서를 선물하고는 자리를 떴다. 하지만 나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약간의 황당함과 어이없음 이었던 감정이 미묘하게 전이된 것이다. 가짜를 읽고 느꼈던 전율을 원본에서는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짜만의 기묘한 매력을 나에게 전달했다.  
그날 이후 매일같이 서점을 뒤지며 그런 가짜들을 찾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중노동 이었다. 그야말로 활자의 지옥 이란게 있다면 바로 그러할까. 겉모습만 봐서는 구분할길이 없기에 결국 같은책을 몇권이라도 읽으면서 찾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은 우연히 발견한 파본에 미친놈처럼 기뻐하다가 출판미스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몇일간 회복 불능에 빠질 정도로 실망하기도 했다. 결국 7개월이 지나서야 카프카의 변신 위조판을 찾을수 있었다. 그 후로는 점점 요령에 가속도가 붙어서 한두달에 1권씩은 꼬박 발견해 낼수가 있었다. 14번째 위조판인 엠마뉘엘 카레르의 겨울아이를 읽으며 바뀐 부분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그 즐거움에 빠져들고 있었을때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찾아낸 위조판들은 전부 한가지 동일한 표시가 숨겨져 있던 것이었다. 책표지나 속지 혹은 본문내용속에 교묘하게 CP를 닮은 기묘한 문자가 써있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찾아낸 위조판들은 결국 한 인물, 혹은 한 조직의 손을 거쳤다는 증거가 될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후 한동안 내가 음모론에 심취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그 뒤로는 거칠것이 없었다. 내용을 확인할 것도 없이 표시가 숨겨져 있는 책자만 골라내면 되는 것이었으니 작업은 한층 수월해 졌다. 표지와 속지에 숨겨져 있는 표시만 찾았기 때문에 본문에 표시를 감춘 책들은 구별해낼수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몇배는 많은 위조판들을 찾아낼수가 있었다.
그렇게 3년쯤 지나자 내 서재의 한쪽에는 똑같은 책들이 전부 2권씩 구비되어 있었다. 하나는 정식 원서였고, 다른 하나는 그에 쌍이 되는 위조본(나는 이것을 CP페이퍼라고 불렀다.) 그쯤되자 위조본들에 대한 집착을 덜어낼수가 있었다. 나의 생활은 다시 정상적인 리듬으로 돌아간 것이다. 가끔 서점에 들려 책을 읽다가 CP의 표시를 찾아내는 경우가 있었지만 굳이 사야겠다는 충동이 들지는 않았다. 단지 그런 책들을 발견하게 되면 정식 원서를 구해 총 2번 읽기는 했다. 그러다 느긋한 마음으로 알지 못하는 국내작가의 소설을 읽던 중이었다. 책중 중간 에피소드를 구분하는 마침표가 찍히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문맥을 놓친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한번 만독해 보았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찾아낼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고 무심코 넘어가려 할때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마침표의 모양들이 기묘하게 엮여 CP의 표시를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또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까지의 CP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국외에 국한된 것이었고, 결국 원서를 통해서만 볼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발견한 표시는 CP의 활동이 국내에까지 확장되었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것은 내가 직접적으로 CP와 접촉할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발견되는 작품들의 페턴을 분석해보면 공통점을 찾아낼수도 있을것 같았다. 의외로 일은 쉽게 풀려 나갔다. 출판되는 책자중 몇권들만 다르게 인쇄될수는 없는 법이었고, 결국 중간에 책을 바꾸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을 터였다. 몇몇 서점을 뒤진 결과 그 포인트는 쉽게 찾아낼수 있었다. 내가 발견한 위조가(사실 일종의 범죄행위라고 할수 있겠지만 그렇게 까지 유도하고 싶지는 않다.)는 어린 여대생이었다. 이런 일에 가담했을 만한 인물에 대해 나는 수없이 상상해 왔지만 이제 막 소녀를 벗어난듯한 여대생이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나는 많이 놀랐다. 잠시 상념을 정리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은밀하게 말을 걸었고, 잠시 치한으로 몰렸다가 사정을 설명할수 있었다. 의외로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민감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단순한 장난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고, 그리 큰 문제로 치부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비밀스러운 CP의 표시에 어느정도 신비한 조직을 상상해 왔는데 그녀는 그런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삭제시켰다. 나는 약간 당황하며 그녀에게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물었고,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는듯 했다. 곧 그 세대다운 경박함과 쾌활함의 중간쯤에 위치한 표정으로 원작 소설을 결말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내용으로 바꿔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천연덕 스럽게. 나는 황망한 웃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 일에 대해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어느세 나의 마음은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아무리 뛰어난 글이라고 해도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뜯어 고치고 싶은 욕망이야 독자로써 가질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CP는 그런 욕망의 너무나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간명한 표출이었다. 단 한장면, 단 한구절만 조금 더 세련되고 유려하게 바꾸는것은 작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은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지만 작품의 완성도를 극대화 시킬수 있는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독자로써 명작의 아주 조금이나마 자신의 열정을 보탠다는것은 더 없는 기쁨일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끈질기게 나의 머리속을 점령해갔다. 한참을 뒤척이던 나는 서재에게 가 폴 오스터의 뉴욕삼부작을 꺼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재독하며 거슬리는 부분에 줄을 긋기 시작했다.



이제 너는 이 책을 덮는다. 그리고는 한동안 옆에 치워둔다. 그러다가 가끔씩 드는 약간은 우스운 호기심에 혼자 슬그머니 웃다 어느날 장난스럽게 속지를 들출 것이다. 그리고 너는 선명하게 찍혀있는 CP의 표시를 확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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