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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to@hanmail.net

  '그러니까,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아.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아무리 원한들 일어나지 않을 테고,
  일어날 일은 어차피 아무리 바라지 않아도 일어나버릴 테니까.'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한 뒤 뺨을 잔뜩 부풀린 채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그녀의 세모난 손톱에 닿은 테이블 유리는 톡, 탁, 톡 약간 초조하게 우는 소리를 냈는데 그녀의 변덕스런 공상에 반응을 하는지 점점, 경쾌한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건, 급조한 이미지야.'
  그녀는 길거리에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앉은 커피숍의 창가 자리, 창밖으로는 4차선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성급하게 고함을 지르며 달리고 있었고, 가련한 가로수의 나뭇가지들은 전선에 걸린 채 바람 따라 힘없이 떨고 있었다. 낙엽들이 팔랑, 주홍색 보도블록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르골 위의 인형들처럼 두 손을 붙잡고 뱅글뱅글 돌아가던 소년과 소녀는 거리 구석에 쌓아놓은 플라타너스 낙엽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황금빛 발자국은, 발자국은.

  그녀는 이쯤에서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너무 뻔하고, 재미없는 공상이다. 춤을 추는 소년과 소녀. 가을낙엽들과 종로 거리. 바람은 불고, 하늘은 높고, 낙엽들은 쌓이고, 사람들은 종종걸음 치고, 자동차들은 화를 낸다. 그리고, 쓸모없는 영상에 눈이 묶여버린 새에 커피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다시 시작한다.

  한 소녀는 다리를 절고 있다. 소년은 소녀의 가느다란 한쪽 다리에 찔리기라도 한양, 가슴 한 켠이 아주 아프다. 사람들은 바쁘게 지나간다. 일생,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듯, 그들의 자세와 몸가짐은 맹신적이기까지 하다. 그 빠른 물결 사이에서 소녀는 여기 저기 부딪히고 치인다. 겨우 담벼락 쪽 가로수 뒤에 작은 몸을 숨기고, 떨어트린 목발을 찾기 위해 울상을 짓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다.
  '나는 지지 않아. 내가 울 줄 알고? 나는 절대 지지 않아.'
  소리 내어 말한 모양이다. 사실 소녀는 정신을 놓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던 것이다. 물론, 거리는 출근시간이 지나 한산해졌고, 소녀는 그 한 자리에서 마치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주욱, 서 있었던 것이다. 억울한 사연을 안고 그 자리에 돌이 되어버렸다는 어떤 민화나 전설 속의 여주인공처럼. 목발대신 매연에 까맣게 때 탄 가로수를 부여안고.
  소년은 그 거리에 새벽부터 벤치에 누워있었다. 소년은 사실 별을 찾는 사람이다. 그것을 직업으로 할까, 고민 중이었다. 도시의 그 어느 곳에도 별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발이 아팠고 숨이 막혔다. 소년 역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참았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울 때가 아니야.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어. 아직은. 아무 것도.'

  시간은 물살처럼 흐르고
  소년은 소녀를 발견한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숨이 멎을 것처럼 심장이 아프다. 왜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다 자라지 못해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소녀의 한쪽 다리. 문득, 소년은 소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지지 않아. 내가 울 줄 알고? 나는 절대 지지 않아.'
  소녀는 자기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내뱉은 말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다. 자신은 여전히 가로수를 붙들고 있고, 옆 도로에는 아득한 소리를 내며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있다. 그리고…

  그리고, 앞에는 허름한 재킷의 낡은 신발을 신은 낯선 소년이 자신의 눈 속을 바라보고 있다.
  소년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소년이 가까이 오라고 부드럽게 손짓했기 때문에 소녀도 엉거주춤한 자세를 바로 하고 가로수 밑에 주저앉았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시시껄렁한 질문을 하고, 소근대다가 조그맣게 웃기도 했다. 소년은 소녀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소녀는 소년의 낡은 신발에 동질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여기, 지금, 이렇게, 넓은 4거리 위에서 소년과 소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 중에 이두 사람만큼 그렇게 잘 통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깨달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소년과 소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곳에 뭐하러왔니?”
  “잘 모르겠어. 나, 뭔가를 찾고 싶은가봐.”
  “목발?”
  “그건, 잃어버린 거고… 뭔가 새로운 것 말야.”
  “그럼, 같이 별을 찾으러 갈래?”
  “내 목발을 돌려받으면.”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눴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연인들의 대화는 제3자에게 있어 이해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던가.

  소녀의 뺨은 사과처럼 붉다, 소년은 털모자를 벗어던지고 소리 높여 웃는다. 소년이 한쪽 팔로 소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지탱해주었기 때문에 소녀는 굳이 목발이 필요 없겠다, 고 생각했다. 둘은 오르골 안에 들어있는 인형들처럼 뱅글뱅글 돌며 춤추기 시작한다. 세계가 그들의 주위를 공전하기 시작한다. 비로소, 살아있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들의 작은 오르골 같은 세계, 아름다운 노랫소리 울려 퍼지고, 그들은 하나의 별(행성)이 되어 자전을 계속한다.one step, two step, three step!

  빛살처럼 흔들리는 그들이 낙엽들이 잔뜩 쌓인 ‘낙엽 산속’으로 발을 옮기고, 그들의 황금빛 발자국들은, 발자국들은.

  어느새 쏟아지는
  푸르고 창백한 달빛 사이로 조각, 조각 흩어져서
  사라졌다더라.

  어젯밤은 별똥별이 쏟아졌던 날,
  아침에 읽은 기사를 떠올리며 그녀는 다 식은 커피를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것이다.

  생명을 잃고 다른 세계로 떨어진 별 한 쌍이 어떻게 새롭게 반짝이기 시작했는지,
  왜 별들이 날마다 새롭게 떠올라 밤하늘을 수놓을 수 있는 건지
  그것은 우연이 만들어낸 변증법,
  항상 새롭게 떠오르는 별처럼 신비한 일,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우주 복고 로맨스!

  fin.
  '宇宙 復古 Romance' first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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