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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반복구간

2008.09.26 23:3009.26

1.건조한 열기와 미적지근한 잠의 기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에 월터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정오의 타는 듯한 흰 광선이 작은 벌침처럼 안구에 박혀왔다.
골짜기 쪽에서 메마른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어제와 똑같이 모래 한 알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황야가 빛바랜 초록과 갈색이 뒤섞인 채 게으르게 누워 월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킨 뒤 기지개를 켜는 사내의 등 근육이 잠시 경련하듯 떨렸다. 20대 중반의 유연하고 강인한 육체 주변으로 긴장감이 흘렀다.
갈색의 속눈썹에 둘러싸인 녹색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월터는 저 멀리 움직이는 얼룩덜룩한 무리들을 찬찬히 살폈다. 소 떼를 살피는 건 그가 쓴 카우보이모자나 부츠, 무거운 올가미 줄, 장갑과 함께 단단하게 들러붙어 있는 친숙한 행동이었다.
가장자리가 불규칙하게 찢어진 펼쳐진 가죽 같은 소 떼들은 사실 신경 쓸 것도 없었다. 그것들은 그저 하루 종일 풀을 우물거리고 다시 게워 씹는 걸 반복했고 긴 꼬리로 윙윙거리는 파리를 쫒아 내거나 뿔 주변을 나무 둥치에 비빌 뿐이었다.
월터는 한숨을 쉬며 다시 나무 그늘 아래 몸을 기댔다. 물병의 물을 몇 모금 삼킨 뒤 아까 조각하던 나무토막과 칼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대충 모양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소와는 다르게 어쩐지 양과 비슷해지고 있었다.
‘양이나 소나 몰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이걸 다 끝내면 오스틴을 만들어 볼까...’
오스틴은 검어 보이는 짙은 갈색의 윤기 흐르는 몸을 지닌 월터의 말이었다. 온순한 성격에 재빠른 다리, 위험을 감지하는 예민한 성격 등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짐승이었다.
지평선 끝에서 작게 먼지바람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바삐 손을 움직여 나무를 깎아 내며 월터는 흘끔흘끔 하늘을 살폈다. 내일은 날씨가 나쁠 것 같았다. 어쩌면 지독한 마른 폭풍이 올지도 몰랐다. 그것은 작은 규모의 회오리바람으로 번개와 시커먼 흙먼지를 동반하곤 했다.
‘검은 송곳’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존이었다. 월터는 지금쯤 흔들의자에 앉아 졸고 있을 자신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입 꼬리를 약간 들어 미소를 지었다. 그 늙은 남자에 대한 연민과 요즘 들어 부쩍 연약해진 육체를 생각하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늙은 고양이처럼 군단 말이야. 어제 무릎 찜질을 해주면서 보니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이 가죽만 남아 있었어. 하긴...할아버지는 올해로 82세나 됐으니까.’
월터는 손을 멈추고 무미건조한 황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간의 초조함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이 그의 얼굴에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무 조각은 이제 약간의 손질만 필요한 듯 보였다. 월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를 털고 자신의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쓰고 오스틴의 안장을 점검했다. 그는 오늘 읍내로 나가 한 달 치의 식량과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들을 살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소 떼를 살핀 후 월터는 말을 몰아 언덕을 내려왔다.

두 시간 가량 말을 달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도 지나버려 햇빛은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었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목에 두른 스카프로 대충 닦으며 월터는 식료품  점으로 말을 몰았다. 오스틴의 옆구리가 불룩거렸고 후줄근하게 지친 짐승을 달래며 고삐를 물통 앞의 기둥에 묶었다.  
모자를 벗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다소 서늘한 기운에 그는 비로소 크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가게 주인인 조셉의 퉁퉁한 실루엣이 카운터 쪽에 어른거렸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여어’라며 친근하게 월터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20대 중반의 월터는 그가 지금껏 알고 있는 사내들 중 가장 잘생긴 녀석이었다. 우뚝한 콧대와 날렵한 턱선, 움푹 들어간 눈매와 함께 어딘지 우울한 초록색의 눈은 타인의 시선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잡아끌었다. 하지만 조셉이 좋아하는 것은 월터의 외모도 외모였지만 우직하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오늘이 정확히 4일인가 보군. 네가 올 줄 알고 미리 식료품을 담아 놨다. 이 중에 빠진 게 있으면 얘기해라.”
“이거면 됐어요...음, 아무래도 관절염 약은 한 병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요즘 들어 할아버지가 부쩍 힘겨워 하셔서...”
“그래, 알았다. 여기....이거랑...담배는 어떠냐?”
월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은 담배 10갑이 들은 종이 상자를 약과 함께 봉투에 넣었다.
“소 떼는 어때? 요즘도 밤마다 늑대가 몰려오냐?”
“아시잖아요? 그것들은 결코 지치지 않아요. 몇 번이나 고생해서 키운 개를 물어 죽여 버리고 독이 든 먹이도 소용없었어요. 하지만 꼭 이맘때부터 시작해 한 달간만 나타나니까 그나마 다행이긴 해요. 안 그랬으면 소 떼들이 남아나지 않을 걸요.”
“그래, 그렇게 되면 늙은 존 할아범이 네 엉덩이를 불이 나게 걷어차 줄 거다.”
“그랬다간 할아버지 다리가 먼저 부러질 걸요.” 월터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조셉은 한동안 월터와 소소한 얘기를 주고받은 후 문득 깨달은 듯 시원한 맥주 한 병을 꺼내 그에게 권했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과 함께 눈앞의 청년이 굉장히 목말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월터는 사양하지 않고 단숨에 그것을 들이켰다. 씁쓸한 거품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먼지들을 씻어 내렸다.

기분 좋게 식료품점을 나선 월터는 오스틴의 안장에 매달려 있던 가죽 주머니에 식료품을 담았다. 그는 말고삐를 부드럽게 잡아끌며 잡화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화약의 쏘는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깡마르고 키가 큰 게리가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월터를 아는 척 했다. 그는 새로 들여온 엽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가죽위에 놓인 여러 가지 길이의 가느다란 쇠막대와 천조각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월터의 눈길이 그 총 위를 한참동안 맴돌았다. 미끈한 총신과 개머리판에 붙어 있는 황동색의 쇠붙이 판은 멋지게 음각된 말로 장식되어 있었다.
게리가 비죽이 웃음을 띠며 월터를 쳐다봤다. 장난감을 발견한 꼬마 녀석과 똑같았다. 아마 몇 분만 더 자신이 총을 만지작거린다면 살게 분명했다.
“...그래, 뭘 사러 왔냐? 엽총탄이 다 떨어졌나?”
“네...늑대들이 몰려와서 요즘은 총알이 많이 필요해요.”
월터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게리는 뒤돌아서서 벽장에서 작은 종이 상자들을 꺼내 카운터에 쌓아 올렸다.
“다른 건?”
게리는 빙글거리며 슬쩍 손질하던 엽총에 눈길을 떨어뜨린 후 월터를 바라봤다.
“.....총은 있어요. 더 이상 샀다간 존이 제걸 벽난로 부지깽이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월터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시선은 계속 그 엽총 위를 맴돌았다.
“이봐, 이건 보통 엽총이 아니야. 사정거리가 엄청나게 길어진데다가 연사 속도가 기존의 두 배 이상이야.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게 해주지.”
월터는 잠시 동안 고민했다. 사실 지금 가지고 있는 총들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요 며칠 늑대의 습격에 써 본 결과는 참담했다. 50발도 넘는 탄환을 낭비하며 잡은 게 고작 늑대 한 마리였던 것이다. 사격솜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월터로서는 화가 날 일이었다.
‘작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래, 같은 총으로 일곱 마리 정도는 잡았잖아.’
갑자기 소독용 알콜 냄새가 느껴졌다. 월터는 멍한 얼굴을 찌푸리며 갑자기 멍해진 머리를 흔들었다. 어지럼증과 함께 강렬한 토기가 느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넘어오는 위액을 억눌렀다. 게리가 긴장한 얼굴로 굳어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증세는 잠시 후 사라졌다. 월터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가를 훔쳤다. 게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말 없이 나무로 만든 엽총 케이스를 꺼내 총을 분리해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쪽 눈썹을 치켜들며 눈을 찡긋하더니 총알 몇 상자를 케이스 위에 올려놨다.
월터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냈다. 검은 줄을 잡아 끄른 다음 게리가 말한 ‘적당한 가격’을 세어 건넸다.

말안장에 총이 담긴 나무 상자를 단단히 묶는 동안 만족감이 밀려왔다. 오늘 밤 그는 늑대들에 대항해 잘 싸울 수 있을 것이었다.
마을을 벗어나 달리는 동안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했다.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골짜기로부터 불어와 월터는 더욱 빨리 말을 몰았다.
목장에 도착했을 때는 그럭저럭 저녁식사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허름한 작은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월터는 재빨리 오스틴을 마구간에 데리고 가 여물과 물을 준비해 준 뒤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구부정하게 등을 구부린 존이 접시를 식탁으로 옮기고 있었다. 관절염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강건한 모습이었다. 그는 월터를 보고 미소를 띠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식사에 안 늦어서 다행이구나. 읍내에 일 보러 간 건 어땠냐? 혹시 새 총이라도 한 자루 사온 거야?”
월터는 우물거리며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변명하듯 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사실은 한 자루 사왔어요. 늑대들이 영리해진건지 제 실력이 녹슨 건진 모르겠지만 어제 보셔서 아시잖아요? 늑대 한 마리밖에 못 잡은 통에 총알 값도 안 나온다구요. 게리씨가 그러는데 새로 개조된 거라서 사정거리도 길고 연사속도도 빠르데요.”
존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작게 혀를 찼다. 그는 손자가 이런 종류의 도구들에 매혹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에 한꺼번에 세 자루의 총을 사왔을 때는 소 떼를 다 팔아치워서 총포상을 차릴 거냐고 화를 내긴 했지만 어쨌든 필요한 물건이긴 했다.
접시에는 햄 두 덩어리와 삶은 완두콩, 감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월터는 존이 따라주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부지런히 음식을 입으로 날랐다. 존은 들판에서 메추라기 몇 마리를 쏴서 잡았다며 우쭐거리듯 말했고 관절염 때문에 내일은 꼼짝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월터의 대꾸에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벌써부터 무릎이 쑤신 게 밤새도록 잠을 못 자고 뒤척거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로 약을 사 왔어요. 오늘 분명히 통증 때문에 힘들 테니 자기 전에 드세요.”
“그래, 그러마. 그런데 읍내에는 별일이 없디?”
“언제나 똑같죠 뭐. 앤더슨 네 개가 새끼를 낳았다는 데 데려올까 하다가 그만뒀어요. 늑대한테 물려 죽을 바에야 안 데려오는 게 나을 듯 해서요.”
“그래....전에 피그가 죽었을 때 네가 상심해서 일주일 동안 식사 당번을 건너뛰는 바람에 내 무릎 뼈가 엉망진창이 되었지. 생각나냐?”
존이 투덜거리며 손자의 어깨를 툭 쳤다. ‘피그’는 검은 색과 갈색이 섞여 있는 영리한 잡종 개였다. 늑대가 그것을 물어 죽였을 때 월터는 그것들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지만 반쯤 뜯어 먹힌 ‘피그’의 시체를 묻어 줘야 했다.
월터는 새로 태어난 송아지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 대해 얘기했고 내일쯤 마른 폭풍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존은 ‘검은 송곳’이 목장 울타리 여기저기를 누더기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고 읍내에서 일꾼을 사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접시 몇 개를 닦은 후 두 사람은 벽난로 앞에 자리 잡았다. 위스키 병을 꺼내든 존은 커다란 잔에 술을 반쯤 따른 후 손자가 총을 손질하는 걸 지켜봤다.
늑대들은 오늘 밤도 올 것이었다.
월터가 새로 사온 총을 꺼냈을 때 존은 안락의자에서 몸을 쑥 내밀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관찰했다. 윤기 흐르는 기다란 몸체와 아름답게 장식된 개머리판을 보자 쏘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숙 솟아올랐다. 하지만 환한 대낮에 살이 뒤룩뒤룩 찐 메추라기도 간신히 잡는 실력으로는 어둠 속에서 작디작은 눈빛만 쏘아내는 늑대들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항상 늑대들을 조심해야 한다. 사악한 것들...그것들은 모두 가죽을 벗겨서 나무에 매달아야 해.”
존의 웅얼거림은 언제나 되풀이 되는 것이었다. 월터는 총을 장전하며 꼼꼼히 그것을 살피는 데 신경 썼다. 게리가 잘 손질해준 덕에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엽총과 총알 상자를 가방에 넣은 후 물병과 빵 한 덩어리도 챙겼다. 존이 큰 유리병에 든 약을 따라 먹는 걸 보고 월터는 침실로 들어가 장작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엌에서 뜨거운 물주머니를 가져와 침대에 넣어둔 후 존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2.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멀리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에 오한이 끼쳤지만 새로 산 총을 생각하자 진정이 되었다.                    
오스틴은 발굽을 구르며 잠시 성질을 냈지만 곧 순순히 끌려 나왔다. 무거운 안장을 얹으면서 월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달랬다. 녀석의 길고 윤기 나는 목이 주인의 손길이 기쁜 듯 움찔거리는 걸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소 떼들이 있는 언덕 근처에 자리를 잡은 월터는 마른 가지들을 대충 모아 부싯돌로 불을 붙인 후 작은 냄비와 컵을 꺼내 커피를 끓일 준비를 했다. 잠을 쫓기 위해서는 특별히 준비한 말린 잎 한두 개를 넣어야 했다. 그것은 존의 비법으로 그는 그것을 인디언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그 잎을 넣고 끓인 커피는 한모금만 마셔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잘 닦은 거울 표면 같은 의식은 결코 잠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커피가 끓기 시작했고 월터는 총을 한 손에 쥔 채 전방을 응시했다. 오스틴이 작게 울며  앞뒤로 움직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은 없었다.

세 시간쯤 지났을 때 문득 골짜기 쪽에서 이상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월터는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며 어제와 같이 몇 가지 의문들을 떠올렸다.
황금색의 그 빛은 20여 분간 지속되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그것은 흡사 음악 같았다. 물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대기 중으로 성스러운 떨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월터는 며칠동안 계속 나타난 그 빛이 외롭게 불침번을 서는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둡고 새파란 밤하늘 아래서 그것은 고독하고 싸늘하게 보이기도 했다. 또 그것이 사라져 갈 때 밀려오는 외로움과 슬픔은 월터의 목을 메이게 했다.
빛이 사라졌을 때 월터는 긴장한 얼굴로 총을 움켜쥐었다. 이제 곧 늑대들이 올 거라는 걸 알았다. 늑대들은 그 빛이 사라질 때를 맞춰 울부짖곤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월터는 그 숫자를 가늠하려고 애썼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소들이 불안한 울음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송곳으로 찌른 것 같은 작은 불빛들이 울타리 주변을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그는 총을 장전하고 숨을 고른 후 방아쇠를 당겼다. 커다란 총소리와 함께 어깨 쪽으로 반동이 왔다. 게리가 말한 대로 총은 성능이 좋았다. 토해내는 듯한 울음소리가 짧게 들려왔고 연달아 쏜 총도 빗맞지 않았다.
늑대들은 총알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서성거리며 월터의 소를 노렸다. 간간이 월터의 위협사격이 이어졌고 늑대들은 울타리 근처로 오는 걸 망설였다. 그것들은 어제와 달리 월터의 총이 제구실을 하는 걸 보고 겁에 질린 듯 했다.
오랜만에 안도감을 느끼며 월터는 느긋하게 모닥불 쪽으로 발을 뻗었다.
다시 커피 한잔을 끓인 후 한 모금을 막 삼켰을 때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언덕 쪽에서 들려왔다.
월터는 창백해진 채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사람 소리가 분명했다. 곧이어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였고 그는 정신없이 총을 쏘며 오스틴을 타고 그쪽으로 향했다.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어둠 속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늑대들의 노란 눈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고 몇 마리가 땅 위의 거무스름한 형체에 몰려 있는 게 보였다.
잠시 동안 총소리와 화약 냄새가 주위를 메웠다. 늑대 세 마리가 한꺼번에 죽어갔고 남은 무리들이 급히 퇴각을 했다. 주변이 조용해졌을 때도 월터는 한동안 말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역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월터는 침울하게 부상자를 살폈다.
목덜미와 등 쪽으로 거무스름하게 피에 젖은 자국이 보였다. 약하게 들리는 신음소리에 서둘러 몸을 젖히자 뺨에 기다랗게 난 발톱 자국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월터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본 후 급히 오스틴의 등에 부상자를 실었다. 늑대들은 오늘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의 불은 거의 사위어 있었다. 얼른 장작을 집어넣고 물을 끓이면서 월터는 부상자를 똑바로 눕혔다.
그는 월터보다 서너 살 정도 어려 보였다. 길고 탄탄한 체격에 어린애 같은 얼굴을 지닌 청년으로 얼굴을 뒤덮은 핏자국 사이로 창백하게 질린 피부가 두드러졌다.
여기저기 살피자 다리 쪽에 물어뜯긴 상처가 있었다. 근육이 심하게 찢어져 있었고 출혈이 엄청났다. 우선 천으로 다리를 꽉 묶은 후 부엌으로 가서 약상자를 꺼내 왔다.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신 후 상처를 꼼꼼히 닦아내고 병에 담긴 약초 가루를 흠뻑 뿌렸다. 울컥거리며 솟아나오던 피가 잠시 후 굳는 걸 보고 월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위스키로 나머지 상처들을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데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창백한 낯빛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월터는 위스키를 병째로 들고 숨도 쉬지 않고 한참을 들이켰다.
다리 쪽에서 긴장이 풀리면서 저릿한 느낌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긴 한숨을 내쉬며 존의 흔들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월터는 흠칫 놀랐다.
침실 쪽에서 거무스름한 형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잠시 후 그것이 존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는 평소와는 달랐다. 마치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섬뜩하고 공허한 느낌으로 노인은 한참동안 월터가 데려온 부상당한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언덕에서 늑대들이 끔찍한 짓을 저질렀구나. 하지만 내가 언제나 말했듯이 그것들은 사악해...항상 사람을 속이지.”
“아마 다른 목장으로 가다가 사고를 당했나 봐요. 이런 밤중에 돌아다니다니 바보 같은 짓이긴 하죠.”
월터는 멈칫거리며 대꾸했다. 존은 왠지 그가 데려온 청년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노인은 웅얼거리며 다시 자기 위해 침실로 들어갔다.

월터는 밤새도록 청년을 간호해야 했다.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었고 깊은 새벽 쯤 열이 갑자기 오르면서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에 월터는 다소 겁에 질려 떨었다. 그는 죽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구덩이를 파는 자신의 모습이 격렬한 혐오감과 공포와 함께 떠올랐다.
월터는 청년에게 억지로 위스키를 먹이고 뺨을 두어 번 가볍게 쳤다. 그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는데 아픔 탓에 멍하고 둔탁한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월터를 응시했다.
월터는 그 지긋한 눈길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건 마치 책망하는 듯 했고 조금 더 일찍 그를 구해주지 않은 것에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신이 도우사, 감사하게도 열은 떨어지고 청년의 몸 상태는 안정을 되찾았다.

아침이 되었을 때 월터는 머리를 뒤로 젖힌 채 흔들의자에서 곯아 떨어져 있었다. 눈을 뜬 것은 존이 다소 조급한 손길로 그를 깨웠을 때였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냐? 붕대도 갈아줘야 하고 음식도 먹여줘야 할 거 아냐? 난 저렇게 큰 건 돌봐줄 수 없으니 알아서 해라.”
“......아, 알았어요. 아무튼 조금만 더 자게 해주세요. 동틀 때에 잠든 거라구요.”
월터는 투덜거렸지만 계속된 존의 성화에 곧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다.
붕대로 피가 스며 나온 게 보였다. 존이 뜨거운 스프와 물을 탁자에 올려놓았고 월터는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폈다.
검은 실로 꿰맨 상처가 보기 흉하게 부풀어 있었다. 약초 가루를 좀 더 뿌리고 붕대를 새로 갈았을 때 청년이 눈을 떴다.
그는 한동안 어리둥절한 얼굴로 월터와 존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 아픔이 느껴졌는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만있는 게 좋아. 상처가 터지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된다구.”
월터가 얼굴을 찡그리며 억지로 청년을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열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그가 말했다.
“늑대들...늑대들이 덤볐어요. 지름길로 가는 중에 모닥불을 보고 다가가다가...으.....얼마나 다친 겁니까?”
그가 누운 채 자신의 다리 쪽을 살폈다. 월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종아리 쪽 근육이 잘려 나가긴 했지만 혈관은 괜찮아. 주의 깊게 살피면 곪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네 이름은 뭐야? 어디서 왔지?”
고통과 아픔이 뒤범벅된 얼굴에 번지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청년이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월터는 어리둥절해졌다.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밀도가 갑자기 높아져서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눈앞의 얼굴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눈가의 주름과 미소 띤 입 모양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다음 순간 미끄러지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광야의 바위들은 누워있다.”
월터는 어색하게 웃으며 못들은 척 했고 재차 이름을 물었지만 청년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3.아벨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갔고 일주일 정도 지나자 존의 지팡이에 의지해 다친 다리로 절뚝거리면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끝내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고 무엇 때문에 그날 밤 월터의 목장으로 왔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월터가 붙인 것으로 그것은 다분히 경멸적인 의미가 섞여 있었다. 늑대에게서 구해냈다는 것에 월터는 그 청년을 길 잃은 어린 양이라고 생각했고 그때 떠오른 것은 유약한 양치기 아벨이었다.
아벨은 유용한 일꾼이었다. 어린애 같은 얼굴과 달리 그의 육체는 건장하고 유연했으며 손쉽게 일을 해냈다. 장작을 패거나 물을 긷는 일은 더 이상 월터의 소관이 아니게 되었다.
월터가 짐작한 대로 그는 네 살 아래의 풋내기였다. 존의 농담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거나 칠면조를 헛간에 몰아넣을 때 바보처럼 팔을 휘두르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하지만 어두워진 거실에서 그가 우두커니 앉은 채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볼 때 월터는 알 수 없는 무거운 예감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었다. 고집스러운 옆얼굴과 웃음기 없는 길고 가는 눈매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마치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으로 변한 아벨은 꺼림칙했다.

아벨의 다리도 거의 나아갈 무렵 월터는 송아지들에게 낙인을 찍기로 결심했다. 존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월터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큰일이었다. 한 사람이 송아지를 잡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낙인을 찍어야하는데 무슨 수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아벨이 있었고 월터는 즐거운 마음으로 필요한 물건을 챙겨 그와 함께 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날은 하늘이 기묘할 정도로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날카롭고 서늘한 살의를 지니고 골짜기와 황야를 굽어보고 있었다. 어쩐지 견딜 수 없는 그 시선에 월터의 기분은 다소 산만하고 과장되게 부풀어 있었다.
“송아지들은 몇 마리나 되죠? 만약 많으면 내일까지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아벨이 어깨에 걸린 밧줄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그를 태운 늙은 갈색 말은 오스틴의 뒤를 느긋하게 따르고 있었다.
“글쎄...아마 300마리 쯤 될 거야. 부지런히 한다면 저녁식사 때까진 끝낼 수 있겠지. 주의해야 할 건 낙인을 찍을 때 송아지가 움직이지 못하게 잘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잘못하면 엉뚱한데 표시를 할 수도 있으니까.”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월터는 오른쪽 팔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팔뚝 근처에 자주색의 부풀은 상처가 가려웠다.
그들이 울타리 근처에 도착했을 때 소 떼들 사이로 술렁거림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 마냥 월터 쪽으로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월터는 천천히 그의 짐승 떼를 흩어 보며 헝겊 주머니에서 쇠로 만든 낙인과 병에 담긴 연고 등을 꺼냈다.
아벨은 돌과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으더니 금세 장작불을 피웠다. 끝에 표식이 달린 쇠막대기를 불 속에 파묻은 후 월터는 오스틴을 몰고 소 떼 가운데로 향했다.
우선 어미 소에게서 송아지를 떼어놓는 게 첫 번째였다. 그가 능숙하게 오스틴을 몰고 영리한 양치기 개처럼 짐승들을 갈라놨고 곧이어 아벨이 가세해 속도를 높였다.
짧은 함성들과 소들의 울음소리가 먼지와 뒤섞여 주변 공기를 흔들었다. 월터가 간간이 밧줄을 휘둘러 송아지들을 낚아챘고 아벨이 녀석들을 반대편 울타리로 몰아넣었다.
세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셔츠가 다 젖도록 말을 몰았다. 수소들이 오스틴 주위를 위협하듯 다가왔지만 아벨의 고함소리에 놀라서 떨어져 나가길 반복했다.
오스틴의 옆구리가 풀무처럼 부풀어 올랐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고 월터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벨이 말에서 내려 몸을 수그렸을 때 월터는 약간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안색이 창백했고 한쪽 손을 다친 다리에 얹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소몰이는 별로 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이 정도로 지치면 곤란해.”
월터는 짐짓 짓궂게 말하며 물주머니를 던졌다. 아벨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받아들더니 잠자코 물을 마셨다.
“소몰이라면 6살 때부터 했어요. 단지 다친 후 처음으로 해봐서 힘든 것뿐이에요.”
월터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모닥불에 꽂혀 있던 쇠막대를 뽑아 들었다.
송아지들은 안간힘을 쓰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어린 것들 특유의 달큰한 냄새와 어수룩한 버둥거림 사이로 털이 타는 누린내가 풍겼다. 아픔에 질려 울어대는 소리에 어미 소들이 대꾸했다.
아벨은 묵묵히 낙인 위로 연고를 바르거나 짐승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밧줄을 잡아당기며 월터를 도왔다. 모자 아래 얼굴은 땀으로 온통 젖었고 피로가 가중될수록 몸은 황야의 돌과 모래처럼 메말라 갔다.
반쯤 끝냈을 때 월터는 호되게 송아지의 뒷발에 채였다. 놀란 아벨이 얼른 밧줄을 잡아챘지만 월터는 한참동안 몸을 숙이고 기침을 해야 했다. 서둘러 갈비뼈를 더듬어보자 다행히 멍으로만 끝날 듯 했다.
“하하, 녀석이 한 건 했네요. 전에 본 운 나쁜 카우보이는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찔려서 사흘 만에 죽었어요.”
“그것 참 위로가 되는 말이군.”
월터가 짜증난다는 듯 찡그리며 받아치자 아벨이 특유의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럴 때마다 월터는 녀석이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도 동시에 느꼈다.

해가 저물고 난 뒤에도 한참동안 그들은 일을 해야 했다. 마지막 한 마리를 해치운 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월터가 총을 손질하는 동안 아벨이 커피를 끓이고 빵과 햄을 잘라 음식을 준비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언덕 쪽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럴 때마다 아벨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곤 했다.
“이봐, 썩 내키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서 자도 돼. 총알도 충분하고 전과 달리 늑대들도 많이 몰려오지 않아. 아마 오늘도 서너 마리쯤 서성거리다가 총소리를 들으면 도망칠 걸.”
“됐어요. 별을 본지도 오래 되서 오늘은 여기서 잘 거예요. 그런데 위스키는 가져오지 않았나요?”
월터는 손을 멈추고 비죽이 웃은 뒤 등 뒤에서 병을 꺼내들었다. 아벨이 어린애 같이 입을 벌리며 좋아하는 걸 보자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아벨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마치 말처럼 술을 마셔댔고 거의 취하지도 않았다. 월터가 위스키 반 병 쯤에 혀가 꼬이는 것에 반해 아벨은 거의 3병을 혼자 마신 적도 있었다.
“오늘은 한 병 뿐이니까 아껴서 마셔야 해. 그때 네가 할아버지가 숨겨둔 술을 반 상자나 해치웠을 때를 기억하고 있어. 할아버지는 난롯가에 뻗은 네가 처음엔 죽은 줄 알았다가 아끼는 술이 없어진 걸 알고 분노와 당혹감에 갈팡질팡 하셨어. 아마 그때 수명이 3년은 주셨을 거야.”
“아, 그런 일이 있었죠....그런데 요즘 존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아벨이 웃음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 월터는 못마땅한 듯 한동안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존은 요즘 거의 침대에만 누워 지냈다. 어제는 갑자기 월터는 모르는 옛날 얘기를 한참이나 떠들어 손자를 당혹케 했다. 그 뒤에 존은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 꺼져가는 목소리로 월터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할아버지는 괜찮아. 한창 때는 수소 목을 맨 손으로 비튼 적도 있어.”
아벨은 아무 소리 없이 컵에 위스키를 따라 건넸다.
알콜이 들어가자 가슴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채인 자리가 거슬렸지만 짐짓 태연한척 모닥불 쪽으로 발을 뻗었다.
“....이제껏 소몰이 말고 다른 일은 해본 적 없어? 항구나 도시에 살아본 적은?”
아벨은 편안히 침낭에 기대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불길이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비쳐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껏 많은 곳을 여행했어요. 배를 타고 다른 대륙들을 돌아보기도 했죠. 그리고 각기 다른 인종의 수많은 사람들....오,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드네요. 대도시의 영광들, 정복자들과 독재자들의 폭정과 화난 군중들의 함성, 지독한 전염병과 재난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산 같은 시체더미와 함께 썩어 들어가던 산자들의 아우성. 나는 충분히 봤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광경은 따로 있죠.”
월터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는 아벨이 허풍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다지 재미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불길에 시선이 사로잡혀 입을 다물었다.
“거기 구덩이가 있어요. 또 넓고 깊은 협곡도 펼쳐져 있었구요.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참 소름끼치는 일이었어요. 거대한 검은 짐승이 웅크리고 있다가 그것을 본 사람을 끌어당겨 죽이는 거죠. 하지만 내가 아는 많은 자들이 기꺼이 어둠으로 몸을 던졌어요. 그 속삭임과 온기에 유혹당해서요. 반면에 난 지금껏 잘 해왔어요. 가느다란 선을 사이에 두고 그 괴물과 얼굴을 맞댄 채, 속삭임을 듣지 않으려고 애쓰면서요.”
월터는 반쯤 눈을 감았다. 아벨의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모닥불의 온기가 발끝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달콤한 피로감을 그의 온 몸에 퍼뜨렸다.

꿈속에서 그는 심하게 흔들리는 여러 개의 환상에 휘둘렸다. 고함소리와 불길이 뒤범벅이 되어 그를 덮쳤고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그를 다른 환상으로 휙 불어 날려버렸다.
그리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 앞에 꿇어앉은 월터는 떨면서 뭔가를 기다렸다. 그자가 팔을 붙들었고 불에 달군 쇠가 살을 지지는 순간 뱃속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이 튀어나와 허공을 찢어 발겼다.
“월터, 월터! 정신 차려요. 무슨 꿈을 꾸는 겁니까?”
월터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다 눈을 번쩍 떴다. 어둠 속에서 아벨의 얼굴이 한참 만에 떠올랐다. 그는 더듬거리며 팔을 만졌고 옛날의 상처가 쑤셔오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다.
“아, 별거 아니야. 늑대들은 안 왔나?”
아벨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어깨를 으쓱했다.
“멀리서 울음소리가 한번 들렸어요. 아마 오늘은 안 올 건가 봐요.”
“그것들은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아요.”
아벨은 마지막 말을 아주 빠르게 중얼거렸다. 월터는 식은땀이 난 이마를 닦아내며 무슨 뜻인지 유추하려다 그만뒀다. 그는 너무 피곤했고 다시 잠이 쏟아지기 시작해 견딜 수가 없었다.
“두어 시간 쯤 더 자도 되요. 불침번은 내가 설게요.”
마지막 말은 모닥불 속으로 녹아드는 듯 했다. 월터는 옆으로 돌아누운 채 금세 잠들어버렸다.

낙인을 찍은 다음날부터 지독한 마른 폭풍이 시작되었다. 세 사람은 사흘 내내 집 안에서만 지냈다. 심한 바람에 지붕이 삐걱거렸고 문틈 새로 들어온 모래들이 바닥 곳곳에 쌓였다.
‘검은 송곳’은 특별히 비열하고 냉혹하게 굴었다. 지금껏 몇 시간정도만 지속된 것에 비해 너무 오래 월터를 괴롭혔다.
그 때문인지 월터는 계속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바람소리가 송곳처럼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에 견딜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이불로 틈새란 틈새는 모조리 막아버렸다.
마치 홍수에 떠내려가는 집에 갇힌 것처럼 심한 불안감이 월터를 지배했다. 그에 비하면 존이나 아벨은 평상시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존은 이제 아벨이 해주는 찜질을 더 좋아했다. 그는 이 싹싹한 청년이 뜨거운 물수건을 자신의 앙상한 무릎에 얹어 주는 순간을 고대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처음에 자신이 보였던 경계심은 잊은 듯 옛날 얘기를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존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폭풍이 불어 닥친 사흘 동안에도 의식을 잃은 것처럼 몇 번이나 불러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월터의 마음은 재가 날리는 뿌연 하늘처럼 무겁게 가라앉았고 그 때문인지 밤에는 더욱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사흘째 밤이었다. 밖에서 지난 이틀보다 더 심한 바람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벨과 존은 얕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월터는 날카로워진 신경을 무디게 하려고 위스키를 한잔 가득 따라 마시고 있었다.
‘내일도 폭풍이 분다면 두통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겠군. 저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유별나게 계집애처럼 구는 건지도 몰라. 그만 자자. 눈을 감고 있으면 잠들 수 있을 거야.’
월터는 반쯤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 킨 후 벽난로 앞에 깔린 침낭에 불편한 자세로 웅크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더 이상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였다. 월터는 한참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양 옆으로 높은 둔덕이 보였다. 손끝으로 만져보자 축축한 것이 진흙이었다. 그는 참호 중간에 서 있었는데 기어 올라가기엔 너무 높고 미끄러웠고 앞뒤로는 길고 검은 어둠만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월터는 목청껏 소리를 질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멈칫거리며 앞으로 걷기 시작하자 어둠 속으로 삼켜지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냉기가 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다. 월터는 오스틴이 있었다면 자신을 끌어내 줬을 거라고 생각하며 우울하게 발을 옮겼다. 두통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다지 위로는 되지 않았다.
참호는 길었다. 어둠이 점점 무서워져서 월터는 발을 멈추고 전방을 응시했다.
오싹한 칼날 같은 기운이 등 뒤에서 느껴져서 깜짝 놀라 뒤돌아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길고 검은 뭔가가 참호 아래로 걸쳐져 내려왔다.
월터는 가만히 기다렸다. 참호 위쪽으로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리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상한 목소리였다. 월터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고 그 길고 검은 게 창이라는 걸 알아챘다.
검은 창은 차가웠다. 손끝을 댔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이 창을 잡아. 위대한 창, 거룩한 자의 피가 묻어 있으니 너는 패배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지금껏 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 너는 그저 떠돌고 있어. 내가 너를 구하려고 헤아릴 수 없이 노력했지만 언제나 저들에게 빼앗길 뿐이지.”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비탄에 젖어있는 듯 들렸다. 월터는 가슴이 메어 왔고 눈가가 쓰릴 정도로 아팠다.
그는 창을 단단히 잡았다. 무거웠고 들어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앞쪽에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싶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커졌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커다란 괴물이 달려오고 있었다. 길고 좁은 참호에서 빠져나갈 곳은 아무데도 없었고 무시무시한 그것의 콧김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월터는 두려움에 눈을 부릅뜬 채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 양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창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신은 노련한 카우보이라고 되풀이해 생각했다.
‘겁먹지 마. 전에 로데오 대회 때 올라탄 소는 이 녀석보다 더 끔찍했어. 그때 등뼈를 부러뜨릴 뻔 했지만 끝까지 버텼잖아. 분명히 앞쪽에서 달려올 테니 창을 잘 붙잡고 있으면 어디든 찌를 수 있을 거야....아니야! 분명 저게 날 뿔로 찌르고 앞발로 짓밟을 거야!’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났을 때 월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창을 잡은 손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파왔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날카로운 통증이 그를 꿰뚫었다.

그가 경련을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새벽의 차가운 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존과 아벨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폭풍은 어느 틈엔지 멈춰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월터는 한참동안 창문으로 보이는 차갑고 푸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무심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낯선 사람의 것인 듯 했다.

4. 두통은 ‘검은 송곳’과 함께 가버렸지만 월터의 우울한 기분은 계속되었다. 존의 병세가 심각해진 것도 그를 더욱 침체시켰는데 마을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아침부터 엉뚱한 옛날 얘기를 중얼거리는 존을 아벨에게 맡기고 월터는 오스틴을 몰고 쫓기듯 황야를 가로질렀다.

마을은 거의 똑같아 보였다. 조셉의 식료품 점 간판이 새로 페인트칠을 했다는 것만 빼면 빛바래고 먼지투성이의 판자 집들이 느른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셉이 평소와 다름없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는 곧 월터의 얼굴이 몹시 창백하며 말랐다는 걸 알아챘다.
“송아지라도 한 마리 잡는 게 어떠냐? 그렇게 많은데 티도 안날 거야. 그래, 존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나빠지셨어요. 요즘엔 옛날 얘기만 하시고 저도 잘 못 알아보세요. 아벨이 말을 걸때는 간간이 정신을 차리지만 별 도움은 안돼요.”
“아벨이라고? 새로 목부라도 고용한 건가?”
“한 달 전에 늑대들한테 습격당했을 때 구해줬어요. 젊고 풋내기지만 일은 곧잘 해요.”
“그래....아무튼 존을 위해서 약이 좀 필요하겠구나.”
조셉은 카운터 뒤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뭔가를 뒤적이더니 곧 갈색과 노란 색 병을 꺼내왔다.
“하나는 잠을 잘 자게 해주는 거고 하나는 아주 강력한 진통제야. 둘 다 순한 양처럼 만들어주니까 유용할 거야. 월터.....너도 알다시피 존은 나이가 아주 많아. 이제 곧 준비를 해야 할 거야.”
월터는 잠시 동안 조셉을 쳐다봤다. 청년의 눈동자에 드러난 슬픔과 당혹감은 조셉에게 잠시 말을 잊게 만들었다.
“네....그래야겠죠....”
월터는 돈을 지불한 뒤 병을 챙겨들고 가게를 나섰다.
잡화점으로 가는 도중에 검은 색의 관들이 죽 늘어선 장의사가 눈에 띄었다. 월터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바깥에 놓인 관들을 살펴보며 때마침 나선 주인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그는 권하는 대로 가게 안에 놓인 좀더 비싼 관들도 둘러봤는데 머리 속에는 존이 한말이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건 송아지에게 낙인을 찍기 전날 존이 한 말이었다. 그는 손자에게 관을 준비해야 한다고, 검고 윤기 나는 커다란 관을 갖고 싶다고 속삭였다.
여러 개의 관들 중 존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게 있었다. 크고 윤기 나는 검은 색이었고 공들여 깎아낸 둥그스름한 관 뚜껑의 곡선이 매력적이었다.
월터는 가격이 얼마냐고 묻고는 가져온 돈을 꺼내 값을 치렀다. 주인은 점잔 빼는 말투로 사흘 안에 배달해주겠다고 했고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그곳을 벗어났다.

잡화상으로 간 것은 거의 무의식적이었다. 게리는 계산대 뒤쪽 낡은 의자에 앉아 발을 올린 채 졸고 있었는데 월터의 발소리에 흠칫 놀라 눈을 뜨더니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늑대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처럼 시무룩한 얼굴이구나. 오늘은 새로 들어온 총이 없어.”
“됐어요. 늑대는 저번의 총으로 모두 죽여 버렸어요. 총알이 필요해서 온 거예요.”
게리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월터를 훑어봤다. 하지만 그는 별 소리 없이 총알 상자만 카운터에 올려놨다.
“더 필요해요. 종류별로 50상자씩 구입할 거예요.”
“어디 도시라도 습격할 셈인거야?”
게리는 투덜거리며 월터가 요구한 양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월터는 서성이며 잡화상을 둘러보다가 검은 색 카우보이모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아벨의 흰색 모자가 다 낡고 기름때로 얼룩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일한 것을 생각하면 과하지 않은 선물이었다.

오스틴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쫓기듯이 거칠게 말을 몰았다. 평소와 다른 주인의 태도에 오스틴도 성난 울음소리를 내며 달렸다.
황갈색의 땅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러 개의 겹쳐진 산맥들이 흐르듯이 움직였고 간간이 치솟은 절벽이 지평선을 수직으로 갈랐다.
소 떼가 있는 언덕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바람에 실린 역겨운 냄새였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월터는 우뚝 멈췄다.
언덕은 온통 검붉었다. 평소의 짐승들의 수런거림과 긴 울음소리는 간 곳 없었고 정오를 지난 태양이 무심히 도살된 살덩이 위에 비치고 있었다.
단 한 마리도 살아있지 않았다. 언덕을 뒤덮은 검은 몸뚱이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수많은 개울을 이루며 아래로 흘러내려왔다. 오스틴이 작게 울면서 뒷걸음질을 쳤고 월터는 망연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대체 누가? 왜?
섬뜩한 절규가 월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는 울부짖었다. 혼란과 분노가 뒤범벅이 되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목도한 잔혹함에 동물적인 무서움에 떨며 목구멍 안쪽의 살덩어리와 내장들이 전율할 때까지 소리 질렀다.
오열이 한동안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월터는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린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누가 이런 짓을 한거야?”
주먹 가득 흙을 움켜쥐고 무릎을 꿇은 사내는 어깨를 떨며 숨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소들은 그의 전부였다. 카우보이인 그가 가진 전부. 도대체 그는 이제 뭘 지켜야 하는 거지?
오스틴이 주인의 등을 콧잔등으로 밀어댔다. 불안한 듯 앞발을 긁어대며 주변을 살폈다.
이 예민한 짐승은 이 상황이 몹시 싫었다. 그의 주인은 아주 나쁜 상태였고 사악한 무언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월터가 일어선 것은 한참 뒤였다. 시체가 썩어가는 악취가 온 사방을 가득 메워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차라리 저것들하고 함께 죽었더라면! 어린 송아지들과 암소들....그 중에는 새끼를 밴 것도 있었어. 아, 그만둬! 눈을 감아! 검은 송곳이 내 머리를 헤집는 것 같다...그런데 아벨은? 할아버지는?’
생각이 그들에게 미쳤을 때 월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스틴에 올라타 전속력으로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을 때 도살된 소들은 잊혀졌다.

“할아버지! 아벨!”
월터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칠게 문을 연 순간 반쯤 열린 침실문과 거실 벽난로 앞에 쓰러져 있는 길고 검은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월터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느낌에 비틀거리며 그것 가까이 다가갔다.
흐트러진 백발 사이로 감은 눈이 보였다. 떨리는 손이 죽은 이의 어깨를 젖혔고 일그러진 얼굴과 반쯤 벌어진 입이 드러났다.
월터는 존의 앙상한 팔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런 온기도 없이 차가운 살이 불쾌하게 달라붙어 왔다.
노인의 마지막 순간은 고통스러웠던 것 같았다. 심장 근처를 움켜쥔 오른쪽 손은 딱딱하게 오그라들어 있었고 제멋대로 비틀린 다리는 쓰러질 땐 생긴 멍으로 온통 거무스름했다.
그것은 혼란스러운 광경이었다. 존의 죽음이 소들에게 행해진 학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명백했고 월터는 잠시 동안 살해된 가족에 대한 분노로 머리가 아득해져왔다.
커다란 북소리가 귓전에 둥둥 울렸고 충혈된 눈가가 쓰려왔다. 월터는 한참동안 존의 시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앞의 그것이 그가 알뎐 존과 전혀 다르며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사물로 변했다는 것이 서서히 인식되었다.
침실에서 이불을 가져다가 시체를 수습하는 월터의 손길은 서투르고 불안정했다. 존의 얼굴이 천 아래로 숨겨졌고 비로소 그는 아벨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갑자기 의심이 검은 연기처럼 그의 마음속에 솟아났다. 그가 생명을 구해준 낯선 사내, 위험한 외부인. 어쩌면 귀중한 소 떼를, 나이든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벨일 수도 있었다. 아니 확실하다.
월터는 이제 분노에 차서 일어섰다. 사납게 번쩍이는 눈과 부풀어 오른 목둘레 덕분에 그는 성난 수소처럼 보였다.
‘바보 같은 짓이었어! 외부인을 들이다니...게다가 바보처럼 나는 녀석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어. 하지만...만약 아벨의 짓이 아니라면? 뭔가가 이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그를 잡아간 거라면 어떻게 하지?’
여러 가지 가능성과 그에 반박하는 의심들이 수도 없이 월터의 마음속을 교차했다.
‘아벨은 이미 죽었을 거야. 그리고 죽지 않았다면 날 죽이러 돌아올 거야.’
생각이 한 곳에 모아지기 시작했다. 월터는 가지고 있는 총을 모조리 꺼내 점검하기 시작했다.

밤이 오싹하도록 무심하게 황야에 떨어져 내렸다. 월터는 반쯤 열어놓은 창문으로 황야를 살피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무릎과 벽에 놓여진 총들이 둔탁하게 빛났고 시큼하고 역겨운 피 냄새가 언덕 쪽에서 계속 불어왔다.
늑대울음소리가 들렸을 때 월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것들은 시체를 먹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그는 무기들을 지니고 오스틴을 몰아 언덕으로 향했다. 죽은 소들, 송아지들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의 일부였다.
부패된 악취가 벼락처럼 월터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역겹고 끔찍했으며 그의 소 떼가 아니었다. 몇 번이고 구토를 하는 동안 월터는 기진맥진해졌다. 간신히 입가를 닦고 몸을 일으켰을 때 산등성이 너머로 수십 개의 검은 덩어리들이 늘어선 것이 보였다.
오스틴이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불쌍한 짐승은 주인이 목을 두드리며 달래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력한 뭔가가 그것의 발을 붙잡아 놓고 있었다. 그것은 월터의 분노였고 재갈과 안장을 통해 전달되어 오스틴을 강력하게 지배했다.
늑대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늑대들이 아니었다. 칼과 방패가 부딪히는 쇳소리와 피에 취한 잔혹함이 뒤범벅이 된 천둥소리를 내는 괴물이었다.
한순간 월터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포스런 존재가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러 오고 있다고 믿었다.
괴물들은 울음을 멈추더니 곧장 죽은 소들에게 향했다. 곧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길고 두터운 혀가 살덩어리를 핥고 송곳니가 뼈로부터 그것들을 물어뜯고 삼키기 시작했다.
월터는 얼빠진 듯 그 광경을 바라만 봤다. 노랗고 빛나는 눈들이 섬뜩한 빛을 내쏘며 그가 있는 쪽을 살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괴물들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것들의 이빨이 허기진 위장을 위해 허겁지겁 살덩이를 탐식하고 정복된 생명에 기뻐하는 게 말이다.
월터는 한참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서서히 등 뒤로 손을 뻗어 엽총을 꺼냈다. 그리고 찰칵 하는 총알이 장전되는 작은 소리가 들렸을 때 문득 무리 중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은 두 발로 일어섰다. 온통 피에 젖어 번쩍이는 얼굴과 타오르는 눈알이 월터를 응시했을 때 오스틴이 비명을 지르며 두 발로 일어섰다.
그 불쌍한 짐승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인을 팽개치고 언덕 아래로 달려가는 오스틴을 몇 마리의 괴물이 뒤쫓았고 곧이어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 졌다.
“오스틴! 오스틴!”
월터는 절규하듯 두어 번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두발로 일어선 괴물이 점점 그에게 다가왔다. 월터는 엽총을 움켜쥔 채 눈을 크게 떴다.
“네 말은 죽었어. 이제 너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구나. 그래서 내가 찾아왔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월터는 매끈하게 굳어 둔탁하게 빛나는 아벨의 얼굴을 쳐다봤다. 조금 전의 핏자국은 온데 간데 없었고 어제 월터가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왜?”
아벨은 멍한 얼굴로 묻는 월터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약간의 연민과 동정이나마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완벽한 무. 그리고 월터는 그것이 무엇과 닮았는지 생각해냈다.
“황야가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나는 그 시선이 불러오는 고독이 두려웠는데 이렇게 내 눈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왜지? 왜 나한테 온 거야? 내가 지켜온 것들은 왜 모두 죽어야 했어?”
화난 목소리로 쥐어짜듯 월터가 물었다. 아벨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애착이 방해되기 때문이야. 넌 그것들을 보느라 황야를 보지 못했어. 그것이 얘기하는 세계의 원리, 깊이 가라앉은 차가운 침묵, 예언자의 광기와 미치광이의 조소 등이 몇 천 번이나 되풀이 되는 동안 단 한번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어. 왜 라는 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이야. 넌 왜 우리를 보지 않았지?”
“그건 두려운 일이야. 넌 내 자신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거라구!”
“아....너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자신은 아무 곳에도 없어. 넌 단지 여기 저기 떠오르는 파편들에 홀린 것뿐이야. 네가 우리에게 왔다면 넌 세상의 비밀을 알 수 있었어! 넌 신의 광휘에 숨겨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것을 모독할 수도 있었어! 그리고 모든 종류의 조소와 악의와 어울려 세상을 뒤흔들고 정복할 수도 있었어! 그런데 여기 아무 것도 없는, 오직 소 떼와 늙은 노인과 함께 너의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낭비하고 있다니!”
아벨이 위협하듯 앞으로 나섰다. 그는 화가 나 있었고 움푹 들어간 눈매 안쪽으로 날카롭게 쏘아봤다.
“네가 원하는 게 정말 이것뿐인가? 내가 18976번째로 묻는 이 질문에 전과 똑같이 대답할 건가?”
월터는 떨면서 뒷걸음질쳤다. 아벨의 뒤쪽으로 그림자가 길게 졌다. 그리고 그는 마치 대답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들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그리고 월터가 뒤돌아섰을 때 그가 본 것은 늙은 존이었다. 그의, 백발의 연약한, 죽은 할아버지가 걸어오는 것을 봤을 때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쓰러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둔해진 가운데 아벨이 자신을 안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 힘없이, 아기처럼 몸을 맡긴 채 월터는 존이 늑대들과 똑같은 노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응시했다.

눈을 떴을 때 월터는 직각으로 내려쏘이는 햇빛에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지는 가운데 오열이 잠시 찾아왔다. 어렴풋이 존과 아벨, 그의 소 떼 모두 환영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제 그는 이곳, 아무도 없는 황야에 버려져 있었다.
황야는 소란스러웠다. 먼지바람과 드문드문 나 있는 잡목들이 침입자를 환영하듯 수런거렸다. 저 멀리 황갈색의 거친 산맥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거대한 바위들이 햇빛을 등지고 여기저기 검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벌써 타는 듯한 갈증이 월터를 엄습해왔다. 그는 간신히 바위 아래 그림자에 웅크리고 앉은 채 눈을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눈을 뜰 때마다 이 모든 게 악몽속의 환영처럼 사라지길 간절히 바랬다.
뜨거운 대기 속에서 비몽사몽 헤매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월터의 머리 속에 떠돈 생각은 아벨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그는 월터의 모든 것을 되돌려 줄 수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난 뭘 하는 거지? 바보처럼 이 황야에서 홀로 죽음을 기다리다니....하지만 아벨은 나를 비웃었어. 내가 계속 황야를 무시했다고, 겁이 나서 바라보지 않았다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곳으로 온 거야. 혼자 있으려고 모든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려고 말이야...그런데 대가가 너무 혹독한 것 같다. 오스틴.....내 불쌍한 말...그것들이 오스틴을 죽였어...내 카우보이모자는 어디로 간 거지?’
창백한 달빛이 어두운 하늘을 으스름히 비쳤다. 까끌한 모래가 입속에 느껴졌고 월터는 정말로 자신이 죽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그의 내부에 남아있지 않았다. 황야는 거대하고 죽어있었으며 편안했다. 그는 그저 황야의 한 부분이 될 것이었다. 모래와 자갈. 바다 위로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그가 매주 갔던 마을과 소 떼, 존에 대한 것이 계속 반복되어 떠올랐다. 그리고 슬그머니 상자의 겉면에 씌운 얇은 종이 그림이 벗겨지는 것처럼 감추어진 것이 드러났다.

월터는 그곳에서 사흘 간 있었다. 똑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면서 아벨이 말한, 황야가 속삭이는 비밀과 헛소리들을 묵묵히 들으면서 죽은 듯 누워있었다.
사흘째 밤이 되었을 때 월터는 조금 떨어진 바위산 근처의 희미한 빛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빛은 점점 강해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빛줄기 속으로 뭔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것은 수많은 빛 무리였다. 수직으로 내려와 땅에 닿은 사다리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며 황야를 비추었다.
노랫소리 같은 진동이 공기를 떨리게 했다. 월터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봤고 그가 왜 아벨의 제안을 거절했는지 이해했다.
눈을 감은 월터의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영혼이 우리에게서 떠나는 게 느껴진다. 또다시 우리는 혼자가 되었어. 하지만 너는 다시 돌아올 거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이겠지만 괜찮아. 우리는 불멸의 존재이고 항상 너를 시험하길 원하니까.”
월터는 모호하게 미소 지으며 무겁고 눅진한 어둠 속으로 향했다.

황야는 어제와 똑같았다. 뜨겁고 강한 햇빛 아래 모든 것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작은 두 개의 사람형체가 묵묵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고 때때로 걸음을 멈추기는 했지만 그들은 곧 잡목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바위에 도착했다.
월터는 반쯤 몸을 웅크리고 죽어 있었다. 얇게 얼굴을 뒤덮은 먼지 덕분에 그는 모래 색의 베일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벨은 묵묵히 한쪽 무릎을 꿇고 월터의 얼굴을 한참동안 내려다봤다. 아쉬움과 슬픔, 패배감과 분노 같은 것이 한꺼번에 뒤범벅이 되어 떠올라 그의 얼굴에 다채로운 표정을 부여했다.
“그는 이번에도 우리의 시험을 통과했어요. 우리가 부여한 상실은 아무 것도 아니란 듯이 망각하고 어린애처럼 그 빛을 쫓아 가버렸어요. 오히려 고통 받는 건 우리 쪽이에요. 우린 항상 그를 잃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항상 그는 돌아온다. 실망할 것 없어. 우리는 그저 이 영원의 게임을 되풀이하면 돼. 위대한 자가 우리에게 허용한 것은 오직 이것뿐이고 조금이나마 그의 영혼을 맛보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아벨은 존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목장으로 돌아왔을 때 언덕 너머로 검은 색의 카우보이모자를 쓴 사람이 느긋하게 말을 몰고 오는 것이 보였다. 갈색 속눈썹에 둘러싸인 녹색 눈동자가 그 두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고 환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아벨은 갑자기 흘러내린 눈물에 의아해하며 잠자코 마주 손을 흔들었다. 월터가 돌아왔고 오늘밤도 그들은 같이 소 떼를 지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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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님은?
숙명여자대학교 생명 과학과를 졸업한 후 2006년 갤러리 정미소에서 ‘도살자를 위하여’로 데뷔한 후 2008년 현재 화가로 활동합니다.
유령의 호러 카페에 주제어로 단편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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