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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고양이와 팬터지

2006.10.28 00:5610.28

readingfantasy.pe.kr  그 날은 참으로 맑고 쾌활한 날이었다. 내 흑암에 가득한, 마치 수맥이 흐르는 듯한 방에서 창문만 열어도 푸른 하늘과 바람이 부는 바깥을 감상할 수 있는 그런 오후였다. 박군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드커버가 씌워진 학문서적을 읽는 듯 했고 나는 그 옆에 누워 혼자 끝말잇기를 하고 있었다. 돈도 없고 배는 고픈데 나오는 말마다 먹을 것들 뿐이었다. '고구마' '마파두부' '부침개' '개살구' 개살구는 먹는 게 아닌가.

  휴강을 했다. 일거리는 없다.
  뻔하지 않은가.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즐길거리를 참은 채 방바닥을 긁어야 한다. 집에서의 원조는 끊긴 지 오래다. 국립 대학이라 그런지 서너달의 아르바이트비용이 곧 수강료였고, 부모님은 그 사실만 믿고 서너달 일해서 돈 버는 것 정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니 하며 생각하신 모양이다. 돌아오지도 말라 하고 그러면서 걱정하는 눈치도 아니다. 가끔 이럴 때는 어릴 적 철 없던 생각들을 되새긴다.
  뻔하지 않은가. 자신과 부모와의 유전자가 상호 무관하지 않은가 하는 생물학적 고찰 같은 것. 어쩌면 그건 철학적 고찰의 변형일지도 모르지만.

  "사랑은 무엇이고 현실을 괴롭게만 하는 자네의 배경은 뭐란 말인가, 벗이여."

  박군은 술주정이나 할 때 지껄이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이 50dB이 넘는 소리와 같이 취급하는 말을 네 자로 줄여 답했고, "시끄러워." 예상대로 박군은 내 말과는 관계없이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저스틴은 말했지." 그게 누군지 내가 알 바는 아니다. "현실의 도피는 현재에 치중하는 일이다. 그것이 결코 미래가 되지는 못한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무슨 말이 하고픈 건가?"

  나는 박군의 앞뒷말의 관계를 파악할 수 없어 물었다.

  "저스틴은 병신이란 뜻이지. 그러므로 잠시 현재에 치중해 보잔 말이지."

  박군은 더욱 난해하게 답변했다. 나의 간곡한 요청 끝에 박군은 자신의 말들을 풀어 설명했다.

  "우선 저스틴의 말을 풀어 보겠네. 저스틴은 '현재에 치중'한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물리적으로 설립되지 못하는 표현이야. 현재란 과거가 무한히 치닫는 점과 미래로 무한히 치닫는 점이 만나는 곳이야.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자유곡선상의 일개 극한점이지. 자네가 문과이긴 하네만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극한 정도는 배웠겠지. 아무튼 어떤 지점에 한없이 가깝다는 말은 곧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면서도 그 결과값이 명시되어있지 않던가 말이야. 우리의 현재도 마찬가지네. 과연 현재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플러스마이너스 몇 초나 될까? 우리가 흔히 쓰는 현재란 표현은, 그래서 관용적으로 쓰일 수 밖에 없다네."

  …신이시여. 갑자기 어제 밤 보았던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뒤에 이어진 말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중요한 것은 그의 결론이었으니까. (때로, 내가 박군의 말을 자주 요약한다는 표현을 써 온 이유를 대강이나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짐작 가능할 것이다.)

  "현재에의 치중은, 그만한 응축이기도 해. 그래서 휴식이란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 그러니까 나랑 놀자."

  이제야 박군이 그런 난해한 몇 마디로 결론지으려 애썼는지 알 듯 하다. 이렇게 그의 비생산적이랄 수 있는 서두는 이를테면 그의 취미이며 특기다. 이렇게 말 불리기에 능하다면 기자나 소설가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칭 철학자였다. 아무튼, 졸지에 그의 고상한 심심풀이의 대상이 되어 버린 나는 물었다.

  "무슨 놀이를 할 건데?"

  "현실을 비틂으로써 현실에 치중하는 일이지."

  박군은 잠시 내 처지에 대한 이야기로 화두를 꺼내었다.

  "자네에겐 수강료라는 문제거리가 있지. 물론 어느정도 돈은 모았지만 대략 30만원이란 양이 모자라고 있어." 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박군이 다시 들쑤시자 나는 우울해졌다. 현실 치중이고 나발이고 어서 현실로 돌아 갔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현실 비틀기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산신령이 나타나 30만원을…." "그건 지나친 왜곡일세." 박군은 내 망상을 뜯어 말렸다.

  "모르겠군. 적당한 왜곡이란 무엇인가?"

  박군은 예를 들어보였다.

  "만일 토끼가 울음소리를 낸다면 어떨까?"



  "토끼는 울음소리가 특이한 생물이다. 그 울음소리를 굳이 의성어로 표현한다면, '식바라밝바 붏밗밢' 정도일 것이다. 상당한 고주파이기 때문에 반경 10미터 이내에서 10분이상 지속적으로 경청시 심각한 스트레스성 두통을 안겨주게 된다. 그래서 일반인에겐 그 귀여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혐오생물이다.

  물론 토끼가 애완동물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때의 붐일 뿐이었다. 조물주의 실수라고 일컫는 그 울음소리때문에 붐은 한 순간 작열탄처럼 토끼똥같은 그을음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 때 박군은 토끼의 성대구조학적 임상실험보고서를 작성하여 내게 보여주었고, 나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토끼가 예쁘게 울게 하는 알맞은 교미법을 개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코알라와의 접붙이기였다. 30년간의 연구 끝에 예쁘게 우는 토끼 품종 - 그러나 그 형태는 혐오생물에 가까운 - 을 개발한 나의 연구팀은 특허료로 30만원을 받고, 결국 나는 수강료를 충당할 수 있….



  "…매력적이야."

  나는 한숨을 쉬며 주절거렸다. 비참히도 현실적인 왜곡이었다. 나는 박군의 예시를 듣고 나서도 한동안 박군이 원하는 또다른 현실 비틀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후우, 자네의 창의성에 의구심을 품을 정도군. 게으른 생활을 하면 자네처럼 머리가 둔해지는 건가?" 박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나는 멍하게 박군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건 왜곡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잖아?"

  박군은 고개를 저었다. "파괴되기 전의 리얼리즘에 충실해. 그것이 현실 비틀기의 포인트지. 내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 나는 깨달았다. 박군의 말은 '내가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현실왜곡처럼 설정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러나 타인들은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가 말을 하고, 그것도 각개 여러 나라의 말을 하며, 지능도 인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날 고양이는 내게 말한다. "내게 장화와 망토와 모자를 줘."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무장화와 점퍼와 철모 뿐이었다. 그것으로도 만족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인 고양이는 공사현장으로 달려가 '장화신고 잠바입고 하이바 쓴 고양이'로 이름을 날린다...



  "그만! 그만! 내가 하겠어, 내가."

  또다시 나는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그리고 내 나름의 비틀린 현실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러나 타인들은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가 말을 하고, 그것도 각개 여러 나라의 말을 하며, 지능도 인간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고양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학문, 언어, 지식과 상식 등을. 손에다 펜을 감아 고정시켜 글씨 연습도 시킨다. 그리고는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제보를 한다. '신기한 고양이' '전생에 인간이었을지도' 뭐 이런 타이틀로 고양이는 결국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에서 인기만점의 대스타가 되어 내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준다.



  "어찌되었건 결국 돈이군." 박군의 날카로운 지적이 내 마음을 찔렀다. 그러나 우리모두가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은, 위의 사실이 너무나 매력적인 사업모델이었다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 때를 회고해 보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고양이는 고양이고, 나는 고양이와 대화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니까. 만일 그 때 박군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글쎄, 좀 부자가 되었을까.

  결국 그렇게, 나의 망상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가끔씩 한 숨 쉬며 고양이들을 볼 때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자네는 무엇으로 현실을 살고, 무엇으로 현재를 사는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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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탄입니다. 4탄도 준비되어 있습죠.

이 글을 올리게 된 동기.



  파킨슨  
  뭘 하징

  하리야 헌처크  
  글쓰3. 케.  10.17  

파킨슨  
  넹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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