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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실종 후 20여년이 흘렀을 무렵의, 그리 옛날 옛적도 아닐 때의 일이다.

메울 동쪽, 지금은 흔히 말구벌이라 불리는 지방의 한 이름 없는 산에 젊은 범 하나가 살고 있었다. 사람의 왕이 그의 사냥꾼 무리를 이끌고 땅에 발붙이고 선 모든 범을 사냥하고 다니던 시절에, 가까스로 화를 피해 홀로 자라난 범이었다. 비록 나무와 바위 사이에서 외톨이 신세이긴 했지만 범은 범답게 살기 위한 모든 것을 아무 탈 없이 몸에 익히고 있었다.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기 위해서는 사람의 왕이 남긴 가르침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범을 범답게 길러내는 것은 다른 누구의 가르침도 아닌, 자라는 범 그 스스로의 힘이다. 왕이 아니기에 왕이 필요한 사람과 달리 범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왕이기 때문이다.

쓸쓸하기만 했던 범의 유년기는, 가끔 심장을 얼릴 듯 가슴을 스치던 스산함의 정체가 외로움이었단 사실을 눈치 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아니, 몇 번인가 찾아왔던 기회가 실은 기회였단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큰 강의 하류처럼 덧없이 흘러갔다. 어느덧 범은 서른 가까운 나이를 등진 청년으로 자라나 있었다. 그 무렵의 범은 산 주변에 터를 이룬 사람들의 입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던 형편이었다. 제아무리 빽빽한 나무와 바위의 무리일지라도, 뭇짐승의 왕 되는 이의 모습을 언제까지고 감춰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거의 모든 범이 섬에서 그 자취를 감춰버린 후의 시절이었던지라 한 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많은 사람이 범의 산으로 찾아들었다. 개중에는 범의 가죽을 탐내어 구하는 사냥꾼의 무리도 몇몇 섞여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이미 죽은, 죽었기에 범이 훔쳐간 죽음을 목 놓아 구걸해야 할 비루한 늙은 것들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그런 자들의 생명줄을 끊어 주는 것이야말로, 범의 의무이자 권리라 할 수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범은 사람에게서 죽음을 훔쳐간, 두 번째 도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은 어릴 적 느꼈던 사람의 왕과 사람에 대한 공포심을 그제까지도 완전히 씻어내지 못했던 처지였다. 범은 차라리 그들의 모습을 피해 산 속 깊은 곳을 이리저리 숨어 다니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그리도 많은 사람의 무리를, 그리도 많은 사람의 눈을, 언제까지고 피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범의 핏줄을 타고 흐르던 것은 범의 피였다. 그리고 범은 어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첫 사냥은 깊은 밤에 이루어졌다. 날카로운 그믐이 산허리를 비집고, 산의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와 그 향기로 흠뻑 젖어 있던 밤이었다. 범은 소복이 쌓여있던 광기로 사람을 해체했다. 봄을 맞은 꽃봉오리처럼 활짝 피어오르는 살의, 그리고 식욕이 그 자리에 있었다. 범은 그 피가 부르짖는 대로 몸을 움직였고, 산의 어떤 짐승과도 비할 수 없는 그 맛에 이내 흠뻑 취해버렸다. 그러나 맛이라기보다는, 희열이었다. 지독한 흥분 속에서도 범은 침착하게 두 번째 사냥을 계획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세 번째를 낳았고, 범은 더 이상 사냥의 밤을 헤아리지 않았다. 무의미한 짓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죽을 날을 맞이해 산으로 쫓겨 온 자는 너무나도 많았다. 범은 아무런 부족함 없이 피의 요구에 응해줄 수 있었다.

그렇게 달떴지만 조용했던 살육의 나날이 어느 덧 다섯 해가 지나갔다. 그 해, 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에서는 유난히도 초상이 적었다. 작년에 돌았던 역병 때문이었다. 기력이 쇠약한 늙은이들이 그 명을 다하기도 전에, 병의 독기에 쐬어 그만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병으로 쓰러진 자는 어영부영하다가 병의 독기를 더욱 퍼뜨릴 걱정이 있는지라, 추깃물이나 흘리기 전에 서둘러 태워 없애버리기가 일쑤이다. 덕분에 그만 한 해 내내 사람 맛을 못 본 범은 마침내 촌락 인근까지 내려와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범은 그가 어릴 적, 사람의 왕과 그의 사냥꾼 무리가 범의 피붙이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너무나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 세월동안 사람의 피와 살을 맛보며 많이 희석된 감정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범의 마음 깊은 구석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제까지 범이 사냥해 왔던 사람은 어차피 범에게 죽음을 빌려 쓰기 위래 제 발로 산을 찾은 사람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잡아먹기 시작했을 때, 사람의 왕이 다시 범의 산을 찾지 않는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불행한, 혹은 다행한 일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이 갈무리해두었던 불안과 공포가 범의 마지막 한 걸음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발목을 겨우 적시는 얕은 개울 하나를 남겨 두고, 고함소리 한 번에 산산이 흩어질 싸리울 하나를 앞에 두고, 범은 언제나 시답잖은 변명거리를 만들어 스스로의 귀에 중얼거려야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슴의 피나 멧돼지의 살 따위로는 도대체 타는 목마름을 달랠 길이 없던 어느 가을날, 범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범은 잊을만하면 이제껏 때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가죽 아래에서 꿈틀대기 시작하던 낡은 불안과 공포를, 마침내 밖으로 꺼내 마주보기 시작했다.

이봐. 잘 들어라. 내가 누구냐. 그래. 네 말 대로다. 난 사람에게서 죽음을 훔쳐 낸, 사람의 두 번째 도둑이다. 난 사람의 죽음이다. 사람은 날 찾아오지 않으면 스스로 죽지도 못해. 도둑맞은 걸 도로 찾아갈 생각조차 못하고, 필요할 때마다 그걸 빌려 쓰려 애원하기나 하는 나약한 족속이다. 내가 사람을 무서워해야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냐.

대답은 없었다. 범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꺼져라.

원래 숨어 있는 것보다는 드러나 있는 것이 더욱 상대하기 쉬운 법이다. 산거죽을 박차는 범의 발걸음은 그 여느 때보다 더욱 가벼웠다. 사람. 사람을 거꾸러뜨려, 그 피와 살을 핥고, 뼈를 부수고, 근육을 찢어 드러난 내장을 물어뜯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이 그저 즐거움이었다. 이제 옅은 냄새만을 품기는 망설임을 가뿐하게 때려눕히며 범은 몇 개의 바위와 계곡을 한 달음에 훌쩍 뛰어넘었다. 발목을 겨우 적시는 얕은 개울과 고함소리 한 번에 흩어질 싸리울을 넘기 전에는 약간의 심호흡이 필요했다. 고작해야 한 번의 심호흡이었다.

한 허름한 초가 토담 그늘 속에 큰 몸을 가까스로 숨긴 채 범은 조심스럽게 귀를 쫑긋거리고 코를 벌름거렸다.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소리와 익숙한 냄새가 범의 코와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살아온 나날 중 가장 길었던 지난 한 해간을 떠올리며 범은 입맛을 쩍 다셨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순간, 잔뜩 웅크리고 있던 범이 몸을 담 너머로 튕기려는 찰나, 집 안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갑작스레 터져 나왔다.

범이 그제까지 본 사람이라고는 노련한 사냥꾼과 죽을 날을 맞이한 늙은 것 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거나 비명을 지르는 법은 있더라도 서글픈 울음소리를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는 족속들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소리에 범은 그만 모골이 송연해졌다. 혹시 저 소리는 사람이 사람의 왕에게 범의 위협을 알리기 위한 어떤 종류의 신호는 아닐는지. 일이 돌아가는 꼴을 좀 더 확적히 파악한 다음 마음먹고 있던 바를 실행해도 늦지 않으리라 여긴 범은, 그제까지 몸 안을 헤집고 있던 도약의 힘을 애써 사방으로 흩어놓으며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기 마, 다 커가 말마한 기 으디 이리 어릉냥 지기고 지랄이고. 고마 뚝 안 그치나? 참말로 누 닮아가 이래 죽도록 씨야쌌능데?"

뒤이어 들려온 아낙의 엄포에도 아이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몇 년이란 세월동안 사람의 습관에 퍽 익숙해져 있던 범은, 아낙의 말을 듣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범이 생각하던 것만큼 위험한 소리는 아닌 듯도 했지만 범은 어쩐지 산통이 다 깨진 듯한 느낌에 다시 담을 넘을 생각은 못 하던 처지였다. 범이 그저 계속해서 망설이는 사이 아낙은 계속해서 아이를 윽박질렀다.

"여룩쪼시 티 내나? 뭐 잘났다고 그래 우능데? 계속 그카다간 니 참말로 범보고 콱 데불고 가뿌라 칸다. 니 방금, 에마이도 소용없고 다 소용없다고 니 입으로 캤다 아이가. 나도 인자 니 에마이 안 할란다. 내가 좋을 끼 뭐 있다고 니 에마이 하노? 이래 계속 니한테 싫은 소리밖에 더 듣겠나?"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던 범은 아낙의 입에서 함부로 튀어나온 말에 섬뜩함을 느꼈다. 범이란 말이 저리도 쉽게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었던가. 이제껏 범이 만났던 사람, 사냥꾼이나 늙은 것은 모두 범을 어떤 의미를 가진, 하지만 범에게는 잘 이해가지 않는 경의로 대해왔다. 그것은 마치 네 발 달린 것이 산을 이야기할 때와 닮아있었고 비늘 달린 것이 물을 이야기할 때, 혹은 날개 달린 것이 바람을 이야기할 때의 태도와도 닮아있었지만 분명 그런 경의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애써 표현하자면 그것은 스스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과 억지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였다. 범은 사람의 그 모순된 태도, 두려움과 구별되는 경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무와 바위와 조잡한 울타리 하나를 경계로 저리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범에게는 퍽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범은 아이가 아낙의 말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가 궁금해졌다. 마땅히 저 소리를 그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범이란 말을 입에 담는 아낙의 태도에서 이미 짐작한 일이었지만 범은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다. 지금 산에서 유리된 사람에게 범이란 그저 말과 글로만 존재하는 허깨비였는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이는 산이나마 아는 사냥꾼과 명줄을 다 태워먹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을 향해 쫓겨 와야만 하는 늙은 것들만이 용케 아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 고작 오십 년을 사는 사람이 이렇게도……. 많을 수 있는 것인지를 범은 몰랐다. 범은 그제야 늙은 범들이, 어째서 어린 범에게 사람을 보이는 것을 그리도 꺼려했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이미 어린 범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범의 상념이 흐르는 도중에도 아이의 울음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쩐지 텅 비어버린 가슴을 억지로 달래며, 범은 검은 하늘을 더욱 검게 가린 산의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범이 막 산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 놓으려는 찰나, 이제는 거의 체념한 듯한 아낙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찔렀다.

"꽂감. 뚝!"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당장 울음을 그쳤다. 발톱을 바짝 세운 채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범은, 이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향해 뛰었다.








2.

처녀의 기구한 운은 태어날 때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가루라도 덮어쓴 양 하얗기만 한 피부와 털, 그리고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마냥 빼빼마른 체구. 울음도 제대로 울지 못하는 허약한 아기를 보고 산파는 말문이 막혔고 어미는 그만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렸다. 물론 그 꼴을 옆에서 지켜 본 남의 일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적당히 예의바른 선에서 이루어진 수군거림과 악의가 다분한 킬킬거림 끝에 아기에게는 곶감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적절하다면 적절한 별명이었다. 아기의 남다른 외모는 확실히 초가을 볕에 잘 말린 곶감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었다.

늦게 본 외동딸이 귀신이라도 들린 양 그 꼴이었으니 부모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써 보고 용하다 소문난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여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녀의 몸은 아랑곳없이 그냥저냥이었다. 천석꾼 소리는 못 듣더라도 그럭저럭 남의 부러움 정도는 살만하던 가세는 그 와중에 점점 기울어갔고 몇 년 전에 돈 전염병 때문에 처녀를 제외한 다른 식구들이 다 나자빠지고 난 이후에는 집안은 완전 거지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처녀를 가까이 하다간 귀신이 옮아 붙을지도 모른다는, 벌써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하던 소문이 완전히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부모가 살아 있을 적에는 그나마 쉬쉬하던 사람들도 그 때부터는 대놓고 처녀를 백안시하기 시작했다. 약해빠진 몸 덕분에 날품도 제대로 팔기 어려웠던 처녀는, 정말 방 안에 드러누운 채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부모와 친분이 있는 이웃들이 양곡을 몇 번 날라다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처녀는 벌써 예전에 산송장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몇몇 마음 좋은 이웃들이 중매를 선 적도 있었으나 근방에 소문이 자자하던 입 비뚤어진 홀아비가 처녀를 보자마자 줄행랑을 친 이후로는 그런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런 처녀의 소문이 이 이름 없는 산의, 또 이름 없는 절의 방장 스님 귀에 들어간 게 아마 서너 달 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처녀의 신세를 딱하게 여긴 방장 스님은 그 날로 당장 그녀를 절로 불러들였다. 처녀는 처음에는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 이야길 전해들은 이웃들이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찾아드는 이웃들의 끈질긴 설득은(그것이 과연 솔직한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 어땠는지는 불분명하다)결국 처녀를 굴복하게 만들었다. 난데없는 여우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던 날, 처녀는 마중 나온 젊은 중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처녀를 배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후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마을 사람은 없다. 그 때 처녀를 마중 나왔던 젊은 중과 눈이 맞아 도망쳤다느니, 머리를 깎았다느니,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그저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다.

그럴 뿐이었지만, 알아야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나가람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마냥 형형히 빛나는 범의 두 눈을 힐끔 곁눈질했다. 나가람이 무릎을 꿇고 있긴 했지만 두 발로 선 범의 눈은 정말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는 공포로 몸이 굳어버릴 것만 같았기에 나가람은 황급히 시선을 도로 아래로 내렸다. 마음속으로 욕지기라도 몇 마디 중얼거려볼 상황이긴 했지만 나가람은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늙은 범은 사람 마음 들여다보는 일 정도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해낸다고 했다.

물론 사람인 나가람은 범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가람은 범의 기색이 상당히 언짢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럴 법도 하다. 확실히 처녀에 대한 나가람의 설명은 앞뒤가 잘 맞지 않았고 다소 더듬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밤길을 걷다 마주친 범에게 '곶감이 무엇이냐' 란 질문을 들은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반응일 것이다. 애초에 나가람은 범이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기에 그 충격은 더더욱 컸다.

공포와 더불어 가을 찬바람이 온통 땀에 젖은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통에 나가람의 몸은 발작이라도 난 양 떨리고 있었다. 그대로 뒀다간 정말 똥오줌도 못 가릴 처지가 될 것 같았기에 그는 팔을 손으로 문지르며 몸을 추스르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가람은 그 바람에 곧 이어진 범의 말을 놓쳐버렸다.

"바, 방금 뭐라 카셨습니꺼?"

범은 더욱 언짢은 기색으로 나가람을 내려다보았다. 나가람은 마음속으로 가족의 이름과 친구의 이름과 이웃의 이름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 쓰이기 시작한 별로 장황하지도 않은 인명록이 '모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로 마무리 지어질 무렵 범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그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야? 우, 우째 생각하느냐굽쇼?"

"그래."

나가람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입을 열었다.

"부, 불쌍하지라. 야. 날 때부터 그런 꼬라지였는데, 또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애비 애미까지 잃었지 않습니꺼. 동네 사람들도 그리 박정하게 굴고……. 어, 원래는 다 착한 사람들인데, 이상하게 가만 보거들랑 괭이새끼 본 강아지마냥 그리 박정하게 군단 말임더. 옆에서 보고있을라꼬 카거든 아무래도, 조, 좀 불쌍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지라."

"무섭게 생각하지는 않느냐?"

"무섭게요? 어, 음. 글쎄, 지야 안 그카지만, 아들이야 뭐……. 지 애미들이 쑤근덕지기는 소릴 듣고 좀 무서워한다꼬 캐야 되나, 아무튼 조, 좀 그런 것 같긴 하, 합니더. 왜 여편네들이 애들 겁줄라꼬 지낸 얘기들 아있습니꺼. 병 옮는다는 소리도 카고, 구신 붙는다는 소리도 카고……. 아들이 뭘 알겠습니꺼. 애미가 그렇다 카이 그냥 무섭다 카고 피해댕기는 기지요."

나가람의 말을 다 들은 범은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양 아무런 말이 없었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밤, 나가람의 씨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맑은 정적을 가냘프게 장식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턱을 억지로 앙다물며, 나가람은 스스로가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지금 나가람 앞에 서 있는 것은 사람의 죽음 그 자체였으니까. 정적은 영원까지 흘러갈 듯 했고, 그 잔혹한 고요는 나가람의 생각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결국 그제까지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나가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방금 전까지 범이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산은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나가람에게 혹시 범이 벌써 떠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범은 산의 어둠 한켠을 차지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가람은 그만 헛바람을 들이켰고, 하필이면 그 때 범의 말문이 열렸다.

"그 절간은 어디에 있느냐."

"저, 저, 저, 저, 절간이요? 아, 야. 저, 절간 말이지라. 절간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신 거지라. 가르쳐, 가르쳐 드려야지요. 야. 여부가 있겠습니꺼! 당연히 말씀해 드려야지요! 쿨럭쿨럭쿨럭!"

범의 언짢은 기색은 그만 점점 짙어져 갔다. 그만 다급해진 나가람은 할 말을 미처 정리조차 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절에 대한 이야기를 모조리 입 밖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가람의 이야기가 지리멸렬을 거쳐 횡설수설까지 다다랐을 무렵 범은 고개를 한 번 갸웃한 다음, 팔짱을 풀어 한쪽 손을 주의 깊게 나가람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피로 축축이 젖어드는 나가람의 옷자락을 흘끗 바라보며 범은 손톱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았다.

"짧게 말해라."

나가람은 말이 아닌 신음소리를 길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손으로 감싼 어깨에서는 장마에 터진 둑 마냥 피가 계속해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열을 헤아린 범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나가람은 비명처럼 말을 토해놓았다.

"계, 계곡! 컥, 끄윽……. 매봉과 병아리봉 사이의……. 계, 계, 계곡 근처에……."

"사람이 붙인 이름은 모른다. 매인지 병아린지 하는 그 봉우리가 어디에 있는 봉우리냐."

"해 뜨는……. 해 뜨는 쪽에, 높은 봉우리와 낮은 봉우리……."

그러고 보니 그 근처를 지나다 종소리 같은 걸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범은 손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어 가지와 이파리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흐릿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은 아직 중천이었고 해가 뜨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마음을 먹은 김에 오늘 밤에라도 절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놓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렇게 하려면 조금은 서두르는 편이 좋겠지만…….

아직 범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범은 눈만 아래로 굴려 바닥에 엎드린 채 훌쩍거리고 있는 나가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 살려주이소."

범의 낌새를 눈치 챈 나가람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살려주이소.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다 죽어가는 어무이가 계십니더. 이런 시간에 산을 찾아온 것도, 어무이의 병환이 너무나 깊어지셔서……. 의원 양반이 다 자란 달치가 아니면 몸을 나숫기 어렵다기에, 그래서 일부러 달 밝은 밤을 골라 찾아온 겁니다. 제발, 제발 부탁입니더. 제가 없으면 어무이는 그 날로 나자빠지심더. 나으리.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 커흑!"

"그렇다면 여기서 널 먹는 게 좋겠군. 그래야 네 어미도 산을 찾게 될 테니까."

나가람은 창백한 얼굴로 범을 바라보았다. 범은 나가람의 코앞에 얼굴을 가져다대며 히죽 웃었다. 달빛을 머금은 송곳니가 창백하게 번득거렸고, 나가람은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을 느끼며 범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별 다를 바 없었기에 나가람은 곧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둘을 먹는 게 낫지. 간단한 계산 아니냐. 사람아."

나가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히죽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은 손바닥으로 땅을 세게 내리쳤다. 소리보다는 진동이 나가람의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가쁜 숨을 내쉬던 나가람은 이를 악물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 하나를 조심스레 쥐어들었다. 딴에는 몰래 하는 일이 분명했지만 범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가람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범은 이빨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네 어미는 병이냐."

"그, 그, 그, 그렇다! 이 몹쓸 새끼야!"

나가람은 벌떡 일어나며 돌을 든 손을 위로 치켜들고는, 의미를 잘 알기 어려운 고함소리와 함께 범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미증유의 재난에 대한 범의 대처는 달려드는 나가람의 가슴을 손으로 슬쩍 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산 속에 울려 퍼졌다. 나가람은 수풀 사이에 고꾸라진 채 끙끙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낫게 만들어."

"시끄럽다! 응? 잠깐. 뭐, 뭐라고?"

"낫게 만들라고 했다. 어차피 난 병든 사람은 먹지 않는다. 죽을 때가 되거든 나에게 보내."

말을 마친 범은 등을 돌리며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나가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조금씩 멀어져가는 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찰랑대는 범의 꼬리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질 찰나, 조금 흐릿해진 범의 목소리가 나가람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대답해 준 사례로 하나 가르쳐 주지. 이 산에는 달치가 없다. 쓸데없는 짓이다. 다른 산을 뒤져 보든가, 아니면 다른 약을 구해보라고 말해 주고 싶군.”

범의 모습이 수풀 속으로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고, 또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가람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후 꽁지가 빠져라 마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울음소리와 신음소리 덕에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산 중턱까지는 용케 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다. 서낭당을 지나, 길가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장승을 보자마자 길바닥에 쓰러져버린 나가람은 일어설 생각도 못한 채 숨을 헐떡거렸다.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

웃음이 반, 또 울음이 반씩 섞인 얼굴로 꺽꺽대던 나가람은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든 정신 속에서도 한 가닥 동정심을 느꼈다. 산 자가 죽을 자에게 바칠 법한 동정심이었다. 범이 어디서 그 웃기지도 않는 별명을 가진 처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꼈는지는 알 방도가 없다. 하지만 나가람은 그녀가 범의 뱃속에 들어갈 거란 사실 하나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범이 사람에게 느끼는 관심, 두는 의미란 먹이로써의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가람은 잘 움직이지 않는 입으로 말 아닌 말을 중얼거렸다. 불쌍한 여자. 그 한 많은 생을 범 뱃속에서 끝마치게 되겠구먼.

하지만 나가람은 이내 오한을 느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결국 다른 이도 같다. 범이 주는 것이 아닌 다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사람의 왕이 사람에게 죽음을 돌려주기 위해 처음 퍼뜨렸다 전해지는 병 역시도 결국 사람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병마에 시달리다 결국 죽은 몸에 산 정신을 가진 채 불에 태워지는 사람을, 나가람은 이제껏 수도 없이 보았다. 두 번째 도둑이 사람에게서 죽음을 훔쳐간 후, 죽음을 올바르게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훔쳐간 도둑, 범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어찌 생각하면 나가람은 굴러들어온 복을 차 버린 셈인지도 몰랐다. 죽을 때가 되어 범에게 찾아가는 것과 살아있을 때 범을 만나 죽는 것. 여기에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어쨌든 어깨가 찢어진 상태로 십 리쯤 되는 산길을 뛴 후 고민할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가람에게는 어깨에 붙일 고약과 긴 휴식이 좀 더 절실했다. 그는 비실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벌어진 어깨를 손으로 꽉 누른 다음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각, 고민에 빠져 있던 이는 나가람 하나만은 아니었다.

점점 빨라지던 범의 걸음은 이제 날음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 번 손과 발을 박찰 때마다 산거죽이 비명을 지르며 범의 몸을 허공으로 튕겨 올렸다. 범은 숨을 씨근덕거리며 어렴풋한 달빛 속을 도약했다.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계속해서 범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두근거림이 한계에 이르렀을 무렵, 마침내 범은 길게 포효했다. 고함소리는 산 전체에 진동했다. 잠에서 깨어난 날짐승들과 산짐승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사방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어지러운 짹짹거림과 킁킁거림 속에서 범은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뛰어올랐다.

곶감이라고?

고작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 계집애라고?

사람아, 사람아! 나는 두 번째 도둑이다. 나는 너희의 죽음이다! 너희에게 나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너희에게 나보다 더 끔찍한 것은 또 무엇이냐!

“그런 것은 없다!”

범은 길게 포효했다. 수목조차 진감케 하는 뭇짐승의 왕 되는 이의 고함소리는 메아리를 타고 먼 달까지 퍼져 나갈 듯 했다. 메아리가 점점 잦아들 무렵, 범은 다시 한 번 길게 포효했다.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없었다. 범은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만족했다. 결론이 내려진 이상, 범이 할 일은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리석은 사람의 무리에게,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야 할 시간이었다. 범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밤 깊은 밤의 더욱 깊은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3.

두 봉우리 사이로 달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함부로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모든 것에 사실 어떤 의미 하나조차 없겠느냐마는, 매봉과 병아리봉은 정말 그 말 그대로의 산세를 갖추고 있었다. 거친 매봉은 금방이라도 아래로 덮쳐오려는 양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에 비해 낮고 둥근 산세의 병아리봉은 땅에 머리를 박고 잔뜩 움츠려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산을 떠난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사람이 아무리 기세가 어떻고 그 모양이 어떻다 떠들어 보더라도 결국 산에 사는 모든 것들에게 산은 그저 산일뿐이다. 그것은 의미 이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속에서는 겉을 볼 수 없다는 전통적인 깨달음의 한 표현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두 접근 방법은 지금 산 안에서 산을 바라보고 있는 처녀에게는 모두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었다.





산사는 두 봉우리 사이의 계곡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즈넉한 달빛을 담은 물이 세찬 미끄럼을 타는 계곡은 아직 젊고 활기에 차 있다. 하지만 산사는 이미 늙었다. 간신히 제 모습만 유지하고 있는 사문 위, 현판은 이미 떨어져나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멀쩡한 구석보다 깨지고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린 곳을 찾아보기가 더 수월할 지경이다. 퇴락한 절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꼬락서니였지만 낡은 것은 건물 그 자체일 뿐, 마당이나 벽에 붙어있어야 할 먼지는 정갈하게 쓸려나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늦은 밤까지 간간히 들려오는 독경 소리가 이 절이 사람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사내는 불을 담은 초롱을 한 손에 쥔 채 절의 뒷마당을 걷고 있었다. 길게 자라 어깨까지 치렁한 머리칼을 보아하니 분명 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늦은 시간에 절을 찾을 참배객이 있을 리도 없으니 아마 아직 의발을 얻지 못한 행자인 듯 했다. 행자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반석 위를 걸어 이윽고 절 구석에 위치한 뒤채 앞에 섰다. 누런 문풍지 뒤로는 아직까지 등잔불이 반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낮은 한숨을 쉰 행자는 초롱을 문설주 위에 걸어두고는 문 앞에 서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곧 방 안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신가요?"

"치성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치성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처녀는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는 달빛이 꽃잎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등잔불을 켜 놓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방 안은 밝았고, 덕분에 치성은 방 구석구석을 한 눈에 다 담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방 어디에서도 토혈한 자국, 혹은 빠진 머리카락 등의 흔해빠진 죽음의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은 어젯밤의 그 난리 통이 정말 있었던 사실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처녀는 치성이 들어와 앉은 다음에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바짝 마른 얼굴 위, 이제는 두 눈동자마저 탁해져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보더라도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었다. 치성은 내심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젯밤에 있었던 소동과 스스로가 토해놓은 피 위에 쓰러져 기절해 있던 처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침 절에 신세를 지고 있던 떠돌이 의원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꼼짝없이 범을 찾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차라리 병이 든 것이라면 약이라도 써 보련만 구완을 마친 의원은 그녀가 병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이렇다 할 생기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그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일찍 죽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병이라기 보단 차라리 천성이라 할 법한 그런 것은 시시한 약이나 구완 따위로 도무지 달랠 수가 없는 법이라며 의원은 혀를 찼다. 처녀는 지극히 살음에서 멀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치성은 그런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큰스님께서 문안을 여쭙고 오라 하셨습니다. 걱정이 크신 듯 하셨습니다."

"그러셨나요."

"몸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의례적인 질문이었고, 처녀는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치성은 이번에는 실제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찌 이리 늦은 밤까지 깨어 계시는 겁니까. 더군다나 그리 창문까지 열어둔 채…… 가을이라곤 하나 밤바람이 퍽이나 차갑습니다. 성치도 않은 몸에 감기라도 들게 되면 정말 큰일이 아닙니까."

"잡생각이 많아 잠이 안 오더군요. 밤바람이나 좀 쐬면 나아질까 하여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절 부르십시오. 말벗이라도 하나 있으면 좀 나을 터이니 말입니다."

"불목하니 일로 언제나 바쁘신 분을 어찌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거친 일에는 단련된 몸이라 괜찮습니다."

처녀는 대답 없이 옅은 미소만 지었다. 시선은 여전히 창 밖에 고정된 그대로였다. 예의범절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무례하다 받아들여질 만한 행동이었다. 치성은 그런 것을 따지기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처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 외모와 선천적인 유약함 때문에 어릴 적부터 다른 이의 놀림감이나 걱정거리, 혹은 기피 대상이 되기 일쑤였던 그녀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일에 대단히 민감했다. 그랬기 때문에 처녀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치성은 그녀의 이유 모를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며 처녀에게 물었다.

"아까 전부터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고 계시는 겁니까?"

처녀는 아무 말 없이 창문 밖의 한 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처녀가 보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챈 치성은 작게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 서쪽에 자리 잡은 한 봉우리에서 밝은 빛의 무리가 실처럼 길게 뻗어 나와 지는 달을 향하고 있었다. 뿜어내고 있는 빛이 달빛과 너무나도 닮아있었기에 그것은 얼핏 보면 달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바라보면 그 빛이 달을 향해 조금씩 물결치듯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그 빛은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원래 자리 잡고 있던 길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는 은가루를 밤하늘 위에 뿌려놓은 듯한 광경이었고 확실히 그것은 좀처럼 눈을 떼기 힘든 장관이었다. 한참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치성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용오름이로군요."

"용오름? 저건 용입니까?"

"아니오. 용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자면 사람에게 용이란 이름을 먼저 허락받은 것은 저 용오름이지요. 용오름의 이름을 따 용의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것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산 아래에서는 저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해 드릴 순 있습니다만, 좀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으니까요."

치성은 창가에서 물러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품 안에서 곰방대 하나를 꺼내며 처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큰스님께는 비밀입니다." 처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행자는 등잔을 기울여 연통에 불을 붙이고는, 물부리를 입에 물고 연기를 한 번 깊숙이 빨아들였다. 샛푸른 담배연기가 등잔불 곁을 맴돌다 이내 창문으로 찾아든 바람에 섞여 사라져갔다. 연기의 말미를 가만히 지켜보며 말을 정리하던 치성은 이윽고 이야기의 운을 띄웠다.

"혹시 달치란 물고기를 아십니까?"

"이름만이라면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본적은 한 번도 없군요."

"그렇습니까. 실은, 저 용오름이란 놈은 바로 그 달치의 무리입니다. 많은 무리가 한꺼번에 줄을 지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저리 빛나는 길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치성의 당치 않은 소리에 처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달치의 무리라니요? 물고기가 어찌 하늘을 난다는 말씀이십니까?"

치성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사람의 왕이 사람을 참으로 사람 된 법으로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사람이 뭇 들과 강의 비밀을 하나하나 파헤치기 시작했을 무렵, 많은 작고 아름다운 것들은 사람의 손을 피해 좀 더 높거나 깊은 곳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고래가 하늘로 올라가고 범이 산 속으로 떠났던 것처럼 다른 것들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곁을 떠난 것들은, 지금 사람이 달치를 모르는 것처럼, 점점 사람에게서 잊혀지다 결국은 모두 낯선 것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달치는 이런 수순을 밟아 사람에게 낯선 것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었다. 달치는 날 때부터 갖춘 그 특이한 성정 때문에 벌써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미 깊은 산 속에 살고 있었다. 사람이 달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그것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먹이를 먹는 것과 제대로 된 잠을 자는 것을 살음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 할 때 달치는 도무지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가 없다. 사람의 머리로는 실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달치는 다른 물고기처럼 풀이나 곤충으로 연명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이 사람의 새끼손가락만한 물고기는 물 위에 비치는 달빛만을 먹으며 살아간다. 달치가 먼 옛날부터 깊은 산 속의 맑은 물 안에서만 살아온 것은 바로 그 특이한 식성에 근거한 바가 컸다. 달과 보다 가까운 높은 곳, 그리고 달빛을 어디보다 많이 머금는 깨끗한 물은 달치의 살음에는 빠져서는 안 될 요소였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달치가 달빛을 이용하는 방법은 먹이로의 활용뿐만이 아니다. 달치는 먹은 달빛 중 일부를 아가미로 흘려내어 실과 같은 형태로 만든 후 그것을 양 나라미 밑에다가 조금씩 모은다. 그리고 알에서 깨어난 지 약 4년쯤 지나면, 그들은 그제까지 모아둔 달빛으로 날개 한 쌍을 지어다 나라미에다 붙이기 시작한다. 그 날개가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추게 되면 달치는 알을 낳은 후 다음 보름달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보름달이 물 위로 그 모습을 비추게 되면, 달치들은 일제히 물 밖으로 뛰쳐나가 달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같은 미물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능력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고 결국 그 비행하는 무리의 모습은 실처럼 길게 달까지 이어지게 된다. 달빛으로 지은 날개인지라 그것과 같은 빛을 발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사람의 눈에는 용오름이란 현상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말을 마치고, 방문을 열어 곰방대를 털어 낸 치성은 그것을 품 안에 갈무리하며 처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용오름은 이야기 도중 끝나있었고 의자에서 내려와 이부자리 위에 앉은 처녀는 드물게 생기로 달뜬 표정으로 행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성은 짐짓 쑥스러운 마음에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재미없는 이야기지요?"

"아니, 아닙니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런 물고기가 있을 줄은 꿈에서도 상상 못해봤군요."

"그러실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으니까요. 후에 가까운 곳에서 두 눈으로 직접 본 후에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셨나요. 저런 광경을 가까운 곳에서 보시다니, 절 안에 떠도는 말대로 속세에 있을 적의 견식이 대단히 넓으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떠도는 말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운이 좋았을 따름이지요."

처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치성을 바라보았다. 치성은 쓰게 웃으며 그 시선을 피했다. 잠시 방황하던 그의 눈은 이윽고 창문을 향했다. 달은 이미 지고, 별만을 띄워 올린 검고 맑은 하늘이 문틀에 가두어진 채 쓸쓸히 장식되어 있었다. 달치가 날아간 방향이라도 쫓는 양 흐릿한 눈으로 그 하늘을 바라보던 치성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떠도는 말일 뿐입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도."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치성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치성은 이내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처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 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부자리 위에 복잡한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따위의 도형들이 이불 위로 물결치다 곧 모습을 이지러뜨렸다. 등잔불은 병든 나비처럼 펄럭거리고 먼 곳에서나마 계속해서 이어지던 독경 소리는 어느 샌가 멈추어 있었다. 풀벌레조차 잠든 늦은 밤에 치성과 처녀는 광막한 고요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침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리였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었던 치성은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내놓지 못할 아쉬움이 가슴 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치성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처녀는 그 의미 없는 행동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치성은 혹시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만약 그렇다면 서둘러 화두를 돌려 이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 해 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치성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무 말 중 하나를 황급히 주워섬겼다.

"크흠! 그나저나, 불쌍한 미물 아닙니까?"

"불쌍한 미물이라뇨? 달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처녀는 고개를 들어 치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손가락만은 처녀와는 분리된 다른 생물인 양 계속해서 이부자리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없는 미물인 다음에야, 사람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본능에만 따라 저리 행동하는 것일진대……. 본디 타고난 것도 아닌 저 작은 날개로, 어딘지도 모를 하늘을 향해 저리 구슬프게 날갯짓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엾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찌 불쌍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불쌍하지 않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자는 미심쩍은 눈으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갈 곳 모르고 떠나는 저 여행이 어찌 가엾지 않다 말씀하시는지,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처녀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이불 위에 그려지던 문양은 미처 다 채워지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처녀는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것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그리고 있던 것이었기에 그것은 동그라미도 네모도 세모도 아닌 그저 삐뚤빼뚤한 선으로만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사막에서 오셨다 들었습니다."

"네?"

"태어나신 곳이 고사라도 지방이시라고…….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것이었는지요."

"아, 아닙니다. 그 곳 태생이 맞습니다. 좀 갑작스러운 말씀이셨는지라 잠시 당황했었던 것뿐입니다.

처녀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입을 열었다.

"사막은 어떤 곳입니까?"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색한 침묵보다는 대화가 훨씬 나을 거라 여겼다. 덕분에 치성은 별 불쾌함이나 거부감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말로 표현하려 해 본 적은 없는지라……."

치성은 눈을 감고 고향의 모습을 떠올렸다. 달빛 아래 순수하게 빛나고 있던 사막과 그것에 비하면 차라리 지저분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하게 어둡던 하늘을 생각했다. 더 이상 창백하지만은 않은, 이글거리는 달이 그 지저분한 밤을 불태우고, 모래는 희다는 말도 모자라 차라리 푸른빛으로 백열하고 있다. 걸으면 걸을수록 멀어지는 지평선,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별과, 별과, 또 별의 무리들. 물론 사막에 밤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사막은 비록 산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치성이 지금 떠올리고 있는 사막은 그 수많은 얼굴 중 가장 평화로운 것이다. 비록 사막의 밤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와 고래의 노래를 그 안에 숨기고 있다 해도 폭발하는 태양과 모래 폭풍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왜 하필 그 모습을 떠올렸는지는 생각의 주체인 치성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떠오른 생각을 솔직하게 처녀에게 고백했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리고…… 아니, 죄송합니다. 더 이상은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제 말솜씨가 부족한 탓인 듯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막은 먼 곳에 있겠지요?"

“아주 먼 곳에 있지요. 뱃길로도 두 달 넘게 걸리는 곳입니다.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치성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헌데,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물으시는 겁니까?"

처녀는 드물게 수줍은 표정으로 치성을 바라보았다. 치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을 권유하자, 처녀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저, 어리석은 여자의 생각이라 비웃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처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등잔불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막에는, 사람의 왕께서 사신다지요?”

치성은 등줄기에 오한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치성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치성의 그런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처녀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람의 왕께서는, 사람의 소망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적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또 허황된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만…… 쉽게 떨쳐내기가 어렵군요. 요즘 들어 더욱 그러합니다. 몸이 불편하니 마음마저 어지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치성은 침묵했다.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의 왕이, 사람의 소망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 준다는 말은 결코 허황된 헛소문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의 왕은……. 때로는 알기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찾아오기도 한다. 치성은 이제껏 느껴왔던 모든 절망을 하나하나 꺼내어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그제까지 열려 있던 창문을 닫으며 겨우 몇 가지 단어를 골라 말을 만들어내었다.

“들어 주실 겁니다.”

“네?”

“그 분께서는 들어 주실 겁니다.”

처녀는 미소를 지었다. 치성은 차마 그 미소를 마주볼 수 없었다.

창문을 잘 걸어 닫은 치성은 요즘 범이 마을에까지 어슬렁거린다는 소문이 있으니 방문 간수를 잘 하라는 당부와, 아무리 잠이 안 온다 하더라도 눈을 좀 붙이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처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찾아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피곤하신 분을 이리 붙잡아 두어서 죄송스럽군요. 아닙니다. 그럼 편안히 주무시길 바랍니다. 이야기가 길었던 탓에 밖에 걸어두었던 초롱은 이미 꺼져있었다. 초롱을 한 손에 든 치성은 방문을 닫고, 달이 진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다음,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처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치성의 발걸음 소리를 세며 잠을 청하던 처녀는 얼핏 창문 밖에서 들려온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떴다. 바람소리라고 생각하기에는 좀 규칙적인 느낌이 있었고, 또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도 같았기에 처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바람에 흔들거리는 수풀만이 처녀를 반겨주었다. 한참 밖을 내다보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처녀는 다시 창문을 닫고 이부자리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달치의 비행과 사막에 대해 생각했다. 잠들기에 그리 적합한 생각은 아니었다. 결국 처녀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제대로 된 먹이를 먹는 것과 제대로 된 잠을 자는 것은 살음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다. 그 명을 다한 것은 먹이를 먹을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다. 설령 혼백이 깨어 있다 하더라도 죽은 몸은 더 이상 그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밤, 처녀는 그 살음을 다했다. 그리고 처녀는 다음날 밤이 되어서야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옆구리께로부터 날카로운 충격이 느껴졌다. 바위가 많은 부근이다. 뾰족한 돌에라도 찢긴 것일까. 하지만 범에게는 아픔을 느낄 여유조차도 없었다. 범은 길이 아닌 길을 달리고 있었다. 가장 노련한 사냥꾼도 걷지 못할 험한 길이었다. 제멋대로 무성하게 돋아난 수풀이 범의 몸을 이리저리 할퀴고 지나갔지만 범에게는 길을 선택할 여유가 없었다. 범은 달리기 위해 태어난 생물처럼 달렸다. 범은 달릴 수밖에 없는 생물처럼 달렸다. 이리도 숨 가쁘게 달려본 적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이리도 절박하게 달려본 적은 또 얼마만인가. 범에게 있어 사냥이란 결코 절박한 행위가 아니다. 살기 위해 사냥하는 짐승과는 달리, 사냥하기 위해 사냥하는 사람과도 달리, 범은 사냥을 지배한다. 절박하게 노래하는 고래가 없듯이, 절박하게 사냥하는 범 역시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이리도 절박한 범의 달음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랬다. 범은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에 쫓기어?

이윽고 범이 도착한 곳은 산의 꼭대기였다. 거친 바위 틈 사이로 가까스로 뿌리를 뻗은 늙은 솔이 바람에 비틀거리고 있었고 솔의 구부러진 뿌리 밑으로 작은 샘 하나가 통탕거리며 솟아나오고 있었다. 범은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샘을 향해 다가갔다. 범은 무엇인가를 구하는 듯도 한 눈으로 샘 안을 바라보았지만, 맑은 달빛만이 가득할 뿐, 샘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범은 애타는 손짓으로 샘 안을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한참을 샘 곁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범은, 고개를 들어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범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애가 끓는 목소리로 아무런 의미 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달치가 가엾지 않다고?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달은 너무나 멀었다. 범은 이를 악물었다.

달치가 가엾지 않다고?








5.

싸늘한 밤바람이 처마 밑 풍경을 튕겨 올렸다. 적막한 산사의 밤, 풍경 소리는 홀로 외롭다. 벗이 없는 소리는 언제나 덧없고 단지 한 번의 울림일 뿐이다. 풍경이 바람에 울리는지 바람이 풍경에 우는 것인지, 소리는 그 단 한 순간에 의해서 살고 단 한 순간을 지나서 죽는다. 남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한 찰나만이 있을 뿐이다. 찰나에 모든 것이 살고 없어지며 그렇기에 찰나 위에는 결국 의미 없는 의미만이 걸려 있다.

달은 처마 위에 걸려 있다. 보름을 막 지난 달은 살짝 이지러진 채 마치 어린 사슴의 눈망울 같다. 밤은 눈을 뜨고 있다. 노래 같은 밤의 숨소리에 산도 잔뜩 움츠러들었다. 달빛을 머리에 인 나무들이 약속도 없이 같은 손사래를 치고 가끔 어디선가 가냘픈 날갯짓 소리가 들려온다. 향기처럼 애잔한 별은 너무나 멀다. 그리고 해가 너무나 짧듯이, 밤은 너무나 길다. 꿈이 너무나 길듯이 사람은 너무나 짧다. 그 끝은 언제나 같지만 실마리는 이미 먼 곳으로, 차라리 신기루처럼 지평선 위에서 아른거린다. 이제는 차마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긴 세월동안 반복되어 온, 그런 밤이었다.

밤을 등진 채 불당에 앉아 있던 선사는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 소리에 눈을 떴다. 참선을 방해한 무례한 방문객에게 불호령을 내리거나 고개를 돌려 그의 신원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참선 중이었다면 주위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그 방문객은 선사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이었다. 그가 먼저 인사말을 꺼내놓지 않는 이유는 혹시 선사의 참선을 방해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눈 앞에 적적하게 놓인 어둠을 잠시 응시하던 선사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치성이냐."

"그렇습니다."

치성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선사의 등에 어렴풋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불당은 이렇다 할 문도 하나 없이 활짝 개방되어 있었다. 때문에 벌써 며칠 째 깨끗하기만 한 가을 하늘, 밤의 명암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대로 치성의 등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희미한 달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퍽 어두웠다. 그가 바라보지 않고 그를 바라보지 않는 선사의 뒷모습이 말했다.

"그 아이는 어쩌고 있느냐."

치성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계속 방 안에 누워 있기만 합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후 쭉 그러합니다."

"한이 많았던 생은 그런 법이다. 고이 묻고 가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게야."

치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처녀의 죽음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다. 곧 처녀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닥쳐온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을지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슬픔은 범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만약 범이 사람에게 죽음을 훔쳐가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조금의 희망 정도는 가슴에 품은 채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편안한 죽음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 또렷한 정신을 가진 채 죽음을 빌려 쓰러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지금의 처지보다야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치성의 마음을 이리 괴롭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장례는 내일 치르도록 하겠다. 그 아이에게 그리 전해라."

비록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치성의 귀에 그 말은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그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선사의 뒷모습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치성은 그 뒷모습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좀 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시간이라면 충분하지 않았느냐. 그 아이의 나이가 열일곱이라 들었다."

확실히 17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다. 하지만 치성은 선사의 말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는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있는 내내 죽음을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너무 가혹하십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사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죽은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너, 너무 급하십니다. 며칠, 아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시간을 더 주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 할 일이다. 오늘과 내일에 대체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게냐?"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죽은 이의 마음이 어찌 다스려진단 말이냐."

치성은 결국 탄식했다.

"아직은 죽지 않았잖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치성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처녀가 아직까지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있고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과 그녀의 죽음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였다. 선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치성은 송구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여전히 치성의 마음은 방금 선사가 꺼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치성아."

치성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네. 스님. 말씀하십시오."

"네가 이 절을 찾은 지도 벌써 다섯 해가 넘었구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아직까지도 네 머리를 깎아주지 않았는지 알고 있느냐?"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잠시 주뼛거리며 선사의 눈치를 살피던 치성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제 깨달음이 아직 부족하기에……."

선사는 헛기침으로 치성의 말을 끊었다.

"그게 아니다."

"네?"

"그게 아니다. 치성아."

선사는 입을 다물었고, 치성은 스스로의 미욱함이 선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몸 둘 바를 몰라했지만 선사가 입을 다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선사는 치성이 처음 절을 찾아왔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5년 전의 어느 가을날, 남루한 차림으로 절을 찾아와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던 치성은, 그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차갑고 더러운 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 담담한 태도로 출가할 뜻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선사는 치성의 이야기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떠한 부연설명도 없는 담백한 거절이었다. 이유를 따져 물을 법도 하건만 그는 아무런 대꾸조차 없이 당장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의 팔을 내려치려 했다. 손을 들어 그 행동을 제지한 선사는 잠시 그를 살핀 후 입을 열었다. '무엇에 쫓기고 있는가?' '죄에 쫓기고 있습니다.' '무엇을 찾으려 하는가?' 치성은 선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벌을 찾으려 합니다.'

반나절 동안의 긴 침묵 끝에 선사는 그의 입산을 허락했다. 치성은 행자의 신분으로 절에 남았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치성은 계속해서 고된 산사의 일을 거의 혼자 도맡아 왔다. 선사는 가끔 그를 불러 일상적인 대화나 나눌 뿐 어떤 가르침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치성은 그에 대해 불평 한 마디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절 안의 다른 중들은 그 기묘한 관계가 선사가 입적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고 선사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옛 기억을 뒤적거리던 선사는 이번에는 죽은 처녀를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내린 결정과 그것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 생각했다. 답은 처녀를 절로 불러들였던 그 날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는 도중 내리게 되는 대부분의 결정이 그렇듯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었다. 선사는 긴 침묵 끝에 오랫동안 아껴왔던 말을 꺼냈다.

"달이 이미 네 안에 있는데, 왜 억지로 날개를 지으려 하느냐?"

선사가 말하는 의도를 짚어낼 수 없었던 치성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등으로 그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던 선사는 감고 있던 눈을 지그시 열었다.

"그 아이를 사랑하느냐."

풍경 소리가 세 번 귓가를 스쳐지나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치성은 무언가가 천천히 등을 타고 기어 올라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느린 속도로, 하지만 확실하게 치성의 몸을 잠식해 오고 있었다. 치성은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확인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후에야 겨우 정체를 드러낸 그것은 광막한 밤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밤은 무게가 아닌 무게로 난폭하게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치성은 광막한 밤을 두 어깨에 진 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두려움이지만 그것보다는 예감을 더욱 닮은 무언가가 치성의 가슴 속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사람의 마음으로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어느 바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파도처럼, 거칠고 잔혹했다. 납작해지고 또 휩쓸리는 것을 몇 번을 반복했을까. 결국 치성은 눈물과 함께 말을 쏟아내었다.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선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뒷짐을 진 채 어둠 저편의 먼 곳을 바라보던 선사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가 곧 벌인 법이니……." 하지만 가까스로 흐느끼고 있는 치성에게 그 말은 닿지 않았다. 선사는 고개를 돌리며 치성에게 말했다.

"잔인한 말이라 여겨지겠지. 하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스님……."

"애초부터 네 마음이 머무를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절이란 너처럼 스스로를 탓하고 책하기 위해 찾는 곳이 아니다. 버리기 위해, 잊기 위해 찾아야 할 곳이다. 네 간곡한 청에 그만 마음이 흔들려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었다만…… 아무래도 이 늙은 중이 노망이 들었던 게야. 결국 네게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치성은 울먹이며 말했다.

"모두 제 수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찌 스님의 탓이라 말씀하십니까……."

선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사의 손에는 어느새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보따리를 바라보던 선사는 그것을 치성 앞에다 가볍게 던졌다. 눈앞에 떨어진 보따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치성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선사를 향해 들었다. 선사는 불당 밖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의발이다."

"스님!"

"내일부터는 일을 그만두고 짐이나 꾸리어라. 그 동안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갈 곳을 잘 찾으면 나 같은 땡초 노릇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치성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마침내 통곡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스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네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찌 내가 용서를 하겠느냐." 잠시 입을 다물고 치성을 내려다보던 선사는 걸음을 떼어놓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아이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는 머물러도 좋다."

선사는 엎드려 울먹이고 있는 치성의 옆을 지나쳐 불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치성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한 채 선사의 걸음은 결국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멀어져만 가는 선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치성은 일어설 생각도 못한 채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바람이 불었다. 풍경이 소리를 냈다. 밤은 눈을 뜬 채 낮이 되는 꿈을 꾸었고 낮은 아직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녀는 눈을 떴다. 하지만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누군지 모를 객 역시도 문만 활짝 열어놓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다. 처녀와 객은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서도 서로에게 퍽 무관심했다. 처녀는 자리에 누운 채 어두운 허공을 향해 말했다.

"장례는 언제입니까."

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일인가요? 모레? 글피일 수도 있겠군요. 갑작스럽게 닥친 일인지라, 미리 장례를 준비해 둘 여유는 없었겠지요. 이 일이 갑작스럽다 여기는 것이 저 혼자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좀 지나치게 앞서나간 생각이겠지요. 그러니 제 멋대로 글피쯤이라 짐작하렵니다. 사흘이라.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시간일 것 같군요. 저는 마음에 듭니다."

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상여에 타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지는군요. 푹신할까요, 아니면 딱딱할까요? 나무로 짠 것이니 편안할 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기대됩니다. 남의 다리로 걸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우습게 들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 무등 한 번 제대로 타 본 적이 없습니다. 귀신들렸다고 소문이 자자한, 가문의 치부인 계집이 마음 놓고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고 싶어요."

처녀의 눈에서는 어느 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꼬리를 타고 내려온 눈물이 하얀 베갯잇 사이로 촉촉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았다. 가득 고인 눈물을 짜내지도 않았다. 처녀의 몸에서 유일하게 색을 찾아볼 수 있는 곳, 그나마 남들처럼 까맣지 않고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는 그저 일렁거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처녀의 얼굴에서 울고 있는 부분은 눈밖에 없었다. 처녀의 얼굴에서 웃고 있는 부분은 아무 곳도 없었다.

"살고 싶어요. 살고 싶습니다. 아직 스무 해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짧습니다. 이제껏 남에게 받아 본 관심이라고는 질시, 두려움, 조롱, 혹은 동정뿐이었습니다. 너무 적습니다. 세상을 손톱만큼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껏 늘 그래왔지만, 이번에도 기댈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날렸다. 나무는 그것이 못내 아쉬운 듯 앙상해져만 가는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낙엽은 계속 떨어졌다.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네 부모의 잘못도 아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네. 맞는 말씀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살았을 뿐인데, 그것에 대해 잘못을 묻는 건 바르지 않은 일이겠지요."

처녀는 한숨처럼 말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저는 누구를 미워해야 되는 거죠?"

"나를 미워해라."

그 목소리는 치성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절에 거처하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처녀는 그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막다른 곳에 서 있었다. 처녀의 입가에 어린아이가 그린 낙서 같은 웃음이 걸렸다.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그렇듯이, 저는 당신을 미워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 모든 이를 죄인으로 만들지 마라."

처녀의 몸이 움찔하고 굳었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는 말과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이냐? 결국 아무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말은 모두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잘못을 저지른 이는 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도 있다."

"그럼 잘못을 저지른 이는 누구입니까?"

"너를 그렇게 낳은 네 부모가 잘못을 저질렀다. 너를 백안시한 주위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 너는 그 모두를 미워해도 된다."

처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께서야말로…… 지금 모든 이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너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처녀는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거세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너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처녀는 결국 참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처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젖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그 울음 속에서 그녀는 이제껏 그렇게도 애타게 매달려왔던 것이 조금은 충족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충족은 죽음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처녀는 그것이 서글퍼 더 크게 울었다. 객은 방 밖에 가만히 선 채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참을 울던 처녀는 눈물로 얼룩진 목소리로 겨우 말을 늘어놓았다.

"왜…… 왜 이제야…… 왜 이렇게 늦게……."

"죽기 전에는 아무것도 늦은 게 아니다."

"난……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죽은 여자에게 이런 희망을……."

객은 처녀의 울음소리를 남겨두고 등을 돌렸다. 방문은 열어둔 채였다. 산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으며 객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직…… 죽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산도 따라 울었다. 밤은 눈을 감고 낮을 맞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긴 세월동안 반복되어 온, 그런 밤이었다.







6.

처녀가 기거하던 뒤채에는 새벽부터 등이 걸리고 방이 붙었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종소리가 산사의 잠을 깨웠고, 해가 뜨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중들은 마을에서 일손을 거들 사람을 불러오고, 제기를 꺼내어 닦고, 음식을 준비하는 따위의 일로 정신없는 오전을 보냈다. 다비식도 아닌 일반 상례를 준비하는 것은 처음 겪는 경우였기에 그들은 다소 혼란스러워하며 그 일을 마쳤다. 어차피 하루 만에 모든 상례 절차를 끝낸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한 이야기였고 때문에 대부분의 의식은 간략하게 준비되었다. 먼지 쌓인 상여가 장식 하나 없이 급하게 들어오고 마당에는 퍽 간소하게 전이 차려졌다.

순식간에 발상이 끝나고 습과 염도 금방 마무리되었다. 상주도, 제대로 된 조문 하나도 없었다. 습을 위해 급히 마을에서 불려온 아낙네들의 무성의한 애곡 소리만이 가끔 들려올 뿐 눈물 한 방울 찾아볼 길 없는 건조한 장례식이었다. 종일 혹사당한 중들은 얼굴에 까불거리는 햇살을 치우며 방장 스님의 조급증에 대한 불평을 작은 목소리로 늘어놓았고 상두꾼들은 그늘에 앉아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나누었다. 피곤한 염불 소리와 목탁 소리가 어쩌다 한 번씩 울려 퍼질 뿐 절은 상중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석양이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날갯짓을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천구의 차례가 돌아왔다. 아낙네들이 까불거리며 전을 구석으로 거둬들이자 상두꾼들은 하품을 하며 상여를 마당 한가운데로 옮겨놓았다. 마당에 가득히 깔려 있던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튀기고 풍경이 딸랑거리며 소리를 냈다. 뒷채 앞을 지키고 있던 중 하나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와 동시에 뒤채에서 마당까지 열을 지어 서 있던 중들이 일제히 염불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처녀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세상을 함부로 덧칠하던 석양은 처녀의 새하얀 몸에도 붓을 대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가지런히 마주잡은 손, 그리고 너울거리는 수의 자락은 삽시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녀는 마치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처녀의 발이 닿는 곳마다 가득하게 쌓여 있던 은행잎들이 불티처럼 솟아올라 바람에 까불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염불이 멈추었고 아낙네의 수다가 그쳤다. 그리고 헤벌쭉거리던 상두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기나 했냐는 양 이내 하던 일들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처녀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상여를 향해 다가왔다. 상여 앞에 서서 처녀를 기다리던 선사는 눈을 감았다.

치성은 먼발치에서, 떨리는 눈으로 선사 앞에 무릎 꿇는 처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녀가 고개를 숙이자 선사는 요령을 흔들며 조사를 읊기 시작했고 그녀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은 채 그것을 들었다. 차마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던 치성은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곧 목이 울컥하고 메이는 것을 느꼈다. 조사가 끝나면 헌화가 이어질 차례였으나 손에 꽃 한 송이라도 들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치성 역시도 미처 헌화에 대해 생각 하지 못했다. 파문 선고나 다름없는 어젯밤 선사의 말에 괴로워하느라, 처녀가 가는 길에 꽃을 바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치성은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꽃. 꽃. 무엇이든 좋다. 곱지 않아도 좋고 향기가 없어도 좋다. 그녀의 가는 길에 꺾어다 뿌릴 꽃이 어디 없나? 절의 살림은 어제까지만 해도 모두 치성 한 사람의 몫이었고, 그 활약을 예의 주시했던 중들은 그가 속세에서 가졌던 직업에 대해 흥미로운 가설 몇 가지를 세워두고 있었다. 수많은 가설 중에는 '사람의 왕이 지극히 총애했던 정원사' 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끔 중 하나가 찾아와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려 하면 치성은 그것을 잔잔한 웃음으로 받아 넘기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치성은 그 따위 소리를 지껄였던 자들과, 더불어 스스로의 꼼꼼한 성격을 모두 쳐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넓은 마당에는 꽃은커녕 잡초 한 포기 찾아볼 수 없었다. 미친 듯이 은행잎을 헤치며 돌 틈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치성은 결국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나일 것이다.' 어쭙잖은 상상이었다. 치성은 처녀를 구원하기는커녕 지금 그녀의 상여길에 뿌릴 꽃 한 송이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책감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사방으로 뿌렸다. 주위에는 온통 처녀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뿐이었다. 여전히 곡소리 한 번 들려오지 않았고 멀리서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마저 들려왔다. 치성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선사의 말을 생각했다. '장례는 내일 당장 치를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우매함을 저주했다. 울어 줄 사람 하나 없는 처녀에게 있어 사흘 미루어진 장례는, 곧 사흘 동안의 무관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아니야.'

치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두 번 내쉬었다.

'내가 있어.'

치성은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언가에 끌려가듯 처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채 두 발자욱도 가지 못하고 멈췄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발밑을 바라보았다.

꽉 쥐어진 주먹이 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치성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 후회하고 싶지 않았지만, 후회하기에도 너무 늦은 때였다.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예리하게 날이 선 시간이 치성의 몸을 엉망진창으로 할퀴고 지나갔다. 치성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애타는 눈으로 상여 위에 오르는 처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선사가 상여 앞에 향을 올리고 폐식을 선언하자 처녀는 상여 위로 올라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두꾼들이 허리에 힘을 주어 상여를 끌어올렸고, 곧 앞말꾼의 입에서 나지막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가거리 가거리 산에 가거리 그늘지거든 산에 가거리
보드라 본다 누가 보드나 큰 도둑이 숨어 본다


상여말이 시작되었다. 오래 전에는 상엿소리라 불리던 것이지만, 첫 번째 도둑이 사람에게서 노래를 훔쳐간 이후 말 이외의 소리는 모두 사라져버린 지 오래이다. 도둑맞은 죽음은 범에게 구걸하러 갈 수나 있지만 이미 고래가 높은 하늘로 올라가 버린 지금 노래는 빌려 쓸 수도 없는 희귀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전해오는 말로는 상을 치르는 것이 정말 하나의 축제였던 시절도 있었다 한다. 영근 석류처럼 터지는 슬픔을 정성들인 노래와 웃음으로 달래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앉아 망자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는, 그런 시절이 과거 어느 날에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두 사람에게 죽음도 노래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에 와서는 함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이다. 지금은 이런 상례조차 거치지 않고, 작별 인사만을 나눈 후 범을 찾아 산으로 쫓기듯 떠나는 사람도 많은 형편이다. 범이 죽음을 훔쳐간 후 그것을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고래가 노래를 훔쳐간 후 그것을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치성은 그런 사실조차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소리 없이 울며 입을 열었다.

"나는……."

상두꾼들이 앞말을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야 어야 어어이 호야 너으 너이 너허라 호야


앞말꾼은 요령을 흔들며 상두꾼을 인도했다. 상여의 움직임과 함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도둑아 도둑아 나를 주거라 채 간 것을 도로 주거라
피를 주고 살을 주니 니가 나를 먹고 지어

어야 어야 어어이 호야 너으 너이 너허라 호야


상여가 치성의 눈앞으로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치성은 젖은 눈으로 처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처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두꾼의 걸음과 더불어 느릿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호롱불 같은 모양새였다. 숨을 씨근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치성은 마침내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설득시켰다. 치성은 일그러진 얼굴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처녀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이……. 뭐였지?

치성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애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처녀는 치성을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치성의 앞을 속절없이 지나쳐, 이윽고 일주문을 나선 상여는, 상여말과 함께 점점 산 깊은 곳을 향해 멀어져갔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은 이들은 시답잖은 농담과 소소한 웃음을 입에 담으며 장례의 흔적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등이 도로 내려지고 붙었던 방도 떨어져 불태워졌다. 촛불이 꺼졌다. 하지만 향 내음은 아직 그윽했다.

치성은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왜 스스로가 여기에 서 있는지, 심지어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억은 혼란을 구성하는 한 요소 정도로 전락했고 판단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치성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어젯밤 선사가 남긴 말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달이 네 안에 있는데, 왜 억지로 날개를 지으려 하느냐?'





상여는 산 중턱쯤에서 멈췄다. 더 이상 올라가다가 자칫 범이라도 마주치면 고인뿐만이 아니라 상두꾼들마저 몰살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판판한 땅에다 상여를 내려놓고 장죽을 한 대 피워 물며 피로를 달랜 상두꾼들은 서로 시시덕거리며 왔던 길로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상여는 다음날 낮이 밝거든 남은 시신(어느 정도나 남을지는 범이 허기진 정도에 달린 문제다)과 함께 가지러 올라오는 게 관습이었고 홀가분한 맨몸이 된 상두꾼들은 날랜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자리에 그대로 남은 것은 처녀뿐이었다.

밤이 내려온 산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달은 떴지만 그물처럼 촘촘한 수관 위에서 달빛은 병든 잉어처럼 파닥거릴 뿐이었다. 상여에 매달린 초롱이 아직 밝았기에 그럭저럭 주위를 분간할 정도는 되었지만 건너편 나무 뒤 그림자 사이에 무엇이 숨어있을지는 도통 알 수가 없는 문제였다. 비록 그 생을 다했다고는 하나 두려움은 아직 살아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랜 처녀는 초롱을 한 손에 들고 상여 위에서 내려왔다. 낙엽이 발에 밟히며 부스럭 소리를 냈다.

처녀는 상여를 뒤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숲은 점점 깊어졌고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거리는 두 치 앞에서 한 치 앞으로 줄어들었지만 어차피 별다른 목적지가 없는 처녀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굳이 목적지를 이야기하자면 범이 있는 곳이 되겠지만 그녀는 범이 지금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사실 상여 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더라도 범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상여를 세우는 곳은 늘 같은 자리로 정해져 있고 범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녀가 걷는 이유는 그 사실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저 가만히 있기가 심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무작정 걷는 것도 심심해졌다. 싸늘하게 식은 몸은 피로나 통증을 느끼지 못했고 이미 걷는 것은 숨 쉬던 것만큼이나 편한 행동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처녀는 걷는 것 대신 태어나서 처음 타 본 승용기구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여를 타는 것은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피가 몸 안을 흐르지 않으니 다리가 저릴 이유는 없었고 종아리 근육이 뭉쳤다거나 멀미가 들었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지만, 운송수단을 통한 이동이 불러오게 마련인 그런 재난을 모두 차치해 두고서라도, 그것은 그냥 재미가 없었다.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니 조금 우스운 기분이었다.

"킥."

처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초롱을 사방으로 들이대었다. 나무와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일그러진 그림자가 그녀의 손짓을 따라 나무와 나무와 나무 사이로 일그러진 춤을 추었다. 기괴한 음영으로 뒤덮인 숲은 마치 그녀를 비웃고 있는 듯 했다. 처녀는 그 모습이 방금 그 소리보다 더욱 무섭다고 생각하며 휘두르던 팔을 멈췄다. 그리고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킥' 이었던가? 아무래도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소리 같았다. 처녀가 아직 어렸을 적, 그녀의 몸종이 한심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 들어본 소리였다. 치성이 방장 스님의 외모에 대한 농담을 던졌을 때 들어본 소리였다. 그리고……. 그 외에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뭐야. 내 웃음소리였구나.

처녀는 등을 나무에 기대고 조용히 웃었다. 고작해야 웃음소리 하나에, 그것도 스스로의 웃음소리에 놀라 그 호들갑을 떨었다는 게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웃어본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자기 웃음소리가 낯설 법도 했겠지. 웃음을 그친 처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숨을 한 번 고르고 난 다음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은 오늘 새벽에 다 흘려버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지 남아있었구나. 처녀는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내었다. 하지만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흘러내렸고 결국 그녀는 그것을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눈 안에 가득 찬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지만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르나 늦으나 갈 곳은 범의 뱃속이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앞을 가로막는 수풀을 걷어내며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수의 끝자락이 온통 풀에 젖었고 다리는 생채기로 가득해졌다. 어느새 신발 한 짝이 벗겨졌지만 처녀는 그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태어나서 세 번도 못 웃어본 게 뭐가 나빠? 그럼 안 돼?"

시야가 흐려지자 대신 귀가 예민해졌다. 하지만 막막한 어둠 속에서 예민해진 귀는 처녀에게 폐가 되었으면 되었지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부엉부엉. 이건 부엉이 울음소리겠지. 개굴개굴. 근처에 개울이라도 있나본데. 귀뚤귀뚤. 가을은 가을인 모양이구나. 푸드덕, 후다다닥! 사, 사람 살려요!

"사람 살리긴 뭘 살려! 벌써 죽은 주제에 뭘 살려달라는 거야!"

처녀는 주저앉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 서슬에 초롱이 떨어지며 바닥을 구르다가 꺼졌다. 원래 그리 밝지도 않았던 밤의 숲은 그 얼마 안 되던 빛마저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처녀는 그 어둠 속에서 고함을 지르며 울었다. 하지만 죽은 몸은 눈물을 짜낼 기력도 없었다. 얼마 남아있지 않던 처녀의 눈물은 곧 모두 소진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만 더 서러워졌다. 처녀는 목으로 울고 가슴으로 울다가 급기야 몸 전부를 사용해서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한 시간 여나 계속되었다. 처녀는 습관처럼 씨근거리며 멍한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흙을 느릿하게 부스러뜨리며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계집애."

처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위로받고 싶은 거야? 위로라면 새벽의 꿈으로 충분했어. 이제 죽어야 해."

처녀는 고개를 들었다.

"가자."

그녀는 말라붙은 눈물을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녀는 어느 새 숲 속에 비스듬히 자리 잡은 공터 한편에 앉아있었다. 공터 한가운데에는 사람 둘 정도는 문제없이 다리를 뻗을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반석이 자리 잡고 있었고 바위 주변으로는 이름 모를 풀들이 모도록하게 돋아나 있었다. 잡초가 먼저 자리를 잡고 버틴 덕분에 나무의 씨가 도무지 싹을 틔우지 못한 곳인 듯 했다. 덕분에 하늘을 향해 확 트인 공터 위로는 흐붓한 달빛이 한가득 쏟아져내려오고 있었고 가끔 달빛 사이로 낙엽이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범이 있었다.

범은 공터 반대쪽, 처녀와 반석을 사이에 두고 앉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반석의 크기와 처녀의 눈높이를 고려해 볼 때 같은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녀의 눈에 들어올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범은 너무나 거대했다. 범의 눈은 갈 길을 잃고 지상에 떨어진 별처럼 빛나고 있었고 코는 처녀의 두 주먹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컸다.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지만 만약 끝까지 벌어진다면 사람의 머리 두 개 정도는 문제없이 드나들 수 있을 듯 했다(과연 그 잔인한 폭력에 노출된 사람의 정신마저 문제가 없을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그리고 통나무 같은 목 밑에 자리 잡은 어깨는 어른 한 명을 그대로 들어다 눕혀놓을 수 있을 것 같이 넓었다.

처녀는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동안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의 둔감함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녀의 몸은 이미 들숨도 날숨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처녀가 계속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은 습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약 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가 흐른 후, 무언가 말을 꺼내놓으려다 겨우 숨이 모자라단 사실을 깨달은 처녀는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결국 말을 하지는 않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지?"

"비명을 지르려고 했었습니다만, 잠시 생각해 보니 이미 적당한 때를 놓친 것 같았습니다."

범은 그렇군, 이라고 말하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던 처녀는 그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숨을 도로 골랐다. 대신 그녀는 입을 여는 것으로 이리저리 날뛰는 마음을 안정시키려 시도했다.

"그런데,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다."

"어떻게?"

"턱을 벌리고 입술과 혀를 움직임과 함께 목을 울리는 방법으로. 가끔은 그 중 몇 가지 방법을 생략해야 될 때도 있다."

처녀는 대단한 진리라도 들은 양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본 범은 그만 웃어버렸다.

"무섭지 않나?"

"네?"

"퍽 침착해 보이는군."

"아…… 그렇습니까.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좀 다릅니다. 사람의 정신은 퍽 나약한지라,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오면 스스로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일 때가 가끔 있습니다."

"미친 건가?"

"글쎄요.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도 않고 당신이 제 아들처럼 보이지도 않으니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체념했나?"

처녀는 우는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범을 향해 다가갔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반석 옆에서 멈췄다.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무언가를 잠시 고민하던 처녀는 머뭇거리는 손을 애써 옷고름으로 가져갔다.

"벗는…… 것이 좋겠습니까?"

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녀는 그 침묵을 찬성의 뜻이라 판단했다.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옷고름을 풀어내었다. 그리고 어깨를 움직여 껍질을 벗듯 수의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처녀의 몸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내가 보기에도 그리 맛있어 보이진 않아.' 달빛 덕분에 푸르스름한 빛마저 띄는 피부와 뼈와 가죽밖에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닌 몸은 확실히 포식자의 구미를 당기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처녀는 내심 한숨을 내쉬다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란 걸 깨닫고 정색했다. 옷을 잘 개어 바닥에 놓아두고 한 짝 남은 신발을 벗어 그 위에 올려놓은 처녀는 반석 위로 올라가 반듯하게 누웠다. 깍지 낀 손을 아랫배에 올려놓은 처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다.

다시 두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세 시간이 막 지나갔을 무렵 처녀는 눈을 떴다.

범은 반석 바로 곁에까지 다가와 처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척에서 본 범의 모습은 멀리서 본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녀는 산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두 번째로 위험한 곳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가장 위험한 곳에서는 보려 마음먹기도 전에 몸이 으깨질 테니까. 하지만 범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처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떨리는 눈으로 범을 마주볼 수 있었다.

"왜……?"

"왜 잡아먹지 않느냐고?"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은 눈을 반쯤 감으며 처녀에게 물었다.

"죽고 싶으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으니까요."

범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기 전에는 아무것도 늦은 게 아니다."

처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처녀의 모습은 그녀의 몸 아래에 깔린 반석과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처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한참 동안 말없이 범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꿈이 아니었군요."

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었습니까?"

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intro.

밤은 하늘 어디에나 펼쳐져 있었다. 바다처럼 깊은 밤 속을 작은 별은 꼬리를 끌며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어스름한 구름이 바람의 손에 이끌려 길고 긴 여행길의 첫 발을 나서고 있었다. 밤이 곱게 물든 하늘은 차라리 땅과는 다른 시간 속에 존재하는 듯 했다. 만약 하늘과 땅의 시간이 같은 흐름 속에 있다면, 저 영원처럼 고요한 밤을 대체 어떤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삶과 죽음을 영원처럼 반복하는 저 달을 대체 어떤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달은 하늘 가운데 떠 있다. 달의 나이는 보름이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가득 맺힌 달빛이 하늘을 괴괴히 비추고 있었고 빛의 침묵 속에서는 차라리 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어쩌면 흐느적거리는 춤사위 같기도 하다.

아니다. 달은 분명 춤을 추고 있었다. 달은 춤으로 모든 밤을 주관하고 있었다. 춤으로 모든 밤의 목소리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고 아침이 밝아오기 전에,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한 번만 더, 부디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길, 마지막이지만 마지막이 아닐 바램을,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범은 생각했다. 달치는 어쩌면, 그런 달의 소원마저 작은 가슴 속에 담고서, 스스로 타고난 것도 아닌 작은 날개로 달을 향해 날아올랐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 해의 여름밤은 몹시도 더웠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역병의 흔적은 하늘부터 열에 들뜨게 했는지, 차가운 달빛으로도 타는 밤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별마저 빛을 잃은 것처럼 보였고 바람조차 이미 잦아든 밤이었다. 사냥의 흥분과 사람의 더운 피로 한껏 달아오른 범의 몸은 흡사 봄볕에 꿈틀거리는 아지랑이처럼 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고, 이제는 정말 정신조차도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식욕조차도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기에 범은 반쯤 뜯다 남은 사람의 시체를 두고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내 심한 갈증이 범의 온 몸을 엄습했다. 샘은 대체 어디였더라. 범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열에 한껏 들뜬 범의 눈 때문이었던지, 분명 여느 때의 산이었지만 풍경은 아무래도 낯설었다. 한참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범은 입맛을 쩍 다시며 발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코를 벌름거린 끝에, 범은 마침내 미약한 물의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냄새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고 범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갈증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피와 살 따위의 찌꺼기 때문에 몹시 불쾌하기도 했다. 범은 무성한 수풀 사이를 이리 헤치고 저리 헤치며 물의 흔적을 찾았고, 범의 행동은 곧 결실을 맺었다. 바위틈에 고인 작은 샘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범은 샘에 코를 박고 다급히 물을 들이켰다. 들이키려고 했다. 만약 범의 눈이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틀림없이 샘 안의 모든 물을 다 들이키고야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열에 들뜬 범의 눈은 용케도, 아니다. 필시 열에 들떴기 때문이었으리라. 열에 들떠있지 않았더라면 그냥 보아 넘겼음직도 한 작은 빛을 발견하고야 만 것이다. 비록 달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깊은 밤, 물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작은 것이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범은 애타는 갈증 속에서도 그만 궁금증이 도졌다. 어차피 눈앞에 고여 있는 물은 어디로 도망가지도 않으리라. 샘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범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작은 빛을 감싸 쥐었다.

범의 손 안에 쥐어진 것은 사람 새끼손가락만한 물고기였다. 범은 손을 들어 올려 물고기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평범한 물고기였다. 하지만 평범한 물고기라면 양 나라미에 빛나는 날개 따위를 붙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고운 빛을 발하는 한 쌍의 날개는 흡사 달의 조각처럼도 보였다. 눈으로 물고기의 날개를 확인한 범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범의 산에는 달치가 없었지만, 범은 달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범에게 있어서 달치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보기 드문 것 역시도 아니었다.

모든 달치가 달을 향해 날아오르지만, 동시에 모든 달치의 비행은 태어나 겪는 첫 비행이다. 더군다나 달치는 애초부터 날기 적합한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날짐승도 아니다. 아무래도 서투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높은 하늘 위에는 달치의 비행을 방해하는 많은 재난 역시도 존재한다. 변덕스럽게 불어 닥치는 강한 바람, 달치 무리의 주위를 날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밤의 사냥꾼……. 그리고 무엇보다도, 달치의 작디작은 날개로는, 아무 탈도 없이 도착하기에 달은 너무나도 멀다. 달치의 미약한 힘으로는 모두 어찌할 방도가 없는 재난이다. 많은 달치가 용오름 중 그런 종류의 재난에 휩쓸려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지금 범의 손에 쥐어진 달치 역시도 그런 달치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날개의 아름다움에 잠깐 매료되었으나 그것도 잠시 뿐, 범은 이내 흥미를 잃고 달치를 도로 물속에 풀어놓았다. 물론 땅으로 곤두박질친 달치의 대부분은 죽게 마련이고 살아있는 달치를 보는 건 범 역시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사실만으로는 범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역부족이었다. 물로 돌아간 달치는 힘겹게 수면 위로 떠올라 하늘을 향해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샘 위로 일렁거리던 달빛이 달치의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범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달치가 달빛을 먹는다는 것은 범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달빛을 먹는 달치의 모습은 범에게 있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다.

범은 달치가 하는 양을 무시하며 샘에다 입을 가져다대었다. 고인 물이었던지라 그다지 시원한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는 갈증 탓에 범은 많이 마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범은 그럭저럭 갈증이 가시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범은 손등으로 젖은 입을 훔치며 샘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달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달빛을 입 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잠시 달치를 바라보던 범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달치는 달빛을 먹고 있지 않았다. 범은 조심스럽게 얼굴을 달치 가까이 가져갔고, 곧 신음소리를 흘렸다.

달치는 입으로 흘려 넣은 모든 달빛을 다시 아가미로 뿜어내어, 나라미에 붙은 날개를 수선하고 있었다. 달치가 달빛을 한 번 들이킬 때마다, 비록 아주 조금씩이었지만, 달치의 날개는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추락 도중 상처 입은 몸을 돌볼 생각도 않은 채 달치는 날개를 수선하는 일에만 모든 정신을 쏟아 붓고 있었다.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범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리 유쾌한 추억거리는 아니었을 텐데. 그런 험한 꼴을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느냐.”

달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무엇이냐? 도대체 무엇이 너를 그리 필사적으로 만드는 거지? 달에는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왜 달을 향하지 못해 안달인 게냐? 타고난 것도 아닌 날개로, 그리도 애타게 구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지?”

대답은 없었다. 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산은 중턱,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촘촘히 얽혀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비치는 달빛은 아무래도 미약했다. 달치는 얼마 안 되는 달빛이나마 힘겹게도 끌어 모아 날개를 수선하고 있었다. 범은 하늘과 달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윽고 샘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더위에 시달린 몸은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작은 달치 한 마리에 신경을 쏟고 있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샘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범의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던 달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달치의 모습은 오히려 더욱 뚜렷해져만 갔다. 범은 참 이상한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달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범은 걸음을 망설이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깊은 밤 속에서 달치의 빛은 미약했고 범의 눈으로도 더 이상 달치의 모습은 분간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범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범의 마음과는 달리 범 발걸음은 어느새 샘을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샘가에 앉은 범은 언짢은 표정으로 달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달치와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달치가 범을 이해했을 리는 없었다. 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범은 달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범은 스스로의 마음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은 팔을 뻗어 달치를 손에 쥐었다.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비늘의 감촉이 서늘했다. 한참 동안 달치를 쥔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범은, 갑자기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범이 도착한 곳은 산의 정상이었다. 밤과 가장 가까운, 하지만 가장 밝은 밤의 중심이었다. 별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무수히 반짝거리고 달빛이 무게를 가지며 어깨를 내리누르는 장소였다. 메마른 바위 사이로 늙은 솔 하나가 힘겹게 뿌리를 박으며 바람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고, 솔의 뿌리 사이에서 작고 맑은 샘이 통탕거리며 솟고 있었다. 범은 더위에 허덕이며 샘을 향해 다가갔다. 샘 안은 투명한 달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범은 손에 꼭 쥐고 있던 달치를 샘 안에다 풀어놓았다. 샘 속에서 잠시 비틀거리던 달치는 이내 수면 위로 떠올라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샘에 고여 있는 달빛은 충분했다. 이 정도의 달빛이라면 그나마 편히 날개를 수선할 수 있으리라.

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범의 말이 들렸을 리는 없었다. 범의 행동에 고마워할 리도 없었다. 범은 피식 웃으며 달치를 바라보았다.

“우습지 않나. 만수의 왕이, 모든 사냥의 정점에 서 있는 내가, 사람의 죽음인 내가, 너처럼 작은 것 하나에 이리도 마음이 쓰인다는 것이.”

대답은 없었다. 범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그리고 달치와의 만남은 범의 일상이 되었다. 때로는 마음이 무겁고 혹은 즐거울 때, 하지만 별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범은 늘 달치를 찾고는 했다. 구름이 하늘을 가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범은 괜히 가슴을 졸이며 안절부절못했고 달치가 무사함을 확인한 후에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밤새도록 달치를 바라보고, 또 의미 없는 말을 한 마디씩 꺼내다 샘가에서 잠드는 때 역시 적지 않았다. 범은 많은 말을 달치에게 들려주었다. 평생 입 밖으로 꺼냈던 말보다 더욱 많은 말을 달치에게 들려주었다. 달치는 범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범은 그런 달치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은 가끔 자문해 보고는 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범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달치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을까?

이해할 수 없어도 좋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 깨달은 사실이었을까. 범은 달치가 좋았다. 달치의 모습이 좋았고, 달치가 무사히 잘 지내주는 것이 그저 좋았다. 달치에게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았다. 이유는 없었다. 있더라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늘 외로웠던 범은, 사실 외로움을 몰랐기 때문이다.

한 달 남짓한 시간은, 범이 이제껏 살아왔던 어떤 나날보다 빨리 흘러갔다.





“너는 바다를 본 적이 없겠지. 아쉽게도 나 역시 바다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풍문에 듣기로는,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샘보다 몇 천 배 더 많은 물이 고여 있는 곳이 바다라고 했다.”

“나는 상상하기 어렵구나. 과연 어떤 모습일까? 끝이 보이기는 할까? 깊기는 또 얼마나 깊을까? 속에는 과연 어떤 것이 살고 있을까?”

“강을 따라 쭉 내려가면 언젠가는 바다에 도착할 수 있다더구나. 뭐, 내 걸음이라면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언제 함께 가보자꾸나. 너도 그럭저럭 마음에 들 것이다. 이 샘보다 훨씬 더 넓은 곳이라면, 네가 먹을 달빛 또한 넘쳐날 것이 아니겠느냐.”

“바다에서라면 지금 너의 날개처럼 시시한 녀석이 아닌, 거친 바람에도 끄떡 않는 멋진 날개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개를 짓는다면 네가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달까지 날아갈 수도 있겠지.”

범은 침묵했다. 범은 달치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달치의 몸보다 약간 더 긴 길이까지 지어진 날개는 은은한 빛으로 샘 안을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었다. 샘은 물이 아닌 빛으로 채워진 것 같았다. 달치가 더 이상 달빛을 먹지 않았던 때는 언제부터였을까. 달치는 빛으로 채워진 샘을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가끔 날기 위한 마지막 연습이라도 해 본다는 듯, 작은 날개를 몇 차례 휘저어 보기도 하면서.

“달에도…… 바다가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달의 바다는 이런 은빛일까?”

대답은 없었다. 범은 고개를 들어 중천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이 보름이었다.





다음 날 밤, 범은 달치를 찾아가지 않았다. 범은 높은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 어둠 속에 어렴풋한 산꼭대기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새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면 괜한 고함이라도 한 번 질러보며, 달이 뜰 때부터 달이 질 때까지, 범은 제자리에서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달이 가장 높은 하늘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 달을 향해 날아가는 아주 미약한 빛을 본 듯도 하였으나, 범은 그저 착각일 거라고,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달이 지고, 날이 밝아올 무렵이 되어서야 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몹시 배가 고팠다. 하지만 허전한 것은 뱃속만은 아니었다.

범은 달치의 샘을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7.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

범의 이야기는 달이 질 때가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처녀는 벗었던 수의를 도로 걸치고, 반석 위에 다소곳이 앉아 범과 마주보고 있었다. 범과 처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범은 웅크리고 앉아 처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처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달도 없는 밤, 밤과 낮의 경계에 서 있는 시간, 어둠은 다만 적적했고 먼 꿈이 사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범과 처녀는 달이 남기고 간 꿈 사이에서 오직 둘 뿐이었다. 언젠가 범과 달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생각했다.”

범의 말문이 열렸다. 처녀는 고개를 들어 범의 눈을 바라보았다. 범의 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처녀는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스스로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범은 먼 곳을 보는 눈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달치의 모습이 애타게 떠오를 때, 급한 마음으로 서둘러 달치의 샘을 찾아가면…… 달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달을 향해 날아가는 일 따위는 이미 잊었다는 듯이, 그 때처럼 유유히…… 샘 속을 헤엄치고 있으리라고. 그러니까, 지금은 굳이 달치의 샘을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던 범은 이윽고 한숨처럼 말을 토해놓았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사실 난 무서웠던 것이다. 달치가 떠났다는 사실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무섭고, 또 두려워서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범은 처녀의 눈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너는 달치가 불쌍하지 않다고 했다. 너는 이유도 모른 채 달을 향하는 달치가 가엾지 않다고 했다.”

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었군요. 그 때의 소리는.”

“그래. 나였다. 너를 죽일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었다. 도망치기에 급급했으니까. 이유도 모른 채, 타고난 것도 아닌 날개로 달을 향하는 달치가 가여운 것이 아니라는 현실에서 도망치기에 급급했으니까. 달치가 가엾지 않다면, 달치가 달을 포기할 이유란 없었으니까.”

처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범을 바라보았다. 만수의 왕은, 두 번째 도둑은, 사람의 죽음은, 놀라울 정도로 슬픈 눈으로 처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녀는, 스스로도 주제넘은 생각이라 여기면서도, 범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녀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처녀 역시 항상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녀는 외로움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달치의 샘을 찾아갔다.”

처녀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범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다. 어둠은 사방 가득히 일렁거리고 있었고 어디에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때, 당신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있다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어떤 이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은, 결국 모든 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녀는 미소를 지었다.

“슬픈 사람도 있군요. 슬프지 않은 사람도 있군요.”

“슬픈 사람은 누구냐. 그리고 슬프지 않은 사람은 누구냐.”

“홀로 떠나는 사람은 슬프지요. 떠나보낸 후, 홀로 남은 사람은 슬프지요. 늘 홀로였던 사람은…… 차라리 슬프지 않겠지요. 혼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정작 정말로 가여운 사람은, 그렇게 스스로의 외로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겠지요.”

처녀는 일어섰다. 범은 웅크려 앉아 있었고 반석 위에 선 처녀는 용케 범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잠시 망설이며 범의 눈을 마주보던 처녀는, 크게 숨을 한 번 내쉰 후 팔을 뻗어 범의 목을 끌어안았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범의 어깨를, 처녀는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당신께서는 가여운 분이 아니세요.”

범의 몸이 굳었다. 범은 눈을 감았다.

“한 때나마 함께였던 당신께서는, 절대로 가여운 분이 아니세요. 슬픔을 아는 당신께서는 절대로 가여운 분이 아니세요.”

“나는…….”

“달치에게는 날개가 있었지만 당신에게는 날개가 없었지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바라보는 곳이 같다면, 날개든 다리든 관계없지요. 비록 따라잡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이다. 혼자이지 않느냐. 지금 나의 외로움은……. 그래. 지금 나의 외로움은,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언젠가 당신과 함께 걸을 누군가를 찾게 될 거예요. 비록 당신이 지금 홀로 남아있을지라도, 당신과 함께 걸어갈 누군가는 반드시 세상 어딘가에는 있어요.”

하지만 나에게는? 처녀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달까지라도.”

“달…… 까지, 라도?”

“네. 달까지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범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범의 보드라운 털 위로 눈물은 구슬방울처럼 떨어졌다. 범은 눈을 감은 채 달치의 모습을 떠올렸다. 달의 은빛 바다 속에서,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개를 양 옆으로 활짝 편 채 유유히 헤엄치는 달치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범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범의 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손 안 가득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며, 처녀는 참 주제 넘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처녀가 범을 위로한 말은, 사실 모두 스스로에게 들려주어야 할 말이었다. 처녀 또한 혼자였으니까. 누구보다도 외로운 사람이었으니까. 처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어서라도 소원하겠습니다. 당신이 꼭 함께 걸을 이를 찾기를.”

범은 눈을 뜨고 처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범의 눈에 비친 것은 처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범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잠시 망설이다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처녀의 등에 얹었다. 처녀는 놀란 표정으로 범을 바라보았다. 범은 처녀를 살며시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널 죽이지 않는다.” 죽이지 못한다.

처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같이 가자.”

처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녀는 범의 목을 감은 두 팔에 힘을 주었고, 얼굴을 범의 어깨 위에 파묻었다.

“왜?”

“너 역시 혼자이지 않았느냐. 너의 외로움은 어찌할 셈이냐. 사람 중에 너와 함께 걸을 이가 없다면, 내가 너와 함께 걸어 주겠다. 너와 함께 걸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라도.”

“하지만 전 이미…….”

범은 웃었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또 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처녀는 말문이 막혔다. 범은 잔잔한 목소리로 처녀의 귀에 속삭였다.

“함께 가자. 너의 달은 어디에 있느냐.”

처녀는 눈을 감은 채 사막의 풍경을 떠올렸다. 사람의 왕이 산다는 사막의 풍경을 떠올렸다. 사람의 소망이라면 무엇이든 이루어 준다는 사람의 왕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나 짧았던, 너무나 적었던, 너무나 몰랐던 채로 다 흘러가고 말았던 스스로의 삶을 떠올렸고, 스스로의 삶을 모두 지배했던 진득한 외로움을 떠올렸다.

정말, 모두 한 순간이었던 것만 같았다.

범과 처녀는 돌이라도 된 양, 서로를 끌어안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 또 상념은 얼마나 흘러갔을까. 처녀는 범의 품 속, 따뜻한 온기 속에서, 문득 어떤 소리를 들었다. 고요하지만 힘찬, 어쩌면 움직임에 가까운 소리였다. 처녀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처녀의 손이 도착한 곳은 범의 가슴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그랬구나.



여기에도…… 있었구나.








outro.

아직 해도 나지 않았건만, 장터는 이른 새벽부터 떠들썩했다. 시골 장터가 으레 그러하듯이 장에는 물건보다 사람이 더 많은 듯 했다. 부지런히 전을 차리는 장사치, 등에 괴나리봇짐 하나 덜렁 메고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물건을 흥정하는 행상, 길 한가운데 서서 멍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작자는 아마 어젯밤 술이 좀 과했던 모양이다. 어딘가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과격한 육두문자가 아무런 여과 없이 귓속으로 날아들었다.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 소리와 소리가 어울려 말이 아닌 노래로 태어나고 있었다.

치성은 반쯤 비운 술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몇 년 만에 입에 댄 술인지. 목으로 넘어간 술의 흔적이 몹시도 썼다. 금세 뜨거워지는 머리를 달래 보려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쉰 치성은, 주막 싸리울 너머 장터의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절을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치성은 많이 달라진 바깥세상의 모습에 적잖이 적응한 상태였다. 가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란 적도 있었으나, 대강 칼을 뽑아 휘두르면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몇 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긴 하구나. 평상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칼을 바라보며 치성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슬슬 배가 출발할 시간이었기에 치성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때를 맞춰 옆자리에서 들려 온 목소리가 치성의 발을 붙잡았다.

“참, 이 사람이 진짜…… 지금까지 속고만 살았나? 정말이라니까! 내 눈으로 직접 본 사실일세. 생각해 보게.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풍이나 치고 다닐 위인인가?”

치성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사내 두 명이 주막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차분한 인상의 사내와 우락부락한 용모의 사내였는데, 우락부락한 용모의 사내는 퍽이나 흥분한 듯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차분한 인상의 사내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건 아니지. 말이 될 법한 거짓말이야 아주 입에 달고 다니지만.”

“뭐라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네그려. 아니,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소문은 정말로 사실일세. 내 마누라를 걸고 맹세해도 좋을세.”

“자네 마누라야 뭐, 별로 아깝지도 않은 걸 가지고 그리 생색은 내지 말게나. 아무튼 그 소문이 사실이라. 허허. 그럼 정말 범과 여자였나?”

“그렇다니까! 틀림없는 범과 여자였네. 큰 고양이 따위를 보고 착각한 게 절대로 아니란 말일세. 자네도 내 담력이 얼마나 센지는 알고 있지 않는가. 그래도 그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배에서 내려와서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아니, 아닌 게 아니라 배에서 내릴 때부터 좀 괴이쩍었지. 그 큰 나루에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비치질 않는 걸세. 참 이상한 노릇도 다 있다하며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말일세.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에서 범 한 마리가 걸어오고 있는 거야.”

“허어.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 봤나 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 아무리 봐도 진짜 범이었거든. 놀라 자빠질 뻔 했다가 가까스로 골목길 쪽으로 숨었지. 헐떡거리며 길 쪽을 슬그머니 바라봤는데, 자세히 보니 범 혼자 오고 있는 게 아니더라고. 자세히 보니까, 이게 웬일인가. 웬 여자 하나가 범 옆에 딱 붙어서 걸어오고 있더란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했나?”

“어떻게 하고 자시고 할 게 있었나. 물려 죽게 생긴 판인데. 계속 골목에 숨어서 범 지나가기만 기다리다가, 이 때다 싶을 때 바로 뛰어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았지 뭔가.”

“그럼 그 범이랑 여자가 어디로 간 건지는 모르는 건가?”

“뭐, 동가네 말을 들어보니 거룻배 하나 끌고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던데. 나야 못 봤으니 자세한 건 모르지.”

“상류 쪽이면, 고사라도 쪽으로 간 거란 말인가?”

“나야 자세한 건 모른다니까. 동가 놈이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괜히 허풍을 떠는 걸 수도 있고. 도대체 범이 사막에는 무슨 볼일이 있겠어. 가 봤자 사람의 왕께 붙잡혀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아마 아닐 걸세.”

범과 여자라. 괴이쩍은 헛소문도 다 있군. 치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시간이 촉박했던지라 더 듣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자리를 떠난 치성은 금세 주막의 소란 속으로 파묻혔다. 덕분에 치성은, 그 뒤로 계속 이어진 우락부락한 사내의 말을 그만 듣지 못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인 게 말일세. 그 범과 함께 있던 여자 말일세. 내가 참 경황이 없어서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던 것 같네. 머리뿐만이 아니었네. 피부도 참 쌀가루라도 뒤집어 쓴 것 마냥 하얗기만 했지. 그래서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네. 아, 저 여자가 아마도 범을 부리는 산신령인 모양이로구나. 어떤 멍청이가 그만 산신령을 노하게 해서 아주 범을 데리고 잡으러 온 게로구나. 그래서 내가 뭔가 산신령에게 죄를 저지르진 않았는지, 머리통을 꼭 감싸 쥐고 덜덜 떨면서 말이야. 범이 다 지나갈 때까지 내내 그것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시현.

시현?

네. 시현. 제 이름이에요. 말씀드리는 게 좀 늦었나 봐요. 워낙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라서, 이야기하는 걸 깜빡했어요.

너의 이름이라고?

네. 당신의 이름은 뭐죠?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줄 이가 없었으니까.

이름이 없다니, 많이 곤란한데요.

곤란한가?

당신께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제게는 중요한 문제거든요.

어째서?

생각해 보세요. 많이 불편하잖아요. 지금이야 당신이라는 호칭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좀 더 서로에 대해 안 다음은 어떨까요. 우리가 좀 더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가 되면 어떨까요. 그 때가 되면 당신도 반드시 불편함을 느끼게 될 거에요.

확실히 그럴 지도 모르겠군.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지요. 제가 이름을 드리겠어요.

이름을?

네. 그러니까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동녘이 뿌옇게 밝아 오는 시간, 가을은 하늘을 찬란하게 밝히고 있었다. 계절의 모퉁이는 이미 지척이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범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내 겨울이 오리라고. 이따금 바람 불고 눈 내리는 일도 벌어지리라고. 하지만 아무리 혹독한 겨울 속에서 헤매더라도 정신을 차려 보면 곁에는 항상 봄이 있지 않던가. 범은 팔에 힘을 주어 삿대를 뒤로 밀었다. 거룻배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강은 동쪽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흘러오고 있었다. 시현과 범의 배는, 범의 삿대질에 힘입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거룻배는 사람이 타기 위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 설계에 범의 탑승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덕분에 물결에 오르락내리락하는 배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좀 위태로운 맛이 있었다. 어쨌든 시현도 범도, 배를 타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서투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마치 달치의 비행이 그러한 것처럼.

하지만. 범은 미소를 지으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강 상류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이란 건 부르기 편하게 아무렇게나 지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무엇을 저리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범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니까. 달치와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시현과 함께 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터였으니까.

이윽고, 시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시현은 밝은 목소리로 범에게 말했다.

“결정했어요. 당신의 이름은…….”

강 저편으로, 아침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終-


===

버닝베아 님은 현재 군복무중입니다. 이 글만 올려두고 그만 다시 군생활로 돌아가셨습니다. 미처 허락을 받지 못하였지만, 너그러이 이해하시리라 믿고 보냅니다.
mirror
댓글 2
  • No Profile
    mimi 06.07.04 15:13 댓글 수정 삭제
    저어, 이 글 중간에 끊겨 있네요. 글 분량이 길어서 업로드가 다 안 된 것 같아요. 조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No Profile
    mirror 06.07.04 15:27 댓글 수정 삭제
    신고 감사드립니다.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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