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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용서하지 말아요.”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울먹이는 목소리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울고 있다. 이 피처럼 붉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머물 곳을 잃어버린 눈동자는 빛을 잃어 혼탁하게 변한 지 오래였지만, 아직은 생의 온기를 잃지 않으려는 듯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있었다. 아직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울지마, 울지마… 난 괜찮아.
 눈물을 보이지마, 이렇게 나도 웃고 있잖아. 웃어 줘……

 “이번 역은 동대문, 동대문 역입니다. 이 역은 열차와 승강장의 사이가 넓사오니.”

 “쿡-”

 음…?
 이 웃음소리는?
 지수는 눈을 들어 웃음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앞에 앉은 한 여대생이 애써 참는지 손으로 가리고 웃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서서 고개까지 꾸벅이며 선잠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스레 헛기침이 나왔다. 상황을 무마해보자고 취한 행동이었지만, 여전히 쑥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전날 밤을 새었다고는 하지만 잠들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것도 꿈까지 꿔가면서 잠을 자다니. 꿈? 그러고 보니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무슨 꿈이었지? 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꿈을 기억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꿈을 꿨다는 기억뿐, 내용까지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잊어버렸다.

 창 밖으로 동대문 역의 승강장이 보이자 전철이 서서히 정차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파들이 오고 가는 승강장. 그곳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거리는 소음들로 소란하기 그지없었다. 양복을 빼 입은 셀러리맨의 지친 모습,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소녀들의 재잘거림, 이어폰 틈새로 비집고 나오는 강렬한 비트를 즐기는 젊은이, 그것과는 무관하게 다른 세계에 빠진 듯 활자에 골몰해 있는 여대생의 모습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있었고, 그들 사이로 목적지를 찾아 내리는, 또는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환승역이라 그런지, 유난히 복잡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지수의 손길에 딱딱한 상자가 매만져졌다. 재킷 주머니에 소중하게 보관된, 1 입방인치로 꼼꼼히 만들어졌을 상자. 각각의 귀퉁이는 부드럽게 연마되어 모난 느낌을 없앴고, 반으로 갈라지며 입을 벌리게끔 만들어진 상자. 지수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겉의 감촉을 흩었다. 손가락에 매만져지는 부드러운 느낌. 보이지는 않지만, 벨벳이 가진 선명한 딥 블루의 색조와 그 안에 자리잡고 있을 투명함을 자랑하는 상징물이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처음 본 순간, 바로 이것이다 싶을 정도로 그녀의 모습을 닮았던 물건.
 브릴리안트 커팅으로 연마된 중앙의 다이아몬드를 중앙에 두고 두 개의 마퀴스 모양으로 연마된 또 다른 두 개의 다이아몬드가 수줍게 감싼 형태를 지닌 것이, 마치 한 송이 장미가 활짝 개화한 모양이었다. 더욱이 중앙의 다이아몬드는 은은하게 붉은 빛이 감도는 색조를 지녀 그를 단숨에 매혹시켜 버렸다. 일반적으로 투명한 것을 가장 높게 쳐주지만, 이상하게도 이 반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한 눈에 사로잡히고야 만 것이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났다. 친구의 소개로 나간 대수롭지 않은 만남. 그 만남에서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었다. 이런 사람이 존재했었는가? 라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암흑 속에 담갔다가 꺼낸 흑요석 같이 까만 눈동자와 조각을 깎은 듯이 곱게 내려간 단아한 옆얼굴. 약간은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 부각시켜 주었다. 한눈에 반해버린 그는 당장 그녀에게 사귀자는 말을 꺼낼 정도로 성급하게 굴기도 하는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1년여를 사귀어 오면서 그녀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고, 그녀 또한 자신에게 한결 같았다. 그렇게 아름답고 착한 그녀가 자신만을 바라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었다. 간을 빼줘도 아깝지 않을 시간들이 지속되어 온 것이다.

 상자를 쥔 손바닥에 촉촉하게 땀이 배기 시작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과연 그녀가 이 반지를 받아줄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믿었다. 그녀야말로 자신이 여태까지 기다려온 사람이란 것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겁의 세월을 건너 왔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 본 순간 그가 느꼈던 것처럼 그녀도… 제발…

 귓가에 방송이 들려왔다, 지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한발 다가서기 위한 걸음을 내디뎠다.

 “…화, 혜화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계단을 다 오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에서도 우산을 든 이들의 모습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나올 때까지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 왜 이 모양일까.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앞으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애써 불길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단지 비가 내릴 뿐이다. 서울의 일기예보야 항상 틀려왔던 것뿐이니까.
 비 때문에 머뭇거리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우산을 펴 들고 하나 둘씩 거리로 나섰고, 없는 사람들은 없는 채로 종종걸음으로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쉽게 그칠 비는 아니란 걸 알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색으로 신경 써서 입은, 단정한 잿빛의 셔츠 위에 걸쳐 입은 검은 재킷과 그에 매치 시켜 입은 검은 바지가 신경 쓰였다. 비를 맞으면 후줄근해 보일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수 없이 뛰기 시작한 순간, 지수의 눈길을 사로잡는 현란한 색조의 물결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유독 어느 한 부분이 마치 수줍은 소녀의 고백처럼 그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었다.
 꽃다발? 그것도 붉은 장미?
 빗방울을 한 가득 머금은 한 다발의 붉은 꽃잎이 그의 시야를 메웠다.
 그의 입가에 싱긋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그녀에게 잘 어울리겠어.

 “저걸로 주세요.”
 “데이트인가 봐요?”

 어느새 그의 손가락은 꽃다발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점원은 꽃다발을 집어 들고 정성스레 포장을 했다. 요즘은 포장기술이 좋아져서인지 투명한 포장지로 겹겹이 쌓을 뿐인데도 금새 예쁜 모양으로 꾸며졌다. 포장 덕분에 오히려 새빨간 장미의 색조가 더 두드러져 화려해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2만원입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주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왜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냥 불쑥 반지만 내미는 것보다는 꽃을 건네며 은근 슬쩍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는 것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을 왜 진작 하지 못했는지. 허기사 주변머리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자신이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생각이 미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말이다.

 약속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항상 만나는 마로니에공원 중앙의 시계탑 앞. 커다란 시계는 9분 지각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단지, 저 멀리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옅은 노랑의 레인코트를 걸치고 노란 우산을 받쳐든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만이 망막을 메울 뿐이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녀가, 환한 미소를 던져주고 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폐부를 찌르는 통증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벅차 오르는 가슴의 고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꽃다발을 들어 가슴에 품었다. 너무 세게 껴안은 탓인지 짓눌린 장미에서 베어 나온 새빨간 꽃즙이 검은 재킷을 물들여 얼룩을 남겼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이 순간, 그가 느끼는 것이라고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와 자신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사실뿐.
 이제 그녀를 만난다. 몇 걸음만 더 디디면 그녀의 앞에서 웃을 수 있다. 그리고 고백하리라.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세상 무엇보다도 그녀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미안해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

 겨울의 한 귀퉁이에 머물고 있다는 듯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면 꽃잎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피처럼 붉은 화우(花雨)임을.
 전설처럼 들려오는, 시체를 품은 벚나무의 눈물. 그 눈물이 떨어지듯 붉은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 그를 죽여라.
 - 주군!

 벚나무 아래, 미동조차 하지 않는 두 인형의 실루엣이 보인다.

 - 그를 없애지 않으면 우리의 거사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 정녕, 그 방법뿐입니까?

 긴 머리를 드리운 여인(女人)의 무릎에서 잠이 든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여인의 새하얀 기모노 자락은 그의 요가 되어주려는 듯이 넓게 퍼져 있었다.

 - 사사로운 감정은 용납되지 않는다. 너의 본분을 잊었느냐?
 - 잊은 것은, 결코 잊은 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검은 무사(武士)복을 정갈하게 입고 새하얀 기모노 위에 누워 잠이 든 사내는 행복한 꿈이라고 꾸고 있는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내의 두 손은 조용히 가슴에 놓여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손 밑으로 숨겨진 날카로운 빛과 그 위로 삐죽 튀어나온 화려한 문양으로 조각된 손잡이가 보였다. 그리고 흥건한 핏물이 그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인의 하얀 손이 잠이 든 사내의 단아한 턱 선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영원히 마르지 않을 붉은 눈물의 흔적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잠이 든 그의 얼굴에 한치의 흔들림조차 없이 고정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 닥쳐라! 네가 인형임을 망각하지 마라. 그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감정조차 허락되지 않은 인형(傀儡-주)일 뿐임을!

 붉은 꽃잎은 마치 붉은 나비 떼가 하늘을 날아오르듯이 하늘을 끝없이, 끝없이 흩날려 떨어져 내렸다.
 영원한 안식처를 보호하려는 듯, 점점 더 많은 수의 붉은 꽃잎이 그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이 현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인형(傀儡-쿠그쯔(くぐつ)) ― 자신의, 실존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인간과 꼭 닮은 인조인간(人造人間). 일본에서 발매된 RPG 천라만상(天羅萬象)의 아키타입의 하나이지만, 이 글에서는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그냥 인형이라 표현했다.

 세이지님은?
 현실도피 중인 만년소녀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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