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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eereal@gmail.com아, 일찍 왔네. 늦는다더니. 들어와들어와. 커피 마실래? 앉아서 좀만 기다려봐. 어머, 너 옷 새로 산 거야? 야, 근데 웬 빨간색이니, 재수없게. 아니, 아니... 이뻐. 이쁘고 잘 어울리는데, 난 빨간색 좀 싫어해. 응, 그게 좀,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작년에 나 교양수업 들었을 때 말야. 아, 넌 모르겠구나. 복학한지 얼마 안 됐지.

있지, 처음에 그 수업을 신청할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냥 이과계 교양을 하나 들어야 했거든. 남들 다 듣는 무슨 생명의료윤리니 그런 건 별로잖아. 그래서 넣어봤지. 인간 본성의 이해. 근데 그거, 알고보니까 되게 특이한 수업이었더라고. 인원은 딱 오십명이었는데, 그걸 다섯 팀으로 나눠서 대학원생들이 두 명씩 팀에 들어가는 거야. 강의실도 다 따로 빌렸다니까? 그래서 학사과에서 한소리 들었대. 무슨 오십명짜리 수업에 강의실 다섯 개가 필요하냐고.

거기다가 그 수업 교수님이 평소에 워낙 미국처럼 대학원생들이 학부생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이라, 주제 선정에서 수업 진행에 평가까지 대학원생들한테 완전히 위임하시겠다고 했거든. 그래서 그런지 대학원생들도 상당히 의욕이 넘쳤다구. TA, 티칭 어시스턴트라고 불렀는데, 레포트 수합하고 출석체크만 하는 '무늬만 TA'가 아니라고 다들 자부심도 아주 대단했다니까.

첫시간에는 팀을 나눴어. 선배들이 앞에 나가서 자기소개도 하고 팀별 주제도 소개하고 그랬거든. 우린 나름대로 재밌었어. 생각해봐. 선생님들을 고르는 거잖아. 대학원생이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낫지 뭐. 학부생 주제에 세계적 석학인 교수님께 뭘 물어보긴 좀 그렇잖아. 근데 대학원생이면 좀 부담도 없고.

처음 나온 TA는 좀 잘난척하는 것 같았어. 학부는 한국에서 졸업하고 석사랑 박사는 Oxford에서 마쳤다는데, 아 정말, 그 악스퍼얼드 발음 듣고 있자니까 흥미가 딱 떨어지더라구. 아니, 요새 누가 그렇게 발음 못해서 안하나? 네이티브도 아닌 것 같더구만. 그리고 주제도 별로 재미없어보였어. 패스패스. 그 다음은 여자선배였는데, 그 사람은 다행히도 국내파였지. 하지만 주제가 너무 정치적이더라구. 난 과학에 정치적 관점 적용시키는 거 별로였거든. 그래서 또 패스.

세번째가 그 사람이었어. 키는 멀뚱히 큰데 비교적 평범해보였지. '나 대학원생이에요'라는 좀 부시시한 머리모양에 금테안경쓰고 말야. 요새 누가 금테 쓰니? 아무튼 또 이번엔 뭐냐, 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그 선배가 그렇게 깨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원래부터 동물을 좋아했대. 그래서 삼 년 전인가 일본에 있는 영장류연구소에서 알바를 했다는 거야. 근데 거기 가니까 암컷들이 엉덩이가 새빨갛게 부풀어올라 있더래. 나도 동물원 갔을 때 그런 거 봤는데 진짜 뾰족한 걸로 찌르면 빵하고 터질 것 같애. 처음엔 병 걸린 줄 알았는데, 그게 발정기라는 표시거든. 선배는 그 엉덩이를 보니까 기분이 무지 이상하더라는 거야. 좀 덥고, 심장도 뛰고, 머릿 속에서는 아무 생각도 안나고. 그 때 인간이란 이성과 논리 이전에 본능을 가진 영장류의 한 종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대나. 그 뒤로 진로를 이쪽으로 정했대. 그 팀 주제가 뭐였는지 알아? 이성간의 구애와 유혹에 있어서 무기는 무엇이냐, 어떻게 작동하냐, 뭐 이런 거였어.

강의실 분위기가 어땠겠니. 남자들은 낄낄대지, 여자애들은 민망해서 웃지도 못하고 이상한 표정만 짓고 있었지. 대학원생들도 저 오빠 또 저 얘기 한다, 이러면서 아주 학을 떼는 표정이더라구. 나도 좀 황당하긴 했는데,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 팀을 신청했어. 그리고 다음 시간에 정해진 강의실로 갔지. 좀 일찍 갔는데, 누가 먼저 와있는 거야. 그 사람이었어. 근데 지난번에는 좀 후줄근한 분위기였는데 그날은 어째 좀 말쑥하더라구. 까만 마이 안에 빨간색 니트를 입고 있었어. 목까지 좀 올라오는 걸로. 근데. 그 때말야. 나 기분이 아주 이상하더라? 그 빨간 니트가 왠지 좀, 하여간 이상했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냐, 쑥쓰럽다 그냥 오빠라고 해라. 그러더라구. 그래서 오빠는 좀 그렇고 선배가 좋겠다고 했어. 근데 그 때 나, 왠지 머리 속에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거야. 그 빨간 니트 위의 얼굴이 웃으면서 말하는 걸 보고 있으니까 좀 덥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3월이었는데 말야.

아무튼 수업은 꽤 괜찮았어. 과제로 나왔던 페이퍼들도 재밌었고. 사람수가 열 명밖에 안되니까 수업이라기보다는 세미나같더라고. 근데 문제는, 그 팀에 여자가 나밖에 없었다는 거야. 원래 전체 수업 성비는 거의 일대일이었거든? 근데 우리 TA가 소개를 그 모양으로 해 놔서, 여자애들이 지레 겁먹고 다 딴 팀으로 가버린 거 있지. 그래서그런지 수업 중 나오는 얘기들도 좀 아슬아슬했어. 결혼 전 섹스는 과연 쾌락만을 위한 것인가, 여성의 에스라인 굴곡은 에스트로겐 농도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남성의 성기 길이는 여성에게 매력포인트로 작용할까 아닐까. 그런 거 말야. 사실 그게 학문적으로 흥미있는 주제인 건 맞거든. 선배는 아주 진지하게 그런 게 자기는 진짜 궁금하다고 그러고. 근데 뭣도 모르는 1학년 남자애들은 그냥 낄낄거리기 바빴지. 그래서 난 아주 뻔뻔스럽게 수업에 임하기로 했어. 거기서 민망해하면 죽도 밥도 안되는 거잖아? 아, 남성의 성기 길이가 여성에게 매력포인트로 작용하는지는 상대 여성의 질 길이라는 변인에 종속된 문제라고 본다. 뭐 그렇게 말야.

그래서 하다보니까 되게 재밌는 거야. 그 분야는 처음 공부하는 거였는데 내가 연애하면서 은근히 궁금했던 것들을 너무 잘 설명해주는 거 있지. 나랑 진짜 딱 맞는 거였어. 그 학기엔 아마 전공보다도 그 수업 리딩을 더 많이 했을 거야. 나 진짜 필사적으로 공부했어. 제대로 알아서 가지 않으면 1학년 남자애들이 성희롱인지 학문적 논의인지 모를 말들을 지껄일 때 밟아줄 수가 없잖아. 오기가 좀 생겼던 거지. 그리고 뭐, 그 선배가 예습 많이 해왔다고 은근 추켜세워주는 것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고 말야.

사실 나 있지, 선배가 그 빨간 니트를 입고 왔던 날 집에 와서 검색해봤어. 야, 왜 웃어. 넌 그런 적 없어? 사실 쉽잖아. 이름 알겠다, 학번 알겠다. 그럼 싸이월드에 한 번 쳐보고, 네이버에 한 번 쳐보고. 웬만한 그, '사회적 영장류'면 온갖 정보들이 우수수 떨어지게 마련이잖아. 근데 이거, 그 사람 싸이도 블로그도 없는 거 있지? 어느시대 사람이냐 한탄하면서 구글에 돌려봤는데 세상에. 책이 한 권 나오더라? 난 처음엔 동명이인인줄 알았어. 근데 가만히 보니까 작가 프로필이 이 사람 맞는 거야. 사진작가였던 거 있지. 동물 전문 사진작가.

그 책은 치르트라는 유인원 사진집이었어. 아, 자이언트 침팬지라고도 해. 너 아는구나. 말도 잘 알아듣고 되게 영리한데 거의 멸종위기거든. 서평을 보니까 '치르트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라던가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같은 말들이 있더라구. 한 권 주문했어. 며칠뒤에 배송된 걸 보니까, 찍긴 참 잘 찍었더라. 동물원에서 봤던 애들은 좀 생기도 없고 피부도 부석부석했는데 그 사진집에 있는 치르트는 아주 윤기가 잘잘 흐르고 표정도 밝은 게 거의 얼짱분위기더라구. 야, 웃지마. 진짜 그랬다니까? 이 책이야, 한 번 봐봐. 이쁘잖아. 털이 많아서 그렇지 잘 보면 장쯔이 닮았어.

그 사진집을 봐서 그랬나, 그 이후로 왠지 부시시한 머리에 가끔 위아래 안맞게 옷 입고 나타나는 거에다 수업시간에 이상한 얘기 하는 것까지 좀 달리 보이는 거 있지. 나도 알어. 콩깍지였지 뭐. 그 다음부터 이리저리 찔러봤어. 메일로 괜히 질문도 보내보고, 책도 한 번 가져가서 사인도 해 달라고 그러고, 언제 밥도 한 번 사달라고 그랬단말야. 그 정도면 거의 알지 않았겠어?

그치만 그 선배는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었어. 미니스커트를 입어도, 망사스타킹을 신어도, 탱크탑을 입어도 아무 반응이 없는 거야. 그래. 입었어, 탱크탑. 그거 입고 학교가니까 무슨 홍해가 갈라지는 거 같더라. 근데 그 사람은 끄떡도 않는 거야. 어떻게 알았냐고? 눈빛만 보면 알아요.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뭔가 기름이 돌거나 아니면 몽롱해지는, 그런 눈빛이 있어. 근데 그 선배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담백 그 자체인 거 있지? 내가 5월부터 옷보다 살이 더 많이 드러나게 입고 다니는데 요만큼도 수작을 거는 낌새가 없는 거야. 아, 게이 아니었냐고? 그 생각도 해봤지. 근데 아냐. 게이라면 그렇게 옷을 못 입을리 없잖아? 편견인 거 알아. 그치만 그건 아니었어.

그렇게 어영부영 한학기가 지나갔거든. 축제도 끝나고 슬슬 더워지면서 기말레포트 낼 때가 되니까 좀 열받더라고. 아니 이 남자는 돌부천가. 그 때까지만 해도 나 한 번도 차인 적 없었거든. 찍은 남자는 남의 남자든 과외학생이든 어떻게든 사귀고 말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뜸들인 적이 있었어야지.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 사실 그 때 내가 시험이 여러 개 겹쳐서 좀 피폐하기도 했고. 안 그랬으면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정신이 들고 보니까 내가 그 선배네 집 앞에 있는 거 있지.

집은 또 어떻게 알아냈냐고? 악스퍼얼드 갔다온 TA한테 부탁했지. 아, 그 얘기까지 하면 길어져. 아무튼 같은 연구실에 있으니까 집 위치 정도는 알 것 같았어. 근데 그것도 모른대. 자취한다는 것 같은데 한 번도 집에 놀러간 적은 없다는 거야. 같이 술 먹고 그런 적도 거의 없대. 그래서 주소 알아내는 건 포기하고, 그 사람이 집에 간다고 하면 전화로 알려달라고 했어. 응. 미행을 한 거야. 그 때 내가 정말 시험공부 하기가 싫었나봐.

정말 높은 데였어. 난 아파트에만 살아봐서, 차도 안 올라가는 곳에 그렇게 높은 데까지 집들이 있는 줄은 몰랐다니까. 끝없이 올라가야 했어. 경사는 거의 사십오도쯤 되고. 뭐? 그러면 에베레스트라고? 진짜야. 너도 한 번 가봐야 돼. 한 삼사십 분은 걸어올라갔을거야. 거의 인적도 없고, 심지어 집들도 별로 없었어. 그리고는 거의 산속으로 들어가더라니까. 몰래몰래 따라갔지. 산길을 한 오분쯤 가니까, 웬 허름한 집이 나오는 거야. 아니, 그건 집도 아니고 거의 오두막 수준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거기로 들어가더라구.

한참 동안 문 앞에 서서 생각했어. 내가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그 사람이 나오면 뭐하러 왔다고 할 거며, 또 어쩌겠다는 거야? 그냥 돌아갈까? 에이 가서 기말레포트나 쓰자 하고 돌아서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거야.

나 담배 한대만 피울게, 여기서부턴 좀 힘들다. 아, 진짜 나 일년 반이나 금연했는데 그 사람때문에 다시 피우잖아. 일단 한 개 피우고 나면 금연은 땡이야. 그담부턴 틈만나면 물게 된다니까. 넌 절대 피우지 마. 피부에 진짜 안 좋거든.

어디까지 했더라? 아 소리. 이상한 소리 들었던 거. 그 소린, 진짜 이상한 소리였어.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슨 동물 소리 같기도 하고. 그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 거야. 거기서 뭐가 나왔냐면 말야, 아주 작은 애였어. 근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야. 모자를 쓰고 있어서 처음엔 뭐가 이상한지 몰랐지. 바로 그 사람이 웃으면서 뛰어나와 그 애를 잡았는데, 아이를 들어올려 두 바퀴쯤 빙빙 돌리고서야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챘어. 그 때 날 쳐다 본 그 사람 표정은 정말 못 잊을 거야. 싹 굳은 게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구.

그는 일단 아이를 집안으로 들여보냈지. 근데 나, 봐 버렸다? 그 사람이 애를 번쩍 들어올렸을 때 말야. 애 얼굴이, 털북숭이였어. 상상이 가? 털북숭이야. 얼굴만 그런 게 아니었어. 손도, 발도 다 털이 가득한 거야. 그 순간에 알아버렸거든. 음... 너 라이거는 알지. 노새 같은 것도. 종의 구분이라는게 그렇게 칼로 딱 자르듯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그리고 치르트는, 유인원중에서 인간이랑 염색체 수가 같은 유일한 종이야. 그래도 난 설마, 이론적인 가능성뿐인줄만 알았는데.

선배는 날 보더니 둘러대기를 포기한 듯했어. 내가 어디까지 공부했는지는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 말없이 담배를 꺼내더라. 나도 한 대 달라고 했지. 금연이고 뭐고 그땐 정말 안 피우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오두막 벽에 기대서 그렇게 같이 담배를 태웠어.

먼저 입을 연 건 나였지. 역시 그 사진집에 있는 치르트였어. 아이코라고 하더라. 왜, 일본에 갔었다고 그랬잖아. 아이코는 죽었대. 그 애를 낳다가. 그 뒤에 애는 애완동물이라고 하고 배편으로 데려왔고. 연구소에서도 그런 일은 숨기고 싶어하니까. 평소엔 어머니가 봐주신대. 안에 계시다고 같이 차나 한잔 하고 가라고 그러더라구.

오두막 안은 아늑했어. 온갖 식물로 가득했지. 바닥에는 부드러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벽은 가죽이나 천 같은 걸로 덮여 있었어. 천장에는 귀여운 모빌 같은 것도 달려 있고, 가구들은 전부 원목이더라구. 바깥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좀 침침했는데 스탠드 같은 게 중간중간 켜져 있어서 분위기는 참 편안했어. 선배가 허브차를 끓여줬지. 허브도 직접 기른 거래. 근데 내가 그 차를 마시는데 그 애가 아장아장하고 오더니 내 치마를 잡아당기는 거야. 그래서 안아주니까 목을 착 휘감는 거 있지. 그게 얼마나 귀엽던지. 낯도 별로 안 가리는 거야. 이름이 뭐니? 하니까 뭐라고 하긴 하는데 못 알아듣겠어. 선배가 애 이름은 재민이라고 하면서, 사람들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데 모음밖에는 발음을 못한다고. 그래서 내가 몇살이니? 하니까 글쎄, 그 쪼끄만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는 거야. '우아!' 그러면서 말야.

고민이 됐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볼까말까. 화내는 건 아닐까. 그치만 거기까지 따라갔잖아. 에라 모르겠다하고 말해버렸지. 얘는 정체가 뭐냐고. 실험이었는지, 사고였는지. 그 때 그 사람의 표정은 정말, 너무 슬퍼보였어. 아니, 아파보였지. 한순간 괜히 물어봤나 싶었지만 궁금하잖아. 알고 싶었어 난.

질 나쁜 장난이었대. 치르트들은 연구소나 동물원같은 그런 환경에서는 새끼를 잘 못 배거든. 그래서 인공수정을 한대. 그치만 그나마도 대부분 실패하고. 그래도 계속 시도는 해야 되니까 제일 막내인 선배가 정자 채취를 맡았대. 근데 그게 참... 기분이 나쁘더라는 거야. 치르트는 털이 많은 것만 빼면 몸 크기도 사람이랑 비슷하고, 그렇거든. 좀 그렇잖아. 그래서 바꿔쳤대. 어차피 맨날 실패하니까. 근데, 착상이 돼버린거야.

멀찌감치서 우리가 말하는 걸 듣고 있던 그의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어. 우리 엄마랑 거의 비슷한 연세일텐데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할머니 같았지 뭐니. 그 상황에서 난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집 좀 구경하겠다고 그랬지. 밖에서 누가 들여다보면 안 되니까 창문은 다 천 같은 걸로 막아놨더라구. 그래서 틈만 나면 화분들 밖에 내놓는 게 일이래. 그래도 식물이 없으면 재민이가 너무 우울해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러더라고. 평소에 애가 밖에 나갈 수가 없어서 되게 힘들어한대. 아주 어렸을 땐 말도 못하고 그러니까 누가 물어보면 침팬지라고 하고 그냥 데리고 다녔는데, 점점 자라면서 치르트 분위기는 없어져서 밖에 나갈 수가 없더라는 거야. 사실 내가 봐도 그런 게 털만 깎아주면 보통 애들이랑 구분도 잘 안되겠더라. 그러다가 어디 폰카에라도 찍혀서 인터넷에 떠 봐. 난리 나지.

벽에 보니까 재민이 사진이 많이 있었어. 애기 때 찍은 걸 보니까 정말 핏덩이더라구. 선배가 젖병 같은 걸로 우유 먹이는 것도 있고, 막 걸음마 할 때 찍은 것도 있었어. 그리고 그 옆에는, 재민이랑 비슷한 애들이 우루루 있는 사진이 있는 거야. 내가 놀라서 물어보니까, 작년에 보르네오에 있는 영장류연구소에 갔었대. 재민이같은 하이브리드들이 거기서 비밀리에 자라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응. 하이브리드라고 해. 근데 그 소문이 정말이었대. B구역이라고 외부에는 공개 안 된 지역이 있는데 거기서 걔네들을 집단으로 양육한다는 거야. 그래서 다음 학기에는 그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가게 됐다고, 원래는 경쟁률이 무지 센데 자기는 재민이 덕분에 좀 쉬웠던 것 같다고 그러더라.

근데 갑자기, 나한테 그런 얘기를 왜 시시콜콜하게 다 해주는지 궁금해졌어. 비밀이잖아.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말았어. 왠지 알 것 같더라구. 내가 자길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를 리가 있니. 아마 나한테 좀 미안했나봐.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지. 걱정마세요.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 안할게요. 그러니까 고맙다 그러면서 씨익 웃더라. 그 웃는 걸 보니까 그동안 내가 한 짓이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새삼 알겠는 거 있지. 그런 줄도 모르고 탱크탑에 미니스커트 같은 걸 입고 그 고달픈 미혼부를 꼬시려고 했으니 말야.

뭐 계속 있기는 좀 그래서 나는 가겠다고 했지. 이번학기 끝나면 외국으로 가버릴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허무해지더라. 그래도 아무튼 뭐 잘 된 거잖아. 거기 가면 재민이도 친구 생기겠네, 아빠랑 어야도 맨날 하고, 좋겠네, 그렇게 말하니까 애가 까르륵 웃는 거 있지. 어휴, 그 침침한 집에 잠깐 있었더니 나까지 좀 우울해지려 그러던데, 애는 어땠겠어. 아무튼 인사하고 가려고 했어. 근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신발장 위 액자에 아이코의 사진이 있는 거야. 얼짱각도로 말야. 근데 눈빛이 얼마나 초롱초롱한지. 난 좀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 그래서 물어봤지. 언제 찍은 거냐고. 그랬더니 선배가 잠깐 생각하더니 만삭이었을 때라고 그러는 거야. 근데 그 순간에, 그 사람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었어. 그 사진을 보면서. 내 허벅지랑 가슴 쳐다볼 때는 절대 안 보여주던 표정이었지.

선배 나한테 거짓말 했죠. 진짜 목구멍까지 그 말이 올라오더라. 그치만 꾹 삼켰지. 왜냐고? 왜겠어. 차라리 게이인 게 낫지.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니까 왜 그러냐고 묻는데 정신이 팍 드는 거야. 좀만 더 그러고 있으면 내가 눈치챘다는 걸 그가 알아버렸을 거야. 기말레포트 쓸 생각하니까 깜깜하다고 둘러댔지. 문을 나서는데 서서히 좀 열이 받더라. 그치만 뭘 어쩌겠어. 그냥, 문 앞에서 재민이랑 같이 손을 흔드는 그 사람한테 한 마디 던지고 가는 수밖에.

뭐라고 했냐고?

빨간 니트 입지 마세요.

그렇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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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99년에 세상이 멸망한다기에 대학도 못가보고 죽는구나 하고 우울한 십대를 보내다가 21세기가 무사히 찾아오자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논술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모조리 죽어버렸던 감성을 이십대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다시 살려냈다. 이런저런 웹진과 블로그에서 남의 창작물을 가지고 이리저리 재단하던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어 앞으로는 인류의 미래와 우주의 앞날을 밝혀주는 재미있는 글들을 많이 쓰려고 한다. 지금은 강원도의 한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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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No Profile
    잘... 읽었습니....다.... 하,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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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8.05.06 18:11 댓글 수정 삭제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읽으셨다는 뜻이군요^^ 황당한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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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선비 08.05.13 16:24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었어요! 시리얼님 블로그에서도 본 글인데 거울에서도 보게 되니 반갑습니다~! 어느 순간 능청맞게 넘어가버리는 이야기가 마치 도시괴담 같은 느낌을 주네요. 현대 과학이 만들어내는 전설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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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민이 08.05.13 20:00 댓글 수정 삭제
    ... 여, 여, 엽기..... (그러나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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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8.05.14 11:59 댓글 수정 삭제
    추선비 // 앗, 추선비님 제 블로그를 알고 계셨군요! 기쁩니다. 저는 정통SF는 잘 모르겠어서, 그냥 떠오른 걸 써봤어요. 엄밀하게 따져보면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 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태까지 태클이 안 들어온 걸로 봐서는 대충 안심하고 있지요^^ 사실 '어느 순간 능청맞게'는 배작가님의 전매특허인데, 아직 습작중인 비기너라 뻔뻔하게 빌려썼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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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eReal 08.05.14 12:01 댓글 수정 삭제
    종민이 // ...곧 그런 형용사를 듣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재미있으셨다면 됐습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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