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www.tales.kr1) 부탁해, 사랑스런 듈리엣

“······외롭군.”
“외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인님.”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의 질문에 내가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외로움’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아니라 과연 대답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지나치게 많이 남겨진 것들 중에 하나라서 결국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할 것 같은 의무감마저 느껴야 했다.
“듈리엣. 그러니까 말이야, 외로움이라는 것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소파 위에 길게 누워 버렸다. 역시 대답하기 귀찮다. 하지만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는 그렇게 무책임한 질문을 던져놓고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 거의 대부분은 버릴 수밖에 없는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사회를 경험했던 구성원들이 느끼는 일종의 고립감이라고 할까. 뭔가 이상한가, 듈리엣?”
그녀는 뭔가 납득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듯 딱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행동이기에 어딘가 또 고장이 난 줄로만 알았다.
“주인님과 제가 이루고 있는 것이 사회가 아닌가요?”
그러니까 약 5초가 더 지난 시점에서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는 전혀 멍청하지 않은 질문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드로이드가 갖는 논리적 사고에 관심을 기울였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흘러가 버렸기에 나는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가 말하는 사회의 맹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말한 것은 그보다 한두 단계를 지나친 결론 같은 것이었다.
“자네의 논점은 아주 흥미로워, 듈리엣. 하지만 나는 지금 너와 내가 나누는 대화에 오히려 더 커다란 외로움을 느끼고 있어.”
“주인님은 저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으시고 계시군요. 그렇다면 저와 같은 안드로이드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부정적인 입장을 숨기지 않겠어. 개체간의 차이점이 없으면 그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아, ‘하나가 안 된다면 열을’이라는 식은 관둬. 예측불가능에 대한 확률적 통계가 아주 잘 말해주니까.”
“253,856,5784대를 만들어야 하지요. 그렇다면 역시나 예측 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탐색이 필요하겠군요.”
하지만 이미 오래 전 지구에 대한 탐색은 끝이 나 버렸고, 이제 1000년 전 쯤에 바이오매트릭스를 탑재했던 우주로 나간 이주 인류에 대한 희망 밖에 없었다.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는 왜 자신과 내가 우주선에 타고 끝없는 항해를 하고 있는 지 이유를 잊어버린 것이다.
“아, 죄송.”
약 5초가 더 지나서야 듈리엣은 자신의 말이 이상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말이 없자 듈리엣은 입을 다물었다.
“만약 지구상에 혼자 남겨진다면 어떨까 가슴이 설레어 하는 것은 아이들의 잔혹한 상상력에 근거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을까.”
“외롭다는 것에 대한 경험 부족에 낳은 사고의 결과가 아닐까요?”
나는 근래에 들어 거의 느끼지 못했던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뭐야. 외롭다는 것에 대해 이해한거야?”
“아뇨. 전혀.”
“······마치 안다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줘.”
듈리엣은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식탁 위에 저녁을 올려놓았다. 이제는 맛이 어떻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한정된 음식 종류 덕에 식사는 영양분 섭취 이외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단지 식사 후에 마시는 커피에 대한 그리움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이제 다시 머리를 마비시킬 정도로 은은한 커피향을 맡을 수 없으리라.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응?”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 이제 잠자리에 들 즈음 듈리엣은 전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주인님을 클로닝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선에는 클로닝 기술에 대한 자세한 기술 문서 및 설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건 내가 죽기 전에 생각해 보도록 하자고.”
듈리엣의 해결방법은 어떤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주 정확했다. 유전적 동일성이 개체의 동일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파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죠?”
“역시나 사회의 기반은 가정이 아니겠어? 아버지가 있고 자식이 있는데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그것은 즉, 주인님의 성적 취향 문제로군요.”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에게 누군가 제발!
“남성이 여성을 좋아하고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게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미 발전할 인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없어졌다고 사회를 구성했던 도덕적 규율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말아줘.”
그리고 사흘 후. 나의 몸을 씻겨주던 듈리엣은 문득 나의 등을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그러니까 주인님은 제가 주인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신 것이로군요.”
나는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간신히 알 수 있었다. 이봐, 이봐. 벌써 사흘이나 지난 이야기라고! 괜히 한 마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을 고르고 있었다.
“뭐, 비슷할지도 모르겠어. 그런 측면에서 듈리엣과 나는 서로 다른 개체라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어, 듈리엣?”
듈리엣은 묵묵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묻은 비누거품을 닦아내고 밖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목욕은 혼자 하도록 하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듈리엣의 모습이 욕실에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듈리엣의 인공 지능 룰에서 가장 위 항목을 차지하던 것에 대해 생각해낼 수 있었다.
“듈리엣! 그래도 밀던 등을 마저 밀어줘야 할 거 아냐!”
“자, 따라해 보세요. ‘부탁해, 사랑스런 듈리엣.’”
그리고 그 뒤로 나는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 듈리엣에서 무언가를 시키기 위해서 저 말을 반드시 붙여야만 했다. 빌어먹을.



2) 이름을 붙인다는 것에 대하여....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뜨끔한 충격과 함께 눈앞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휩싸였다. 그리고 온몸의 신경이 이마로 향해 있는 사이 뒤통수에 둔탁한 느낌이 들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는 사이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몇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처음 그가 의문을 품었던 것은 잠들었던 기억이 없는 자신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눈을 뜨고 있는 이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 코를 막아놓은 솜은 무엇인가.
“저의 이마에 접촉한 뒤, 뒤로 넘어지던 중 2차적으로 벽에 후두부가 접촉, 코에서 피로 추정되는 물질을 흘리시고는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었습니다.”
“차라리 충돌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주겠어?”
어떠한 용어에 대한 교체 주문인지 물어보는 듈리엣을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듈리엣이 아직 나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듈리엣. 옷은?”
“주인님께서 물어보시는 우선 사항은 보다 상위를 차지하는 우선 사항을 수행하기 위해 현재 보류 중에 있습니다.”
듈리엣의 행동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듈리엣이 말하는 ‘보다 상위를 차지하는 우선 사항’이란 ‘주인의 안전 확보’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저를 고치셨는지요. 예비로 만들어 둔 안드로이드를 가동시키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듈리엣은 오직 두 벌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옷 중에서 하나를 꺼내 입은 후 물었다. 그는 한 동안 아무것도 없는 방안을 둘러본 후 다른 방향을 보며 중얼거렸다.
“······새로 이름을 짓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이름이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물체를 지칭하는 용어를 뜻하시고 계신 건가요?”
남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토록 괴로운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 스스로를 물체로 분류하는 듈리엣이기에 괴로운 것이리라.
“인간에겐 아끼는 물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로운 안드로이드에 ‘듈리엣’이라는 이름을 주면 되지 않을까요?”
듈리엣의 생각은 지나칠 정도로 차가웠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논리 연산의 결과물. 듈리엣에겐 자신의 생각이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간혹 그런 생각을 하곤 해. 어느 날 깨어보니 하느님이 듈리엣을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거야. 그리고 그런 듈리엣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거지.”
“그 명령은 주인님의 안전에 관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우선 사항에 위배되는 명령으로 분류하여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는 못들은 척 자신의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고 나는 피식 웃는 거지. 욕구불만이구나 하고 말이야.”
“무엇에 관한 말씀인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인간이 될 수 없는 안드로이드입니다만.”
듈리엣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다시 말했다.
“인간의 소유욕은 편집증적인 부분이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 듈리엣에 대한 편집증이라고나 할까.”
“그 말씀은 제 존재자체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계시다는 말씀인가요?”
“······해결방법을 제시해 보겠어?”
그는 듈리엣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더 강한 스트레스를 받도록 하여 현재 주인님이 느끼시는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방법과 스트레스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 즉 저를 파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인님은 어느 쪽이 더 좋으신가요?”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하는 듈리엣을 보며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하지만 도리어 입가에는 미소가 흘러나온다.
“둘 다 마음에 안 들어.”
다시 고개를 갸웃하는 가슴만 커다랗고 멍청한 안드로이드.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일종의 자신의 것이라는 표식과 같지. 꼭 자신의 것이 아니더라도 이름이란 누군가와 누군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거야.”
그는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여 고리를 만들어 연결하는 모양을 흉내 내었다.
“이름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누군가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행위 또한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은 거야. 조금 더 깊은 연결을 원할 경우 그 행위는 보다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고나 할까.”
“행인 A, B, C와 같은 경우군요.”
언젠가 우주선의 데이터베이스에 남겨진 영화의 엔딩 스탶롤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듈리엣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런 의미 없는 행동을 했던 것일까. 아니, 듈리엣에게 있어서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던가? 물론, 무언가 자신의 말이 원인이 된 것이긴 할 테지만.
“그 연결이 아주 특별해서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부모와 자식 사이, 사랑하는 연인 사이와 같은 거지. 뭐, 듈리엣의 경우도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 이야기는 제가 주인님께 특별한 존재라는 말씀인가요?”
“······비슷할까나.”
“하지만 저는 다른 안드로이드에 비해 특별한 스펙을 가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노후화된 모터들로 인하여 성능이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편입니다.”
텅빈 우주 공간이 과연 무엇으로 차있을까 고민하던 어린 시절, 자신은 그녀가 인간인 줄 알고 있었다. 언제나 밝게 웃어주던 줄리엣. 그녀가 보여주던 따뜻한 미소가 단순히 프로그래밍 된 것이라는 사실은 충격이었고 곧 슬픔이었다. 부모와의 신체적 차이점을 발견한 어린 오이디프스의 충격.
“······뭐, 이것저것 하나하나 다시 설명하려면 힘드니까 말이야.”
“제 메모리가 새로운 안드로이드가 갖는 성능상의 이익보다 더 값어치가 존재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이 무엇이든 애착이 가는 법이니까.”
1차 언어 필터링은 많이 사용하는 관용구를 일반적인 언어로 바꾼다. 그러므로 ‘자신의 손때가 묻은 것’같은 것은 ‘자신의 오래 사용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언어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확인 후 세척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아야 되는데······.
“무언가 제 말에 이상이라도?”
“······아니. 아니야. 전혀 문제없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오늘은 아닐 거라고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외치고 있었나 보다. 낡은 우주선은 낡은 안드로이드처럼 결국 동작을 멈추고 이 광활한 우주에 한 점이 되어 버렸다.
“주인님의 방사능 피폭치가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표시되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우주 방사선에 직접 노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주선 외벽에서 우주선을 수리하던 낡고 손때 묻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안드로이드를 구하기 위해서.



3) 듈리엣 인 더 스타쉽 (Duliet in the starship)

그가 깨어난 것은 몇 개월만의 일이었다. 우주 방사선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몸은 꾸준히 약해져만 갔다. 최후의 수단으로 듈리엣이 선택한 것은 그의 신체 대사를 극도로 늦추는 일이었다. 방사선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물로 가득 채운 실리던 같은 곳에 넣고 생명 유지 장치를 켜고 온도를 낮추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눈이 감기는 순간 어색한 미소로 손을 흔들던 듈리엣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마도 몇 십년동안 듈리엣은 이 넓은 우주선을 홀로 지키며 끝도 없는 우주를 떠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며 듈리엣은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 자신을 클로닝할 것이고 xy 염색체에서 xy 염색체와 xx 염색체를 유전자로 갖는 개체 한 쌍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외롭지 않겠지. 하지만 인간이었다면 미쳐버렸을 시간을 듈리엣 혼자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세포는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있을 텐데······.
“······얼마나 지났지?”
“주인님이 잠드신지 278.4592일이 지났습니다.”
듈리엣은 여전히 그곳에 자신을 지키며 서있었고, 손에는 옷가지가 들려있었다. 옷을 입으라는 의미인 듯 듈리엣은 옷을 내밀었고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겨우 움직여 옷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시야가 듈리엣의 뒤를 보았을 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저 물질은?”
“공기의 70%가량은 질소가, 20%가량은 산소가······.”
“아니, 그거 말고. 저 뒤에 보이는 기분 나쁘게 생긴 녹색의 점액질 물질 말이야!”
듈리엣은 고개를 뒤로 돌려 잠시 자신의 주인이 말하는 물질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녹색에 보기만 해도 끈적거릴 것 같이 뭉쳐있는 모습. 마치 젤리 같기도 하다.
“아, 그들의 몸은 산소에 약하기 때문에 산소를 막는 물질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어떤 의미에서 산소는 독이다. 인체는 산소를 이용한 물질대사를 하지만 그 산소로 인하여 세포는 늙게 되고 죽게 된다. 아니, 지금은 그런 것보다 듈리엣이 말한 ‘그들’이라는 존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들에 대해서 설명해주겠어?”
“주요 신체 특징은 머리 하나, 팔 네 개, 다리 두 개. 팔 하나에 손가락은 각각 두 개씩으로······.”
“그만!”
“······?”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니까 이 가슴만 크고 멍청한 안드로이드는 이 우주선에 외계인이 탔었다고 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 물질은 바로 그들이 탔었던 흔적이라는 것이다. 메모리가 이상해졌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듈리엣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듈리엣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하지 않는 이상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는 두려웠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서 그들이 아직 이 우주선에 있는 거야?”
“아뇨. 정확히 10일전에 이 우주선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일단은 안심. 잠깐 추방이라고?
“심장 박동수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하향중입니다. 아직 몸이 편찮으신가요?”
그리고 역시나 멍청한 안드로이드답게 자신의 주인이 왜 당혹스러워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니, 그런 것보다 이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주인이 몸이 아프지 않다고 믿는 듯했다.
“어째서 ‘아직’이라고 말을 한 것이지?”
“현재 주인님의 몸 상태는 극히 건강한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째서.”
“몸 안의 누적된 방사능을 제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왠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알기로 현재의 인류에게 방사능을 제거할 기술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냉동수면까지 가야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기술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자세하게 설명해보겠어?”
“지금으로부터 12일전. 미확인비행물체A가 우주선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화적인 종족이며 전투 의사가 없음을 밝혀왔으며 우리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 우주선에는 전투를 위한 어떠한 설비도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말만 들으면 그들은 정말로 평화적인 종족에 다른 종족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은 것 같았다. 잠깐.
“잠깐. 어떻게 대화를 했지? 우리말을 알고 있던가?”
“네.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지구를 관측했거나 아니면 1000년 전에 떠난 인류가 이들 문명과 접촉했었다는 의미와 같았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인류에 낯설지 않음이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우주선에 탑승을 허가했습니다.”
물론, 듈리엣의 입장에서 자신이 주인보다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없었다. 자신의 주인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듈리엣은 이 우주선을 주는 것도 머뭇거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아이를 유괴하는 납치범도 아이에게 처음에는 전혀 그러한 분위기를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우주선에 탑승한 그들은 광학무기로 보이는 것을 들이대며 이 우주선을 자신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해 줄 것과 주인님과 대면할 것 요구했습니다.”
역시······. 듈리엣이 만났던 것은 말로만 듣던 우주 해적이었다. 이 우주선에는 몇 십 세기에 걸쳐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낙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탐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저는 전투에 돌입하였으며, 그 직후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아무리 다용도라고 할지라도 듈리엣은 전투용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무기도 들고 있었다고 한다면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서있고 추방했다는 것을 보면 승리했다는 의미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지 않은가.
“······전투에 돌입하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반대 아니야?”
“전투에 돌입하고, 그 뒤에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주인이 아무 말도 없자 듈리엣은 말을 이어갔다.
“전투에 돌입직후 2개체를 행동불능으로 만들었으며, 무기를 제압하였습니다. 빼앗은 무기로 다시 2개체를 생체활동불가상태로 만들었으며······.”
생체활동불가상태. 쉽게 말하자면 죽였다는 의미였다. 드디어 살인까지 저질렀구나, 이 가슴만 크고 멍청한 안드로이드. 아니. 인간이 아니니 살인은 아닌가.
“······그거 설마 기습 아냐?”
“기습이란, 적이 생각지 않던 때 갑자기 들이쳐 공격하는 행위를 말씀하십니까?”
“응.”
듈리엣은 한참 동안 상황을 다시 회고하는 멍하니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저의 행동은 기습하는 상황과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
하여간 그 뒤 듈리엣은 대기 중에 있던 안드로이드 몇 대를 가동하여 우주선 안으로 들어왔던 해적들을 제압하였고, 몇몇을 인질로 잡아 그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 그들을 협박하여(···) 기술을 이전받고 그 미확인미행물체A에 태워서 우주로 추방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듈리엣이 그들을 기습하였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았을 경우 거꾸로 당했을 수도 있었고, 자신은 그들에 의해서 실험체가 되어 어딘가로 팔렸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더 듣고 싶으신가요?”
“아니, 됐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자신은 내내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 몸서리쳐졌다.
“응? 듈리엣 팔이······.”
그제야 그는 듈리엣의 왼쪽 팔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교전 중 광학무기에 맞은 모터 몇 개가 타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듈리엣의 왼쪽 팔은 군데군데 검게 그을려있었다.
“어째서 수리하지 않았지? 다른 안드로이드를 가동시켰다면 충분히 자체 수리 가능하잖아.”
“주인님께서 물어보시는 사항은 보다 상위를 차지하는 우선 사항을 수행하기 위해 현재 보류 중에 있습니다.”
아아. 몇 개월이 지나도 그대로다. 이 가슴만 크고 멍청한 안드로이드.




4) 듈리엣의 고독

“외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인님.”
또냐,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읊조리기 시작한 듈리엣은 이제는 주기적으로 질문을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인가 AI 룰을 확인하도록 명령 내렸지만 이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듈리엣의 안드로이드로써의 논리는 다용도로써 설계된 AI 룰셋 중에서도 가장 인간에게 안전한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가끔 말을 안 듣기도 하지만 말이다.
“저는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듈리엣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야 만 것이다.
“······뭐?”
“저는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한 것 같습니다.”
“······. ······뭐?”
“저는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한 것 같습니다.”
“······.”
“저는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
“아아! 그만!”
그러니까 말이다. 듈리엣은 자신이 툭하고 내뱉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려 지구 시간으로 1년이 넘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마도 인간의 뇌로는 생각하기도 끔찍할 만큼 방대한 양의 논리 구조를 그리기 위해 연산을 수행했을 것이고 그 결과가 나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논리 구조는 절대로 컴퓨터의 그것처럼 논리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주제에 논리 구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논리적으로 풀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높은 확률로써 인간의 논리적이지 않은 논리 구조가 논리 구조로써 표현할 수 있는 거라는 것이다.
물론, 어떠한 학자들은 인간의 논리 구조가 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뇌는 너무 많은 변수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고속으로 동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는 인간의 논리 구조는 완벽하게 논리적이지만 입력되는 모든 변수를 다른 사람이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알아낸 몇몇 변수만으로 논리를 진행하고 얻어진 결과와 비교하기 때문에 인간의 논리 구조가 논리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수식으로 쓰자면


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일부 어떠한 학자들의 주장이 올바른 것이었다면, 듈리엣은 인간의 논리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했으며, 그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변수를 알아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즉, 그 이야기는 듈리엣이 알아낸 인간 논리 구조를 다른 곳에 이식하면 컴퓨터도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그래. 그럼 외로움이라는 것이 뭐지?”
“사회에서 느끼는 고립감입니다.”
“······.”
내가 예전에 했던 말과 다르지 않게 들리는 것은 왜지?
나는 듈리엣을 수리실로 데려가 등 뒤에 꽂을 수 있게 되어 있는 통신 케이블을 모선의 컴퓨터에 연결하고 듈리엣의 실행 메모리 영역을 모두 스캔하도록 했다.
“저는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한 것 같습니다.”
“알았으니까.”
패리티 체크까지 끝낸 후 에러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의 속은 더욱 답답해져만 갔다. 이런 기분이라서 사람들은 담배를 펴고 싶은 모양이다. 제길.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지?
“아무래도 나는 네가 가진 논리의 문제를 알 수가 없는 것 같아.”
“저는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한 것 같습니다.”
듈리엣은 자신의 옷의 지퍼를 끌어 올리며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 만큼의 논리 회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맞습니다.”
“그러면 네가 어떻게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거지?”
“······.”
잠시 침묵.
“설명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
“말로 설명하는데 예상 시간으로는 대략 이십만 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NPC(NP-Complete) 문제냐!
“주인님께서는 그때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잠시 침묵.
“없습니다.”
이 당연한 소리를 하기 위해서 듈리엣은 무언가를 연산했던 것이다. 두통이 밀려온다.
“두 시간 이내로 요점만 설명한다면 들어볼 용의는 있어.”
또 잠시 침묵.
“요점을 만드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를 뭔가의 반복이다. 왠지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안드로이드에게 속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을 위해서 가끔 일어나는 이벤트성 농담 따먹기인가?
“······얼마나 걸리는데?”
“예상 시간으로는 대략 326일 21시간 14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습니다. 주인님께서 그때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그만. 거기까지.”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그렇게까지 인내심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나는 듈리엣이 그 빌어먹을 요점을 만들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327일을 보내는 동안 스스로 식사를 만들어 먹을 만큼 요리 솜씨가 좋진 못했다.
나는 이 복잡한 문제를 어서 빨리 매듭짓고 더 이상 ‘저는 외롭다는 의미를 이해한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어떠한 연산을 수행한 결과로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는 건가?”
“네. 사회에서 느끼는 고립감입니다.”
“하지만 듈리엣. 들어봐. 그건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야. 실시간으로 동일한 연산을 수행할 수 없고, 그걸 증명할 수 없다면 곤란한 거야.”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주인님은요?”
“······응?”
“주인님께서는 외로움에 대해서 실시간으로 연산을 수행하고 그 과정을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내가 그 과정을 설명 못한다면 듈리엣은 아마도 외로움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감정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겠다는 의미였다.
“못해.”
“그렇다면······.”
“아, 아. 그러니까 인간의 논리 과정은 선형적인 축에서 계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비록 그 과정이 선형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비선형적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그게 선형적이든 비선형적이든 높은 확률로 거의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어. 하지만 듈리엣은, 듈리엣은 그게 안 되잖아.”
“······그런가요.”
“응.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것을 끝으로 듈리엣은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와 천천히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 뭔가 찝찝한 기분을 달래며 듈리엣의 메모리 체크를 위해서 열어두었던 프로그램들을 하나하나 닫았다. 어차피 할 것도 없으니 말이다.
“주인님.”
나간 줄 알았던 듈리엣은 문 앞에 서서 막 의자에서 일어나는 나를 바라보았다. 차분한 얼굴. 붉은 눈동자가 힘이 없어 보였다.
“제가 말했던 외로움에 대해 정정하겠습니다.”
“······그래. 말해봐.”
“외로움이란, 아마도 제가 인간이었다면 주인님의 말씀을 듣고 느꼈을 감정입니다.”

*    *

나는 듈리엣을 안고 흐느끼듯 한동안 울어야만 했다. 나에게, 그리고 이 멍청하고 가슴만 큰, 하지만 사랑스러운 안드로이드 듈리엣에게 느껴지는 깊은 외로움을 서로 달래기 위해서.

5) 데쟈뷰

요즘 들어서 이상한 감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게 기시감(旣視感)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이미 그 감각 때문에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였다. 심지어 이렇게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 지경에 왔는지 우주선에 남겨진 모성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보고 있는 자신에게 마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기시감.
또는 데쟈뷰(Déjà vu). 지구상에 존재했던 국가, 프랑스가 사용했던 언어로 표현되는 단어로 ‘이미 본 듯한’이라는 뜻이다. 또는 ‘기억 착란(paramnesia)’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이 단어는 서기 1851에서 1917년까지 생존했던 알제리 출신의 정신 및 심령 연구가 에밀레 보이락의 저서 정신 과학의 미래(L'Avenir des sciences psychiques)라는 책에서 사용된 말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이미 겪었던 경험인 것 같은 느낌을 의미한다. 공식적인 연구에 의하면 일반인의 70%가 한 번 이상 이를 경험했으며, 이에 대한 원인에 대해서는 꿈이나 기억 장애, 뇌의 이상 등 다양한 이론이 존재한다.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문이 열리고 듈리엣이 들어올 것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곧이어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확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신만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
“하아.”
그리고 듈리엣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돌아오지 않자 오히려 안심을 느낀다. 아직 자신의 뇌가 미치지 않았음을, 이것이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임을 확신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하지만 머지않아 기시감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도대체 자신의 뇌에 어디가 잘못 된 것일까. 설마 이러다가 자살을 하거나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너무 오랜 시간 이 좁은 우주선에서 듈리엣과 단 둘이서만 지낸 것이 원인일까. 이러다가 언젠가 모든 것의 원인을 듈리엣에게 돌리고 자신의 손으로 부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시 외로움에 미쳐 우주선의 문을 열고 아무것도 없는 저 차가운 우주 속으로 몸을 던지지는 않을까. 사고는 점점 불길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무렵 듈리엣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듈리엣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자신의 주인을 발견하고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주인님. 맥박과 호흡이 흐트러져 있습니다. 누워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듈리엣은 자신을 부축해서 방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어지럽게 흐트러져있던 침대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고, 듈리엣은 그 위에 자신을 눕혔다. 이불을 덮게 하고 차가운 손을 자신의 이마에 올렸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옆에 있어줘, 듈리엣.”
“물론입니다, 주인님.”
자신의 체온에 점점 따뜻해져가는 듈리엣의 손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의식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    *

왜 자신이 이 우주선에서 창고 같은 이곳에, 그것도 맨발로 걸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발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이미 자신의 행동은 의무감에 가까웠다.
기시감.
드디어 이 망할 놈의 감각은 자신에게 몽유병 같은 증상을 일으킨 것이다. 눈을 떴을 때 듈리엣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고, 자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방을 나와 곧장 이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망할······.”
누구를 향해 욕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없던 듈리엣에게인지, 이런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자신에게 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그리고 문 앞에 섰다.
이 문을 열어야 한다.
그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머리로 떠올려보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일까. 이것은 이미 호기심에 가까웠다. 기시감과 호기심이 맞물려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 젠장.”
발길을 돌리려고 해도 돌려지지가 않았다. 이곳은 창고. 듈리엣과 같은 타입의 안드로이드가 십여 대가 이미 조립된 상태로 보관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외에 우주선의 예비 부품 같은 것이 보관되어 있다. 어둡고 추운 곳이기도 하여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듈리엣을 시키면 되니까.
“······.”
저 문 저 편에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현실은 공포 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과거의 지구 위에서 만들어졌던 공포 영화와 같이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일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 결심이 굳어졌다. 고민은 한참이었지만 행동은 순식간이었다.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아주 작은 저항을 느끼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등 뒤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 우주선에는 오로지 자신과 자신을 ‘사랑스럽다’라고 말해달라는 안드로이드 듈리엣만 있었다. 그러니 그 대상은 당연히 듈리엣이어야 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시감.
하지만 그곳에 듈리엣은 없었고 발자국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 문이 열리고 있었다. 착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흡이 거칠어지는 일은 없었다. 자고 있는 사이 투여한 진정제가 아직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문이 완전히 열리고, 조명이 하나씩 빛을 밝혀 정적이 휩싸인 창고 안을 비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무언가 이상한 것을 하나하나 뇌가 인지하기 시작한다. 언제 이곳에 마지막으로 들어왔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자신의 기억과 다른 것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네킹처럼 와이어에 의지한 채로 서있어야 했던 안드로이드가 대부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투명한 액체로 가득한 둥근 표면의 투명한 유리통이 몇 개 놓여 있었다.
클론.
이것은 인간의 DNA를 복사해서 클론 인간을 만들어내는 장치였다. 분명히 연구실에 있어야할 장비가 왜 이런 창고에 박혀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듈리엣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명령도 없이.
자신의 복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유리통 안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선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유리통 안에 무언가 있음을 확인하고 발길을 돌려 그 앞으로 갔다.
“······듈리엣?”
그 안에 듈리엣이 나체의 모습으로 눈을 감고 떠있었다. 손이 유리통에 닿자 자신의 온기가 액체를 타고 전해진 것처럼 듈리엣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주인님.
입모양은 단지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였지만 듈리엣은 입을 움직이며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액체의 수위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며 액체 위에 떠있던 머리카락에 남아있던 액체가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곧이어 유리통이 열리고 나체의 듈리엣이 서있었다.
“같이 가실 곳이 있습니다.”
유리통에서 나온 듈리엣은 액체를 털어버리고 옷을 입으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자신은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것은 이 기시감.
듈리엣이 이끄는 대로 발길을 옮겨 다다른 곳은 본 적도 없는 방 앞이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 좁은 우주선 안에 자신이 모르는 방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지만 낯선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듈리엣. 이 방은?”
이제까지 자신이 아는 듈리엣이 아닌 것 같은 그녀였지만 안 물어볼 수 없었다.
“이 방에는 지금까지 돌아가신 주인님들과 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뭐?”
듈리엣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을 바라보라는 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머리는 이미 생각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니. 이미 순식간에 사실을 파악했지만 머리는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눈앞에 투명한 관 안에 누워있는 조금씩 다른 모습의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생각하기를 그만 두었다.
그러다 망가져버린 인형처럼 한 쪽 벽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듈리엣과 같은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들을 보면서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듈리엣?”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앞이 흐려졌다.
“최초의 주인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주 방사선 때문에 중요한 기관의 세포들이 DNA에 변형을 일으키면서였습니다. 이는 백혈병 및 다른 암을 일으켰고, 이 우주선에 있는 장비로는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듈리엣을 구하기 위하여 우주선 밖으로 뛰쳐나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 때 한계치를 훨씬 넘는 방사능에 노출되었고, 외계인에게서 얻은 기술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듈리엣에게서 들었다.
“······외계인은 오지 않았습니다, 주인님.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이 우주선의 시설을 이용하여 주인님의 DNA를 이용하여 주인님의 클론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이 일정한 나이로 배양되는 동안 이 우주선에 남겨진 기억을 주인님께 옮기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여 세대에 걸쳐 자신의 주인을 만들려는 시도를 듈리엣 그녀는 계속했다는 것이다.
“······나의 마지막 소원들은 뭐였지?”
더 이상 몸을 겨눌 힘이 없었다. 더 이상 기시감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고,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과거의 자신들은 듈리엣에게 도대체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어느 날 깨어보니 하느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멍청하고 가슴만 커다란 그녀들은 꾸준히 자신의 AI를 개발시키고, 새로운 형태의 안드로이드를 개발했던 것이다.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6) 소원

우주선 안에 실려 있던 핵연료가 모두 고갈되고, 6개월 정도 쓸 수 있던 고체 연료까지 모두 소모된 뒤 우주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우주선 외부로부터 날아오는 미약한 빛 에너지가 전부였다. 듈리엣은 다시 생명 유지 장치에 들어갈 것을 권했고, 그에 따라 나는 다시 생명 유지 장치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며칠, 몇 개월, 몇 년, 아니며 또 수십 년, 수백 년이 흘렀을지도 모를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    *

호흡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극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내뱉는 입김이 투명한 유리에 부딪혀 뿌옇게 만들었다.
“듈리엣?! 윽!”
소리를 지르는데 목이 끔찍하게 아팠다. 아마도 지나치게 오래 이 안에 있었던 것이 원인이리라.
그러나 듈리엣으로부터의 대답은 없었고, 대신 생명 유지 장치의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전혀 회복되지 않은 팔 다리 근육을 이용해 장치의 문을 억지로 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식은땀이 흘러 피부가 축축해질 즈음에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실내등은 켜지지 않았다. 단지 생명 유지 장치에 작은 등 몇 개만이 깜빡거릴 뿐. 미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흐르는 땀을 더욱 끈적거리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몸이 더워졌다.
어둠속을 뒤적여 겨우 옷을 찾아 입고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문의 버튼을 눌렀지만 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매뉴얼 모드로 바꾸고서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불빛마저 없는 우주선의 긴 복도를 따라 메인 브리지까지 가는 것만으로 숨이 차올랐다. 다행히 메인 브리지로 들어가는 문은 열린 채였다. 메인 브리지에 바깥 우주를 유리 창문을 통해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설계된 스크린은 모조리 꺼져 있었고 몇몇 LED만이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듈리엣?”
기대대로 듈리엣의 대답은 없었다. 겨우 겨우 터미널을 찾아 손으로 건드리자 작은 스크린 하나가 밝은 빛을 내면서 켜졌다. 스크린에는 수많은 경고창이 떠있었고, 그 중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경고 메시지는 전력 공급 부족에 대한 것이었다.
계속 빛 에너지를 모아 발전을 계속하고 있지만, 생명 유지 장치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생명 유지 장치의 동작은 거의 모든 경우에 대해서 최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주선을 관리하는 코어 컴퓨터가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생명 유지 장치마저 꺼버린 것이었다. 코어 컴퓨터마저 꺼진다면 이 우주선을 그대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주위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지도 알 수 없어 우주 속에서 미아가 되어 버린다.
냉정히 생각해본다면, 이 상황이 크게 나아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우주선은 이제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이미 스스로 자세를 제어할 수도 없었다. 그 전에 산소가 떨어져 죽게 될 것이다. 가장 가까운 항성계까지의 거리는 현재 속도로
‘17만 시간.’
20년 가까운 시간이었다. 인간이 산소 없이 20년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랍게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깊은 안도감이었다.
‘이렇게 죽는 구나.’
그리고 눈을 감았다.
울티메이트 웨폰(ultimate weapon)이라 불리는 무기의 개발은 인류에 의한 태양계의 종말을 가져왔다. 과거 세계 3~4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구의 절반을 잃어 버렸던 인류가 참혹한 핵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핵전쟁으로도 인류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교훈은 지구 밖 행성으로 인류의 터전을 옮기는 과정에서 행성을 통째로 파괴해버릴 수 있는 울티메이트 웨폰을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가장 먼저 인류가 이주한 지구 밖 행성 화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인류공동체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는 다른 이주 행성들의 독립 선언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지구와 화성 사이에서 수많은 협상이 오갔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행성 간에 마땅한 공격 수단이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화성의 독립을 지구가 인정해야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구는 비밀리에 화성과 목성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소행성을 이용하는 울티메이트 웨폰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지구에 의한 화성에 대한 전쟁 선언이 있고 하루 뒤, 지름이 50km에 이르는 소행성 4개가 화성을 향하게 된다. 화성 인류는 이를 막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지만 지구 측의 방해로 인하여 하나의 소행성을 저지하는데 그치게 된다. 첫 충돌 몇 시간 전 화성은 독립을 철회하고 지구의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결국 화성에 이주했던 인류 5억 명은 하루 만에 절명하고야 만다.
첫 번째 울티메이트 웨폰이 화성을 강타한 직후, 울티메이트 웨폰의 사용이 결정된 지구의 인류공동체 회의장은 핵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만다. 그 후 지구는 극심한 내전에 휩싸이게 되고, 그 사이 다른 인류 이주 행성들은 울티메이트 웨폰의 개발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인류는 멸망하고야 만다.

*    *

자신이 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믿기지 않을 정도의 행운 때문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몸은 땀에 절어 있었다. 실내가 온도가 조금 높아졌고, 산소의 양은 이제 폐로 느껴질 정도로 줄어 있었다. 우주 공간은 매우 희박한 수소를 제외하고는 열을 매개할 매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명체가 내는 열을 식혀주지 않으면 열이 우주선 내부에 쌓이게 된다. 우주선 전체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내는 열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위해서 산소와 온도가 유지 되었던 곳은 우주선에서도 일부분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우주 공간에 직접 노출되면 인간은 압력차에 의해서 폐의 공기와 수분이 순간적으로 빠져나가 코와 입 주위가 얼어붙게 된다. 혈액 속에 질소와 산소가 급속한 감압으로 인하여 끓어오르다 결국 산소 부족으로 인해 서서히 의식을 잃고 심장이 멈추면 죽는다. 순간적으로 얼어 죽거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터져 죽진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왠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주복.’
우주선에는 우주선 외부를 수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우주복을 남겨져 있을 터였다. 우주복은 단열처리가 되어 있었고, 영상 120도와 영하 120에 이르는 온도 범위에서도 인간이 100시간은 넘게 생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중에는 냉각장치와 산소 호흡기도 포함되어 있다. 분명 우주복은 감압실 근처에 있을 터였다. 여기 브리지로부터 조금 멀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통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은 차분히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용기가 많지도 않고, 고고하지도 않다.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말이다.
떨리는 팔다리로 어둠을 더듬어 감압실로 향했다. 발걸음을 더할수록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이 되어 떠올랐다. 생각하지 말자.
눈앞에서 지구가 붉게 변해가는 모습을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태양계 안을 몇 번이나 돌며 인류가 남긴 유산들과 생존자를 찾아보았고, 그 때마다 좌절에 휩싸였다. 참을 수 없는 고독감과 상실감에 몇 번이고 죽을 생각을 했었다.
생각하지 말자.
이 광활한 우주 속에 오로지 혼자뿐이라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바이오매트릭스를 탑재한 항성 간 이주선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혹시 하는 마음이었다. 결코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말자.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었다. 하다못해 생명체가 살고 있는 다른 행성이라도 찾을 수만 있다면, 이 몸을 눕힐 땅만 있다면······.
“생각하지 마!”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고는 급격히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자신은 이 좁은 우주선 밖으로 나간적도 없다! 지구를 본적도 태양을 본 적도 없다! 이 머릿속에 남겨진 기억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심지어 금방이라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나의 동생, 나의 친구들까지도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듈리엣! 듈리에엣!”
그 멍청한 기계 때문이다!
분노가 치밀었고 미친 듯이 듈리엣의 이름을 불렀다. 왜 자신을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것을!
다리가 꼬여 넘어졌다. 가슴부터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폐에서 숨이 빠져나갔다. 심한 기침이 났고 얼굴은 땀과 눈물로 얼룩졌다. 그리고도 움직인다. 이 질긴 목숨이 움직인다.
“듈리에엣······.”
나는 울고 있었다.
“······듈리엣!”
목소리는 그녀를 찾고 있는 외침이 되어 우주선 안을 메아리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외쳤지만 그녀의 기척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바닥을 기고, 기고, 또 기어 어딘가로 도착해야 했다. 정상적이지 않은 머리는 자신을 감압실이 아닌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 곳은 자신이 죽을 장소라는 것을 안 것은 겨우 문 앞에 도착해서였다. 언젠가 듈리엣이 자신을 이끌어 자신과 같은 기억을 공유하였던 또 다른 나 자신들이 놓여 있는 곳. 나는 다시 운명처럼 자신이 죽은 장소를 선택한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흔들리는 머릿속.
멈추지 않는 근육의 떨림.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떨림이 멈추었을 때, 몸을 일으키고, 그리고 두 발로 일어서, 굳게 닫힌 그 문을 열었다.
새 하얀 빛이 그 안에서 쏟아지며 나의 몸을 감싸 안았다. 빛은 눈을 통해 뇌 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그늘을 만드는 작은 몸집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꼬옥 마주 잡고 무언가를 기도하는 듈리엣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

그것은 한 인간이 남긴 기억이었다.
이 광활한 우주에 마침내 피어난, 하지만 불과 하나에 지나지 않는 기적이었다.




현 공과대학원 박사과정(현 전문연구요원)
모진 인연, 탱자탱자 테일즈(www.tales.kr)의 밤을 불 살랐다 피곤에 지친 집사.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려고 노력하는 중.
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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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코로나 라임 2018.05.01 503
초청 단편 닫히다 2016.11.30 312
초청 단편 꽃 없는 봄1 2016.07.31 248
초청 단편 OK TO DISCONNECT 2013.05.31 2735
초청 단편 툴쿠2 2013.05.31 2667
초청 단편 Recipe: 사랑의 묘약 2011.05.28 2019
초청 단편 컴퓨터의 마음2 2010.10.29 2058
초청 단편 나비의 꿈(胡蝶之夢) 2009.10.31 1824
초청 단편 여름 호러 특집③ 가족의 집2 2009.08.29 1936
초청 단편 우주인류학개론10 2009.02.27 3592
초청 단편 누에머리손톱6 2009.02.27 2625
초청 단편 백사1 2009.01.31 1478
초청 단편 여우야 무슨 반찬1 2008.11.29 1676
초청 단편 반복구간 2008.09.26 1654
초청 단편 사라진 아내1 2008.08.29 1710
초청 단편 바다의 노래1 2008.06.27 1430
초청 단편 원숭이 엉덩이는 빠/알/개/6 2008.04.25 2252
초청 단편 밤에 울부짖는건 늑대만이 아니다2 2008.03.28 1659
초청 단편 듈리엣 - 시나리오 소원4 2008.03.28 1864
초청 단편 판시웨인 입성1 2008.03.0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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