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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 단편 고철장의 고양이

2006.10.28 00:5710.28

readingfantasy.pe.kr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깊은 고민이 절정에 달하던 그 때, 선선한 가을바람이 시작되던 어느 날 오후, 오늘의 모든 강의를 듣고선 터덜거리며 박군의 자취방으로 향하던 길 가운데 있던 어느 고철장 앞에서의 일이었다. 그 날은 지금 생각하면 중간고사에 매우 중요한 날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날 내 귀에 들어온 강의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학기 중간고사에는 내가 모르는 내용만이 문제에 점철되어 있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그렇게나 중요한 날 나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나는 고철을 보며 멈춰서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고철장 주인의 한 달 수입에 관하여, 그 고철장의 규모는 우리 학교 운동장만했다. 그곳에 뭐랄까, 뒷동산이라기엔 좀 작고, 그렇지, 마치 왕릉만한 - 좀 비일반적인 비유겠지만 - 고철뭉치들이 서너군데 쌓여 있었다. 일전 TV에서 나는 10여년동안 자기 집 마당에 고철을 쌓은 뒤 300여만원에 판 아저씨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저 정도 고철을 합한다면 대략 그 정도 나올지도 모른다. 나는 이 고철장의 규모를 통해 고객이 많은 고철장임을 한 눈에 직감했다. 그 외에도 인근 건설현장과의 접근성, 가용한 인력, 주인이 보유한 작업도구와 장비 등을 감안해가기 시작하는 등의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저 일은 자네같은 스무살배기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냐. 건설과 경제, 경영, 여러가지 분야에 대한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해."

  눈을 돌린 곳에는 나를 향해 말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고양이도 나처럼 고철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따질 때 자네가 고철장에 가지는 희망은 '환상 구성'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 때로 무분별한 환상 구성은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을 낳기도 해. 좋지 않은 버릇이지."

  나는 멍한 눈으로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내 이름은 스크래치라고 하지. 그냥 줄여서 톰이라고 부르게." 내가 왜 스크래치란 이름은 줄여서 톰이라고 하는지도 이해 못 할 때 톰은 덧붙였다. "이 근처엔 쥐들이 많이 숨어 살지. 좀 낚아갈 수 있을까 해서 와 봤어."

  나는 관심도 없는, 그가 여기 왜 왔는지에 대한 사실까지 알게 되기까지, 벌써 몇 가지의 궁금증이 생겨 났다. 첫 번째는 어떻게 내가 고철장을 보면서 고철장 주인의 한 달 수입에 대해 생각하는지를 알았으며, 두 번째는 내가 돈에 관련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데, 어떻게 내가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를 아느냐는 점이었다. 부연하자면, 고양이가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 없듯이,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고양이 역시 얼마 없다.

  "역시 자네는 '환상을 좇는 사람'이 맞군."

  "환상을 좇는 사람이라니요?"

  톰은 인간과 환상에 대한 긴 논문을 낭독했다. - 물론 그 논문은 매우 투명해서 착한 톰만이 알아볼 수 있을테지만 -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성과 감성을 가진 생물은 늘 환상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살고 각 시기마다 추구해 온 환상이 정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유아기때는 어머니에 대한 환상이 작용한다. 그 품이 가장 편안하고, 풍족한, 자신에게 있어 가장 만족스러운 장소로서의 개념을 가진 채, 풍족함을 안겨 주는 것을 향해 무조건적인 추구를 한다. 유년기때는 세상을 인식해 감으로써 어머니의 품을 떠나지만 세상에 관한 인식의 불충분으로 인해 가불가를 따지지 못하는 시기이다. 때문에 부모 등의 어른들이 심어주는 비현실적 환상을 곧이곧대로 믿고 추구하게 된다. 성장기에는 지식의 발달로 가불가를 정립하게 되지만, 이번엔 현실적 환상, 즉 있을 법한 일에 대한 환상을 쉽게 추구하게 된다. 청년기가 되면 이제부턴 전환점으로, 환상을 환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현실을 현실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현실 속에서 환상을 구현하기 위해 애를 쓴다. 여기서 성공한 이가 후세에 위인으로 기록되는 이들이다. 이후 장년기와 노년기로 이어진다. (톰은 이 두 요소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톰이 열심히 설명했다는 점만 기억해두면 좋을 것이다.)

  "자네가 바로 청년기에서 환상을 구현해 보려 애쓰는 시기지. 만일 고철장 주인을 하게 된다면… 하는 상상을 통해 환상이 구현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돼. 때로 즉흥적인 환상구상이 큰 일을 이룩하는 토대가 되기도 하지만, 잘못 고른 거야. 고철정 주인이 되려면 10년이 넘게 공부와 경험을 해야 하는데, 자네의 환상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당장 다음 달에 돈 30만원이 수중에 들어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불가능하다 할 수 있지. 땅바닥에서 펄덕이는 물고기를 구하려면 십리 밖의 개울보단 수중의 물 한 컵이 나은 법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눈 앞의 환상에 이끌려 하마터면 시간을 낭비할 뻔한 것이다.

  "환상이란 양날의 검이야. 삶을 즐겁게 하고 목표를 정해주기도 하지만 때로 삶을 낭비하는 독이 되기도 하지. 실은 나도 바다에서 고기를 낚아 먹는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지만 어떤 인간이 내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어. 내 심리이론의 스승니기도 하지."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처지에 빠져 봤던 경험이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고철장을 바라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가 고철장 주인이 되겠다는 환상 구상을 하고 있고, 그것이 이번 달에 돈 30만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모두 알아차렸던 것일까.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말로써 전달했다. 톰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아 그거! 내 깜빡잊고 말을 안 했군. 실은 최근에 내 스승님을 만나 뵈었지."

  나는 그가 왜 자기 스승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끝까지 들어 보기로 했다.

  :그 때 자네 얘기를 좀 들었다네. 요즘 돈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자네가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다길래 내가 직접 상담을 하고 싶어 찾아 온 거야."

  "저를 아는 사람이라고요? 이름이 어떻게…?"

  "박…."

  나는 거기까지 듣고는 멍해진 채 톰의 말이 귀에 안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지인 중에 박씨 성을 가진 이는 박군 뿐이었으니까.

  나의 절친한 친구 박군은 언제부터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던 걸까. 그리고 또 바닷가엔 언제 찾아가서는 몽상가 고양이를 괴상한 정신분석학으로 설득했던 것일까. 궁금증이 더 많아지는 걸 보니 돈 문제와 합져서 한동안 두통에 시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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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또 썼습니다. 전작은 결국 실패인 거 같습니다.

  장년기와 노년기... 여기에 대해서는 설명을 좀 더 하려다가, 그저 프로이트 심리분석학 패러디한 거 주절거려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해서 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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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파킨슨 님은 환타지 읽기 Reading Fantasy 홈페이지의 첫 연재(습)작가입니다. 연재작 ‘버서커’를 비롯, [환타지 읽기 중단편선 1]에 실린 ‘마지막 용병 이야기’, ‘청천’ 등의 글을 쓴 바 있습니다.
현재는 말년 병장생활 중으로 제대가 보름도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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