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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fantasy.pe.kr  그 날 저녁, 나는 허탈감에 젖은 채 방 안의 무정물이 되어 있었다. 날씨는 해 질 때까지만 해도 화창했다. 그러니까 지금도 아무 이상 없이 맑은 날씨일 것이다. 나는 정지된 무엇이 된 채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치 그 생각이 끝난 뒤에 모든 것이 정상이 될 것처럼, 모든 시간이 다시 흘러가 내가 다시 유정물이 될 것처럼 하고 있었다. 나는 방 안에서도 특히 어두운 곳에 있었다. 미세한 움직임조차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 속의 그림자. 불은 꺼져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사랑은 무엇이고, 달 밝은 밤의 스케이팅은 무엇인가, 벗이여!"

  누군가 내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왔다. 누군지 보지 않더라도 그가 박군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술을 마시면 그는 저런 말을 곧잘 해대곤 했다. '사랑은 무엇이고, 오늘 먹은 삼계탕 안의 돼지고기 한 점은 무엇인가, 벗이여!' 라거나, '사랑은 무엇이고, 일본어를 지껄이는 고양이가 짓밟은 우리 안의 카타르시스는 무엇인가, 벗이여!' 라는 둥 '사랑은 무엇이고...'로 시작하는 빠른 말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그의 말은 정신이 없어지는 말이었다. 평소 엽기적이던 그는 술을 마시면 좀 더 빠르게 엽기적으로 변한다. 나는 그래서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대충 짐작하며 어떻게 하면 그를 다시 이 방에서 나가게 할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박군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전화로 모든 것을 다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런 말을 한 것이 잘못이었을 수도 있었다. 박군은 겉으로는 엽기적이지만 심성은 착하니까, 내가 오늘 얻은 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려고 내게 많은 관심을 쏟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그 관심을 거부할 경우 그의 분노가 상승하여 더 많은 말을 내게 늘어놓을 것 역시 분명했다.

  불이 켜졌다. 형광등의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 하다가 흰 빛과 함께 제 빛을 찾았다. 눈부심에 눈을 찡그리고 그 빛을 피했다. 나는 그 찡그림 속에서도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도 저렇게, 어두운 내게 처음엔 눈을 피하고 싶은 찡그림이었다. 나는 눈물이 흘렀다. 눈이 너무 따가워서 흘리는 건지, 그녀 생각에 북받쳐서 우는 건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나는 그 둘 다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박군은 내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울고 있군, 벗이여. 떠나간 고양이같은 그녀를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가?"

  "고양이라고?"

  박군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내게는 마치 미끼를 무는 사냥감을 쳐다보는 야생의 사냥꾼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같아 보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박군이 고양이의 특징, 성격, 행동양태와 그 원인이 되는 사고방식이나 호르몬에 대한 강의록을 낭독하기 시작할 때는 그 표정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군은 자랑스럽게 결론을 말했다.

  "여자는 곧 고양이인 셈이지."

  나는 그 결론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박군의 강의록은 고양이가 여자와 닮은 점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 결론을 낸다면 고양이는 여자와 닮았다지 고양이가 여자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런 나의 생각과 정 반대로 나는 강의를 열심히 들은 한 학생으로서의 태도를 보였다.

  "질문이 있는데," 바로 나는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럼 남자는 뭐지?"

  박군은 다시 한 번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남자의 특징, 성격, 행동양태와 그 원인이 되는 사고방식이나 호르몬에 대한 즉석 강의를 시작했다. 그 내용은 남자인 내가 들어도 그럴듯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며, 상당히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박군은 결론지었다.

  "그러니까 남자는 개야."

  기분 나빴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까지나 박군은 남자와 여자를 동물에 비유해내어 성별에 대한 이해를 도운 것에 불과하니까. 남자와 여자가 개구리와 뱀이건, 라이거와 타이온이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박군이 고마워서, 더 이상 이렇게 구석에 쭈그리고 앉는 모습을 보이는 게 민망해졌다. 결국 나는 일어서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박군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박군의 덕택에 정지된 시간은 다시 흐르노라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박군은 아침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아침산책이나 하면서 기분전환을 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침나절, 밤을 꼬박 샌 두 청년이 있는데 한 명은 술에 절어 비틀거리고 한 명은 퉁퉁 부은 눈에 꾀죄죄한 몰골로 다니면 다들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카타르시스를 짓밟는 그것을 보게 되었다.

  우리 집 문 앞 골목에서 발정난 고양이 수컷이 발정난 개 암컷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우리가 멍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몸집 크기 차이 때문에 자기 성기를 개의 성기로 밀어넣을 수 없어 바둥거리던 그 고양이가 이 쪽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뭘 봐, 이 개새끼들아!"

  나와 박군은 건방진 고양이를 응징하고 패륜 암캐를 훈계한 뒤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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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 좀 약하긴 해도 예전 것과 이어진다는 건 명백하지만, 우리 이름은 아직도 나오지 않는군.
  박군 : 뭐, 독자들 맘대로 생각하라 그래. 내 이름이 박인순이건 뭐건.
  나 : 그럼 나는 나도향 할까?
  박군 : 상큼하게 웃지 말게, 벗이여. 때려버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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