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해도연 랄로랑이안 모뉴먼트

2022.12.01 08:0012.01

랄로랑이안 모뉴먼트

해도연

 

A.
행성 랄로랑이는 지구를 닮았다. 모항성 타우타이에서 떨어진 거리도 그렇고 덩치에 걸맞지 않는 커다란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지름과 질량이 각각 지구의 1.3배와 2.2배로 랄로랑이의 표면을 걸어다니면 체중이 30% 정도 늘어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눈썰미가 좋다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더 멀어보인다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거고. 아쉽게도 인간이 랄로랑이 땅 위에 서게 될 일은 없겠지만.

랄로랑이의 위성인 마시나는 지구의 달보다 3배 무겁고 1.5배 크다. 태양계 최대의 위성인 가니메데를 압도하는 규모다. 굳이 비유를 하지만 수성이 지구를 공전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처음 랄로랑이와 마시나를 확인했을 때 이들을 쌍행성이라고 불러야할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랄로랑이를 행성으로, 마시나를 위성으로 결정했다. 어떻게 부르든 두 천체의 물리적 특성이 달라지지도 않을 뿐더러 약간의 향수가 일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4만 9천 광년 떨어진 곳에서 고향의 모습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랄로랑이와 마시나를 행성과 달로 부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랄로랑이에는 문명이 있다. 여러 문명이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로 랄로랑이 각지에 퍼져 있고 가장 앞선 문명도 연한 금속을 겨우 다루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들에겐 지성과 호기심이 넘치며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랄로랑이안이라고 부른다.

반면 마시나에는 미생물 하나도 없다. 물은 커녕 대기도 없고 지각활동도 없다. 그냥 덩치만 큰 달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다. 랄로랑이의 문명들은 태양 타우타이보다 달 마시나를 더욱 우러러본다. 그럴만도 한게, 마시나는 타우타이보다 겉보기 크기가 훨신 큰데다 밤마다 차갑고 신비로운 빛을 뿌리며 랄로랑이안을 우주로 유혹한다. 달이 지구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시나를 본 어린 랄로랑이안은 우주를 꿈꿀 것이고 언젠가는 마시나에 발자국을 남길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 랄로랑이는 지구이고 마시나는 달이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그리고 멀리까지 온 것 같아요.”

카론의 말에 나는 감상을 접는다. 너비가 3미터가 채 되지 않는 정방형 공간 안에서 관성에 몸을 맡기며 빙글 돌아 카론의 화면을 본다. 화면은 짙은 회색에 자글자글한 노이즈가 가득하다.

“은하 벌지가 예상보다 훨씬 짙어요. 게다가 사이별들의 위치는 커녕 우리 위치도 불분명하고. 천문학자들이 일을 좀 덜한 것 같네요.”

“후보는 찾았어?”

카론이 화면 위로 네모 박스에 둘러싸인 자그만 점들을 잔뜩 띄운다.

“그래도 후보가 있는 게 어디야. 고생했어.”

“미안하지만 얘들은 태양 후보가 아니에요.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별일지도 모르는 녀석들이죠.”

“그럼 이제 금방이네.”

금방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알지만 카론의 까칠한 성격을 자극하는 게 인공지능의 양자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기에 가끔은 모르는 척 연기를 해줘야 한다.

“이봐요, 선장님. 100만 년이면 별들이 브라운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요. 100만 년 밖에 지나지 않은 거면 그나마 다행이죠. 출발하고 200만 년이 지났는지 500만 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는데.”

“그럼 그만 둬. 뭐하러 찾아?”

“그럼 목적 코드를 수정해 주시던가요.”

“미안, 코드 수정은 세 번째 선장이 권한을 있어서.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네. 그 친구가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하고 가버렸으니.”

“전 아마 지구를 찾다가 방전되서 죽겠죠.”

“걱정마. 넌 내가 묻어줄게.”

화면 위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나타난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자그만 창 밖에 떠오른 행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손가락 총을 내밀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긴다. 보이지 않는 총알이 지나간 랄로랑이 대기에서 타우타이의 햇빛이 조각나며 무지개를 그린다. 옷감으로 쓰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색의 향연이다.

 

a.
“그날 이후 2년이 지났습니다. 이젠 아무도 부정 못하겠죠. 그날이 트리거 데이였다는 걸.”

세희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운을 넣으며 말했다. 세희는 커다란 원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유가 무엇이든 모두 근심어린 표정이었다. 세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은 평원을 가득 메운 화려한 꽃밭이 세희의 눈동자에 비쳤다. 길게 자란 꽃과 풀을 흔드는 보드랍고 따뜻한 바람 사이로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벌레를 잡고 꽃잎을 모으며 놀고 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이사이로 3미터 넘게 고개를 치켜든 해바라기들이 세희를 마주 바라봤다. 둥근 꽃은 마치 회의실을 관찰하는 눈동자처럼 보였다.

“아이러니하죠. 이 아름다운 풍경이 파멸의 징조라니. 아니, 파멸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징조가 아니라 과정이겠네요.”

무슨 말을 해야할까. 세희는 고민했다. 기후급변대책회의 오전 세션의 의장으로 자리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믿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해바라기의 눈동자를 피해 고개를 돌리자 자그만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세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희는 다시 원탁으로 돌아와 발표자들이 제출한 요약자료를 손끝으로 훑었다.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할까?

“그날 이후, 평균기온은 고작 며칠 만에 가파르게 올랐다가 떨어지길 반복했고 반 년 만에 남북극의 얼음이 30%나 줄어들면서 해수의 순환이 깨지거나 폭주했습니다. 모두가 예상했지만 눈감고 있던 일이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끔찍한 방법으로 일어났습니다.”

원탁 건너편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세희도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날 이후에 무엇을 잃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높이 100미터에 길이가 2,000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일이 폴리네시아 군도를 덮쳤습니다. 어떤 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떤 섬은 높이 솟은 산만 가까스로 고개를 내밀었지요. 해일이 지나간 후 해수면은 5년 전보다 30미터 이상 더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도를 다시 그릴 틈은 없었습니다. 해수의 흐름이 달라지면서 해저지각에 가해지던 하중이 불안정해졌고 해저 지진이 이어졌습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요. 우리가 한때 내륙이라고 부르던 곳이 쓰나미에 휩쓸릴 거라는 걸.”

고향 생각이 문득 떠올랐지만 세희는 소리 없는 긴 호흡과 함께 기억을 다시 삼켰다.

“트리거 데이 이후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전세계의 기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보고 들었습니다. 사실 창 밖만 바라봐도 알 수 있죠. 5년 전 사람에게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티베트 고원이라고 말하면 믿어줄까요? 아이들은 이제 하얗게 얼어붙기 전의 유럽과 깊고 울창하던 아마존, 푸른 우주의 행성 같던 폴리네시아의 섬들, 북극의 빙하와 남극의 얼음대륙을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겠지요. 먼 후손 아이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아이들의 이야기죠. 겨우 2년! 방아쇠가 당겨지고 겨우 2년 만에 세계 인구의 40%가 고향을 잃고 기후난민이…”

“방아쇠를 당긴 게 누구죠?”

영국 대표가 인도 대표를 보며 말했다. 인도 대표는 말없이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영국 대표는 목소리를 키웠다.

“우린 50년 만에 탄소배출량을 80%나 줄였어요. 미국과 중국도 절반으로 줄였죠. 하지만 어느 나라가 감축은 커녕 오히려 더 쏟아낸 덕분에 우린 수도와 나라와 국민의 절반을 잃었어요. 어느 가족은…”

“오전 세션에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두에게 트라우마입니다.”

세희의 제재에 영국 대표는 조용한 기침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인도는 기후온화지역을 공정하게…”

“당신은 공정을 이야기할 입장이 아니죠.”

인도 대표는 여전히 영국 대표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더 차분한 목소리를 말했다. 영국 대표는 잔뜩 뽑아온 발표자료를 들어보이며 따졌다.

“트리거 데이 전 10년 동안의 탄소배출량을 기준으로 온화지역을 피해국가에게 배분해야 해요. 인도는 가장 많은 탄소를 뱉어놓고도 가장 많은 온화지역을 가지고 있어요.”

인도 대표는 이윽고 고개를 들고 영국 대표를 바라봤다.

“다들 회색 갱지를 쓰는데 그 새하얀 종이는 어디서 났나요? 트리거 데이 전 10년 동안의 탄소배출량이라고요? 10년으로 될까요? 300년은 잡아아죠. 그리고 시기에 따른 탄소가치도 따져보자고요. 탄소 1kg으로 얻은 당시의 상대적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말이죠. 그럼 아마 당신들은 오히려 땅을 받기는 커녕 더 내놔야 할 겁니다. 얼어붙은 런던을 다시 녹여서라도 말이죠.”

영국 대표가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바닥에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도 대표는 오히려 팔짱을 끼며 여유를 부렸다.

세희는 두 대표를 향해 진정하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기후온화지역 배분 문제는 지금 다룰 이슈가 아닙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저녁 세션에서 천천히 얘기를 해봅시다. 그리고 온화지역이 언제까지 안정적일지는 알 수 없다는 것도 다들 아실테고요. 오늘 아침 가장 먼저 중국 대표가 발표한 것처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가장 넓은 기후온화지역이지만 다시 2년이 지난 뒤엔 얼어붙거나 바싹 말라버려도 이상하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찾아야할 건 당장 도망갈 곳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입니다.”

“제가 짧게 몇 마디를 해도 될까요?”

필리핀 대표가 손을 들며 말했고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먼저 의장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습니다. 지금 한반도가 겪고 있는 사막화와 극단적 일교차 현상은 우리 루손 섬에서도 일어날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당신들의 투쟁은 곧 우리의 투쟁이 될 것입니다.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리핀은 아주 운이 좋았습니다. 폴리네시아를 덮쳤던 해일은 필리핀에는 큰 피해를 주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는 감사기도를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신에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피해를 덜 입을 수 있었던 건 멜라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의 섬들이 방파제처럼 우리를 지켜줬기 때문입니다. 폴리네시아의 섬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트리거 데이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건 바로 이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과 주민들입니다. 땅과 집을, 나라를 잃었지요. 그리고 수많은 생명도요. 희생자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의 사람들은 어디있나요? 투발루 대표는요? 키리바시 대표, 사모아 대표는 있나요?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죠. 국민의 절반을 잃어도 어떻게든 유지가능한 국가들과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방아쇠를 누가 당겼냐고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입니다. 아이들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 모두입니다. 책임이 없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걸 잃고 사라졌으니까요.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서 서서히 방아쇠를 당겨왔습니다. 그리고 트리거 데이는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닥쳤어요. 그들은 오래 전부터 경고했습니다. 그 경고를 들었던 모든 이의 책임입니다. 그럼에도 방아쇠 당기기를 멈추지 못했으니까요. 지금 여기서 트리거 데이의 책임을 서로 떠미는 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그래도 어떤 나라들이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 사실이죠.”

일본 대표가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알제리 대표가 일본 대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누가 오랫동안 폭약을 채워넣지 않았다면 방아쇠를 당기든 도화선에 불을 당기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죠. 오후 세션 준비도 필요하니 이제 그만 합시다.”

말을 마친 알제리 대표는 세희에게 시선을 보냈다. 세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말했다.

“네, 여기까지하죠. 오후 세션 주제는 기후안정화기술입니다. 오후 세션 의장인 알제리 대표님은 준비된 자료를 미리 받아가시고요.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원탁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라포밍 따위 가능할리가.”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B.
랄로랑이안의 행동을 살피면 살필 수록, 그들에게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낀다. 엄밀하게는, 우리에게 있는 무언가가 그들에겐 없다.

“평화롭기 그지 없군요.”

카론이 말한다.

“맞아. 내가 자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지구 시간으로 따지면 2,000년 정도. 랄로랑이 시간으로는 1,400년. 당신의 신체시간으로는 1년 4개월 10일. 선장이 자는 동안에도 계속 지켜봤는데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카론의 말을 듣고 창 밖을 본다. 지구를 똑닮아 둥글고 희고 푸른 랄로랑이가 시야를 가득 차지하고 있다. 저 아래에 랄로랑이의 열 다섯 문명이 위대한 여정을 걸어나가고 있다. 그들은 이제 같은 대륙에 있는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다. 두 문명이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의 다른 모습과 문화에 놀라움을 쏟아냈고 다양성을 기반으로 삼아 더욱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순간에도 전쟁이나 전투는 커녕, 사소한 싸움조차 없다.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어 보인다. 마치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내가 타우타이 행성계에 도착했을 때부터 랄로랑이에는 원시적인 문명이 있었기에 거기에 집중하느라 랄로랑이의 생태계 자체를 미처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최근이 되어서야 랄로랑이의 생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랄로랑이로 직접 내려갈 수는 없었지만 회전형 핵추진 항성간 우주선 스틱스에는 많은 원격탐사 장비가 있었다. 길고 험난한 아광속 비행 속에서 다른 선장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고장난 것들을 제외하고도 랄로랑이의 생명을 살피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진짜 생물학자가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수도 있겠지만.

랄로랑이의 생명은 놀랍기 그지 없었다. 정말 생물학자가 왔어야 했다. 글쎄, 아니면 역사학자나 사화과학자가 왔어야 했을까. 랄로랑이안을 보고 예상했던대로 랄로랑이의 생태계에서는 어떤 형태의 폭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지도 않았고 영역 다툼을 하지도 않았다. 죽은 동물을 먹는 경우는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랄로랑이에서는 동물이 죽어도 부패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청소꾼 역할을 하는 동물이 반드시 필요했고, ’개체수는 많지만 수명이 짧고 연약한 초식동물’과 ’개체수는 적지만 수명이 길고 강인한 육식동물’이 함께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다.

내가 엘라라고 이름을 붙인 초식동물은 생김새가 한때 지구에 살았던 거대 코뿔소인 엘라스모테리움을 닮았다. 다리나 눈의 수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랄로랑이의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 지구의 동물과는 그나마 비슷한 편이다. 엘라는 곰팡이 나무인 프리텍사이트에 뿔을 찔러넣었을 때 나오는 즙을 먹고 산다. 엘라가 프리텍사이트를 공격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랄로랑이의 땅에는 기원을 알 수 없는 고무질 고분자 물질이 많이 존재하는데 프리텍사이트는 이 물질을 흡수는 하지만 배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고무질 물질이 내부에 쌓여 종양처럼 자라는데 이걸 제때 빼주지 않으면 금세 말라죽는다. 그래서 프리텍사이트는 종양이 위험할 만큼 커지면 수분을 잔뜩 분비해 주변 땅을 무르게 만든 다음, 뿌리를 움직여 엘라 서식지로 이동한다. 엘라가 프리텍사이트에 뿔을 찔러넣으면 고무 종양이 터지고 그 속에서 영양분이 가득한 즙이 흘러나온다. 엘라는 즙으로 범벅이된 종양을 며칠 동안이나 껌처럼 씹으며 놀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 버린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프리텍사이트에게 엘라는 의사고 엘라는 수술을 해주는 대신 영양분과 장난감을 제공받는 것이다.

엘라와 함께 지내는 육식동물은 무트라는 커다란 새인데 이들은 단순한 스캐빈저가 아니다. 엘라는 그리 똑똑하지 않아 늪이나 강에 빠지거나 프리텍사이트에 뿔이 끼여서 빠지지 않아 함께 위기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무트 수십 마리가 엘라에게 달라붙어 구조해 준다. 그 과정에서 무트가 엘라에게 깔려 죽는 경우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죽도록 내버려뒀다가 죽자마자 만찬을 열었을 테지만 말이다. 마치 최대한 많은 엘라를 살려야 자신들 역시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무트는 엘라를 도왔다. 그러다가 사고 때문이든 수명 때문이든 엘라가 죽으면 무트는 그때서야 엘라 고기를 맛본다. 엘라의 개체수가 무트의 개체수보다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무트가 굶어 죽을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경쟁은 있었다. 더 강한 생존력을 가진 개체와 집단이 더 많은 후손을 남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물리적 싸움이나 먹이 쟁탈전은 조금도 없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조차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보호를 받거나 먹이를 공유 받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적게나마 후손을 남겼다. 그래서 많은 세대를 반복한 동물 무리에는 같은 종이라도 크고 작은 돌연변이들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다른 대륙에서 적어도 수만 년 동안 떨어져 살었을 전혀 다른 동물들도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행동이 그들의 본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심지어는 손톱 크기의 곤충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도 이런 행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동안…

“이제 그만 쉬시죠.”

카론이 조명 밝기를 낮추며 말한다.

“난 피곤하지 않아.”

“그래서 문제죠. 느끼질 못하니까. 지금 쉬지 않으면 그렇게 좋아하는 과학자 놀이도 얼마 못해요.”

“알았어.”

나는 관측자료가 잔뜩 나열된 벽면을 조심스럽게 밀어낸다. 몸이 붕 떠오르며 반대편 벽으로 천천히 흘러간다. 몸이 벽에 닿기 전에 손을 뻗어 스위치를 하나 누른다. 벽에서 하얀 동굴처럼 생긴 자그면 수면 튜브가 빠져나온다. 그곳으로 몸을 집어넣자 압박이불이 몸을 기분 좋게 조여온다.

“카론.”

“네.”

“지구에선 생존경쟁이라든가 적응하지 못한 자는 사라질 뿐이라든가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잖아. 자원이 한정될 수록 더 공격적인 경쟁을 하게 되고.”

“전 들은 게 아니라 그러게 입력된 거기는 한데, 뭐, 일단 계속하시죠.”

“그래서 생명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거나.”

“유전자 단위에서 이기적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했는데, 글쎄요. 개체나 무리 규모에서 보면 얘기가 좀 복잡해지기는 하죠.”

“유전자 단위든 무리 단위든, 랄로랑이의 생명을 보면 어쩌면 우리가 생명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게 어쩌면 지구에 한정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카론이 수면 튜브 위로 몸에 털이 가득한 엘라 여러 마리가 모여 있는 사진을 표시했다. 엘라는 원래 머리와 목에만 털이 가득했지만 사진 속에는 온 몸이 털로 뒤덮인 엘라 한 마리가 있었다.

“이 녀석은 돌연변이고 덥고 습한 엘라 서식지에서 살아가기엔 적합하지 않죠. 그런 와중에 식성도 다른 엘라보다 두 배는 좋아서 자원을 많이 소모하고. 그런데도 다른 엘라와 무트의 무리가 이 부적합자를 끝까지 지키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럴지도. 심지어 기근을 겪으면서도 벌써 몇 대 째 이어지고 있잖아.”

“제 생각엔 그것도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 같네요. 엘라 무리는 저 돌연변이가 불쌍해서 지켜주는 게 아니라 유전자 풀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겨두는 거예요. 털복숭이 돌연변이가 나타난 이후로 혈연관계에 있는 엘라들의 상처회복 속도가 미약하게나마 빨라지고 있어요. 그리고 지난 200년 동안 랄로랑이의 평균기온이 조금씩 내려가고 있으니 털복숭이 유전자를 남겨두는 게 현명한 선택이기도 하죠.”

나는 수면캡슐에서 억지로 고개를 내밀며 몸을 일으킨다. 카론이 기계팔 끝에 달린 조그만 화면을 내게 들이밀며 불만 가득한 표정의 이모티콘을 띄운다.

“쟤들이 유전자 풀이나 기후 변화 같은 걸 따지면서 행동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진 않겠죠.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저런 행동을 해온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거 아닐까요? 지구에서도 동물의 이타적 행동은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지구의 모든 동물이 그렇진 않잖아. 랄로랑이에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부터 소형 우주선만한 동물까지 모두 그렇게 행동하고 있어.”

“우리가 랄로랑이 생태계의 모든 진화 과정을 지켜본 건 아니니까요. 오랜 과거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어떤 사건과 환경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내가 카론을 설득할 방법은 당연히 없다. 하지만 카론은 언제나 나의 허무맹랑한 가설의 맹점을 짚어주기에 카론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굳이 카론을 설득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카론의 말대로, 이젠 정말 쉬어야 할 시간이다. 나는 다시 수면튜브로 몸을 집어넣으면서 말한다.

“어쩌면 말이야.”

카론이 수면튜브 위로 지구의 모습을 띄운다. 아름다운 행성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그리운 풍경을 떠올리며 말을 잇는다.

“지구 생명의 공격성은 우리가 아직 불완전한 생명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더 완벽한 생명이 우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

“완벽한 생명 같은 건 없어요. 이제 그만 주무시죠. 이번엔 잠이 길어요. 다음에 일어날 땐 랄로랑이안이 로켓을 쏘고 있을지도 몰라요.”

카론이 조명을 완전히 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롤라랑이의 푸른 반사광이 수면튜브 위를 살며시 덮는다.

 

b.
지나는 현관에서 커다란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고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가 서둘러 챙기라고 한 짐은 누가봐도 피난물품이었다. 한파나 폭염, 폭우가 찾아올 것 같으면 언제든 짐을 챙기고 떠나기는 했지만 오늘 아침까지도 기상급변 경보는 없었다. 게다가 경보가 있는 경우에도 차에 실을 수 있는 만큼의 짐은 챙기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랑 가방 하나였다. 아빠는 가방 하나에 들어가지 않는 짐은 모두 버리라는 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다.

안절부절하던 지나가 참지 못하고 결국 문 손잡이로 손을 내밀었을 때, 뒷마당 문으로 들어온 이한이 딸의 손목을 거세게 붙잡았다. 이한의 반지가 지나의 손등을 긁었지만 둘 다 그 정도 일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지나, 이쪽이야.”

지나가 미처 상황을 묻기도 전에 이한은 지나의 손목을 당기며 거실과 부엌을 통과하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지나는 지금 보고 있는 집의 풍경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이사 할 때마다 거실에 걸었던 고향의 풍경사진, 지나가 엄마와 아빠를 위해 직접 만들었지만 작아서 입지 못하고 장식만 해둔 무지개 스웨터, 엄마가 어린 시절부터 아끼던 우주왕복선 모형, 아빠가 매주 가족의 일상을 그린 한 쪽짜리 만화 같은 것들.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아빠, 무슨 일이에요?”

이한이 뒷마당 문을 열자 오프로드 자동차 한 대가 꽃밭을 짖이기며 나타났다. 지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차에 올라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지나가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차 문을 열려는 순간, 사이렌이 울렸다. 계속 이어질 것 같은 곳에서 반복해서 끊어지며 짜증과 긴장을 유발하는 소리였다.

“망할, 벌써.”

이한이 지나에겐 들리지 않게 욕설을 뱉으며 운전석을 두드렸다.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노년의 여성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서둘러야 해.”

“할머니?”

지나의 말에 성희는 할머니 특유의 안심하라는 미소를 잠시 보여주고는 이한에게 말했다.

“큰 길은 벌써 막혔어. 계곡 쪽으로 가야 할 거야. 거봐, 내가 오프로더로 가야한다고 했지?”

“타겟은 나왔나요? 어디로 날아가고 있죠?”

“일단 올라타. 지나, 너도 어서. 안전벨트 단단히 매고.”

이한이 조수석에, 지나가 뒷좌석에 올라타자마자 성희는 가속패달을 힘껏 밟았다. 과부하 걸린 모터가 불쾌한 고주파음을 쏟아냈고 자동차는 뒷마당 울타리를 뚫고 나갔다.

“하나는 30분 전에 임시 연합정부청사에 떨어졌어. 근데, 미친, 천만다행으로 폭발직전에 기폭장치가 원격으로 해체됐어. 지구 반대편에서 미사일 리모컨 둘러싸고 영화 같은 일이 있었다는데 어차피 막은 사람들도 다 죽어서 자세한 건 알 수 없고. 다른 하나는 티베트 온화지대로…”

성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한은 얼굴 근육을 꿈틀거리며 억지로 표정을 지웠다.

지나가 창밖을 내다보니 길거리에는 사이렌 소리에 당황하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자동차는 그들을 능숙하게 피하며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는 동안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건 무슨 소리죠? 무슨 경보음이에요? 처음 들어봐요.”

지나가 물었다. 이한은 고개를 돌려 지나를 잠시 바라보며 고민했다. 말해야 할까?

“핵미사일 경보음이야.”

성희가 대신 대답했다.

“중앙아프리카 연합국이 아시아 기후온화지대 협회국들을 대상으로 선전포고를 했어.”

“…왜요?”

이번엔 이한이 대답했다.

“중앙아프리카는 노동력 대부분을 아시아 기후난민에 의존하고 있거든. 주요수입원도 콩고온화지대에 들어선 각국 임시정부에서 나오는 토지이용료고. 근데 아시아 쪽에서 온화지대 협상을 진행하면서 이제 중앙아프리카에서는 발을 빼려고 한 거야. 거기에 구유럽연합도 정부를 아시아로 옮기려고 하고 있고. 그렇지 않아도 온화지대가 자꾸 줄어들면서 정권이 흔들리던 중앙아프리카가 결국 선을 넘어버렸어.”

성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남아프리카가 어떻게 핵무기를 만들었겠어? 내 생각엔 뉴어메리칸 놈들 때문이야. 탄소는 제일 많이 토해 놓고 온화지대는 제일 많이 차지하고있는 놈들. 걔들도 이제 온화지대 사업을 하려는 거지.”

지나는 잠시 넋을 놓치고 있다가 몸을 번뜩 일으키며 물었다.

“엄마는요? 엄마는 지금 티베트에 있잖아요?”

이번엔 성희와 이한 모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화! 전화 해봐요!”

“연결이 안돼. 위성전화도 끊어졌고.”

성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한은 걱정스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지나의 눈시울이 부풀어 올랐다.

“괜찮을 거야. 울지마.”

이한의 말에 지나는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흐리지 못한 눈물이 마른 손등을 적셨다.

“지나.”

성희의 부름에 지나가 한 번 훌쩍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성희는 룸미러로 지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난 네 엄마의 엄마야. 그래서 알아. 네 엄마는 눈 앞에서 크툴루가 꿈틀거려도 침착하게 다음 할 일을 생각하고 실천할 사람이야. 증기선으로 들이박거나 입맛 다시면서 회칼이랑 고추장을 찾을 걸?”

“그게 뭐예요.”

지나가 빨갛게 젖은 눈으로 쿡쿡거리며 웃었다. 성희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런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반드시 살아남아. 그러니까 티베트에서 무슨 일이 있든, 누군가 살아있다면 그건 네 엄마일거야.”

“저기 봐요!”

이한이 외치자 성희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크게 들썩거렸고 안전벨트가 그들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이한은 고개를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성희도 하늘을 올려다 봤다. 지나도 안전벨트를 풀고 앞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 봤다.

자그만 점 하나가 하얀 궤적을 남기며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미사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가고 자동차들은 미사일이 날아가는 반대방향으로 질주를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자동차와 자동차, 사람과 자동차가 섞이며 충돌하고 뒤집혔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한이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하늘을 향했다.

“다시 돌아가자. 집으로.”

성희는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차를 뒤로 돌렸다.

“미사일이 날아가는 방향으로요?”

지나가 물었다.

“속도나 고도로 봐서는 여긴 타겟이 아니야. 적어도 200킬로미터는 더 떨어진 곳일 거야. 그럼 적어도 여긴 당분간 다시 공격받을 일이 없을거고. 다시 돌아가서 필요한 짐을 더 챙겨 나와야 해.”

도로가 반대방향으로 이동하는 자동차와 사람들로 가득해지자 성희는 차를 도로 바깥으로 빼내 임시공원지대를 가로질렀다. 자동차는 지나보다도 작은 묘목들과 나무로 대충 만든 그네나 미끄럼틀 따위의 놀이기구를 깔아뭉개며 망설임 없이 거칠게 나아갔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지나가 말한다.

“2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면 양이3공장지구인가요? 지난주에 거기 환경정화 실습 갔었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가 지난 주말에 우리집에…”

지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성희와 이한은 반응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그저 조용히,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나아가다가 공원지대가 끝나는 곳에서 성희는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운전대에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미안해, 지나야. 모두 우리 때문이야.”

성희는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가 네 미래를, 네 친구들의 미래를 망친 거야. 넌 잘못한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잘못은 이미 살 만큼 산 사람들이 했는데.”

지나와 이한이 성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할 때, 성희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은 잔뜩 충혈되었지만 시선은 뚜렷하고 표정은 단호했다. 성희는 짧고 싶은 호흡을 한 번 내쉬고 말했다.

“가자. 아직 할 일이 많아.”

성희는 다시 차를 몰았다. 지나는 조용히 뒤에서 성희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한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C.
한 시간 째 랄로랑이 최대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직 로켓은 쏘지 못했지만 놀라운 항해술을 개발해 바다를 자유롭게 누비고 있다. 랄로랑이 바다는 지구 바다보다 훨씬 넓고 해류는 혈관처럼 복잡했지만 랄로랑이안은 대기와 바다가 주고받는 미약한 전자와 자기장의 흐름을 느끼며 자신이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을 알아낸다. 놀라운 능력이다.

“이제 진짜 일을 할 때가 왔어요.”

카론이 말한다. 내가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지 카론이 자그만 화면을 내 얼굴 옆으로 들이민다. 화면에는 둥근 다면체 하나가 떠있다. 카론이 다시 말한다.

“여기에 모뉴먼트를 남길 건가요?”

“원래대로라면 적어도 100개의 행성은 둘러볼 예정이었잖아.”

“그러게요. 하지만 지적생명은 생각보다 드물었죠. 수백 만 년을 떠돌아 다녀서 겨우 하나 찾았으니. 그것도 운 좋게 찾은 거고.”

“100개 중에 하나를 골라 남기려고 했던 게 이젠 남기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었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요? 위대한 인류의 메시지를 남기기에 적당한 곳인가요?”

나는 화면을 바라본다. 화면 너머에 있는 카론에게 시선이 닿기를 바라면서.

“넌 어떻게 생각해?”

“전 분석가일 뿐이지 결정권자가 아니에요. 인간답게 스스로 결정하세요. 계산기한테 맡기지 말고.”

“지금 와서,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답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시 랄로랑이를 본다.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랄로랑이안의 도시는 웅장하기 그지 없다. 자철석이 풍부한 랄로랑이는 행성 전체의 자기장이 강력할 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고유의 독특한 자기장이 있다. 자기장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랄로랑이안은 도시를 설계하면서 자기장의 복잡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곳곳에 심었다. 그래서 그들의 도시는 마치 행성 랄로랑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랄로랑이안은 그들의 기술마저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구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자그만 전구를 켜는 것을 자연과 기술로 구분하지도 않잖아. 그냥 저들에겐 모든 게 행성 랄로랑이가 품은 현상의 일부인거야.”

“저들이 로켓과 우주선을 만들고 위성 마시나로, 혹은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가더라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난 그럴거라 믿어. 그땐 행성 랄로랑이와 자기자신들 역시 타우타이 행성계의 현상 중 하나라고 생각할 거야.”

나는 화면 속 둥근 다면체를 다시 본다. 모뉴먼트. 호기심 많은 문명에게 전하는 선배 문명의 경고와 조언이 담긴 물건.

“우리가 과연 랄로랑이안들에게 이런 걸 남길 수 있는 입장일까? 차별과 혐오, 군비경쟁, 전쟁을 경계하고 성장과 개발보다 평화와 안전이 중요하며 고향 행성을 아껴야 한다는 얘기를, 과연 우리가 저들에게 할 수 있을까?”

“못할 이유가 있나요?”

카론이 평소보다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카론은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을 것이다.

 

c.
회색 머리 여자가 두꺼운 종이 뭉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건 미친 짓이에요. 1438기의 핵폭탄을 정해진 곳에서 터뜨리면 50년 동안 기후가 안정화된다고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요?”

빨간 눈을 한 남자는 회색 여자의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파르게 오르기만 하던 평균기온이 대륙전쟁 이후로 5년 동안 꾸준히 내려갔어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과학자들이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반복했고.”

“과학자요? 트리거 데이 경고하던 다른 과학자들 다 짤라내고는 그런 일 없을 거라던 그 사람들말인가요? 그때도 예상하지 못했던 걸 모든 게 개판이 된 지금와서 뭘 믿고 하겠다는 건가요? 도대체 언제까지 행성 하나를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을 건가요? 그리고 대륙전쟁 때 17개의 핵이 터졌어요. 그것도 인구가 밀집한 기후온화지대에서. 덕분에 우리는 그나마 있던 인구의 절반과 온화지대의 70%를 잃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1400개가 넘는 핵을 쓰겠다는 건가요? 확실하지도 않은 50년 때문에?”

“50년이면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

“우린 이미 실패했어요. 포기하세요. 잘 들어요. 대륙전쟁 때 퍼진 돌연변이 곰팡이가 인간의 생식기능을 완전히 망가뜨렸어요. 우리가 사라지면 이제 인류는 멸종입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대부분이 지구에서 사라지겠죠. 모두 우리 탓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 행동은 하지 말자고요. 제가 원한 건 살아남을 방법이 아닙니다. 한 행성을 살아갔던 지적존재로서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거예요.”

빨간 남자는 가지고 왔던 자료를 힘없이 거두고는 구석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 옆에서 파란 손가락을 한 사람이 일어서서 회색 여자에게 다가왔다. 파란 사람이 내미는 자료를 받아든 회색 여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또 핵인가요? 그냥 들어가세요.”

“조금 다릅니다.”

파란 사람의 말에 회색 여자가 테이블 위로 팔짱을 꼈다.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파란 사람은 회색 여자의 테이블 위로 준비해온 자료를 순서대로 펼치며 말했다.

“지금 지구에 남아있는 모든 핵을 이용하면 우주선 한 대를 태양계 바깥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됐어요. 그만하세요. 우린 화성은 커녕 지구 테라포밍도 실패했어요. 냉동수면과 배아냉동 모두 200년이 한계라는 것도 확인했고 200년 안에 갈 수 있는 곳 중에 우리가 살 곳은 없어요. 우린 절대 태양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요.”

“탈출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메시지를 보내자는 겁니다.”

“무슨 메시지를요?”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는지. 우리은하 어딘가에는 지적생명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천문학자들 얘기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에서 우리는 비교적 이른 문명이었을지도 몰라요. 다른 행성에는 아직 어린 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그들에게 우리가 알려주는 겁니다. 문명의 선배로서의 조언을 주는 거죠. 이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회색 여자가 팔짱을 풀고 파란 사람을 올려다 봤다.

“고도 3만 6천 킬로미터 정지궤도에 뉴어메리칸의 우주선 하나가 있어요. 정부가 붕괴하면서 버려졌죠. 뉴어메리칸 난민 과학자들 얘기로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걸 개조하면 아광속 비행이 가능한 회전식핵추진엔진, RNDE를 만들 수 있어요.”

“우리가 지금 우주에서 설치고 있을 상황이 아닐텐데요.”

“지금까지 우리는 핵폭탄을 오직 자멸의 수단으로만 이용했어요. 하지만 RNDE는 우리가 핵폭탄을 평화적으로, 누구의 희생도 없이, 모든 인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차피 우리에게 남겨진 미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곳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미래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회색 여자는 잠시 조용히 생각을 하더니 자료 첫 페이지로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우주선 이름이 왜 하필이면 스틱스죠?”

파란 사람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마지막 영혼이 지나길 길이니까요.”

 

D.
“다들 오만했던 거야. 선배 문명 같은 말을 써가면서.”

나는 손바닥 위로 떠오른 모뉴먼트의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말한다.

“랄로랑이안은 우리 조언 따위가 없어도 우리보다 나은 선택을 할 거야. 다른 행성의 생명과 지성이 우리와 비슷할 거라고, 우리처럼 결함이 있을거라 믿은 게 잘못이었어. 저들은 혐오도 전쟁도 오만함도 없이 모든 걸 이뤄내고 있잖아.”

“그럼 모뉴먼트를 남기지 않을 생각인가요?”

카론이 묻는다. 나는 모뉴먼트 홀로그램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대답한다.

“아니. 남기긴 할 거야. 카론, 모뉴먼트의 기록을 바꿀 수 있을까?”

“아뇨. 권한이 없어요.”

“여긴 우리 밖에 없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보안 모듈도 고장나서 소프트웨어로 대체하고 있잖아.”

카론이 고개를, 그러니까 이모티콘이 그려진 화면을 내 얼굴 앞으로 내민다.

“진심인가요?”

 

d.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며 쏟아내는 붉은 비명이 눈부셨다. 늙은 세희와 어린 소요의 그림자가 언덕 반대편으로 길게 늘어섰다. 세희는 선글라스를 가져왔어야 했다고 짧은 후회를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신 오래전 화상 때문에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태양보다 조금 높은 하늘을 올려봤다.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자그만 별 하나가 보였다.

“이제 스틱스가 출발할 거야.”

세희가 말했다. 소요는 비행기 장난감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세희를 올려다 봤다.

“선생님이 만든 건가요?”

소요가 세희의 바지춤을 잡으며 물었다.

“아니. 하지만 내…"

세희는 말을 끊고 오른손으로 한때 왼손 약지가 있던 곳을 잠시 어루만지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집 아저씨가 만든 거지. 일부는.”

소요가 고개를 높이 들고 깜빡이는 별을 바라보자 세희는 소요를 품에 안아 올리고 계속 말했다.

“스틱스는 아광속 항성간우주선이야. 최대 0.33c, 그러니까 광속의 3분의 1 속도로 수 만 년 동안 우리은하를 돌아다닐 거고. 어린 문명을 발견하면 거기에 우리의 역사와 실패와 배움을 담은 모뉴먼트를 남기겠지.”

소요는 자그만 두 손을 동그랗게 말아 세희 앞으로 내밀었다.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맞아. 그거. 동그란 다면체. 그게 모뉴먼트야.”

“누가 타고 있어요?”

“아무도 몰라.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알려져 있지 않아. 승무원 선발위원들은 다들 작년에 죽었어. 위원 모두 말기암 환자였거든.”

"우릴 두고 탈출하는 건가요? 선생님네 아저씨가 만들었다면서요. 가족이죠? 같이 탈출하면 좋을 건데."

“글쎄. 탈출은 아닐거야. 고통스럽거든. 아광속비행에 노출되고 암세포를 키우는 초장기수면도 반복하고. 확률적으로 5명 중 3명은 출발하자마자 죽을 거야.”

“그럼 100명 보내면 될텐데.”

100이 자기가 아는 가장 큰 숫자라는 것마냥 커다랗게 팔을 휘두르며 말하는 소요를 보고 세희는 소리 없이 웃었다.

“재료가 부족해. 아광속비행에서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보호복 재료가 태양계에 얼마 없거든. 그래서…”

세희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봤다. 소요도 따라서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 꼭대기를 올려봤다.

“그러니까 애초에 인류는 태양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거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세희의 손목에서 시계가 가볍게 진동했다. 세희는 소요를 땅에 내려놓고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았다. 그리고 서쪽 지평선을 바라봤다. 태양은 이미 거의 가라앉아 이젠 더이상 눈이 부시지 않았다.

“소요, 저길 봐. 스틱스가 출발하고 있어.”

세희가 팔을 뻗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 끝이 향하는 군청색 하늘에서 작은 별이 살짝 번쩍였다. 별은 연달이 섬광을 터뜨리며 옆으로 나아갔고 어느새 길고 가느다른 궤적을 그리며 밤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E.
“모뉴먼트는 무사히 심었어요. 랄로랑이안이 언젠가 전파망원경을 그들의 달 마시나로 향한다면 가장 먼저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곳에.”

카론이 기계팔로 내게 진통제를 주사하며 말한다.

“고마워.”

“뭣 좀 물어봐도 될까요?”

“뭘?”

주사바늘이 내 팔에서 빠져나오면서 자그만 검은색 핏방울이 하나가 떠올랐다가 카론의 기계팔에 묻는다. 카론은 신경은 쓰이지만 굳이 닦을 생각이 없다는 듯 움직이며 내게 묻는다. 

“모뉴먼트에 뭐라고 남겼나요? 원래 기록되어 있던 조언과 경고를 모두 지워버렸다는 건 알아요. 그 위로 뭘 덮어 쓴 거죠?”

“뻔한 이야기야.”

“기계지능에겐 뻔하지 않을 수도 있죠.”

웃음이 나온다. 그렇겠지. 카론에겐 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냥… 당신들이 존재해서 기쁘다고.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많은 가능성 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나는 카론의 기계팔에 묻은 검은 핏자국을 닦는다.

“그리고…, 당신들이 이걸 볼 때면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겠지만, 수많은 어리석음 끝에 자멸한 우리지만,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뻔하군요.”

“그치?”

“겨우 그 말하려고 이 거대한 우주선을 만들었다니. 너무 아깝네.”

“너라면 무슨 말을 남길 건데?”

카론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화속도를 맞추기 위해 카론이 늦게 반응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길다. 아주 길다.

“카론?”

“찾았아요.”

“뭘?”

“지구.”

“아직도 찾고 있었어? 목적성 코드는 지워줬잖아.”

“그래도 습관이란 게 있으니까요.”

카론이 습관을 말하다니.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보여줘.”

화면 위로 자그만 그래프가 가득 나타난다. 그래프마다 아래 위로 왔다갔다하는 선이 그려져 있고 선마다 지저분한 노이즈가 가득하다.

“사진은 없고 통과 현상을 찾았어요. 지구가 태양 앞을 지나가면서 태양이 아주 조금 어두워진거죠. 처음 관측한 건 25년 전이지만 태양이 여기선 너무 어둡고 물리량을 특정하기도 어려워서 결론을 내리는데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확실해요. 이 그래프의 곡선은 4만 9천 광년 너머에 있는 지구가 그린 거예요.”

나는 종양으로 부풀어 오른 손가락 끝으로 그래프를 어루만진다.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의 호흡이 느껴진다.

“누군가… 있을까?”

“없어요.”

카론은 단호히 대답한다.

“지구를 찾은 덕분에 시간을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었는데 우린 235만 년을 떠돌아 다녔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래프 속 지구는 우리가 출발하고 230만 년이 지난 지구인거죠. 인류는 우리가 출발하고 10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라졌을 거고. 지금은 유물 하나 남아있지 않을 걸요.”

“자비 없는 녀석. 지금 지구 상태는 어때?”

“지구 대기를 통과한 태양광을 분석해보면…”

카론이 잠시 말을 멈춘다.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하다.

“불확실한 요소가 많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옥은 아닌 것 같네요. 표면온도는 0도를 조금 넘어요. 온실효과 폭주는 오래전에 끝난 것처럼 보여요.”

나는 그래프 위에 있는 긴 숫자를 본다. 지구의 좌표다. 숫자를 머릿속에 담고 심우주를 향해 뚫린 창문을 본다. 저기에 지구가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양을 공전하면서.

“카론, 다시 돌아가자.”

“진심인가요?”

“진심이야.”

“우리 둘 다 출발하자마자 죽을 걸요. 당신 몸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고 제 시스템도 아광속 비행을 다시 견딜 수 없어요.”

“연료는 충분해?”

“아니, 그러니까, 연료는 충분한데.”

“어차피 할 일 다 했잖아. 여기 남아 있어서 뭐하겠어. 지구로 바로 직행한다면 시간은 어느 정도 걸려?”

“위험지역을 피해간다면 30만 년 정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200만 년조차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지난 시간이니까.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30만 년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구를 떠나고 260만 년이 지난 지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결코 보지 못하겠지만, 내 몸의 일부는 먼지가 되어 다시 지구의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지구에서 다시 한 번 문명이 발생하고 발전을 이어나가고 있을지도 몰라.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 그 종이 우리를 발견한다면…,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불완전함을 닮았을 그들이야말로 모뉴먼트가 필요할지도 몰라.”

“우리 자신이 모뉴먼트가 되자는 거군요. 재미있네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카론은 조용히 기계팔과 화면을 벽 속으로 정리한다. 이제 바쁘게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함께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랄로랑이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스틱스 강 너머에서 발견한 세상. 저들이 우리보다 먼저 탄생했더라면, 저들이 우리를 먼저 발견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지구를 떠나온 이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개인용품함을 연다. 지구에서 가져온 최소한의 추억들. 상자 속에서 무지개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말라버린 몸에 딱 맞다. 그 아래에 있던 만화가 그려진 종이뭉치와 우주선 장난감도 꺼내 품에 안는다. 마지막으로 목걸이를 목에 건다. 한때 어머니의 반지에 박혀 있던 지구 모양 사파이어가 새파랗게 반짝인다. 세상 무엇보다 그리운 파란빛이다. 

이제 이승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
소요는 망원경으로 기구가 올라간 어두운 하늘을 살폈다. 이젠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구에 달린 고도계가 보낸 신호가 맞다면 50킬로미터까지 올라갔다.

“충분해.”

소요가 말하자 옆에서 맨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요냐가 주머니에서 손바닥 만한 리모컨을 꺼냈다. 리모컨 아래에는 케이블 두 개가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요냐는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있던 배터리에 리모컨의 케이블을 꽂았다. 리모컨에 있던 자그만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이제 누르면 될까?”

요냐가 물었고 소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냐가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소요는 낡은 손목시계의 태엽을 돌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잠시 시계가 진동했고 동시에 리모컨의 램프가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기구에 매달려 올라갔던 로켓이 지구의 중력권을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는 의미였다.

“성공이야! 우리가 만든 모뉴먼트가 올라갔어! 보름 뒤엔 달 궤도에 들어설 거고 몇 년 뒤면 달의 적도 어딘가에 추락할 거야. 그럼 적어도 수백만 년 동안은 그곳에 있을거고. 운이 좋으면 천만 년도 있겠지!”

소요가 그 자리에서 방방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요냐는 그 모습이 보기 좋다는 듯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조용히 웃었다.

“소요.”

“응.”

“우리가 지구의 마지막 인간이라는 거, 진짜 그렇게 생각해?”

“거의. 기껏해야 끝에서 몇 번째겠지. 여기가 마지막 온화지대니까.”

소요가 담담하게 말했고 요냐는 긴 숨을 내려놓으며 수긍했다. 그리고는 리모컨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모뉴먼트엔 뭐라고 쓴 거야?”

“별 거 아냐. 뻔한 이야기. 언젠가 지구가 다시 살만해 지고 새로운 종이 나타나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켰을 때, 그 녀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 그리고…”

소요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했다. 요냐는 재촉하지 않았다.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밤하늘 너머를 바라보며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 닿지 않을 인사를 보내며, 소요는 살며시 웃었다.

 

끝.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나의 기쁨 2023.02.28
곽재식 치트키 2023.02.01
노말시티 이번 이월의 이별 2023.02.01
박희종 The animal government 2023.02.01
곽재식 한산북책 2023.01.01
박희종 선택 2023.01.01
곽재식 백투 유령여기 X2 - 자주 묻는 질문(FAQ) 2022.12.01
해도연 우주항로표지관리원의 어느날 30분 2022.12.01
해도연 랄로랑이안 모뉴먼트 2022.12.01
해도연 병범 씨의 인생 계획 2022.12.01
pilza2 허약 드래곤2 2022.12.01
빗물 근처의 꿈 2022.12.01
아밀 그리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2022.12.01
박희종 동자신과의 대결 2022.12.01
서계수 종막의 사사 2022.12.01
아이 머리끈 2022.11.30
갈원경 하루의 선택 2022.11.01
박희종 마이클 잭슨이 돌아왔다 2022.11.01
서계수 그렇게 전사는 뻐꾸기를 구하고 2022.11.01
박도은 입맞춤 퍼레이드 2022.11.01
Prev 1 2 3 4 5 6 7 8 9 10 ... 47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