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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머리끈

2022.11.30 22:1811.30

머리끈

아이

 

1

 

자광은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왼쪽 팔목을 더듬었다.

자기 전에 항상 머리에 묶여 있던 머리끈을 풀어 마치 팔찌처럼 왼쪽 팔목에 찬 다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팔목에 감겨 있던 머리끈을 빼서 다시 머리를 묶는다. 자광은 어제 자기 전에 팔목에 찬 그 머리끈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일어나긴 일어났는데 아직 잠이 완전히 깬 건 아니라서 자꾸 눈이 감기려고 했다. 그걸 억지로 안 감으려고 눈꺼풀에 힘을 잔뜩 주려다보니까 앞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머리끈을 찾으려고 왼쪽 팔목을 계속 더듬고는 있었지만, 팔목에 머리끈이 없다는 건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하긴, 자기 전에 습관처럼 찬 머리끈이 팔목에 없을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할 수 없었겠지.

자광이 그 머리끈을 팔목에 차고 잔 건 벌써 2년째다. 그리고 그동안 아침에 일어나서 왼쪽 팔목을 더듬었을 때 단 한 번도 머리끈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비몽사몽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광이 왼쪽 팔목에 머리끈이 없다는 걸 눈치 못 챈 건 어쩌면 당연했다. 설사 자광이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잠이 완전히 달아나서 시야가 아주 깨끗했더라도 왼쪽 팔목에 머리끈이 없다는 건 눈치 못 챘을 것이다.

일어나서 벌써 20초 동안이나 왼쪽 팔목을 더듬고 있던 자광이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는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왼쪽 팔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응, 머리끈이 어디 갔지! 어제도 분명히 팔목에 감아놓고 잤을 텐데, 그게 없어질 수가 있는 건가!”

자광은 머리끈이 안 보인다는 걸 알자마자 갑자기 수백 킬로그램의 물체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슬픔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물론 자광이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당장 머리를 묶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머리 묶는 끈이야 지금 바로 거실로 나가서 가정용으로 나온 소형 3D 프린터를 이용해 하나 만들면 된다. 만드는 데 3초도 안 걸린다.

자광이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2년 동안이나 자기 전에 늘 팔목에 감아놓았던 그 머리끈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광은 올 해 스물세 살이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젊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면 으레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 듯이, 자광 역시 3년 전인 스무 살 때 서울을 떠나 이곳 하노이로 왔다.

서울과 하노이는 직선거리로 약 3천km. 하지만 요즘은 비행기보다 진공자기부상열차인 하이퍼루프를 주로 이용한다. 서울과 하노이 직항 노선을 이용하면 베이징과 충칭을 거쳐서 가기 때문에 거리는 직선거리보다 긴 약 4800km지만, 하이퍼루프는 속도가 시속 1700km라서 세 시간이 채 안 걸린다. 그러니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게다가 이제는 3D 프린터를 이용해 음식도 집에서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자광의 부모는 나이 어린 아들이 타국에서 혼자 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자광의 독립을 허락했다.

자광이 살고 있는 곳은 하노이에 있는 한 지하 아파트다.

하노이에는 10년 전인 2040년부터 지하 아파트 붐이 일었다. 그래서 하노이 곳곳에 지하 아파트가 있다. 중국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해양 도시 칭다오가 수중 아파트의 메카라면, 이제 지하 아파트의 메카는 단연 베트남 하노이였다.

그중 자광이 살고 있는 지하 아파트의 이름은 ‘Olympus 1’.

Olympus 1은 땅 속 600m 깊이까지 내려간 130층 높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벽에 특수 유리를 적용해 600m 지하층까지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 되어 있었다. 게다가 Olympus 1은 자체적으로 전기와 산소를 생산하고, 건물 안에 공원, 체육관, 쇼핑몰 등이 있어서 자족 도시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Olympus 1의 가장 큰 특징은 입주민이 모두 자광과 같은 20대에서 30대까지의 젊은이들이었다. Olympus 1을 지은 회사 대표가 입주민을 모집할 때 그렇게 조건을 내걸었다.

 

입주 조건

성별 : 상관없음

연령 : 20∼39세

40세 생일이 되면 임대 계약이 자동 해지됨.

 

자광이 히엔을 만난 건 Olympus 1에서 생활한 지 1년이 막 되었을 때였다. 집에서 3D 프린터로 저녁에 먹을 음식을 만들어서 먹은 후, 오랜만에 Olympus 1 가장 아래쪽에 있는 지하 공원을 산책하려고 했다.

Olympus 1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공원 버튼을 눌렀을 때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잠시만요! 같이 가요!”

그 말에 자광이 서둘러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Olympus 1에 있는 모든 엘리베이터는 입주민만 이용할 수 있었다. 문 열고 닫힘도 Olympus 1에 입주할 때 등록한 지문으로만 조작이 가능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벽에 있는 센서가 탑승객을 감지해 입주민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만일 입주민이 아니라고 확인되면 엘리베이터 안에 대기하고 있던 곤충 모양의 초소형 드론이 출동해 침입자의 목에 강력한 마취제를 주입한다. 그러니 입주민이 아니라면 미리 Olympus 1 관리실에 접속해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반쯤 닫혔다가 다시 열리면서 자광 또래의 여자가 탔다.

“아, 감사합니다! 친절한 분이시네요!”

그러면서 여자가 자광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첫인상이 매우 활기차 보여서 자광도 덩달아 여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자광은 며칠 전에 집 거실에서 여자를 홀로그램으로 본 적이 있었다. Olympus 1 관리실에서 이곳에 새로 입주한 사람이 있다며 홀로그램으로 먼저 입주민들에게 인사를 시켜준 여자였다. 그때 여자는 자기소개를 할 때도 매우 활기차 보여서 자광이 기억하고 있었다.

“별 말씀을요. 며칠 전에 입주하신 분이죠? 홀로그램 통해서 인사해 주신 모습 봤어요. 안녕하세요, 전 여기 Olympus 1에 입주한 지 1년 정도 됐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주자광이라고 합니다. 저는 서울에서 왔어요.”

자광의 인사에 여자가 또 한번 환하게 웃었다.

“와, 한국 분이세요? 반갑습니다! 전 베트남 사람이에요. 고향은 다낭이고요. 이름은 히엔. 나이는 스물하나. 아시다시피 여기 Olympus 1에 이사 온 지 이제 딱 일주일 됐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히엔이 벌써 세 번째로 환하게 웃었다.

자광은 그런 히엔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 히엔도 스물한 살이에요? 반가워요. 저도 스물하나예요. 동갑이니까 우리 친하게 지내요. 아참, 그런데 어디까지 가세요?”

“아, 저 지하 공원에 가보려고요. 그런데 자광도 스물한 살이라고요! 어머, 전 저보다 세 살 정도 어리다고 생각했어요. 호호호, 농담 아니에요! 도대체 동안 비결이 뭐죠?”

히엔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쉴 새 없이 자광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한국에 한 번도 안 가봤는데, 특히 서울은 정말 가보고 싶은 도시다. 서울 어느 곳을 추천해 주고 싶은가? 혹시 베트남에는 여기 하노이 말고 어느 도시를 가봤나? 다낭에는 가봤나? 다른 나라도 가봤다면 어디인가?

그러면서 히엔은 자신은 언제고 기회가 되면 서울에서도 살아볼 거라고 상당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자광이 히엔더러 꼭 서울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응원해 주었다.

둘이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어느새 Olympus 1 맨 아래층에 도착했다.

Olympus 1 맨 아래층은 공원이었다. 둘레가 5km가 넘기 때문에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공원 한 바퀴 도는 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자광과 히엔은 천천히 공원을 산책했다.

둘이 산책을 하는 동안에도 주로 이야기하는 쪽은 히엔이었다. 자광은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고.

“자광 너는 그럼 외국 생활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응, 처음이야. 외국 생활도 처음이고, 부모님 집을 벗어난 것도 처음이야.”

“그렇구나. 그럼 혹시 중국 칭다오 쪽에 모여 있는 수중 아파트에서도 안 살아 봤겠네?”

“응, 다들 요즘은 수중 아파트가 괜찮다고 하더라. 그래서 생각 중이기는 해. 다음에는 칭다오 쪽으로 가볼까 하고 말이지. 그러는 히엔은 칭다오에 있는 수중 아파트에서 살아봤어?”

“야, 당연하지! 나 거기서 1년 넘게 살아봤어!”

“부럽다. 수중 아파트는 물 위로 뜨기도 한다던데.”

“뜨지. 평소에는 아파트 건물이 투명한 구(球)에 싸여 있어서 바닷물 속에 잠겨 있는데, 날씨가 좋을 때는 물 위로 올라와. 그러면서 투명한 구도 걷히고.”

“와, 근사해!”

“근사하지. 그뿐이 아니야. 그렇게 물 위로 떠서는 말이지, 이동도 해. 집이 움직여. 아파트 건물이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있으면, 마치 거대한 크루즈를 탄 기분이야.”

“와, 진짜 굉장하다! 다음엔 꼭 수중 아파트로 이사 가야겠어!”

자광은 지하 공원을 산책하면서 히엔의 말에 점점 더 열광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덧 히엔보다 더 활기찬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히엔이 입만 열면 자광은 제자리에서 이삼 미터씩 팔짝 팔짝 뛰어오르며 ‘세상에, 그게 정말이야!’, ‘와! 멋져! 정말 멋져!’,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말도 안 돼!’ 같은 소리를 연발했다.

자광이 그렇게 공중으로 팔짝 팔짝 뛰어오르며 열광하는 통에, 옆에 있던 히엔은 번번이 자광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눈을 안 찔리려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야, 자광! 제발 진정해! 그러다 나 실명하겠어! 제발 진정하고 가만히 좀 있어! 네가 자꾸 이렇게 뛰면 이 지하 아파트가 땅 속으로 완전히 꺼질지도 몰라!”

히엔이 아무리 그렇게 우려 섞인 말을 해도 자광을 말릴 수는 없었다.

“얘는 어떻게 된 게 첫인상이랑 완전히 틀려. 엘리베이터에서 봤을 때는 굉장히 얌전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활동적인 타입이라는 거 알았으면 애초에 엘리베이터 같이 안 탔잖아!”

히엔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자기 머리에 묶여 있던 머리끈을 풀었다. 흰색과 빨간색 고무줄을 꼬아서 만든 머리끈이었다. 엄지손톱만 한 동그란 가죽 장식 하나를 끈에 매달아 포인트를 주었다.

그 머리끈은 히엔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마치 20세기에 히피들이 사용하던 머리끈과 비슷했다. 물론 히엔도 애초에 히피들이 사용하던 머리끈을 보면서 만든 것이니까 비슷한 게 당연했다.

히엔은 머리끈을 풀어서 여전히 팔짝 팔짝 뛰고 있는 자광을 힘으로 제압한 뒤, 자광의 머리에 정성스럽게 묶어주었다.

히엔이 보기에 머리끈을 한 자광의 모습은 근사했다. 하지만 근사하다는 말을 해주기가 왠지 어색해서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봐줄 만하네. 역시 머리끈이 예뻐. 내가 만든 거지만, 역시 예뻐. 이거 자광 너 가져.”

그러면서 히엔이 아주 잠깐 동안 자광의 얼굴을 보다가 곧장 혼자서 터벅터벅 산책길을 걸어갔다.

머리끈을 한 자광이 근사해서, 그런 자광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괜히 자기가 얼굴이 빨개지는 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히엔은 자광 앞에 계속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자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히엔이 느닷없이 머리를 묶어주는 바람에 마치 발이 땅에 단단히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심장 박동도 빨라지고 얼굴까지 화끈거려서, 자광은 머리 묶어주고 있는 히엔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마침 히엔이 머리를 다 묶고 나더니 혼자서 저만치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자광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그러니까 히엔이 혼자 저만치 걸어가지 않고 계속 자기 앞에 서 있었으면, 하마터면 자광은 히엔의 입에 키스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자광은 더 더욱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은 아주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고.

사실 자광이 그렇게 머리끈에 감동을 받은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히엔이 직접 만든 머리끈이었으니까.

요즘은 머리끈조차 손으로 직접 만든 제품을 구하기가 어렵다. 머리끈 같은 작은 것부터 가구나 가전제품까지 전부 3D 프린터로 만든다. 작은 건 집집마다 있는 소형 3D 프린터로 만들고, 가구나 가전제품처럼 큰 건 3D 프린트 매장에 의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집도 3D 프린팅으로 짓는다.

자광은 수제 머리끈을 풀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만든 물건을 갖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뭔가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끈이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자광은 침대에서 일어나 주변을 찾아보았다. 2년 전에 지하 공원에서 히엔한테 선물 받은 뒤로 단 하루도 사용을 안 한 적이 없는 머리끈이었다. 매일매일 그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자기 전에 풀어서 팔목에 감고 잤다. 마찬가지로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매일 그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고.

그런데 그 머리끈이 보이지가 않았다. 매일매일 그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으니 당연히 어제도 그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었다. 그러니 당연히 어제도 자기 전에 그 머리끈을 풀어서 팔목에 감았다. 그런데 왜 오늘 아침에 그 머리끈이 보이지 않는 걸까.

자광은 침실을 거의 해체하듯이 뒤졌다. 하지만 작고 소중한 그 머리끈은 보이지가 않았다. 대신 손목에 거뭇한 자국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잠뿐만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정신까지 완전히 자신한테서 달아날 위기였다.

자광은 일단 머리끈 찾는 걸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히엔과는 일주일 전에 헤어졌다. 서로 좋은 감정으로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가졌던 감정들이 변하며 헤어지는 거야 당연했다. 그 정도는 자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히엔과는 무려 2년 동안이나 연인 사이로 지내지 않았던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하 공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뒤로 둘은 다음 날부터 자연스럽게 연인처럼 행동했다. ‘우리 지금부터 공식적으로 사귀는 거다!’ 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마치 오래 전부터 연인이었던 듯 행동했다.

자광은 히엔을 만날 때면 늘 머리끈을 하고 갔고, 히엔은 자광을 보자마자 항상 머리끈을 풀어 다시 묶어주었다.

히엔이 머리를 다시 묶어줄 때 자광은 단 한 번도 마음이 설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첫 날 지하 공원에서 히엔이 머리를 묶어줄 때도 설렜고, 히엔이 헤어지자고 한 날 마지막으로 머리를 다시 묶어줄 때도 설렜다. 그래서 히엔이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줄 때면 자광은 늘 심장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히엔이 좋아서 설레는 건지 아니면 히엔이 직접 만든 예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줘서 설레는 건지는 자광도 잘 몰랐다. 왜 설레는 건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늘 마음이 설레서 자광은 히엔이 머리를 다 묶어주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히엔에게 키스를 했다.

그런 머리끈이 없어졌다. 침실 이곳저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머리끈이 안 보였다.

자광은 히엔이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연인 사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았다. 물론 히엔과의 이별이 그리 충격적이지가 않아서 자광도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다.

-히엔을 많이 좋아하지 않았던 건가!

자광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잠깐 동안 히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히엔을 많이 좋아했잖아. 하루 종일 히엔만 생각한 날도 많았고.

자광은 자신이 히엔을 덜 좋아해서 이별 통보가 덜 충격적인 건 아니라며 금세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나는 원래 누구와 이별해도 충격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나!

자광은 그런 생각까지 해보았다.

자광은 히엔을 만나기 몇 달 전까지 Olympus 1에 살던 다른 입주민인 후아와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후아하고는 채 1년도 안 돼서 헤어졌다. 그때도 자광은 후아하고의 이별이 크게 충격적이지가 않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별을 잘 견디는 사람일지도 몰라.

자광이 머리끈을 찾다 말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갑자기 자신에 대해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자광은 여전히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팔목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별을 잘 견디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결론까지 내려놓고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인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자광이 이별을 잘 견디는 사람은 맞았다. 일주일 전에 히엔에게서 이별을 통보 받았을 때도 자광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으니까.

이별을 통보 받은 날에도 자광은 평소처럼 머리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히엔은 이별을 통보하기 전에 자광의 머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자광은 그 순간이 좋았다.

물론 자광은 알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히엔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릴 때부터 낌새를 눈치 채기는 했다. 히엔이 이별 통보할 타이밍을 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광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별 통보하는 날에도 히엔이 평소처럼 머리를 묶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히엔은 이별을 통보하기 전에 자광의 머리를 머리끈으로 다시 묶어주었다.

자광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별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다.

히엔과 이별한 뒤에도 자광은 언제나처럼 자기 전에 머리끈을 풀어서 팔목에 감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팔목에 감겨 있던 머리끈으로 다시 머리를 묶었다. 그 상태로 거실로 나와 잠이 완전히 깰 때까지 소파에 앉아서 스크린벽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내장된 스크린벽은 자광이 침실에서 나오는 순간 자동으로 켜진다. 그날 날씨와 자광의 컨디션 등을 파악해서, 자광이 가장 편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영상을 자동으로 보여준다. 물론 주로 보여주는 영상은 요즘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지만.

자광은 한번 더 침실을 둘러본 뒤 오늘은 대학교 오프라인 수업이 있는 날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나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크린벽을 터치해 요즘 인기 있는 머리끈을 검색해 보았다. 굳이 스크린벽을 직접 터치하지 않고 생각만으로 머리끈을 검색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을 때는 여전히 스크린을 직접 만지기도 했다.

자광은 별로 마음에 드는 머리끈이 없어서 그나마 판매 순위가 높은 모델을 찾아 출력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거실 한쪽에 있던 소형 3D 프린터에서 자광이 선택한 빨간색 머리끈이 조금씩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빨간색 머리끈은 히엔이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하고 부실해 보였다.

자광은 머리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느릿느릿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하지만 2년 동안 히엔이 준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서 그런지, 이제 막 3D 프린터를 통해 만든 빨간색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으려니까 자꾸만 머리카락이 엉켰다. 그래서 머리카락이 엉킬 때마다 자광은 신경질적으로 빨간색 머리끈을 잡아당겼다. 그럴 때마다 빨간색 머리끈에 돌돌 말려 있던 머리카락들도 한꺼번에 뽑혔다.

“아얏!”

자광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도 머리끈을 잡아당기는데, 머리카락이 제법 많이 뽑히는 바람에 통증이 커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나왔다.

자신이 내지른 비명에 놀란 자광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머리끈에 돌돌 말린 자신의 머리카락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머리끈에 돌돌 말린 자신의 머리카락들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웃겨서 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뽑힌 걸 보고는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이었다.

자광은 얼른 웃음을 거두고는, 이번에는 굉장히 신중한 표정으로 머리끈에 돌돌 말린 머리카락을 풀려고 노력했다. 실보다 가는 머리카락을 무슨 수로 풀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광은 마치 풀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사람처럼 집중해서 머리카락을 풀려고 노력했다.

자광이 머리카락을 풀려고 노력하는 동안 거실에 있는 스크린벽은 수시로 화면을 바꾸고 있었다.

아침에 자광이 거실로 나와서 특별히 다른 명령을 실행하지 않는 한 인공지능 컴퓨터가 내장된 스크린벽은 그날의 날씨와 자광의 기분에 따라 적당한 영상을 찾아서 보여준다.

처음에는 늘 그렇듯 오늘도 아름다운 자연 경치였다. 그러다 화면에 번개 치는 하늘이 보였다. 그러다 한동안은 머리 긴 사람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러다 수백 종의 머리끈이 진열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지금은 2년 전에 자광이 히엔과 처음 지하 공원을 산책하던 날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면에서 둘이 함께 걷다가 자광이 팔짝 팔짝 뛰어오르자, 히엔이 자광을 진정시킨 뒤 자기 머리끈으로 자광의 머리를 묶어주는 모습이 보였다. 히엔이 자광의 머리를 다 묶어주자 누가 갑자기 되감기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화면은 자광이 팔짝 팔짝 뛰는 장면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다시 히엔이 자광을 진정시키면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런 뒤 다시 되감기 버튼. 히엔이 다시 머리끈으로 자광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스크린벽에서는 그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스크린벽은 자광의 기분에 따라 적당한 영상을 찾아서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 컴퓨터가 판단하기에 자광한테 적당한 영상은 히엔이 머리를 묶어주는 영상이었던 모양이다.

자광은 머리끈에 돌돌 말려 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려고 애쓰느라 스크린벽을 보지 못했다.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수백 종의 머리끈이 화면을 꽉 채우고, 지하 공원에서 둘이 산책을 하고, 그런 모습을 못 봤다.

그리고 이제 자광이 머리끈에 돌돌 말린 머리카락을 풀다가 차츰 마음이 안정되면서 고개를 들어 우연히 스크린벽을 보았다.

스크린벽에서는 여전히 히엔이 머리끈으로 자광의 머리를 묶어주고 있었다. 머리를 다 묶어주면 화면이 다시 두 사람이 막 지하 공원에 도착한 장면으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는 다시 머리를 묶어주었다.

자광은 한동안 말없이 스크린벽을 쳐다보았다. 화면에서 히엔이 머리를 묶어줄 때면 괜히 거실에 선 채로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마치 히엔이 지금도 옆에 서서 자신의 머리를 묶어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실제로 히엔이 머리를 묶어주고 있는 것처럼 자광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왜 지금도 히엔이 머리를 묶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광은 허공에다 손까지 휘휘 내저으면서 스크린벽에 내장된 인공지능 컴퓨터한테 다른 영상을 보여주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빨간색 머리끈을 거실 한쪽으로 휙 내던졌다.

거실 바닥에 떨어진 머리끈은 24시간이 지나도 같은 곳에 계속 방치되어 있으면, 집안 어딘가에 있는 청소로봇이 다가와 레이저빔을 이용해 흔적도 없이 분해할 것이다.

스크린벽은 이제 자광의 기분에 맞는 적당한 영상을 찾는 대신 정규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뉴스에서는 베트남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연일 이어지고 있는 폭염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하노이를 포함한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폭염이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으니 외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내용이었다. 만일 외출을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자외선에 노출되지는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스크린벽 화면이 다른 영상으로 바뀌었다.

특정 기억만 골라서 삭제해 주는 기술을 보유한 베트남 굴지의 글로벌 기업 아스고(ASGO)라는 회사의 광고 영상이었다.

 

당신은 아스고에서 원하는 기억만 삭제하면 됩니다. 그러면 감정은 바뀝니다.

무엇이 당신을 괴롭게 합니까?

아스고에 오십시오. 저희가 그 기억을 삭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바뀝니다. 다시 즐거웠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아스고가 당신의 감정을 바꿔드립니다.

 

하노이에 본사를 둔 베트남의 초거대 글로벌 기업 아스고의 광고 속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수천 명이 화가 나고 슬퍼하는 얼굴로 아스고 본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시 아스고에서 나올 때는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광도 아스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자광뿐만이 아니다. 아스고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국인이든 베트남인이든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혹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도 아스고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기억 삭제에 관해서는 다른 경쟁 기업들에 비해 독보적인 기술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애초에 기억 삭제 기술을 처음으로 시술한 기업이 아스고이기도 했고.

그래서 한국인이나 베트남인, 중국인, 일본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인들은 특정 기억을 삭제하기 위해 각 나라에 있는 아스고 지사를 찾는다. 물론 일부러 본사가 있는 하노이를 찾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평생에 한 번만 아스고를 찾지 않는다. 매번 기억을 삭제하고 싶을 때면 아스고를 찾는다. 마치 어제 먹은 음식이 소화가 잘 안 되면 소화제를 먹듯이, 공원 산책하다 넘어져 무릎을 다치면 파스를 뿌리듯이, 지속되는 폭염에 잠깐 피부가 자외선에 노출돼서 화상을 입으면 연고를 바르듯이,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아스고를 찾는다. 심지어 자신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모를 때도 아스고를 찾는다.

아스고는 특정 기억을 삭제해 준다. 게다가 자신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스고의 독보적인 기술이 괴로워할 만한 기억을 자동으로 찾아서 삭제해 준다.

그러다 보니 최근에는 ‘아스고 중독’이라는 사회현상까지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알약 삼키듯 아스고에 가서 괴로운 기억을 삭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힘들게 하는 기억이 있다면 아스고에 가는 것이다.

 

자광은 어느새 스크린벽에 바짝 다가가서 아스고 광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상을 보는 동안 손으로는 계속 자신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고 있었다. 그 동작만으로도 자광이 지금 영상을 보면서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면 머리를 묶고 싶어 한다거나.

자광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해야 했다.

자광은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스크린벽을 향해 말했다.

“아스고 본사에 예약해줘. 시간은 오늘 오후 세시.”

스크린벽에 내장된 인공지능 컴퓨터가 하노이에 있는 아스고 본사에 예약을 할 것이다. 자광은 시간에 맞춰 아스고에 가기만 하면 된다.

자광은 샤워를 하러 가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아참, 머리끈에 대한 기억을 삭제할 거야. 히엔은 나한테 지하 공원에서든 어디에서든 머리끈을 주지 않았어.”

 

 

2

 

아스고는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주변에 있었다. 높이가 무려 1.5km가 넘는 슈퍼 빌딩이 아스고 본사였다.

자광이 슈퍼 빌딩 지하 출입문 앞까지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광 또래의 여자가 빌딩 안에서 나왔다.

“안녕하세요, 마이라고 합니다. 자광님이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오셨어요. 제가 오늘 자광님을 도와드릴 겁니다. 영광입니다. 안내해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세요.”

깡마르고 키가 큰 마이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해야 할 말만 짧게 끝내는 바람에 오히려 자광은 마이에게서 무한한 신뢰감마저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장서서 자신감 넘치게 걷는 마이의 모습 때문에 자광은 살짝 움츠러들기까지 했다.

마이가 아스고 출입문 앞까지 먼저 가서 자광을 기다렸다.

자광이 허겁지겁 마이 곁으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자광의 머리카락이 좌우로 흩날렸다.

자광이 출입문까지 다 오자, 마이가 활짝 웃음을 짓더니 자광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광님, 잠깐만요.”

그러더니 마이가 자기 머리에 묶여 있던 머리끈을 풀어서 자광의 머리를 묶어주었다. 은색 구슬 장식이 달린 수제 머리끈이었다. 3D 프린터로 출력한 제품이 아니었다.

마이가 수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주는 동안 자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져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자 다 됐어요. 어머, 너무 예뻐요! 이 머리끈은 저 말고 자광님이 하셔야겠는데요. 음, 분하지만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제가 자광님한테 드리는 선물이라고 해두죠.”

마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화가 난 사람처럼 양쪽 볼을 부풀렸다.

그런 마이의 모습을 보자 자광은 더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마이를 따라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자광이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 자동적으로 자광의 계좌에서 코인이 빠져나갔다. 물론 아스고 기업으로. 그리고 동시에 아스고 기업의 계좌에서도 코인이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자광이 살고 있는 Olympus 1 관리실 대표 계좌와 수제 머리끈 제조 기업 대표 계좌로.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자광이 아스고 본사로 들어서자, 자광의 계좌에서 5코인이 아스고 기업 계좌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스고 기업 계좌에서 각각 1코인씩 지하 아파트인 Olympus 1 관리실 대표 계좌와 수제 머리끈 제조 기업 계좌로 빠져나간 셈이었다.

 

 

<에필로그>

 

Olympus 1 입주민은 반드시 Olympus 1 관리실이 개인 정보를 열람하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입주할 수가 없다. 불법 주거 침입으로 간주해 드론 공격을 받게 된다.

개인 정보는 수시로 업데이트 된다. 예를 들어 어제 스크린벽을 통해 어떤 영화를 봤는지 같은 사소한 것도 업데이트 된다. 그런데 만일 과거에 머리끈에 대한 기억을 지운 적이 있다면, 그게 업데이트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주자광이 과거에 머리끈에 대한 기억을 삭제한 적이 있다는 것도 당연히 업데이트 됐다.

Olympus 1이 운영하는 인공지능 컴퓨터는 입주민의 개인 정보를 쉴 새 없이 분석해서 수시로 기업에 제공한다. 예를 들어 주자광의 개인 정보 중에서 ‘2년 전에 머리끈에 대한 기억을 삭제한 적이 있음’이라는 정보를 아스고와 머리끈 제조 회사에 제공하는 식이다.

참고로 주자광은 후아에게서 받은 머리끈을 잃어버려서, 머리끈에 대한 기억을 2년 전에 삭제했다. 물론 당시에는 지하 공원 어딘가에 떨어뜨렸는데 찾지를 못했다.

그럼 이제 주자광이 머리끈에 대한 기억을 삭제했다는 사실을 아스고와 머리끈 제조 회사가 자신들의 컴퓨터에 저장해 놓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자동으로 네트워크상에서 머리끈과 관련해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어 테스트를 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성공률이 가장 높은 테스트를 실행에 옮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주자광이 2년 전에 머리끈에 대한 기억을 삭제한 적이 있다는 건 이미 아스고와 머리끈 제조 회사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자광이 지하 공원에서 새로 사귄 여자 친구 히엔한테서 머리끈을 선물 받았다는 정보 또한 Olympus 1에 의해 아스고와 머리끈 제조 회사에 또다시 전달이 됐다. 즉 개인 정보가 업데이트 되어 기업에 전달된 것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주자광은 본격적으로 두 회사의 잠재 고객이 되었다. 그때부터 아스고와 머리끈 제조 회사가 운영하는 컴퓨터는 네트워크상에서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 테스트를 한다. 과연 어떻게 해야 주자광에게 머리끈을 팔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주자광이 기억을 삭제할지를 테스트한다. 그리고 각종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공 확률이 낮게 나온다면, 두 회사의 컴퓨터는 주자광을 다시 보류 목록에 저장해 놓는다.

그러다 주자광이 히엔과 헤어졌다. 개인 정보가 또 한번 업데이트된 것이었다. 물론 그 정보 또한 아스고와 머리끈 제조 회사에 전달이 됐다.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 되자 두 회사의 컴퓨터는 다시 네트워크상에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테스트한다. 그러다 마침내 이번에는 성공 확률이 높은 상황을 만들어냈다.

두 회사의 컴퓨터가 테스트한 시뮬레이션은 이렇다.

 

Olympus 1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 24시간이 지나도 계속 방치되어 있으면, 청소로봇이 다가와 그 물건을 레이저빔으로 흔적도 없이 분해한다.

그 청소로봇을 이용한다.

주자광은 늘 자기 전에 머리끈을 풀어 팔목에 감는다.

주자광이 자고 있을 때 청소로봇을 작동시켜 팔에 감겨 있던 머리끈을 분해한다.

주자광이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끈을 찾다가 결국 못 찾고 거실로 나와 3D 프린터로 머리끈을 만든다. 이때 머리끈 제조 회사는 가장 인기 없고 머리카락이 잘 엉키는 머리끈 모델을 일부러 제공한다.

동시에 스크린벽에서는 아스고 기업 광고가 보인다.

주자광이 아스고에 예약하면, 머리끈 제조 회사는 아스고 직원(마이)에게 수제 머리끈을 보내준다.

아스고 직원은 건물 입구에서 주자광에게 머리를 묶어주면서 수제 머리끈을 선물로 준다.

그럼 주자광이 마음을 바꿔 아스고 예약을 취소할 확률은 제로다. 물론 주자광이 아스고 직원에게서 선물 받은 수제 머리끈은 기억 삭제 비용에 포함된다.

 

이 시뮬레이션은 곧바로 두 회사의 경영진들에 의해 승인을 받았고, 결국 Olympus 1 관리실의 협조로 자광의 집에 있던 청소로봇이 새벽에 움직였다.

청소로봇이 시나리오대로 자광의 팔목에 감겨 있던 머리끈을 자광이 잠든 사이에 레이저빔을 이용해 흔적도 없이 분해했다.

그리고 자광은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왼쪽 팔목을 더듬었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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