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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원경 하루의 선택

2022.11.01 11:2311.01

하루의 선택

 

 갈원경

 

 


오늘은 서른 하나.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

로Ro의 말에 나는 로를 빤히 쳐다봤다. 피식 웃던 로는 날 보더니 쯧 혀를 찼다.

“내가 젊었을 땐 31이라면 아이스크림 가게였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다’고. 서른 한 종류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이름인데.”

“‘하루’는 아이스크림이 아니에요. 먹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로는 유기물을 섭취하면 안 되는 몸이니까요.”

“안 먹어! 에이, 재미없는 놈. 네가 아이스크림이 뭔지나 알겠냐.”

“유지방 10% 이상, 공기 함유량 50% 이상의 차가운 디저트. 광의로는 차가운 셔벗과 소르베 젤라또까지 포함하는 개념. …아느냐가 아니라 먹어 봤냐고 물으셔야죠.”

“내가 분명히 인간과 일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너는 대체 어떻게 자라서 그렇게 꽉 막혔어. 재미없는 녀석. 아직 20대면 좀 유쾌한 맛이 있어야지.”

로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를 보았다. 그에게는 세 번째 몸이다. 2세기 전에 태어난 로는 유기체 몸이 수명을 다할 무렵인 1세기 전, 뉴바디 상용화 시기에 유기체 몸을 버리고 뉴바디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뉴바디 회사 통폐합으로 자신의 뉴바디 수리가 불가능해지자 신탁해 둔 자금 대부분을 들여 나노 머신이 포함된, 자체 수리가 가능한 신형 메카로 이전하는 소송에 승리했다. 하지만 재산 대부분을 소송 비용으로 다 써버렸기 때문에 나처럼 ‘하루’를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됐다고 했다. 내가 처음 이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로는 여기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관리자들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모르지만, 어머니한테 들었던 관리자들도 그랬고 인간이건 메카이건 저런 식의 농담을 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한다.

“‘하루’ 리스트부터 주세요.”

로가 리스트를 전송했다. 나는 서른 하나의 명단을 죽 훑었다. 명단 옆에는 성별 표시와 원래의 직업, 신체 특징 같은 것들이 함께 올라 있다. 처음 ‘하루’ 명단에 오르면 제일 먼저 이름이 사라지고, 그들이 결정한 뒤에는 원래의 직업이 사라진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신체적 특징이다. 물론 원래 세레스 시민이었던 사람들은 매우 특이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경우는 없으므로 기껏해야 키가 몇이라거나 눈동자 색이 어떻다거나 신체 일부가 메카로 교체되었다거나 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오늘 리스트에는 드물게도 80대 이하인 사람이 둘 포함되어 있다. 120세를 넘긴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직 장년이 둘이나 있는 걸 보면 뭔가 관리자들을 성가시게 하는 사고가 있었던 것이겠지만, 물론 나나 로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가요, 로.”

로가 투덜대며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오기 전에 우리 사무실에서 ‘하루’의 대기실로 가는 전송기가 갑자기 가동되면서 전임자가 대파되는 사고가 있었다. 그 뒤로 로는 절대로 앞서 걷지 않는다. 전송기에서 내가 안전 확인까지 끝내고 나면 그제야 로는 전송기 안으로 들어온다. 전송기가 작동하고 우리 눈앞에 서른 하나의, 똑같은 회색 옷을 입고 회색 마스크를 들고 있는 ‘하루’가 있는 대기실이 나타났다. 서른 하나가 동시에 우리를 보았다. 똑같은 회색 옷을 입고, 손에는 어정쩡하게 지급된 마스크를 들고 있다. 눈치 빠른 몇은 벌써 마스크를 쓰고 있기도 하지만, 역시 70대 정도로 보이는 둘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알고 계시겠지만 대기실을 나가서 오늘 하루 동안 여러분들은 세레스 지원 단지들을 둘러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둘러보는 통로는 외부 공기가 정화장치 없이 그대로 순환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내셨던 곳과는 매우 다른 공기에 노출되게 됩니다. 큰 입자가 통로로 유입되지는 않겠지만 오염물질이나 세균성 물질이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여러분은 아직 익숙하지 않으실테니 마스크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아까 맡아보니까 이상한 냄새가 났어! 여기 약물을 뿌려 두고 우리를 서서히 죽게 만드는 거 아니야?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건 말 뿐이고.”

마스크를 손에 든 70대, 은발의 남성이 나에게 말했다. 얼굴을 보자 리스트의 한 이름이 반짝였다. 80대 이하의 두 명 중에 어린 쪽이다. 로가 나의 상관이고 이 팀의 책임자지만 이들은 늘 내게 말한다.

“살균처리 된 마스크입니다. 오늘 하루는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세레스는 여러분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마스크 없이 숨쉬기 쉽지 않으실 테니 지금 착용하시는 것을 권고합니다.”

“저 문만 열고 나가면 곧바로 후회할 텐데 긴 말 할 것 없어.”

로가 말하더니 통로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금방 바깥 공기가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몇이 기침하면서 마스크를 급히 썼다. 로는 언제나 말보다 행동이 빠르다.

“잠깐, 이대로 이동하는 거야? 나는 여기 잘못 온 사람이라고! 이것 봐, 나는 의회 소속이야. 아직 이런 곳에 올 나이가 아니야! 관리자를 만나게 해 줘!”

기침을 해 대면서 한 명이 앞사람을 밀치며 나와 말했다. 다시 리스트의 다른 한 줄이 반짝였다. 올해 82세인 전직 의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입 끝이 계속 떨리고 있다. 삼 년이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여기서 ‘하루’를 상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일이 있다. 세레스의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가 되는 이들 중에 특히 나이가 젊은 경우는 대개 저런 문제가 있다. 분노 조절 장애, 아마도 원인은 알콜 같은 약물류. 약물을 사용하는 건 개인의 자유다. 그걸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세레스에서 낙오된다는 것까지 그들은 알고 있다. 다만 그들은 대개, 자신이 약물을 통제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약물 중독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을 텐데, 그래도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공개적으로 밝혀도 되는 사항이지만 나는 이들이 마지막 선택을 할 때까지 이들을 존중해 주는 쪽을 선호한다.

“착오가 있었다고 생각되시면 참관을 마치고 숙소에서 ‘선택’할 때 이의제기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의제기 선택지 같은 건 없다. 그도 알고 있다. 그는 나를 힐긋 보다가 기침을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마스크를 썼다. 로가 고개를 돌려 통로로 나간다. 나는 그들이 로의 뒤를 따라 통로로 들어가게 하고 가장 뒷 열에서 아무도 낙오되지 않도록 보는 역할이다. 우리가 헬맷을 쓰는 이유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하루’가 안내인을 공격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 전임자는 ‘하루’가 목을 졸라 일을 못 하게 됐다고 했다. 로는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면서 절대로 헬맷을 벗지 말라고 말했다.

오늘의 첫 코스는 세탁소다. 스팀과 함께 마른 상태로 나오는 옷을 개서 정리하고 한쪽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세탁물을 분류해 기계에 넣는다. 이번에는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다. 습도가 높은 곳에서 메카를 가동하는 것보다 시민이 아닌 사람들을 쓰는 게 훨씬 저렴하다. 이동과 운반 작업을 반복하는 이들은 얼른 보기에도 근육이 잘 잡혀 있다. 세레스의 시민일 때는 모른다. 자신이 벗어버린 옷이 어떻게 하루 만에 다시 똑같은 상태로 정리되어 돌아오는지. 그들은 찢어지거나 상한 옷이 어떻게 폐기되고 똑같은 옷이 다시 돌아오는지, 물려서 교체를 신청한 옷이 어떻게 되는지 알 이유가 없다. 그들이 집을 비운 시간 동안 가사로봇이나 혹은 가사보조인이 생활의 흔적을 모두 정리하고 세탁물을 모두 챙기고 정리된 새 옷을 제자리에 둔다. 흔적을 얼마나 남길 것인지, 가사로봇을 쓸 것인지 가사보조인을 쓸 것인지는 그들의 선택이었다. 언제나 바꿀 수 있는 선택. 잠깐이라도 어질러진 것을 견디지 못해서 24시간 가사로봇을 쓰는 비용을 감당하기로 한 경우도 이들 중에는 있었을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언제나 닳은 흔적 없이 원상태로 돌아오는 옷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돌아온 것인지 생각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지독한 얼룩이 남은 옷이나 침대 시트나 카페트가 어떻게 됐는지 한 번쯤 궁금해 한 적이 있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레스의 시민은 자신이 원하는 상태를 지속할 권리가 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두 번째 방은 침대가 빼곡한 공간과 그 옆에서 러닝머신을 뛰거나 잠들거나 생활하는 사람들의 공간이 나뉘어 있다. 침대에 눕거나 앉은 사람들은 주사를 맞거나 약을 먹고 있다. 로가 설명한다.

“이 팀은 신약의 효과를 확인합니다. 약을 투여받을 때 외에는 행동의 범위가 넓지만 다른 사람과 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150세 이하로만 지원이 가능합니다. 연령 제한이 있는 이유는, 이 약을 사용할 사람들이 세레스 시민이기 때문이지요. 150세가 넘는 시민은 없으니까요. 이 팀의 활동을 통해 F형 인플로마를 조기에 치료할 수 있게 됐지요. 여러분 중에도 혜택을 받으신 분이 있군요.”

몇 명이 두드러지게 어깨가 처진다. 150세가 되어 ‘하루’가 된 사람들. 그러나 로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F형 인플로마 치료제로 임상 실험을 거친 건 다섯 종류였다. 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약품 팀은 모두 F형 인플로마에 감염되었고, 5종의 치료제를 각각 투여받았다. 세 종의 치료제는 효과가 없었다.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을 투여받은 사람 중에 80%가 생명반응이 종료했다. 나머지 한 종은 일시적으로 병증이 약해졌지만, 갑자기 이상 반응을 일으킨 사람이 50% 나타났다. 그 50% 역시 패혈증이나 서로 다른 병으로 생명 반응이 종료했다. 약물 팀의 인원이 가장 자주 바뀐다는 것을 로는 말하지 않는다. 애초에 약품 팀에 지원할 수 있는 ‘하루’는 적고, 대개는 세레스 주변의 섬 주민들, 세레스의 시민이 될 수 없는 이들 중에 신체조건을 만족하는 경우다.

세 번째 방은 폐기물 분류장이다. 마스크와 핼멧을 쓰고 있어도 냄새가 파고드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사 로봇이나 가사보조원이 시민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폐기물 중에 소각이 확정된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일단 이 방에 모인다. 쌓여있는 무더기마다 두세 명이 붙어 통로에서 떨어져 쌓이는 것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벨트에 옮기고, 벨트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열 명이 양쪽으로 같은 간격으로 서 있다. 그들은 기계적으로 벨트 위의 물건 중에 정해진 것을 벨트 밖으로 꺼내 자신의 자리 아래에 있는 파이프로 내린다. 벨트가 뒤쪽으로 갈수록 위에 놓인 물건들은 점점 적어지고, 남아있는 것들은 대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에 가깝다. 마지막까지 벨트 위에 있었던 것들은 소각로로 들어간다. 벨트가 멈추자 벨트를 따라 서 있던 이들은 벨트에서 멀어져서 벽에 붙어있는 곳에서 뭔가를 먹거나 마시거나 장갑에 묻은 오염물질을 제거한다.

폐기물 분류장은 근무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은 편이라 오히려 근무 환경이 좋은 편에 속하지만 ‘하루’는 대부분 방 안의 냄새 때문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마스크를 써도 냄새는 막을 수 없다. 분류장 사람들은 고글과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뭔가를 먹거나 마시려면 마스크를 벗어야 한다. ‘하루’ 중 몇 명이 마스크를 벗는 이들을 보고 헉, 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근무 시간은 정량제여서, 당일 해결해야 할 폐기물을 모두 분류하고 나면 이후에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갈 수 있다고 로가 설명한다. 그들은 이 방을 나가서 시간을 쓰는 것보다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는 쪽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하루’의 표정을 보면 이들 중에 폐기물 분류장을 선택하는 경우는 없어 보였다.

열 두 개의 방 중에 여섯 개를 지났을 때 ‘하루’의 표정은 대부분 아침보다 어두워졌다. 로와 나는 그들을 데리고 중앙대기실로 이동했다. 중앙대기실에는 ‘하루’를 위한 점심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고형이 꽤 포함된 스프였다. ‘하루’에게만 허락된 식사였다. 아직 그들은 시민과 비시민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이게 점심이라고?”

몇 명은 자신의 번호가 적힌 자리에 앉아 번호가 찍힌 그릇에 놓인 스프를 먹기 시작했고, 전직 의원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스프를 들고 한 모금 입에 넣어 보고는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안내인! ‘비시민’ 들은 이런 걸 삼시 세끼 먹는 건가?”

삼시 세끼라는 말은 틀렸다. 그건 시민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말해 줄 의무가 없다.

“직무에 따라 다르지만 이건 오늘 같은 날에만 제공되는 식사죠.”

“그렇지? 아무리 비시민이라도 어떻게 이런 것만 먹겠어!”

그가 웃으며 그릇을 비웠다. ‘하루’ 대부분은 이렇다.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먹고 난 그릇은 이곳에서 세척합니다.”

그릇을 비우고 일어난 이들에게 로가 말했다. 나는 내가 비운 그릇을 들고 세척대로 가서 스펀지로 그릇을 닦고, 건조기에 넣는다. 간단한 동작이다. ‘하루’에게는 낯선 일이겠지만. 그들은 눈치를 보면서 나를 따라 하기도 하고 곧바로 건조기에 넣어 버리기도 한다. 상관없다. 그들은 곧 그 그릇이 자신이 계속 써야 하는 그릇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오늘 저녁부터. 그들은 접시에 자신들의 기호가 붙어있는 이유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법이 없다.

“안내인은, 세레스 시민이었다가 이 일을 하게 된 건가? 내 말은, 우리도 안내인이 되길 선택할 수 있느냐는 말이야.”

150세가 되어 ‘하루’가 된 하나가 내게 물었다. 자신들을 안내하는 모습이 꽤나 쉬워보였나보다. 나는 오늘 오전 내내 누구도 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도 내게 존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다. 한 번의 예외도 없는, 매일의 ‘하루’가 그러하다.

“안내인은 규정상 시민이었던 적이 없었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말에 그는 쯧, 혀를 찬다. 그게 자신이 안내원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한 번도 시민이었던 적 없는 이와 말을 섞었다는 불쾌감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이 코스를 어떻게든 조정할 권한이 없지만, 어제까지 시민으로 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하루만에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라고 하기 전에 비시민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더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태어나서 줄곧 그들은 육아보조원이나 육아로봇과 함께 있었을 테고 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들은 수많은 비시민들이 자신들의 주변에 있는 걸 보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 주변에 있었던 그 많은 비시민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그들은 비시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서 학교나 유치원을 다녔을 것이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의 흔적은 항상 그들이 정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집을 나서기 전에 분명 보았을 것이다. 밤새 잠든 자리 그대로 엉망으로 뭉쳐진 이불과, 샤워를 하며 거울과 유리와 바닥에 남은 물자국과, 아침을 먹은 뒤 놓인 그릇과 수저와 어제 밤에 입었던 잠옷과 지난 밤부터 출근 전까지 쓰고 던져둔 타월을. 머리를 손질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딱 하루치만큼 방에 쌓인 각질과 먼지들을, 그들은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집을 나온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난밤 퇴근해서 본 바로 그 장면처럼 정돈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출근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입밖에 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루’의 질문이 조금 달랐다면 나는 다르게 대답했을 것이다. ‘시민이었던 적이 있었나’가 아니라 ‘어디서 태어났나’였다면. 그럼 나는 표정 없는 얼굴을 유지하며 그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세레스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결정했지요. 너는 시민으로 부족하다고. 그들은 내 부모 모두가 세레스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시민이 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나는, ‘하루’가 너도 시민이었던 사람이냐고 물을만큼 시민처럼 생겼지만, 그들은 내 어머니가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 역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결정했다.

알람 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로가 나를 보았다. 가끔 로는 저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아마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모를 것이다.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 같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

“이동하겠습니다.”

 

로봇 조립 공장과 전자제품 조립 공장, 소모품 포장 공장과 같은 공장 시설을 하나씩 훑는 동안 ‘하루’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들은 일하기 쉽도록 메카 보조장치를 인간과 다른 형태로 이식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저항감을 느낀다. 시민의 세계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의 얼굴에 앞뒤로 눈이 달려있는 모습에도, 팔이 360도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에도, 다리 끝에 달린 것이 발이 아니라 무한궤도장치인 모습에도 움찔움찔 놀란다.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이 방을 택한다. 사실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작업에 효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를 덜 소모한다는 뜻이고, 그건 삶의 비용이 덜 든다는 뜻이다. 거기에다 메카 보조장치를 달 때의 보조금이나 지원금까지를 생각하면, 정말로 나쁜 선택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실을 매번 설명하지만, 오늘의 ‘하루’ 중에는 눈을 빛내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이는 이조차 없다.

저녁 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었던 장소로 돌아오자 그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각자의 번호가 적힌 테이블 앞에 앉는다. 점심과 같은 스프에 빵 한쪽이 스프 그릇에 올라와 있다.

“잠깐, 여기 그릇이 더러워!”

“이거 하나도 안 씻겨졌다고! 기름이 둥둥 뜨잖아!”

열 명 남짓한 이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로는 나를 보고, 나는 로를 본다.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 전에 한 명이 머뭇거리며 그들에게 말한다.

“이거…, 점심 먹을 때 우리가 씻었던 그 그릇 같아요.”

“세척하는 방법을 보여드렸을 텐데요.”

내가 말한다. 나는 평온하게 말하지만,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게 가장 즐거운 순간인걸. 당신들이 처음 점심을 받는 그 순간의 표정도 꽤나 인상적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 이 순간이 가장, 즐겁다.

“내가 씻은 그릇을 다시 내가 쓴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그럼 누가 쓸 거라고 예상하셨던 거죠?”

나는 묻는다. 몇 명은 벌써 스프를 마시고 있고, 몇 명은 스프를 보고만 있다.

“드시는 게 좋습니다. 오늘 식사는 이게 마지막이니까요.”

“그리고…오늘 숙소로 돌아가서 ‘선택’을 하는 거지?”

스프를 먹지 않은 한 명이 말했다.

“숙소로 가셔서 세 시간 동안 숙소를 경험하신 뒤에, 선택하시게 됩니다.”

로가 말했다. 오늘 그들은 비시민의 표준 주거 시설에 묵는다. 그들은 처음 보는 공동 샤워실과 공동 주방을 쓰는 법을 배울 것이다. 시설 관리인은 그들에게 어제와 똑같이 안내할 것이다. 침대의 이불을 정리하는 법과 햇빛에 말리는 법과 시트와 옷을 세탁기를 쓰는 법과 건조된 옷을 정리하는 법, 작업장으로 이동하는 법을 안내할 것이다. 그들은 오늘 배워야 할 일이 많다. 그리고 한 시간의 설명과 안내가 끝나면 그들은 두 시간동안 자신의 방에서 머물 것이다. 패널을 언제 터치하는지는 자유다. 오늘 하루가 끝나기 전까지만 선택지를 고르면 된다.

“그럼 안 먹고 이걸, 세척해도 되는 건가? 내가 쓴 그릇은 어떻게 되지? 다음 사람이 쓰나?”

그걸 처음부터 물었으면 좋았을 겁니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 사용된 그릇은 이번 식사 후에 폐기합니다. 이번에는 세척하지 말고 저쪽 폐기함에 넣으세요.”

그는 힘없이 일어나서 그릇을 한참 쳐다보다가 폐기함에 넣었다. 그릇은 바로 폐기함과 이어진 분해 장치로 들어간 뒤 비시민 용의 물건으로 재생될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그건 말하지 않게 되어있는 일이다. 그들이 씻기조차 싫어했던 물건이 비시민을 위한 물건이 된다는 건, 앞으로 비시민으로 살아갈지도 모르는 그들의 선택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이미 마음을 정한 걸로 보이지만, 또 모른다. 하나쯤 내 예상과 다른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스프를 깨끗하게 비우고 그릇을 폐기하는 사람이 셋, 다 먹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먹은 사람이 열아홉, 아예 먹지 않은 사람이 아홉. 통상적인 비율이다. 나는 스프를 비우고, 함께 나온 빵으로 그릇을 닦아 먹은 뒤에 그릇을 폐기함에 넣는다. 딱히 재생을 신경써서는 아니다. ‘하루’의 저녁에 나오는 빵은 그래도 맛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내가 음식 맛을 아는 게 아빠를 닮은 거라고 했다. 그 말이 끔찍하게 싫었다. 시민을 닮아봤자, 내게 시민의 삶이 주어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들을 임시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태우고 인원을 확인한 후에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로의 숙소는 그들의 숙소 안에 있어서 로는 매일 다른 ‘하루’를 태우고 버스로 집으로 간다. 로는 그게 교통비가 안 드는 수지 맞는 일이라고 했다. 어차피 고장 날 일도 없는 몸, 교통비를 아껴서 돈을 모아서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간다. 로에겐 이것 역시 수지 맞는 일일 것이다. 매일 일하는 곳 지하에 바로 집이 있다는 게.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아직 깨기 전이었다. 어머니가 있는 방에는 조명을 모두 꺼 둬서 창도 없는 방은 완전히 깜깜하고 어머니의 숨소리만 조용히 들려왔다. 이번 달은 밤 근무니까 어머니는 아마 서너 시간 뒤에 일어나 출근할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닦고 작은 테이블 위의 패널을 켰다. 오늘의 ‘하루’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마스크 착용을 바로 하지 않았던 셋, 그릇 세척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여덟,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던 넷, 그리고 언제나 조용히 지시를 따랐던 일곱. 미리 리스트에 체크해 두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씩 평가 내용을 기록한다. 이건 그들에 대한 평가지만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이 일에 적합하다는 걸 보여주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 다른 일로 배치될 수 있다. 내가 ‘하루’를 안내하는 일을 맡은 건 내가 시민과 비슷한 외모이기 때문이지만, 그런 비시민이 나만 있는 건 아니므로.

일을 다 마치고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는데, 기다렸던 알림이 왔다. 로가 오늘 ‘하루’를 평가한 내용과 내 평가의 일치율이 90% 이상이라는 메시지 하나. 그리고 ‘하루’ 중에 선택을 마친 비율이 100%에 달했다는 메시지 하나. 나는 ‘하루’의 선택 리스트를 연다. 오늘 서른 하나가 선택한 것은 모두 같았다. 그들은 모두 비시민의 삶을 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비시민과 시민의 경계에 잠시 발을 디뎠다가, 내일 시민으로 소멸할 것이다. 통상적인 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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