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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수 종막의 사사

2022.12.01 00:0012.01

종막의 사사

서계수

 

사무엘, 엘가나와 한나의 아이. 지존자 엘로힘께 바쳐진 나실인. 이스라엘 최후의, 그야말로 종막(終幕)의 사사(士師). 두 왕의 머리에 기름 부은 자.
한편으론 사사(士師)롭고도 사사(私私)로운 삶을 살다 간 이. 그러나 이는 앞서 나열된 수식들과 다르게 널리 알려져 있진 않다.


독실한 신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한나는 엘로힘께서 제게 시험을 내리신 것이라 믿었다. 부족한 믿음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한나의 ‘시험’은 갓 태어난 채 강보에 둘둘 말려,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으므로.

그토록 아들을 바랐건만, 한나가 낳은 것은 아들이 아니었다. 이것이 시험이 아니고 다른 무엇일 리 있겠는가. 믿음이 한나를 확신케 했다. 그녀는 지금 제가 그 옛날 욥처럼 사탄과 그녀의 주인 사이에서 줄다리기 밧줄처럼 이리저리 당겨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한나가 기억하기론 욥조차 엘로힘의 시험에 무너질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한나가 지금 감히 느끼는 배신감, 그 또한 훗날 엘로힘께 바칠 충성에 면죄될 수 있을지 몰랐다.

한나의 눈물 한 방울이 아기의 뺨 위로 톡 떨어졌다. 그녀의 남편, 레위인 엘가나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는 것이 물기로 흐려진 시야 너머로 뿌옇게 보였다. 엘가나는 다른 아내 브닌나로부터 이미 자식을 여럿 얻은 후였기에 후사가 그리 급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한나의 눈물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속상해하지는 마시오. 그리고 부디…저번처럼 곡기를 끊지 말아요. 먹고 마시며 몸을 회복합시다.”

엘가나가 한나의 손을 감싸자 한나는 그만 웃어버릴 뻔했다. 그녀의 손등을 덮은 엘가나의 손바닥이 물기로 흥건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슬퍼하는 거요. 아무리 아들이 중한들 내게 당신이 그러하듯이 당신에게도 내가 더 중하잖소? 그렇지 않은 거요?”

한나는 눈을 깜작여 눈물을 털어내곤 애써 웃었다.

“기뻐서 그래요. 제가 이렇게 자식을 낳았으니, 이젠 사람들이 저를 아이 낳지 못하는 여자라 조롱할 수 없을 테니까요.”

브닌나라 할 지라도. 한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대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라 비웃겠지. 마음속에 냉기가 일었으나, 한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엘가나가 한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애는…어찌하겠소?”

한나는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붉고 쭈글쭈글했다.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열 달 뱃속에 품고 있다 낳은 자신의, 그것도 첫 번째 아기였다. 갓난아기를 안았을 때, 조그만 심장에서 울리는 고동이 얼마나 벅차게 다가왔던가. 그러나 어느새 벅참도 설렘도 차츰 사그라들고, 한나의 가슴은 차가워졌다. 세상 사람들이 중히 여기는 것은 아들이다. 엘가나가 지금은 한나를 사랑해주지만, 겨우 딸자식 하나 낳고 끝난 늙은 여자 한나에게도 그럴 것인가? 자신이 없었다.
한나는 고개를 들었다. 제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차가운 마음을 가졌단 말인가. 그래서 오랫동안 어머니가 되지 못한 걸지도.
그러나 다른 방도가 있단 말인가.

“아기가 젖을 떼면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보낼 거예요.”
엘가나가 주춤했다.

“하지만 당신이 아기를 보낸다고 한 것은, 그…아들일 경우잖소. 딸애인데, 데리고 있는 게 어떠하오?”

당신이 적적하지 않게 그편이 좋을 것 같구려. 엘가나가 덧붙였다.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애는 브닌나, 내 적수의 앞에서 나의 수치가 될 것이다,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실인 서원은 여자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미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다 맹세했습니다. 비록 아들이 아니더라도, 맹세를 무르고 싶진 않아요.”

한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한나는 실로 엘로힘의 집에서 울며 기도했던 적이 있던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어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아이의 평생을 주님께 드리고 아이의 머리를 깎지 않겠습니다…”

그때 제사장 엘리가 저에게 뭐라 했던가. 주정을 부리지 말고 술을 끊으라고 하였지. 한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이 슬플 뿐입니다. 저를 악한 여자로 생각지 마소서. 단지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을 뿐이니까요.”

제사장 엘리가 말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주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길 원하노라.”

그리고 딸이 태어났다.
엘로힘께서 한나의 소원을 절반 들어주신 것이다.
엘가나가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한나는 아기를 보는 엘가나의 눈빛을 보았다. 딱하다는 눈빛이 썩 절절해 보이진 않았다.

한나는 깨달았다. 아, 이 아이는 오로지 나의 아이. 나와 내 주님의 아이이다. 엘가나는 한나가 아기를 낳을 수 있기를 한나만큼 고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한나가 낳길 원했으니 낳을 수 있길 바랐을 뿐이다. 나의 남편은 내 아기를 사랑하지 않는다.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나만큼 내 아기의 운명에 관심이 있지 않다.
엘가나가 물었다.

“아이 이름은 무얼로 하려오?”

한나가 대답했다.

“주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셨으니, ‘사무엘’이라 하겠습니다.”

사무엘은 ‘엘로힘께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한나가 작게 웃었다.
이것은 보답이다. 이것은 복수다. 반쪽짜리 답변에 대한, 나의 사사로운.

오해하지 마시라. 그녀는 엘로힘을 사랑했다. 제 아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사람은 때론 사랑하면서 원망할 수도 있으며, 사랑을 수단으로도 쓸 수 있는 법이다.


실로 엘로힘의 집, 즉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가 사무엘을 맡아 기른 지 십수 년이 지났다. 그간 엘리는 엘로힘과 통하던 재능, 즉 영적 감수성을 많이 잃었다. 제사장으로선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그의 주인을 모실 때 반드시 지녀야 할 그것이 엘리를 떠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엘리는 점차 어두워가는 눈, 비만한 몸으로도 사무엘이 또래와 다르다는 것쯤은 깨달을 연륜이 쌓였다. 아니, 오히려 ‘그’였기에 잘 알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가 낳은 자식은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불량아들이었고, 눈앞의 아이와는 다곤 숭배자와 레위인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엘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사무엘, 내 딸아. 너무 초조해 말아라. 네 어머니는 곧 오실 것이다.”
“예.”

사무엘이 젖을 막 떼었을 때부터 보아온 엘리였지만, 아이가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일 년에 한 번 정도였다. 하긴, 아이는 아기 때부터 잘 울지 않아서 성전에서 일하며 저를 돌보는 여자를 걱정시켰다.

“아기가 순하다고 무턱대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어려서 울지 않는 아이는 자라서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요.”

엘리는 아이 돌보는 여자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의 아들들, 지금은 제사장 일을 하고 있는 홉니와 비느하스는 어릴 때 울고 떼를 쓰곤 했기에, 사무엘을 돌보는 여자의 말도 엘리에겐 타당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어른들의 걱정과는 어긋나게도, 다행스레 아이는 잘 자랐다. 또래보다 키가 빨리 컸고, 총명하고 담대했다.

단지 방금 배운 것을 금세 외워 암송하고, 늙은 엘리가 잊고 있던 것을 짚어 엘리를 깨우쳐주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어미 양으로부터 처음 태어난 새끼 양을 제물로 바치는 법을 배우던 날, 사무엘은 눈물도 싫은 소리도 없이 제물 준비하는 이들이 가죽을 벗기고 뼈로부터 살점을 발라내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엘리는 그 점 또한 ‘성스럽게 구별된 이’라는 나실인답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여러모로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었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한 번도 자른 적 없는 머리를 천으로 가리지 않은 것 또한 그랬다.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엘로힘과의 약속을 의미했다.

검은 머리를 허리께까지 기른 사무엘이 아, 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저기서 어머니가 오고 계세요.”

엘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겐 보이지 않는구나. 확실한 게냐? 경배를 드리러 온 많고 많은 이들 중 어찌 네 어머니만 딱 그렇게 구별해낸단 말이냐.”

사무엘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엘리는 아이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알아챘다.

“옳아, 늙은 내 눈 탓이라 이거지?”

사무엘이 씩 웃으며 엘리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한테 가도 되나요?”

엘리도 웃었다.

“가 봐라. 누가 뭐래도 일 년 만이 아니냐.”

높은 언덕에 선 아이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흐르듯 나부꼈다.

아이는 언덕을 달음박질쳐 내려갔다. 행렬의 한가운데 끼어있던, 이제는 마냥 젊진 않은 여자가 제게 달려오는 사무엘을 발견하곤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이는 뛰다 말고 멈춰섰다. 제 어머니 한나의 손을 잡은 채 뒤뚱거리며 걸음을 떼는 사내아이를 보았던 것이다.

한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졌다가 서서히 돌아왔다. 그러나 사무엘은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어째서 아까는 보지 못 했을까? 그러고 보니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단 사실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게 사내애였구나.
한나는 제 손을 잡고 걷던 아들을 남편 엘가나에게 넘겨주곤, 사무엘에게 다가와 불편한 자세로 몸을 구부려 아일 끌어안았다.

“잘 지냈니? 머리가 많이 자랐구나. 키도 많이 컸고.”

그러고 나서 몸을 떼어냈을 때, 한나는 다시 입꼬리를 올린 사무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제 감정을 완벽히 감추는 것은 아직 서투른 것이, 어린아이는 역시 어린아이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네 남동생이야.”

한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사무엘이 대꾸했다.

“잘 됐어요.”
“내게? 아니면 네게?”

사무엘이 한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런 건 묻지 마세요.”

한나는 사무엘의 양어깨를 쥐고 제 몸에서 떼어냈다. 그러곤 경배를 드리러 가는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한 손으론 사무엘의 손을, 다른 손으론 보따리 하나를 쥔 채였다.
둘은 무리로부터 멀찍이 거리를 둔 곳에 멈춰섰다. 사무엘에게 말을 건네는 한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얼마나 아들을 바랐는지, 너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거야. 브닌나가 아들을 낳지 못한 나를 얼마나 능멸했는지 아니?”

엘리를 비롯한 저를 가르치는 제사장들로부터 명석하다 칭찬을 듣는 사무엘이었지만 브닌나를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젖을 떼자마자 집을 떠나왔는걸요.”

사무엘의 대답에 한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불편한 배를 짚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당황한 사무엘이 저를 올려다보자 한나는 억지로나마 웃어 보였다.

“네 동생은 더 있어.”

사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나가 말을 이었다.

“주님께서, 그리고 엘리 제사장께서 축복해주신 덕분이야. 어째서 나를 위해 기뻐하지 않지? 네 어머니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저는 어머니의 소원이었던 적이 없나요?”

한나의 말문이 막혔다. 사무엘은 더는 입조차 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 눈으로 한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나가 한숨을 토해내곤 대꾸했다.

“네가 내 태중에 존재하기도 전에 나는 널 낳길 소망했어. 그리고 네가 태어난 후에는…”

사무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는 제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았다. 낳고 보니 아이는 아들이 아니었고, 브닌나라는 여자가 계속 저를 비웃었단 얘기를 하려는 것이겠지.

그렇지만요.

사무엘이 입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렇지만요, 저 계속 노력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요. 제사장님이 하라는 공부도 열심히 했고요, 어린 양을 죽이는 것도 끝까지 지켜봤어요. 어머니…”

한나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일은 나를 위해서 해선 안 돼. 네 주인이신 엘로힘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야.”

한나는 보따리를 끌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미 보따리 안에 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익숙하고도 낯선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마포 에봇이었다.

이집트에서 주로 생산되는, 아마로 짠 옷이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할 시 입는, 제사장의 고유 복장이었다. 한나는 그것을 아이가 입을 수 있게끔 작은 겉옷으로 만들어 매해 가져다주곤 했다.
한나가 옷을 사무엘의 몸에 대었다. 치수가 맞나 보는 것이다. 일 년간 키가 자란 사무엘이었지만, 아이의 성장을 예상하고 크게 만든 옷이라 입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했다.

“입어 보렴.”

천천히 팔 넣는 구멍에 손을 끼워넣는 사무엘을 보며, 한나가 말했다.

“너는 지금도 내 소원이야.”

사무엘이 한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나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제사장이 되는 것이 소원이란다. 너는 여자아이이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드보라처럼 제사장이 될 수 있겠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 벌써 아이를 셋씩이나 안겨주신 주님이 아니시니.”
“저는…”

사무엘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는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중얼거렸다.

“그러면 우리를 축복해주렴. 자, 이제 제사장님께 돌아가야지.”

사무엘은 몸을 돌려 제사장 엘리에게로 뛰어갔다. 익숙치 않은 새 겉옷이 팔랑거렸으나, 조금도 신나지 않았다.

다시 언덕에서, 엘리는 사무엘이 풀 죽은 얼굴로 터벅터벅 제게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차분한 아이가 제 어머니가 오는 날만은 아이답기 그지없다고, 엘리는 그리 생각하며 사무엘에게 물었다.

“네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셨더냐?”

사무엘은 짧게 대답했다.

“예.”

제사장은 조금 마음이 따끔해졌다. 한나에게 자손을 내려달라 기도한 것이 저였기에.

“서운하더냐?”
“아뇨. 당신께서 어머니에게 축복을 내려주셨다면 좋은 일이잖아요?”
“허나 네 표정은 좋지 않아 보이는데. 야속한 것이 정말 없느냐? 넌 이곳, 실로 엘로힘의 집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데 네 남동생은 그렇지 않으니.”

사무엘이 대꾸했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자식을 주님께 바쳤기에 아이가 하나도 없었어요. 새로 아이들이 생긴다면 좋은 일인 거예요. 저에게도 동생들이 생기는 거고, 그건 싫지 않아요. 단지…”

이번에도 엘리는 아이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알았다.
사무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새 옷을 꼭 끌어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매해 세마포 에봇을 주신 이유를 알았어요. 어머니가, 제가 제사장이 되길 원하시나 봐요.”

한나의 그 태도는 좋게 말하면 계획, 대담하게 말하자면 야망일 터였다. 젖만 겨우 뗀 제 딸을 신전에 바친 인간답다고 엘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 정도로 이성이 흐려진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대제사장이 될 것이야.”

엘리는 그의 아들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원래 장자가 대를 이어야 할 대제사장직이었으나 그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아비인 그가 망쳐놓았다. 사랑이 지나쳐 아이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하도록 놔두었다. 그리하여 진노한 주께서 그로부터 총기를 거둬가셨으나, 이 정도는 엘리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그도 원치 않는가. 한나도 원했다. 그와 아이의 주인, 이레 만에 세상을 지은 분께서도 원하실 터였다. 사무엘이 대제사장이 되기를, 모두가 원했다.

엘리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반드시 그리 될 게다.”

제사장 엘리의 최후의 예언쯤 되지 않겠냐고, 엘리는 그리 생각하며 아이를 향해 장난스레 웃었다.
그날 밤, 사무엘은 여느 때와 같이 언약궤가 있는 엘로힘의 성전 안에 누웠다.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진 언약궤 위엔 순금 판을 덧씌웠고, 그 순금 판 양쪽엔 날개 달린 천사 조각상 한 쌍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성전을 지키는 일곱 개의 횃불은 언약궤의 뚜껑, 순금 판이 녹아 흘러내릴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아름다움에 한층 빛을 더했다. 사무엘은 태어나 이제껏 이보다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날름대는 화염을 아무리 보아도 시들해지지 않듯이, 언약궤 또한 언제나 고상하고 거룩했다.

사무엘은 남들과 구분된 아이답게 진정 아름다운 것은 언약궤의 겉이 아니라 속에 있단 것을 알았다. 언약궤 안에는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의 살구 싹이 돋은 지팡이, 만나가 담긴 항아리 하나, 그리고 언약, 즉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비가 보관되어 있었다. 모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떠돌 때 엘로힘께서 내리신 보물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 사무엘이 떠올린 것은 엘로힘의 말씀도, 엘로힘이 내린 보물들도 아니었다.내가 어떤 고초를 겪어왔는지 아느냐고 묻던 한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는 반드시 제사장이 될 것이라 말하던 엘리의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람의 얼굴, 그것이 사무엘의 조그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 한나는 이제 아들도 낳았고 또 다른 아이도 가졌다. 그런데 왜 내게 그런 표정을 짓고 그런 말을 하였지?
제사장이자 스승, 엘리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좀 더 알 것 같았다. 엘리는 슬퍼하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제 운명에 대해, 홉니와 비느하스가 맞이할 최후에 대해. 그러나 동시에 내게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지.
한나의 죄책감 어린 항변. 엘리의 슬픔 어린 축복. 사무엘은 아직 그 둘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저 기억으로 간직할 뿐이었다.

사무엘은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낮의 두 사람을 대할 때 느꼈던 감정을 몰아내려 애썼다. 한나를 보고 엘리를 볼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의 이름을 아직 사무엘은 몰랐다. 그러나 삿된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때였다.
사무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어온 것처럼 친숙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엘리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무엘은 일어났다. 그리곤 달렸다.


사무엘의 경우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에 의해 나실인으로 살 것이 정해졌으나, 기본적으로 나실인은 본인이 서원을 한다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될 수 있었다. 나실인으로 살겠다 정한 기간에는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규칙을 지켜야 했다.

하나, 머리카락, 남자라면 수염 또한 잘라서는 안 된다.
둘, 술과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셋, 부모 형제가 죽었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삼손은 이 셋 모두를 어기는 자였다.
삼손이 실로 엘로힘의 집을 찾았을 때, 사무엘은 어느덧 성인의 나이였고, 사사, 즉 판관이자 대제사장인 엘리 아래에서 제사장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사무엘은 저에게 걸어오는 사내를 보고 단번에 삼손임을 알았다. 단지 예언자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체 나실인이 아닌 어느 사내가 저렇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산단 말인가. 그리고 사무엘이 아는 한, 자신을 제외한 가장 이름난 나실인은 삼손이었다.
그러나 삼손은 사무엘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제사장이 계시는가?”

성전에서 일하는 여느 여자로 생각한 건지, 삼손은 사무엘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딱히 노엽진 않았다. 실로 성읍 인근 사람들이라면야 사무엘이 누군지 다 알았으나, 그녀가 알기로 삼손은 소라 땅 태생이었다. 사무엘이 누군지 모를 수도 있을 터였다.

“그대가 삼손입니까? 여간한 일이면 제게 직접 말씀하시지요.”

그제야 삼손은 사무엘에게 눈길을 주었다.

“꼬마가 눈썰미는 제법이군. 머리카락을 보고 알아보았나?”

사무엘은 조금 노여워졌다.

“꼬마가 아닙니다. 머리카락으로 알아본 것은 맞습니다만.”

삼손이 피식 웃었다.

“고작해야 갓 성년이 된 나이로 보이는데. 남자 옷을 입은 데다 몸도 비쩍 마르고 머리 긴 것 외엔 소년 같은 것이, 여자다운 데라곤 조금도 없구만. 좋아, 꼬마 아닌 아가씨. 다 큰 처녀가 머리카락은 왜 가리지 않았나? 그 또한 꼬마라고 불릴만한 점이 아니냔 말이야.”

사무엘이 삼손을 노려보았다.

“내가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그제야 깨달은 듯 했다.

“나실인인가? 그렇다면…”

삼손이 한 발짝, 다시 한 발짝 다가와 사무엘을 거의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내려다보았다. 그 기세에 사무엘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사무엘도 작은 키가 아니었건만, 가까이에서 본 삼손은 사무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이제껏 사무엘이 본 남자 중 가장 거칠게 생긴 자였다. 뚜렷한 선으로 그려진 이목구비 중 만사 귀찮다는 듯한 나른한 눈매가 제일 먼저 사무엘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무엘은 경악했다. 턱에 대충 깎은 건지 깎였다가 다시 자란 건지, 짤막한 수염이 삐죽하게 돋아있었던 것이다.

“너는 사무엘이겠군?”
“당신, 수염을 깎았군요?!”

사무엘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삼손은 골똘한 낯으로 사무엘을 관찰했다.

“사무엘이라면, 나랑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을 텐데. 물론 열 손가락은 넘기겠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꼬…댁은 너무 어려 보이는데?”
“그게 중요해요? 당신, 나실인인데 수염을 깎는 게 어디 있어!”

삼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사무엘의 코앞까지 제 얼굴을 가져갔다. 놀란 사무엘이 뒷걸음질을 치려 할 때, 신 한 짝이 벗겨졌고, 사무엘은…

“괜찮아?”

그대로 나자빠지진 않았다. 삼손이 사무엘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사무엘은 황급히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뜨거운 손바닥에 잡혔던 감촉, 그리고 악력이 남긴 흔적이 손목에 남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지만, 삼손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손목에 스며든 홧홧함이 뺨이며 이마까지 살갗을 타고 오르는 것 같았다.

잠시 마주쳤던 두 눈에 건방지게도 짓궂음이 담겨 있던 것이 당황스러웠다. 사무엘은 다른 백성들과 구분된 나실인이었고, 제사장이었다. 신의 음성을 들은 자였다. 그러나 삼손 또한 신의 음성을 들은 자였고, 그 점이 사무엘을 혼란케 했다. 성스럽고 단정해야 할 자가 어찌 이리 무도하단 말인가.
삼손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너무 어리구만. 게다가 남자 구경도 한 번 못 해본 모양이고. 혼기가 찬 나이일 텐데, 결혼은 안 하나?”

다시 사무엘에게 다가가려던 삼손은 좀전의 일을 떠올리곤 발걸음을 멈췄다.

“아, 추파 거는 것은 아니야. 내 취향은 화려한 이방인 여자라서. 나보다 연상이면 더 좋고. 게다가 난 이미…”
“당신 여자 취향 물은 적 없어요.”

사무엘이 잡혔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문지르며 대꾸했다.

“대제사장께 가는 길이라면,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제법 껑충한 키로 앞장서 걸어가는 사무엘을 따라가며 삼손은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따라 제가 말이 많다 느껴진 것이다.

사무엘의 안내로 대제사장 엘리를 마주한 삼손은 상대가 그 주인께 버림받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대제사장의 의복은 영광과 아름다움, 거룩을 상징했다. 금패, 열두 개의 보석, 우림과 둠밈, 석류와 금방울을 간직한 대제사장의 세마포 에봇은 여전히 성스러워 보였으나, 삼손은 옷 너머 인간의 가죽 내면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자였다. 그는 엘리가 타락했노라고 단정했다.

단지 엘리의 비만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영적 감수성을 잃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엘리는 어느새 너무나도 ‘인간’이 되어있었다. 그가 진실로 엘로힘께 사랑받고 또 엘로힘을 사랑하는 이였다면, 엘로힘께 죄를 지은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단칼에 베었으리라. 아브라함이 엘로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듯이, 엘리도 그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엘리는 그러지 않았다.
단적으로, 엘로힘에 대한 사랑보다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이 더 큰 것이다.
삼손은 불손한 연민을 느끼며 엘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엘리는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단 지파 마노아의 아들 삼손, 오랜만이군. 그대가 이방인 여자와 어울린단 이야기를 들었네. 사실인가? 나실인으로선 해선 안 되는 일 아닌가.”

삼손이 피식 웃었다.

“당신이 간수 해야 할 것은 내 아랫도리가 아니라 당신의 두 아들의 그것일 거요.”
“감히.”

분노한 것은 엘리가 아니었다.

“당신이 온 것은 이교도들로부터 언약궤를 어찌 지킬지 대제사장님과 의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대제사장이자 사사를 겸하시는 분께서 죄를 묻는다면, 그리고 그 죄가 진실로 당신이 저지른 죄라면 당신은 그저 시인하고 뉘우치면 돼.”

사무엘이 삼손의 코앞까지 다가가 쏘아붙였다.

“조용히, 판결을 기다리란 말이야.”

삼손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논하러 왔는지는 어찌 알았지? 대제사장께서 알려주셨나. 제사장께서 충직한 것이, 차기 대제사장 감으로 손색이 없겠어. 그러나 나 또한 사사, 누군가 고발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재판을 당하는 것은 불쾌하다고밖에 할 수 없겠군.”

삼손은 이제 엘리를 보았다.

“당신의 아들들이 지은 죄 때문에 제사장들, 사사들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사사 아닌 왕을 원한다. 이교도들처럼.”
“당신도 사사라고 했지. 나실인이 지켜야 할 것들이라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다 어기고 있다던데, 백성들이 왕을 원하는 데에 마치 사사로서의 당신의 책임은 전혀 없단 것처럼 말하는군?”
“그만, 사무엘.”

엘리가 다시 기침을 했다. 그러곤 탁해진 눈으로 삼손, 그리고 사무엘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삼손은 사무엘을 보는 엘리의 눈에서 슬픔과 애틋함, 절망을 읽어냈다. 그는 깨달았다. 엘리의 끝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삼손은 한동안 실로 성읍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에게 삼손을 그가 지낼 처소로 데려다주라고 명한 후, 사무엘은 엘리가 머무는 곳으로 찾아갔다. 엘리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엘리가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말이 옳다. 백성들은 나와 내 아들들의 죄 때문에 왕을 원해. 머지않아 최악의 사태가 터질 것이고, 우리 가문엔 더는 노인으로 늙을 만큼 장수할 이가 남지 않으리라.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워하였으나 결국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 그래서 이제 나는…”
“대제사장님.”

엘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무엘, 네가 걱정되는구나. 마지막 대제사장, 마지막 사사가 될 아이야. 얼마나 많은 슬픔, 얼마나 많은 절망을 맛보겠느냐.”

한탄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너는 어떤 시련을 겪어도 굳건할 테지. 그리하여 너는 나를, 너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슬프게 만들 것이다.”

젊고 단단한 손이 노인의 살찐 손을 붙들었다. 사무엘은 잠시 그렇게 엘리의 곁에 머물렀다.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스승, 나의 대제사장.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다.
성전을 나온 사무엘은 처소로 향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지치고 싸늘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엿듣고 뒤를 밟기까지. 당신, 본인이 제사장 그리고 사사라는 자각이 있긴 합니까.”

삼손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사는 장군이기도 하지 않나. 잘 엿듣는 것도 뒤를 잘 밟는 것도 군인의 자질이지. 잘 들키는 건 아니다만.”
“그래서, 만족할 만한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만족 못 해. 나는 슬픈 얘길 들으면 마음이 안 좋거든.”

사무엘이 코웃음을 쳤다. 삼손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정말인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개자식이지만, 나는 엘리가 그런 놈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만은 이해가 돼.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도 대체로 아주…”

사무엘이 이마를 짚었다.

“당신 취향 물은 적 없다고 했지.”
“주께서 참 잔인하단 생각을 한 적은 없나?”
“…뭐라고요?”

삼손이 물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주님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나? 네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내 어머니와 비슷한 경우였더군.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지.”
“그러나 주께서 그 여인들에게 아이를 낳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아이를 낳게 해주신 것이 주님이라는 거지, 맞는 말이야. 그러나 그 여인들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것도 주님이셨다. 엘리의 경우, 엘리의 타락한 아들들을 벌하시겠다 하신 것도 주님이었으나 엘리의 아들을 타락하게 놔두신 것도 주님이시지.”

사무엘이 이를 바득 갈았다.

“당신 어머니와 내 어머니가 오랫동안 아일 낳지 못한 것도, 엘리의 아들들이 타락한 것도 주님의 탓이 아닙니다. 주님은 전지전능하시나 우리에게 의지를 주셨지요. 아담의 아내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녀의 의지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죄를 짓고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죄인 또한 주님의 섭리, 즉 계획 속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 계획이란 말이지…”

삼손이 서글픈 낯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꼴을 보고 있는 사무엘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방금까지 오만한 낯으로 신나게 신성모독을 저지르던 남자가 지금은 채찍질 당한 노새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사무엘은 저도 모르게 삼손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가 퍼득 정신을 차리곤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슬프지 아니하냔 말이다.”


삼손은 실로 성읍에 꽤 머물렀다. 언약궤를 지켜야 한다느니, 엘리의 말벗을 해줘야 한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이유를 대면서. 언약궤는 사무엘이 잘 지키고 있었고, 엘리의 말벗 또한 시간 날 때 사무엘이 해주고 있었다. 즉, 삼손은 실로에서 내내 사무엘만 쫓아다니고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높을 만큼 키가 큰 데다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남성이 제사장 사무엘을 쫓아다니는 것은 어디에서나 눈길을 끌었다.
참다못한 사무엘이 삼손을 쫓아내려 했다.

“당신, 블레셋에서도 이렇게 대낮부터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닙니까?”

삼손이 정색했다.

“그 무슨 말씀인지. 제사장이 여자인가?”
“그러면 이런 선물은 왜 한 건가요? 필요 없으니 도로 갖고 가세요.”

사무엘은 손바닥만한 꾸러미 하나를 던졌다. 챙, 하고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삼손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충격에 풀어진 꾸러미에서 튀어나온 것은 철제 빗이었다.

“당신 가지라고 준 건데.”
“저는 필요 없어요.”
“부담 갖지 말래도. 쓰던 거니까?”
“쓰던 걸 왜 나한테 주는 건데!”

삼손은 말없이 빗을 주워 사무엘에게 내밀었다. 잠시 그대로 서서 버티고 있던 사무엘은 결국 한숨을 쉬며 빗을 받아들었다. 그제야 삼손이 만족한 듯이 웃었고, 사무엘은 어쩔 수 없이 그 웃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나실인이잖나. 머리가 길어서 수시로 빗어줘야 한다고. 당신 그 까치 밭 머리가 계속 신경이 쓰였거든.”
사무엘이 투덜거렸다.

“까치 밭인건 당신도 마찬가지…”
“그 빗, 블레셋 철(鐵)이거든. 오래 쓸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더더욱 쓸 수 없어요.”

삼손이 놀렸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이집트에서 만든 세마포로 된 것이 아닌가? 이교도의 것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그 옷도…”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간직해줬으면 해. 내일 내가 떠나더라도.”

사무엘의 움직임이 멈췄다.

“놀랐나?”
“아뇨, 슬슬 그럴 때가 됐다 싶네요. 시덥잖은 이유로 머무르고 있던 당신이니까.”
“슬픈가?”

사무엘은 고개를 숙였다. 슬프지 않다. 슬플 리가 없었다. 고작 이레 동안 얼굴을 본 사이 아닌가. 절대 슬픈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 얼굴을 이 남자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다.
억센 손이 사무엘의 턱을 쥐고 끌어당겼다. 놀란 사무엘의 눈이 커졌다. 눈앞에 머리가 길고 짤막하게 수염을 기른, 뚜렷한 선의 남자가 검은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사무엘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친숙한 표정이었다. 한나, 그리고 엘리에게서 보았던 감정들. 슬픔, 절망, 분노…연민.
삿되고 삿된 것들. 사무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남자의 손목을 잡은 채 천천히 제 얼굴에서 떼어냈다. 힘이라면 이스라엘, 아니 온 세상에서 가장 강할 이가 사무엘에게 손목을 잡힌 채 놀라울 정도로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삼손이 웃었다.

“삿되지 않아.”
“…삿된 것입니다.”
“주께선 자신의 형상을 따 우리를 지으셨다지. 그의 사랑이 삿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랑도 그럴 터.”

사무엘은 참을 수 없었다.

“대체 뭘 믿고 그럽니까. 뭘 믿고 그렇게 오만방자하게 망령된 말을 하지요?”

별안간 번쩍 발이 떠올랐다. 삼손이 사무엘의 양팔 아래에 손을 넣고 들어 올린 것이다. 뭐라 할 새도 없이 삼손의 얼굴이 다가왔고, 사무엘은 차마 그를 마주할 수 없어 눈을 감았다. 거칠지만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담담하게 사무엘의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사랑받고 있거든.”
“…내려놓지 못해요?! 이 망할 인간이…!”

삼손이 사무엘을 내려주곤 껄껄 웃었다.

사무엘이 씩씩댔다.

“언젠가 주의 사랑이 당신을 떠날 날이 올 겁니다. 당신은 오만하고 건방지니까.”
“그건 예언인가? 아마 들어맞을 거란 예감이 드는데. 아무튼, 지금은 아니란 거지.”

사무엘은 그렁한 눈으로 삼손을 노려보았다. 한없이 다정한 얼굴을 한, 눈앞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잘 가요.”
“고마워. 아, 방금 그건…”

삼손이 검지로 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마. 제사장과 사사의 이름으로 축복한 거니까.”

그가 두꺼운 손으로 사무엘의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너는 마지막 사사가 되겠지. 그러나 가장 사랑받는 사사가 되기를. 그런 마음을 담아 널 축복했어. 내 몫, 그리고 이제는 은총이 떠나간 엘리의 몫까지 담아.”

어느새 실로 성읍의 하늘은 어둑했다. 삼손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갔고, 사무엘은 그런 삼손의 뒷모습을 누그러진 눈으로 지켜보았다. 가는구나 싶었다. 이레 동안 저를 무척이나 휘젓고 간 사내가.
작은 꾸러미를 풀자 블레셋 철제 빗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이 반짝 빛났다. 자세히 보니 빗 사이에 끼워진 머리카락 몇 올이었다.

그 남자.

사무엘이 빗을 꽉 움켜쥐자 뾰족한 빗 끝이 손바닥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기도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웃는 남자의 얼굴을 치워달라고 빌었다.
삿된 것을 몰아내 주시옵소서.
신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이교도 여자를 사랑하였다가 배반당한 삼손이 노예가 되어 살아생전보다 더 많은 이교도를 죽이며 죽은 때에, 이교도들이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고 언약궤를 빼앗아 간 때에, 이로 인한 충격으로 엘리가 사망한 그때, 사무엘은 사사가 되었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제 백성들을 돌보느라 바쁜 와중, 사무엘은 한나와 엘리의 얼굴, 그리고 삼손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유가 없으니 떠오르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라, 사무엘은 감히 엘로힘을 원망했다. 자식을 잃은 욥처럼, 자식을 낳지 못한 한나처럼 저 또한 같은 감정으로 고통받고 있단 것을 사무엘 자신은 몰랐다. 한나, 엘리, 그리고 삼손의 절망과 슬픔이 파도처럼 사무엘을 덮쳤다. 이따금 사무엘은 울고 또 울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눈물이 오로지 언약궤를 빼앗긴 탓에 흐르는 것인 줄만 알았다.
어떤 밤, 사무엘은 더는 엘리도 언약궤도 없는 성전으로 올랐다. 일곱 개의 횃불만이 여전히 성전을 밝히고 있었다. 사무엘은 언약궤의 발치, 어린 시절의 제가 누워 잠들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좁고 불편해 보였다. 처음으로 엘로힘의 부름을 받은 장소였다.

사무엘은 성전을 나갔다. 비탈길을 내려가다 우뚝 멈춰섰다. 성전에도 사람이, 언덕 아래에도 사람이 있을 터였다. 중턱인 이곳에서만이 사무엘은 달빛과 함께 홀로였다.
사무엘은 길 가장자리로 다가가, 잔풀이 자라난 흙을 손으로 파내고 품에서 빗을 꺼냈다. 천에 싸여있던 빗엔 여전히 사무엘의 것 아닌 머리카락 몇 올이 꿰어져 있었다. 한 번도 쓴 적 없는 물건이었다.
사무엘은 제가 파낸 작은 구덩이에 빗을 넣고 흙으로 덮은 다음, 조그마한 돌무더기를 얹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입속말로, 다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 빌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베냐민 사람이며, 내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 가장 미약합니다. 어찌하여 저입니까?”

근심 어린 얼굴로 그리 말했던 사내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뺨에 입을 맞췄다. 아, 비로소 삼손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저보다 머리 둘은 높을 정도로 키가 크고 잘생긴 젊은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늙은 사무엘의 마음을 무엇보다도 당황케 한 것은 상대가 너무나도 풀이 죽어 있단 점이었다.

“그분께서 너를 선택하였으니까.”

그러곤 사무엘은 웃어 보였다. 사내의 귀가 새빨개졌다.

“너는 변하여 새사람이 될 것이야. 지금과는 다른, 지금의 너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울이 대꾸했다.

“정말, 지금은 상상이 안 됩니다. 전 지금은 고작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암나귀들이나 걱정하는 한심한 종자인 것을요.”
“암나귀들은 더는 네 아버지를 근심케 하지 않는다. 네 아버지가 지금 걱정하는 것은 너야.”

사울은 근심스러운 낯으로 사무엘을 내려다보았다. 사무엘이 제 뺨에 입을 맞출 땐 눈을 감느라 보지 못 했으나, 가까이에서 본 사무엘은 늙고 지쳐 보였고,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기회를 따라 행하면 된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니까.”

사울이 무심코 내뱉었다.

“사사께서도 저와 함께하십니까?”

사무엘은 사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알아볼 수 있는 감정이 거기에 있었다. 삿되고 어리석은, 수십 년을 애썼으나 도저히 떨쳐낼 수 없던.

사무엘은 힘주어 천천히 말했다.

“왕이여, 그대가 주와 함께 하는 한 나도 그대와 함께하리라.”

그제야 사울의 얼굴에서 근심이 한 꺼풀 날아갔다. 웃는 낯으로 제 하인과 멀어지는, 전도유망한 미래가 약속된 남자를 보며 사무엘은 지친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자유일 터. 사사의 시대는 저물었다. 만백성이 원한 바 있으니, 그리고 주께서 허락한 바 있으니, 바야흐로 왕이 다스리는 시대였다.
그러니 이제 사무엘은 무거운 책임을 벗고 홀가분해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늙은 심장은 더 이상의 삿됨은 견뎌내기 힘들었으니까.
미래의 왕과 하인을 배웅한 성읍 끝자락에서, 사무엘은 감은 눈꺼풀에 내리쬐는 햇볕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의 소임, 자신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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