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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재 I love you

2013.07.31 22:1407.31

한 명의 배우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팬이라 불리고, 어떤 이들은 빠순이라 불리며, 어떤 이들은 광신도라고 불린다. 뒤로 갈수록 비난과 조롱의 뜻이 짙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광신도라는 말이 처음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다. 미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누군가에게 몰두한다는 것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있기는 한 걸까. 나는, 물아일체니 천인합일이니, 자연이나 사물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의 경계선마저 잃어버릴 것 같은 말들을 태연히 하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미친 듯이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는 비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기꺼이 내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발을 닦고, 그녀의 가장 더러운 일을 도맡는 종복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한 번인가, 내 이런 생각을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아이에게 털어놓았다가, 경멸에 가까운 반응을 되돌려받은 일이 있었다. 넌 미쳤어. 아니면 아직 철이 안 들었거나. 또래보다 조숙한 척 하던 그 아이는 불쾌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 범죄에 가깝잖아. 그 아이는 나를 경멸했겠지만, 나는 그 아이를 경멸했다. 어차피 우리들따위, 대량생산품일 뿐이잖아. 나는, 그 아이를 경멸하는 나 자신마저 조롱하며 중얼거렸다. 공장에서 툭툭 찍어내는 플라스틱 필통처럼, 매끈하고 날렵하게 생겼어도 가볍고 속은 텅 비어 있는걸.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들 침착하고 태연한 척 해 봤자, 그거 알고 있어? 너희들 모두 다 그냥 대량생산품이야. 하하호호 웃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귀를 잡아당기며 말해주고 싶었다. 너희들 모두, 공장에서 똑같이 생긴 싸구려 장난감들을 찍어내듯이, 꼭 그렇게 생긴 아기공장에서 태어난 애들이야. 어른들은 그걸 진화자궁이라고 부르겠지만. 해가 갈수록 인간은 더 발전할 것이고, 세대를 거쳐 갈수록 더 현명해질 것이라는 뻔한 소리들을 하겠지만. 우리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우리 엄마 아빠와, 그보다 더 이상하게 생긴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모가 자식을 질투하고 먼저 태어난 사람이 늦게 태어난 사람을 증오하는 이건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얼음틀에 물을 부어 냉장고에 얼리듯이 만들어진 아이들과, 진화자궁의 첫 세대라며 그렇게 태어난 것에 한없는 자부심을 품고 있는 지금의 중년들과, 길어진 여생을 저주하며 젊은 세대를 증오하는 늙은이들이 싫었다. 너무 많은 시대와 세월과 세대가, 한 순간에 아코디언처럼 겹겹이 접혀 조금만 움직여도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작은 눈에 어깨가 잔뜩 구부러진 초라한 노인이 자신의 증손자를 목졸라 살해했다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처음부터 이건 예견되었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사람과 20세기 후반의 사람이 한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진화 2세대였던 그 노인의 손자 부부는 대학에 다니던 중 결혼을 했고, 졸업하자마자 진화자궁 사용 허가를 받았다. 작게는 정신나간 노인이 갓 태어난 증손자를 목졸라 죽인 친족살인이고, 좀 더 크게 보면 3세대의 프로토타입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한 일이었다. 언론사마다 이에 대해 논평을 내놓았지만,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이나 심지어는 중세 시대 사람이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아기와 한 집에서 살 것을 요구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을 테니까. 축적된 지식이나 문화 뿐이 아니라, 골격 자체도 달라지고 있는 마당에. 나는, 어디로 보아도 공존이 불가능할 것 같은 세대들이 어떻게 잘못 꼬인 시간축 탓에 서로 만난 듯한 이 상황이야말로, 예견된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슈슬리사들이 인간의 진보에 공연히 힘을 쏟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군가는 이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만 했을거다. 나는 방구석에서 웅크린 채 끝도 없이 옛날 영화들을 보았다. 지난 세기의 영화들을, 백년도 더 된 영상물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내 숭배하는 이에 대해서도 찾아보았다. 그녀는 직접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닌 듯 했다. 드물게 실린, 그 흔한 사진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인터뷰에서 그녀는 아주 침착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거름종이로 걸러내기 전의, 날것의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나 말고도 그녀를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모두가 정신나간 광신도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잘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난 여자. 어쩌면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여자.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닿고 싶었다.

그런 숭배와 갈망과 부질없는 소망이 뒤엉킨 채로,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다작으로 유명한 케빈 베이컨이라는 배우를 중심으로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들이 그와 몇 단계를 거치면 아는 사이인지, 즉 한 영화에 출연했는지 파악하는 게임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것으로 역시 20세기 후반에 공동연구를 많이 하기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어느 수학자를 중심으로 수학자들도 같은 놀이를 했다고 해 보았는데, 미국 수학회에 등재된 논문 중 99%가 여덟 단계만 거치면 그에게 연결될 수 있었다는 통계가 있었다. 애초에 이 이야기는 1969, 미국의 심리학자인 트래버스와 밀그램이 모든 사람은 6단계만 거치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이론을 발표한 데서 시작되긴 했는데, 함께 영화에 출연하거나 함께 논문을 쓰는 정도의 사이도 아니고, 그저 아는 사이라면 확실히 그럴 수도 있을 법 했다. 이 이론은 21세기 초반에, 당시 전세계를 연결하던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메신저 이용자들을 연구한 결과 사실로 입증되었다. 임의의 두 사용자를 선택했을 때, 평균 6.6단계만 거치면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세계가 대상인데도 그런데, 하물며 한 도시라면. 그것도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것도, 그녀가 타는 배가 운 좋게 이 나라에 모항을 두고 있다면.

어머, 너 운 좋네. 그 사람이라면 이쪽 맞을 걸? 전에도 여자와 사귀는 걸 봤으니까.”

알바를 하던 카페에서, 나는 단골 손님인 군 장교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아웃팅 아니에요?”

아웃팅이라고 하기도 그런게...... 그녀는 딱히 그런 것을 감추지 않거든. 아마 그런 것도 있을 거야. 예전부터 그녀를 쫓아다니면서 구세주랍시고 난리치는 광신자들이 있었는데, 그녀가 대놓고 난 이반이요, 하고 다니니까 좀 떨어져 나갔거든. 처음에는 그걸 보고 코스이반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그녀도 그 장교나 나와 비슷한 취향이라고. 내가 그녀의 애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연애하긴 힘든 상대지. . 사람 잘 안 사귀려고 하거든.”

연애를 싫어해요?”

연애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사람하고 잘 어울리질 않아서. 예전에 연애할 때는 좀 괜찮았는데, 요즘은 그도 아니고.”

갑자기 진입장벽이 높아진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한다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짐을 챙겼다. 남들은 대학에 갈 나이가 되면 다들 독립을 준비한다는 마당에,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이 고장에서 몇 대를 살아왔다는 내 가족들은 내가 집을 나가겠다고 하자 다들 기겁을 했다. 여자애는 밖으로 내돌리면 사고가 난다는 게 이유였다. 세상에, 하늘에 슈슬리사의 우주선들이 떠오르고도 5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이게 무슨 헛소리야.

어디 밖에 숨겨둔 놈팽이가 있어서, 그래서 나가는 게 아니냐! 당장 그놈을 데리고 와!”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면, 계집아이가 갑자기 집을 나가겠다는데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있어!”

그렇다니까. 슈슬리사가 나타나건 뭐가 어떻게 되건, 인간이란 변하질 않는다. 지금이 20세기 후반이기만 했어도, 할아버지가 이러시는 것을 이해라도 해 드렸지. 지금은 이해받지도 못할 그런 논리로 사람에게 호통부터 치시는, 한없이 시대착오적인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다가 나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사로 대답했다.

밖에 숨겨둔 놈팽이 따위 없어요. 난 여자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자포자기한 채 커밍아웃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못한데. 그렇게 생각할 찰나, 재떨이가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고얀 것, 어디서 몹쓸 물이 들어서!”

피하긴 했지만, 제대로 맞았으면 아마도 경찰을 부를 만한 일이 일어났을 거다. 세상에, UN과 슈슬리사의 권고로 동성결혼이 법제화가 된 게 대체 언제인데. 그래도 아직도 이런 반응이라니 이쯤 되면 병이다, .

계집아이가 공부한다고 괜히 바람이나 들어서는, 어디서 이런 헛소리를 지껄이는게야! 당장 학교 그만두고, 선 자리 알아봐 올 테니 결혼부터 해!”

“......아까는 밖에 놈팽이가 있느냐고 난리를 치더니,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고요? , 정말. 웃기지도 않아서.”

이것이!”

가방을 집어들었다. 할아버지와 맞서다 보니, 엄마 아빠의 표정은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충격을 받으신 것은 분명했지만, 내가 집을 나가는 것과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 중 어느 쪽에 더 충격을 받으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라도, 한없이 촌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한없이.

집을 나왔다고 해도, 알바비가 나오려면 며칠은 더 있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던 과 동기의 자취방에 짐을 잠시 맡겨놓은 채 꼬박꼬박 알바만 하러 갔다. 수업에 나가지 않은 지는 오래 되었다. 과 동기는 왜 수업에 나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 애에게는 일상 자체가 바빴고, 사실은 경계하면서도 한 주 정도 같은 과 아이가 짐을 맡겨놓고 싱크대 앞에서 잠만 자겠다고 부탁하는 것을 매정하게 거절할 만한 아이도 아니었다. 그 애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나를 공기 취급하는 것이 전부였을 거다. 우리는 모두, 서툴렀으니까.

인도나 발리에라도 간 줄 알았네.”

그렇게 월급을 챙겨가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언니는 내가 알바하는 가게에 찾아와서는,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낄낄거렸다. 전에 집에다가 어디서 아르바이트 한다고 이야기는 했는데, 귀담아 들은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겠지. 그나마 언니가 여길 기억하고 찾아온 것도, 자기가 친구들과 가면 공짜 커피를 마시게 해달라고 헛소리를 해댄 덕분일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제일 싼 커피라면 모를까, 언니가 좋아하는 크림 듬뿍 얹고 토핑도 얹은 커피라면 한 잔이 내 한 시간 알바비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정말.

엄마가 뭐라는 줄 알아?”

뭐라시는데?”

슈슬리사가 분명히 애들을 진화시킨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저런 게 나왔을까.”

“......재료가 글렀나보지.”

그 이야기 들으셨다간 정말로 너 잡으러 온다.”

못 잡을 걸.”

나한테도 이렇게 잡히면서 뭘,”

나는, 여기 있는 것도 모레까지라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여기 오면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면, 한참은 더 헛걸음을 칠 테니까.

커피나 줘.”

나한테 커피 맡겨놨어?”

, 전에 나 오면 공짜로 준다고 했잖아. 안 그래?”

너 혼자 우긴 거겠지.”

그래서 줄 거야, 안 줄 거야? 안 주면 엄마한테 여기 있다고 그냥 꼰질러버린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알바는 네 시까지였고, 나는 주인 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10분 먼저 카운터에서 내려왔다. 제일 많이 나가는 커피 두 잔, 내 한 시간 반 어치 시급에 상당하는 음료를 들고, 언니가 기다리는 테이블에 다가가 한없이 불친절하게 내려놓았다. 적어도 그 중 한잔에는 적개심을 반쯤 담아서.

먹고 꺼져.”

원시 종교 마니아에다가, 게다가 레즈비언이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잘도 마이너하게 섞어놓았다 싶어서.”

“......마이너하지 않아서 좋겠네, 누구 씨는.”

건너편에 앉았다. 언니는 뭐가 기분좋은지 아주 얄미울 정도로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뭐야.”

좋아서,”

뭐가.”

성적소수자. 난 전부터 성적소수자에 관심이 많았거든? 성인 인구의 10%라는데 내 주변은 물론이고 내 친구들 주변에도 별로 없었단 말야.”

이건 대체 무슨 헛소리야.

전에 레즈비언인 동기가 자기한테 반할까봐 걱정이라고 도망다니지 않았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뭐가 다른데?”

넌 나한테 반하지 않잖아?”

어이쿠.

가족중에 그런 마이너한 사람이 하나 있는 건, 나중에 애들 교육상도 좋지. 봐라, 세상에는 너희 이모처럼 저렇게 남들과 다른 사람도 있단다, 하고서......”

그러니까.”

아주 이쯤되면, 지랄도 가지가지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체, 저 작고 어여쁜 머리통 속에는 뭐가 들어있으면 저런 말이 한번의 주저도 없이 줄줄이 나오는 걸까.

내가 지금 네 악세사리냐?”

어머, 말이 심하잖아.”

나는 커피를 그대로 언니의 머리 위에 들이부었다. 언니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빈정거렸다.

대량생산품 주제에, 지랄하네.”

  

 

 

 

해고는 당했지만, 여기에는 좋은 점도 있었다.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었다면 몰라도, 해고한 이상 그때까지의 시급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으면 위법이었다. 주인 언니는 제대로 시급을 계산해 주었다. 마지막 그 두 잔의 커피는 서비스라고 했다. 돈을 받자마자, 나는 바로 과 동기의 방에서 짐을 빼고 진해로 떠났다.

남의 인생을, 부끄러움으로 보는 것도 싫었지만 악세사리 하나 생긴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위선은 더 꼴사나웠다.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대체 무슨 짓이야. 무슨 생각이야. 그렇게, “, 나는 소수자를 이해합니다. 소수자는 우리의 친구죠.”하는 사람들을 보면,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법적인 차별은 없어졌어도 현실적인 차별이 절절하게 남아있던 시절, 유색인종 친구를 두는 것이 쿨하다고 생각하던 백인 중산층 이야기를 현실에서 보는 것 같아서 한없이 기분이 더러워졌다.

진해에서 나는 적당한 독신자 숙소를 얻어놓고, 군인들이 주로 찾는 카페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곳 인구의 반은 군 관계자였다. 나는 여름이 가고 짧은 겨울이 지나고 벚꽃이 휘날리도록, 그곳에 머물렀다. 수많은 배들이 항구에 들어왔다가 다시 떠나가고, 주말이면 젊은 사관생도들이 거리를 채웠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곳에서 그 누구도 아니었다. 조용히 커피를 내리거나 샌드위치를 만들고 서빙하는 알바생이 늦게 오면 서빙도 했다. 그 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자산함에 타고 있는 그 연구장교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녀가 해군에 입대하면서, 이곳 진해에 웬 희한한 종파의 교회들이 잔뜩 들어섰다는 이야기부터, 그녀가 심심풀이로 만들어냈다는 온갖 발명품에 대한 이야기까지.

, 이것저것 있었어. 예를 들면 신형 작전용 부츠. 이건 물 위를 걸어다니면서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든 건데, 정말 한 2, 3년만에 전 군에 보급이 된 거야. 사실 최근에 승진한 것도 이것 덕분이었을 거야..”

우와.”

그것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좀 있었어. , 예를 들면 이거.”

적당히 술에 취한 대위가 품에서 약 상자 같은 것을 하나 꺼냈다. 서로 색이 다른 열 개의 알약이 개별포장된 블리스터 팩을 흔들어보이며, 그녀는 빙긋 웃었다.

이거 하나면 회식 끝!”

숙취해소용인가요?”

그 반대야. 이거 한 팩이면 1개중대 100명이 마시고도 열두 병은 남을 만큼 술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 이거 봐, 보라색은 와인, 갈색은 맥주, 흰색은 보드카.”

세상에, 술집들 다 망하게 하자는 거예요?”

아니. 하지만 배 위에서도 가끔은 축하할 일이 생기거든. 그때마다 술을 들고 다니면 아까우니까. 배에 싣는 건 여튼 무게가 돈이고, 무게가 기동력에 반비례하는 건데.”

이거 꼭, 그거 같네요.”

그거?”

...... ‘바이블에 나오는 것요, 예수의 기적.”

아아,“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기도 하고.”

아아, 그런 이야기 많이 하지.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대위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엷은 금빛을 띤 올리브빛 피부가 아무래도 낯익었다. 안경을 벗자,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이것저것 정말 많이 발명하고 아이디어도 많이 내는데,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아무래도 바이블과 겹치는 것들이야.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이사나, 광신도들이 어쩌면 재림예수일지도 모른다고 쫓아다니는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지.”

당신.”

이사나 빈트 마리얌.”

평생 내가 숭배하던 사람의 이름이, 내 귓바퀴에 감겼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마술처럼, 그녀가 내 앞에 있었다. 반쯤 술에 취한 표정은 사라지고, 매서운 눈매가 드러났다.

“......학생이 내 이야기를 캐묻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거든.”

부끄러웠다. 청맹과니라는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을 떴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 십대 중반부터 늘 숭배했던 사람을 눈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안경을 쓰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에 취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사나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았다.

광신자야?”

“......”

전공이 그쪽이 아니라면야, 굳이 그 두꺼운 바이블을 챙겨 읽진 않았을 텐데.”

할아버지가 신자셨어요. 슈슬리사가 오기 전에

집에 책이 있었다.”

신화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원시 종교 마니아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학교는...... 그쪽으로 진학하진 못했지만.”

광신자가 아니라면, 왜 나를 찾은 거지?”

나는 침을 삼키고 싶었지만, 입안은 어느새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어요.”

 

 

 

 

  

그녀를 만나고, 싸구려 모텔에서 그녀와 함께 뒹구는 데 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네 시간. 나는, 내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돌아앉은 그녀의 등을 보며 겨우, 무슨 염치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입을 뗀 것이 고작이었다.

나랑 사귈래요?”

이봐, 나 이래봬도 군바리야.”

안경을 집어들며, 그녀는 대꾸했다. 이 평화로운 시기, 대체 군대라는 조직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주말마다 거리를 메우는 군인과 사관생도들 그 누구와 비교해 보아도 한없이 빈약한 것이 어디로 보아도 사람 때려잡게 생긴 구석이라고는 없는 여자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머리를 묶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아래, 초저녁의 햇살을 받은 올리브빛 같은 몸은 보기좋게 탄력이 있었지만, 딱히 꾸준히 단련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한번 바다에 나가면 몇 달은 기본으로 나다닌다. 누구와 연애를 하기에는 조건이 나빠.”

대체 이 시대에, 군대가 왜 필요한 거죠? 전쟁을 할 것도 아니잖아요. 슈슬리사가 다 통제하고 있는데.”

슈슬리사에 대해 반기를 드는 반군들도 없지 않고. 슈슬리사가 있다고 해도 국가간에 벌어지는 복잡한 사정은 많아.”

그녀는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슈슬리사는 전능한 존재가 아냐. 그들이 지구를 다스린다고 해서 분쟁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문제가 생겼을 때 제3자의 눈으로 좀 더 공정하게 판단하고 대책을 마련할 방법은 생겼지만, 그래도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 문제가 생기고 있지.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군대라는 조직 자체는 꽤 유용하니까. 탐사라든가.”

탐사라니, 고색창연하네요.”

나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가 훑고 다니던 시대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웃었다.

땅 위를 다 돌아봤다고 해도, 지구의 30%일 뿐이잖아. 좋아, 그건 그렇고.”

?”

아까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찾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네 질문은 뭐지?”

나는, 그녀를 숭배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를 두고, 사람들은 광신도라 부르며 조롱했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그녀에 대한 아주 짧은 기사와 인터뷰를 스크랩하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 온 인터넷을 뒤지고, 이사나 빈트 마리얌이라는 여자의 삶에 대한 파편들을 주워모아, 나는 그녀의 삶을 내 멋대로 재구성하고 사랑에 빠졌다. 선지자이며 예언자이자 구세주였던 남자가 태어났다는 바로 그 날에, 세 종교의 성지인 곳에서 모든 아이들이 진화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이 당연해진 그 시대에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 그것만으로도, 누군가를 숭배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충분하다고 여겼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순교하고 싶었다. 붕어빵조차 속에 팥을 가득 채우고 만들어지는 마당에, 나를 포함해서 모든 아이들이 속 빈 플라스틱 필통처럼 영혼없이 태어나는 이 시대에, 그녀라면 내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그녀라면, 영혼에 대해 내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제대로 된 질문이라면.”

신은 어디에 있는지, 구원은 어디에 있는지, 슈슬리사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들에게도 과연 영혼이 자리잡을 곳은 남아있는 것인지. 진화자궁을 빙자한 아기공장에서 태어나는 우리가, 알을 잘 낳도록 품종개량되어 부화기에서 대량으로 깨어나는 양계장 닭들과 다른 것은 대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그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과 답들을. 슈슬리사보다 열등한 인간이 슈슬리사가 이끌어주는 대로 진화를 거듭하여 우주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헛소리와, 우리는 사육당하는 가축이 아니니 그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들이 아닌,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알고 싶었다. 양계장의 닭처럼 태어난 우리와 달리 인간의 아이로 태어나, 슈슬리사의 손에서 자란 그녀라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가 대체 누구인지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냉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내가 구세주이기를 바라는 거니?”

“......”

너도 내가 이사 알 마시, 혹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바라는 거니?”

저는......”

죄값은 셀프야.”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죄를 양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고대 종교의 제의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뻔뻔하지 않아? 죄 지은 사람은 떳떳이 살고 있는데, 엉뚱한 양이 속죄양이랍시고 벌을 받는 것은. 그렇다고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한없이 비논리적인 짓이지. 그런데 그도 부족해서, 2천년 전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남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리고는, 그도 부족해서 또 멀쩡한 사람보고 구세주니 뭐니 하는 건 무슨 심리들이야. 고개를 들면 우주선이 떠 있는 시대에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으라고 말하는 거야? 정작 내가 태어났을 때는, 슈슬리사의 인공 자궁에서 사람이 태어나기 시작한지 고작 15년밖에 안 되었을 때인데도 뭔가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아이 취급을 받았는데. 그 불결한 아이에게 죄를 대속시키면 편안하게 발들 뻗고 잘 수 있는 모양이지.”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담담하게. 그냥 그리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내, 대답, 또는 질문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다가, 그녀는 옷을 꿰어입고 밖으로 나갔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를 뒤따라 달려나갔지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꿈이었을까. 이사나 빈트 마리얌, 또는 이사나 알 마시라 불리는, 내가 숭배하던 그 사람이 잠시나마 내 곁에 있었던 것은. 나는 모텔 입구에 붙어있는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때가 탄 셔츠의, 제대로 여미지 못한 옷깃 사이로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나를 온통 뒤흔들었던 그 선명한 감각들이 떠올랐다. 나는 모텔 문을 열고,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어두웠고, 별은 드물었다. 슈슬리사의 우주선들이 희미한 빛을 내며 하늘을 가렸고, 그 사이 손톱같은 달 한 조각이 걸려 있었다. 나는, 한번도 슈슬리사의 우주선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몸을 떨었다. 기실, 저 위에 올라가 본 사람조차도 거의 없을 테다. 슈슬리사가 오기 전까지 인류는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달에도 가 보았지만, 그들이 온 이후로 우리는 우주를 빼앗겨버렸다. 인간에게 아직 허락되지 않은 슈슬리사의 우주선, 그 너머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을 하늘과 우주는 이제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질문이 뭐지?”

두 달만에 다시 나타난 그녀는, 커피를 주문하다 말고 내게 물었다.

?”

뭐야, 잊어버린 거면 그냥 가고.”

아뇨!”

나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가, 카운터 안쪽의 주인 언니부터 손님들까지 모두 나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벌개진 채 놓아버렸다. 뒤쪽의 누군가가 뭐야, 레즈야?”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쩔쩔 매고 있었다. 그녀는, 태연히 안쪽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잠깐 이 아가씨랑 이야기좀 해도 괜찮을까요?”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흐렸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여름은 길었고, 걸핏하면 소나기가 쏟아졌다.

슈슬리사가 왔으면 이 날씨부터 어떻게 좀 하지 말이에요. 1년내내 봄이라든가.”

기후라는 것은 전 세계가 유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서, 바꾸고 싶어도 쉽게 바꿀 수 없는 부분일걸. 적어도 더 이상 온난화가 진행되는 것은 막은 것으로 알고 있어.”

예전에는 이렇게 심심하면 소나기가 쏟아지지 않았다고 그랬는데요.”

, 예전에 나온 소설에도 소나기 맞고 병들어 죽은 여자애가 나왔는데. 꽤 유명한 소설이라서, 한때 입시 문제에도 단골로 나왔다고 했어.”

“......무슨 방사능 물질이 함유된 비를 맞기라도 한 거예요? 산성비 정도로 죽진 않을 테고.”

원래 몸이 약한 애였다는 설정이지.”

뭐예요, 그게.”

나도 몰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 말고,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밥이나 같이 먹자.”

내 이름은 알아요? 같이 잤으면 이름 정도는 물어보라고요.”

알면 뭐해. 사귈 것도 아닌데.”

나랑 사귈래요?”

그녀가 웃었다.

됐어, 난 그냥 네 질문이 궁금해서 온 거니까.”

두 달 내내 궁금했던 거네요.”

그런 것에 의미를 두고 싶어?”

그런 거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요.”

이해가 안 간다. 대체 뭘 믿고 사귀자는 거야.”

도시락집 문을 여는 뒷모습이, 묘하게 쓸쓸했다

 

 

 

도시락 두 개에 음료수를 포장해 들고, 우리는 지난번 그 모텔의 좁은 화장대 앞에 나란히 앉아 식사부터 했다. 급식이 없던 시절에는, 다들 이런 도시락을 들고 다니면서 식사시간 전에 몰래 도시락을 까먹는것을 즐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때가 되면 사들고 돌아와서 알아서 찾아낸 적당한 공간에 구겨앉아 먹는 것이지만. 한때는 그랬다고 한다. 그녀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언젠가 소풍을 갔을 때, 자신을 맡아 길러주던 신부님 댁의 언니가 싸 주었던 도시락 이야기를 했다. 감나무와 벛꽃나무, 인천 앞바다. 어두운 진초록과 하늘거리는 엷은 분홍빛, 갓 씻어놓은 조생귤처럼 선명한 주홍빛이 어우러진, 그녀의 소녀시절을 채우던 색채를. 가장 넓은 면적을 칠하는 것은, 회색이었다. 어두운 회색, 황토빛이 얼룩진 잿빛 바닷물.

지금도 인도양 쪽을 지나다 보면, 이 새파란 바닷물이 내가 아는 바다가 맞나 싶을 때가 있어. 그 인천앞바다 똥물과 자꾸 비교가 되어서.”

그 잿빛 바다처럼 찡그리며, 그녀는 인천앞바다가 얼마나 구질구질했는지 강조했다. 마치. 무언가를 떨쳐내고 싶은 사람처럼. 나는 그녀 몫의 음료수 캔을, 휴지로 입구를 닦아서 건네주며 웃었다.

그런 말도 하네요, 똥물......”

군바리라니까. , 군인들이 얼마나 욕을 잘 하는지 모르는구나? 참고로 하는 말인데, 난 아홉 가지 말로 능수능란하게 욕을 할 수 있어.”

욕 말고, 그냥 잘 하는 건 몇 나라 말인데요?”

어디보자, 네 가지.”

우와.”

놀랄 건 아냐. 영어는 다들 배우는 거고, 어릴 때 예루살렘 쪽에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한국에 왔고. 거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맞닿아 있으니까, 아랍어를 하거든. 어릴 때 몇 년 살았던 거라서 영영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공부하니까 그래도 남들보다는 빨리 돌아오더라. 감이라는 게 있어서.”

그래도요, 대단하네요. 근데 정말, 말을 막 하실 줄은 몰랐어요.”

, 구세주로 오인받는 사람 치고는?”

그런 셈이죠. 그게 싫은 건 아니에요. 좀 뜻밖이라서 그렇지.”

구세주로 오인받는 사람 치고는 섹스도 잘 하지 않았어?”

“......괜찮긴 했죠.”

이렇게 또 따라올 만큼.”

“......그렇다고 쳐 두고요.”

먼저 씻어. 도시락은 내가 치울테니.”

 

 

 

4세기의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막달라 마리아의 위대한 의문이라는 글을 인용하며, 옆구리에서 여자를 만들어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가 보는 앞에서 섹스를 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충격을 받자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 그대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주해판 논어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나는, 탈진한 채 고개만 돌려, 내 옆에 똑바로 누워있는 사람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말끝마다 구세주로 오인받는다고 말하는 당신은 누구일까.

그녀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수많은 의문들이 겨우 혀 끝에 돌기 시작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방향이 없는, 그래서 이제 겨우 말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바로 꺼내놓지 못할 의문들이.

너 말고도, 많이들 궁금해 하더라.”

당신이 구세주인지 아닌지를?”

아니, 슈슬리사가 인류를 진화시킨다고 했는데, 이 공차들은 뭔지.”

동성애자?”

.”

우리 엄마도 그랬다던데요. 언니 말로는.”

그래서?”

뭐라고 해요. 원재료가 나빴던 모양이라고 했죠.”

확률 문제지. 배합하다 보면.”

여튼요.”

글쎄.”

그녀는 소리없이 웃었다.

플라스틱 필통같아요. 우리들은.”

무슨 뜻이지?”

영혼이 없이. 껍데기만 매끈하게 뽑아져 나오니까.”

누가 영혼이 없다고 그래?”

우린, 슈슬리사가 붕어빵 찍듯이 만들어낸 애들이잖아요.”

그 촌스러운 소리는 뭐야. 1978년에 시험관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영혼이 없는 시험관 아기는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거라고 했어. 우습지 않아? 넌 지금 그것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슈슬리사가 지구에 내려오기 전에 이미 백만 명이 넘는 시험관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랬으면 진작 종말이 일어나고도 남았겠지.”

웃음이 났다. 그동안, 인생이 뒤틀릴 정도로 고민하던 것을 순식간에 정리해버리는 그 말에.

그래서 날 찾았던 거야? 엄마가 아홉 달 배 아파서 낳은 아이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아서?”

“......아니라고 못해서 죄송해요.”

진작 알았다면 도망칠 걸 그랬군.”

하지만, 영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게는 영혼이 없고?”

“......제대로 된 영혼이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속삭였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두 발이, 중력을 잃은 채 결코 바닥에 닿지 못하는 감각. 한번도, 무언가가 나를 단단히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자기 자리가 없이, 먼지처럼 부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는, 내가 뭔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들 잘못될 리 없다고 그러는 거죠, 슈슬리사가 만들어낸 아이들인데 설마 불량품이 있겠느냐는 식으로. 그러면서도, 자연출산으로 태어난 사람들, 지금 50대 넘어가는 할아버지 선생님들은, 무슨 장인정신이나 그런 것이 교과서에 나오면 늘 습관처럼 그러시는 거예요. 열달 배아파서 태어나지 못한 애들은, 장인정신 없이 대충 찍어낸 공장 물건 같은 거라고.”

그건 선생이 나쁜 거네.”

나는, 그래서 그녀를 만나면 뭔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발 밑을 단단하게 지탱해줄 무언가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슈슬리사가 만들어냈는데도 마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다가 불량품이 생긴 것처럼 동성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나 자신에 대한 혐오. 그 모든 것을 영혼의 탓으로 돌리고, 슈슬리사의 탓으로 돌린 채로, 나는 내가 생각한 그 답이 맞다는 것을 증명받기 위해 그녀를 찾았다. 아마도, 어쩌면 나는 정말로, 그녀를 구세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 눈물과 내 머리카락으로 그녀의 발을 씻고, 그녀의 사도, 가장 비천한 종이 되어, 결국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세상을 바꾸어내리라는 어떤 희망처럼, 마음속에 멋대로 만들어낸 그녀를 숭배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간결한,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주위를 살펴보았다면 진작에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단순한 답을 앞에 두고, 나는 조금 기뻤고 많이 아팠다.

군에 몸담고 있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연구와 맞아들어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야.”

뭘 연구하는데요? 무기?”

심해어류.”

바다 물고기요? 생선?”

뜻밖에도, 인간은 우주보다도 깊은 바다에 대해 더 무지했거든.”

잠깐 잠들었나보다. 내가 눈을 뜨자, 나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일어났다. 나는, 웃었다. 눈물자국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그 다음에, 눈가가 유난히 당기는 것을 느끼고서야 알았다. 뺨을 손바닥으로 비비는데, 그녀는 먼저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난 먼저 씻었어. 씻고 나오든가.”

바다 이야기, 더 듣고 싶어요.”

, 별 건 아냐. 지구와 비슷한 행성들도 없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지구의 바닷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슈슬리사들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잖아? 다른 분야는, 그러니까 수학이나 물리나 화학 같은 것은 슈슬리사가 이미 거둔 성과가 있는데도, 지구인들이 따라와주길 기다리는 게 있는데, 적어도 지구의 해양생물학은 슈슬리사든 그 어떤 외계의 지성체든 여기 와서야 시작한 거니까, 그들과 나란히 연구할 수 있는 분야인거지.”

그래서예요? 이기고 싶어서?”

나는 가슴을 가린 채로 일어나 앉아 물었다. 그녀는 셔츠의 단추를 마저 채우며 쓸쓸히 대답했다.

동등해지고 싶어서,”

 

 

 

씻고 나와, 함께 걸었다. 모텔 거울 앞에서 나란히 선 우리 둘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어쩐지 따뜻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고, 그녀는 내게 정말로 사귀고 싶으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그 심해의 어족들에 대해, 아직 사람들과 슈슬리사들의 손이 닿지 않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듯이, 진화자궁으로 뇌내 시냅스만 착실하게 늘리면서, 어차피 슈슬리사가 다 발견했을 지식들을 그냥 그대로 전수받을 궁리만 하고 있으면, 인류의 종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아주 사라진다고 생각해. 결국은 그 지식과 문명을 전달받겠지만,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다면 학교 졸업할 때 까지 암기만 착실하게 하다 나온 꽉 막힌 모범생처럼 되어버릴 테니까.”

그래서 자산함에 타는 거예요?”

“......아마도.”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원래 생물을 좋아했어. 이것저것, 성게나 작은 새들의 유전자를 조작하기도 했고.”

난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그런 게 처음부터 없는 사람도...... 있을거예요. 아마. 하고 싶은 것도, 잘 하는 것도. 재능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다 있으면 재능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잖아요. 아닌가요?”

그래, 가로 세로 높이 1미터 되는 시멘트 덩어리가 있는데, 그 어딘가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데, 그게 깨알만한지 콩알만한지는 누구도 모르는 상태로 사포질을 해서 그걸 찾아내는게, 재능을 찾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걸 사포로 밀어보기 전에 재능이 없다는 말부터 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

모르겠어요. .”

지금 몇 살이지?”

스물 한 살.”

,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니 다행이네. 어려 보여서 걱정했는데.”

그녀는 모텔 간판을 돌아보며 웃었다. 비가 내릴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어 그녀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피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검지 손가락을 걸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뺨에 닿았지만, 그뿐이었다. 거부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좋았다. 내가 생각하던, 그런 어떤 진리를 내 앞에 꺼내주지 않았다 해도. 처음으로, 천천히 조심스레 내 두 발이 땅을 향해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중력처럼, 나는 처음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멀리서 웬 중년 여자들이 다가왔다. 그녀는 갑자기 손에 힘을 주어 내 손을 잡더니, 나를 등 뒤로 돌려 세웠다. 광신자. 그 단어를 떠올리기도 전에 다가온 그녀들은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이사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성경구절을 읊어대었다.

구세주인 당신을 타락시키는 음녀가 나타났으니, 마땅히 돌로 쳐서 죽여야지요!”

시끄러워, 이 할망구들아. 닥치지 못해!”

그녀는 내 머리를 쥐어뜯던 광신자의 손을 잡아 비틀며, 나를 벽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경찰을 불렀다. 광신자들이 십자가를 꺼내들고 음산한 목소리로 이상한 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구경하며 몰려든 사람들중에 한두명이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그 중에는, 내 또래인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사나는 기막히다는 듯이, 가장 젊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당신, 정말로 믿는거야? 슈슬리사가 가득한 지금에 와서도? 누군가 신이 빛이 있으라고 한마디 한 것만으로 세상이 생겨나고 누군가 진흙을.집어 던진것만으로 생명이 생겨났다고 생각해? 무지했던 시절, 어떻게든 세상을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에 만들어낸, 그 당시의 논리 안에서만 합당했던 설명을, 2천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끌고오는 건 대체 뭐하자는 거야?”

사명을 깨달으십시오.”

부디 사명을 깨달아, 우리 모두를 저 슈슬리사에게서 구원해 주세요.”

주님의 어린 양인 당신께서......”

이사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만약에 정말로 구세주였다고 해도, 이런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을 리 없겠지.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가만히, 자유로운 다른 한 손을 그녀의 등에 얹었다. 심장소리가 들렸다. 치밀어오르는 화를 애써 억누르는, 그러나 임계점에 다가간 격렬한 고동이 손바닥에 닿았다.

이봐, 당신들.”

경찰차는 아직 멀었을까, 생각하는데, 그녀가 품에서 테이저를 꺼냈다. 쏘려는 것일까. 정당방위일거야. 괜찮아. 생각하는데, 그녀는 테이저를, 그 광신자들에게 건넸다.

주님의 어린 양이 무슨 뜻인지 알기는 알아? 그게 무슨 뜻인지 안다면, 그걸 이리 쏴 봐.”

그게 무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생각을 하고 살지 그래. 주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은, 그런 구세주라는 것은, 당신들의 죄를 모두 대신 지고 죽어달라는 뜻이잖아. 그래, 내가 죽어서 당신들의 죄가 씻은 듯이 없어진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쏘지 못할 게 없잖겠어, 안 그래?”

이사나는 내 손을 놓고, 한 걸을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

“......”

못 할 것 같아? 못 하겠으면,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마. 꺼져. 남의 귀한 목숨을 멋대로 자기들 죄값을 치우는 데 쓸 테니 내놓으라고 갖은 지랄은 다 해놓고, 이제와서 주겠다는데 못 하겠어? 자기 손에 피 묻히기는 싫은 모양이지? 우리는 죄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남에게 피해준 일 없는 척, 그렇게 살고 싶은 모양이지? 말해봐. 내가 죽는 것으로 당신들의 죄가 씻겨진다면, 그런 것을 원해? 그런 것이 정말로 공정하다고 생각해?”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니......”

테이저를 든 광신자가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구만.”

당신은 무염시태, 성령에 의해 동정녀가 낳은 분이시니......”

그게 정말로 하느님의 뜻이라면, 당장 저 위에 있는 슈슬리사들부터 치워보지 그래. 아니면 다른 종류의 멍청이들처럼, 슈슬리사가 하느님의 명을 받아 내려온 천사들이라고 착각하고 행복하게 살든가. , 스스로도 믿지 못할 것들을 믿으라고 하면서 애먼 남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거야. 헛짓거리 하지 말고, 꺼져. 당장 꺼지라고. 당장......”

그리고 이사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사나의 셔츠 깃에 꽂힌 핀과 테이저건 사이로 새파란 빛을 띤 방전이 일었다. 경찰이 도착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경찰이 이사나의 테이저를 쥔 여자를 체포하는 사이, 다른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나는 그녀를, 주저않아 내 품에 안기듯 기댄 그녀를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아아. 나는 정말로, 그녀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도 싶었다. 그녀가 나의 죄를 사하지 않고, 그녀가 나의 죄를 대신 감당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녀를 위해 대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그녀의 어깨를 가슴으로 받아 안는 그 짧은 순간, 이 세상 전부가 사라진듯한 가없는 고요가 순간 내 모든 감각을 사로잡은 그 순간에, 그런 것을, 그런 마음을, 누군가 엿듣는다면 광신적이라고 비웃을 그런 감정을, 사실은 사랑이라고 이름붙여야 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미쳤냐, 미친 년에게 무기를 건네주는데 출력도 안 줄이고 줄 리가 없잖아.”

이사나는 아이스티를 마시며 웃었다. 그날, 그 순간, 테이저의 충격으로 잠깐 주저앉았던 그녀는, 자신을 쏘았던 광신자가 경찰을 밀치고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경찰의 허리춤에 꽂혀있던 테이저를 빌려서 정조준, 단발로 잡아버린 것으로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세상에. 죽은 줄 알았는데. 한 순간이지만 그녀와 함께 죽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는데, 사흘은 고사하고 30초만에 정신을 차린 이, 구세주로 종종 오인받는 섹스머신 욕쟁이 군인께서는 반쯤 빈정대는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사흘만에 카페에 나타났다.

, 질렸어. 2천년도 전에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해보려고 짜맞춘 이론에 아직까지 기대고 있는 게으름뱅이들은 상대하고 싶지도 않아. 대체, 뭐 하자는 거야. 2천년 전에 그 남자는 잡다한 계명 필요없이 사람들끼리 사랑하고 살라고 했더니만, 그걸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전쟁질이지 않나, 이제는 멀쩡한 사람보고 또 남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라고 길바닥에서 난리를 치지 않나. 뭐 하자는 거야, 대체.”

그러다 정말 죽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랬으면, 쏜 놈이 살인자가 되었겠지? 손쉽게 자기 죄를 남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한 삼류 악당의 말로 치고는 나쁘지 않잖아.”

아니, 당신 말이에요, 당신. 이사나 빈트 마리얌.”

글쎄? 그 사람들 말마따나 내가 정말 구세주라면 사흘쯤 두면 어떻게 일어나지 않을까? , 요즘같이 고온다습할 때는 좀 곤란하겠네. 사흘이면 뭐 이미......”

말을 해도 참 어떻게 그렇게 못된 말만 골라서 해요.”

내가 뭘?”

이사나는 웃었다. 그녀의 올리브빛 피부를, 검은 머리카락을, 나는 만져보고 싶었다.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듯 다시 한번 등에 손을 대고 가슴의 고동을 느껴보고 싶었다. 끌어안고 싶었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사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웃지 말아요.”

. 뭐 찔리는 생각이라도 한 거야?”

그런 것 아니거든요.”

있잖아. 난 사실 내 자신이 별로 소중하지 않아. 어떤 의미에서는, 잉여생산물에 가깝다고 생각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진짜야. 광신도들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처녀수태로 태어난 것을 두고 그 난리를 치는 모양이지만, 논문들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드물긴 해도 사례가 아주 없는 일은 아냐. 진화자궁 초기 단계에, 새로 만난 종의 유전자를 분석해서 1차 진화를 시키는 중에 아주 드물게, 아주 가끔, 그런 일이 생겨난다고. , 생긴다고 다 낳는 것은 아니니, 만삭이 되도록 잘 숨기고 다니다가 끝내 낳아버린 내 어머니도 꽤나 깡이 좋은 여자이긴 했던 모양이지만.”

그럼 정말로 구세주 같은 것은 아니었네요.”

정말로 구세주라서, 정말로 나를 어디다 매달아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야.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내가 태어난 게 신의 의지가 아니라 열 다섯 살 밖에 안 되었던 내 어머니의 의지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어쨌든 살아가기로 했어. 내 자신이 별로 소중하지 않건, 잉여 생산물이건 상관없이. 이왕 이렇게 태어난 거라면, 슈슬리사의 세계에서 인간으로서 지식의 진보를 이루고 싶으니까. 낡은 육분의를 별을 향해 고정하고, 그 별을 향해 계속 나아가듯이. 내가 찾을 진리는 그런 데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난 계속 배를 탈 거고. 1년에 이렇게 뭍에서 지내는 기간은 다 합쳐도 석 달도 안 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이사나는 빈 아이스티 잔을 내려놓았다. 날은 덥고 습했고, 빈 잔에는 방울방울 물기가 맺혔다. 나는 영문 모르고 복받쳐오르는 묘한 울음을 애써 참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이스티 잔 위에 손가락으로 격자 무늬를 두어 개 그리다가, 대답을 촉구하듯 내 뺨을 건드렸다.

괜찮겠느냐고.”

뭐가요.”

묻고 있잖아. , 네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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