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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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낙하산

2005.09.30 22:4209.30

1.

비행기가 폭파 되었다. 나는 B747-400 여객기의 30C 좌석에 앉아 있다가 단숨에, 1만5천 피트 산공의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불과 몇 초 전에 앉아 있던 자리가 갑자기 굉장한 기세로 뒤흔들리고, 뭔가 번쩍 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사정없이 강력한 폭풍이 온 몸을 휘감았던 것도 기억난다. 그래서 뭔가 싶어 두리번, 하고 나니, 나는 튕겨 나오듯 비행기에서 멀어지며 흩나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굉장한 바람이 온 몸을 감쌌다. 공기가 엄청나게 차가웠다. 귓가를 멍멍하게 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나는 떨어지고 있었다. 중심을 잃은 내 몸은 엉거 주춤하게 누운 듯한 모습이 되어 공기를 가로질렀다.

극렬주의 무장세력의 농간 이었는지, 아니면 생명보험금에 목숨을 건 정신나간 녀석이 폭탄을 터뜨렸는지, 하여간 갑자기 비행기가 찢겨 나가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그냥 낡은 비행기를 죽어라 하늘에 띄우며 돈을 벌어보려는 약아빠진 항공사놈들 때문에 고물비행기가 저 혼자 망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 그만. 이제 와 비행기가 폭파된 이유가 다 무슨 소용이랴. 하늘을 보았다. 낮인 데도 워낙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하늘이 좀 검은 색으로 어두워 보였다. 샛별인 듯 보이는 별도 하나 눈에 들어 왔다.

나는 앉은 자리가 묘해서 비행기 동체에서 굉장히 멀리 튀어 나온 편이었다. 비행기 날개와 동체 뭉치는 저 멀리서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하늘색 옷을 입은 일본 아가씨도 떨어지고 있었고, 작달막한 프랑스 할아버지도 추락 중 이었다. 아까 내 옆 자리에 앉아서, 엄청나게 큰 소리로 자기들끼리 하나도 안 웃긴 농담을 주고 받던 네 명의 젊은 일당들은, 의자에 안전벨트로 묶인 채로 네명이 나란히 앉아 좌석에 붙어 추락 중이었다.

비행기 주변에서 땅에 떨어지는 형편에, 저들처럼 서로서로 얼굴 표정을 보게 되는 것도 별로 흥미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눈부신 태양. 구름 위로 작렬하는 태양. 동그랗고 하얗고 노란빛을 띄는 무심한 태양이 떠 있었다. 햇빛을 보면 눈 나빠진다는데, 이제는 그럴 걱정도 없다. 나는 혼자 달랑 표표히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중력의 한쪽 끝을 잡고 1억 5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거대한 불덩이라는 판단을 할 시간은 없었다.

태양 너머 펼쳐진 하늘에는 운해의 저편 너머로 지평선이 보였다. 희미한 지평선은 굉장히 멀리까지 보여서, 그저 일직선이라기보다는 약간 볼록해 보였다. 지구가 둥그니까. 지평성도 좀 둥그스름하게 보이는 것이다.

지구를 완전한 원형으로 가정하고, 저 지평선이 굽은 정도를 따지면 호와 직선의 거리를 이용해서 지금 내가 떠 있는 높이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직각삼각형의 성질과 원과 접선의 성질을 이용해야 겠지. 아마도 이상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 중에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생각일 것이다.

팔을 펼치거나, 옷 단추를 풀어 바람을 맞는 넓이를 크게 하면, 떨어지는 속도를 조금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5초만에 떨어지는 것과 19초만에 떨어지는 것의 차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죽는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나는 비슷한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 대한 뉴스를 떠올렸다. 나는 전화를 꺼내서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통화 해 보려고 했다. 전화기가 켜지고 신호가 가고 통화를 하려면 땅에 도달하기 전에 한 마디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 해볼만한 일이다. 전화 연결이 되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다는 기록은 전화회사 컴퓨터 어딘가에 남을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지금 같은 형편에 마지막에 남길 것으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이 높은 곳에서 과연 전화가 연결이 될지는 또 모르겠다만.

나는 망설임 없이 전화할 사람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그녀.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그녀. 온갖 잡다한 생각에 이리저리 궁리하고 고민하고, 그런데 항상 상황은 최악의 연속이라서, 도무지 짝사랑만 불사른 그 아이.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마지막으로 사실은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고 정말 마지막으로 말해 보리라고 생각했다. 전화기 1번 번호에 등록되어 있는 여자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같은 처지에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 오랜시간 동안 애만 태워온, 그녀에게 나는 마지막 고백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 실패했다. 전화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전화번호부 검색을 하기에는 시간도 없고 전화 화면도 보이지 않는다. 전화번호가 기억이 안 날 밖에. 항상 그랬다. 전화기를 들고 정말로 오랫만에 한 번 전화를 할까 말까 했다. 통화 시나리오와 전화 대사를 길게 준비하고 나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몇 마디 하다 끊는 전화. 그런 통화를 1년에 한 두 번쯤 해볼 뿐인데, 어떻게 전화번호를 외고 있겠는가.

그리하여, 수많은 세상의 짝사랑남녀 여러분. 세상의 종말을 가까이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을 마지막으로 고백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화번호와 주소를 암기하도록 하자.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는데, 눈 앞에 공중전화 밖에 없는데, 전화번호를 몰라서 그 말을 못한다면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말이다. 그야말로, 그대들 짝사랑의 한심함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사건일지니.

나는 전화기를 하늘을 향해 내던졌다. 나도 떨어지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저 전화기는 결코 다시 내게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전화가 하늘 높이 훨훨 저혼자  날아가버린듯 보인다. 잠깐, 전화가 조그만하기에 공기의 저항을 덜 받으므로, 운이 없으면 땅에 닿기 전에 전화가 되 떨어지는 것이 보일지도 모른다. 운이 없으면이라. 더 이상 뭐 어떻게 운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죽기 직전에는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친다고 한다. 인생을 살면서 기억하는 모든 순간들이 극히 잠깐사이에 너무나 선명하게 모두 떠오른다.

여기서 주마등이란 무엇인가. 주마등이란 옛날옛적에 쓰던 신기한 물건으로, 일종의 환등장치 속에 그림들을 넣어둔 것이다. 그래서 작동시키고 들여다보면 말이 달리는 모습을 꼭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지독하게 원시적인 영사기요, 애니메이션 재생장치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주마등이란 가장 원시적인 PMP인 셈이다.

그러니까, 주마등 처럼 옛생각이 떠오른다는 표현이란, PMP 동영상 재생하듯 옛생각이 난다는 표현과 똑같은 말이다. 더군다나 주마등이라는 기구는 옛날에 시장통의 약장수들이나 야바위꾼들이 많이 응용하던 장치라서 어딘지 분위기도 좀 켕키는 데가 있다. 꼭 죽기 직전 인생을 돌아볼 때, 멋대가리 없는 주마등을 들먹일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헛생각으로, 지옥보다 안타까운 시간을 수초 허비한 나는, 주마등이건 윈도 미디어 플레이어 9.0 이건 간에 어쨌든지 옛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들. 유치원에서 간 소풍.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간 적 있다던 유치원 선생님. 초등학교 때 친구들. 부모님 속썩이던 일. 중학교 시절 학교 뒷뜰에서 벌어진 최악의 격투극. 고교 시절의 무용담들.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가 해주시던 이야기들. 처음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 그녀의 목소리. 눈빛. 대학과 대학원. 분광분석장치를 기막히게 해석해서 모든 사람들이 설명을 듣고 경탄하던 짜릿한 순간.

아. 이제 인생이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아무것도 아닌 추억 하나하나가 너무나 그립고 소중한 것으로 느껴졌다. 가슴을 후벼파고 뇌리의 심연에 아로 새겨 졌다. 언뜻언뜻 지나치며 보던 편의점 직원의 모습이나, 구내 식당 아주머니의 얼굴. 딱 두 마디 나눠 본 고교 3학년 때의 죽도록 말없는 내 옆자리에 앉았던 놈.

내 인생과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처럼 문득문득  떠오를 때도, 그 하나하나 마다, 괜히 심장이 퍽퍽 스트레이트 펀치를 얻어 맞는 듯 감동적이었다.

발아래 구름의 바다가 하얗게 끝없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 가운데를 나는 헤집고 들어갔다. 구름은 몇 겹으로 겹쳐져 있었다. 구름 바다 밑에 구름 들판이 또 깔려 있고, 그 아래에 또 구름 장판이 펼쳐 진 듯 하다고나 할까. 꼭 무슨 지상 세계 위에 천계가 있고 천계 위에 천천계가 있고 그 천천계 밖에 천천천계가 있고, 그 밖에는 그 어떤 존재도 상상도 못할만큼 신비로운 천천천천계가 있다는 무슨 신화 전설 비스무레하게.

그 온 세상을 뒤 덮은 듯한 구름의 거대한 층과 층 사이로 가끔은 무지무지하게 거대한 기둥이 두 층을 관통하고 있기도 하고, 혹은 거대한 산봉우리 같은 구름이 두 층의 세계를 꿰뚫고 자리잡고 있기도 했다.

구름 층을 돌파하면서 펼쳐지는 광경은 정신 나갈만큼 신비로웠다. 지극히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산봉우리같은 거대한 구름의 계곡 사이로 뭔가 있을 것 같았다. 꼭 지구만한 키의 신들이 대장간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광경이 보이는지. 혹은 그 높디 높은 구름기둥의 표면에 어떤 기묘한 사람 얼굴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 듯도 보였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으로 도저히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할 멋진 체험을 하고 인생을 마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스카이 다이빙이 있잖아. 맞다. 그냥 이거는 아깝게 목숨만 날리는 짓이다. 스카이 다이빙이 아니더라도,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늙으막의 시간을 갖고. 그런 경험들이 하늘에서 종단속도로 땅바닥에 내려 꽂히는 것보다는 백만배 더 신나고 즐겁고 재미있을 것이다.

다시 눈을 떴다. 하나, 둘, 셋.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숫자를 센다. 곁눈질로 보니, 구름을 돌파하고 이제는 땅이 보였다.

도시 상공도 아니고, 사막이나 바다도 아니고 산중도 아니었다. 무슨 밭인지 아니면 초원인지, 혹은 그냥 언덕배기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건 연두색이 넓게 펼쳐진 아주 평화로워 보이는 땅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자니, 워낙 거세게 바람을 가르며 떨어진 탓에, 바람과의 그 마찰열 때문에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느낌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나는 내 마지막을 함께 해준 하늘을 다시 감상하며 최후를 맞기로 결심했다.

나는 똑바로 하늘을 다시 쳐다 보았다. 푸른 하늘. 아까 내가 돌파해 온 거대한 뭉게구름들. 쏟아지는 태양 빛.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한가롭게 언덕배기에 누워서, 저 구름 흘러가는 곳을 상상하며 보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끝으로 땅에 내 등이 닿는 그 순간의 느낌. 그 찰나의, 지독히 얇은 그 잠깐의 느낌을, 똑똑히 아주 길고 분명한 느낌인양 느꼈다. 엄청난 충격량과 중력의 터질듯한 외침이, 바로 내 등에서부터, 긴 단발마로 울려퍼질 것이다.



2.

미치고 환장하겠는 것은, 내가 이 꿈을 엄청나게 자주 꾼다는 점이다. 비행기 사고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쯤은 꼭꼭 이 꿈을 꾸었다.

분석실 업무가 격해져서 좀 피곤하다거나, 실험 결과가 잘 안나와서 신경이 곤두서있을 때, 여자친구랑 갈등이 좀 심할 때, 등등과 같은 경우에는 이 꿈을 꾸는 빈도는 더 잦아 졌다. 이 꿈은 지나치게 정신을 혹사시키고, 공포감도 막강한 악몽 중의 악몽이었다. 나는 땀에 젖어 잠을 깨었고, 그러고 나면 잠시 비몽사몽(기막히게 정확한 표현이다) 하다가 이곳이 회사에서 내어준 기숙사 방의 낡아빠진 스펀지 침대 위인 것을 깨닫고 깊게 안도한다.

그러고나면, 어두컴컴하고 아무도 없는 기숙사 방에서 나는 잠시 혼자 앉아 있다. 갑자기 외롭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몇몇 일들 때문에 정신이 쇠약해져 있을 때 같은 경우에는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요즘 들어서 나는 하루 걸러 하루 꼴로 이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고, 나는 점점 더 뭔가 알 수 없는 일이 닥쳐 오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회사 연구소의 광물 분석실에서 일하는 나는, 연구소가 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기에, 연구소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대체로 나의 일이란 먼지가루 같은 돌 부스러기가 무슨 성분인지 조사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하여 걸핏하면 분광분석기 옆에 붙어서  밤을 새는 때가 많았고, 반대로 분석이 끝난 시간을 맞춰서 약품 처리를 하기 위해서 신새벽에 연구소에 시간 맞춰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 연구소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기숙사에 산다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꿈을 꾼 직후의 깊은 밤에는 또 다르다.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연구소와 기숙사. 기숙사의 그 압도적인 정적. 괜히 한없이 비좁게 느껴지는 궁벽한 방. 정리정돈을 애써 해 보았지만 어쩔 수 없이 좀 구질구질해 보이는 책이며 옷가지들. 특히 책상위에 이리저리 쌓여 있는 두꺼운 독일어 카탈로그와 메뉴얼들, 포개어져 있는 서류철들은 왜 그리 야박해 보이는지.

"이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OHP가 부소장으로 온 이후로 이 꿈을 더 자주 꾸는 거 같애요."

다음날 나는 또 그 꿈을 꾸었다면서, 점심 때 분석실 실장님에게 말했다.

"에이 설마. 자기가 무학대사도 아니고, OHP가 무슨 왕십리 도인도 아닌데. OHP가 꿈이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실장님은 나의 심각한 표정을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좀 멋쩍어져서, 나도 그냥 허헛 하고 웃었다.

여기서 언급된 OHP란 언급된 그대로, 얼마전에 부소장으로 갑자기 발령 받은 어떤 아저씨를 말한다. 다 생략하고, OHP가 무엇의 약자이냐부터 설명한다면, 그것은 이 사람이 부소장이 되고 실장님과 내가 처음 그에게 불려 갔을 때의 감상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핫,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로 부소장으로 들어온..."

그러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데, 그는 얼마전까지 사람 이름과 또 다른 사람이름을 "and"로 묶어 놓은 것을 회사 이름으로 하는 회사에서, "헤드헌팅"일을 했다고 했다. 사실 내막인즉, 우리 회사가 주 채권 은행으로부터 경영 합리화를 위해, 몇몇 선진 경영 기법을 도입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명령이 시작이었다. 그 결과 조치 중의 하나로, 경영 "시스템"에 "엑스퍼트"라 할 수 있는 "브레인"인, 이 사람이 연구소 운영 개선을 위해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어쩌고 & 저쩌고" 사에서 "어낼리시스"해서 만들어낸 "리포트"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의 첫 연설에, 우리는 사실 조금도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광물분석실의 모든 직원들의 - 그래봐야, 실장과 나 단 두 명이다. - 주의를 완전히 휘감아 사로잡은 것은 부소장의 머리칼에서 나는 어마어마한 광택이었다.

무스? 젤? 고전적인 기름? 도저히 무엇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부소장의 머리칼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정리되어, 기막히게 반질거리면서 그 습기와 윤기를 발산했다. 그 강철 아치와도 같은 완벽한 가르마 타기의 곡선. 머리 자체가 마치 버터를 깎아 만든 조각인 양 보이는 그 어우러짐. 그가 머리칼에 바른 신비한 물질은 아주 기묘한 향기를 온 방안에 풍기는 듯 했다. 그야말로 유방백세! 결코 그 향기는 강하지 않고 아주 은근하고 약했지만, 아주 멀리 멀리 까지, 그 드넓은 회의실 전체에 가득차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 머리칼만 넋을 잃고 보았다. 정말 머리칼이 반질반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세상에는 기이한 공포증 때문에 자기 집 문 앞을 나서는 게 극심한 공포인 사람도 있고, 그런가 하면 물방울 무늬 원피스가 너무나 징그러워서 쳐다보기는 커녕 상상도 제대로 못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이 정도로 심한 헤어스타일을 보고 미칠 수도 있는 노릇아닌가. 부소장이 "엔터프라이즈 레벨에서는 그러한 코스트들은..." 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나는 이 무스-젤 떡칠 머리칼에 불을 한 번 댕겨 보면 어떨까 하는 위험한 상상을 하기까지 했다.

이상에서 드러난대로, OHP란, Oily Haired Person의 약자였다. OHP는 바로 그 첫날 부로 부소장을 부르는 약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의 환상적인 머리 관리법으로 인해서, 2백미터 밖에서도 그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날씨가 좋고, 먼지가 없는 날이면, 우리는 5백미터 거리에서도 능히 OHP를 식별해 낼 수 있었다.

OHP가 연구소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 이상한 웹 사이트를 사용하도록 지시한 일이었다.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각 직원들의 "스케줄"을 기록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사용해서 액티브X 컨트롤를 2천개쯤은 설치해야 페이지가 제대로 뜨는 그 웹 사이트에 우리는 매일 들어가서, 그가 이상한 잡지에서 긁어다 붙인 "향기나는 글들" 같은 기사를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나면 스케줄 페이지로 넘어가게 되는데, 거기에 업무 시간표를 매일 짜서 2시에서 3시까지 장비 설정 3시에서 4시까지 보고서 작성 같은 내용들을 차례로 쳐 넣어야 했다.

광물 분석실에 설치된 컴퓨터들은 인디고와 옛날 왕컴퓨터 기게들이었고, MS윈도가 아니라 유닉스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제대로 동작하는 기종들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스케줄 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옆 건물에 있는 자료실 컴퓨터를 이용해야 했다.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저희들이 사용에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크게 효용은 높은 것 같지 않은데요."

1주일이 지나자, 실장님이 부소장에게 그렇게 약하게 항의했다. 부소장은 자신의 첫 개혁작업이 고루하고 답답한 연구원들에게 반발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해 약 45분 동안 기업 문화와 혁신 구조에 대해 특강을 해 주었다. 결국 그는 해결책으로 우리에게 3백2십만원 짜리 노트북을 하나씩 구입하도록 지시하여, 윈도와 익스플로러를 깔아서 쓰라고 했다.

"회사 밖으로 노트북 들고 나갈 때는 꼭 서류 제출해서 결재 받으시고요."

그런 말을 덧붙이면서.

다음으로 OHP는 연구소 출입문에 이상한 지문인식 장치를 달았다. 그 지문인식 장치에 엄지를 찍으면 직원을 알아보고 그걸로 출퇴근 시간을 기록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워크 이피션시"를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출퇴근 시간마다 기계에 지문 한 번씩 찍는게 뭐 그렇게 큰 변화겠냐만은, 이 또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밤 12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면, 이 기계는 다음날 새벽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이걸 퇴근 기록이 아니라 새벽일찍 출근한 기록으로 인식을 해 버리는 것이었다.

"실장님, 어떡합니까?"

그렇게 출근으로 기록되니, 전날의 퇴근은 기록이 되지 않았다. 즉, 나는 퇴근 기록을 하지 않고 그냥 도망간 직원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자동으로 조퇴로 처리되었다. 따라서 나는 밤 12시를 넘기면서 한 1주일 심야 야근을 하고나니, 해괴하게도 그 대가로 올해 휴가를 몽땅 다 날려버리는 역설적인 일을 당하게 되었다.

"내부 프로그램을 수정하려면, 지문인식 기계를 기계 만든 미국회사에 보내서 개조를 받은 다음에 다시 받아 와야 한다는데요."

실장은 그런 소식을 전해 왔다.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지문인식 기계 밑에 노끈을 매어서 장부를 하나 달아 놓고, 거기에 볼펜으로 실제 출퇴근 시간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걸 본 OHP가,

"이게 무슨 비효율적인 짓이예요? 보기도 굉장히 흉하잖아요."

그러면서 떼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장부를 없앴다.

결국 그 때 부터, 우리는 일을 하다가 11시 59분쯤이 되면 허겁지겁 뛰어가서 지문을 한 번 찍어서 퇴근을 알리고 다시 실험실에 기어들어가서 실험을 계속하는 일을 했다. 이짓을 하느라 두 번인가 굉장히 비싼 광석 샘플 몇 개를 날려 버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실장님과 나는 괜히 짜증이나서 쓸데 없이 둘이 대판 싸우기도 했다.

분명히 그 무렵부터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꿈을 꾸는 날이 많아 졌다. 실장님은 웃어 넘겼지만 확실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꿈을 꾸고 잊을만하면 또 꿈을 꾸고, 잊을만하면 또 꿈을 꾸고, 그런 상황이었지만, 그 때부터는 꿈을 꾼 이상한 느낌이 채 가시지 않을 만큼 가까운 기간안에 또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그 때부터, 꿈을 꾸고 깨었을 때 일지처럼 꿈에 대해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몽중일기"라고나 할까. 거의 똑같은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달라지는 내용을 메모하고, 꿈을 꾼 날짜와 깬 시간을 기록했다.

그렇게 차분히 따져 나가다 보면 분명히 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똑같은 꿈을 자주 꾸는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초자연적인 예지나 텔레파시와 관계가 있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내 심리와 무의식에 대한 어떤 근거는 되어 줄 거란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그때까지만해도 OHP와 내가 직접적으로 무슨 안 좋은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OHP는 밤샘을 밥먹는 하는 우리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저는 어제 11시까지 일하다가 퇴근했어요." "부소장인 제가, 지난 주에는 10시까지 계속 야근했습니다" 같은 대사를 굉장히 장렬하고 처절한 어조로 설교했다.

나중에 24시간체제로 정신 없이 돌아가는 연구소 분위기를 알고는, OHP는 스스로 굉장히 민망해 했지만, 그 때까지도 나는 OHP에게 별 불만이 없었다. 혹여 정시 출퇴근의 빛나는 이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위대한 영웅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좀 하기도 했다.

그런데  OHP가 유난히 더 머리기름을 많이 바르고 온 날, 그가 갑자기 회의 중에 자동차 경주이야기를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열심히 실험내용에 대해 연구원들과 의견을 주고 받던 그자리에서, 묵묵히 있던 OHP는 갑자기 자동차니, 레이싱이니 하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영문을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들 지적하는 이야기를 못해서 어색하게 얼버무리고 넘어가려하고 있었는데, OHP는 계속 F1이니, 인디아나 폴리스가 어쩌고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참다 못해 내가 말하고 말았다.

"부소장님. 스펜서 포물러. 이 때 여기서 말하는 포뮬러 라는 건요, 레이싱에 나오는게 아니라, 계산식이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스펜서 포뮬러는 무슨 자동차 경주가 아니라 통계에 사용되는 계산식입니다."

그 때의 그 싸하고 냉랭한 기운.

그것을 저장해서 조금씩 뿌리는 방법만 있다면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 였다. 나는 어떤 표정이 될까 스스로 두려워서 감히 OHP의 얼굴 표정을 쳐다 보지도 못했다. 아예 다른 연구원들이 무안해 하는 분위기였다. 그 이후로, OHP는 나를 멀리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 수록 꿈을 꾸는 빈도는 더 높아만 갔다. 꿈은 언제나 그대로 였다. 처음 추락 사실을 알고 당황하고, 추워하고, 인생을 돌이켜보며 생각해 보고, 사람을 그리워 하고, 구름을 통과하고 땅에 부딪히는 그 내용은 바뀌는 바 없이 똑 같았다.

약간씩 차이가 있긴 했다. 구름의 모양이나, 꿈속의 시간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오후인지 정도의 차이였다. 폭파 직후에 비행기 주변에서 떨어지는 승객들이 다른 사람으로 이따금 바뀌긴 했는데, 그 차이도 결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차이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하나도 빠뜨림 없이 최대한 생각나느데로 꿈을 꾸자마자 종이에 써 두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꿈 속에서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차츰차츰 더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꿈 속의 나는 항상 떨어지기 직전에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숫자를 헤아리곤 했다.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꿈에서 깨면 그 숫자를 몇 까지 헤아렸나를 기록했다. 조금 커질 때도 있고, 조금 작아질 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 숫자는 줄어드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했다. 꿈 속에서 내가 최후를 맞는 시간은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꿈이 이렇게 사정없이 나를 옭죄어 오게 되자, 나는 좀 더 능동적으로 시간을 할애해서 꿈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나는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에 대한 반론 서적들을 읽었고, 그 반론 서적에 대한 반론 서적들도 읽었다. 보다 현대적인 꿈에 대한 이론서들을 읽었는가 하면, 고전적인 "꿈해몽 비법"이나 인터넷 해몽 사이트들을 뒤지기도 했다. 이 꿈이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만족스런 해답은 없었다.

성적인 활동력을 상징한다거나, 성장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는 해설이 있긴 했지만, 내가 무슨 돈 후안도 아니고 야오밍 선수도 아닌데, 이 꿈을 이렇게 허구헌날 꿀 이유야 없지 않은가?

꿈이 미치는 영향은 꽤 컸다. 꿈을 꾼 다음날 노곤하고 피곤한 것이야 그렇다쳐도, 숫제 나는 비행기를 타기가 무서워 졌다. 그 비행기가 폭파되고 거기서 떨어지는 내 모습이 너무나 또렷한 공포감으로 다가왔다.

어디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나는 비행기 타는 일 때문에 출발부터 겁에 질렸다. 요즘에는 그 정도가 심해져서,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거나, 텔레비전에서 비행기가 날아가는 장면만 보아도 갑자기 그 비행기가 뻥하고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서 조마조마하고 불안했고, 도무지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출장을 가게 되면 비행기를 타기 전에, 나는 버번과 싸구려 럼을 잔뜩 마셨다. 그래서 확 술에 쩔어서 비틀거리며 비행기에 탄다. 그러면, 온갖 딴생각이 머리를 가득채워서 꿈과 추락에 대한 공포증을 잊을 수 있었다. 댄스의 고전은 누가 뭐래도 디스코.  코메디 프로그램의 코메디언 제스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녀. 뭐 그런 생각들이 알콜의 산들바람을 타고 윈드서핑을 하는 것이다.

다만 그 정도 상태가 되면, 나는 "Rock'N Roll Music"이나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를 너무나 부르고 싶어졌다. 내가 기내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추태를 부리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실장님의 근엄하고도 효과적인 관리에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꿈 때문에 비행기 근처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 꿈을 자주 꾸는 것 같으면, 이제는 그 꿈을 꾸게 되면, '또 꿈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아요? 그러면, 왜 꿈속에서는 생각한대로 되잖아요. 그게 꿈이라는 걸 알기만 하면, 그냥 슈퍼맨처럼 하늘을 막 날아다니거나, 아니면 아예 폭파된 비행기를 다시 붙여서 그냥 타고 날아갈 수도 있을텐데."

한 번은 실장이 그렇게 물어 본 적이 있다.

"저도 정말 그럴 것 같은데 말이죠, 도저히 꿈속에서는 이게 꿈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정말. 진짜 진짜 같거든요. 꼭 정말로 하늘에서 추락하는 거 같은 느낌이 느껴져요. 왜 그 수영장에서 물미끄럼 타고 내려올 때 기분 같은 거 있잖아요. 그 기분의 십의 육승배라고나 할까."
"그럼 정말 정말인거 아닐까. 꿈 꿀 때 마다 유체이탈을 해서, 정말로 하늘에서 추락을 하는거지."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어요. 옛날에 정말로 그렇게 비행기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는데, 제가 꿈꿀 때마다 텔레파시로, 그 시간의 그 사람과 다른 차원에서 연결되는 거라고."
"그거 그럴듯 하네. 맞어. 그 정도로 추락할 때에는 워낙 감정이 강렬해질거니까, 그게 정신적인 힘을 어떻게 확 끌어올려서 다른 차원에서 시간을 초월해서 자기랑 확 연결을 시키는 건지도 모르지."
"그런데 어디 차원 들먹이는 신기한 이야기치고 옳은게 있나요......"

여러가지 가정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계속 내가 정말로 진짜 추락하는 느낌의 그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마치 점점 숨이 가빠오듯이, 그 꿈을 꾸는 횟수는 점점 많아져서 이제는 거의 매일 밤마다 그 꿈을 꾸게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갑자기 OHP가 우리에게 중대발표를 한답시고 불러 모았다.

"연구소 경영 합리화 조치의 가장 중요한 혁신책으로 연구소를 신설 확장 이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 이전이요?"
"어디로 갑니까?"
"제주도 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확 충격을 먹었다. 제주도 아름답고 좋은 곳이다. 그렇지만 모두들 다 이 도시에 가족과 친구가 있고, 단골집과 추억의 장소, 삶이 있지 않은가.

"왜... 왜... 왭니까?"
"아무래도, 연구 활동을 하기에는 보다 한적하고 조용하며 자연친화적인 곳이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올리버 로이드 하우스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자연친화적인 환경의 연구소가 그렇지 않은 곳에 비해......"

OHP는 또 다시 특유의 장황한 강의를 시작 했다.

"우리는 좋은 환경을 위해서 한라산 특별지구에 건립된 연구소로 이동합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고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당연히 회사측에서는 여러분에게 전원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기숙사도 함께 건립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주도에 있을 때부터는, 연구원들이 전부다 기숙사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주변에 건물이라고는 전혀 없으니까요. 회사측에서는 여러분에게 기숙사를 완전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그럼, 교통은요? 근처 읍내쪽과 연결되는 대중교통 편이라도 개발되어 있어야죠."
"사실, 그런 직원 여가 활용 문제 때문에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일단 주말마다 회사 버스를 운행 시키기로 했고요. 연구소 안에 24시간 편의점이랑 초고속 인터넷을 무제한 제공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인터넷 동영상이랑 온라인 게임을 마음껏 하시면서, 즐겁게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
"아참, 구내식당의 한 끼 가격은 모두 3천원 이하가 되도록 했습니다. 파격적인 '췹' '프라이스'죠?"

그러면서 OHP는 멋지게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허무감마저 느꼈다. 실장님과 나는 퇴근하면서 기나긴 투덜거림과 분노와 저주를 늘어놓았다.

"저 그냥, 회사 관두고 딴데로 옮길래요. 이제 그래도 지금 사귄 여자친구랑 1년 겨우 처음 넘겨 봤는데. 결혼도 하고 해야죠. 갑자기 헤어질 수도 없는거 아녜요."
"딴 데로 옮기면 안돼요."
"왜요?"
"연구원들한테는 동종 업종 이직 금지 조항 있잖어. 다른 회사에 취직하면 계약 위반으로 한 8,9억 물어 줘야 할 걸."
"그럼 어떡해요. 회사에서 죽으라면 죽어야 됩니까?"
"그건 아니지. 그냥 회사 관두고 놀아도 되고... 아니면 무슨 장사를 하거나 자격증을 따서 다른 일을 해도 되고..."

실장님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 자신이 더 걱정이었다.

실장님은 나보다 한 살이 더 어렸지만, 이제 처음 연애다운 연애를 해보고 있는 나에 비해서, 그녀는 작년에 결혼한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머나먼 외딴 곳의 연구소로 옮겨가게 되면, 그녀는 주말 부부가 아니라 월말 부부로 살아야 했다.

"실장님은 어떻게 할 거예요?"
"몰라. 그냥 재미삼아 이혼이나 확 해버릴까."

장난스럽게 웃자고 한 이야기였지만, 내용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하나도 안 웃겼다.

그 날 밤에 나는 자면서 추락하는 꿈을 하루 저녁에 두 번이나 꾸었다. 끝장나게 무서웠다. 두 번이나 꾸면서도 도저히 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생생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며칠 후. OHP는 스케줄 웹사이트에 전 연구원 대상 공지사항을 올렸다. 내용은 주말에 자기가 송별회를 하면서 한 턱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러분, 연구소가 제주도의 한라산 지구로 이전하게 되지만, 저와 소장님 및 비서진은 여전히 이 곳에 잔류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께서는 속 편하게 연구만 계속하시면 되지만, 소장님께서는 항상 많은 사람을 만나고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고민하시므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언제나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항상 도시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사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정말로 피곤한 일임을 모두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각오는 하고 있어 왔기에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고요. 어쩔 수 없이 저희는 이곳에 남고 여러분은 제주도 한라산 연구소로 옮겨가는 이별의 시간을 맞게 되었습니다만, 그 동안 참 많은 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장황하게 썼는데, 나는 그 내용에 대한 감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또 다시 놀랐다. 실장님이 말했다.

"가구 보러 안가요?"
"가구요?"
"예. 이번에는 기숙사를 직원 마음대로 꾸미게 한다고, 기숙사는 방만 주고 그 안에 들어갈 가구는 다 직접 사야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게 있었어요? 아니, 그런게 어딨어요?"
"왜, 어제 부소장님이 말씀 안하시던가요. 연구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회사로서는 비용도 효율적으로 절감하기 위해서, 기숙사 가구는 각자 사기로 했다고. 회의 마지막에 그랬잖아요."
"아니 또 나는 '이피션시' 어쩌고 하길래 쓸 데 없는 말 일 줄 알고 딴 생각했죠."
"양치기 소년."
"가구 값은 회사에서 지원해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붙박이가 있는게 정상이죠!"
"어쩌겠어요. 도리 없지. 회사에서 소개해준 가구 가게에 가면 20퍼센트 할인해 준데요. 제주도 지점에서 바로 운반도 해주고."

나는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나는 다짜고짜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 제주도로 전근가니까 헤어지자고 딱 두 문장으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숨이 가빠왔다.

그리고 배터리를 뽑아서 전화를 내던졌다. 데자뷰. 꿈 속에서 전화를 던지던 장면이 생각났다. 여자친구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나는 가장 무례한 이별을 저지른 최악의 인간으로 길이길이 보전될 것이다.

나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정말 뭐라도 할까 고민해 봤지만, 광물 분석의 경력을 이용할 수 있는 일은 국내에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분석장비만 파던 내가 지금 같은 불경기에 식당이나 술집을 한다 한들 빚더미에 올라 앉을 것만 같았다. 그럼 그냥 놀면서 어디 여행이나 다닐까? 아니면 전혀 다른 전공으로 학교를 다시 다녀 볼까? 의대 치대 한의대? 자격 시험 공부?

나는 지극히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오늘 밤에는 밤새도록 수백번이고 추락하는 꿈을 꾸다가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이다.

실장님은 이미 초연한 모습이었다. 실장님과 나는 둘이서 가구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책상도 고르고 옷을 넣어둘 장도 고르고 있자니, 보는 사람마다 우리를 혼수 준비하는 예비 부부로 생각했다. 나는 계속 울적해서 불만 품은 얼굴로 있는데, 실장님은 "신부가 신랑보다 훨씬 낫네. 신부가 아깝다." 하는 그 말에 맞장구 치면서 유쾌하게 웃기까지 했다.



3.

제주도로 가는 대한항공 1455편. 30C 좌석에 나는 들어 와 앉았다. 점심시간을 막 앞둔 11시 비행기. 평일이었지만 만석이었다.

날씨는 어느 때 보다 화창하고 좋았다. 내 옆자리에 곧 실장님도 들어와 앉았다. 결국, 나도, 실장님도, 제주도의 외딴 연구소로 가는 길에 순응히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괜히 신문을 펼쳐들고 한 두 장 넘겼다. 탑승구 앞에서 나눠주던  것이었다. 두 시간씩 지하철을 타고 가도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졸기만하는 것이 보편적의 사람의 태도일진데. 이상하게 사십 몇분을 날아가는 비행기안에서는 꼭 신문도 보고 책도 보고 음료수도 마시고 왜 그런 모든 일을 다 하려 하는지.

재미난 일이다.

"어? 오늘은 술 안마셔요? 꿈 생각 안나요? 꼭 진짜로 추락하는 거 같은 꿈 때문에 비행기 보기만 해도 무서워 했잖아요."

실장님이 뒤늦게 눈치를 채었다. 그녀는 대단히 놀랐는지 정말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은 기쁜 기색을 띤 상기된 표정이었다.

"우리 가구 고르러 갔었잖아요. 그 때 침대 고를 때, 가구 매장 직원이 어찌나 달변이던지, 내가 지금 기숙사 침대가 스폰지 침대라고 했더니 '어머 선생님 그러면 허리다쳐요, 큰일나요.' 하면서 정색했던거 기억나시죠?"
"예. 기억나죠. 우리보고 신혼부부한테는 침대가 커야 된다고 하던."
"그러면서 침대는 스프링 복원력이 좋아야 된다고 계속 떠들었잖아요. 스펀지로 된 침대 매트리스는 계속 무게가 가해지면 점점 납작해져서 안된다고 했고.

그래서, 기숙사에 돌아가서 내 침대위에 두꺼운 책을 올려 놓고 가만히 살펴 봤죠. 그러니까 이놈의 스펀지 매트리스가 처음에는 두께가 한 30cm쯤 되더니, 한 두 세시간 지나고 나니까 점점 무게에 짓둘려서 자꾸 납작해지는거예요.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채 10cm도 안되는 두께가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제서야, 실장님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죠. 그 썩은 기숙사 침대에서 누워서 자니까, 자는 동안 정말로 점점 떨어져 내려 온거예요. 매트리스가 점점 무게에 눌려서 납작해지니까. 겨우 20cm를 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자는 동안 정말로 아주아주 조금이지만 추락이라면 추락을 한 거죠. 망할 그 스펀지 매트리스 침대 때문에 자꾸 추락하는 꿈을 꾼겁니다.

그냥 방바닥에서 자니까 아무 꿈도 안꾸더라고요. 바로 오늘 아침에 스프링 복원력 최강의 제일 좋은 침대로 당장 주문했어요."
"나름대로 남쪽으로 이사가는 도중에 꿈 이야기 한 번 하는 거네요."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나도 싱긋이 웃고는, 받아 두었던 주스를 마셨다.

"잠시 기류 변화로 기체에 예기치 못한 요동이 있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좌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착용하시고..."

방송이 한 번 나오더니 정말 비행기가 좀 심하게 흔들렸다. 요동은 길고 꽤 심했다. 서 있기 힘들 정도 였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울음을 터뜨린 아기의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제주도라. 이미 결정된 일. 나는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삼다도라 하지 않는가. 돌이 많으니, 광물 분석실 연구원인 나에게 뭐라도 좋은 점이 있을 것이고, 여자가 많다고 하니, 깨진 여자친구와 짝사랑을 만회할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끝으로, 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게 하늘 저편까지 나를 바래다 줄 것임이 분명하다.


* Oliver Royedhouse는 The Ultimate Trivia Collection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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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 No Profile
    가연 05.10.13 09:26 댓글 수정 삭제
    이번에도 멋집니다! +_+
  • No Profile
    곽재식 05.10.14 13:19 댓글 수정 삭제
    이번에"도.."

    오. 그동안 읽어 주셨드랬군요. 감사한 마음 이를길 없습니다.

    본래 마녀가 나오는 정말 본격 환상물을 쓰려고 했는데, 마감시간이 아슬아슬한지라, 예전에 써뒀던 걸로 올렸습니다. 결과는 또다시, 일종의 SF.

    다음 번에는 정말로 마녀가 나옵니다. 따라서, 실패작의 가능성이 높지나 않을지 우려됩니다만, 과감히 쓰고 있습니다.
  • No Profile
    이중 05.10.31 03:24 댓글 수정 삭제
    뭔가 더 나올줄 알았는데. 반전을 기대하던 저로써는; 어지간히 실망한게 아닌데요~? (웃음)
  • No Profile
    곽재식 05.11.05 14:14 댓글 수정 삭제
    낙하산 이란게 그렇지 않습니까. 극적인 일이 생기기 보다는, 그저 안전하고 거스를 수 없는 일일 뿐.

    다만 이 비행기가 제주 국제 공항까지 무사히 착륙 할 수 있을지 약간 의문을 품으실 수 있다는 것으로 위로 하시기 바랍니다. 혹여 확인하시지 않으셨다면 주인공이 앉는 항공기 좌석 번호를 다시 보십시오.
  • No Profile
    날개 08.02.26 21:44 댓글 수정 삭제
    무사히 착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재미있네요. 저는 그래서 이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가 진짜 사고가 나고, 결국 예지몽이었고, 거기에 대비해 주인공은 사전에 낙하산을 미리 사두어서 만일을 대비한 낙하산 덕분에 여유롭게 살아남는 엔딩을 혼자 상상했었습니다.(다른 사람들은? 이라는 문제가 남지만요. 하핫.)
  • No Profile
    실바람 13.05.03 18:43 댓글

    아슬아슬하게 끝까지 읽었어요. ㅎㅎㅎ

    어제밤 보고나자마자 열심히 댓글을 길게 썼는데, 댓글 달 권한이 없다는 메세지가 떴어요.

    오늘은 열어보면 안되는거 읽고 댓글 시험해보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첫줄은 "낙하산"에 대하여 지금 생각나는 걸 적은 거에요.

    오늘은 이상하게도 어제 제법 많이 쓴 댓글내용이 하나도 떠오르지않거든요.ㅠㅠ

    ^_^ @e_acacia


  • No Profile
    청야 18.03.19 19:33 댓글

    행정기관들은 거의 이전하지 않거나 해도 서울가까운 곳으로 가고 산하기관들은 오지로 다 보내버리는 지방이전이 생각나네요...지구 온난화 부분에서 뿜었습니다ㅋㅋㅋ이런 찰진 비유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시는지 궁금하네요ㅋㅋㅋㅋ그리고 침대 문제는전혀 생각하지못했네요ㅋㅋㅋ이걸보니 왠지 저도 침대 중간부분이 꺼져서 사이드에서 잔 후로 더 잘자는것 같은 느낌이.. !

  • 청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8.03.22 20:52 댓글

    약간 아재 개그 느낌이라 사실 독자님들에 따라서는 싫어하시는 분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래도 적당히 조절해 가면서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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