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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지옥의 분홍, 로희

2014.03.31 22:2103.31

지옥의 분홍, 로희

 

 


“검정색으로 해주시면 안 돼요? 분홍색은 좀 촌스러운데……. 검정색에다, 어깨에 뽕도 좀 넣고, 여기 목 부위에 칼라도 좀 만들고, 가슴 살짝 보이게 앞트임도 좀 하고. 분홍색 쫄쫄이는 이거 아무리 봐도 유치찬란한데요. 완전 초딩 분위기라고요. 이왕 만들어 주실 거, 유명 디자이너한테 의뢰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진짜 이거 입기 싫은데. 게다가 요즘은 무광이 유행이라고요. 이렇게 번쩍번쩍 광나는 분홍색 쫄쫄이를 어떻게 입어요. 이런 거 입고 출동했다가는요, 창피해서 실력 발휘도 제대로 못 할 거예요. 사람들 시선 신경쓰느라 움직임도 둔할 테고요. 차라리 이 옷 안 입는 게 낫죠. 아, 이런 말씀 드리면 삐지실 텐데, 죄송해요. 아무튼 옷 안 입으면 레벨 백인데, 옷 입으면 레벨 십으로 떨어질 거예요. 물론 레벨 십 만으로도 제 능력은 초인적이지만, 아, 제 자랑했다고 또 그렇게 인상 찡그리시면, 제가 좀 의기소침해지는데요, 아무튼 이 옷은 다시 한번 생각을 해주세요. 저도 웬만하면 입겠는데요, 아, 분홍색 쫄쫄이, 이건 아무리 좋게 봐도, 좋아 보이지가 않아요. 선생님 같으면 이런 옷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으시겠어요? 거봐요, 대답을 피하시잖아요. 예? 입을 수 있으시다고요! 입어보고 싶으시다고요! 아니, 왜 그렇게 말을 막 던지세요! 그럼 이 옷 입고 다니세요! 전 그냥 평상복 입고 출동할 테니까요! 얼굴이야 뭐 헬멧 쓰면 되죠. 불편해서 곤란할 거라고요? 그건 아시네요? 당연히 불편하죠. 그리고 이 옷은 당연히 창피하고요. 하지만 창피한 것보다야 불편한 게 낫죠. 네? 투정 좀 그만 부리, 누, 누가 투, 투정을. 이게 투정 부리는 거예요! 제가 지금 투정 부리는 거예요! 그럼 이 옷 들고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당신이라면 이 옷 입고 다닐 수 있겠느냐고 한번 물어볼까요? ‘미쳤어요, 이런 옷을 어떻게 입어요!’ 아마 다들 이렇게 말할 걸요. 네? 진짜로 그렇게 말하는지 안 하는지 한번 물어보라고요? 미쳤어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요! 선생님 같으면 물어볼 수 있으시겠어요? 왜 아까부터 계속 말을 막 던지세요! 저 상처 주는 게 그렇게 즐거우세요? 네? 그러니까 제가 자꾸 떼를 쓰니까 일부러 그러시는 거라고요? 하, 정말, 이건 제가 떼를 쓰는 게 아니잖아요! 누가 봐도 분홍색 쫄쫄이는 아니잖아요! 네? 뭐요? 슈퍼맨이요? 슈퍼맨이 입었던 쫄쫄이보다는 낫다고요? 하, 나 참, 여기서 슈퍼맨이 왜 나와요! 그건 그냥 만화 속 주인공 아니에요! 영화 속 주인공이잖아요! 그 주인공이야 어떤 쫄쫄이를 입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어차피 출연료 왕창 받고 연기하는 건데요! 선생님 혹시 슈퍼맨 팬이세요? 그럼 차라리 슈퍼맨을 부르세요! 저는 그냥 집에서 쉴 테니까요! 뻑하면 투정이나 부리는 저랑 뭣하러 같이 지내세요! 슈퍼맨 부르세요, 슈퍼맨! 네? 슈퍼맨을 어떻게 부르냐고요? 만화 속 주인공을 어떻게 부르냐고요?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요? 제가 지금 또 투정 부리고 있는 거라고요? 슈퍼맨 얘기는 그럼 말이 돼요?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제 잘못만 자꾸 지적을 하세요! 이게 다 선생님 때문인데요! 다 이 분홍색 쫄쫄이 때문이잖아요! 그냥 좀 더 세련된 걸로 바꿔주시면 되잖아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왜 안 되냐고요!”
“제가 분홍색을 좋아합니다.”
“…….”
“특히 분홍색 쫄쫄이를 좋아합니다. 번쩍번쩍 광나는 분홍색 쫄쫄이를.”
“…….”
할 말을 잃은 로희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조금 충격을 받았는지 입에서 거품까지 뽀글뽀글 올라왔다.
저 분홍색 페티시즘 환자. 분홍색 쫄쫄이 페티시즘 환자.
“그렇게 격하게 표현하실 필요까지는 없잖습니까. 환자라니요. 전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잡니다.”
그 환자가 그 환자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 신체 건강 얘기가 아니잖아. 의외로 말의 의미를 이해 못 하시네. 완전히 자기 주관적으로만 생각하셔. 꽉 막히셨어. 그리고 왜 멋대로 남의 생각을 읽으시는 거야. 엄연히 주인공은 난데 말이지.
“치사하게 주인공 운운하시깁니까. 이 소설에서 제 캐릭터 특징이 원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대신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 그러니 당연히 로희씨보다 등장 횟수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조종하는 건 접니다. 로희씨를 움직이게 하는 건 저라는 얘깁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부터라도 이 소설에서 로희씨를 안 나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로희씨를 대체할 만한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더 이상 투정 부리지 마십시오. 분홍색 페티시즘 어쩌고 하는 얘기도 앞으로는 하지 마십시오. 자칫 독자들이 저를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이제 그 옷을 한번 입어보십시오. 지금, 제 앞에서요. 보고 싶군요.”
저 변태! 완전히 미친 거 아냐! 아니지, 그냥 직접 말로 하자. 어차피 읽히는 건 똑같으니까.
“미쳤어요! 창피해서 입기도 싫은 이 분홍색 쫄쫄이를 지금 선생님 앞에서 입어보라고요! 선생님 지금 침까지 흘리고 계신 거 아세요? 표정 가관이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지금 저더러 이 옷을 입어보라고 하시는 거죠?”
“맞는지 안 맞는지 보려는 것뿐입니다. 오히려 로희씨 생각이 불순합니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신 겁니까.”
“부, 불순하다니요! 제가 상상은 무슨 상상을 해요! 상상이야 선생님이 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이거 쫄쫄이잖아요! 이런 쫄쫄이 안 맞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 이건 선생님이 입으셔도 맞을 거라고요!”
“왜 이러십니까. 쫄쫄이도 엄연히 치수라는 게 있습니다. 쫄쫄이는 누가 뭐래도 몸에 꽉 껴야 됩니다. 그게 진정한 쫄쫄이입니다. 하지만 로희씨 몸매가, 그리니까 비율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몸매가 그리 훌륭하지 않기 때문에, 쫄쫄이 치고는 조금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한번 입어보시라는 겁니다. 크면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요. 조금 작게 말입니다. 물론 지금 그 쫄쫄이가 작으면 다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만.”
로희는 또 한번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역시 입에서는 뽀글뽀글.
“그, 그렇게 노골적으로 제 몸매 얘기를……. 그렇게 막 제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통쾌하세요!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시네요. 그리고 이 쫄쫄이가 작으면 다시 만들 필요가 없다니요! 이거 완전 성희롱 발언이에요! 사과하세요! 안 하시면 정식으로 선생님을 고소할 겁니다.”
“엇, 몸매 트라우마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로희씨는 몸매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밤에도 그렇게 치킨과 맥주, 라면을 즐기시기에, 몸매 가꾸는 것에 무덤덤한 분이시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아니 무슨, 그런 분이 그렇게 한밤중에 그런 걸 그렇게나 막 드시고. 누구라도 그런 생각 갖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 제가 언제 또 그렇게 막 먹었다고……. 그럼 저 대신 선생님이 한번 출동해 보세요! 이게 에너지 소모가 얼마나 심한 줄이나 아세요! 다른 여자들처럼 먹었다가는 힘 한번 못 쓰고 픽 쓰러진다고요! 나 참, 누군 그렇게 먹고 싶어서 먹는 줄 아세요! 필요하니까, 그렇게 안 먹으면 안 되니까 먹는 거라고요! 그리고, 제가 또 언제 치킨하고 맥주하고 라면을 즐겨요, 즐기기는요! 그 늦은 시간에 먹을 만한 게 그것뿐이니까 그렇죠! 선택의 폭이 좁다고요! 그리고 저 카페에서 커피도 즐겨 마시는 여자에요!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그 얘기는 쏙 빼세요!”
“아, 네 알았으니까 어서 입어보기나 하십시오. 로희씨 오늘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만 하면 과민 반응을 보이시니, 이거 대화 나누기가 상당히 불편합니다.”
“다 이 옷 때문이잖아요! 선생님의 그 분홍색 쫄쫄이 페티시즘 때문이잖아요! 제 취향을 조금이라도 반영해 주시면 해결이 되잖아요! 왜 자꾸 책임을 저한테로만 돌리세요!”
“거 페티시즘이라는 말 좀 하지 마십시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십니다. 그냥 분홍색 쫄쫄이를 조금 좋아할 뿐입니다. 분홍색, 얼마나 여성스럽고 좋습니까.”
“그게 분홍색 페티시즘이에요! 인정을 하세요! 인정하면 편해져요!”
“뭘 인정을 합니까, 인정을 하기는. 아닌데 왜 인정을 합니까. 그럼 로희씨나 인정을 하십시오. 몸매 무덤덤증.”
“네, 그래요, 저 몸매 무덤덤증이에요! 매일 밤마다 치킨하고 맥주하고 라면 먹어요! 몸매에 신경 안 써요! 신경 쓴다고 해서 좋아질 몸매도 아니고요! 그런데요, 그런 제 볼품없는 몸매를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취향이 저 같은 몸매 쪽이신가요? 참 독특하시네요.”
“왜 자꾸 이야기를 그런 쪽으로 몰고 가시는 겁니까. 누가 로희씨 몸매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니, 했습니까? 그 분홍색 쫄쫄이가 맞나 안 맞나 그걸 보고 싶어 하는 거 아닙니까. 몸에 꽉 끼는 분홍색 쫄쫄이, 그 완벽한 아름다움을 볼 수만 있다면, 하, 생각만 해도 황홀합니다.”
뭐야 지금, 했습니다, 라고 했어.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변태. 그리고 자기가 분홍색 쫄쫄이 페티시즘 환자라고 인정도 하고 말이지. 완전 변태. 내 말이 맞네. 이겼다!
“잠깐 뒤돌아서세요.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 갈아입을 수가 없잖아요.”
“아, 그렇군요. 그럼 뒤돌아서 있겠습니다. 0.3초 안에 갈아입으십시오.”
0.3초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이젠 아주 노골적으로 취향을 드러낸다, 웃겨 아주, 분홍색 쫄쫄이 페티시즘 환자. 저거 봐, 저거 봐! 이젠 부정도 안 해!
“에휴, 0.3초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좀 꽉 껴서요. 생각보다 입는 데 좀 시간이 걸리네요. 그런데 또 꽉 끼기는 하는데요, 생각보다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네요. 다 입었어요. 아, 역시 좀 창피하네요. 몸매 그대로 드러나네요. 야식 끊어야 하나.”
“어디 보자, 네, 잘 맞습니다. 그럼 다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이번에는 0.1초 드리겠습니다.”
“뭐, 뭐예요! 기껏 갈아입으라고 하시고는, 그럼 무슨, 그러니까 무슨 느낌 같은 걸 말씀해 주셔야죠!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이렇게 입자마자 바로 벗으라고 하시는 게 어딨어요! 그리고 시간은 왜 단축시키시는 거예요! 기분 나쁘잖아요!”
“안 불편하시다면서요. 그럼 된 거 아닙니까.”
“되긴 뭐가 돼요! 선생님 분홍색 쫄쫄이 페티시즘 환자시잖아요! 그럼 좀 더 오래 보셔야죠! 이렇게 빨리 갈아입으라고 하시면 안 되죠! 더 기분 나쁘잖아요!”
“그럼 계속 입고 계십시오.”
“창피하게 이걸 어떻게 계속 입고 있어요!”
“도대체 그럼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입고 계시라 해도 뭐라 하시고, 갈아입으시라 해도 뭐라 하시고, 어지럽습니다.”
“어지럽긴 뭐가 어지러워요! 느낌 짧게 말씀해 주시면 되는데요!”
“촌스럽습니다.”
짧아. 짧아도 너무 짧아. 그리고 지나치게 솔직해.
내가 그렇게 창피해서 못 입겠다고 할 때는 아무 소리 안 하더니, 기껏 입어줬더니 이제 와서 촌스럽대. 당연하지, 당연히 촌스러워. 나도 알아. 그런데 선생님은 분홍색 쫄쫄이 페티시즘 환자잖아. 그래서 그래. 그런 사람한테 촌스럽다는 말을 들으니까 내가 정말 너무 비참해. 이건 분명 옷에 문제가 있는 건데, 이상하게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려. 아, 자신감 떨어져.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인 내가, 인간 앞에 나서기가 싫어. 창피하고 촌스러워서 말이야. 이게 말이 돼! 안 되지, 당연히 안 돼.
“선생님, 저기 있잖아요, 저 이 옷 못 입겠어요. 혹시 뭐 어디 동대문 시장에서 사오신 건 아니죠? 만약 그러셨다면 반품하세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정말로 맞춘 거라고요? 제 신체 사이즈는 또 어떻게 아시고 맞출 생각을 다 하셨을까요. 정말로 맞춘 거라면, 피 같은 돈 그냥 날리셨네요. 아무튼 전 이 옷 못 입어요. 마음에 드는 옷이 생길 때까지는 그냥 평상복 입고 출동할게요. 대신 최대치로 능력 발동하면 돼요. 그럼 움직임이 워낙 빨라서, 인간들의 시력으로는 저를 볼 수 없을 거예요. 피로감은 좀 심하겠지만, 그래도 그게 낫겠어요. 기분 안 나쁘시죠? 아니지, 솔직히 기분 나쁜 건 저죠. 이렇게 촌스러운 걸 입으라고 하시다니, 제 입장은 조금도 생각을 안 하셨던 거잖아요. 선생님은 너무 독단적이세요. 주변 의견 같은 건 아예 무시하시고. 사람들한테 그런 말씀 많이 들으시죠? 아니라고요? 왜요? 많이 들으실 텐데요? 저한테까지 왜 거짓말을 하고 그러세요? 거짓말 아니라고요? 진짜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또 제 잘못인 것 같네요. 제가 착각했습니다. 네? 그렇게 뉘우칠 필요까지는 없다고요? 지금 이 뉘앙스가 뉘우치는 뉘앙스로 들리셨어요? 선생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여쭤봐도 될까요? 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선생님 혹시 주변에 아무도 없으시죠? 얘기 나눌 수 있는 상대는 저뿐이죠, 그쵸?”
“아닙니다. 만나서 함께 얘기 나누는 사람 많습니다. 아마도 로희씨야말로 상대가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뭐, 그거야 당연하다고 봅니다. 로희씨는 특별한 존재시니까요. 비꼬는 게 아니고요, 진심입니다.”
살의, 피가 끓어오른다. 하지만 참자. 어차피 죽이지도 못할 거.
“그런데 로희씨가 오해하고 계신 게 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한 말 말입니다. 그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일부러 촌스러워 보이도록 만든 옷이니까요. 그러니까 로희씨가 저 옷을 입으셨을 때 촌스러워 보인 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딱 제 의도대로 됐다는 겁니다. 제대로 잘 만들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불쾌해하시거나, 저 옷에 불만을 가지시거나, 저를 죽이고 싶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로희씨가 촌스러워 보여서 저는 진심으로 기쁩니다.”
뭐지 이 사람, 취향이 너무 그로테스크한대. 촌스러운 걸 좋아하는 건가. 예를 들면 분홍색 쫄쫄이…를 입은 나. 하하, 이거 이거, 이럼 곤란한대. 우린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아요, 선생님. 아잉.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꼭 발바닥 가려운 사람처럼.”
“왜 옷이 촌스러워야 하는데요? 이왕이면 누가 봐도 멋있다는 감탄이 나올 수 있는 그런 옷이 낫지 않을까요? 게다가 제가 입을 옷이잖아요. 그러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 취향이 아닐까 싶은데요. 선생님의 그 사심 가득한 취향 말고요.”
“사심 가득한 취향이라는 게 뭡니까? 분홍색 쫄쫄이 페티시즘은 대충 뭔지 알겠는데, 사심 가득한 취향이라는 건 도대체……. 아니, 왜 또 그 발바닥 가려운 사람 같은 표정을 짓습니까? 참 나, 로희씨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건 그렇고요, 물론 로희씨가 입으실 옷이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로희씨 취향일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 생각은 했습니다. 제일 먼저 했습니다. 안 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뭔가 섹스어필할 수 있는 그런 옷, 그게 로희씨가 선호하는 옷 아닙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그렇게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흠, 하지만 그 생각은 곧 접어야 했습니다. 제가 로희씨 성격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일 로희씨 취향에 맞는 옷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로희씨가 그 옷을 입고 출동을 했습니다. 로희씨 실력으로 봤을 때, 아마 상황 정리하는 데 1분이면 충분할 겁니다. 물론 상대에 따라서는 채 1분도 안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복귀를 하셔야죠. 상황이 정리됐으니까 바로 복귀를 하셔야 합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지만 로희씨가 누굽니까.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 그러니까 여기서 우월하다는 건 신체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외모나 성격 뭐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우월한 존재, 그러면서도 그걸 인간들 앞에서 뽐내고 싶어 합니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어 하십니다. 부정하지는 않으시는군요. 그래도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이었을 겁니다. 한 남자가 입국심사대를 통과했습니다. 이름은 이디도. 나이는 27세. 여권 상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무사히 입국심사대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는 이디도가 아닙니다. 출국할 때의 이름은 지도남. 나이는 29세였습니다. 그런 자가 이디도가 되어 돌아온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그 자를 이디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외모나 나이 모든 게 달라졌는데도, 지도남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이디도를 보는 순간 지도남을 잊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은 이제 지씨 성이 아니라 이씨 성이 됩니다. 나이도 달라집니다. 모두 두 살이 적어집니다. 가족뿐만이 아닙니다. 그 가족의 친구, 그 가족의 친구의 친구, 그 가족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 다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지도남이 이디도가 되는 순간,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 때문에 질서가 무너집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고, 살아 있던 사람이 사라집니다. 단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게 바뀝니다. 그래서, 제가 출동을 명했지요. 그 자를 제거하라고요. 그러니까, 이디도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그 여자를 제거하라고요.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그 여자를 제거하라고요. 길거리 화가 흉내를 내는 그 여자를 제거하라고요. 인간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역마를 제거하라고요.”
“네, 그래서 멋지게 제거했잖아요. 와, 목을 베니까 갑자기 종인 인형으로 변하더라고요. 그러고는 화르륵 불타버리고. 그런데 그게 왜요? 전 제대로 임무 수행을 했는데요.”
“제대로 하긴 뭘 제대로 합니까. 그런 전투 능력 제로인 사역마한테 하마터면 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사역마가 한껏 추켜세워 주니까 우쭐해지셔서는, 본인 능력 자랑에 정신이 팔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다 결국 그림까지 그리게 되고, 하마터면 그 그림을 받을 뻔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사역마의 능력은 로희씨한테도 통한다고 제가 몇 번을 강조했습니까. 그런데도 그림을 받을 뻔하시고. 어휴, 만일 그때 로희씨가 그 그림을 받았더라면,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에이, 왜 자꾸 그 얘기를. 저 그때 정신 팔리지 않았다니까요. 그냥 사역마랑 같이 놀아준 거였어요. 제가 우쭐해하기는요, 무슨.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도 참.”
“그게 다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있지 않습니까. 좀비 바이러스 퍼뜨리려던 의사 사건도 있잖습니까. 그뿐만이 아니죠…….”
“그만 하세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을 하고 그러세요!”
“이게 사소한 게 아니니까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아 글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요, 뭐 어쨌든 제 성격이야 그렇다 쳐요. 그거랑 이 촌스러운 옷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요?”
“아직 감을 못 잡으신 겁니까. 전 충분히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못 잡았어요!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아주 은근히 사람 무시한다! 아, 또 살의 느껴.
“그래야 사람들 앞에서 우쭐거리지 않으실 거 아닙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자세하게 말씀을 하세요!”
아 진짜 싫증나는 타입이야. 사람 왜 이렇게 지루하게 만드니!
“그러니까 촌스러운 옷을 입으셔야, 창피해서라도 빨리 임무를 마치고 그 자리를 벗어나실 거 아닙니까. 사람들 앞에서 뽐내고 그러지 못하실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옷을 만든 겁니다.”
그래, 진작 그렇게 얘기를 할 것이지. 몇 줄 되지도 않는 얘기를 가지고 무슨 인천공항까지 나오고, 참. 그러니까 결국은 이거잖아. 내 외모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원래 옷 자체가 촌스러웠던 거잖아. 하마터면 큰 오해를 할 뻔한 거 아니야. 의기소침해질 뻔했잖아. 외모야 이만하면 어디 가서도 안 빠지지. 그러니까 성격이 문제네. 하지만 괜찮아. 그런 건 눈에 안 보이는 거니까. 게다가 내가 뭐 인간들하고 어울릴 일도 없고. 그리고 성격 안 좋은 건 선생님도 마찬가지고.
“그런데요, 선생님. 서기준이라는 인간은 도대체 정체가 뭔데 제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거죠? 제가 보기엔 그냥 평범한 25세 남자일 뿐인데 말이에요. 마땅한 직업도 구하지 못해서 지금 편의점 알바 하고 있고. 나중에 무슨 엄청 위대한 인물이라도 되나 보죠? 아, 혹시 선생님 후계자! 선생님 곧 물러나실 건가 봐요!”
로희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 밝은 표정이 좀처럼 변하지도 않았다.
“지금 로희씨 표정 아주 행복해 보이십니다. 그 행복을 깨고 싶지 않군요. 허락해 주신다면 입을 다물고 싶습니다만, 어차피 로희씨도 아셔야 할 테니까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후계자는 아닙니다. 후계자를 키울 생각은 아직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기준씨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립니다만, 그 자는 악입니다. 단순한 악이 아니라, 악 중의 악입니다. 악 위의 악,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는 악, 로희씨조차 상대할 수 없게 될 악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악이 될 수도 있는 인간입니다. 그런 악으로 만들기 위해 악이 이 세상에 탄생시킨 인간입니다. 아니, 악입니다. 그러니, 그런 서기준씨가 각성을 하면 안 됩니다. 악 중의 악, 악 위의 악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막기 위해서는 로희씨가 그 서기준씨를 지키셔야 합니다. 악이 서기준씨를 죽이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악은 서기준씨를 죽이려 합니다. 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악이 서기준씨를 죽였을 때, 서기준씨는 각성을 하게 되니까요. 서기준씨가 죽으면, 이 세계도 죽습니다. 서기준씨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로희씨밖에 없습니다. 저 촌스러운 옷을 입으시고, 오로지 서기준씨 죽음을 막는 데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뭐가 이렇게 비장해! 그런데 악 중의 악, 악 위의 악이라.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나, 서기준이라는 인간이! 아니, 서기준이라는 악이! 그럼 그냥 내가 죽여버리면 안 되나, 그 서기준을. 악이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이면 되지 않나! 아니면, 서기준을 죽이려고 하는 그 악을 죽이면 안 되나! 악 중의 악, 악 위의 악이 아니라면, 내가 죽일 수 있는 악 아닐까!
“아니오, 로희씨는 서기준씨를 못 죽입니다. 그리고 로희씨는 악도 못 죽입니다. 물론 사역마는 죽일 수 있지만 악은 못 죽입니다. 혹시 잊고 계셨던 겁니까, 로희씨도 …악이라는 사실을요? 악은 악을 죽이지 못합니다. 아직 악이 되지 못한 악도 죽이지 못합니다. 악을 죽일 수 있는 악은, 그 자가 유일합니다. …당신의 아버지 말입니다. 당신을 버린 아버지 말입니다. 인간과 게임을 벌이기 위해 당신을 버린 아버지 말입니다.”
“…….”
“전투 능력은 그 어느 악보다 뛰어나지만, 악하지 않은 악. 인간을 사랑하는 악, 악으로서 실격인 악, 자신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안겨준 악, 만들어내지 말았어야 할 악, 그래서 죽이려 했던 악. 그 악, 그 악이 바로 로희씨입니다. 하지만 로희씨의 아버지는 로희씨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저에게 로희씨를 보살피도록 했습니다. 게임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가 말한다. 내가 버린 악을 잘 보살펴라. 내가 말한다. 내가 악 중의 악, 악 위의 악을 만들어내는 걸 막게 하라. 내가 말한다. 만일 막지 못한다면, 이 세계에서 인간은 사라진다. 내가 말한다. 너도 게임을 즐기거라, 살고 싶다면.’ 거부할 수 없는 게임이었습니다.”
“아 참, 그랬지요. 깜빡했어요, 저도 악이라는 사실을요. 뭐,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그나저나, 아버지는 말을 시작할 때마다 먼저 ‘내가 말한다’를 말하는군요. 개성 있어 보여 좋네요. 내가 말한다. 난 버려진 악이다. 내가 말한다. 난 악 중의 악, 악 위의 악이 만들어지는 걸 막는다. 어떤가요, 선생님? 좀 위엄 있어 보이지 않나요? 아니면 역시 카피한 느낌이 나나요? 아무래도 제 걸 만드는 게 좋겠죠? 유치해도 자기만의 것은 유일하니까요. 그런 자부심이 생기겠죠? 뭐가 좋을까요?”
“그런 건 알아서 생각하십시오. 관심 없습니다. 아 참,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분홍색 쫄쫄이 때문에 제가 정작 할 말은 안 하고, 지금까지 쓸데없는 말만 했습니다. 지금 바로 송파동으로 출동해 주십시오. 사역마 두 마리가 멋대로 설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바로 제거해 주십시오. 그리고 곧장 복귀해 주십시오. 제발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으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바로 복귀…… 허 참, 정말 제멋대로십니다. 아직 말도 안 끝났는데 벌써 사라지시다니요…….”
선생님 얘기 다 듣고 있다가는 이미 상황 종료, 디 엔드입니다. 선생님은 현장을 너무 모르신단 말이죠. 선생님이 한마디를 더 하시는 동안 현장에서는 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어요. 아무리 백 명을 구한들 뭐하겠어요. 단 한 명이 목숨을 잃는다면, 저한테 그 임무는 실패라고요.
슈웅, 슈웅, 슈웅.
아, 꼭 입으로 이런 효과음을 낼 필요는 없는데.
음, 저긴가 보네요. 저 가게, 왜 유독 저 가게만 저렇게 어두울까요. 그런데 어두워도 너무 어둡네요. 어둡다기보다는 그냥 까맣다고 해야 할까요, 빛이 아예 없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멋지네요. 제게는 너무 아늑한 곳입니다. 저런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니, 제 사역마로 삼고 싶을 정도네요. 암흑, 정말 멋지지 않나요. 인간들 눈에는 제 이 분홍색 쫄쫄이가 보일 리 없잖아요, 저런 곳에서는. 정말 멋진 곳입니다.
“으악! 으악! 으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살려줘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뭐야, 뭐야! 왜 고함을 지르고 그래! 왜 그래! 설마 내 모습이 보이는 거야! 이 분홍색 쫄쫄이가 보이는 거야! 이렇게 깜깜한데도 보이는 거야! 그래서 그러는 거야!…가 아니구나.
“이봐요, 사역마 아가씨! 이제 그만 그 남자 몸에서 손을 떼시죠! 인간의 몸이 당신에게 닿으면 뭔가가 보이나 봐요! 하지만 난 인간이 아니라 악, 저한테는 통하지 않는답니다. 오호호. 전 안 보여요.”
로희의 말을 듣자마자 여자 사역마는 남자의 몸에서 손을 뗐다.
남자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스르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눈알은 반쯤 뒤집어졌고, 입에서는 흰 거품이 흘러나왔다. 한겨울에 강물 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지만 로희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저 남자는 살았다. 며칠 악몽 좀 꾸고 나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니 남자에게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 사역마 아가씨였다.
“뭐, 뭐예요, 다, 당신! 보, 보기 휴, 흉해요! 도, 도대체 그, 그 옷은 왜, 왜 입고 다니는 거, 거예요! 초, 초, 초, 초, 촌스러워요!”
왜 촌스럽다는 말만 더 더듬어! 그래도 깜깜하니까 상관없어. 지금 내 모습 볼 수 있는 자들은, 너희밖에 없으니까.
“어, 어둠을 거, 걷어내겠어요! 다, 당신 모습, 다, 다 볼 수 있게 하, 할 거예요! 초, 초, 초, 초, 촌스럽다 못해, 무, 무서울 정도예요!”
자꾸 촌스럽다는 말만 더 더듬지 말라니까!
“그런데 넌 사역마 주제에 내 정체도 모르는 거야? 나잖아, 로희! 사역마 천적. 지옥의 분홍. 뭐, 지옥의 분홍이라는 닉네임은 방금 지어낸 거지만. 아무튼 정말로 나 몰라?”
“모, 몰라요! 제, 제가…….”
“아, 됐어. 그만 해도 돼. 답답하게 왜 자꾸 말을 더듬어!”
“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그런데 전 정말로 당신 몰라요. 그러니까 주문하지 말고 돌아가주세요. 여기 영업 끝났어요.”
“난 돈 없어서 주문도 못 해. 그러고 보니까 이 옷에 주머니가 없구나. 네 덕에 중요한 걸 알아냈어. 이 옷의 허점 말이야. 또 한번 선생님을 몰아붙일 수 있는 건수를 찾아냈어. 고마워. ……그런데 너 참 건방지구나. 내 앞에서 거짓말을 다 하고. 사역마가 날 모를 리 없잖아. 엄밀히, 엄격하게 말하면 나도 네 주인인데 말이지. 사역마 주제에 주인을 몰라보다니, 이것처럼 창피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니? 사역마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나는 존재감 없는 주인인가, 하고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어. 오호호, 하지만 뭐 상관없어. 내가 또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잖아. 그런 건 금방 잊어버리거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같은 거 안 했어요. 그래도 어쨌든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처음에는 정말 아주 잠깐 동안은 당신이 누군지 몰랐어요. 그 초, 초, 초, 초, 촌스러운 분홍색 쫄쫄이 때문에요. 보고 있는 제가 다 창피했어요. 그런데 저 남자랑 같이 온 저 여자는 왜 저렇게 조용할까요. 주변이 이렇게 깜깜하면 불 좀 켜라고 소리칠 법도 한데 말이에요. 그런데 그 분홍색 쫄쫄이 한번 만져봐도 돼요? 무슨 소재로 만든 거예요?”
여자 사역마는 로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뻗었다. 오른손을.
“응, 저 여자는 지금 잠깐 정지 상태야. 숨만 쉴 뿐 시체나 다름없어. 5분 동안. 시간이야 그 정도면 충분하지. 듣지도 못해. 보지도 못해. 움직이지도 못해. 말하지도 못해. 생각하지도 못해. 웃지도 못해. 울지도 못해. 눈 뜨지도 못해. 내가 이미 그렇게 만들어놨으니까. 그러니까 5분 동안. 시간이야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런데 너, 괜찮아? 비명을 안 지르네. 보기보다 참을성이 많구나. 아니면 통증을 못 느끼는 체질인가. 불쌍하군. 통증이 얼마나 짜릿한데. 아니지, 내 실력이 뛰어난 건가. 통증이 뇌에 전달되기도 전에 잘라버렸으니까, 네 그 오른쪽 손목을. 오호호.”
그제야 여자 사역마는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로희의 몸에 손을 대려던 그 손. 분홍색 쫄쫄이를 만져봐도 되겠냐며 뻗었던 그 손.
여자 사역마는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고 잠시 감탄했다. 손목 부위가 잘려나갔는데, 그 잘린 부위가 어쩜 이리도 깔끔할 수 있을까. 울퉁불퉁 들쭉날쭉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마치 10년 동안 쉬지 않고 갈아온 칼로 단번에 무를 자른 듯하다. 그러니까 잘린 부위가 비현실적으로 매끈하다. 그리고 이제야 잘린 부위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그러고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줄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 위로.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여자 사역마의 비명은 시멘트벽에 금이 갈 정도로 크고 날카로웠다.
“제 손 언제 잘린 거죠? 언제 자르셨어요? 전혀 눈치 못 챘어요! 그리고, 어쩜 이렇게 아름답게 잘릴 수가 있죠! 아름다워요! 자르는 건, 아니 잘리는 건, 아름다워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뭐야, 내가 자르면 안 아름답잖아. 하나도 아름답지가 않잖아. 울퉁불퉁 들쭉날쭉, 흉해. 징그러워. 꼴사나워. 미워. 너무 미워. 아주 미워. 구역질나. 분홍색 쫄쫄이 구역질나. 우웩! 농담이에요, 로희님. 고마워요. 우웩!
여자 사역마가 방금 지른 비명은 잘린 손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주방으로 달려가 칼로 남자 사역마의 몸을 내리치며 지른 비명이었다. 그러니까 자기 남자친구를 죽이기 위해 지른 비명이었다. 물론 우웩!…은, 음, 헷갈린다.
툭, 툭, 툭, 툭, 툭.
남자 사역마의 팔과 다리와 목이 역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그 전에 몸에서 떨어졌고, 그 다음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방용 칼로 팔과 다리와 목을 절단하다니, 그것도 왼쪽 손만으로 그렇게 하다니, 비록 깔끔하게 절단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왜소한 체격에 비해 힘이 상당히 세다. 역시 사역마다웠다. 그래도 굳이 다섯 번씩이나 내리칠 필요까지야…….
“이봐, 여자 사역마! 너 왜 그래! 왜 내 수고까지 덜어주고 그래!”
“어! 뭐예요! 로희님은 못 들으셨어요? 전 들었는데, 대래의 목소리. 아, 제 남자친구, 그러니까 저 남자 사역마 이름이 대래예요. 노대래. 한낱 사역마라고 해서 이름이 없는 건 아니에요. 물론 저도 이름이 있고요. 은미예요, 이은미. 대래가 그랬거든요. ‘생각이 안 나, 미안. 은미 너한테 또 뭘 사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어서 와서 나를 죽여줘. 저 초, 초, 초, 초, 촌스러운 분홍색 쫄쫄이가 나를 죽이기 전에. 그러니까 은미 네가 나를 죽여줘. 어차피 우린 죽잖아. 한낱 사역마일 뿐이니까. 우린 잘못한 게 없지만, 우린 사역마잖아. 흐흐, 오늘 데이트 못 하겠다. 미안해.’ 이랬거든요. 그래서 죽였어요. 바보같이, 자기가 뭘 사과해야 하는지 떠올리지도 못하고. 죽어 마땅하죠. 그래서 툭, 툭, 툭, 툭, 툭. 다시는 사역마가 되지 말라고 툭, 툭, 툭, 툭, 툭. 우린 다섯 조각을 내야 하잖아요. 그래야 영원히 사라지잖아요. 아, 남자들이란 정말 무책임하다니까요. 여자와의 약속도 잊어버리고. ……. 실은 제가 먼저 죽으려고 했어요. 대래보다 제가 먼저. 그래서 로희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던 건데. 제 주특기가 상대의 몸에 손을 대서 공포를 보여주는 거잖아요. 뇌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그래서 로희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던 거예요. 물론 로희님 몸에는 손을 대봐야 소용없죠. 로희님에게는 안 통하니까요. 알면서도 손을 대려고 했죠. 그럼 로희님은 ‘한낱 사역마 주제에 나에게 능력을 발동시키려 하다니, 괘씸해!’ 하면서 저를 죽이실 줄 알았죠. 그런데 이렇게 손만 자르시다니, 역시 잔인하세요. 용서라는 게 없네요. 로희님이야말로 악 중의 악이세요…가 아니었네요. 아, 이렇게 시간 끌면 안 되는데, 먼저 죽은 대래가 기다리겠어요. 그럼, 나머지 세 번도 좀 부탁드릴게요, 로희님.”
빙글, 여자 사역마는 칼을 쥔 왼손을 빙글 하고 돌렸다.
울퉁불퉁, 들쭉날쭉, 삐뚤빼뚤. 그렇게 잘린 머리가 역시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론 그 전에 몸에서 먼저 떨어졌고.
오호호, 이러면 둘 다 그래도 행복하게 죽은 거 맞겠지. 나 그렇게 잔인한 여자 아니야. 5분, 시간이야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물론 위기는 있었어. 초, 초, 초, 초, 촌스러운 분홍색. 일부러 더 많이 더듬고 말이지. 그럼 나빠. 이 옷이 얼마나 촌스러운데, 그걸 또 대놓고 막 놀리고 말이지. 나빴어. 하마터면 내 손으로 직접 둘 다 죽일 뻔했다고.
그런데, 느껴지니? 나 지금, 너희들 죽음, 슬퍼해 주고 있는 거?
툭, 툭, 툭.
이젠 사역마로 만들어질 일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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