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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영 마에스트로 G

2014.03.31 22:2003.31

마에스트로 G

* 표기법에 대한 안내 : 작중 아르헨티나 탱고에 관한 용어는 현지 발음을 살려 표기하였다. 다만 땅고나 일반적인 외래 명사, 이름은 표준 표기법을 따랐음을 밝힌다. (땅고->탱고, 마에스뜨로->마에스트로, 땅고 떼라삐아->탱고 테라피, 까를로스 가이딴->카를로스 가이탄 등)



음악이 끝나고 손님들도 모두 떠난 밀롱가(탱고를 추는 바)에 한 명의 소녀만이 쓸쓸한 자리를 지켰다. 그는 소녀에게 똑바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훗날 그 순간을 돌이키며, 어쩌면 그저 끝나버렸을 이야기가 거기에서 기적처럼 시작되었노라 말하곤 했다.

* * * * *

소녀의 20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인생에서 탱고는 고리타분한 춤에 지나지 않았다. 소녀의 증조부는 당대 전설이라 불린 탱고 마에스트로라 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떠들든 소녀의 가족들은 탱고와 먼 삶을 살았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소녀의 조부는 당신 아버지의 그림자에 평생 시달려야 했고, 그 때문인지 가족들 누구도 탱고와 연을 맺지 못하도록 엄히 다스렸다. 조부는 나이가 들수록 탱고를 혐오했다. 그래서 소녀의 가족들은 나고 자라 뿌리내렸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탱고를 쉽게 접할 수 없는 한적한 시골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그 점이 늘 불만이었다.
조부는 탱고 혐오증 외엔 좋은 사람이었다. 소녀도 조부를 사랑하였기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척 슬펐다. 반면 기쁘기도 했다. 심심하고 외로운 촌구석에서 드디어 벗어날 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조부의 장례가 끝나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가족은 집과 땅을 팔았다. 소녀의 부친은 조부의 탱고 혐오와 단속을 이해하고 줄곧 따라온 사람이었으나, 시골 생활이 따분하기 그지없다는 데엔 소녀와 같은 의견이었다.

소녀는 조부의 짐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양친 모두 살림 정리에 바빠서 자연스레 소녀의 몫이 되었다. 소녀는 조부의 흔적을 정리하다 이야기로만 아는 증조부에 대한 많은 자료를 발굴해냈다. 하나의 궤짝에, 얼마나 깊이 숨겨두었는지 하마터면 발견하지 못하고 떠날 뻔했다. 일기며, 사진이며, 스크랩 슬레이트며 무수한 상패며 훈장, 너덜거리는 탱고 슈즈 하나하나를 꺼내보던 소녀는 조부의 마음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던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끝내 그의 흔적은 버리지 못한 아들의 마음이었다.
소녀는 부모님 몰래 궤짝을 제 손에 넣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서 신변 모두 정리되자 천천히 증조부의 흔적을 더듬었다. 수많은 공연 영상 속의 증조부는 조부와 부친에게 유전자를 과연 나누어 주었는지 의심될 정도로 낯설고 멋있었다. 탱고가 고리타분한 춤이라 여겼던 과거를 후회했다. 어떻게 생긴 여자든 증조부와 춤을 추면 마법에 걸린 신데렐라처럼 예뻐졌다. 남자로 시작해 여자로 끝나는 순간의 예술에 소녀는 홀딱 반해버렸다. 어쩐지 자신의 안에 증조부가 남긴 탱고 유전자가 있고 그것이 눈을 뜬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강하게 이끌렸다.
강한 열망으로 소녀는 탱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모의 눈을 피해 거리에서 탱고를 공연하는 이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석 달간 일주일에 한 번 탱고를 배웠다. 유명한 강습소는 부모의 지인이나 친구들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 피했다. 비록 영상에서 보던 증조부의 화려한 탱고에는 발끝도 미치지 못할, 아주 기본적인 걷기와 몇 가지 몸을 움직이는 기술뿐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럭저럭 초보 티를 벗어날 무렵 소녀는 이제 직접 증조부가 살아 숨 쉰 그 세계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밀롱가에서 모르는 남자와 공주님처럼 아름답게 춤을 출 상상에 푹 빠졌다. 부모가 모두 집을 비우는 날을 골라 그 날 열리는 밀롱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소녀가 자신의 계획을 최소한 스승들에게 알렸다면 그들은 데뷔하기 좋은 밀롱가를 골라주거나 여차하면 함께 가 주었을 것이다. 소녀는 지나치게 신중했고, 무지했다. 하필 고른 밀롱가가 가장 최악의 선택일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졸업파티 때 입었던 드레스를 꺼내 입고 단 한 켤레 가진 낮은 굽의 연습용 탱고슈즈를 신었다. 제 나름대로 꾸며본답시고 화장도 했다. 보통의 밀롱가라면 충분했을 터였다. 소녀는 입장하고서야 크게 낭패했다. 그곳은 드레스코드의 수준이며 춤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았다. 사방에서 낮잡아보는 시선이 쏠렸다. 

‘딱 한 곡만 출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부끄러운 와중에도 소녀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버티기로 했다. 기다리기로 했다. 노력해보기로 했다. 소녀의 증조부가 그러했던 것처럼, 촌뜨기라 업신여김당하며 아무도 춤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던 비참함을 이겨내고 결국 플로어의 지배자가 된 그 용기를 본받으려 애썼다.
소녀의 노력에도 현실을 냉혹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폐점시간이 도래했지만, 소녀는 단 한 곡도 춤을 출 수 없었다. 다른 손님이 모두 떠나고 점원들이 뒷정리를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꾹꾹 참았던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죽고 싶단 생각이 들 무렵, 누군가가 다가왔다. 소녀는 퇴장을 기다리다 못한 직원이 축객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다가온 사람은 전혀 예상외의 말을 꺼냈다.

“아가씨, 당신과 춤출 행운을 제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 * * * *

아르헨티나 탱고의 거장, 마에스트로 카를로스 가이탄이 끝내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임종을 지켜본 이들은 그가 아주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고통 없이 숨을 거두었다고 알렸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보물이었고, 전 세계 땅게로스(탱고를 추는 사람들)의 큰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그의 죽음에 아르헨티나 전역이 슬픔에 잠겼으며, 장례식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각지의 밀롱가는 그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장례식 당일 일제히 문을 닫았다.

카를로스 가이탄의 탱고 일생은 자서전과 영화를 통해 익히 알려졌듯 고난과 역경의 드라마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길거리 반도네온 연주자로 목숨을 연명하였고, 탱고에 매료되어 이후 오직 탱고 한 길만을 바라보며 우직하게 살았다. 당대 내로라하는 탱고 마에스트로를 단 한 명도 사사하지 않고 탱고 문디알 최연소 챔피언이 된 천재였다. 그의 독특한 탱고 포지션과 철학은 크나큰 돌풍을 일으켜 세계 탱고계의 판도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그의 탱고 사조는 전통적인 방식의 탱고와도, 20세기 전후 아스트로 피아졸라와 함께 태동한 누에보 탱고와도 다른 독자적인 영역이며 동시에 두 탱고 스타일 모두를 계승한 정당한 후계자였다. 그는 시대에 발맞춘 새로운 사조뿐 아니라 언제나 전통의 가치를 잊지 말고 갈고 닦기를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원숙해진 그는 세계 탱고협회의 협회장에 올라 탱고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보급하고 활성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탱고와 정신질환 환자, 노인을 위한 재활 치료를 접목한 ‘탱고 테라피’는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여자가 그와 춤을 출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나타나는 밀롱가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고, 여신처럼 꾸민 여자들이 그의 눈에 띄어 춤 신청을 받고자 너나 할 것 없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는 공연이나 대회 등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오랜 시간 고정 파트너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여자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누군가는 그와 한 딴따(탱고 음악의 단위, 보통 3~4곡을 묶어 한 딴따라고 함)를 추는 일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잭팟보다 짜릿하고 가치롭다’라고 하였고, 또 누군가는 ‘그와의 한 딴따를 위해 내 일평생을 바쳐도 좋다’라고 하기도 했다.
탱고 세계의 기둥과도 같았던 이의 죽음이 안겨준 상실감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향년 72세. 그리 오래도, 짧게도 살지 않은 일생이었고, 사람들은 평생 그를 잊지 못할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사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땅게로스들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을 해냈다. 마에스트로 가이탄의 모든 춤 테크닉을 집어넣고 전성기 시절 외모를 딴 탱고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적인 이유로 실재 인물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위법이었기 때문에, 명목상은 ‘거장의 탱고 유산을 보존하고 후대에 교육하기 위한’ 교육용 안드로이드로 제작되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많은 이들의 채워지지 않은 공허로 그가 태어났다. 그는 카를로스 가이탄의 이름을 따 ‘마에스트로 G’라고 불렸다.
G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밀롱가에서 처음 기동하던 날은 축제나 다름없었다. 가이탄과 오래 고락을 함께 해오며 춤추었던 존경받는 마에스트라 아네스타 레예스가 특별히 G의 손을 잡고 공연을 선보였다. 완벽한 춤이었다. 공간 전부를 끌어안을 것 같은 넓고 둥근 아브라소(안기, 탱고의 홀딩)와 절도 있는 걸음, 특유의 장식 동작까지 이질감이 전혀 없는 가이탄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기쁨에 겨워 눈물을 감추지 못한 사람도 즐비했다. 열화와 같은 감정의 홍수 속에서 단 한 사람, G와 춤을 춘 레예스만이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G에게 말했다.

“당신 춤은 완벽해요. 하지만 중요한 게 없군요.”

G가 공손하게 물었다. 그는 나기를 완벽한 가이탄의 재현으로 났기에 부족한 부분을 수렴하여 오차를 없애야 했다. 레예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야 물론 꼬라손이지요. 당신은 그저 가이탄의 춤을 추는 인형일 뿐이에요. 추지 말 걸 그랬어. 내 인생의 오점이야.”

G는 레예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꼬라손은 말 그대로 심장이었다. 탱고의 꼬라손은 달리 말하자면 춤의 영혼이었다. G는 그것이 사람 감정의 영역에 있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하면 꼬라손이 느껴지는 춤을 출 수 있는가?’ G는 당장 풀 수 없는 의문을 기억해 두었다. 마에스트라는 그날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G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각지의 밀롱가에 다니며 가이탄과 춤을 추고 싶어 하던 이들과 춤을 추었다. G를 제작하는 데 가장 많은 돈을 들여 우선 소유권을 가지게 된 자는 G와 춤을 추기 위한 예약제를 시행했고 급기야 돈을 받기 시작했다. 소유주는 G의 제작비용과 유지비 명목이라 변명하였지만, 일정 부분 이상이 소유주의 사적 영리를 채우는 데 들어갔다는 의혹과 반발이 일었다.
G를 둘러싼 문제가 곳곳에서 생겨났다. 정작 당사자인 G는 그저 묵묵히 가이탄의 구실을 했다. 그의 아주 사소한 버릇이나 언행까지도 학습하여 줄곧 따라 했다. 피드백이 쌓여가며 G는 가이탄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똑같아졌다. 그러나 단 하나,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꼬라손. 최초의 마에스트라 뿐 아니라 G가 점점 가이탄이 되어갈수록 그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당신에겐 꼬라손이 느껴지지 않아요.”
“뭔가 공허한 느낌이 들어요.”
“왜 내게 집중하지 않죠?”
“역시 산 사람 만큼은 못하는가 봐.”

G는 그들의 한탄과 불평에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자신에겐 꼬라손이 없다. 탱고의 가장 중요한, 영혼을 담지 못한다. G와 춤을 추고자 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G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언론이 쏟아졌다. 마에스트로를 기억하고 춤을 보존하려고 만든 안드로이드가 창부가 몸을 팔듯이 춤을 팔게 되었다며 분노했다. 또 G와 춤을 추었던 이들이 G는 그저 가이탄의 춤을 복제할 뿐, 진실로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아니란 증언을 속속 쏟아냈다. 머잖아 G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춤을 금지당했다. 가이탄 죽음의 공허가 가실 무렵, 사람들은 G를 더는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고인의 이름에 먹칠하는 골칫덩이로 생각했다.
G의 소유주는 G를 데리고 아르헨티나 밖을 떠돌았다. 깐깐한 부에노스아이레스 땅게로스와 달리 세상에는 G가 찾아와 주길 기다리는 이들로 넘쳐났다. 땅게로스가 있고 밀롱가가 있는 나라며 도시라면 어디든. G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을 때보다 몇 배, 몇십 배나 많은 이들과 춤을 추었다. 오직 가이탄으로써.
G의 춤과 공연은 연일 호평이었지만 오래지 못했다.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만들어진 관심은 일회성이었고, 가이탄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에서 비롯된 관심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그러했듯 경멸과 분노로 바뀌었다. G의 소유주는 그럼에도 많은 돈을 벌었다.

G는 여전히, 꼬라손에 대해 생각했다. 소유주에게 물었을 때 소유주조차도 헛웃음 지으며 무리라고 잘라 말했다.

“심장의 박동, 아브라소에서 오는 열기, 섞이는 호흡, 피가 돌면서 터져 나오는 감정의 홍수, 기계적이지 않고 유연한 텐션에서 느껴지는 일체감, 이런 게 탱고의 꼬라손을 만든단 말이야. 기계 몸인 넌 피도 심장도 없고 호흡도 그저 흉내 낼 뿐인데 어떻게 꼬라손을 말하고 원해?”

소유주의 단언에도 G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입력된 가이탄의 성격과 행동패턴이 불가능하다고 타인이 단정한 것을 노력과 연구로 이겨내고 거머쥐라 명령했다. 카를로스 가이탄은 그렇게 평생 불가능한 것을 이루며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종국에 G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소유주는 G로 벌어들인 부를 즐기다 가이탄을 열렬히 추종하던 사람에 의해 저격당해 죽었다. 범인은 마피아라고 했다. 졸지에 주인을 잃은 G는 법적 절차에 따라 두 번째로 많은 제작비를 낸 이의 소유가 되었다. 두 번째 소유주는 G에게 춤을 추지 말라고 명령했다.

“모든 비극이 자네 때문에 일어났네. 자넬 만든 건 마에스트로를 기억하기 위해서였네만, 지금은 후회만 남아. 마에스트로가 천국에서 화내고 계신 게 틀림없어. 당신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속죄라면 자네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겠지.”
“절 폐기하실 겁니까?”
“그러고 싶네만, 사지 멀쩡한 안드로이드를 무단으로 폐기하는 건 범죌세. 이제 더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아. 서서히 잊히도록 하세.”

G는 두 번째 소유주가 운영하는 밀롱가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했다. 가이탄이 탱고 거장이 되기 전에 길거리 반도네온 악사였단 점을 반영했고, 이용한 결과였다. G라는 사실을 모르도록 생김새를 바꾸고, 사람들과는 한 마디도 섞지 못했다. 그 외의 시간은 아무 일도 배당받지 못한 채 대기상태로 지냈다. G는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 모두를 통틀어 꼬라손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정보를 얻고, 눈앞을 어른거리는 땅게로스의 춤사위를 하나하나 기억하여 분석했다. 춤을 출 수 없어도 언제나 춤을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G는 꼬라손을 알지 못했다. 두 번째 소유주가 경영 문제로 G를 세 번째 소유주에게 넘기고, 세 번째 소유주가 네 번째로, 네 번째에서 다섯 번째로,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 소유주까지 당도했지만, 여섯 번째 소유주의 아들에게, 그 아들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지는 시간 까지도 G는 답을 찾지 못했다.
긴 시간이 지나 세상 사람들은 G를 잊었다. 가이탄의 이름도 그저 ‘과거 위대한 탱고 마에스트로’로 여겨질 만큼 세월이 흘렀다. G에 대한 일은 마에스트로에 관한 우스운 일화 중 하나 정도로 여겨졌다. 언급할 가치도 없는 사족이 된 것이었다.

여섯 번째 소유주의 손자는 조부가 운영하고 부친이 물려받은 밀롱가를 마찬가지로 물려받았다. 그동안 또다시 새로운 탱고 사조들이 생겨났고, 이제 다시 두 세기도 전의 전통 탱고 유행이 돌아왔다. 손자는 G를 그저 조부와 부친이 가게와 함께 물려준 낡은 반도네온 연주기계로 생각했다. 부친 대에 창고에 처박혔던 G를 꺼내 일하게 해보니 골동품의 낡은 멋이 있을 뿐 아니라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 손자는 부친이 어째서 이토록 훌륭한 기계를 먼지 속에 처박아 두기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G는 태어나고서 시간이 벌써 반백 년이 훨씬 지났음을 깨달았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이제 그의 행동 원칙이며, 움직이도록 만드는 시스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춤을 금지당한 시간이 춤을 추었던 시간을 하염없이 넘어버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꼬라손의 존재만을 생각하고 추구하며 기동하게 되었다.

손자의 밀롱가는 수준이 높았다. 뛰어난 땅게로스로 늘 북적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제 막 밀롱가에 데뷔하려는 풋내기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신청을 외면당하기에 십상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왔다가는 깊은 상처를 받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풋내기 초보를 놀리고 괴롭히길 좋아하며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는 나쁜 이들도 많았다. G는 오케스트라석에서 매일매일 전쟁처럼 벌어지는 신경전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날도 여전히, 뭣도 모르는 한 소녀가 벽에 핀 꽃이 되어 누군가의 무시와 누군가의 경멸과 비웃음을 샀다. 작달막하고, 할머니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온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탱고슈즈인지 모를 밋밋한 검은색 낮은 굽의 힐을 신었다. 엷게 화장한 얼굴은 앳된 귀여움이 감돌았으나 그뿐이었다. 화려하고 눈부신 밀롱가 풍경에 소녀만이 어울리지 않는 부조였다. 소녀는 열심히 용기를 내어 자신과 춤춰줄 이를 찾았지만, 여러 딴따가 지나도 소녀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 폐점시간에 이르러서도 단 한 곡도 추지 못했다.
마지막 딴따가 끝났다. 소녀는 지치고 우울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가게를 정리하러 온 손자가 직원을 통해 소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측은한 맘에 잠깐 변덕을 부렸다.

“누구 춤출 줄 알면 한 딴따 잡아줘.”

직원들은 질색하며 자리를 피했다. 호기심으로 평판을 떨어트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손자가 어깨를 으쓱하고 소녀에게 폐점을 알리러 가려 할 때, G가 움직였다. G는 손자에게 정중히 물었다.

“제가 저분의 상대를 해도 될까요?”
“안될 건 없다만, 춤출 줄 아나?”
“현 소유주인 당신이 허락하시면 가능합니다. 저는 당신의 조부 대에서 춤추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손자는 G의 말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 좋네. 춤춰도 돼. 어디 실력을 보여주게.”

G는 잠금 상태로 두었던 가이탄의 탱고 모듈을 불러왔다. 한 번에 많은 데이터를 가동하다 보니 낡은 신체가 삐거덕거렸다. G는 상체와 고개를 바로 세우고,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가씨, 당신과 춤출 행운을 제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소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G를 바라보았다. 어둡게 흐렸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하며 G가 내민 손을 잡았다. G는 소녀를 플로어까지 곱게 안내하여 편한 자세를 잡도록 기다려 주었다. 소녀는 왼손을 G의 오른팔을 둘러 등의 날개 뼈에 대고, 오른손을 G의 왼손에 조심스레 올려 작은 색종이 고리처럼 안았다. 긴장으로 어깨와 등이 뻣뻣해지자 G가 깊게 호흡을 독려했다.

“죄송해요, 제가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배운 기간은 중요하지 않아요. 자, 이제 음악이 나올 겁니다. 마침 플로어엔 아무도 없군요. 당신과 나 단둘만의 무대입니다. 마음껏, 즐겁게 춥시다.”

G는 가이탄이 으레 긴장한 상대에게 하던 말을 했다. 소녀는 다시 또 놀란 표정을 짓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손자의 지시로 음악이 시작했다. 지나치게 느리거나 빠르지 않고 박자가 쉬운 탱고 음악이었다. G는 소녀를 부드럽게 인도하여 걸었다. 음악의 뉘앙스마다, 박자마다 강약과 속도를 조절하며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는 만으로도 놀랍도록 우아한 춤이었다. 소녀가 미처 발을 떼지 못해 머뭇거리거나 무게 중심을 잃을 때에도 기다리고, 어울러 곡과 춤사위 일부로 만들었다.
첫 곡이 끝나고 두 번째 곡에선 조금씩 소녀의 춤 동작을 리드했다. 뒤로 걷는 여자의 다리를 교차하여 스텝의 선을 옮기면 끄루사다, 한 발을 축으로 가로 뉘인 8 모양으로 돌면 오초 아델란떼, 여자의 자리를 차지하며 달 모양으로 반 돌아가게 하면 메디아 루나, 여자의 발을 멈춰 양쪽에서 가두는 상구치토에서 여자를 이끌어 막힌 남자의 다리를 지나게 하면 빠사다. 남자의 몸을 중심으로 앞, 뒤, 옆으로 스텝을 옮겨 돌면 히로. 몸이 리드보다 많이 돌거나 성큼성큼 넘어가 버려 썩 아름답게 움직이지 못했지만, 소녀는 즐거워 보였다. 발이 꼬이거나 리드를 받지 못해 생기는 난처함도 곧잘 웃어넘겼다. 기술은 부족해도 음악을 잘 탔다.   
마지막은 느리고 사랑스러운 곡이었다. 소녀가 들떠 말했다.

“저 이 곡 정말 좋아해요.”
“명곡 중의 명곡입니다. ‘그대 장미 나무의 꽃들이 더 아름답게 필 때, 나는 사랑을 기억하고 깊은 아픔을 기억하겠지요……’”

G는 가사를 읊조리며 느리게 걸었다. 소녀는 도취하여 G의 품에 고개를 묻고,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걷기만 하는데 이렇게 행복할 수 있네요.”

소녀의 몽롱하게 묻힌 목소리가 들렸다. G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3분 30여 초의 곡이 끝나고서도 소녀는 G의 품에 안겨있었다. G가 소녀의 등을 꼭 감싸 안아 꿈의 끝을 알렸다.

“즐거웠습니다.”

고개를 뗀 소녀가 눈물을 흘렸다. 잠자코 지켜보던 손자는 마지막 정리를 G에게 맡긴 뒤 직원들과 가게를 떠났다. 식상한 드라마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고, 우는 여자를 달래는 일은 더더욱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가게에 두 사람만 남았다. G는 소녀를 자리로 데리고 왔다. 소녀가 진정하도록 달랬다.

“어째서 우십니까?”
“기, 기뻐서요. 행복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G는 이제껏 춤을 췄던 많은 이들의 반응을 생각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이렇게 기뻐하곤 했다. 그러나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십니까?”
“아니요. 다만 멋진 신사분이란 건 알겠어요. 또, 멋진 춤을 추시는 분이란 것도요. 정말…… 꼬라손이 넘쳐서 벅찬 기분이 들었어요.”

G가 되물었다.

“꼬라손을 느꼈다고요?”
“네! 뭐가 잘못됐나요?”

G는 혼란스러웠다. 특별할 것 없는 춤이었다. 소녀가 대체 무엇에서 꼬라손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다. G가 어리둥절한 모습이자 제풀에 놀란 소녀가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증조할아버지는 무척 훌륭한 탱고 마에스트로셨대요. 증조할아버지가 너무너무 훌륭하시니까, 아들인 할아버지 대 부터는 탱고를 추지 않았다고 해요. 할아버지는 가족 누구도 탱고를 배우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하셨어요. 저는 할아버지가 얼마 전 돌아가시고 짐을 정리하면서 증조할아버지의 일기며 자서전이며 춤추는 영상을 보았어요. 그렇게 대단할 줄은 미처 몰랐어요. 저도 모르게 푹 빠져서…… 부모님 몰래 탱고를 배웠어요. 제가 이러고 있는 거 아시면 절 죽일지도 몰라요.”

소녀가 하하, 경쾌하게 웃었다.

“아참, 꼬라손 이야기였지. 그런 위대한 증조할아버지도 춤의 꼬라손 때문에 평생을 고민하셨던 거 같아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일기장에 열심히 고민한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근데 지금 이 순간에요, 그게 평생토록 고민할 일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꼬라손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즉각 질문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소녀가 당황하다가, 볼을 붉히고 대답했다.

“어, 그러니까 말이죠, 엿장수 맘요.”
“예?”
“그러니까, 제가 이런 말 한 걸 직접 뵌 적도 없는 증조할아버지가 아시면 경을 치실 텐데요. 그냥 내가 느꼈다고 말하면 있는 거 같아요. 춤추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죠. 그러니까 엿장수 맘이지. 왜 괜히 자기 맘엔 안 들고, 남 탓하고 싶을 때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깊이가 없다느니, 껍데기라느니, 영혼이 없다느니 이러쿵저러쿵. 꼬라손도 그래요. 전 충분히 만족했고 즐거웠으니까, 당신의 꼬라손을 확실히 느꼈다고 말할래요.”

G는, G를 움직이게끔 하는 가이탄의 모듈이 소녀의 말을 답으로 인정했다. 오랜 시간 반응이 없자 소녀가 덜컥 겁을 먹었다.

“화나셨어요?”
“아닙니다.”
“다행이다. 저기, 혹시 누가 당신 춤에 꼬라손이 없다고 그랬어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지요. 일평생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말이에요? 나 참, 당신 탓 아니에요. 제가 믿어요. 그 사람들은 우리 증조할아버지와 췄어도 꼬라손 타령했을 사람들일 걸요? 진짜로 그랬대요. 할아버지가 너무너무 잘 추니까, 사람 같지 않아서 꼬라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고요. 제멋대로죠?”

소녀는 작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툴툴거리다 뒤늦게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G가 문까지 배웅했다. 소녀는 햇살처럼 웃었다.

“이건 제 짐작인데요, 당신은 우리 증조할아버지를 아는 사람 같아요. 춤 신청 멘트나 하는 이야기가 다 내가 아는 데론 걸. 그래서 꼭 그분이랑 춤 춘 기분이 들었어요. 저, 제가 여기 왔다는 거, 누구라는 거 다 비밀로 해주세요. 즐거웠어요!”

소녀는 도로를 구름 삼아 사뿐사뿐 걸어 새벽의 어스름 너머로 사라졌다. G는 그녀의 뒷모습을 전송하고 밀롱가 문을 닫았다. 가게의 모든 뒷정리를 마친 뒤 플로어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소녀와 춤춘 시간을 돌이켰다. 소녀의 체온과 호흡과 떨림과 고동을 떠올렸다. 소녀는 G에게 그가 가질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딴따의 끝에서, 마에스트로 G는 평온한 미소를 만면에 지은 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20140319


안드로이드 연작, 다섯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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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No Profile
    가는달 14.04.01 14:21 댓글

    마에스트로G 공구신청합니다. ㅠㅠb 

  • 가는달님께
    No Profile
    양원영 14.04.01 18:13 댓글

    평생 곁에 두고 춤추고 싶어요. 저도 공구하고 싶...... 큽. ㅠㅠ

  • No Profile
    아밀 14.04.10 21:27 댓글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소녀는 최고의 데뷔를 했네요!

  • 아밀님께
    No Profile
    양원영 14.04.13 13:06 댓글

    감사합니다! >v< 잊을 수 없는 데뷔였을 거예요. 소녀의 미래를 증조할아버지가 축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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