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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등라모연

2020.01.01 01:1201.01

등라모연

노말시티


해가 뜨고 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이 세상의 중심에 거대한 회전석이 있어 스물네 시간에 한 번씩 온 세상을 걸어 돌리고 있다고 했다. 북쪽으로 가고 또 가면 차가운 얼음 바다 한 가운데 붉은 탑이 우뚝 서 있고 남쪽으로 가고 또 가면 험준한 얼음 고원 위로 한없이 솟아오른 눈 덮인 산 속에 푸른 기둥이 묻혀 있다 하니 둥근 껍질 위에 굽이굽이 밀려 올라간 주름진 산맥도 움푹 팬 대양에 담겨진 한없는 바닷물도 모두 그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영원히 돌고 있다 했다. 온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모두 회전석에서 나오니 언젠가 세상이 그 기력을 다하는 날 거대한 회전석도 멈추면 세상은 영원한 낮으로 불타오르고 끝나지 않는 밤으로 얼어붙는다 했다.

"그런 건 다 옛 사람들이 지어낸 말인 줄 알았죠. 세상에 정말 이렇게 저절로 돌아가는 돌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창히는 손바닥만한 원반 위에 가느다란 바늘 세 개가 달린 장치를 들고 잰 걸음으로 모연을 쫒아가며 떠들었다. 모연은 일부러 보폭을 좀 넓혔다. 창히는 결국 요상한 장치의 뚜껑을 닫고 헐떡거리며 스승을 쫒아 뛰어야 했다. 약이 오른 창히가 주먹을 꼭 쥐고 발을 차 보았지만 모연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창히는 숨을 헐떡거리며 터벅터벅 걸었다. 모연이 걷는 품은 그대로였지만 창히가 쫒아 뛰나 걸으나 모연과의 거리는 변함이 없었다.

"제가 회전석에 관심을 갖는 게 싫으시죠?"

"누가 싫다더냐. 재밌구나. 계속 말해 보거라."

"스승님이 제대로 무공을 가르쳐 주시면 저도 이런 사술에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내 무공보다 그 사술이 더 낫구나. 그걸 배우거라."

"전 스승님의 무공이 더 좋습니다."

"그럼 왜 그런 요상한 물건을 들고 다니느냐."

"무공이 더 좋다고 했지 이런 게 싫다고는 안 했습니다."

"역시 어려서 그런지 생각도 유연하구나. 네가 나보다 낫다. 그러니 날 쫒아 다니지 말고 스스로 배우거라."

"자꾸 왜 그러십니까. 제가 더 나으면 스승님이 제게 배우시죠!"

"네가 더 낫다고 했지 네게 배우겠다고는 안 했다."

"아니 그러니까... 스승님! 스승님!"

창히는 어느새 또 다시 멀어진 모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입을 다물고 전력을 다해 뛰어야 했다.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모연이 속도를 줄이고 나서야 창히는 겨우 거친 숨을 내뱉으며 투덜거릴 수 있었다.

"내 참. 대놓고 뭐라고는 안 하시지만 제가 신경을 거스를 때 마다 속도를 내는 거 아십니까. 그거 꽤나 유치하십니다."

"난 그저 걸었을 뿐이다. 내가 빨라진 것인지 네 녀석이 느려진 것인지 구별할 방도가 있느냐."

모연의 말에 창히는 바짝 따라 붙으며 요상한 장치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 모연은 그제야 힐끔 장치에 시선을 스쳤다. 세 개의 바늘이 제각각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장치의 아래쪽에 달린 금속 상자 안에서 흰 줄무늬가 가득한 검은 돌 하나가 묘한 빛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세간에 떠들썩한 회전석인 모양이었다.

"있지요! 이게 바로 그 시계라는 겁니다. 이걸 보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잴 수 있으니 스승님이 빨리 걸으신 건지 제가 느리게 걸은 건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 시계라는 물건 또한 느려진 게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느냐."

"아예 스승님 빼고 온 세상이 전부 느려진 거라고 하시지요."

"네 녀석이 이제야 깨달음을 하나 얻었구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이 느려지고 세상이 가벼워지고 세상이 부서지는 것이라 했다. 내가 아니라."

창히는 모연의 말을 곱씹는지 잠시 걸음이 느려졌다가 이내 다시 뛰어 스승을 따라잡았다.

"스승님을 느리게 해 보려 했는데 안 됩니다."

모연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리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연의 웃음이 골짜기에 메아리쳐 다시 돌아왔다. 땅이 흔들리고 나뭇잎이 떨리는 게 창히의 눈에 보였다. 아니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창히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을 따라 웃다가 어느새 모연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진 걸 눈치 채고는 얼른 표정을 거두어 들였다.

"진심으로 그리 하였느냐."

"그리 하였습니다."

"거미줄처럼 달라붙은 세상을 걷어내려 평생을 몸부림쳤다. 세상의 법도와 세상의 속도를 털어내고 홀로 날아다니려 했단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어느새 세상은 저만치 앞으로 달려가는데 나 홀로 뒤떨어져 있더구나. 이제와 다시 세상에 올라타려 해봐야 되지 않을 일이지. 그러니 어찌 네 녀석이 나를 움직이겠는가."

모연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등성이 하나를 더 넘어 둘은 하륜산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길을 탔다. 길이랄 것도 없이 그저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이어진 틈새를 비집고 발길을 옮겼다. 이런 길 아닌 길을 반나절은 짚어 들어가야 하는 곳에서 방족은 사람들을 피해 모여 살고 있었다. 창히 또한 방족이었다. 모연은 갑자기 멈춰 섰다.

"앞장 서거라."

"스승님도 길을 아시지 않습니까."

"괘씸하구나. 나 보고 네 길잡이를 하라는 것이냐?"

"제 속도로 걷는 게 스승님의 성에 차지 않을까 그럽니다."

"지금껏 어찌 나를 쫒아 왔느냐. 돌아보지 말고 네 방법대로 가거라."

창히는 손에 들고 있던 시계를 품속 깊은 곳에 밀어 넣고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정말 겅중겅중 뛰며 숲을 헤집고 다녔다. 모연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 방족이 길을 짚어가는 모양이 원래 그랬다. 그래서 방족이 지나간 길에는 길이 나지 않았고 아무리 지켜봐도 가는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창히가 뛰는 속도는 보통의 방족보다도 훨씬 빨랐다. 아마도 스스로는 본인이 그렇게 빨라졌다는 걸 알지 못하겠지만. 창히가 다섯 걸음을 디딜 때 모연은 한 걸음을 디디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간을 걸어 둘은 방족의 마을에 도착했다. 방족의 족장은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새의 다리에 묶어 모연에게 보냈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창히가 멈춰 섰다.

"여기부터는 스승님 혼자 가십시오. 저는 마을에 발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방족을 떠난 자는 방족의 마을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세상의 규율을 다 따를 거면 뭐 하러 날 쫒아 다니느냐."

"규율이 아니라 마을을 떠난 제 마음을 여전히 따르는 겁니다."

"그리 말할 것이지. 예 있거라."

모연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어딘가로 사라졌다. 창히는 혀를 내두르며 나무 하나에 기대 앉아 품속에서 시계를 꺼냈다. 숲길을 짚어 들어온 지 고작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예전이라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렸을 거리였다. 창히는 혹시 벌써 고장이 났나 싶어 빛나는 돌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돌은 여전히 은은한 빛을 내며 일정한 속도로 돌고 있었다. 마주치고 엇갈리며 서로 물린 톱니바퀴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따라 돌았다.


"호랑이 말입니까?"

장로가 내민 차를 가볍게 한 모금 음미하며 모연이 되물었다. 차에는 아직 모연조차 그 맛을 다 알지 못하는 하륜산의 이름 모를 풀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 험준한 줄기들을 앞마당처럼 타고 다니며 동물들과 어울려 사는 방족이 호랑이 때문에 모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의외였다.

"호랑이들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밤새 마을을 향해 울부짖으며 먹지도 않을 짐승들을 물어 죽입니다. 약초를 캐던 마을 사람 하나도 물려 죽었지요. 징패라고 창히 그 녀석도 아는 사람일 겝니다. 추운 겨울이면 제 발로 호랑이 소굴에 찾아 들어가 털 속에 몸을 묻고 밤을 보내던 녀석이지요.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채 겨우 마을로 도망쳐 왔지만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대호를 봤다고."

"대호라."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수염은 날카로운 창보다 길고 이빨 하나가 쟁기 만하며 그 입을 벌리면 사람 키보다 큰데다가 솥뚜껑만 한 눈에서는 푸른 불꽃이 일고 꼬리만 해도 아름드리나무보다 두꺼운 호랑이가 있으니 호랑이들의 왕인 대호라 했다. 대호는 원래 호랑이가 아닌 사람이라고도 했다. 아니면 사람으로 둔갑하는 호랑이라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대호는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모연은 딱 한 번 대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사실 대호도 대호지만 모연님을 여기까지 오시게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회전석이라고 들어 보셨겠지요."

회전석. 그 이유가 무엇이든 옛 사람들이 말하던 대호가 나타난 건 옛 사람들이 말하던 회전석이 얼마 전부터 저잣거리에 돌기 시작한 것과 묘하게 시기가 맞아 떨어졌다. 모연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다시 입에 가져다 댔다. 차의 맛이 아까보다 썼다.

"저절로 움직이는 기계들이 나타났다지요. 북쪽 바다 끝에 있는 붉은 탑 근처에서 회전석이라는 걸 주워다가 장난감들을 만든 답니다. 그게 뭐든 간에 세상의 순리를 따르는 물건은 아니겠지요. 그러니 호랑이들이 그리 날뛰고 대호까지 나타난 것 아니겠습니까."

"제게 부탁하시는 건 대호 쪽입니까. 회전석 쪽입니까."

"그 회전석들을 가지고 들어온 자들의 우두머리는 한쪽 팔이 기계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름이 등라라고 하더군요. 저도 기억을 하는 이름입니다."

차를 입에 가져다 대던 모연의 손이 순간 움찔하며 따뜻한 차 한 방울이 찻잔 밖으로 흘렀다. 모연은 찻잔을 빙글 돌려내려 떨어지는 방울이 바닥에 닿기 전에 다시 받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한 모금 마신 모연은 찻잔을 앞에 내려놓았다.

"징패라는 사람이 대호를 봤다는 곳은 어딥니까."


나무뿌리를 베고 떨어진 나뭇잎까지 끌어다 모아 덮고 잠을 청하던 창히는 모연이 다가오는 걸 보고는 벌떡 일어났다.

"마을에서 주무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네 녀석을 여기 두고 잠이 오겠느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십니다. 어디로 갑니까?"

"이 밤에 어디를 가겠느냐."

"어디 바람이라도 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너머 흑암골에 호랑이들이 많다더구나. 털이 푹신한 놈으로 하나 끌어안고 자야겠다."

"흑암골이라면 저도 압니다. 제가 앞장설까요?"

"되었다. 생각할 것도 있으니 천천히 가자꾸나."

모연과 창히는 달빛에 의지해 숲길을 걸었다. 창히는 얼마나 빨리 걷고 있는지 궁금해 시계를 꺼내보고 싶었지만 모연의 표정이 전에 없이 무거워 차마 그러지 못했다.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나뭇잎과 천천히 돌아가는 달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해 보려 했지만 어느 하나 명확하지 않았다. 흑암골로 가는 길 역시 제멋대로 늘어났다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창히는 조심스럽게 모연에게 물었다.

"왜 스승님을 부르신 겁니까?"

"징패라는 사람을 아느냐."

"잘 알지요. 그런데..."

불길한 예감을 한 듯 창히의 얼굴이 굳었다. 모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징패가 호랑이에게 물리다니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가 보면 알겠지."

창히의 발이 재게 움직였다. 방족 마을을 찾아갈 때보다 더 빨랐다. 이번에는 창히가 두 걸음을 디딜 때마다 모연이 한 걸음을 디뎌야 했다. 모연은 가끔 창히가 두려웠다. 등라가 모연을 보았을 때도 그랬을까. 모연은 그저 등라가 좋았고 무조건 믿고 따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등라는 모연에게 거리를 두었다. 스승님 앞에서 보인 수련에서 모연이 처음 등라를 앞섰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등라의 눈빛을 모연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모연은 한 번도 등라를 앞서지 않았지만 모연을 바라보는 등라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모연이 힘을 남기고 있다는 걸 등라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정식으로 대결을 해 보지 못했다. 불의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등라는 그 길로 스승과 모연을 떠났다. 머나먼 북쪽으로 갔다는 소문만 들려왔다.

창히가 자신을 앞서는 건 두렵지 않다. 모연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모연과 창히 둘 중 한 사람은 떠나야 했다. 등라를 앞선 이후로 모연은 항상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등라를 바라보아야 했다. 차라리 그 전에 모연이 떠났다면. 그랬다면 등라가 팔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까.

"스승님! 너무 빠르십니다!"

모연은 어느새 창히를 앞질러 달리고 있었다. 흑암골이 눈앞에 있었다. 창히가 숨을 헐떡이며 모연을 쫒아 왔다.


달이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깊은 골짜기를 비추었다. 나무 그늘 곳곳에서 도깨비불 같은 푸른 안광들이 모연과 창히를 노려보고 있었다. 창히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호랑이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습니다. 낮에 다시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렵느냐."

"징패도 물어 죽였다지 않습니까."

"무서우면 예 있거라. 내 다녀오마."

모연이 웃으며 말하자 창히는 얼른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방족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다니 말이 됩니까. 혹시나 제가 호랑이를 해하게 될까 그게 걱정돼서 그럽니다. 저 중에 제가 모르는 조상님이라도 계시면 어쩝니까?"

방족 사람들은 공덕이 높은 사람은 죽은 뒤에 호랑이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함께 하륜산을 지켰다. 사람 고기 맛을 아는 호랑이들도 방족은 건드리지 않았다. 방족 사람들이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고 하륜산에 숨어 살 수 있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그런 호랑이가 방족 사람을 물어 죽였다는 건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배짱 하나는 두둑하구나. 하긴.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지."

모연이 창히를 보며 웃었다. 창히가 호랑이들이 숨어 있는 나무들 사이로 걸어가자 수십 개의 안광이 새로 번쩍였다. 창히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낮게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창히의 숨통을 죄어왔다. 창히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발을 물렸다. 동시에 가장 앞에 있던 그림자 하나가 번개같이 창히를 향해 날아 들었다.

"어... 엇!"

창히의 왼발이 반원을 그리며 뒤쪽으로 돌았다. 몸이 오른쪽으로 젖혀지며 뒤로 넘어가 가슴을 향해 날아든 호랑이를 옆으로 비꼈다. 동시에 오른팔이 왼발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함께 돌아 호랑이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모연은 창히에게 초식을 가르쳐 준 일이 없었다. 그저 어깨 너머로 배웠을 뿐인데도 창히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했다. 빠직하고 호랑이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는 날아든 힘 그대로 창히를 지나쳐 굴러와 모연의 발아래에 멈췄다. 호랑이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아...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창히가 뒤를 돌아보며 낭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습을 드러낸 호랑이들이 순식간에 창히를 둥글게 둘러쌌다. 하지만 모연이 어느새 다가서 창히를 뒤로 밀어내는 게 조금 더 빨랐다. 호랑이들이 모연을 노려보며 낮은 신음 소리들을 흘렸다. 창히를 향했던 울음과는 조금 달랐다.

모연은 뒷짐을 진 채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장 앞에 있는 호랑이를 향해 다가갔다. 호랑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한껏 입을 벌렸지만 모연은 평온한 얼굴로 호랑이의 입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침이 흘러내리는 송곳니와 모연의 정수리는 불과 손가락 한 마디 차이도 나지 않았다. 호랑이의 입이 철컹하고 닫혔다. 송곳니는 모연의 코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모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호랑이는 뜨거운 혓바닥을 내밀어 모연의 뺨을 한번 핥은 뒤 뒤로 물러났다. 모연과 창히를 둘러쌌던 다른 호랑이들도 일제히 몸을 돌려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대호를 불러 오거라! 내 할 말이 있으니!"

모연이 외쳤다. 호랑이들이 화답하듯 울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창히가 모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스승님도 참 배짱이 대단하십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슨 배짱이 필요하고 무슨 무서울 게 있단 말이냐. 호랑이는 제 힘과 상대의 힘을 가늠할 줄 아는 영물이다. 나에게 덤빌 이유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제게 덤빈 놈은 제 힘을 가늠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야 네 녀석이 허허실실 힘을 숨긴 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지. 모연은 그런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과연 창히 이 녀석은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연이 생각하는 사이 창히는 새삼스럽게 놀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모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대호라고 하셨습니까? 대호라는 게 정말 있단 말입니까? 혹시 징패를 물어 죽인 것도 그 대호입니까?"

"복수라도 할 셈이냐. 그만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길 것 같으면 덤벼 봐야죠. 질 것 같으면 다음을 기약하고. 수틀릴 때 도망치는 정도야 스승님께서 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수틀리면 네놈을 먹이로 던져주고 도망칠 생각이다."

"스승님은 참 거짓말을 못 하십니다."

넌 참 거짓말을 못해. 등라는 모연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일부러 수를 하나 접어 등라에게 뒤처졌을 때 등라는 무서울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팔을 하나 잃은 등라에게 괜찮다고 더 열심히 수련하면 된다고 말했을 때도 그랬다. 제발 떠나지 말라고. 최고가 아니어도 좋고 누가 더 낫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함께 있기만 하자고 말했어도 등라는 그렇게 대답했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대호가 다가왔다.

대호는 먼저 기세로 다가왔다. 공기가 무거워지며 땅이 잡아먹을 듯 발을 끌어당겼다. 창히도 무언가 이상한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 다음은 냄새였다. 끈적한 짐승의 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의 피 냄새도 섞여 있었다. 모연은 왠지 그게 등라의 잘린 팔 냄새인 것만 같았다. 숲 전체가 흔들리는 낮은 울음소리가 모연과 창히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푸른 눈이 보였다. 창히가 꿀꺽 침을 삼켰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거나 넋을 잃고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모연 역시 오래 전 등라와 함께 대호를 맞닥뜨렸을 때는 그랬다. 오히려 지금의 창히 만큼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연은 확신했다. 대호는 모연을 이길 수 없었다. 이런 녀석에게 등라가 팔을 잃었던 거라니 모연은 허탈할 지경이었다.

"물러나 있거라."

"저도 돕겠습니다."

"어리석긴. 방해하지 말고 물러서거라!"

모연이 창히의 가슴을 짚고 가볍게 뒤로 밀었다. 창히가 뒤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자세히 보니 그대로 부딪히는 줄 알았던 창히는 그새 공중제비를 돌아 발로 나무를 짚고는 앞으로 굴러 내렸다. 동시에 천지가 갈라지는 듯한 대호의 포효가 파도처럼 모연을 덮쳤다. 한참 뒤에 서 있던 창히 조차 겨우 일어서려던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모연의 옆에서 포효를 맞았다면 심장이 터져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포효는 모연을 건드리지 못했다. 모연을 둘러싼 공기는 부드럽게 포효를 갈라 사방으로 흩뿌렸고 찢어지는 진동은 모연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잦아들었다. 모연은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대호는 모연의 앞으로 걸어 나오며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옛 사람들의 묘사에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대호의 눈에서는 진짜로 푸른 불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주변의 숲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압도적이라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모연의 표정은 그림으로 그려진 종이호랑이를 보듯 담담했다. 대호가 지붕만한 앞발을 들어 그대로 모연을 찍어 눌렀다. 그 정도 크기의 무언가가 움직이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쌘 동작이었다.

그 움직임은 그러나 모연에게는 너무도 느렸다. 쓰러져 있는 창히 조차 그걸 볼 수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고 그저 대호의 앞발이 모연에게 다가오는 모든 장면들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연은 멀리 피하지도 않았다. 대호의 날카로운 발톱이 불과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가는 위치에서 모연은 대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호는 울부짖으며 모연을 덮쳐 물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연은 먼지처럼 흔들리며 대호의 공격을 피해나갔다. 대호가 모연을 건드릴 수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 대호의 발톱과 송곳니는 그저 길거리에 널린 돌부리에 불과했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발걸음은 저절로 피해갔다. 몸에 몸을 맡기고 모연은 생각에 잠겼다. 대호를 어찌할 것인가. 모연은 아직 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등라의 팔을 잘라 먹고 결국 떠나게 한 놈이었다. 한때는 복수를 하겠다고 하륜산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기도 했었다. 아마 그때 다시 마주쳤다면 모연 역시 성치 못했을 테지. 이제 모연이 마음만 먹으면 제 아무리 대호라 한들 일격에 배를 갈라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연의 분노는 식었고 이제 등라의 팔은 대호가 아니라 자신이 빚진 것이라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복수는 모연의 몫이 아니었다. 할 수 있게 되니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보다 모연은 갑자기 등라와 대호가 동시에 나타난 이유가 궁금했다. 대호는 영물이니 사람의 말을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으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대호는 모연을 공격하던 걸 멈추고 창히를 노려보았다.

"스승님! 맡겨 주십시오! 해 볼만 하겠습니다."

어느새 털고 일어난 창히가 자신 있는 얼굴로 대호 앞으로 나섰다. 모연은 말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창히 저 녀석은 그것까지 본 것인가. 모연은 창히의 속마음이 가끔 보이지 않았다.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지만.

창히를 향해 웅크렸던 대호가 온 산을 뒤흔드는 포효를 다시 내뱉었다. 창히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까의 모연이 포효를 부드럽게 갈라내 사방으로 흩뿌렸다면 창히는 단단하게 자신을 감싸 포효를 튕겨냈다. 창히의 팔과 얼굴이 갈라지며 몇 가닥 피가 흘렀지만 창히는 개의치 않았다.

대호의 거대한 몸이 산사태처럼 움직이며 창히를 덮쳤다. 몸을 빙글 돌리며 옆으로 피했지만 날카로운 발톱은 창히의 가슴을 긁고 지나갔다.

"앗 차!"

창히의 옷이 찢어지며 품속에 숨겨 놓았던 시계가 바닥에 떨어졌다. 회전석이 반짝하고 빛났다. 대호가 울부짖으며 발바닥으로 시계를 짓눌렀다. 그 틈을 타 창히의 손날이 대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대호의 우람한 꼬리가 공기를 찢으며 창히를 후려쳤다.

모연은 반원을 그리며 달빛을 가르는 대호의 꼬리에 슬쩍 올라타서는 꼬리 끝으로 미끄러졌다. 꼬리를 타고 날아간 모연은 창히의 손날이 대호의 목에 박혀 들어가기 직전에 창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빙글 돌며 대호의 꼬리는 허공을 쳤다. 대호는 다시 한 번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서서히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무 사이로 흔들리던 푸른 불빛도 깜박하고 꺼졌다.

"아 이거! 완전히 박살났네요.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창히가 산산히 부서진 시계를 주워들며 말했다. 원판은 쪼개지고 바늘은 구부러졌다. 조각난 회전석은 빛을 잃고 밤처럼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돌지는 않았다. 그걸 본 모연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나서느냐. 진중치 못한 값을 치렀다 생각해라."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대호랑 한 번 붙어 보겠습니까. 스승님이 대련을 해 주시지 않으니 조바심이 나서 그럽니다."

"너는 대체 내게 왜 무공을 배우려 하느냐. 지금 네 실력으로도 어디 가서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다."

"이게 다 스승님 때문입니다. 산을 보고도 오르지 않으면 어찌 세상을 제대로 살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널 내쳐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없으면 혼자서 밥해 드시고 사시기 구차하지 않겠습니까. 저잣거리 심부름은 또 누가 다닙니까."

"이 녀석. 내 설마 네가 없다고 굶겠느냐. 말 나온 김에 내일은 저잣거리나 같이 나가 보자."

"직접 나가십니까? 스승님이요?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겁니까?"

"이리 쉽게 부서지는 물건을 판 녀석들을 찾아가 한 번 따져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마침 그치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니 한 번 잘 말해 보마."

대호가 굳이 회전석을 부수고 떠난 건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대호의 출몰과 징패의 죽음 그리고 등라의 귀향은 분명 연관이 있었다.


모연이 산채를 떠나 도성으로 나가는 건 십 년 만이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도성의 풍경은 모연이 기억하던 모습과 별 다를 게 없었다. 북쪽에서 왔다는 기계공이라는 사람들이 저절로 움직이는 신기한 물건들을 저잣거리에서 팔기 시작했다는 소문은 창히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회전석의 전설을 이용해 교묘한 장난감을 파는 사기꾼들이라 여겼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도성은 회전석을 이용한 기계들로 가득 찼다. 저잣거리에 다녀온 창히의 수다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때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을 보며 모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은 모연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모연은 자신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양상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직접 보자 뒤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가 왜소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창히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저건 자동차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란 뜻이지요. 저 쪽의 저 높은 탑이 보이십니까? 그 꼭대기에 달려 있는 게 시계입니다. 제가 보여드렸던 것과 크기만 다르고 똑같은 원리로 움직이지요. 놀라운 건 시계보다 저 탑입니다. 저 탑을 짓는데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자재들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 덕분이지요. 혹시 구경하고 싶으시면 동쪽 성벽을 개축하는 곳으로 가보시면 됩니다. 저절로 곡식을 빻는 기계, 물을 퍼내는 기계, 옷감을 짜는 기계. 이제는 그 회전석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신기할 건 하나도 없구나. 수레는 말이 끌면 되고 시계는 밤낮과 계절의 변화를 보아 알면 되고 무거운 물건이야 도르래를 써서 들어 올리면 되는 것 아니냐. 그저 원래 할 수 있는 일을 조금 쉬이 거들어 줄 뿐인데 왜들 그리 난리란 말이냐."

"그 쉬이 거들어 주는 게 대단한 일이란 말입니다. 스승님이야 혼자서도 말보다 빨리 달리고 태산 같은 바위도 거뜬히 들어 올리시니 저런 기계의 힘이 필요 없으시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엄청난 일이지요. 이제 굳이 수련을 하지 않아도 스승님처럼 천지를 뒤흔드는 힘을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세상이 된 겁니다. 그러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거 보아라. 그런 세상이 왔는데 너는 어찌 수고를 들여 내 재주를 배우려 하느냔 말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너도 그 기계공이라는 것이 되어 쓸모 있는 기술을 배워 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

"또 그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스승님을 따라 다닌 지가 이제 십이 년이 넘었습니다. 지금껏 배워 온 게 아까워서라도 끝을 봐야 하겠습니다. 정 제가 귀찮으시면 그냥 화끈하게 전부 다 가르쳐 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러면 제가 다 배우고 떠나든 포기하고 떠나든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배울 게 없대도."

"거 보십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스승님도 제가 떠나는 게 싫은 거 아니십니까."

"좋고 싫은 게 어디 있느냐. 그저 흘러가는 대로 떠다니고 스쳐 지나가며 살 뿐이지."

"그게 미묘하단 말씀입니다. 언제 욕심을 쥐고 놓아야 하는 지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리 될 일에 욕심을 부리고 되지 않을 일은 놓는 것이니라. 무에 어려울 게 있느냐. 그만 하고 어서 그 장난감을 만든다는 곳으로나 안내해라."

"아. 그 전에 이건 꼭 아셔야 합니다.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창히가 모연을 끌고 간 것은 활을 파는 점포였다. 모연도 기억을 하는 곳이었지만 이제 점포 앞에 걸려 있는 건 절반만 활이고 절반은 회전석이 달린 기계였다. 언뜻 보면 석궁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가 훨씬 작았다.

"아이고. 모연님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모연을 알아 본 나이든 주인이 점포 밖으로 튀어 나오며 인사했다. 사냥터를 놓고 도성 사람들과 방족 사이에 다툼이 있었을 때 모연이 중재해 준 일이 있었다. 모연의 기억으로는 딱히 이 점포 주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이 나지는 않았었다. 모연이 가볍게 답례하며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기계에 가 닿은 걸 눈치 챈 주인은 냉큼 하나를 집어 들어 모연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자동쇠뇌라는 겁니다. 회전석을 이용해서 시위를 당겨주는 것이지요. 이 회전석이라는 녀석이 엄청나게 힘이 좋아서 이렇게 작은 데도 위력은 장사가 강궁을 당기는 것보다도 셉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시위를 당길 뿐이라면 원리와 이치가 명백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모연이 구조를 슬쩍 살피고는 그렇게 말하자 창히가 나섰다.

"그래서 제가 모시고 온 것입니다. 일단 한 번 보시기나 하십시오."

창히가 쇠뇌를 받아 들고는 한 뼘 정도 길이의 살을 장전했다. 그리고는 점포 한 구석에 놓인 과녁을 조준하고는 손잡이 근처의 작은 막대를 반 바퀴 돌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회전석이 밝아지며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활대도 없이 기다란 금속 막대 내부에 시위만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방아쇠를 당기자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날아가 과녁에 박혔다. 그 힘은 모연이 상상하던 이상이었다. 보통 살이 날아가는 속도보다 서너 배는 빨랐다. 살을 쏘아 낸 쇠뇌는 저절로 두 번째 살을 장전했다.

"빠르구나."

"도성 내에는 이런 걸 지니고 다니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스승님이라면야 이 정도로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그 위력을 미리 알아두시는 편이 좋을 듯하여 굳이 모시고 왔습니다."

창히의 말대로 회전석의 위력은 모연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지금껏 모연이 보아온 세상의 움직임과는 이질적이었다. 이러한 힘이 자연적으로 만들어 진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이 회전석이라는 물건이 끌어내는 힘은 분명 어딘가에서 자연의 조화를 깨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전설에서는 세상이 기력을 다하는 날 거대한 회전석도 멈추고 끝나지 않는 낮과 밤이 계속된다 했다. 어쩌면 이 작은 돌들은 그 거대한 회전석의 기력을 끌어내 써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도성 내에 얼마나 퍼져 있나."

모연의 질문에 주인이 손가락을 꼽아 보며 말했다.

"도합 백 문 남짓일 겁니다. 회전석이라는 게 워낙 귀해서 말입니다요."

"이런 무기를 본 군주가 어찌 자신의 병사들을 이걸로 무장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그 회전석은 어디서 구하는 지 혹시 아는가."

"북쪽 바다 끝에 있는 붉은 탑 근처에서 캘 수 있다고는 합니다만 가본 적이 없으니 소문일 뿐이지요. 그런 소문이라면 도성 근처 하륜산에 회전석이 묻혀 있다고도 합니다. 기계공들이 여기에 자리 잡은 게 그 때문이라지요."

"하륜산! 주인어른 그게 정말입니까?"

창히가 불쑥 나서며 물었다. 그제야 창히가 방족이라는 걸 알아본 주인이 뒤로 물러서며 손사래를 쳤다.

"모르지 몰라. 그냥 떠도는 소문일 뿐이라오. 이제 보니 그런 말을 들었는지도 가물가물하군."

역시 등라에게 가 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모연은 쇠뇌를 내려놓고 창히에게 고갯짓했다.

기계공들이 모여 있다는 작업장은 도성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꽤나 유서 깊은 가문의 집터였던 걸로 기억하는 그 자리는 대장간과 화로, 목공장과 석공장들이 가득한 작업장으로 변해 있었다. 기계공들이 군주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만 했다. 작업장 주변은 낮은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들어가는 입구에는 병사들이 서 있었다. 모연과 창히가 앞으로 다가가자 병사들은 창을 겨누며 소리쳤다.

"이 곳은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다. 썩 꺼져라!"

모연이 눈짓하자 창히는 마지못해 품속에서 부서진 시계를 꺼내 보였다. 어리둥절해 하는 병사들에게 모연이 말했다.

"이걸 여기서 만들지 않았나. 이리 쉽게 부서졌으니 좀 고쳐 주어야겠네."

"부서뜨린 놈이 잘못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호랑이들과는 달리 이 병사들은 상대의 강함과 약함을 가늠하는 눈이 없었다. 모연은 개의치 않고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병사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모연을 창으로 밀어내려 했으나 모연은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창을 비껴내면서 두 병사 사이를 지나갔다. 창히는 발을 한 번 굴러서는 병사들과 지키고 있는 문까지 한 번에 뛰어넘고 모연이 들어올 수 있도록 안쪽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 이것들이 대체..."

두 사람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병사들은 얼른 달려들지는 못하고 두 사람을 쫒아오며 소리를 질렀다. 작업장 안이 어수선해지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연과 창히에게 쏠렸다. 그중 나이든 한 병사가 모연을 알아보았다.

"혹시 모연님이 아니십니까? 물러서라! 이 분은 하륜파의 장문이신 모연님이시다! 이런 곳에는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모연은 맞네만 장문도 아니고 이제는 하륜파라 할 것도 없네. 그저 고장 난 기계 하나를 고칠 수 있을까 해서 찾아온 것이니 너무 소란 떨지는 말게."

"고장 난 기계라 하셨습니까?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창히가 부서진 시계를 내 보이자 병사가 대충 훑어보더니 말했다.

"회전석이 산산이 부서졌군요. 이게 이렇게 쉽게 조각나는 돌이 아닌데... 아.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병사가 모연을 안내한 곳은 작업장 구석에 위치한 막사였다. 아마도 그 병사의 권한으로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였을 터였다. 모연은 병사의 호의에 감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앉아 계시면 공방 사람들에게 한 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보잘 것 없지만 차라도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고마운 일이지. 그저 덥힌 물이면 되네."

병사가 다시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갔다. 창히는 병사가 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물었다.

"우리 문파 이름이 하륜파였습니까?"

"문파는 무슨 문파.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일 뿐이다. 이제는 따르는 사람도 없는데 문파가 가당키나 하겠느냐."

"스승님과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륜파는 모연의 스승인 강외가 장문으로 있을 때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때도 하륜산 줄기에 은둔하며 세상에 나오기를 꺼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강외의 무공만은 근방에서 대적할 자가 없었고 그 명성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제자들도 적지 않았다. 등라와 모연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애제자인 등라와 모연 중 누가 차기 장문이 될 지를 놓고 떠드는 건 이 도성 사람들의 흔한 안주 거리였다. 아마도 저 병사 역시 그 중 하나였으리라.

등라가 떠난 이후로 모연에 대한 강외의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다른 제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강외는 모연에게 장문의 자리를 물려주려 했지만 모연은 언젠가는 등라가 돌아올 것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어느 날 강외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고 모연은 여전히 장문을 자처하기를 거부했다. 실망한 다른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뒤로 하륜파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 허명이라도 꺾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모연에게 망신을 당했고 이제 사람들은 하륜파 대신 모연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렇게 따지면 하륜파를 멸문시킨 건 모연이나 다름없었다.

"다 지난 일이다. 행여 쓸데없는 말을 떠들고 다닐 생각은 말아라."

"정 그러시면 우리가 이름을 하나 새로 지어도..."

모연이 다시 면박을 주기 전에 나이든 병사가 다시 막사로 뛰어 들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시뻘게진 얼굴이었다. 병사는 모연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 생각이 짧아 귀한 손님을 소홀히 모셨습니다. 대공장님의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대공장이라 함은 등라님이신가?"

"맞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시지요."

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의 뒤를 따랐다. 병사의 나이로 보면 모연은 물론 등라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로 등라에게 안내하지 않은 건 아마도 두 사람의 관계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등라가 떠나고 세상에는 등라와 모연의 사이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둘의 대결에서 등라가 패배했다는 말도 있었고 모연이 등라를 모함했다는 말도 있었다. 등라와의 관계에서 확신이 없는 건 모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등라가 이곳에 돌아온 지 몇 달은 되었을 텐데 모연에게는 연락 한 줄 없었다. 모연은 정말 오랜만에 등줄기에 긴장이 흐르는 걸 느꼈다.

"오. 모연! 이게 대체 얼마만인가. 내 이곳에 돌아오고도 자네를 찾아 볼 면목이 없었는데 이렇게 손수 만나러 와 주다니 기쁘기가 이를 데가 없네!"

등라였다. 긴 세월이 지나 주름지고 낡았지만 모연은 단번에 등라를 알아볼 수 있었다.

"등라님이 여기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면목이 없으시다니요. 이제야 인사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스승과 문파를 버리고 떠난 사람에게 무슨 염치가 있겠나. 내 이곳으로 돌아올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알 수가 없군. 같이 온 분은 제자신가?"

"처음 뵙겠습니다. 창히라고 합니다."

"방족의 용모를 지녔군."

"제대로 보셨습니다. 하나 지금은 방족을 떠났습니다."

"하하하. 이런. 이렇게 우리 하륜파에 잘 맞는 후배를 고르다니. 나와 모연의 스승님이시던 강외님도 방족이셨네. 그래. 어쩌다 모연의 제자가 되었나."

"제가 무작정 쫒아 다니고 있습니다만 그것만으로도 배우는 게 많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다? 예전의 모연이 그랬지. 앉게. 모연. 이제는 누가 봐도 장문의 풍모가 흐르는군. 하긴 지난 세월이 얼마인가. 그 이야기를 다 풀어내려면 몇 날 밤을 새도 모자랄 걸세. 아 참. 그 전에. 시계가 고장 났다 했나?"

등라는 뒤에서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에게 어깨 너머로 손짓했다. 병사는 섬세하게 세공된 금속 고리가 달린 작은 금속 기계 하나를 가져왔다. 단추를 누르자 은빛 뚜껑이 열리며 숫자판과 바늘이 나왔다. 창히가 부서뜨린 시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아니. 이런 걸 받아도 됩니까?"

"비록 내 도망치긴 했지만 모연의 제자라면 내 제자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나. 사양치 말고 받아 두게."

시계를 밀어 주는 등라의 왼손에는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옷으로 가려진 안쪽에는 오른팔과 다름없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모연이 자신의 기계팔을 바라보는 걸 눈치 챈 등라는 소리 내어 웃으며 기계손을 들어 보였다.

"아. 이거. 어떤가. 원래 팔 보다 낫지 않은가? 좋은 세상일세. 힘의 흐름을 익혀 보겠다고 맨 주먹으로 아름드리나무를 후려치던 것 기억나나? 이렇게 쇠붙이로 바꿀 줄 알았다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모연 자네를 따라잡아 보겠다고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밤새 나무를 두드리지 않았었나. 핫핫. 자네는 몇 번 만에 익히는 기술을 말일세. 다 타고 나는 재주가 따로 있는 걸 그때는 몰랐지. 내 재주는 이거였네. 어떤가. 한 번 볼 텐가?"

등라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손등을 보이던 등라의 왼손이 뒤집어지며 손바닥이 모연을 향했다. 그리고는 다섯 개의 금속 손가락이 뱀처럼 늘어나며 모연을 향해 번개같이 뻗어 나왔다.

손가락이 파고드는 위치는 교묘했다. 어느 방향으로 피해도 하나 정도는 걸리도록 짜여 있었다. 모연은 이 공격을 받아낼 지 아니면 등라가 멈추리라 믿고 가만히 있을 지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더 깊게 생각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모연은 어쩔 수 없이 날아오는 금속 손가락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모연의 오른손은 등라의 기계손 바로 앞까지 다가가 금속 손가락을 조금씩 바깥으로 밀어냈다. 모연을 향해 날아 온 손가락의 방향이 꺾이며 다섯 개 모두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창히를 따라가 자동쇠뇌의 위력을 확인했던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여유를 부리며 반응을 고민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북방 제일이라는 모연의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군. 네 녀석이 스승님도 버리고 문파도 버리고 오직 네 이름 하나만 드높였다 들었다. 사실이냐."

등라가 기계손을 움켜쥐듯 안으로 오므렸다. 모연의 머리를 둘러싸고 벌어져 있던 손가락들이 안쪽으로 구부러지며 날카로운 손톱 끝을 모연에게로 향했다. 모연은 오른손을 등라 쪽으로 들이밀며 손가락을 좀 더 벌렸다.

"저는 그저 등라님을 기다리며 장문의 자리를 사양한 것뿐입니다. 스승님이 사라지신 것 문파원들이 떠난 것 모두 제 뜻과는 무관하였습니다."

"날 기다렸다고? 가소롭구나. 스승님의 뜻이 이미 네게 있었다는 것을 정녕 몰랐다고 할 셈이냐? 넌 항상 그런 식이었다. 왜 차라리 네가 최고라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 것이냐. 끝내 내가 내 입으로 너보다 못하다는 걸 말하게 할 셈이었냐?"

"전 등라님을 앞선 적이 없습니다."

"여전히 거짓말을 못 하는구나. 그럼 어디 네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자꾸나."

기계손의 손가락이 무섭게 안쪽으로 조여 들었다. 등라는 수에 여유를 둘 생각이 없었다. 손가락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것으로는 모연의 얼굴이 꿰뚫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모연은 오른손을 더 내밀어 아예 등라의 기계손을 깍지 껴 잡고는 뒤로 꺾었다. 가운데로 모여 들던 기계손의 손톱들이 함께 뒤로 밀려나 모연의 코앞에서 챙 하고 맞부딪혔다.

등라가 씨익 웃으며 기계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등라의 힘이 아니라 회전석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지금까지 모연이 다뤄보지 못했던 종류의 힘이 모연의 손을 짓눌렀다. 조화도 균형도 없는 차갑고 딱딱한 힘이었다.

"스승님!"

창히가 벌떡 일어났다. 등라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병사들이 창히에게 자동쇠뇌를 겨누었다. 하지만 창히를 멈춘 건 모연의 왼손이었다.

"어디 감히!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창히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는 듯하다가 순식간에 병사들 쪽으로 날아갔다. 쉬익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살이 날아와 창히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철컥하며 두 번째 살이 장전되기 시작했다. 장전이 끝났을 즈음에는 두 병사의 쇠뇌는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낄 자리가 아니라는 말 듣지 못했어?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꺼져."

"물러나 있거라."

등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병사들은 그제야 방아쇠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창히는 빼앗은 쇠뇌를 구석으로 던져 버리고는 모연의 뒤쪽으로 가 팔짱을 끼고 섰다. 등라가 모연을 보며 말했다.

"어떤가. 네 힘이 약한 것이냐 아니면 이 기계손의 힘이 센 것이냐. 회전석의 힘은 정해진 힘이고 세상 만물의 변화에 흔들리는 힘이 아니다.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등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등라의 왼쪽 소매 속에 가려져 있는 기계팔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오며 깍지를 끼고 있는 모연의 오른손이 서서히 반대쪽으로 꺾였다. 모연에게서 멀어졌던 금속 손가락들이 다시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모연은 오른손에 걸린 힘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지만 회전석의 힘은 아무런 반응 없이 고집스럽게 모연을 향해 밀려왔다. 단순한 힘 대결로는 등라의 기계팔을 꺾을 수 없었다.

모연은 발로 등라와 자신 사이에 있던 탁자를 옆으로 날려 버리고는 오른손에 걸었던 힘을 풀었다. 모연의 오른손이 뒤로 꺾였지만 모연의 오른팔과 몸도 그에 맞춰 돌며 등라를 향해 날아갔다. 모연의 발이 등라의 무릎을 짚으려 했지만 등라는 옆으로 비껴내며 뱀처럼 뻗어나간 기계손의 손가락들을 휘어 모연의 목을 노렸다. 모연은 기울어졌던 몸을 살짝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피했다.

모연은 기계손에 깍지 잡힌 손을 풀어보려 했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라의 기계팔은 손목과 팔꿈치를 쉴새없이 돌려가며 모연을 찍어 누르려 했지만 그 또한 등라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모연의 몸은 종이처럼 흩날리며 등라의 공격을 피해냈다. 비록 기계손의 힘을 빌리고 있지만 등라의 무공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륜산을 떠난 이후에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모연 역시 등라를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연은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공방을 나누면서도 자신의 왼팔만큼은 등 뒤로 붙인 채 떼지 않았다. 등라가 잠시 공격을 멈추고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째서 왼팔을 쓰지 않는 것이냐! 네 녀석이 끝내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제 왼손은 등라님에게 빚진 지 오래입니다. 이 손으로 등라님을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건방지다! 누가 네게 그럴 자격을 주었느냐!"

모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등라는 한참을 모연을 노려보다 기계손에 힘을 풀었다. 뻗어 나갔던 손가락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깍지에 걸려 있던 모연의 오른손도 기계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모연은 짓뭉개진 오른손을 만져 보며 어긋난 뼈들을 끼워 맞췄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등라를 바라보았다. 모연을 바라보는 등라의 눈빛은 모연이 자신도 모르게 등라를 앞섰었던 그때의 눈빛이었다. 등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와 나의 길은 이미 갈라졌다. 어찌하여 하륜파를 지키고 장문이 되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내가 깨끗하게 새 길을 걷도록 놔두지 않느냔 말이다. 나는 이제 회전석으로 기계를 만드는 기계공이다. 제 몸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무공의 길은 버린 지 오래다."

"처음 등라님과 나누었던 맹세를 지키고자 할 뿐입니다."

"맹세? 하. 그게 어찌 맹세란 말이냐. 어리고 어린 날의 치기일 뿐이지. 그래. 나를 끝내 하륜파에 묶어 네 밑에 두고 싶단 말이냐? 아니면 나를 억지로 추켜올려 허수아비 장문으로라도 세우고 싶단 말이냐? 그게 네 녀석이 이리도 지독하게 지키려는 맹세인 것이냐?"

"이제 하륜파는 없고 저도 장문 따위가 아닙니다."

"그럼 대체 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모연은 차마 말을 보태지 못했다. 결국 등라가 다시 쏘아 붙였다.

"네가 끊지 않는다면 내가 끊을 수밖에. 따라 오너라. 내가 이곳에 다시 돌아 온 이유를 보여주마. 너도 단지 나와 회포를 풀기 위해 여기를 찾아 온 건 아니겠지."

등라가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모연이 뒤를 따랐다. 창히는 아까 받았던 은색 시계를 품속에 깊숙이 챙겨 넣고는 모연을 쫒아갔다.


등라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회전석을 만드는 공방이었다. 탁자 위에 주먹만 한 원석들이 놓여 있었고 석공들이 원석에 붙어 있는 울퉁불퉁한 회색 불순물들을 쳐내고 있었다. 그러자 밤처럼 검고 매끈한 돌 가운데 파도가 부서진 흰 거품 같은 무늬들이 박혀있는 회전석이 나왔다. 그렇게 깎인 돌들을 가운데가 움푹 파인 은쟁반에 던져 넣자 스스로 빙글빙글 돌며 진동을 만들었다. 그 진동이 쟁반을 울리자 피리 소리도 아니고 나팔 소리도 아닌 미묘한 음이 높낮이를 바꿔가며 흘러 나왔다.

"저게 끝이 아니야. 저렇게 깎은 회전석은 축의 방향을 맞춰 특별히 제작한 금속 틀에 물리고 둥그런 대칭 모양이 되도록 다시 연마해 내야 하지. 그렇게 돌아가도록 만든 회전석에 고정 장치와 잠금 장치를 달고 용도에 따라 다양한 톱니바퀴들을 연결하면 갖가지 자동 기계들이 만들어 지는 게야."

"이 회전석들이 내는 힘은 어딘가 이상합니다. 힘이란 무릇 땅과 물과 하늘을 돌고 돌아 순환해야 하는 것일진대 이 힘들은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솟아 나오듯 끊임없이 빠져 나오기만 합니다. 본디 세상에 허락된 것이 아닌 어떤 힘을 끌어다 쓰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찌 그 끝이 좋을 수 있겠습니까?"

등라는 잠시 모연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모연 자네는 처음에 왜 무공을 배우고자 했나. 그저 강해지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 단순한 마음을 따라 수련을 하다 보니 지금처럼 조화니 균형이니 순환이니 하는 원리를 깨치게 된 것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회전석에 대해 자네가 말한 것도 맞지만 내게는 우선 강한 힘이 느껴지네. 일단은 그 힘을 끝까지 추구해 볼 셈이네. 그러다 보면 나도 나의 길을 찾을 수 있겠지."

"왜 그렇게 힘을 쫒으려 하십니까?"

"최선을 다해야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 자네처럼 손쉽게 무언가를 얻는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해. 모연. 세상은 불공평하네. 나 같은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얻어내는 무언가를 자네처럼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은 쉽게 쥐고 또 쉽게 놓아 버린단 말이지. 저기 저 방족 아이는 과연 어느 쪽일까 궁금하군."

등라가 창히를 돌아보았다. 창히가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저야 그냥 스승님들을 쫒아 다니며 흉내나 내 볼 뿐이죠. 아유. 저는 두 분처럼 복잡하게 따지는 건 딱 질색입니다."

"재밌는 녀석을 찾았군.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 회전석의 힘은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다네. 크면 클수록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지. 물론 그에 걸맞게 정밀하게 세공되어야 하네만. 내 이 기계팔에 달린 작은 회전석으로도 어느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지는 아까 보았겠지. 그런데 말야. 공교롭게도 이 회전석이 하륜산 아래에 묻혀 있다네. 아니. 묻혀 있는 게 아니라 하륜산 자체가 커다란 회전석이나 마찬가지야. 단지 가공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게 무슨 의미겠나? 힘이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 자네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해도 산을 옮기고 바닷물을 마르게 할 수는 없겠지. 난 할 수 있다네. 그 회전석만 있으면!"

등라는 잔뜩 흥분한 채로 더 안쪽에 있는 공방으로 들어갔다. 작업장 안으로 들어오기 전. 모연과 창히는 넓은 공터에 자리 잡은 작업장 중앙에 성벽처럼 높은 천막이 씌워져 있는 걸 보았었다. 등라가 들어간 공방은 그 천막 안쪽이었다. 따라 들어간 모연과 창히는 그렇게 높게 천막을 씌웠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 쪽 구석에서는 석공들이 무언가를 연마하고 있었다. 커다란 가마솥처럼 보이는 검은 덩어리는 하나의 거대한 회전석이었다. 축에 물려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회전석의 힘을 이용해 석공들이 둥글게 불순물과 모서리를 쳐내고 있었다. 불순물이 떨어져 나가고 튀어나온 모서리가 깎여 원형에 가까워 질수록 회전석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연마석을 잘못 가져다 대었다가 그 힘에 못 이겨 튕겨나가 버리는 석공들도 있었다.

그리고 공방에는 모연과 창히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거대한 기계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어제 만난 대호도 비현실적인 크기였지만 아직 다 조립되지 않은 듯한 기계는 그것만으로도 그 높이와 길이가 각각 대호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강철로 된 외피 안쪽으로 육중한 축과 톱니바퀴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뭉툭한 두 개의 다리로 목 없는 사람처럼 서 있는 기계 옆에서는 팔이 될 부분으로 보이는 부품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떤 팔에는 등라의 기계팔처럼 손가락이 달려 있었고 어떤 팔에는 거대한 삽과 갈퀴, 말뚝처럼 두꺼운 송곳 같은 도구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수십 개의 쇠뇌가 연결된 네모난 부품도 보였다.

"대체... 이게 다 뭡니까?"

"보면 모르겠나? 회전석의 힘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철인형이지. 그에 걸맞은 회전석을 구하기 위해 꽤나 애를 썼다네. 다행히 방족 사람 하나가 회전석 덩어리를 캐낼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더군. 호랑이들이 꽤나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이만한 덩어리 하나를 구할 수 있었지."

"징패! 그 방족 사람이 징패였군!"

모연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등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륜산에는 흙과 바위가 벗겨져 회전석이 드러나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지. 흑암골이야. 하지만 그 곳은 호랑이들이 지키고 있다네. 징패 그 자는 호랑이들을 다룰 수 있더군."

"징패는 죽었습니다. 호랑이들에게 물렸죠."

"알고 있네. 하지만 이제 상관없어. 저 철인형만 있으면 그깟 호랑이가 문제겠는가."

"그리고 대호가 나타났습니다."

대호라는 말에 등라의 표정이 굳었다. 등라는 차가운 자신의 왼팔을 한 번 만져 보고는 모연에게 물었다.

"대호와 만났는가. 뭐라고 하던가."

"별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회전석 시계를 밟아 부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네가 여길 찾아온 게로군. 자네... 최근에 스승님을 뵙지는 못했는가?"

갑작스런 등라의 질문에 모연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등라님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님도 사라지셨습니다."

"그렇군. 그래놓고 이제 와서. 잔인한 분이야. 모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네. 진심이야. 하지만 우리의 길은 갈라졌을 뿐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히기까지 하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등라는 철인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기계가 완성되면 나는 저걸 타고 하륜산 흑암골로 갈 걸세. 거기서 호랑이들을 죽이고 대호도 죽일 거야. 그리고 방족을 하륜산에서 내쫒고 하륜산의 껍질을 벗겨 거대한 회전석으로 만들 계획이네. 그 회전석의 힘은 내가 천하를 손에 넣는 밑바탕이 되겠지."

그 말을 들은 창히가 버럭 소리쳤다.

"호랑이들을 죽이고 방족을 내쫒는다고요? 고작 이딴 장난감이나 만들려고 말입니까? 무슨 그런 정신 나간 계획이 다 있습니까!"

등라가 창히를 보며 웃었다.

"장난감인지 어떤 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이 방족 아이는 어느 편에 설 지 정했나보군. 모연. 자네는 어느 쪽인가. 방족인가 내 쪽인가. 아니면 관여치 않을 텐가. 그날 흑암골에 가보면 알 수 있겠지. 여봐라! 이 두 분은 볼 일을 다 보셨다. 정중히 밖으로 모시거라."


하륜산의 방족 마을로 가는 길을 다시 짚어가는 내내 창히는 투덜거렸다.

"대체 왜 그 자리에서 등라라는 자를 때려눕히지 않으신 겁니까? 스승님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 괴상한 장난감이 다 만들어 지길 기다릴 이유가 있습니까?"

"글쎄다. 그냥 그리 하여야 할 것 같았다."

"그냥이라니. 혹시 스승님 그 자에게 무슨 책잡히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팔 하나를 빚졌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네 이 녀석. 오늘 따라 말이 많구나.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왜 아닙니까? 호랑이를 죽이고 방족을 내쫒는다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징패도 그 자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요. 방족을 배신했으니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받긴 했지만요."

"너도 방족을 떠나지 않았느냐."

"떠난 것과 배신한 것이 어찌 같습니까?"

모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라가 모연을 떠났어도 모연은 그걸 단 한 번도 배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길을 가르고 이렇게 엇갈리게 한 건 어찌 보면 모연의 탓이었다. 하지만 모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찌해야 그 길을 가르지 않을 수 있었을 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고약한 운명일지도 몰랐다. 등라와 모연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하자는 맹세를 한 그 날. 둘은 이렇게 서로 칼을 맞댈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졌는지도 몰랐다.

방족 마을에 도착한 모연과 창히를 맞이한 건 뜻밖의 손님이었다.

"오랜만이구나."

강외였다. 등라와 모연의 스승이었던 강외.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강외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예를 차리려는 모연을 강외가 막았다.

"하륜파의 장문 자리를 여전히 거절할 셈이냐."

"등라가 돌아왔습니다. 응당 그에게 돌아갈 자리이지요."

"등라는 하륜파를 스스로 떠났다."

"저 또한 하륜파를 떠난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대체 왜 이리 고집을 부리는 게냐."

"등라와 저는 정식으로 대결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제인 제가 장문이 되려면 대결에서 이겨야 하지 않습니까."

강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강외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결국 이리 될 운명이었구나. 흑암골에서 등라를 꺾으면. 그때는 장문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냐."

모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강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장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들도 준비를 하게. 큰 싸움이 될 터이니."

"공연히 목숨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모연에게 강외는 크게 일갈했다.

"건방지구나! 방족은 수백 년 동안 호랑이와 함께 이 하륜산을 지켜왔다. 이 싸움이 어찌 너 혼자만의 싸움이란 말이냐! 너는 물러가서 네 몫의 싸움이나 준비하거라!"

모연은 강외에게 예를 표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날 흑암골에는 눈이 쏟아졌다. 모연과 창히. 그리고 강외와 방족 사람들은 흑암골에 모여 등라와 그의 기계병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륜산의 호랑이들이 모두 모인 듯 사람들 틈에 끼어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대호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륜산의 목을 죄어오듯 주기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호랑이들이 털을 곤두세우고 낮게 으르렁 거렸다. 진동이 점점 커지면서 쇠와 쇠가 부딪혀 미끄러지는 소리도 바람에 실려 왔다.

거칠게 날리는 하얀 눈발 사이로 멀리 검은 물체가 보였다. 그리고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 물체는 점점 커졌다. 호랑이 하나가 울부짖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검은 물체 뒤에서 회색의 둥근 덩어리 하나가 솟아올랐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건 거대한 바위였다. 튀어나간 호랑이를 향해 떨어지는 바위의 크기는 처음 솟아올랐을 때 상상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호랑이는 눈밭에서 미끄러지며 바위를 피해 보려 했지만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거대한 바위에 깔려 버렸다. 부서진 돌조각과 호랑이의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모두 흩어져라!"

강외가 외쳤다. 동시에 수십 개의 바위 덩어리가 날아올랐다. 사방으로 흩어져 숲으로 숨는 사람들과 호랑이를 향해 날카로운 쇠꼬챙이들이 날아왔다. 어느새 숲에 숨어 다가온 등라의 쇠뇌병들이었다. 바위와 쇠뇌를 피해 달아나느라 흑암골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가자!"

모연이 창히를 향해 외쳤다. 창히는 이미 쇠뇌병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회전석을 이용해 몇 배의 속도로 날아드는 쇠뇌였지만 창히의 속도는 이미 그걸 능가했다. 쇠뇌들은 창히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고 쇠뇌병들은 창히의 일격에 힘없이 쓰러졌다.

모연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바위를 향해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사람이 감당할 무게가 아니었지만 모연은 그 바위가 깃털이라 생각하고 눈송이라 생각했다. 모연이 밀어내고 밟아 내리는 대로 바위는 궤적을 바꿔 사람들과 호랑이들을 피해 떨어졌다. 모연은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바위를 날려대는 투석기 쪽으로 날아갔다.

발밑으로 목이 없는 거대한 철인형이 보였다. 철인형은 육중한 갈퀴가 달린 손으로 눈 덮인 흑암골을 긁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갈퀴가 파고 지나간 자리에서 가공되지 않은 검은 회전석이 드러났다. 모연은 철인형의 몸통에 앉아 있는 등라를 보았다. 호랑이에 올라탄 강외와 방족 사람들이 일제히 철인형을 향해 돌진했다.

모연이 투석기 위로 뛰어 내리니 기계를 다루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그래도 기계는 홀로 움직였다. 하륜산의 바위 틈새에 다리를 박아 넣은 채 투석기들은 스스로 바위 덩어리들을 깨뜨리고 파내 흑암골을 향해 날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하얀 눈이 미처 덮어주지 못한 사이로 하륜산은 검붉은 속살을 처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모연은 허리에 차고 있던 연검을 꺼내 들었다.

빛을 내며 돌아가는 회전석과 거기 연결된 축과 톱니바퀴를 유심히 살피던 모연은 종이처럼 얇은 연검을 톱니바퀴 사이에 찔러 넣었다. 연검에 걸려 요동치던 톱니바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이어진 축과 톱니들이 하나씩 회전을 멈추더니 결국 투석기가 멈춰 섰다. 회전석만 요란한 빛을 내며 헛되이 헛돌았다.

모연이 기계들을 모두 멈추고 흑암골 쪽으로 돌아오자 거대한 철인형을 둘러싼 호랑이들과 방족 사람들이 보였다. 땅을 내려치고 비처럼 쇠뇌를 달리고 거대한 팔을 나비처럼 가볍게 휘두르는 철인형에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하나둘 쓰러졌다. 그때 산을 찢는 포효 소리가 들렸다. 대호였다.

방족 사람들을 제외한 등라의 병사들은 그 포효만 듣고도 무기를 떨어뜨리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등라의 철인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호를 보자마자 육중한 발로 땅을 차며 대호를 향해 달려갔다. 방족 사람들은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땅 위에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철인형이 비처럼 쇠뇌를 날렸지만 대호는 꼬리를 휘둘러 쇠뇌를 모두 쳐냈다. 몇 개가 꼬리에 박혔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호는 섣불리 철인형에 덤벼들지 못했다. 모연이 보기에 이것은 너무도 뻔한 승부였다.

철인형은 아름드리나무 하나를 뿌리째 뽑아들어 대호를 향해 휘둘렀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나무와 갈퀴를 대호는 겨우겨우 피했다. 틈을 노려 달려든 대호가 철인형의 몸통과 팔이 이어지는 부분에 드러난 축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송곳니가 닿기 전에 먼저 철인형의 팔이 대호의 목을 움켜잡았다. 대호가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모연은 서둘러 달려가 철인형을 향해 날아 들었다. 온몸이 강철판으로 뒤덮여 있는 철인형은 축과 톱니가 드러난 부분이 많지 않았다. 회전석도 가슴 한가운데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모연을 발견한 철인형은 한 손으로 대호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갈퀴가 달린 다른 손을 모연을 향해 휘둘렀다. 모연은 가볍게 갈퀴를 비껴냈다.

갈퀴가 모연을 지나치는 순간 끼이익 소리와 함께 갈퀴가 철인형의 팔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등라의 기계팔에 달려 있던 것과 비슷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튀어나와 모연을 향해 날아 들었다. 한 아름은 되어 보이는 철인형의 손가락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모연을 공격했다. 연검으로는 굵은 손가락을 쳐내기는 무리였다. 모연은 몸을 휘어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손가락은 집요하게 모연을 감싸고 돌았다. 결국 손가락 하나가 모연의 몸을 둥글게 휘감고는 강하게 조였다.

"스승님 조심하세요!"

창히였다. 창히는 어느새 철인형의 등을 타고 올라 등라가 앉아 있는 운전석 뒤편으로 숨어들어 있었다. 창히는 주먹으로 운전석을 덮고 있는 두꺼운 유리를 내리쳤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한 가운데로 들고 있는 창을 찔러 넣자 창은 빠직 소리와 함께 등라를 향해 내리 꽂혔다. 등라는 고개를 살짝 움직여 창을 피했다.

그 덕에 모연을 죄고 있던 손가락의 힘이 살짝 풀렸다. 모연은 손가락에서 미끄러져 나와 손가락들을 잇는 관절 부위에 연검을 찔러 넣었다. 톱니바퀴에 연검이 말려 들어가며 챙 소리와 함께 부러져 나갔다. 하지만 손가락 두 개도 동작을 멈췄다.

등라는 한 손으로는 모연을 공격하는 손가락들을 조종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운전석 유리에 여전히 꽂혀 있는 창을 밀고 당기며 창히와 싸웠다. 창자루를 잡은 창히가 창날을 등라의 몸에 꽂아 넣으려 애썼지만 등라는 여유 있게 피하며 창을 밀어 휘저었다. 자루가 빙글 돌며 창히의 턱을 강하게 쳤다. 창히가 창을 놓친 사이 운전석 안쪽으로 잡아 당겨진 창은 반대로 돌아 창날 쪽이 창히를 향해 튀어 나왔다. 창히는 가까스로 날을 피했다.

모연은 여전히 대호의 목덜미를 붙들고 있는 철인형의 팔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손가락 세 개로는 모연의 움직임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등라가 모연을 향해 소리쳤다.

"잘 보아라! 대호의 정체를!"

모연이 미처 다가가기 전에 철인형의 손이 대호의 목을 꺾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거대한 대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철인형은 대호를 눈바닥에 집어 던졌다. 대호의 눈은 여전히 부릅떠져 있었지만 푸른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숨이 끊어진 대호의 몸은 서서히 줄어들더니 흰 머리를 늘어뜨린 노인이 되었다. 모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쓰러진 노인은 다름 아닌 강외였다.

"스승님!"

모연은 철인형에서 뛰어 내려 강외를 끌어안았다. 아직까지 몸을 추스를 수 있는 방족 사람들이 강외를 향해 달려왔다. 강외의 꺾인 목이 힘없이 늘어졌다. 등라가 소리쳤다.

"정녕 몰랐단 말이냐! 내 팔을 물어뜯고 하륜파를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게 누구였는지를! 모두 널 장문으로 만들기 위한 스승님의 뜻이었던 것을! 이래도 내가 모연 너와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하륜파에 남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모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황망히 서 있는 모연에게 강외를 넘겨받은 방족의 장로가 말했다.

"강외님은 하륜산과 방족을 지키려 한 것뿐입니다. 방족에는 오래 전 부터 전해내려 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철로 만든 인형이 하륜산에 묻혀 있는 검은 돌을 캐내 세상의 움직임을 멈추려 한다는 전설이지요. 그걸 막으려면 방족이 아닌 사람이 하륜파의 장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강외님은 그게 모연님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방해가 되는 등라님을 내쫒은 거지요. 설마 등라님이 철인형을 타고 나타날 줄은..."

"쓸데없는! 그런 전설이 다 무어란 말이냐! 모연! 아직도 늦지 않았다. 나와 손을 잡자. 함께 회전석의 힘을 얻어 세상을 흔들어 보잔 말이다. 그럼 나와의 맹세도 지킬 수 있지 않느냐!"

"이야야얏!"

창히였다. 어느새 다시 창을 집어든 창히가 등라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창히는 등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가볍게 창을 피한 등라의 기계팔이 운전석을 뚫고 나와 창히의 목을 향했다. 재빨리 피했지만 다섯 개로 갈라진 손가락이 춤을 추며 창히를 감싸고 돌았다. 창히는 필사적으로 손가락을 쳐내며 방어했지만 날카로운 금속 손가락은 창히의 몸 곳곳을 긁고 지나갔다.

급히 운전석을 향해 뛰어 오른 모연이 양손을 두꺼운 유리에 대고 기합을 내질렀다. 유리 전체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모래처럼 등라에게 쏟아졌다. 등라가 벌떡 일어나며 기계팔로 창히의 목덜미를 쥐고는 철인형 아래로 집어 던졌다. 눈 위로 떨어진 창히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정녕 내 앞을 막아서야겠단 말이냐. 나와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지금껏 장문의 자리도 고사하며 나를 기다린 것 아니냐. 이제 문파도 없고 스승도 없다. 대체 무엇이 중요해서 굳이 나를 막으려 한단 말이냐."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있습니다."

"나 역시 그러하다. 결국 내가 내 뜻을 접고 네 밑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 아니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전 등라님을 앞선 적이 없습니다."

"헛소리! 그럼 오늘 여기서 그 승부를 가려 보자꾸나!"

거대한 철인형 위에서 등라와 모연이 마주섰다. 눈보라는 아까보다 더 거세게 몰아쳤다. 모연은 왼팔을 등 뒤로 붙였다.

"네 녀석이 끝까지... 후회하지 마라. 오늘은 너와 나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등라의 기계팔에 달린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다섯 자루의 연검처럼 꿈틀거리며 모연에게 날아들었다. 모연은 한 팔로 금속 손가락들을 가볍게 밀어내며 순식간에 등라에게 접근했다. 등으로 기계팔을 막고 등라의 명치를 짚으려던 모연의 오른손을 등라의 오른손이 막았다. 두 개의 오른손이 등라와 모연의 가슴 사이에서 분주하게 오갔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방어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등라의 기계팔이 다시 모연의 머리를 노렸다. 모연은 허리를 빙글 돌려 미끄러져 나가며 등라에게서 멀어졌다.

"무공의 수련 또한 게을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 네 녀석이 북방 제일이라는 소문이 떠 도는데 내가 속 편하게 앉아 있을 수만 있었겠느냐!"

등라의 기계팔이 다시 날아 들었다. 모연은 아까처럼 등라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여의치 않았다. 등라의 다섯 손가락은 모든 방향에서 모연을 압박하며 공격하고 몰아 붙였다. 모연은 어쩔 수 없이 금속 손가락을 정면으로 상대했다. 모연은 손가락 하나를 붙잡아 두 동강 낼 수 있었지만 그 틈에 다른 손가락이 모연의 뺨을 길게 찢었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모연은 재빨리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이왕 기계공의 길로 들어서셨다면 어째서 나머지 하나의 팔도 기계로 바꾸지 않으신 겁니까. 만일 오늘 두 개의 기계팔로 맞붙었다면 저는 등라님의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까지 왼팔을 쓰지 않는 주제에!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전력을 다해 맞서거라!"

그때였다. 멈춰있던 철인형의 가슴에서 우두둑하며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철인형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중한 갈퀴로 땅을 내려치자 땅 밑에 묻혀 있던 회전석의 검은 표면이 드러났다. 철인형이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르며 흑암골의 땅을 긁어대자 점점 더 많은 회전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회전석이 드러날수록 하륜산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점점 거세졌다.

"등라님! 어떻게 된 겁니까! 당장 이 기계를 멈추십시오!"

"잠금 장치가 부서진 모양이야. 회전석이 서로 조응하는 힘이 생각보다 너무 강력하군. 잘 보아라. 이제 이 팔에 달린 회전석의 힘도 더 거세졌을 테니!"

등라가 다시 기계팔을 날렸다. 등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금속 손가락은 아까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고 더 강하게 모연을 때렸다. 한 팔로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피하기만 한다면야 가능하겠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철인형은 더욱 거세게 땅을 파헤쳤다. 아래에서 창히를 비롯한 방족들이 막아보려 애쓰고 있었지만 의미 없는 희생만 늘어갈 뿐이었다. 모연은 어쩔 수 없이 등에 붙이고 있던 왼팔을 풀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자 받아라!"

등라가 달려 들었다. 기계팔과 오른손을 총동원해 모연을 공격했지만 두 팔을 다 사용하는 모연은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흔들리는 철인형 위에서 모연은 나비가 춤추듯 날아다니며 사방에서 등라를 공격했다. 등라는 금방 수세에 몰렸다. 모연이 바짝 달라붙으니 기계팔도 제대로 쓰기 힘들었다.

모연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기계팔을 슬쩍 비껴내면서 기계팔의 팔꿈치를 짚었다. 축과 톱니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부분이었다. 모연은 톱니가 약하게 물려 있는 방향을 따라 기계팔을 잡아 틀었다. 금속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팔이 아래로 축 처졌다. 모연은 틈을 주지 않고 어깨로 올라가 마찬가지로 관절을 분해하고 등라의 기계팔을 아예 잡아 뽑아 버렸다.

한 팔 밖에 남지 않은 등라는 모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연은 어렵지 않게 등라를 제압하고 외쳤다.

"자! 이제 이 흉측한 기계를 멈추십시오!"

"그건 안 돼!"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다. 잠금 장치가 부서졌어. 더 이상은 회전석을 멈출 방법이 없어. 이 철인형은 하륜산을 다 파헤치고 거대한 회전석이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야."

"회전석이 어디 있습니까!"

"운전석 바로 아래다."

모연은 운전석을 덮고 있는 철판들을 잡아 뜯었다. 두꺼운 철축이 커다란 톱니바퀴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쪽으로 밝은 빛을 내는 회전석이 보였다. 밤처럼 검은 회전석은 거미줄처럼 덮여있는 흰 무늬들에서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으며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용없어. 사람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다."

등라가 고개를 저었지만 모연은 포기할 수 없었다. 철인형의 몸통 한 가운데에 커다란 회전석이 있었고 회전석에 두꺼운 철축이 길게 박혀 있었다. 그 철축이 돌아가며 중간중간 달려 있는 톱니바퀴를 통해 몸 전체에 힘을 전달하고 있었다. 모연은 철축을 붙잡아 멈춰 보려 했지만 어림없는 시도였다. 모연의 손바닥 가죽이 벗겨져 피가 철철 흘렀지만 회전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모연은 아까 틈새로 연검을 밀어 넣어 톱니를 튕겨 냈던 걸 떠올렸다. 이 두꺼운 철축은 연검 따위로 멈출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단단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모연은 등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이 느려지고 세상이 가벼워지고 세상이 부서지는 것이라 하였지요. 내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먹으면 온 세상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회전석으로 만든 이 기계는 세상의 조화에서 벗어나 있다. 네가 마음먹는다 하여 약하게 할 수 없어. 이미 해 보지 않았느냐."

"기계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 또한 세상의 일부가 아니겠습니까. 마음먹기에 따라 제가 얼마나 단단해 질 수 있을지 봐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무슨 짓을 하려고!"

모연은 대답 없이 두꺼운 철축과 연결된 톱니바퀴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약해보이는 톱니 하나를 찾아 자신의 왼팔을 가져다 댔다.

"안 돼! 바보 같은 짓 하지 말아라!"

등라가 달려들어 말리려 했지만 모연은 자신의 왼팔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강석보다도 단단하고 강철보다도 질기다고 생각했다. 왼팔에 힘이 들어가며 살짝 뻣뻣한 느낌이 들었다. 모연은 그 왼팔을 그대로 톱니 사이에 찔러 넣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왼팔의 손가락뼈들이 부러져 나갔다. 모연의 왼팔이 톱니 사이로 말려 들어가며 철축이 도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모연은 온 힘을 다해 철축을 톱니 반대 방향으로 밀어 냈다. 왼팔이 빨려 들어갈수록 철축의 속도가 느려지며 바깥쪽으로 조금씩 비껴나기 시작했다.

철축이 멈추려고 하자 회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밝아졌다. 이제는 쳐다보기만 해도 눈이 멀 것 같았다. 그리고 철축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모연의 왼팔은 어느새 어깨 근처까지 빨려 들어갔다. 모연의 몸이 통째로 톱니 사이로 빨려 들어갈 형국이었다.

그때 모연의 몸을 등라가 끌어안았다. 하나 남은 팔로 모연을 단단히 끌어안은 등라는 두 발로 톱니와 철축을 딛고 끌려 들어가는 모연을 붙들었다. 회전석이 더 밝아졌지만 그만큼 철축이 더 밀려났다.

"으아아아아악!"

등라가 외쳤다. 모연의 왼팔이 끊어졌다. 동시에 철축이 톱니를 벗어났다. 멈췄던 철축이 무서운 속도로 다시 돌아가며 사방에서 톱니바퀴들이 튕겨져 나왔다. 등라는 모연을 끌어안고 철인형에서 뛰어 내렸다. 모연의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하얀 눈밭에 흩뿌려졌다.

철축이 어긋나고 우그러졌지만 회전석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철인형의 내부에서 튕겨 다니며 부품들을 우그러뜨리기 시작하자 철인형의 거대한 몸체는 비틀거리다가 기울어지며 자신이 파헤쳐 놓은 검은 땅 위로 넘어졌다. 철인형 밖으로 튀어 나온 회전석은 바닥에 있는 검은 원석과 부딪히며 갈려 나가고 쪼개졌다. 결국 산산조각이 나고 나서야 회전석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서. 하륜파의 장문직은 수락하신 겁니까?"

모연의 어깨를 싸맨 붕대를 갈아 주며 창히가 물었다. 모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흑암골에서 등라님을 꺾으면 장문의 자리를 물려받겠다고."

"스승님도 참 괴팍하십니다. 처음부터 두 손으로 싸웠으면 될 것을 그리 뜸을 들이다 승부를 내십니까. 당하는 입장에서 어디 기분 좋겠습니까."

"나의 마음이 그리 흐른 걸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괜찮았습니다. 스승님이 그렇게 전력을 다해 수를 펼치시는 건 처음 봤으니까요."

"괘씸한 녀석이로고. 스승이 사지에 몰려 있는데 팔자 좋게 구경을 했단 말이냐."

"도와 드린다고 올라가 봤자 제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밀어 내실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그 핑계로 슬쩍 철인형 위에 올라가서 구경을 했으면 더 재밌었을 듯도 합니다."

모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붕대를 다시 싸맨 창히가 일어나며 말했다.

"방족은 드러난 회전석을 다시 흙으로 덮느라 바쁘고 등라님이 사라진 뒤로 회전석이 바닥난 기계공들은 이제 작은 조각으로 장난감이나 만들고 있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정식으로 장문이 되셨으니 이제 우리 하륜파도 제자들을 모아 좀 세력을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스승님이 철인형과 싸워 이겼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자자하니 모집만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설 겁니다."

"알아서 해라. 나는 오늘로 장문직을 그만 둘 터이니."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까 분명 장문직을 수락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수락했지. 수락을 하고 장문이 되었으나 오늘부로 그 장문직을 그만 두겠다는 뜻이다. 못 알아 듣겠느냐?"

"못 알아 듣겠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장난이십니까."

"네 이 놈. 장난이라니. 너도 이제 언행을 점잖게 하거라. 한 문파의 장문이라는 사람이 그리 가벼워 어디 제자들이 모이겠느냐?"

"점점 알 수 없는 말을 하십니다!"

입을 쩍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창히를 향해 모연은 크게 웃었다.

"장문이 장문직을 그만 두면 제자 중 하나가 장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내 제자라고는 너 하나 밖에 없으니 네가 아니면 누가 장문을 하겠느냐."

"그게 뭡니까? 문파원 하나 없는 장문이 무슨 소용입니까?"

모연은 웃음기를 거두고 창히를 향해 말했다.

"창히야. 너는 한 문파의 장문이 될 실력이 충분하다.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야 원래 신경 쓰지 않던 것이 아니냐. 하륜파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름은 네 마음대로 바꾸어도 좋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돌 생각이니 찾지 말거라. 인연이 되면 또 보자꾸나."

"아니! 어디를 간다고 그러십니까! 팔 하나 밖에 없는 분이 밥이라도 제대로 해 드시겠습니까?"

창히는 펄쩍 뛰며 말렸지만 모연은 이미 뜻을 굳힌 뒤였다.

"네 앞가림이나 잘 하거라. 그리고. 팔은 하나 더 있다."


등라와 모연은 갈대가 가득한 강가에서 마주섰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저녁 햇빛이 강물 위에서 보석처럼 부서졌다. 세상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회전석은 여전히 스물네 시간에 한 바퀴 씩 세상을 걸어 돌리고 있었다.

"이제야 공평하게 대결을 해 볼 수 있겠군."

등라가 말했다. 모연이 오른팔을 들어 자세를 잡으며 대답했다.

"이번엔 진짜로 최선을 다합니다. 각오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오냐. 나도 봐 주지 않겠다. 팔이 둘이면야 네가 유리하겠지만 외팔이 생활은 내가 훨씬 오래 했다는 걸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기계팔을 쓰시다가 사람 팔을 쓰시려니 오죽 답답하시겠습니까. 이 승부는 제가 이깁니다."

"입만 살았구나! 지는 사람이 저녁거리를 준비한다. 알겠느냐!"

"좋습니다!"

등라와 모연의 단단한 팔이 두 사람의 가슴 사이에서 맞부딪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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