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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1 요정 이야기

-현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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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란 관리사 보조업무
심야 근무(오후 10시~오전 8시). 시간마다 점검만 하고 그사이에 수면 가능.
주 5일, 1일 10시간 근무. 18세 이상 22세 이하 여성으로 귀가 예민한 분 우대. (면접을 겸한 간단한 테스트 있음)
최저시급의 1.5배 지급.

처음 본 순간 현아는 바로 이거다 싶었다.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자 곧바로 지원 버튼을 누르고 작성해둔 이력서를 보냈다. 정말 괜찮은 곳이라면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테니 자연 경쟁도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아르바이트는 지원자가 너무 많이 몰리면 신청을 막아버리는 경우가 있어서 서둘러야 했다.
황급히 지원을 하고 나서 다시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니 조금씩 의심과 불안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짧은 근무시간과 높은 급여에 끌리긴 했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
요정란. 요정의 알이라니.
현아가 고등학생일 때 요정이 세상에 알려졌다. 인간과 매우 닮았지만 덩치가 작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구체관절 인형 같은 생물. 성장했을 때 평균 키는 60센티미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요정은 비싸지만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귀한 애완동물이 되었다. 처음에는 희소가치 때문인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시간이 흘러 전문적으로 요정을 부화시키고 분양하는 업체가 생기면서 공급이 안정되고 가격이 낮아졌으나 지금도 선진국의 부유한 사람이나 기른다고 여겨지고 있다.
유행을 시작한 것은 인기 연예인, 대기업 경영자 가족, 산유국 왕족 같은 셀럽 혹은 부유층이었다. 이어서 TV 프로그램과 인터넷 개인방송에서 경쟁적으로 요정을 기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붐을 일으켰다.
현아도 즐겨 보는 인터넷 방송이나 SNS를 통해 요정을 보고 푹 빠져들었지만 기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꿈 같은 얘기였다.
마트 캐셔인 어머니와 화물차 기사인 아버지를 둔 중하위층 가정의 고등학생인 현아에게 요정은 화려한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화면 너머로 볼 수는 있되 같은 세계에 공존한다는 실감을 느낄 수 없는 존재였다.
나름 노력한 끝에 현아는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더 좋은 일류대학도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등록금이 부담되어 커트라인이 더 낮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쪽을 택했다.
하나뿐인 자식의 성공을 인생의 마지막 희망으로 여긴 부모는 더 좋은 대학에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현아는 부모 앞에서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아쉬움을 품었다. 그저 빨리 졸업하고 취직해서 독립하고 싶었다. 요정은 무리여도 고양이라면 기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집에서 벗어나 혼자 힘으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오랜 꿈이기도 하고.
그렇게 1학년은 어려움 없이 보냈으나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 추첨에서 떨어져 하숙을 해야 할 처지가 되면서 고민이 생겼다. 현아의 대학교 기숙사는 1학년의 경우 거주지역과 입학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하기에 무난하게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었으나 2학년 이상은 추첨으로만 선발하는 방식이기에 이런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1학년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지냈지만 이젠 처지가 달라졌다. 학교 인근 원룸을 구해 1학기 동안은 저녁 때 호프집 서빙을 하면서 보냈는데 문제는 집으로 돌아온 여름방학 기간이다.
학비는 부모가 부담해주고 있고, 언젠가 독립한 뒤에 갚을 생각이지만 월세와 생활비까지 신세 질 형편이 아니었다. 돌아와 보니 집안 형편이 뻔히 보였다.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아서 일을 하다 쉬다를 반복했고, 아버지 역시 나이도 있고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한 처지였다.
의기소침한 현아는 같은 과 친구 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했다.
“잘 지내?”
“그렇지 뭐.”
유리의 살짝 탁하지만 평소처럼 여유로운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유리는 현아의 목소리를 비타소주(비타민 음료와 소주를 섞은 칵테일)에, 자신의 목소리를 막걸리에 비유한 적이 있다. 현아는 유리의 목소리를 좋아해서 별 얘깃거리 없이도 종종 수다를 떨곤 했다. 특히 무슨 일이 생겨도 무심한 듯 쿨한 듯이 말하는 유리의 담담한 어조를 좋아했다. 불안이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교 얘기, 최근 본 영화 얘기, 과 동기들은 방학 때 어디서 뭐 하는지에 대한 알맹이 없는 얘기가 이어지다가 동기들이 무슨 알바를 한다더라 하는 화제가 나오자 겨우 본론으로 들어갔다.
“넌 이번 방학 때 알바해?”
“과외만 좀 하는데.”
“웬일이야, 좋겠다……. 과외가 최고 꿀이라던데.”
“과외는 인맥없음 힘들어. 요샌 다들 인강 보니까 과외 많이 안하걸랑. 나도 엄마 아는 사람 딸이라고 해서 맡은 거지.”
“야,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우리집은 거진 시골이라 알바 자리도 없어서 고민이야. 어차피 2학기도 자취를 해야 하니 방학 때 바짝 벌어둬야 되는데…….”
유리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현아에게 유리는 매력적인 목소리도 좋지만 시시콜콜한 얘기를 털어놓을 좋은 상대이기도 했다.
“더는 집에 손 벌릴 처지도 아니고. 솔까 등록금 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거든. 나머진 내가 해결해야 해.”
“너 1학기 내내 저녁에 알바했잖아. 그래서 우리 과모임도 너 땜에 거기서 한 적도 있고.”
“응. 이대로라면 2학기도 계속 알바해야 돼. 어쩜 좋니?”
“에휴……. 우리 현아 예쁜 얼굴 너무 상했는데 방학이라고 쉬지도 못하겠네. 토닥토닥 해줄게.”
유리는 평소에 친한 사람의 머리나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버릇이 있고 통화를 할 때도 ‘토닥’이나 ‘쓰담’ 같은 말을 해주었다. 말로 해주는 원격 쓰다듬도 현아는 싫어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그림 아이콘으로 보내줄 때가 더 많았지만.
“계속 알바사이트만 뒤지고 있어.”
몇 초 동안 말이 없던 유리가 갑자기 물었다.
“어, 잠깐만. 집이 ○○시라고 했지?”
“응.”
“내가 예전에 봤던 게 생각났는데. 일단 끊어봐. 톡으로 보내줄게.”
“뭔데?”
현아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이후 몇 분 동안 소식이 없어서 현아는 휴대폰으로 새로 나온 뮤직비디오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유리의 메시지가 떴다. 딱히 글도 없이 달랑 인터넷 주소만 적혀 있었다. 눌러보니 구인구직 웹사이트의 구인공고가 나왔다.
〈요정란 관리사 보조업무 모집〉.
생전 처음 듣는 직종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급여가 좋았고 주소가 현아의 집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반면 곰곰이 생각할수록 수상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전 세계 부유층만 입양한다는 요정. 그 요정의 알을 관리하는 회사가 현아가 사는 별 볼 일 없는 대한민국의 인구 11만 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에 있다니. 이제야 알았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믿기 힘들었다.
혹시 거짓으로 속인 걸까? 높은 급여로 여성을 유인하여 인신매매라도 하려는 건가? 여성만 모집한다는 점이 특히 수상했다. 요정 알이 남자를 보면 경기라도 일으킨다는 말인지, 왜 여자만 뽑으려는 걸까.
덜컥 겁이 났지만 지원을 한 지 두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답장이 오자 마음은 설렘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렇지만 이런 꿀알바를 망설이다 놓칠 순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해소되지 않은 불안에 대한 대처를 고민한 끝에 도균을 떠올렸다. 유치원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동네 친구로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며 사이가 좋아 ‘병균’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남자를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는 현아가 유일하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남자였다.
톡을 보내 뭐하냐고 물어보니 다다음달에 군대 간다며 PC방에 죽치고 있었다. 밥을 사주고 PC방비를 내주는 조건으로 내일 면접에 동행하기로 약속을 받았다. 한결 안심이 된 현아는 집에서 뒹굴면서 여름방학의 하루를 보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자고 생각하며.


호프집 이후로 두 번째로 보는 면접이라 생각보다 긴장되었다. 그때는 사실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생이었고, 가자마자 바쁜데 잘 되었다며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당일 채용되어 곧바로 앞치마를 두르고 주문받으러 달려가야 했다. 면접 과정은 없다시피 했고 사장도 털털한 성격에 함께 일하는 알바들도 다 같은 대학 선후배라서 금방 친하졌기에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없었다.
즉 이번이 제대로 치르는 첫 번째 입사면접인 셈이었다. 비록 방학 동안에만 하는 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지만 인생에서 하나의 관문을 지나야 하니 자연 떨릴 수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인 정류장에서 도균과 만나 버스를 함께 탔다. 도균은 장난기가 많고 잘 웃는 착한 녀석이지만 덩치가 커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특히 밤에 술 마실 때.
회사는 위치만 의심스러울 뿐 멀쩡한 건물에 멀쩡한 사무실이었다. 4층 건물의 2층. 왼쪽으로는 컨테이너 화물차 출입구가 달린 물류창고, 오른쪽에는 재활용센터가 있다.
두리번거리던 도균이 물었다.
“여기가 맞아?”
“보내준 지도의 위치는 맞는데.”
“창문엔 동물병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도균이 가리킨 대로 2층 창문에는 시트지를 떼어내고도 접착면이 남은 때문인지 흐릿하게나마 창문 하나마다 한 자씩 적힌 ‘소망동물병’이라는 큼직한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옆, ‘원’이 있었을 자리에 〈소망페어리케어클럽〉이라고 적힌 훨씬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니 외견만큼 멀쩡하고 평범한 사무실이 나왔다.
열린 유리문 안을 기웃거리자 입구 쪽 책상에 앉은 여성이 어떻게 왔냐고 물었고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니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도균이 말없이 따라왔지만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좁고 먼지 나는 방 안에는 작은 회의용 탁자와 바퀴 안 달린 사무용 의자 몇 개가 있고 뒤에는 다른 탁자와 의자 같은 비품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바로 다른 여성 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현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덕하고 착해 보이는 첫인상 덕분이었다. 조폭 같은 아저씨나 마담 같은 여자가 면접관이었다면 바로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대충 뒤로 묶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옅은 화장에 폴로 셔츠와 체육복 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중년 여성이 면접관임을 알게 된 현아는 한결 마음을 놓았다.
이후 현아가 ‘주임님’이라 부르게 되는 최영란 주임은 도균을 슬쩍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동행이시죠?”
도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친군데요, 여기 오는 길을 모르겠다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면접은 이 친구가 볼 거고요. 저 여기 있어도 되나요? 나가 있어야 하나……?”
“동행분이 종종 있어요. 저희가 젊은 여성만 모집하니까 혹시나 불안해서 애인이나 친구를 데려오는 분이 많아요. 의심을 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주임은 아주 작게 한숨을 쉬더니 출력한 현아의 이력서로 눈길을 주면서 말했다.
“면접은 금방 끝날 테니 그냥 계세요.”
이어서 간략하게 현아의 이력서에 적힌 몇 가지를 확인하듯 묻고 대답했다.
“언제부터 일하실 수 있어요?”
“아, 네. 그야 언제든지……”
“내일부터 하라고 하면 바로 가능하시죠?”
“예.”
얼빠진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벌써 합격한 건가? 채용 확정? 아르바이트라지만 너무 쉽고 빠른 거 아닌가 싶었다. 이대로 면접이 끝나나 싶을 때 엉뚱하게도 도균이 입을 열었다.
“저,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주임은 안경 너머로 눈만 슬쩍 돌려 쳐다보았다. 상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균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왜 성별하고 연령을 정해놓은 거죠? 그 남녀고용평등법인가, 그거에 위배되는 거 아니에요?”
“하하, 아니에요. 그 법은 채용조건에서 성별에 차이를 두면 안 된다는 취지 아닌가요? 업무의 특성상 한쪽 성별만 가능한 일이라면 법 위반이 아니죠.”
“요정 알 관리를 여자만 할 수 있는 이유는 뭡니까?”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어린아이가 제일 적합해요. 근데 미성년자는 쓰는 쪽도 일하는 쪽도 제약이 많아서 힘들죠.
특히 우리는 3교대로 밤에도 일해야 하니까요. 성인이라면 단연 여성이 적합해요.”
“꼭 여자여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우리도 처음엔 제한을 두지 않았는데 테스트를 해보니까 남성의 부적합도가 너무 높았어요. 상대적으로 여성이 높았죠. 마침 좋은 기회인 것 같은데, 테스트를 받아보시겠어요?”
“테, 테스트요?”
“겁먹을 거 없어요. 건강검진 받을 때 하는 청력검사 비슷한 거예요. 마침 두 분이 계시니 직접 테스트를 받아보고 결과를 비교해볼까요?”
“좋아요. 해보죠. 만약 제가 더 결과가 좋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쪽 남자분은 지금 하시는 일 있나요?”
“제가 다담달에 군대를 가게 되어서…….”
“그래요, 어쩔 수 없네요. 만약 결과가 좋다면 그쪽을 채용하려고 했는데.”
미소가 어우러진 농담 같은 대화를 나눈 후에 두 사람은 주임을 따라 다른 방으로 갔다.
안에는 의료기기로 추정되는 커다란 기계가 있고 책상 위의 노트북과 컴퓨터로 이어진 복잡한 전선 다발이 보였다. 주임은 헤드폰을 하나 집어 들어 보였다.
“어느 분이 먼저 하실래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제가 하죠.”
도균이 선뜻 나섰다.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몰라 여전히 당황스러운 현아로서는 다행이었다. 테스트가 어떤 내용인지 미리 알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렇지만 봐도 별 힌트는 얻지 못했다.
도균은 시키는 대로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에 손을 얹고 헤드폰을 썼다.
들리는 소리를 듣고 그에 맞는 내용을 화면에 찾아서 클릭하라는 내용이다. 일종의 인터넷 설문조사와 흡사하게 생긴 양식이 모니터 화면에 떴다. 잠시 웅웅거리는 기계의 작동음, 마우스를 누르는 클릭 소리만 들렸다.
두 사람의 테스트가 끝나자 주임은 창을 두 개 띄워 결과를 보여주었다.
“왼쪽이 먼저 하신 남자분, 오른쪽이 여자분의 점수예요. 확 눈에 들어오죠?”
정말 커다란 숫자라서 눈에 안 들어올 수 없었다. 도균의 점수는 37점, 현아의 점수는 82점이었다.
주임은 손가락으로 ‘82’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꽤 높은 점수예요. 아주 좋은데요. 우리가 찾는 분을 제대로 만난 것 같아요.”
도균은 입술을 내밀고 반쯤 혼잣말로 불평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라고…….”
현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테스트의 내용은 잡음 비슷한 희미한 소리를 듣고 느껴지는 감정에 맞는 항목을 골라서 선택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항목의 글귀가 매우 추상적이라는 점이었다. 가령 생명의 고동, 사랑스러운 감정, 배고픔, 손이 닿지 않는 부위의 가려움, 낯선 거리감 등등.
현아는 옛날에 친구의 엠씨스퀘어를 잠깐 써봤던 느낌을 받았다. 희미한 백색 소음이 파도처럼 점점 크게 들리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고, 간혹 심장이나 맥박과 흡사한 고동이 느껴졌다.
“저기요, 이 테스트가 실제 일하는 내용하고 어떻게 관련이 있는데요?”
왠지 일할 것도 아닌 도균이 더 질문을 많이 했다. 주임은 어차피 현아에게도 해줄 말이어서 그런지 순순히 대답했다.
“실제 하는 일이 이래요. 계속 헤드폰을 쓰고 알의 상태를 듣는 게 일이니까요.”
“듣는다고요?”
“알의 컨디션이 어떤지 살피고 그에 따른 대응을 해주는 게 업무 내용이에요. 이현아 씨에게는 일하게 되면 구체적으로 알려줄 거예요.”
“근데 이거 비효율적인 거 아닙니까? TV 다큐에서 본 것 같은데, 외국에서는 기계가 다 관리하던데…….”
“우리도 그런 기계가 있으면 좋죠. 검토는 해봤는데, 구매와 관리에 너무 비용이 나가니까 차라리 사람을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거죠. 실은 수도권에 새로 설비를 확장할 예정이에요. 빠르면 내후년 정도? 어차피 이현아 씨도 대학생이고, 졸업 전까지 방학 때만 일할 생각이죠?”
“네.”
현아가 대답했다.
“이현아 씨는 테스트 결과가 좋아서 앞으로도 자리만 있으면 우리가 연락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도균이 다시 끼어들어 물었다.
“확장한다는 말은 기계를 도입한단 말이죠?”
“맞아요.”
“근데 왜 하필 여기서 시작한 거예요?”
“그야 우리나라에서 요정란이 처음 발굴된 곳이 여기니까요.”
“아하, 포케몬에서 태초마을 같은 거군요? 어쩐지.”
도균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이해했다. 요정을 포켓몬스터로 생각하고 말고는 개인의 자유지만, 현아는 기계보다 값싸다는 이유로 동원된 인력이라는 자신의 처지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어차피 방학 때만 할 아르바이트, 오래 하고 싶은 생각 따윈 애초에 없다. 졸업하고 보란 듯이 취직할 때까지만 일할 생각이었다.
현아는 주임의 안내에 따라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


현아는 요정란 보조 관리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정식 직종은 없다. 무엇보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요정 알을 관리하는 업체는 이곳 하나밖에 없고 종사하는 노동자는 모두 합쳐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가 지정한 한국고용직업분류에 따르면 〈반려동물 미용 및 관리 종사원〉에 해당하는 직종이다. 요정란 관리사란 그냥 폼나게 지어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는 얘기.
하긴 반려동물 영양사도 장례지도사도 심지어 반려동물과 산책을 대행해주는 직업도 있는데 요정 알 관리하는 직업이라고 없으란 법 있나. 현아는 일을 배우면서 이런 나름의 자부심도 함께 배웠다. 우리나라에서 스물도 안 되는 극소수만 종사하는 희귀한 직업이다. 비록 외국산 고가기계의 도입과 함께 곧 사라질 운명에 처했지만.
업무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구인광고 내용처럼 마음껏 잘 수는 없었지만. 계속 헤드폰을 쓰고 알 내부에서 발생하는 잡음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끄럽진 않지만 잘 수도 없고 집중을 해야 해서 책이나 폰을 들여다보는 짓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반면 육체의 노동강도가 매우 낮다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현아는 일에 적응하면서 최대한 쪽잠을 자면서 시간을 절약했고 낮에는 어학원에 다니고 자격증 시험공부를 했다.
요정 알은 현아의 생각보다 작아서 성인 남자 주먹 정도 크기였다. 더구나 상상보다 훨씬 섬세하다고 한다. 약간의 충격, 심지어 소음에도 껍데기에 금이 가는데 이렇게 파손되고 외부 공기가 유입된 알은 한 마디로 죽은 것과 같다. 부화하지 못하고 그대로 썩어버린다.
따라서 인큐베이터라 불리는 작은 배양기에 하나씩 소중하게 담겨서 관리된다. 수십 개의 달걀을 동시에 관리하는 부란기(孵卵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가의 설비다. 각각의 알에 센서를 부착하여 발생하는 진동과 소리를 관리 컴퓨터로 전송하고, 이를 요정란 관리사가 직접 듣고 알의 상태를 확인하여 이상이 생길 때마다 적절한 조처를 해준다.
이 모든 과정을 전자동으로 처리하는 기계는 아직 대한민국에 없어서 테스트를 통과한 청력과 감성이 예민한 사람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 그들이 모두 가임기 여성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고 주임은 설명했다.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하고 감정이입을 잘하는 사람이 우리 일에 잘 맞아. 현아도 혹시 공포영화나 무서운 거 잘 못 보지?”
현아는 강한 동의를 표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겁이 많은 사람도 있는데, 지나치게 몰입하거나 감정이입을 잘해서 무섭거나 끔찍한 걸 못 보는 사람도 있어. 아이들 중에 특히 그런 경우가 많거든. 사실 걔들이 제일 적합한데 미성년자를 고용하기가 어디 쉬워야지. 그다음으로 많은 쪽이 20대 여성. 보통 60점만 넘어도 일을 시키는데 현아 너처럼 80점 넘는 인재가 잘 없어.”
이제 같이 일하게 되어 편하게 말을 놓은 최영란 주임은 현아의 적성이 맞는다며 칭찬했고 현아 역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급여도 좋고 힘들지도 않고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직원이 여성뿐이어서 직장 분위기도 편안하고 좋았다. 유일한 남자는 회사 사장인데 야간 근무자라 그런지 거의 만난 적도 없다. 탕비실이나 화장실 오고 가다가 몇 번 마주쳐서 꾸벅 인사한 정도다.
심지어 선배 아르바이트의 말에 따르면 관리사들과 회의를 하거나 업무지시를 내리는 실제 업무는 회사의 유일한 이사인 사장 부인이라고 한다. 직원들 모두 사모님이 아니라 이사님이라 부르고 있고 실질적으로 회사의 최고권력으로 여기고 있었다. 현아도 일하게 된 첫날 남자 사장이 아니라 이사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들었다.
어느 날에는 근무교대를 앞두고 조금 일찍 출근한 선배와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었다. 알에서 나오는 음파를 우리는 어떻게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 이를 기계는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는 건지. 선배는 현아의 의문에 고개를 저었다.
“무슨 원리인지 이론인지 나도 몰라. 근데 어쨌든 제대로 돌아가잖아? 예를 들면…… 운전면허 있어?”
“없는데요.”
“난 면허 따서 차 굴리거든. 근데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면 무슨 원리로 바퀴가 굴러가서 자동차가 움직이는지 하나도 몰라. 그래도 운전하는 데 어려움은 없걸랑. 키를 돌리고 액셀을 밟고 휠을 돌리면 자동차가 움직인다는 사실만 알지.
지금 우리가 요정 알을 관리하는 방식이 이래. 엔진이나 내연기관 원리 뭐시기는 하나도 몰라도 운전은 잘만 하는 것처럼, 요정이 무슨 초능력을 부리는지 몰라도 소음을 제대로 해석할 수만 있으면 관리하는 데 문제는 없다는 얘기지.”
현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잡담은 기계가 도입되면 직원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로 이어졌고, 결국 회사가 이전하면 자신도 그만둘 테니 어차피 별다를 바 없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왜냐하면 선배는 이미 결혼해서 여기서 살고 있고 남편 직장도 양가 부모도 근처에 있으니, 조건이 좋다 해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혼자 회사를 따라 이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아도 졸업하면 서울 쪽에 취직할 생각인 거 아냐?”
“네, 가능하면 수도권의 괜찮은 기업으로 가고 싶죠.”
“빨리 취직하고 돈 벌고 성공해라. 넌 결혼하지 말고 요정 하나 보란 듯이 길러.”
“어우, 제 처지에 요정은…… 말도 안 돼요.”
“왜? 지금이야 요정이 귀하니까 비싸지만 한 10년쯤 지나봐라. 요정 대량생산도 가능해지면 가격도 많이 내려가서 너나 나나 한 마리쯤 기르게 되겠지. 그때는 이 회사도 엄청 커지려나?”
“그래도…… 전 그냥 고양이나 기를래요.”
“그러든지. 고양이든 개든 남자보다는 나을 거다. 걔들은 예쁘기라도 하지. 하하.”
연애와 결혼 경험이 없는 현아는 차마 맞장구칠 엄두가 안 나서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마셨다.
선배가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은 이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예언이 되지만, 당시에는 현아도 선배 자신도 그리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넘어갔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매일 알을 들여다보았고 일주일에 한둘은 부화하여 태어나는 요정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나마 목격했지만 현아 자신이 요정을 길러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처음에는 양계장이나 동물병원을 연상했으나 막상 일을 시작하고 나니 스스로가 동물원에서 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동물원 직원들은 그 귀하고 비싼 동물들을 매일같이 상대하며 관리는 하지만 내 애완동물로 기를 일은 절대 없지 않은가. 요정을 바라보는 현아의 시각 역시 그랬다.
요정 알은 타원형이긴 해도 새의 알에 비하면 좀 더 구체에 가까웠다. 껍데기가 매우 얇아 빛을 비추면 내부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태아와 흡사한 웅크린 형태, 완충재처럼 내부를 촘촘하게 뒤덮은 점액질이 보였다. 그렇지만 과도한 빛을 오래 쐬면 안 되었다. 요정 알은 매우 민감하여 주위환경이 급변하면 부화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알은 대략 150에서 180일 정도 지나면 부화한다. 부화 시기를 파악하고 있어야 입양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제때 보내줄 수 있다. 요정 알은 일반가정에서 관리하기 힘들어서 부화에 실패하면 알껍데기가 부서지고 안에는 부패하여 끈적해진 점액질 덩어리만 남는다. 보통사람이 보면 충격을 받을 정도로 불쾌한 모습이 되기에 요정란 관리회사는 이를 철저히 감추고 부화에 성공한 후에야 요정의 모습을 공개하고 분양한다. 고객에게 요정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을 줘선 안 되니까.
애완동물도 입양한다는 표현이 정착된 지금,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닮은 요정에게 ‘입양’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당연했다. 요정은 출생 시 10센티미터, 2년 정도 성장하여 평균 60센티미터까지 자란다. 외모는 인간과 닮았지만 요정이라는 명칭에서 연상되는 더듬이나 날개는 없다. 인간에 비해 머리가 커서 부화 시에는 3등신 정도에 팔다리는 짧고 통통하지만 자라나면 6등신 정도 비율이 되면서 팔과 다리도 길고 가늘어진다. 불과 2년 정도에 이와 같은 성장기를 마치고 이후 죽을 때까지 노화 등 외형의 변화는 일절 일어나지 않는다.
얼굴을 보면 코와 입이 작은 대신 눈과 귀가 크다. 특히 눈은 인간으로 치면 안경을 썼을 때 해당하는 면적 정도의 크기를 차지한다. 따라서 머리에서 안구가 차지하는 부피가 크고 상대적으로 두뇌의 용량이 적어서 처음에는 요정의 지능이 매우 낮다고 추측했으나 현재는 개나 고양이를 능가하는 지능을 가졌다고 본다.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과 다른 요정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신체에 털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자연히 붙이는 머리카락과 눈썹이 인기 액세서리다. 덕분에 요정을 판매할 때는 눈동자와 피부색만이 고려대상이고 애초에 없으니 머리카락은 입양하는 사람이 원하는 색깔로 고를 수 있어 오히려 좋다는 의견도 있다.
또 한편으로 겉모습과 달리 혀와 성대의 모양이 인간과 달라 아무리 가르쳐도 인간의 언어는 말할 수 없다. 요정은 작은 목구멍으로 시옷과 쌍시옷에 가까운 소리를 주로 냈다. 그렇지만 꽤 똑똑하기에 인간의 언어를 기억했다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인간이 손을 내밀며 “손!”이라고 말하면 자신의 손을 얹는 요정의 모습은 영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을 닮았으나 작고 눈이 큰 요정의 모습은 바로 살아 움직이는 인형 자체였다. 실제로 요정은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인형의 옷과 액세서리 대부분을 착용할 수 있다. 그렇게 꾸며놓은 요정은 만화 속 캐릭터처럼 예뻤다. 덕분에 광고모델로 인기를 얻고 있음은 물론이다. 요정을 사람처럼 꾸미고 간단한 연기를 시킨 뒤 잘 이어붙여 편집하고 성우의 더빙을 거쳐 만든 광고, 영화, 드라마 등의 영상물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요정에게 성별 구분은 없지만 성기가 없고 눈이 커서 보통 여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수명은 일반적으로 평균 10년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미지의 영역이다. 요정이 보급된 지 채 5년도 되지 않아 아직 충분한 통계치도 모이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다만 언제 죽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생애에 걸쳐 단 한 번 입으로 알 한 개를 낳은 직후 숨을 거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성생식도 요정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원인의 하나다.
알을 체내에 품으면 상체가 부풀고 신진대사가 느려지는데 이때는 거의 아무런 활동을 못 한 채 누워서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과 물을 섭취한다. 평균 3개월 정도 지나 산란이 임박하면 입에 작은 거품이 차오르고 입보다 몇 배나 커다란 알을 낳는다. 모든 요정이 산란 직후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고 현재까지 생존한 사례는 없다. 산란할 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사망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인은 요정 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요정 관리회사에서는 입양할 때부터 산란 즉시 업체에 알려달라고 안내한다. 요정이 알을 품었다는 얘기는 곧 작별할 마음의 준비를 할 때가 왔다는 얘기가 된다.
요정맘 카페에는 이런 이별준비 게시판이 따로 있어 슬픔을 토로하는 요정맘의 애절한 사연이 간혹 올라온다. 아직 요정의 정확한 수명을 모르는 상태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요정에게 닥친 상황을 때 이른 죽음으로 간주하고 슬퍼했다. 많은 주인은 자기 요정이 언제 알을 품을지 몰라 불안한 마음을 지닌 채로 지내야 했다.


한 달 정도 일하자 현아는 조금씩 알을 관리하는 방법과 요령을 알게 되었다. 간혹 인터넷에 떠도는 부정확한 소문과 다른 진짜 정보를 얻었다. 인터넷 방송을 보면 애지중지 기른 요정이 알을 낳고 숨졌는데 그 소중한 알을 회사에 넘겨주다니 말이 되느냐며 자신이 직접 기르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꽤 있다. 아쉽게도 아직 성공한 경우는 없었다. 개중에는 자극적인 화면으로 조회수를 벌어보려고 부화에 실패한 요정 알을 보여주는 영상도 있었다.
물론 업체에서도 부화에 실패하는 경우는 있었다. 요정 한 마리가 겨우 알 하나를 남기니 알 역시 귀하고 비쌌다. 다만 이곳은 대한민국의 태초마을이라 불리는 곳인 만큼 미부화 상태의 요정 알을 다수 발굴했기에 일부 실패가 있어도 업체는 꾸준히 요정을 분양하며 운영할 수 있었다.
궁금해진 현아는 근무교대를 할 때 선배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부화에 실패한 알이 가끔 나오잖아요. 그건 어떻게 해요?”
“어쩌긴, 버리지.”
선배는 아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놀라서 뭐라 응수도 하지 못하는 현아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면서 덧붙였다.
“왜, 부자들이 정력제로 먹기라도 할까 봐? 죽은 요정은 어디에도 못 써먹으니까 걱정 마. 예전에 애완동물 사체는 폐기물로 분류되는 거 알아? 그냥 쓰레기란 말이야.
썩은 요정 알은 아직도 그래. 이제 막 생겨나서 법도 규제도 없는 상태거든. 덕분에 우리 업체가 잘 나가고 있는 거겠지만…….”
그러니까 그냥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다른 쓰레기와 섞인 채 버린다는 얘기다. 현아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토록 인간과 닮았고 그래서 더욱 사랑받는 요정이지만 죽으면 동물만도 못한 처지라니. 그래도 주인은 정성스레 장례라도 치러주지, 여기 회사에서 부화도 못 한 채 죽은 요정은 곪은 달걀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아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 선배가 적은 일지를 보면 알 하나가 부화에 실패할 것 같으니 잘 지켜보라는 전달사항이 있었다. 그 알을 보니 알껍데기가 유난히 얇아서 찢어질 것 같은 상태였다. 빠르면 현아가 지켜보는 오늘 당장이라도.
껍데기가 찢어지고 태어나지도 못 한 채 죽으면, 그저 일지에 ‘알 1개 부화실패로 폐기’라고 짧게 한 줄 적고 끝날 것이다. 회사는 알 하나의 관리비용을 손실 처리할 테고. 하나의 생명이, 인간과 정말 닮은 생명이 그렇게 간단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온종일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아는 평소처럼 헤드폰을 쓰고 근무를 시작했으나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수시로 그 위태로운 알의 신호를 들으며 상태를 확인했다. 보통은 일정 시간에 따라 모든 알의 신호를 순서대로 수신하여 점검해야 했는데 현아는 한 달 정도 일하면서 어느 정도 기계도 다룰 줄 알게 되었기에 신호를 전환하여 하나만 집중적으로 확인했다.
처음에는 계기판과 알을 담은 인큐베이터가 복잡하고 무서운 미지의 기계처럼 보였다. 자신 같은 풋내기가 함부로 손가락이라도 건드렸다간 무언가 잘못되고 사방에서 사이렌이 울리면서 알들이 몽땅 와장창 부서질 것처럼 겁이 났다. 그렇지만 하루 이틀 일하면 일할수록 익숙해지면서 알도 기계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 요정 알에서 들리는 소음에서 현아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했다. 처음엔 고통 쪽이 강했으나 지금은 호소였다. 마치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호소. ‘나를 살려줘, 나를 돌봐줘. 나는 태어나고 싶어, 살고 싶어.’ 마음속에서 그렇게 해석되자 현아는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타이머를 걸어놓고 얼른 회사를 뛰어나왔다. 보통 화장실을 갈 때도 타이머를 설정해야 한다. 자리를 비워도 되는 휴식시간은 1시간에 10분. 그 이상 지체되어 제어장비에 아무런 조작이 없으면 경보가 울리고 보안업체가 출동하며 이사를 필두로 전 직원에게 비상문자가 날아간다.
휴식 10분 외에는 요정 알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관리사는 헤드폰으로 요정 알의 신호를 받고 그에 따라 온도나 습도를 조정하는 등의 입력을 해야 한다. 10분 이상 자리를 비울 급한 일이 생겼다면 회사 안의 다른 사람이 교대를 해줘야 하는데, 야간에는 회사에 현아 혼자 남게 되니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고작 아르바이트인 현아가 10분 이상 자리를 비워 비상벨이 울리면 그냥 ‘짤리는’ 정도로 일이 끝나지 않으리라. 만에 하나 알에 이상이 생긴다면 그로 인한 피해보상까지 덤터기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아는 서둘러 회사를 나와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 계란 6개들이와 우유 한 팩을 사 왔다.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관리실에 들어가 마우스를 잡고 클릭하니 7분 20초를 지나고 있었다. 평소 편의점 야간 직원과 친해진 사이라서 미리 써놓은 쪽지를 놔두고 계산을 안 했기에 시간 단축이 가능했다. ‘정말 급한 일이라서 그런데 퇴근할 때 와서 계산할게.’ 그렇게 쓴 메모장을 카운터에 던지듯 놔두고 달걀과 우유를 훔치듯이 갖고 돌아왔다.
현아는 가쁜 숨을 가라앉힌 다음에 가져온 재료로 썩은 요정 알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쓰레기봉투를 가져와 버린 컵라면 안에 날달걀 3개를 까넣고 우유를 탔다. 여기에 탕비실에서 가져온 커피 가루를 뜨거운 물에 녹이고 티백을 찢어 얻은 녹차 가루를 섞어서 색깔을 조절했다. 현아가 목격했던 실제 썩은 요정 알과 최대한 비슷한 모습을 재현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하나가 빠졌다. 냄새는 어쩌지? 현아는 고민하다가 탕비실 배수구 거름망을 꺼냈다. 아니나다를까 라면 찌꺼기 등이 뭉쳐서 악취를 내고 있었다. 조금만 넣으면 되었다. 전에도 주임이 깨진 요정 알을 처리할 때 냄새를 지우려 베이킹소다를 뿌렸다. 현아도 소다를 위에다 뿌릴 것이기 때문에 악취를 많이 낼 필요는 없다.
이렇게 위장을 끝낸 다음 현아는 인큐베이터를 열었다. 문제는 이토록 깨지기 쉬운 알을 어떻게 다루느냐였다.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업체에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큰 요정 알을 개인이 잘 관리할 수 있을까? 당장에라도 그만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현아가 편을 가르고 논쟁하며 다퉜다. 결국 현아는 이래도 죽고 저대로 죽는 알이라면 장례라도 내가 제대로 치러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건으로 알을 조심스레 감쌌다.
평소 들고 다니는 현아의 가방은 대학교에 다니며 쓰던 것이라 크기가 넉넉했다. 알 몇 개쯤 충분히 감추고도 남을 공간은 있었다. 문제는 충격에 예민한 알을 어떻게 안전하게 옮기느냐인데……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고민하던 현아는 책상 위에 둔 달걀을 보고 무릎을 쳤다. 코앞에 해법이 있었는데 몰랐다니!
현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음과 동시에 이제라도 생각해낸 자신을 천재라고 칭찬하며 즉시 달걀 6개들이 종이상자의 내부를 요정 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조정했다. 달걀을 고정하는 돌기를 커터칼로 자르고 요정 알을 넣은 다음 흔들리지 않도록 상자를 테이프로 단단히 감았다. 그런 다음 가방에 넣고 다시 길게 자른 테이프를 끈처럼 감아서 가방 바닥에 묶어서 고정했다.
사실 이 모든 현아의 고생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회사에는 있었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관리실 안을 늘 비추고 있다는 사실은 현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달 동안 지켜본 결과 사내 누구도 녹화된 지난 영상을 돌려보지 않았다. 도난사건이나 알 전체에 이상이 발생하여 원인을 따져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굳이 돌려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 밤도 별다른 특이사항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아가 일지에 적은 내용, 즉 단 한 개의 알이 껍데기가 깨지면서 부화에 실패하여 폐기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음날 아침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선배 직원과 근무교대를 하고 무사히 퇴근했다. 평소보다 가방을 더 조심스레 들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아에게서 유달리 수상한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가방을 소중히 다루는 모습을 보며 의심을 품을 만큼 눈썰미가 남다르거나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사람은 사내에 없어 보였다.
현아는 퇴근하고 즉시 편의점으로 갔다. 이미 교대를 했는지 다른 직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현아는 사정을 설명하고 달걀과 우유 값을 냈다. 다행히 그 직원도 인수인계를 받았기에 별말 없이 돈을 받았다.
아직도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현아는 집으로 돌아왔다. 알을 빼돌리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알의 부화를 위해서는 고생길의 시작에 불과했다. 온도와 습도도 맞춰야 하고 절대안정이 필요했다. 빛을 과도하게 쬐도 안 된다. 특히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요인은 바로 무음이었다. 요정 알은 소리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므로 소음을 완전히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 인터넷 정보는 이 부분을 간과했고 따라서 요정 알을 기르는 인터넷 방송이 전부 실패했던 원인 역시 여기에 있다. 영상 속 요정 알은 방송 진행자가 곁에서 떠드는 시끄러운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 부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태교에 좋다며 온갖 음악을 들려주는 사례도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현아의 고민도 이 부분이었다. 자신의 집은 소박한 연립주택. 현아만의 방이 별도로 있고 주위에서 들리는 소음은 딱히 없다. 갑작스러운 공사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지만 집 안에서 자연스레 생기는 가족 간의 대화, TV 소리, 수돗물을 트는 소리, 변기를 내리는 소리 등의 생활소음은 방문을 닫는 것만으로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
다행히 집에 오니 평소처럼 부모는 출근하고 아무도 없어서 조용했다. 현아의 어머니는 집에 있는 동안 보든 안 보든 늘 습관처럼 TV를 켜놓곤 했다.
고민하던 현아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고 재활용센터와 인근 시장을 돌면서 필요한 물품을 구했다. 일단 목재상자가 좋지만 구할 수 없어서 골판지 상자를 마련한 다음 내부에 흡음재와 차음재가 붙은 보드를 붙이고 그 위에 퍼즐매트를 붙여서 작은 방음실을 만들었다. 온습도계를 사서 수시로 온도와 습도를 확인했는데 요정 알이 부화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되려면 온도는 지금보다 조금 더 높으면서 습도는 낮아야 했다. 온도는 겨울철에 쓰는 전기방석을 쓰면 되지만 습도 조절이 까다로운 문제였다.
가난한 현아 방에는 에어컨이 없고 거실에만 있었기에 큰맘 먹고 제습기를 마련했다. 첫 월급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통장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2학기를 위해 아껴둔 돈이었다.
당장 목숨 하나 살려야 할 판인데, 이 정도쯤이야.
아깝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현아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대며 자신을 달랬다.
대책은 마련했어도 현아는 집 안에서 최대한 조용히 생활했다. 특히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썼다. 평소엔 음악도 크게 틀고 친구랑 대화도 했으나 이젠 이어폰을 꼈고 연락은 문자 메시지로 대신했다. 통화할 일이 있으면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공부에 집중하는 환경이 마련되어서 잘 되었다고 여겼지만, 동시에 부작용도 따라왔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만이 아니라 집에서까지도 수시로 요정 알을 신경 쓰고 관리하는 처지가 되자 마치 24시간 늘 일을 하는 것 같은 부담과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 것이다.
가족에게도 숨기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요정 알을 훔쳐온 사실을 털어놓은 친구 유리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기분을 달랬다.

현아 < 자나깨나 요정 알만 본다. 내 팔자crying
유리 < 그래서 알은 잘 자라니?
현아 < 아직 순탄해.
유리 < 그럼 회사에 그냥 놔뒀어도 괜찮았을 거 아냐?
현아 < 나도 그런 생각 매일 해. 왜 사서 이 고생인지. 근데 이제와서 털어놓으면 나 짤릴지도 몰라. 아니 회사 물건 훔쳤다고 고소당할지도.
유리 < 하긴... 에구 우리 현아, 학교에 폭삭 삭아서 나타나는 거 아냐?
현아 < 걱정 마셔. 알 건강만 아니라 내 건강도 잘 챙기고 있으니까.
유리 < 그래, 우리 예쁜 현아. 2학기 때 보자. 보고 싶네.

현아는 대답으로 셀카를 찍어 유리에게 보내주었다. 어깨너머로 방구석에 모셔놓은 골판지 상자가 얼핏 보였다. 주위에 책을 쌓아서 자신이 없을 때 누가 방에 들어오더라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나름 감춰두었지만.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회사에서 예상했던 때와 거의 다르지 않은 시기에 알은 무사히 부화했다. 퇴근하여 방에 돌아와 확인하니 상자 내부 온도가 크게 높아졌다. 열어보니 물이 끓으며 부글대는 것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알껍데기가 부서졌고 점액질에 쌓인 태아와 흡사한 작은 요정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어머, 어머! 태어났어, 우리 애기!”
현아는 자신이 낳은 아기를 보기라도 한 듯이 감격에 겨워 소리쳤다. 이제는 굳이 소음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져서 기쁘기도 했다. 요정은 감각이 예민하여 강하고 거친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긴 하지만 청력이 인간보다 약하기에 일상적인 소음과 대화 정도는 괜찮았다.
“어쩜 좋아, 너무 예뻐! 아직 애기인데도…….”
일을 하면서 갓 태어난 요정을 몇 번이나 봤지만, 자신이 직접 길러서 그런가? 이 아이는 다른 어떤 요정보다 더 예뻐 보였다. 머리가 크고 털이 없는 요정 아기는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고무 인형 같았다. 저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현아는 새삼 생명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꼈다.


“어디, 직접 눈으로 보자. 얼마나 대단한지.”
“보고 놀라지나 마. 사진과는 비교가 안 돼.”
현아는 자랑을 하며 숄더백을 조심스레 텅 빈 원룸 한가운데에 놓았다. 2학기가 시작되며 현아는 유리와 의기투합하여 같이 지낼 방을 구했다. 대학가 인근은 방을 잡기도 힘들고 방세도 비싼 데다가 여자 혼자 지낸다는 불안요소까지 있어 마음 맞는 친구와 룸메이트가 된다는 사실은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고 안심되는 일이었다.
개학하고 처음 만난 날부터 유리는 요정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마침내 현아는 숄더백을 조심스레 열었다. 여러모로 모셔왔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섬세하고 정성껏 요정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어우, 깜짝이야!”
유리는 감탄인지 아닌지 모를 반응을 보였다. 현아의 요정은 사정상 제대로 된 옷을 사 입히지 못해 손수건과 천 자투리로 급조한 직물을 두르고 있었다. 로브라 해야 할지 튜닉이라 해야 할지 모를 옷을 대충 둘렀고 헐렁한 후드로 맨머리를 감췄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없이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는 모습은 얼핏 그레이 외계인(잘 알려진 외계인 이미지로 머리와 눈이 크고 몸이 작으며 피부가 회색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같기도 했다. 유리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초록색 눈동자는 에메랄드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한참 감탄하며 지켜보던 유리는 이내 평소의 침착한 면모를 되찾고 핀잔주듯 꼬집었다.
“너네 요정은 무슨 수도승이니? 옷이 날개라는데, 미모를 영 못 살리네.”
“야, 옷 살 사정이 없었어. 돈 쓸데가 한둘이어야지.”
유리는 거의 엎드린 자세로 요정과 눈을 마주치려 애쓰며 물었다.
“얘 이름이 뭐랬지?”
“리라젤. 소설에서 따서 붙였어.”
“안녕, 리라젤. 나는 유리라고 해.”
유리가 손가락 두 개만 들고 살짝 흔들면서 웃었다. 요정은 눈을 끔뻑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유리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현아가 얼른 달랬다.
“요정이 원래 낯을 가린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두려워한다나 봐. 너도 생각해봐. 얜 아직 태어난 지 1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덩치가 커다란 인간을 보면 겁이 나지 않겠어?”
“겁 난 얼굴로는 안 보이는데. 아주 도도한 공주님 같아.”
“맞아, 얘가 공주고 난 시녀지.”
자조적인 말인데 말투에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요정은 뭐 먹고 살아?”
“이유식에 과일을 갈아서 주고 있어. 요정 기르는데 돈 많이 든다잖아? 사실 그거 알고 보면 거의 다 업체에서 속이는 거야.”
“진짜 그래?”
“내가 요정 관리회사 알바했잖아. 보니까 요정 분양할 때는 자기네 회사가 만든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서 비싸게 팔잖아? 그거 다 파는 이유식이나 죽으로 만든 거야.”
“세상에, 그렇게 남겨 먹나 보네.”
“나도 그거 처음엔 몰라서 얘를 어떻게 기를까 앞이 막막했지. 에휴.”
현아는 한숨을 쉬더니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주임님한테 물어도 보고 요정맘 카페에 가입해서 정보란 정보는 다 찾았지.”
“너네 주임이 뭐라고 안 해? 안 들켰어?”
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실은 주임에게서 의문을 담은 문자가 오긴 했다. 일할 때 친해진 덕분에 사적으로도 메시지를 자주 주고받았는데 그 와중에 현아가 요정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많이 물어본 탓이었다.

최주임 < 요정이라도 기르니? 뭘 그렇게 세세하게 물어봐.
현아 < 아뇨;; 실은 제가 요정에 관한 책이라도 써볼까 하고요. 회사에서 일하면서 요정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졌는데 책에도 인터넷에도 정보가 별로 없더라고요...
최주임 < 대학생이라 그런지 생각이 남다르네. 그래 열심히 해봐라. 혹시 아니? 전공 상관없이 네가 요정 전문가로 명성을 떨칠지?

이런 주임의 상냥한 오해 덕분에 현아는 요정을 직접 관리하는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힘든 정보를 얻었다. 덤으로 인터넷에서 요정 관련 가장 유명한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여기는 회원수만 보면 10만 명이 넘는 거대 커뮤니티지만 대다수는 글을 읽고 댓글만 다는 준회원일 뿐 요정을 직접 기르는 정회원은 100명도 되지 않았다.
요정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증하는 심사과정을 거쳐 현아는 정회원이 되었고 정회원들끼리만 소통할 수 있는 게시판을 통해 요정을 건강하게 잘 기르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특히 요정이 좋아하면서 저렴한 음식, 요정이 아플 때 보이는 징후와 치료 방법 등 정말 요긴한 정보는 대부분 ‘집사’들의 경험으로 얻어낼 수 있기에 무엇보다 가치가 있었다.
“그래도 돈 엄청 깨져.”
현아는 맨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유리의 예리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기집애, 말로는 그러면서 얼굴엔 좋아 죽겠다고 쓰여 있는데.”
“티 나니? 흐흐.”
현아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며 배시시 웃었다. 유리는 버릇처럼 현아의 등을 토닥였다.
“꼭 연애하는 애 같다?”
“맞아, 난 사랑에 빠졌어.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어떻게 사랑에 안 빠질 수 있겠어? 리라젤을 보면 세상의 인간은 모두 더럽고 못생기고 무가치한 것 같지 뭐야.”
“지랄한다. 너는 인간 아니냐?”
“당연히 나를 포함해서지. 우리 인간은 요정마마를 먹여 살릴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거야.”
유리는 등을 소리 나게 탁 치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은 짧은 순간 리라젤과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심장이 쩌릿해지는 기분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은 유리의 일생에서 지금껏 두 번 느꼈던 것 같았다. 첫사랑이던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버렸을 때, 고등학교 때 정말 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느끼고 용기를 내어 고백했지만 거절당했을 때.
가슴이 아리고 안타깝던 그 느낌을 요정을 본 순간 느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유리는 한동안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사랑일까? 그러기엔 너무 짧고 이질적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다음에야 유리는 자신이 느낀 강렬한 감정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다른 종족인 요정에게서 인간 이상의 사랑스러움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이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본능적인 거부감각이 발동하면서 부딪쳤다고. 그렇게 사랑을 잃었을 때 느낀 것과 흡사한 아픔을 요정을 실제로 본 순간 느꼈다고.
이렇게 두 명과 한 마리의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 현아를 비롯한 요정 주인들은 절대 요정을 ‘마리’라는 단위로 부르지 않았으나 현재 법률상 요정은 개와 다를 바 없는 애완동물이었다.
공교롭게도 사정상 현아는 2학기에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 유리가 리라젤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현아는 자신이 알아낸 모든 정보를 유리에게 전수했다. 미각이 섬세하여 조금만 짜거나 달거나 시거나 맵거나 써도 토해내니 인간에게는 연하고 심심하게 느껴지도록 간을 해야 한다든가. 더구나 치아가 작고 약해서 단단하면 씹을 수 없으니 이유식이나 떠먹는 요구르트에 사과, 귤, 딸기 등을 갈아서 적절히 섞어서 먹여야 했다. 물 또한 정수한 깨끗한 물만 먹기에 수돗물에서 소독약 냄새가 조금만 나도 얼굴을 찌푸리며 마시기를 거부했다.
요정은 덩치가 작은 만큼 몸이 연약하여 자잘한 병에 잘 걸려 수시로 구토를 했고 피부에 옅은 얼룩이 생기는 트러블도 잦았다. 비용만이 아니라 이렇듯 손이 많이 가고 섬세함이 요구된다는 점을 봐도 요정이 부자와 셀럽 계층의 애완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요정 보모를 따로 고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정도로.
하필 리라젤은 그런 요정 중에서도 특히 허약한 편이었다. 태어나지 못하고 폐기될 위기를 겪었던 알 시절부터 유래했을지도 모르는 신체의 유약함은 현아와 유리에게 늘 몸과 마음 양쪽 모두 고생을 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둘은 리라젤 때문에 자주 싸웠다. 그러면서도 소음에 민감한 리라젤을 이불로 덮어놓고 말소리를 죽여 가며 말다툼을 할 정도로 두 사람은 요정을 기르는 습관이 몸이 배어 있었다.
“리라젤을 나만 기르는 것 같아, 나만! 얘가 내 요정이야?”
참다못한 유리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이날도 리라젤이 아파서 괴로워하자 현아는 네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니냐며 은근히 유리 탓으로 돌렸고 이에 참았던 화가 폭발한 것이다.
현아는 말문이 막혔다. 유리의 이어지는 공격은 너무 아픈 치명타였다.
“어제 죽 누가 끓여 먹었게? 내가 했어. 피부약은 누가 사 왔지? 그것도 나야. 아무 약이나 바르면 큰일 난다고 해서 내가 요정 카페 뒤져서 알아냈다고.”
“난 알바를…… 이제 곧 중간고사도 있고……”
진땀을 흘리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으나 치졸한 변명에 불과했다. 유리는 그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래, 알바. 좋지. 다다음주는 시험이니까 시험공부도 해야 되고. 다 좋아, 좋다고! 근데 너만 공부하니? 나도 해야지. 나도 리포트 쓰고 조별과제하고 시험 치고 다 해야 돼. 알바만 안 한다고 내가 독박육아 뒤집어써도 되는 거야? 이러려고 내가 너랑 같이 지내는 줄 알아?”
“아니, 나는…… 그…… 미안해.”
우물거리다 겨우 미안하다는 말만 툭 던지고 현아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유리도 리라젤도 차마 마주 볼 용기와 염치가 없었다.
“됐어, 대신 이렇게 하자고. 내가 억지로 리라젤 돌본 거는 아냐. 솔직히 처음 본 순간부터 완전히 빠져들었으니까. 네가 헬렐레했던 모습, 지금 다 이해하고 있어. 너나 나나 방에 들어오면 철벽같이 손 씻고 이 닦고 하잖아. 왜? 리라젤에게 병균 옮길까 봐 그러지. 우리 둘 다 리라젤을 사랑하고 아끼고 있어. 그것만은 분명해.
그러니까, 앞으로 확실히 하자. 리라젤 주인은 너 혼자가 아니야. 우리 둘이 같이 책임지고 돌보는 거야. 아이도 부모가 둘인데 요정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나? 네가 큰 언니 해, 내가 작은 언니 할 테니까. 알았지?”
“어, 응. 알았어.”
지금 현아 심정으로는 유리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까짓 공동주인, 해달라면 해주지. 그런 생각이었다. 리라젤에게 족보나 호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마음이 풀린 유리는 이불을 걷고 리라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든 지금이야말로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처음과 달리 많이 꾸며놓은 상태였다. 현아의 취향대로 짙은 갈색 장발을 씌우고 긴 속눈썹을 붙여서 한층 소녀에 가까운 외양이었다. 옷도 레이스가 달린 노란색 인형용 잠옷을 입혔다.
“키가 꽤 자랐어. 엄청 빨리 자라네.”
유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현아는 유리의 마음이 풀린 것으로 보이자 얼른 끼어들었다.
“그치? 한 10센티미터는 자란 것 같아. 요 두세 달 사이에.”
현아는 볼펜을 들어 리라젤 옆에 댔다.
“이게 한 15센티 되거든. 봐, 네가 처음 봤을 땐 이 볼펜보다 짧았지? 지금은 더 커졌잖아.”
“평균 키가 60센티라고 했지? 1년 안에 넘겠는데.”
둘은 잠시 아기의 성장을 뿌듯해하는 부모 같은 마음과 눈빛으로 리라젤을 보았다. 문득 궁금해진 유리가 물었다.
“근데 얘는 사람 말은 못해? 이렇게 사람이랑 닮았으면서.”
“겉은 닮았지만 속은 많이 다르대. 혀랑 성대 구조가 달라서 사람의 말은 가르쳐도 못한다나 봐.”
“하긴 나도 그동안 쌕쌕대는 소리밖에 못들었다. 꼭 병아리처럼…….”
“귀여우니까 됐지, 뭐.”
“맞아, 너무 똑똑해도 문제야. ‘언니들은 왜 나를 이렇게밖에 못 길렀나요?’ 이러고 나오면…….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네. 엄마한테 전화해야겠다.”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나. 유리는 평소 별로 하지도 않던 부모에게 전화효도를 했다. 현아도 마음이 켕겼는지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건강한지 공부는 잘하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물었고 현아는 평소와 달리 울컥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그럼 잘 지내지’라는 짧은 답변을 보냈다.
아마도 리라젤이 더 자라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요정의 나라로 돌아간다면, 거기서 문자로 안부를 보낸다면 자신도 같은 말을 묻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넘치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다. 전화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통화 중에 갑자기 울먹였다가는 괜히 어머니의 걱정만 불러일으켰을 테니까.
그날 이후로 현아는 리라젤 육아에 더 신경과 시간을 쓰게 되었다. 리포트도 아르바이트도 있고 중간고사도 있었으나 유리만 믿고 떠넘겨선 안 된다는 자각이 있기에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현아와 유리는 같은 과이기도 하고 함께 듣는 교양과목도 있어서 리라젤이 아픈 날에는 한 사람이 원룸에 남아 보살피고 다른 사람이 대리출석을 했다. 그때는 둘의 폰을 다 들고 가서 블루투스 방식이든 번호입력 방식이든 전부 대응했다. 심지어 이름을 부를 때도 목소리를 흉내 내며 대응했다.
두 사람은 다른 장소를 포기하고 원룸에서 함께 공부하며 리라젤을 돌보았다. 오히려 서로 협력하며 공부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 전체적으로 성적이 우수한 현아의 도움을 받은 덕에 유리의 학점이 높아지는 부수효과가 생겼다. 그 덕분인지 중간고사 이후로 유리의 불만은 거의 사라졌다. 유리 본인은 공동주인이 되어서 책임감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이쪽 이유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기말고사까지 무사히 넘기고 2학기를 마치자 유리는 방학 동안 리라젤을 자신이 맡겠다고 주장했다. 그건 말도 안 된다고 거부하려 했지만 현아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린 공동주인이잖아, 그렇지? 그리고 넌 너네 집 형편 때문에 리라젤에 대해 입도 뻥긋 안 했고.”
유리의 말은 틀린 점 하나 없었다. 현아는 국으로 듣고만 있었다.
“이런 말 하게 돼서 미안하지만 우리 집은 여유가 있어. 난 방학 때 엄마 아는 집 애들 과외나 조금씩 하면서 받는 돈은 다 내 용돈으로 쓰고 있어. 솔직히 생활비, 학비 걱정해본 적 한 번도 없거든. 너처럼 다른 알바도 해본 적 없고.
그러니 방학 동안 우리 집에서 기르는 편이 리라젤을 위해서도 너희 집을 위해서도 낫지 않을까?”
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리라젤과 떨어져 지내라니 그런 형벌이 또 있을까 싶지만, 유리의 말은 옳다. 그래서 분하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스스로가 미웠다.
“……그, 그렇게 하자.”
정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대신 사진이랑 영상 매일 보내줘야 해.”
“매일은 좀 귀찮은데…… 그치만 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니까, 그럴게.”
“너희 집 놀러 가도 될까?”
“당연하지.”
유리는 통 크게 허락했다. 겨울방학에도 현아는 요정 알 관리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매일 유리가 보내주는 리라젤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삶의 낙이자 위안으로 삼았다.
겨울 동안 리라젤은 한층 빠르게 자라났다. 덕분에 유리는 그동안 마음에 품었던 생각 하나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이제 리라젤은 깨어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주위 사물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눈빛과 소리를 냈다. 유리가 내민 손가락을 자신의 조그만 손가락으로 감싸 쥐기도 했다.
현아처럼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기뻐하기도 했으나 이내 유리는 리라젤에게 자아와 지성이 생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더는 그저 움직이는 인형으로 여길 수 없음을, 하나의 지성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이제 리라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구강구조 때문에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지만 손가락은 똑같이 열 개가 아닌가. 유리는 고민했지만 인형용 연필이나 크레용이 없기에 글자를 쓰게 만들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기껏 써도 그 작은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고.
그러던 어느 날 현아가 가르쳐준 아이디와 암호로 요정 카페에 들어가 보니 기르는 요정에게 타자를 가르쳤다는 글이 보였다.
‘그렇구나!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유리는 즉시 그 글의 주인처럼 안 쓰고 버려두었던 옛날 스마트폰을 꺼냈다. 꽤 자랐다고 하지만 리라젤에게는 휴대폰 화면이 사람으로 치면 침대나 탁자처럼 커다랗게 보이리라. 여기에 메모장 앱을 띄우고 글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유리는 유아용 글자책을 사서 글자를 보여주고 해당하는 자판을 누르게 했다. 리라젤은 그야말로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며 빠른 암기속도를 보였다. 한 번 가르쳐준 것은 금방 외우고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았다. 너무 똑똑해서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굶주린 듯이 글자와 단어를 외운 리라젤은 겨울방학 기간 안에 간단한 문장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진척을 보였다. 대신 암기능력에 비해 사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수준은 아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직접 보거나 겪지 않은 낱말의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 아이는 언어를 습득할 때 부모를 통해 먼저 말을 배우고 나서 글자를 배운다. 그렇지만 시각이나 청각에 장애가 있는 아이도 점자나 수화 등 다른 방식을 통해 결국 언어를 배울 수 있듯, 리라젤 역시 문자만으로 언어를 익혔다.
리라젤은 제대로 뜻도 모르지만 엄청나게 많이 외운 낱말을 마구잡이로 쓰면서 언어활동을 시작했고, 유리가 리라젤의 문장을 고치거나 바로잡는 등 잘못된 부분을 가르쳐주면서 차차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유리는 이 과정을 현아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진이나 영상은 있어도 글을 배우는 모습은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다. 방학 마칠 때쯤 혹은 마치고 난 후에 알려서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현아는 결국 아르바이트에 치여서 방학 동안 유리의 집을 방문하지 못했다. 유리는 이를 알고 3학년 때 함께 지낼 방을 잡자는 연락을 나눈 다음 사진을 하나 보냈다.
스마트폰 화면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보낸, 이중으로 수고를 한 엉뚱한 사진이었다. 하얀 화면 위쪽에는 크게 확대한 글자로 적힌 짧은 글이 있었고, 아래쪽에 뜬 가상 키보드 위에는 고사리처럼 작고 귀여운 손이 있었다. 아직 손바닥으로 화면을 눌러가며 써야 할 정도로 작은 리라젤의 손.

현아 언니 안너ㅓㅇ하세요.
나는 리라젤입니다.
당신의 좋음 항상 감사합니다.
나는 어닌가 보고싶다.

현아가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하자 유리가 덧붙였다.

유리 > 이거 라젤이가 직접 쓴 글이야.
현아 > 어떻게??surprise
유리 > 내가 글을 가르쳤거든. 말은 못해도 이제 글은 잘 써. 어때, 똑똑하지, 우리 딸?

이 글은 유리가 내용까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현아의 사진을 보여주며 현아를 기억하느냐고 물었고 리라젤은 그렇다고 글을 써서 대답했다. 유리는 현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만 했다. 오타도 있고 번역기로 돌린 듯한 어색함도 담긴 저 짧은 네 문장은 불러준 대로 받아쓴 것이 아니라 리라젤이 스스로 생각해서 썼다고 유리는 현아에게 강조하며 설명했다.
현아는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감동하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추측하느라 잠시 고민해야 했다. 첫 줄의 오타는 ‘안녕하세요’임이 분명한데 ‘당신의 좋음’이 무슨 의미일까?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당신의 좋은 점 혹은 좋은 행위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는 뜻일까? 마지막 줄은 ‘어딘가’일 리는 없고 ‘언니가’의 오타일 텐데, 존댓말로 쓰다가 갑자기 반말이 된 부분은 번역기를 돌린 것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글 같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그리움이 심해진 탓인지 현아는 겨울방학 끝날 때까지 하려던 예정보다 일찍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서둘러 짐을 싸 집을 떠났다. 부모에게는 대학가에 방을 잡기 어려우니 서둘러야 하며, 학과에서 신입생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핑계를 댔다. 사실 아무 직함도 없고 학과 행사에 거의 참여해본 적도 없는 현아가 할 일은 전혀 없었건만.
현아는 유리의 집에서 1주일 정도 신세를 진 다음 대학가에 있는 셰어하우스에 들어갔다. 부모에게 한 거짓말은 또 하나 있는데 기숙사에 떨어졌다고 말했지만 실은 리라젤 때문에 신청 자체를 안 했다. 기숙사에서는 리라젤과 함께 지내기 불편하고 들킬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현아의 대학 기숙사는 애완동물 금지인 데다가 친구라도 해도 함부로 드나들기 힘든 환경이어서 유리와 함께 지내며 리라젤을 돌보기 위해서는 기숙사를 포기해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단둘이 지내기 위해 방 두 개짜리 집을 개조한 셰어하우스에 들어갔다. 방은 각자 자신의 공간으로 쓰고 거실, 부엌, 화장실을 함께 쓰는 구조였다. 이전 원룸보다 방세는 비싸지만 훨씬 넓고 지내기 편해서 좋았다. 리라젤은 매일 번갈아가며 각자의 방에서 돌보기로 했다. 원룸에서처럼 늘 함께 있으면 결국 둘 다 공부도 육아도 제대로 안 되니 순서를 정해 한 명은 자기 혼자만의 삶과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3학년이 되었으니 학과 공부와 학점 관리에 힘을 쏟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방침이었다.


요정이 인간 아기나 애완동물보다 기르기 쉬운가, 라는 질문에는 간단하게 답을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훨씬 수월한 부분도 있었다. 요정은 아기 때부터 전혀 울지 않아 기르는 사람이 잠을 설치거나 생활에 방해를 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개나 고양이처럼 아무 데나 돌아다니다 집 밖으로 나가거나 길을 잃을 우려도 없었다. 요정은 아주 얌전히 대부분 시간을 눕거나 앉아서 보냈다. 졸리면 자고, 깨어 있을 때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 커다란 눈망울로 주위 사물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분명 요정이 보는 이 세상은 매우 커다랗게 느껴질 터였다. 지금 리라젤은 40센티미터 정도까지 자랐는데, 그에게 인간의 방 크기는 사람으로 치면 내부가 텅 빈 5층 건물 안에 있는 것과 흡사한 느낌을 받으리라. 살림도 단출하여 현아의 방은 행거 하나, 접는 침대 하나, 좌식책상과 좌식의자가 전부였다. 유리의 방은 좀 낫지만 침대, 옷장, 화장대, 책장, 책상, 사무용의자, 컴퓨터가 있을 뿐 화려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현아는 방에 갓 들어온 데다가 책장을 마련할 형편도 안 되어서 전공서적을 비롯한 온갖 책을 구석에 눕혀서 쌓아 놓았다. 리라젤은 그 형형색색의 책등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층층이 다양한 색과 무늬가 겹쳐진 신비로운 책의 탑을.
그 외 시간엔 스마트폰 화면의 가상 키보드로 글자를 쓰면서 놀았다. 곁에 아동용 글자 책을 펼쳐놓으면 따라서 쓰곤 했다. 책이 너무 커서 직접 책장을 넘길 수 없기에 아기새처럼 작은 목소리로 울며 보채면 현아나 유리가 듣고 넘겨주었다.
반면 아기나 동물보다 까다로운 점도 있었다. 물과 음식은 아주 조금만 섭취했지만 원하지 않는 재료나 성분이 들어 있으면 금방 토하고 피부에 두드러기나 반점이 생기곤 했다. 리라젤은 요정 중에서도 약한 체질이라 온도나 습도가 조금이라도 높거나 낮을 때, 청소기를 돌리는 등의 소음이 발생할 때면 금방 기운을 잃고 쓰러져 시름시름 앓았다.
울지 않는다는 점은 이럴 때 역으로 어려움을 가중했다. 요정은 아파도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기에 자주 살펴보며 신경 쓰지 않으면 못 알아차린 채로 장시간 방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아도 유리도 리라젤이 식사를 할 때는 끝까지 지켜보는 습관이 들었다. 무사히 다 먹고 편안하고 졸린 얼굴로 손수건과 머플러로 만든 부드러운 침대 위에 누우면 두 사람도 그제야 안심하고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리라젤이 거의 이삼일에 하루꼴로 아파하자 현아는 요정 카페를 드나들며 요정의 증상에 따른 원인 및 적절한 치료법을 찾거나 원하는 내용이 없으면 질문을 남기곤 했다. 점점 리라젤이 다른 요정들보다 더 허약하다는 의심이 짙어졌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부화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알에서 간신히 살려냈으니까. 더구나 업체의 전문적인 관리도 받지 못했고. 그래서 현아는 리라젤이 앓거나 괴로워할 때마다 스스로가 벌을 받는 듯한 가책과 슬픔을 느꼈다. 나 때문이라며, 부잣집에 입양되었으면 더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며 자신을 책망했다. 특히 원래부터 생리 직전에 우울감이 심한 편이었던 현아는 생리와 리라젤의 병이 겹치면 그야말로 한없이 깊은 우울증의 늪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 그걸 다 네 탓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리라젤을 살려냈으니 뿌듯하게 생각해. 대신 부모로서의 확실한 책임감을 갖고 잘 돌봐주면 되는 거야.
설마 괜히 태어나게 해서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네 엄마가 너 고생할까 봐 안 낳았으면 넌 지금 세상에 없었을 거 아냐? 쓸데없이 자책은 하지 마.”
유리가 이렇게 위로해줘야 할 정도였다.
“고마워. 네가 함께 지내줘서. 나 혼자였으면 정말…… 어우, 생각만 해도 끔직해.”
“또 쓰잘데기없는 생각하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어. 애 하나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야. 리라젤이 얼마나 똑똑한지 너도 알지? 조만간 일기장 앱을 깔아서 일기를 쓰게 시킬 생각이야.”
“일기?”
“평소에도 자기 생각을 두서없이 메모장에 쓰더라고. 최근 외운 단어를 꼭 넣어서 글짓기를 하는 모양이야. 그런 식으로 그 단어를 익혀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셈이지.”
“어떨 때는 두려운 느낌도 들어. 점점 똑똑해져서 대화를 나누게 되면 날 원망할까?”
“또, 또 걱정한다.”
말로는 핀잔을 주었지만 유리는 현아가 먹을 약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몽블랑과 카푸치노를 사 들고 돌아온 참이었다. 생리 공결로 학교를 쉬고 하루 종일 리라젤 곁에 누워 있던 현아는 커피와 케이크의 달콤한 향기에 조금이나마 기운이 돌아왔다. 마음속에서 우울이라는 먹구름이 걷히며 밤 크림으로 덮인 산봉우리가 얼핏 엿보이는 상태가 되었다고 할까.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몇 입 먹던 현아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을 멈추더니 리라젤의 식기로 쓰는 간장 종지에 크림 조금을 담아서 내밀었다.
“괜찮을까? 또 토하거나 설사하면 어쩌려고…….”
“생크림 요구르트는 잘 먹잖아.”
늘 그렇듯 리라젤은 바늘도 안 들어갈 듯한 작은 콧구멍으로 킁킁 냄새를 맡더니 커다란 눈동자를 위로 올려 현아의 얼굴을 보았다. 현아가 전용 숟가락으로 살짝 떠서 내밀었다.
리라젤을 위해 만든 이 숟가락은 바로 스테인리스제 귀후비개의 손잡이 부분을 잘라 만든 것. 리라젤은 넙죽 받아서 우물거리더니 삼켰다.
“거 봐! 좋아하잖아.”
“흥, 피는 못 속인다더니.”
마치 리라젤이 현아가 낳은 딸이라도 된다는 투였다. 유리도 조금씩 느끼고는 있었다. 자기가 아무리 정성 들여 길러도 현아와 리라젤 사이에는 마치 부모자식 같은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 때부터 길렀던 현아를 진짜 부모라고 느끼는 본능적인 감각이 요정에게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뭐 했냐?”
잡념을 떨치려 유리는 현아에게 말을 걸었다.
“글쎄, 기억이 안 나네. 계속 누워 있었어. 폰 좀 들여다보다 얘랑 놀아주다가 배고파서 컵라면 먹었고……”
“너 꼴이 완전히 육아 스트레스다. 괜찮아? 바람 쐬러 나갈래? 애는 내가 볼게.”
“딱히 나가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지 않아. 집에 있는 쪽이 편해.”
“다음 주 생일이잖아, 유원지라도 갈까?”
현아는 진저리를 내듯 온몸을 떨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진짜 됐다니까. 나가봤지 고생이지.”
“그럼 뭐 갖고 싶은 거 있음 말해.”
“음…… 아! 마침 있는데. 말해도 되나? 원래 생일선물은 주는 사람이 생각고 받는 사람이 막 요구하면 안 되는 건데.”
“야, 그런 게 어딨냐? 누가 그런 법칙 만들었어? 편하게 말해. 내 지갑 사정은 피차 아니까 허용 한도 내에서.”
아주 잠깐 망설이는가 싶던 현아는 히죽 웃으며 쇼핑몰 웹사이트를 찾아가 원하는 상품을 보여주었다. 다음 주 생일 전날 택배가 도착했다.
가정용 소형 플라네타리움. 쇼핑몰에서는 별자리 투영기, 별자리 무드등 같은 이름으로 팔고 있는 상품이다. 저가형은 싸지만 현아는 이왕 생일선물이니까 평소 사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오래 넣어놨던 외국산 고가 모델을 부탁했다. 유리는 군말 없이 샀다. 둘이 같이 살고 있으니 자신도 함께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조립이 어렵다고 칭얼대는 현아를 위해 유리는 열심히 조립까지 해서 완성했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자 현아의 방 가운데 접이식 탁자 위에 놓고 방의 불을 끈 다음 플라네타리움을 켰다.
“와아!”
현아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왔다.
“마음에 들어?”
“응.”
“그럼 됐지. 생일 축하한다. 내 생일 기대해도 되지?”
“으윽. 내 사정 알잖아, 좀 봐주라.”
현아가 합장을 하며 과장되게 엄살을 떨자 유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아는 양반다리를 하고 허벅지 위에 머플러로 감싼 리라젤을 앉혔다. 요정 역시 처음 보는 별이 가득한 광경에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유리는 새삼 그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했다.
“얘 표정 좀 봐. 엄청 감동하네. 밤하늘의 로망을 이해하나 봐?”
“그럼, 누구 앤데. 우주는 못 가더라도 우주 그림은 봐야지! 히힛.”
자기가 말해놓고 뭐가 그리 우스운지 혼자 웃던 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사실 요정을 좋아하긴 했어도 진짜 기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고등학교 때부터 요정은 못 길러도 고양이는 길러야지, 그렇게 주문 외우듯 계속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겠니.”
“누군들 알았겠어? 네가 판단하고 결정해서 실행한 결과야. 한 아이의 부모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일이었어. 전에도 말했지만 큰 부담은 가지지 마. 적당한 책임감만 가지면 그걸로 충분해.”
“고마워. 넌 항상 뭐라 그래야 하나, 논리적이라고 할까?”
“내가 뭘.”
“난 항상 일만 벌여놓고 리라젤 돌보는 일도 처음엔 너한테 다 떠맡기고 그랬지.”
“어유, 됐네요! 이제 와서 착한 척. 내가 아는 이현아는 이런 애가 아닌데? 그치만 나는 원래 그런 현아를 좋아하거든.”
“고마워.”
“됐다니까. 진짜 경치 좋긴 좋다. 근데 같이 보는 상대가 나라서 미안하다?”
유리는 반쯤 빈정대듯 말했다. 현아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내 친구여서 정말 다행이야. 새삼 느꼈어.”
“진짜 얘가 점점 이상하네. 안 하던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죽을 때가 되었냐?”
“흥. 라젤이를 두고 죽을 순 없어.”
“그래, 얼른 커서 효도하는 모습 볼 때까지 살아야지.”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은 짠 듯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요정의 짧은 수명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요정은 길어야 10년, 보통은 5년을 넘기기도 힘들다고 한다. 리라젤은 과연 얼마나 더 오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괜히 슬퍼진다. 그래서 둘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자.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해 괜히 생각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셋이 함께 사는 행복을 즐기면서, 가능한 한 오래 간직할 추억이 되기를 바라면서.
두 사람과 한 요정은 하얗게 흩뿌려진 별을 보면서 말이 없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들 외로운 세 영혼은 함께 우주를 떠돌았다.


5년이 지났다.
한 인간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 현아에게는 특히 크고 중대한 사건이 많이 있었다. 인생을 바꾸고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할 많은 일이 일어났다.
현아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회사를 옮기고 진급을 하기도 했다. 집이 이사를 했고 아버지가 입원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루 다 말하지 못할 숱한 크고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역시 현아 스스로 돌아보아도 손꼽을 가장 큰 사건 두 가지가 연달아 일어났다.
요정을 잃었고, 삶의 동반자를 얻었다.
가족이라 생각했던 리라젤과 갑작스레 헤어지며 얻은 충격과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현아는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였다. 새삼 새롭다고 할 사람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늘 곁에 있었기에 당연히 여겼고 소중함을 잊었던 그 사람.
계기는 리라젤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리라젤을 잃은 후 회사도 무단결근하고 연락 두절이 된 채로 집에 틀어박혀 울다가 지치면 잠들기를 반복하던 현아의 집에 그가 찾아왔다.
휴가가 끝나고도 회사에 나오지 않아 전화와 문자로 거듭 연락해도 응답이 없자, 결근 이틀째 회사는 입사 동기이자 평소 친한 직원에게 집에 찾아가 보라고 시켰다. 가서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자 고향 집에 전화를 걸어 현아가 거기 있는지 물어봤다. 부모 역시 현아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걱정이 된 어머니는 대학 졸업할 때까지 딸과 함께 자취하던 친구 유리에게 연락했다.
졸업 후에도 한동안 교류하며 서로의 집에 놀러 가는 사이였던 유리는 현아의 하숙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이유가 없는 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는 현아의 성격도 알았고. 현아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서둘러 현아의 집에 들어간 유리는 침대에 누운 채 거의 식음을 전폐하여 쇠약해진 현아의 모습을 목격했다.
유리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오히려 진작 찾아오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일단 현아의 회사에 연락하여 많이 아프지만 다음 주에는 출근할 수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유리는 죽과 커피를 사 온 다음 집을 대충 청소하며 현아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꼬르륵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현아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뺨에는 눈물이 마른 자국이 선명했고 눈에는 눈곱이 잔뜩 꼈다. 그래도 육체는 생존본능을 발휘하는지 죽 냄새를 맡고 열심히 배에서 먹으라는 신호를 소리로 바꾸어 보내고 있었다.
유리는 함께 자취하던 시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다.
“깼어? 죽이랑 너 좋아하는 카푸치노 사 왔으니 먹어.”
“…….”
현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없이 죽을 먹었다. 아무리 슬픔이 심해도, 친구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발동해도 공복 앞의 음식이라는 강력한 유혹을 이길 수는 없었다.
유리는 마주앉아서 현아가 죽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네 인생만 힘들어질 뿐이야. 네가 슬퍼하든 굶어 죽든 변하는 것은 없어. 리라젤은 돌아오지 않아.”
“…….”
유리는 손을 내밀어 현아의 어깨에 얹었다.
“돈 열심히 벌어서 새로 요정 하나 입양하면 되잖아, 안 그래?”
“……리라젤은 아니잖아.”
“넌 외동이지? 그래서 모를지도. 난 동생들 있잖아. 어릴 때는 부모님이 동생만 예뻐하는 줄 알고 속상한 적 많았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알겠더라. 자식은 각각 다 예쁜 법이야. 요정을 입양해서 길러보면 너도 그 마음 이해하겠지.”
현아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유리를 보았다. 유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이렇게 얘기하는 거 3년 만이지? 네가 이사도 안 가고 비번도 안 바꿔서 천만다행이다. 매사에 둔하고 게으른 애라니까.”
“넌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살짝 불평하는 듯했지만 애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나 아니면 누가 너 챙겨주겠니?”
유리의 말에 현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수그러들었다.
“……사귄다는 사람은?”
“헤어졌어, 옛날에.”
유리는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레즈끼리 살면 편하고 부부처럼 알콩달콩 잘 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역시 사람은 성격이 중요해.”
살짝 자조적인 말투로 남 얘기처럼 하면서 유리는 창문 너머 하늘을 보았다. 3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취직하며 자연스레 멀어졌던 유리가 오랜만에 현아를 찾아왔다. 넌 예전에 눈치챘겠지만, 이라고 말을 꺼내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커밍아웃했다. 그렇지만 유리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현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뒤이어 왠지 지금껏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 이를 숨기고 3년 정도 동거했다는 사실에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혐오감을 느낀 현아는 화를 내며 절교를 선언했다.
유리는 친구로 시작하여 천천히 커진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리라젤을 아이 삼아 다시 셋이서 같이 살자는 고백을 할 계획이었건만 뜻밖의 절교를 당하자 마음의 상처를 입어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종종 생각해. 정신없고 서툴러서 실수도 많이 했지만, 부딪치고 싸운 적도 참 많았지만 너랑 같이 리라젤을 키우면서 지냈던 그 대학 시절이 내 인생에서 제일 충실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유리는 계속 하늘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것은 일종의, 두 번째 고백이었다. 아직 잊지 않았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툭.
빈 플라스틱 죽그릇 안으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현아의 눈에서 흘러넘친 눈물이 뺨을 지나 턱에 고였다가 방울져 떨어졌다.
“나도 그래…….”
현아는 울먹이며 간신히 쥐어짜듯 대답했다. 이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유리는 당황했지만 이내 곁에 앉아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같이 예쁜 요정 아이를 키우자, 알았지?”
유리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눈이 초롱초롱하고 피부가 뽀얀 아이로 입양하자. 눈동자는 무슨 색이 좋아? 난 파란색이나 보라색이었으면 좋겠는데. 머리카락은 요새 예쁜 가발 많으니까 기분 따라 색깔도 길이도 바꿔보자. 이름은 뭐가 좋겠어?”
“……가 ……해.”
“응? 뭐라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어서 현아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아 되물었다. 현아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정하라고.”
리라젤은 현아가 붙인 이름이었으니 이번에는 유리의 차례라는 의미였다. 또한 유리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였다는 뜻도 있었으니, 유리는 환하게 웃으며 현아를 껴안았다. 현아는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접촉한 사람의 몸은 정말 따뜻했다.
다행히 회사는 현아의 결근을 병가로 처리해주었다. 리라젤에 관련된 사건이 알려진 덕분도 있었다. 이후 유리와 현아는 각자의 자취방을 정리하고 더 큰 집으로 이사해 함께 지냈다.
현아는 지금껏 동성애에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유리와 함께 지낸 시간이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했음을 떠올렸다. 리라젤을 잃자 누군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짙어졌고. 그래서 유리를 위해 기꺼이 동성결혼에 합의했다. 뒤늦게 동성애에 관심을 두게 된 현아는 과거에는 동성결혼 제도는커녕 동성애 자체를 죄악시했다는 사실을 알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지? 옛날 사람들은 숨이 막혀서 어떻게 살았나 몰라. 낙태도 죄도 동성애도 죄도 대마초도 죄고…… 죄 아닌 게 없어. 그 시절에 노예제도는 없었나 모르겠다?”
유리 역시 현아를 배려하여 결혼식도 생략하고 함께 살면서도 신체접촉은 되도록 피했다. 그 얘기를 들은 유리의 레즈비언 친구는 부부관계가 없는 부부도 있냐, 라는 농담 섞인 질타를 했지만 유리는 딱히 욕구불만은 없다며 태연히 웃어넘겼다.
두 사람은 새로 요정을 입양하기 위해 적금통장을 만들어 돈을 모았지만 아직도 요정은 귀하고 비싼 애완동물이었다. 유리는 몇 번이나 현아의 눈치를 보며 대신 개나 고양이를 입양하자고 넌지시 권했으나 현아는 단호히 거절했다. 반드시 요정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날을 위해 모은 돈은 한 푼도 쓸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그렇게 몇 년이 더 지난 어느 날, 현아와 유리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던 리라젤의 편지.
리라젤이 현아를, 유리를 잊지 않고 보내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누가 꾸며낸 건가? 자신들을 속이려고 장난친 건가? 방송국에서 만들어 보냈나? 아니면 정부에서? 두 사람 다 믿기 힘들었다. 리라젤의 편지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맨 앞에 받는 사람 이름만 다르지 두 통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현아에게 / 유리에게
안녕하세요.
리라젤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편지를 남겨요.
저에게 준 사랑과 저를 길러준 정성에 감사를 드립니다. 셋이서 함께 살았던 시간은 행복했어요. 지금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방에서 올려다본 우주는 너무 아름다웠죠.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요.
그렇지만 저는 추억만 돌아보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날 줄 알게 된 아기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둥지에서 어미가 주는 모이만 받아먹던 아기새도 언젠가는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겠죠.
그날이 오면 새는 자신의 둥지를 새로 만들기 위해 떠나겠지요.
두 분은 정말 좋은 부모이자 친구였어요.
두 분이 있는 지구는 나쁘지 않은 둥지였고요.
그래도 저는 평생 둥지에 머무를 생각은 없어요.
이제 저는 새로운 둥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
안녕히 계세요.

눈물이 흘렀지만 리라젤과 헤어졌을 때와 같은 슬픔과 무력감의 눈물은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식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또한 다 자라 독립하게 된 자식을 보고 뿌듯해하는 부모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에 더 가까웠다.
유리는 편지를 읽자마자 차마 못 버리고 남겨둔 대학 시절 교재를 담은 상자를 뒤져 낡은 상자를 꺼냈다. 현아는 오랜만에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어디 갔나 했더니 네가 갖고 있었어?”
예전 현아가 생일선물로 받았던 소형 플라네타리움. 몇 년 만에 다시 보자 반갑고 그리운 마음이 솟아났다.
“미안, 너랑 헤어질 때 급하게 짐을 싸다가 실수로 섞여 들어갔었어.”
“어쩐지 없어졌다 했더니…….”
유리는 전원을 연결하고 켰다. 플라네타리움은 그때와 다름없는 밤하늘을 집 안에 뿌렸다. 두 사람은 그 시절처럼 바닥에 앉아 어깨를 맞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현아가 목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록 곁에 리라젤은 없지만.
뒤에 이어질 그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현아와 유리는 가슴이 아릴 정도로 리라젤의 부재를 실감하며 그리움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슬프지는 않았다. 지금쯤 리라젤도 별이 가득한 우주를 올려다보고 있을 테니까. 그 우주는 조그만 장난감이 방 안에 뿌리는 모형이 아니라 정말로 수조, 수경, 수해 개 별이 만들어내는 진짜 빛으로 가득한 광활한 공간이다.
자신의 진짜 둥지를 만들기 위해 진짜 우주 너머로 날아간 요정 리라젤의 성공과 행복을 빌며 현아와 유리는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한참이나 별을 바라보았다.


(2019.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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