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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재식주의자

2016.06.30 23:5306.30

재식주의자


갑자기 탄광으로 내려 오라는 말에 당황했지만, 재식은 어쩔 수 없었다. 원고료를 받으려면 시키는대로 해야 했다. 요즘에는 닥치는 대로 돈 준다는 원고 의뢰는 뭐든 맡고 있었다. 개중에 탄광 관광지화 사업팀에서 준다는 돈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작가님, 일단 여기로 오세요. 와야 뭐가 일이 되죠.”

망해서 안 쓰고 있는 탄광이 있는데, 요즘 유행 따라 그 탄광을 관광지로 다시 개발한다는 사업을 그쪽 지자체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이 사업팀 사람들은 역시 유행 따라 사업 계획서에 “스토리 텔링” 어쩌고가 필요 하다는 것을 집어 넣은 상태였다.

“저희 사업에 맞는 스토리 아우트라인을 잡아 주시는 게 작가님 역할이고요. 실장님께서는 여기가 탄광이니까 몬스터들이 나오는 던전에 관한 스토리로 해 주시는 것도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왜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요.”

기획사 직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미 그쪽 담당 공무원은 나름대로 막연히 상상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기획사 직원은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그 “실장님”이라는 공무원은 “그 왜, 게임처럼 몬스터 나오는 던전 같은 그런 스토리 텔링을 해 주셔도 되고, 뭐 자유롭게 작가님께서 상상하시는 대로 잘 스토리 텔링을 도입해 주시면 돼요. 아무래도 상상력은 저 보다는 작가님이 더 전문가이시니까”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다른 것을 하면 안 되고 반드시 “게임처럼 몬스터들이 나오는 던전”이라는 틀에 맞추어 주어야만 할 거라고 기획사 직원이 따로 이야기해 주었다.

“게임처럼 몬스터들이 나오는 던전이라는 것까지는 맞춰 주셔야 될 거에요. 안 그러시면 뭘 하든지 간에 그 실장님께서 실망하실 거고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 다시 작업하셔야 할 거거든요.”

그 기획사 사람들은 모두 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었다. 재식이 보기에는 그럴 수 밖에 없어 보였다.

지자체에서 발주한 사업은 공공 연구소 하나가 맡아서 하고 있었고, 공공 연구소는 그 사업의 관리와 기획을 다시 어느 큰 사기업에 맡기고 있었다. 그 큰 사기업은 일을 세 개로 쪼개서 기획사 세 곳에 나누어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그 기획사들은 사무실이 서울에 있었다. 그래서, 탄광 근처에 있는 다른 중급 기획사 하나에 일을 맡겼고, 그 중급 기획사는 작은 기획사 하나와 계약을 해서 실제 일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직원은 명함만 그 작은 기획사 “직원”이지 사실은 작은 기획사와 계약 하에 건건이 일을 따와서 하는 프리랜서였다. 메두사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것을 보고 싸우는 페르세우스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자면, 이 직원이라는 사람이 일을 하는 형국은 지그재그로 이리저리 반사 되어 한 스무개 쯤 거울을 거쳐 비친 모습을 보고 괴물과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익숙해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이 사람의 추측은 일단 맞을 거라고 재식은 믿었다.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실장님께서 보고를 하셔야 하는데, 작업하시는 분이 자주 탄광에 출장 왔다 갔다 했다는 것만큼 일 하는 티가 나는게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오셔야 합니다.”

하지만 재식이 막상 탄광에 와 봐도 별 다른 할 일은 없었다. 안전모 하나와 손전등 하나를 챙겨 주면서 직접 탄광을 구석구석 둘러보고 “스토리 텔링”을 만들어 내시면 된다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탄광 입구에 가 보니,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와 붉은 글씨로

“위험! 노후한 탄광으로 매우 위험한 곳이니 절대 출입 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씌인 표지판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안내해 준 사람에게 “저런데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아, 제가 조치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그 표지판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이제 들어 가시는데 안 걸리적 거리시죠?”라면서 재식을 쳐다 보았다. 재식은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멀뚱히 서 있었는데, 그 사람 역시 그저 멀뚱히 서 있었다.

재식은 “이게 아니다, 이게 아니다” 계속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불길했다.

결국 재식은 수를 쓰기로 했다. 일단 탄광 안에 들어 가면 한 몇 발짝만 둘러 보고 적당히 눈에 안뜨이는 구석에 가서 앉아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거기서 한 시간 쯤 가만히 있다가 그냥 나오기만 해도, 대충 열심히 탄광을 조사해 보고 거기에 맞는 “스토리 텔링”을 이제 만들 수 있다는 생색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재식의 수법은 완전히 실패 했다.

재식은 몇 발짝 걷기도 전에 한쪽 발이 푹 빠졌고, 그 때문에 중심을 잃고 옆으로 자빠지자 곧 벽 사이에 나 있는 구멍으로 굴러 떨어졌다. 굴러 떨어지는 충격으로 구멍 바닥을 쳤더니, 거기 바닥이 무너졌고 결국 재식은 알 수 없는 깊은 땅 밑 굴 속으로 한참 떨어지게 되었다.

재식이 정신을 차려 보니, 그곳은 어디에선가 빛이 들어 오는지 묘하게 밝은 곳이었다.

재식은 일단 살아 있다는 것에 좋아 했다. 그러나, 곧 비참해졌다. 굴 깊은 곳에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공포에 질려 천천히 죽어 가는 상상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살 가능성이 그나마 얼마나 될 지 알아 보고 싶었다. 재식은 그 굴 안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굴 가운데에 사람 형체가 있었다.

탁자처럼 솟은 바위 위에 그 사람 형체는 앉아 있었다. 재식은 가까이 가 보았다. 그 사람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과연 정확한 양반다리였다. 어쩐지, 진짜 정통 양반이 자신의 다리로 진정한 자신의 신분을 보여 주고 싶을 때 취하는 포즈라고 할 만한 느낌이 드는 그런 앉은 자세였다.

재식은 그게 사람인가 시체인가 싶어 슬며시 다가가 쳐다 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 형체가 재식을 쳐다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재식은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은 정말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갓과 도포는 아주아주 낡아 보였지만 사람은 꽤 멀쩡해 보였다.

“저, 안녕하세요? 여기가 어디지요?”

재식이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중국어 같기도 하고 일본어 같기도 하고 한국어 같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재식이 몇 차례 묻자 그 사람은 마침내 먼지 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세 글자를 썼는데, 한자였다. 재식도 “김”자는 알아 볼 수 있었다. 김씨? 그렇다면 아마 이름인 것 같았다.

재식은 전화를 꺼내서 그 한자를 찾아 보았다. 그 사람은 재식의 전화를 신기한 듯이 흘깃흘깃 넘겨다 보았다. 그렇지만 양반 체면이 있는 것인지, 그렇게 넘겨다 볼 뿐 고개를 빼고 보거나 뭐하는 지 묻지는 않았다. 쉬운 글자라서 찾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김, 시, 습. 김시습이요? 선생님이 김시습이세요?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조선 전기의 위대한 문장가이자 유학은 물론 불교와 신선술까지 섭렵하셨다는 바로 그 분 맞으십니까?”

재식이 소리쳤다. 김시습이 대답했다.

“무삼마랄하난다?”
“예?”

재식은 역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재식은 자기 이름을 한자로 쓰고 자기 방향으로 선을 그어 가리켰다. 그리고 김시습의 이름을 김시습 방향으로 선을 그어 가리켰다. 그리고 재식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곽재식”이라고 말하고, 김시습을 가리키며 다시 “김시습?”이라고 의문문으로 물었다. 그러자 김시습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기음-싀셥”

하고 말했다.

그리고 김시습은 뭐라고 한참 말했는데, 더 이상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김시습은 6백년 전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옛날 고전문학의 말들이 생각났다. 김시습은 그런 조선시대 말을 쓰던 사람이었다. 서로 의사소통이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재식은 억지로 몇 마디 더 말을 해 보았다. 그러다보니, 김시습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보여 주면서 서로 말에 익숙해져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식은 전화기에서 EBS에서 하는 논어, 맹자에 관한 강의 동영상을 찾았다. 김시습에게 그것을 보여 주자, 김시습은 그 강의는 대충 알아 듣는 것 같았다. 동영상에 나오는 현대의 한국어는 여전히 생소하게 들렸지만, 논어, 맹자 쯤이야 전체를 통째로 줄줄 외고 있으니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빤히 짐작하고 있는 것이었다.

곧 김시습은 스스로 터치 스크린 사용법도 익혔다. 그리고 이런저런 영상을 찾아 가며 몇 시간 동안 비슷한 영상을 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나를 향해 말했다.

“아아, 내가 유학의 뜻을 일찌감치 버리기를 잘 했구나. 학문이 이렇게 쇠퇴하다니! 이 기기에 나오는 학자라는 것들이 논어, 맹자를 가르치는 것을 보니, 떠벌이며 괴상한 소리를 하는 놈들만 가득할 뿐, 제대로된 가르침을 전하는 선비는 하나도 없구나.”

재식은 김시습에게 어떻게 현대 한국어를 갑자기 할 수 있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시습은 발음과 단어가 변하는 규칙 몇 개를 익히니 어려울 것이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기야, 김시습은 세 살 때 한문으로 된 글을 짓는 법을 깨우쳤다는 사람 아닌가. 어학에는 재능이 있을 것이다. 동영상 강의 몇 분으로 현대 한국어에 대강 익숙해지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싶었다.

“지금 옥좌에 계신 분께서는 몇 대이신고?”

김시습이 말했다. 김시습은 아직까지 조선이 계속 되고 있어서 그 후손이 임금 자리에 올라와 있다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재식이 대답했다.

“조선은 벌써 오래 전에 망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들어 섰습니다. 이 나라에는 임금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김시습은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리고 몹시 괴로워 하였다.

“불충한 더러운 몸이 되어 나라가 망했는 데도 숨을 쉬고 있다니. 내가 어찌 선비라 하겠는가?”

한참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재식은 이 양반이 돌았나 싶어 슬며시 조금 먼 곳으로 물러 났다. 김시습은 흐느끼며 말했다.

“수양대군이 자기 친조카를 죽이는 폐륜을 저지르며 옥좌를 탐냈으니, 나라 꼴이 망가져 망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재식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도 몇 백년 동안 조선은 잘만 이어졌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굳이 이 슬퍼하는 육백년 묵은 아저씨에게 지금 말해 줄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재식은 김시습이 진정될 때까지 또 한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김시습의 눈물이 잠시 멈출 때를 틈타, 재식이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 도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숨을 쉬며 살아 계십니까?”
“내가 더러운 세상 똑바로 살 수 없다 여겨, 방방곡곡 심심산천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이 몇 십년이었는가? 온갖 산을 떠돌다 우연히 신선의 묘한 술법까지 익히게 되었으니, 마침내 죽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몇십년, 몇백년이고 버티는 술법까지 깨우치게 되었다.”

김시습이 말년에 도술까지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기는 했다. 재식도 그런 말을 언뜻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재식은 그냥 세상 욕 잘하는 천재 선비에 대한 동경이 발현된 것일 뿐인 지어낸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정말로 김시습이 신선처럼 되어서 2016년까지 어느 동굴 밑에서 명상을 하고 있을 거라고 믿어 본 적은 없었다.

“선생님, 그러면 부디 나가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저는 신선술도 모르고, 아직 젊은 데다가, 바깥에서 해야할 일도 많습니다.”

재식은 최대한 공손히 김시습 아래에 엎드렸다. 김시습이 대답했다.

“음.”

김시습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재식은 조마조마하게 김시습의 답을 기다렸다. 혹시 김시습이 방법이 없다고 선언하거나, “너는 살아 나갈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아닐까 걱정했다. 얼마 후, 김시습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는 쾌활한 표정이 되었다.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김시습이 재식에게 말했다.

“비상통화 기능을 이용해 구해달라고 연락하면 되지 않겠느냐?”

재식은 당황했다. 막연히 무슨 도술을 써서 순간이동을 시켜 준다거나, 공중부양으로 날아서 동굴을 탈출하게 해 주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전화기로 119에 연락하라는 말을 김시습이 해주다니.

“비상통화요?”
“그렇다. 아까 네가 들고 있는 기이한 기기를 보니, 이는 다른 곳에서 들려 오는 말을 받아서 보여 주는 듯 하였다. 그런데, 그 기기를 보니 비상통화라는 훈민정음이 적혀 있었으니, 이는 아마도 아닐 비, 항상 상, 통할 통, 말씀 화 자를 쓰는 말 아니겠는가? 곧 보통이 아닐 때에 급히 다른 곳에 말을 전하고 싶을 때 쓰라는 뜻이리라. 그러니, 필시 그 기기로 다른 곳에 구해달라는 말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화가 터진다고요?”

김시습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려 보니, 과연 전화가 작동되는 지역이었다. 심지어 아무 쓸모 없는 iptime 이기는 했지만 와이파이 신호조차도 하나 잡히는 게 있었다.

재식은 김시습의 말대로 전화를 걸어서 119에 신고를 했다. 어떤 상황에 처했는 지 설명을 하자 119 사람들이 전화기 배터리가 다 되면 곤란해지니 일단 전화를 꺼놓고 있다가, 30분 후에 다시 연락해 보라고 말했다. 재식은 그러겠다고 하고 전화를 껐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같이 나가시지요. 여기에 이렇게 계시다가 굴이 무너지면 위험하시기도 하고요. 그리고 계속 땅 밑에서 가만 앉아 계시면 너무 심심하실 수도 있잖아요.”
“당치 않다! 더러운 세상 꼴보기 싫어 하늘을 피해 굴 속으로 들어 왔거늘, 이제 와서 무슨 미련으로 또 다시 세상에 나가겠느냐?”
“더러운 세상이라뇨?”

재식은 문득 더 따지고 싶었지만, 문득 오늘 아침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는 말이 떠올랐다. 재식은 말을 멈추었다. 김시습이 다시 말했다.

“수양대군이 망하고 그 무덤이 파헤쳐져서 벌을 받았느냐?”
“아닙니다. 조선 왕릉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되어서,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온 천하의 보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명회의 집이 불타고 그 죄를 새긴 비석이 세워졌느냐?”
“아닙니다. 한명회의 압구정 정자가 있던 압구정동은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집들이 많은 동네가 되었고, 최근 쇠락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서울에서 가장 힙한 곳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이 계유정난을 다같이 욕하는 세상이 되었느냐?”
“욕을 할려면 못 하는 것은 아닌데... 요즘 사극을 보면, 왜인지 한명회나 수양대군이 약간 멋있는 사람으로 나오는 게 트렌드인 것 같습니다. 출연료 많이 받는 배우가 주로 그런 역할 맡고요.”

김시습의 눈치를 보니, “출연료”가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짐작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극”이나, “배우”라든가 하는 말은 조선 전기 최고의 천재 작가다운 탁월한 상상력으로 대강 그 뜻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사극에 나오느냐?”
“가끔 나오시기는 합니다만, 한명회나 수양대군에 비해서는 워낙 비중이 적은 역할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보통 사육신 시체 묻어 주는 장면에서 신인 배우가 대사 세 마디 정도 하는 역할로 나옵니다. 지난 번에는 대사 없이 그림만 나오고 성우가 해설만 하기도 했고요.”

김시습은 다시 급격히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재식은 좀 좋은 말을 해줘야 겠다고 생각해서 뭐든 떠올렸다.

“그래도 신숙주는 요즘 별로 멋있게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찌질하게 나올 때가 많더라고요.”

그러나 김시습은 여전히 괴로운 표정이었다.

한편 재식은 곧 구출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정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여전히 굉장한 일을 겪고 있다는 신비감에 들뜨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만 즐겁고 기쁜 표정이고 김시습은 우울한 표정에 찌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약간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수백년 동안 곱게 잘 명상하고 계셨는데, 제가 괜히 이렇게 깨우고 안 좋은 소식만 전해드려서요.”

그러자 김시습은 서글픈 표정으로 재식을 쳐다 보았다. 김시습이 물었다.

“그대는 어느 집안의 자제인고?”
“무슨 집안은 아니고요. 그냥 현풍 곽씨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그냥 회사 다니시다가 은퇴하셨고요, 어머니도 비슷하시고. 할아버지께서는 농사 지으셨고, 할머니께서도 같이 농사지으셨고요.”
“현풍 곽씨라...”
“그 왜, 홍의장군 곽재우 있잖습니까? 그 분도 현풍 곽씨입니다.”

그러나 김시습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재식이 가만 생각해 보니,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사람이니 김시습이 속세를 떠난지 한참 후의 인물이었다. 김시습은 다시 질문을 했다.

“재식이라는 것은 본명인가?”
“그렇습니다.”
“현풍의 곽씨 가문이라면 그래도 포산군의 후예일텐데, 본명을 그대로 쓰는 것은 너무 상스럽지 않으냐? ‘호’나 ‘자’, 하다 못해 필명이라도 없느냐?”

재식은 김시습이 “매월당”이라는 호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매월당 김시습처럼, 자기 자신을 부를 이름이 아닌 다른 호칭이 필요한 것인가 싶었다. 재식이 대답했다.

“그나마 블로그 닉네임이 ‘게렉터’이기는 합니다만.”
“게렉터라니... 어감이 매우 안 좋구나.”
“예, 그래서 어디 글을 기고할 때나 책을 낼 때에도 그냥 본명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괜찮습니다. 벌써 갑오개혁 때 양반과 쌍놈이라는 구분이 사라졌으니, 그런 것이 없어진지 120년입니다.”

그러자 김시습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김시습의 눈이 점점 커졌다. 재식은 김시습이 갑자기 신분제도의 철폐를 납득하지 못해 소리라도 버럭버럭 지르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혹시 6백년간 연마했다는 도술로 자기에게 장풍이라도 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김시습이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책을 내다니? 그렇다면, 그대도 글을 쓰는 시인묵객이란 말인가?”
“아, 글! 글이요!”

그러자 재식은 다시 한 번 뭉클한 감정이 몰려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맞습니다. 제가 사실은 작가입니다.”

그러고 보니,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쓴 우리 역사 최초의 소설가였다. 그렇다. 이 사람은 한국 소설의 창시자이며, 그 창시한 소설이란 것을 베스트셀러에 올린 전설적인 인기 작가인 것이다. 서평 이벤트도 할 수 없고, 홍보할 SNS 사이트도 없던 시절, 그런 시절에 베스트셀러 등극에 성공 했던 소설가가 눈앞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인쇄를 하려면 파주 출판 단지에 연락하는 대신 뒷집 과거 시험 떨어지고 집에서 놀고 있는 영감님에게 술 사주고 책을 손으로 베끼게 하던 시절에 베스트셀러를 낸 상상초월의 거인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생각을 할 수록 재식의 가슴 속에 소설의 신을 직접 마주한 것 같다는 감격이 넘실넘실 차오르고 있었다.

재식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김시습은 좀 진정하라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었다. 김시습이 물었다.

“그렇다면, 네가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한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글을 쓴다면 무슨 글을 쓰느냐?”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아아, 이 시대에는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느냐? 내가 최초로 소설을 쓰면서 언젠가는 소설이 크게 흥할 줄 내다 보았다. 정녕 사람들이 온통 소설들을 읽는 시절이 온 것이란 말이냐!”

김시습의 얼굴은 드디어 확 밝아졌다. 김시습의 얼굴이 밝아진 것을 보자 재식도 기뻐졌다. 그러나 거기에 맞장구치며 대답을 하려고 뭐라고 말 할지 생각해 보니, 그저 웃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재식이 대답했다.

“뭐, 사실 그런 것은 아닌데요.”

그리고 재식은 출판 시장의 파탄과 어려운 처지에 대해 김시습에게 설명했다. 간신히 밝아진 김시습의 얼굴이 다시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재식의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그래도 사람들이 시 보다는 소설을 많이 읽는 것 같습니다. 시집은 진짜 아무도 안 보니까요.”

김시습을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김시습의 얼굴은 더 어두워지기만 했다.

“그래도요. 선생님 소설은 다들 조금씩은 들어 봅니다. 학교에서 시험칠 때 최초의 소설 하면, ‘금오신화’라고 외우라고 할 때가 있거든요. 저는 재밌게 봤어요. 그 왜, ‘만복사저포기’에서 부처님이랑 도박하는 장면 나오지 않습니까? 그거 재밌어서 저도 제 소설 ‘사기꾼의 심장은 천천히 뛴다’에 그걸 소재로 쓰기도 했습니다.”

김시습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재식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김시습은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육백년간 쌓인 번뇌를 지긋이 음미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음미가 다 끝난 듯 할 즈음, 이윽고 김시습이 물었다.

“정말 내 소설이 재밌었느냐?”
“예, 재밌었습니다.”
“어떤 점이 재밌었느냐?”

재식은 머뭇거리다가 허겁지겁 다시 말했다.

“그 음... 일단 발칙한 상상력이 대단하고요. 그리고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고요. 또,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고요. 그리고, 어... 사람 냄새 나는 진솔한 이야기이고요.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담은 절절한... 그러니까 울림이 있는 이야기이고요.”

책 선전할 때 썩도록 나오는 잡다한 널린 문구를 재식은 떠오르는 대로 줄줄히 읊었다. 다행히 김시습은 그런 말들을 전에 들어 본 적이 없었는지 꽤 괜찮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김시습은 다시 점차 기분이 좋아졌다. 재식도 점차 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하여튼,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 시절에 소설이란 걸 쓰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무리 당시 중국에서는 벌써 유행하고 있었다고 하지만은.”
“선진국에서 유행한다고 우리나라 작가가 같은 것을 쓴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닌 법이다.”
“맞습니다.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는 SF가 잘 안되더라고요. 어째 요즘 그래도 꾸역꾸역 쌓여서 조금은 자리 잡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김시습이 위대해 보였다. 재식은 김시습에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좋은 소설은 어떻게 써야 하나요?”
“네가 진정 그것을 배우고 싶으냐?”

김시습이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약간 구자형 성우나 양지운 성우 같이 들렸다. 정말 무슨 신선의 도술이라도 쓰는 것 같은 극히 멋진 목소리였다.

재식이 김시습의 얼굴을 올려다 보니, 그렇게 생각을 하고 봐서 그런지 6백년 동안 소설 쓰는 법의 정수만 연마해서 핵심을 담고 있는 소설계의 영원한 신선과 같이 보였다. 호롱불 100개를 켠 듯한 아우라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재식은 몸가짐을 바로 하고 공손히 김시습은 앞에 꿇어 앉았다. 재식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도 최대한 성우 비슷한 멋있고 진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소생, 재주는 미약하오나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뜻 만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굳사오니, 감히 욕심을 내어 선생님께 큰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부디 좋은 소설을 쓰는 이치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러자 김시습은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가 다소 갑작스러워 재식은 움찔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가만히 엎드리고 있었다. 김시습이 말했다.

“좋은 소설을 쓰는 첫째는 흥미로운 줄거리이니, 무릇 처음을 읽을 때부터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고, 다음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록 신기하고 놀랍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저 황당하고 허망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처럼 느끼며 같이 울고 웃을 수 있고, 진실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가깝게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재식이 김시습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둘째는 무엇입니까?”

김시습이 대답했다.

“좋은 소설을 쓰는 둘째는 아름답게 글을 꾸미는 것이니, 읽고 있으면 재미 있는 말에 한 마디 한 마디가 즐거워야 하고 또한 그 말의 치장과 운율이 아름다워 읽는 사람이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을 꺼내어 보여 주는 것 같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그저 요란하게 장식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쉽게 바로 알 수 있어야 하고 어떤 묘한 마음을 글로 나타내고 있는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해야 하며, 경쾌하고 신나게 글을 읽어 가는 속도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재식은 보통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세 가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짐작했다. 그래서 재식은 셋째는 또 무엇인지 물었다.

김시습이 대답했다.

“좋은 글을 쓰는 셋째는 바로 마감이니, 마감 전에는 시간을 맞추어 꼭 글을 다 써서 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마감에 맞추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무릇 스스로 글을 다 쓰겠다고 정한 기한이 있으면 도중에 의지가 꺾여 그만둘 것이 아니라 꾸준히 끝을 내는 끈기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지킬 수 있을만한 마감을 스스로 계획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뜻도 되느니라.”

재식은 김시습이 말한 세 가지가 아주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냥 뻔한 말을 했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린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목소리가 멋있어서 괜히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지, 정말 소중한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재식이 다시 물었다.

“선생님, 소생 아둔하여 그 뜻을 잘 깨우치지 못하겠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그러자 김시습이 다시 껄껄 크게 웃었다. 재식은 다시 움찔했다. 웃음이 끝나고 김시습이 말했다.

“흥미로운 줄거리는 바로 씨앗과 같은 것이니, 모든 소설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과 다른 좋은 씨앗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그 씨앗을 잘 길러 보아야 같은 곡식을 거둘 뿐이다. 허구헌날 작가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면서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나 남용하거나 작가 자기 자신을 그대로 옮긴 주인공을 등장시키며 눅눅한 감상을 담은 뻔한 이야기를 쓰면서 좋은 글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보리 씨앗을 뿌리고 쌀이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재식은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시습은 이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아름답게 글을 꾸미는 것은 흙과 같은 것이니,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려도 자갈밭, 진흙밭에 뿌려서는 제대로 곡식이 자라나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그 씨앗 마다 적합한 밭이 있으니, 벼는 물이 많은 논에 심고, 밀은 물이 적은 밭에 심는 것과 같이, 이야기 줄거리에 걸맞게 글을 꾸며야 하는 것이다. 그저 멋있는 남의 글투만 따라 하거나 유행 한다는 재주만 흉내내거나 억지로 웃긴 말을 쓰려고 하는 것은 미나리와 연꽃이 물에서 잘 자란다고 하여, 귀한 인삼을 물속에 던져 썩히면서 잘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이번에도 재식은 여러 반성되는 점이 있었다. 김시습이 이어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너의 글 쓰는 방향을 든든하게 세우도록 하거라.”

들뜬 재식은 자기 생각에 맞게 오늘 듣고 생각한 것을 적당히 정리해서 “재식주의”라고 이름 붙여도 되지 않겠나 생각 했다. 자신을 되돌아 보니, 소설이 너무 가볍게 보일까봐 괜히 무거운 이야기나 우울한 소재를 남발하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를 비판하고 인생의 고민을 다루는 소설을 쓴다하더라도 밝고 경쾌한 이야기로 풀어 나가는 것이 더 마음에 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재식은 김시습의 다음 해설을 기다렸다. 그런데 엎드린 채로 꽤 오래 기다려도 김시습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재식이 이상해서 김시습을 올려다 보았다.

“선생님, 첫째 줄거리와 둘째 글 꾸미는 것에 대해서는 비유법으로 설명을 해 주셨는데, 셋째 마감에 대해서는 설명을 안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김시습은 답답한 듯 6백년치의 한숨을 한꺼번에 쉬었다. 김시습이 말했다.

“마감은 그저 마감이지, 마감을 어찌 다른 것에 비유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을 듣자 재식은 갑자기 김시습이 더더욱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화를 하는 도중에 몇 차례 119와 대화를 하다 보니, 이제 십분, 이십분 내로 재식이 있는 곳으로 구조대가 올 듯하였다. 재식이 김시습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제가 소원이 있으니, 이렇게 된 것 엽편이라도 소설 한 편만 써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엽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아주 짧은 소설을 말합니다.”
“얼마나 짧은 것을 말하느냐?”
“정말 짧게 쓰신다면 140자 소설만 되어도 됩니다.”
“마침 내가 2백년 전에서 백5십년 전 사이에 몇 가지 구상해 놓은 것이 있느니라.”
“정말입니까? 그러면 여기 써주십시오. 전화기의 메모앱을 이용하면 그냥 손가락으로 쓰셔도 입력이 됩니다.”

재식은 기뻐하며 전화기를 내밀었다. 김시습은 그날 본 중에서 가장 기뻐하며 거침 없이 전화기를 터치하기 시작했다. 재식은 김시습이 무슨 소설을 써 줄 지 기대감에 튀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재식이 보니 김시습이 쓴 글은 “大韓民國朴槿惠政府年間”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선생님, 소설을 한문으로 쓰시면 어떡합니까?”
“글을 문자로 쓰지, 그림으로 그리면 그것이 글이냐?”
“아니오. 한글, 훈민정음으로 쓰셔야죠.”
“그렇다면 요즘에는 소설도 다 훈민정음으로 쓴단 말이냐?”
“그렇죠.”
“아, 정녕 그렇단 말이냐!”

김시습은 크게 놀랐다. 한참 이런 저런 말을 혼자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감탄하였다.

“조선이 망했는데도, 세종께서 만드신 훈민정음은 이렇게 널리 쓰이고 있다니, 이것이 천하가 바뀌고 나라가 뒤엎어져도 성인의 가르침만은 두고두고 남는다는 이치인가. 참으로 훌륭하시구나!”

재식은 구조대가 올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훈민정음 쉽잖습니까? 그냥 말씀으로 하시는대로 쓰시기만 하면 돼요.”

김시습은 그 말을 듣고 한글로 소설을 써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꾸 망설이기만 했다. 김시습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울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김시습이 재식에게 말했다.

“그런데,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너무 어렵구나.”
“인터넷 사이트 제가 보여 드리는 것 보고 참고해서 써 보시면 안될까요?”
“그래도 너무 어렵다. 특히 표준어라는 것이 너무 헷갈리는구나. 닭도리탕은 일본말 같아서 쓰면 안되고 닭볶음탕이라고 써야 한다니. 문종 때에도 닭도리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김시습은 띄어쓰기를 특히 어려워 했다. 그런데 애를 쓰는 가운데 그만 가운데 시간이 훨훨 지나가고 말았다.

“안되겠습니다, 선생님. 그냥 말로 하시면 녹음이라도 해 가도록 하지요.”
“안타깝구나. 인연이 맞지 않으니 시간이 없도다.”

재식이 허겁지겁 전화기의 녹음 기능을 실행시키려는데, 김시습은 일어나서 뒤돌아 섰다. 김시습은 천천히 어디론가 걸어 가려는 것 같았다. 재식은 김시습을 붙잡아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여러 사람의 소리가 하늘 쪽에서 들리고 밝은 빛이 확 몰아쳐 나왔다. 뭘 파헤치는 지 돌멩이 몇 개가 떨어졌다. 재식은 그 돌 중에 하나에 맞았다. 번쩍하더니, 정신이 잠깐 흐려졌다. 이름을 묻고 소리 지르는 것이 들리고 했는데도 재식은 뭐가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재식은 구조되어 굴 속에서 바깥으로 나온 상태였다. 재식이 나온 곳은 산비탈을 깎아 만들고 있던 아파트의 지하주차장 공사 현장이었다.

재식이 서울로 돌아온 후, 담당 공무원은 안전문제가 비화되는 것을 싫어하여 그냥 대충 넘어 가면 적당히 아무렇게나 “스토리 텔링”을 써 주어도 좋다고 연락을 주었다. 다시는 탄광에 직접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재식은 고맙다고 했는데, 얼마 후 기획사 직원이 연락을 주어서, “작가님, 그래도 그 ‘게임에서 몬스터 나오는 던전’ 같이는 써 주셔야 됩니다. 안 그러면 상상력이 부족하고 참신하지 않다는 이유로 다시 써야할 거거든요.”라고 조언 해 주었다.

그리하여, 재식은 그쪽으로는 적당히 굴 속에 도깨비, 지네, 용, 이무기 같은 게 숨어 있고 용사들이 들어 오면 싸우게 된다는 이야기를 써 주었다. 대신에, 겪은 일은 적당히 조금 내용을 바꿔서 인터넷에 올리기로 했다.

원고 자체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다 썼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아무래도 김시습이 쓰지 말라고 한 대로 써버린 소설 같아서 흡족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마감을 지킨 것이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재식은 가끔 김시습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재식은 혹시 김시습이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볼 때가 있었다. 특히, TV에서 방영하는 사극 매 회차마다 아주 길고 상세하게 진지한 비평을 올리는 닉네임 “매월그대와”의 글을 볼 때, 바로 이 사람이 김시습이 아닐까 상상해 보곤 한다.

- 2016년, 고속터미널에서

댓글 4
  • No Profile
    신나라 16.07.01 18:12 댓글

    "말버릇과 태도의 우아함"에 등장하는 "한강주의자"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입니다.

    물론 한강 씨의 소설은 재미있게 읽은 게 없습니다.


    주인공은 왠지 "콘도르 날개 - 완결편"에 등장하는 "곽재식"인 것 같아서 새삼 반갑습니다.


    '패륜'이 "폐륜"으로 잘못 적혀있습니다.

  • 신나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6.07.02 19:09 댓글

    예전 이야기까지 이처럼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부터 먼저 생각하고 뭔가 이 제목을 단 소설에서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이런저런 옛날 구식 SF 소설들을 읽다가 소재를 가져와서 질러버린 이야기였습니다.

  • No Profile
    pena 16.07.02 13:08 댓글

    제목은 무언가의 패러디 같은데, 안은 전혀 상관없지만 더 엄청난 패러디와 풍자들로 가득하네요. 잘 봤습니다. 

  • pena님께
    No Profile
    곽재식 16.07.02 19:12 댓글

    오래간만의 덧글 대단히 반갑고, 정말 감사합니다. 김시습이 현대로 돌아와 여러가지 사건을 겪는다는 장편으로 써보면 어떤가 계산도 해보고 있습니다.

    김시습은 조선시대 전기 인물로는 매우 드물게 초상화가 남아 있어서 어떻게 생긴지 알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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