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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립 크루세이더

2016.04.30 22:5204.30

크루세이더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싸늘한 검은 색 빛의 콘크리트 벽에 사람들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찬은 사람들의 불편함도 아랑곳 하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리빈이 물었다. 

“저 사람 뭐라 중얼거리는 거예요?“
“난 주인공이야. 주인공이야...크룰 뭐라 하고 있어요.”
“누구 저 사람 아시는 분 없어요?”

모두가 침묵했다. 방공호 안의 여자 둘, 주리빈, 도은혜, 남자 셋, 김종석, 강훈, 김민호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런 얼굴들이었구나. 
핵폭탄 투하 경보 사이렌과 안내 방송에 이끌려 온 후, 기나긴 정전 탓에 서로의 얼굴들을 익히지 못했다. 그 동안 어둠 속에서 이찬의 노래와 누군가의 울음밖에 없었다. 
갑자기 형광등에 불이 들어온 오늘, 사람들은 노래하는 사람이 안경에 여드름 범벅의 얼굴을 가진 이찬이라는 걸 확인했다. 울음소리는 확인할 필요 없었다. 모두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번씩 울었다. 사람들이 일어나 방공호 안을 둘러봤다. 
들어올 때 출입구였던 문이 있었는데 자동 미닫이문이었다. 문은 방과 부조화를 이룰 정도로 불룩 튀어 나와 있는 게 한 눈에도 매우 두터워 보였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는 이 문 하나 밖에 없었다.
문 옆에 Defence Radiation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플라스틱 서랍장이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서랍장은 대단히 커서, 폭이 2m가까이 됐다. 중앙에 나무 탁자가 있었다.

갑작스런 전쟁 개시와 대피 방송에 떠밀려 방공호로 들어온 지 30시간이 넘도록 이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공포와 불안 속에서 혹시나 기적이 일어나 구조 받으리라는 희망에 기대어 오랫동안 인내했다. 30시간 만에 빛을 보게 되자 긴장 속에서 신경을 바싹 세우고 버텼던 피로가 몰려왔다.
방공호 안에 설치된 확성기로 전파되던 라디오 방송이 끊기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공호 안으로 무사히 도피하신 여러분께 현재 구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행정체계가 복구되고, 전황이 나아질 때까지 장시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절대 바깥으로 나오시면 안됩니다. 방사능에 노출될 우려가 있습니다.-
여기서 얼마나 버텨야 할까?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을까?
모두가 방공호 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살아날 궁리를 했다. 
혹은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모두가 부지런한 때에 오로지 이찬만이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도은혜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고 있어요?!”
도은혜는 환하고 밝은 이마와 보조개를 가지고 있었다.
밝은 인상이지만 어둠 속에서 모든 긍정이 방전돼 보였다.
모든 시선이 이찬에게 쏠렸다.

“저요? 저 구상 하는데요?”
“구상?”

 도은혜가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어둠 속에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노래 때문에 원한이 쌓여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찬은 모두가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가늘게 하고 입술을 내민 둔한 표정을 지었다. 
도은혜의 눈에는 그 표정이 모두를 미련하게 여기는 표정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이찬의 표정을 보지 못했기에 그간의 고난에 도은혜가 예민해진 걸로 여겼다.
이찬은 도은혜의 분노를 외면하고, 두리번거리다 강훈과 눈을 마주쳤다. 
강훈은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안경을 한번 추켜 세우고 흥 하고 이찬을 비웃었다. 


생존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방공호 전체가 흔들렸다. 
소리가 벽과 벽 사이를 튕겨 바닥을 쳤다가 천장으로 솟아올랐다.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민호가 신속하게 스위치를 켜서 불을 밝혔다. 
김종석은 거대한 몸으로 여자들을 끌어당겨 식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강훈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구조물과 천정 전선라인들을 구석으로 걷어찼다.
이찬은 부스스하게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 이 광경을 멀뚱멀뚱 구경했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었다. 폭발음과 지진이 멈췄다. 
김민호가 외쳤다.
“다친 사람 없어요?”
남자들은 대답하고 여자들은 울었다. 김종석은 일어서서 떨어진 파편들을 정리했다.
강훈은 천장에서 떨어진 구조물과 전선들을 살폈다. 
“씨발. 여기서 어떻게 살아?“
김민호가 강훈의 화를 달래려 부드럽게 말했다.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해봐야죠. 구조가 올 때까지는…”
강훈은 말없이 파편들을 밟아 찌그러뜨렸다. 
도은혜가 식탁에서 나와 이찬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아저씨 뭐 했어요?”
이찬은 도은혜에게 생전 처음 희한한 걸 보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은혜는 눈물로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당신 뭐 했냐고?!”
이찬은 어리둥절하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아저씨 아닌데요. 제 이름은 이찬인데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쪽은 도대체 이 난리 날 동안 뭐했어요?”
“여기는 방공호인데요.”
“이것 봐요! 벙커든 방공호든 우리 집이든! 당신 뭐했냐고?!”

이찬은 도은혜의 악쓰는 소리를 듣다가 우물우물 입을 열려 했다. 
도은혜의 말이 이찬의 입을 막아 버렸다.
“잠에서 깨어나 가만히 구경하다가 웃었잖아요? 그랬잖아요. 안 그래요? 맞죠. 보았죠. 모두들?”
도은혜가 동의를 구하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나서서 뭐라 하기는 그렇지만 희미하게 동의했다. 
도은혜는 기세가 등등해져 이찬을 쏘아봤다. 이찬은 당황해서 낮게 웅얼댔다.

“…제가 왜 그랬냐 하면요. 자다가 쾅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보니 사람들은 왔다갔다 하고 주 변에서 물건 막 떨어지고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하나도 없어서? 우리는요. 우리도 없었어요. 우리라고 별 수 있었겠어요? 모두가 살려고 하는데 웃음이 나와요?”
“아~~”

이찬이 갑작스레 입을 크게 벌리고 길게 이어지는 소리를 질렀다.
도은혜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저는 정신도 없고 이런 상황도 처음 겪어보니까 잘 몰라요.”
김종석은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주리빈은 양팔로 자신을 끌어안고 힐끔대며 이찬을 봤다. 김민호는 어이가 없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강훈이 손가락으로 이찬을 가리켰다.

“야! 아니지. 보쇼. 우리는 이런 일이 처음 아닌 것 같아? 누구는 전쟁 전에 이런 벙커인지 방공호에서 살았을 것 같아!”
“아닌데. 난 안 웃었는데?”
“아니. 그거 말고, 누군 이런 일을 겪어 봤냐고?”

이찬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렸다. 
화가 난 강훈이 다가가자 김민호가 끼어들어 강훈을 달랬다. 
강훈이 김민호의 제지를 뚫고, 이찬 앞에 섰다. 강훈보다 머리 하나 작은 이찬은 사람이 앞에 왔는데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시야 밖에 계산 못하기에 뻔히 보이는데 숨고는 어른이 못 찾을 거라고 자신만만해 한다. 흡사 그런 태도였다.
강훈이 멱살을 잡으려 양손을 내민 순간 천장의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김민호가 말했다.
“정전인가?“
형광등이 점멸하다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강훈이 씩씩댔다.
“당신 운 좋은 줄 아쇼.”


김민호는 저번 폭발 때 떨어진 전선들을 놓고 고민 중이었다. 
전기 배선이 얽히고 설킨 천장을 봐도 어디가 어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수리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저번 난리 이후로 갑자기 조명이 정전되거나, 한참 동안 눈이 아프도록 깜박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난리에 대비해 벽 쪽에 바싹 붙어 잠자고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방공호 안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오랫동안 말했기에 몹시 피곤했다.
과연 어느 나라가 전쟁을 벌였을까?
왜 우리에게 핵공격을 했을까?
바깥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언제 구조될까?
사람들 머릿속에 담아둔 공포가 멈추지 않고 줄줄 흘러나와 걱정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김민호는 천장을 자세히 보기 위해 사다리를 찾으러 플라스틱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장 안에 접이식 사다리가 있었다. 그 외 생필용품과 수리 도구들이 가득 있었다.
김민호는 사다리를 꺼내다가 깨어난 이찬과 눈이 마주쳤다. 
김민호는 한 순간 멈칫 했다가 결심을 내렸다. 손짓으로 이찬을 불렀다.
이찬이 다가와 김민호 곁에 털썩 주저 앉았다.
김민호는 뻔히 대화하려 부른 걸 알 텐데, 상대가 서 있는 걸 무시해버리고 앉아버리다니.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저기요. 지금 상황 아시죠?”
“예?”
“지금 상황 말이예요.”
“지금 자다가 일어났는데...”
“그게 아니라 지금 핵전쟁이 나서 우리가 여기 숨어 있게 됐잖아요.”
“아 예.”
“모두 신경 날카롭고 하니까 아까 일 이해하세요.”

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호가 이찬의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여드름투성인 양 볼과 면도를 놓친 수염 때문에 쉽지 않았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만큼 서로를 배려하고 돌봐야죠.”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선은 다른데 가 있었다.
김민호는 스스로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마 여기 있는 동안에 하고 싶은 일 못하고, 먹고 싶은 만큼 못 먹을 거예요.”
“왜요?”
“당연히 물자가 부족하니까요.”

이찬이 턱에 손을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김민호를 염두 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관심 갖는 집중이었다.
김민호는 예민한 성격이었다. 
갈등을 못 견디는 심약한 성질이 아니라 집단의 온도를 감지하는 눈이 있었다.
어떻게든 이찬이 더 말을 하도록 이끌어내고 싶었다.
하나씩 가르치면 되리라 생각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이찬이 계속 사람들과 멀어지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생활에 하루 빨리 적응해 나가도록....”
“저기 저는 개인차가 있어서 적응이 좀 느릴 것 같은데...”
“예?”
“저는 원래 적응을 빨리 못해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래요?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까 하루빨리...”
“아닌데...”
“그럼 어쩌시게요.”

주리빈이 깨어나서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방금 깨어난 도은혜에게 귀속말로 속삭여 상황을 설명했다. 
이찬이 말을 이어갔다.
“글쎄...그동안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도은혜가 냉랭하게 끼어든다.

“이것 봐요. 여기가 아저씨네 집이예요?”
“저 아저씨 아닌데요? 이상하네. 왜 자꾸 아저씨라 하지?”

도은혜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이찬은 도은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저씨 아니라는데도...”
김민호는 이찬의 말을 반복했다.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
“예.”
“왜요?”
“제가 잘 못하니까요.”
“잘 못하면 잘하려 들면 되지 않아요?”
“예.“
“근데 왜 일방적으로 도와달라고 하세요?”

이찬은 선뜻 대답을 못하고 콧등을 비비거나 발끝을 꼬았다. 
김민호는 이찬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고 싶어 기회를 주었다.
내심 곤란하게 됐으니 이 정도면 깨우쳤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말을 하실 때 오해 없게 해야죠. 이찬씨가 아마 하려던 말은..”
“아니예요. 아마 전 잘 못 할거예요.”
“해보지도 않고서요?”
“저는 제 자신을 잘 아니까...”

이찬은 스스로 기회를 걷어찼다. 

“그래도 남에게 도움 받는 거 의존적 태도 아니예요?”
“아니요. 저는 제가 항상 받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받으니까요.”
“그럼,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줘야 해요?”

이찬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조금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예.“
김민호는 짜증을 이기지 못했고 대화 소리는 커져 있었다. 
강훈이 소리에 잠에서 일어났다. 
도은혜가 강훈의 주위를 끈 다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속삭였다. 
주리빈이 자리를 옮겨 강훈 앞에 앉은 다음 도은혜의 설명을 도와줬다. 
이찬은 주위사람들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혼잣말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어...난 내가 못할 때만 그러는데~”
김민호는 이찬의 말에 대답 않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강훈이 팔짱을 끼고 말한다.

“이봐요. 아저씨 뭐라도 되요?”
“저 아저씨 아닌데요. 이찬인데요.”
“예. 예. 찬씨. 찬씨 뭐라도 돼? 우리보다 잘났어? 뭐 똑똑해?”
“예. 아이큐 높아요.”

이찬은 어이 없어하는 모두의 반응을 보고는 당황했다.

“저 인문계 나왔는데...”
“아 그래서 뭐!”
“똑똑하냐고 물으셨잖아요.”
“똑똑하면 우리가 뒤치닥 거리 해줘야돼?”
“아뇨.”
“그럼 뭐야?”
“똑똑하냐고 물으시길래....”

도은혜가 입술을 삐죽였다. 
“똑똑한 사람이 적응하나 못해?”
이찬은 도은혜를 쏘아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식.의 양.과. 생.물.학.적 능.력.은 다.르.니.까.”
“꼬박꼬박 말대꾸네.”

이찬은 갑자기 작위적으로 싱긋 웃었다.
여유 있어 보이려는 연기가 익숙하지 않고 어설퍼 보였다.

 “난 여자랑 싸움 안 해요.”

도은혜와 주리빈이 짧게 비웃는 소리를 내고는 서로 속삭였다. 
김민호는 모두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찬씨. 천장 살피려 하는데 사다리 좀 잡아주세요.”
이찬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전 근 지구력이 딸려요.”
김민호는 허탈하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도은혜가 크게 웃었다.
“근지구력이 딸린데!”
주리빈은 강훈을 강훈은 도은혜를 따라 웃었다. 
비웃음 하나 없이 정말 즐겁고 행복한 웃음이었다. 
이찬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뒤통수만 긁적였다. 
형광등이 깜박거렸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형광등을 바라봤다. 형광등이 꺼졌다.
누군가가 말했다.

“또 정전이네.“
“형광등도 근지구력이 딸리나봐요.”


김민호와 강훈, 김종석이 벽면 안에 있는 보일러 패널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보일러 옆에 붙은 설명서를 봐도 고장 난 곳이 어딘지 찾기 힘들었다. 
남자들은 손으로 보일러 온수와 증기라인을 훑으며 원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도은혜가 벽에 대고 노크를 했다.
“차라도 한잔 드시고 해요.”
남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바닥에 앉아 도은혜의 차를 기다렸다. 
이찬은 비상식량 포장박스를 하나 주워 위에다가 종이를 올려놓고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강훈은 언짢게 이찬을 바라보며 남자들과 적대적인 감정을 나누려 했지만 남자들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도은혜가 차를 만들자 주리빈이 남자들에게 차를 나누어 줬다. 
이찬은 자신에게는 주지 않자, 직접 차를 두잔 만들더니 한잔을 주리빈에게 건넸다. 
어울리지 않은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강훈이 말했다.
“뭐야. 둘이 그새 눈이라도 맞은 거야?”
이찬은 수줍어하며 종이박스로 가서 차를 홀짝였다. 
김민호는 이찬의 어린 애 같은 행동을 보며 웃었다.
“찬씨 왜 그래요?”
이찬은 고개를 숙여 종이박스를 바라보며 낮게 웅얼댔다.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랑 닮았거든요.”
“캐릭터라면 게임?”

이찬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강훈이 물었다.
“만화?”
이찬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만화 아니고 애니메이션.”
“웃기고 있네. 그게 그거지.”

김종석은 차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이찬 때문에 분위기 나빠지기 전에 일 하자고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강훈도 따라 일어섰다.
“에휴. 니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주리빈은 이찬 눈치를 보며 도은혜에게 다가가 뭐라 속삭이자 도은혜가 크게 웃었다. 
김민호가 일어서다가 물었다.
“왜 웃어요?”
도은혜가 입을 열기 전 이찬이 먼저 말했다.
“오 나의 여신님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베르단디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도은혜가 더욱 크게 깔깔 웃어댔다. 
“본인은 댁이 싫대요. 어떡해?”
이찬을 제외한 모두가 웃었다. 
이찬은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강훈은 보일러 벽면으로 가다가 일부러 돌아와 잔인하게 웃었다.

남자들이 보일러 앞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낸 끝에 간신히 고쳐냈다.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모두가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주리빈이 한쪽 벽면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뜨거운 물 나와요! 어서 식량 팩 데우죠.”
김민호가 기름 묻은 손을 수건으로 닦아냈다. 
김종석이 뒤에서 김민호의 양 어깨를 잡고 힘있게 두드려 줬다. 
뒤에서 강훈이 싱글벙글 웃었다.
“이제 밥 뜨겁게 먹을 수 있게 됐어.”
주리빈의 말에 도은혜가 침낭을 꿰매다 웃으며 일어섰다.
“수고들 하셨으니. 제가 차려 드릴게요. 편히 쉬세요.”
도은혜의 상냥한 말에 남자들은 웃으며 바닥에 편히 앉았다. 
이찬은 그 동안 홀로 앉아 있다가 밥 먹는 다는 소리에 후다닥 식량박스로 가서 식량 팩을 꺼내 도은혜에게 내밀었다. 도은혜는 이찬의 빠른 기세에 당황했다.

“뭐예요?!”
“제가 3시간 동안 참았거든요.
“뭘요?”
“밥 먹는 거요.”

도은혜의 냉랭한 말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찬은 자기 할 말을 어눌하게 마쳤다. 
모두 굳은 표정으로 이찬을 바라봤다. 강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폭발했다.
“어이 어이 야! 너 그럼 우리가 식량팩 데우게 보일러 수리 할 때까지 기다렸단 말이지?”
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훈은 폭발했던 태도를 싹 지우고, 능글맞게 물었다.
이미 대답은 알고 있었다.

“왜에?”
“전 할 줄 모르니까요.”
“누군 할 줄 알아서 했고?”

이찬은 대답을 하지 않고, 뒤통수를 긁거나 한쪽 발로 다른 쪽 발을 슬슬 문질렀다. 
모두가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이찬은 압박감을 느꼈는지 코밑까지 슬슬 문질렀다. 
도은혜가 하.하. 짧게 웃고는 식량팩을 내밀며 빠르게 말했다.
“그럼 난 이거나 데우라고? 내가 당신 보모야. 엄마야? 뭐야? 내가 왜 당신 먹으라고 이걸 데워야 해?!”
이찬은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쳐다보며 웅얼웅얼 댔다.

“맨날 요리하시길래. 전 그냥 드린 거죠.”
“그냥? 이제부터 당신이 그냥 직접 해.”

도은혜는 식량팩으로 이찬의 가슴을 밀었다.
주리빈이 도은혜에게 눈짓하며 짧게 “어제 저녁에” 라고 속삭이자 도은혜가 생각 났다는 듯 말했다.
“당신 어제 식량 훔쳐 먹었지?”
이찬은 흠칫했지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주리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어제 은혜랑 같이 들었어요. 남자분들은 깊이 잠드셔서 못 들었겠지만, 어제 우리끼리 밤에 얘기 나누다가 들었는데 누군가 부스럭거리며 뭔가 먹는 소리가 들리더니까요.”
주리빈은 얘기하는 내내 도은혜에게 동의를 구하듯 쳐다봤다. 도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리빈 옆에 붙어섰다. 남자들 시선이 이찬에게 모였다.
김민호가 대표로 물었다.
“진짜 그랬어요?”
이찬은 대답을 않고 식량 팩을 가슴에 안고 내려다 봤다. 김민호가 목소리를 키워 두 번 물었다.
“아 진짜 그랬냐고요?”
이찬은 김민호에게 도움을 요청하듯이 목소리를 쥐어 짰다.

“…저는 옛날에 집에서 6끼 먹었거든요.”
“예? 어떻게요?”
“아침, 점심, 저녁, 간식, 야참, 군것질.”

이찬의 말에 여자들 혐오스럽게 쳐다봤다. 
김민호는 애써 혐오를 억누르며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간식, 야참, 군것질 모두 같은 말 아니 예요? 여기는 그렇게 못 해요.”
“고쳐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강훈이 화를 못 참고 끼어들었다.
“야! 그래서 몰래 훔쳐 먹어도 돼?!”
이찬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고개를 돌리면 대답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긴다는 듯한 순진한 믿음이 보였다. 강훈이 더 강하게 윽박질렀다.

“그래도 되냐고?”
“...안되죠.”
“아는 사람이 그래? 씨발 대답 안 해? 미쳤냐? 야 니가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돌았냐?”

강훈이 벌떡 일어나자 김종석도 따라 일어났다. 이찬에게 다가가는 강훈을 뒤에서 말렸다.
강훈은 팔을 휘둘러 저항하려 했지만 예상치 못한 큰 힘에 끌려갔다. 
몸집이 큰 김종석이 강훈을 가볍게 제압했다. 이찬을 향해 강렬한 시선을 던졌다.

“이보게 찬씨, 내가 가만히 듣고 있으려다가 이렇게 나서게 됐는데…보통 사람들은 하루 3끼 먹네. 찬씨도 잘 알잖아. 이제부터 찬씨도 우리랑 같이 하루 3끼를 먹는 거야 알았지?”

이찬은 자신 때문에 달아오른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했다. 

“자자 내 눈 마주치고 남자답게 약속하자고, 하루 3끼 남들하고 다 같이 먹는 거야. 알겠나?”
“.....예.....근데...그게...”

이찬이 시원스레 대답 못하고 우물댔다. 
김종석은 또 엉뚱한 대답이 나오는 걸 감지하고는 서둘러 말했다.
“이보게 찬씨.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 우리 모두랑 맞춰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 거야. 자네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없다고...”
몸집이 큰 만큼 속도 깊은지 김종석의 목소리에 분위기가 잡혀갔다. 
김민호가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 비상 식량 많이 없어요. 모두 맞춰 가야죠.”
“자 자 잔소리는 이만 할 테니 일단 손에 든 거 맛있게 먹게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찬은 홱 돌아서 어린 애 같은 종종걸음으로 후다닥 식량박스로 갔다. 
식량 팩을 꺼내서 화장실로 갔다가 다시 식량박스로 돌아왔다. 
왜 저럴까? 이찬이 식량박스를 뒤지다가 사람들 시선을 느끼고 설명해 줬다.
“아 이거요. 내용물이 부서진 게 느껴져서 새 걸로 바꾸려고요.”
부서진 식량 팩을 넣고 새 식량 팩을 꺼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강훈이 모두들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럼 부서진 거 우리나 먹으라고?”
도은혜는 피식 웃다가 주리빈의 팔뚝을 잡고 흔들며 물었다.
“쟤 미친 거야. 그렇지? 미치지 않고 저럴 수가 없어!”
주리빈이 지쳐서 슬픈 표정으로 도은혜를 안아줬다. 
도은혜는 울분을 속으로 삭이며 울었다. 김민호가 다가가 도은혜의 등을 두드려줬다. 


말소리가 어둠 속을 오갔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내일은 형광등을 손봐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차 티백이 몇 개 남았죠?  70개요. 사람들 대화 사이로 이찬이 끼어들었다.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어둠 속에서 침묵이 켜졌다. 이찬은 반응이 나올 때까지 애 같은 잇소리를 내며 딴청 피웠다. 
김종석의 굵직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래 자네도 잘 자게.”


어둠 속에서 포장지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형광등이 켜져 방공호 안이 환해졌다.
도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럴 줄 알았어, 이 철면피!”
몰래 식량 팩을 훔치려던 이찬은 당황했다. 모든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찬에게로 다가갔다. 김민호가 말한다.

“이찬씨 뭐 하는 거예요!”
“먹으려고요.”
“왜요?”
“배고파서요.”
“아까 우리랑 약속한 한 내용 잊어 먹었어요? 하루 3끼 먹기로 했잖아요.”
“배고파서...”

김민호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강훈은 화를 낼 건수가 생겼기에 웃었다.
“야 찬, 당신 돼지여?”
이찬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최대한 쉽게 설명한다는 걸 어필했다.
“저는요. 6끼에서 3끼로 줄였거든요. 근데 배가 고픈 거예요. 그래서 하나 더 먹었어요. 그래도 6끼에서 4끼로 줄였잖아요.”
강훈은 도중에 말을 끊기 위해 위협적으로 쌍소리를 냈지만 이찬은 쏟아내듯 빠르게 말을 맺었다. 김민호는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3끼만 먹으랬잖아요. 우리의 규칙이라구요.”
“그래서 그게 힘드니까 하나 더 먹었다구요. ”

강훈이 다가가 손가락으로 이찬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야이 정신병자야 3끼만 먹으라구, 아침, 점심, 저녁만 먹으라구!”
이찬 입장에서 3끼에서 한끼 더 먹은 이유로는 합당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못한 거 같아서 답답했는지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게 힘들어서 저 하나 더 먹었다구요! 배고파서 한끼만 더!”
주리빈이 도은혜의 어깨 뒤로 고개를 내밀며 이찬을 노려봤다. 도은혜가 주리빈에게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그럼 약속은?”
이찬은 도은혜가 못마땅한지 고개를 돌렸다.

“여자랑 안 싸운다니까요.”
“약속은 어쩔 건데 말해봐, 이 철면피야!”

이찬의 얼굴에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도은혜가 깔깔대며 웃는다. 

“기분 나뻐? 나쁘면 어쩔 건데?”
“제가요. 사실요. 지금 이렇게 먹고, 낼 아침에 일어나서 모두에게 말하고 허락 받으려고 했거든요. 그러니 저 철면피 아니거든요.”

이찬은 말하는 도중 김민호의 얼굴을 쳐다보며 동의를 바랬지만 김민호는 무시했다.
이찬이 외면하는 김민호를 향해 가르쳐 주는 톤으로 말했다.
“잘 들어보세요. 제가 배고파서 자다가 하나 더 먹었고, 생각해보니까 하루 3끼로 무리인 것 같으니 4끼는 먹어야 겠다고....”
주리빈이 도은혜의 뒤에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혼자 4끼 드시면 안돼요. 식량팩 숫자를 우리 인원수로 딱딱 나눠서 양을 나눴어요.”
이찬이 주리빈을 쳐다보자 주리빈은 시선을 피하려 도은혜 등에 숨었다. 
김민호가 말했다.
“그래요. 수량이 정해져 있는데. 찬씨 말대로 혼자 4끼 먹으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이찬은 희한한 걸 쳐다보듯이 김민호를 보다가 당연하게 말했다. 

“전 배고프니까요.”
“됐어, 이 개새끼는 매가 약이야.”

강훈은 말을 마치고 달려들어 이찬의 뺨을 날렸다. 이찬은 뺨을 맞고 쓰러졌다. 
강훈에게서 도망치려 엉금엉금 기었다. 
김민호가 강훈을 말렸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 
도은혜와 주리빈이 이찬의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날카롭게 웃었다. 
이찬이 울기 시작했다. 이찬이 울자 강훈이 멈췄다. 
“야이 씨발 새끼들아. 덤벼 미친 새끼들아. 개새끼들아.”
이찬이 울다가 벌떡 일어나 욕을 소리쳤다. 사람들이 반응하기 전에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김종석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두통이 심했다. 
이찬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그제야 한 마디 말을 꺼냈다.
 “지겹네. 정전.”


어둠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서걱서걱 연필로 뭔가 쓰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 모두가 깨어있었지만, 조용히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누구도 듣고 있다는 걸 내색하지 않았다.


이찬을 제외한 모두가 둘러 앉아 있었다. 
모두가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호가 눈치를 살피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거 읽어봤어요?”
김민호가 내민 종이를 주리빈이 받아 읽었다.
“죽여봐. 죽고 싶다. 모두들 죽여 버리고 싶다. 죽고 싶다. 죽여줘.”
모두가 주리빈의 종이 읽는 소리를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훈이 바닥을 쳐다봤다.

“조금만 더 참을 껄....”
“그러고 보니 전에 자살할 뻔 했다고 얘기하는 것도 들었어요.”

김민호에게 모두의 시선이 몰린다. 
“고등학교 때인가? 왕따 당해서 자살하려 했대요.”
도은혜는 사람들 분위기를 살피다가 말을 툭 내뱉었다. 
“하긴 그 성격에 왕따 안 당하겠어...에이...우리가 너무 한 것 같네.......요.”
모두가 침묵. 숙고의 시간이 지나자 제각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정상이라고 볼 수 없잖아요. 정서불안인가?”
“말귀도 못 알아 먹고...“
“맞아요. 엄청 찌질 해요.“
“사실 조금 모자른 건 우리도 조금 눈치채고 있었잖아요. 상황이 안 좋다 보니 이렇게 됐는데 그래도 우리가 원래 이렇게 인색한 사람들은 아니…었겠죠?”

김민호의 마지막 말에 강훈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끄덕였다.
“전쟁 터지기 전까지...나도 이러지 않았는데...”
도은혜도 미안해서 같이 심하게 대한 강훈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한번 잘해줄까요?”
“우리는 짐승이 아니니까..한번도 잘해준 적 없으니...”

모두 침묵으로 합의했다. 김종석이 침묵을 깼다.
“일단 잠자고 나면 그 친구도 화가 좀 풀리겠지. 그때 얘기해 봅시다.”

 
도은혜와 주리빈은 옷과 침낭을 바느질하고 있었다. 
강훈은 벽에 등을 대고 기대어 있다가 심심한지 주먹으로 바닥을 때렸다. 
김종석은 전선을 구부려 옷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김민호가 방공호 출입문을 살피다가 사람들 쪽으로 와서 앉았다. 도은혜가 물었다.

“그래 문은 어때요?”
“예, 괜찮아요. 일단은 안심이고 안에서만 열지 않으면 별 일 없어요.”
“저기가 열리면 여기로....방사능이 들어오는 거죠?”
“일단 지금은 안전해요. 문 옆에 방사능 계측기가 달려 있는데 수치가 낮았어요.”

강훈이 물었다.

“어두워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저 문 너머에 문 하나 더 있던 거 같은데요? 
“저기 주리빈씨 옆 설명서에 있을 거예요.”

주리빈이 주변에 놓인 설명서를 읽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내부 입구라 부르고요. 저 문 뒤로 또 외부 입구가 있어요.
계기반을 조작해서 압력조절이나 통풍, 내부 입구, 방공호 외부 입구를 열고 닫을 수 있다 와 어머? 이게 뭐야?”

강훈이 설명서를 받아서 읽었다.

“너 이제 날 지켜봐 내가 만들어 갈 내일을 많은 도전과 어려움들이 우릴 막아서도 언제나 난 주인공이니까. 서명이 슬픈 꿈?”

모두들 일어나서 다가갔다. 
강훈이 설명서를 펼쳐서 모두에게 보여줬다.
“슬픈 꿈이 뭐지?“
화정실 문이 살짝 열리고 이찬이 얼굴을 내밀었다.
“제 필명인데요.”
강훈이 화를 내려 하자 김종석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강훈은 잘해주기로 했던 거 기억해내고는 몸에서 힘을 뺐다.. 
김민호는 마치 대단한 걸 앞둔 듯 가볍게 심호흡하고 이찬에게 다가갔다.

“시라도 쓰신 거예요?”
“아닌데요.”
“그럼 뭐죠?”
“애니메이션 가이스터즈 오프닝 가사요.”
“만화주제가라....”

이찬은 김민호의 반응이 이해 안 간다는 듯 미련스럽게 눈을 껌벅거렸다. 
김민호는 이찬의 모습을 보며 인내심이 바닥나려 했다. 다시 한번 심호흡으로 가다듬었다.

“자 이찬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요. 지금 우리 전쟁이 일어났어요. 그것도 핵전쟁, 이런 상황에서 방공호 문을 조절할 수 있는 설명서에 낙서해도 되겠어요?”
“낙서 아닌데요.”
“그럼요?”
“저 가사 보면 알듯이 가사내용대로 힘든 상황을 용기로 이겨내자는 뭐..그런 건데...”
“예, 예. 좋아요.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설명서는 굉장히 중요한 건데 거기다 이런 걸 써도 되겠어요?”
“저 가사 저한테도 중요한 건데...”
“설명서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거예요. 즉 공용이란 말이죠. 거기다 개인적인 걸 적으면 안되죠. 이제 이해해요? 솔직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찬씨 행동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알고 있어요?”

이찬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자 김민호가 목소리를 깔고 세게 나갔다. 
“대답 좀 하시죠?”
이찬은 생각에 골몰히 빠져들었다.

“왜요? 찬씨 다른 생각 있으세요?”
“제가 지금 물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 사실이예요.”
“어...어...만약에 제가 그림을 그린다면 제 특유의 그림체나 제가 그렸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뭐라 구요?”
“제가 만화를 그리면요. 보는 사람이 이름을 보고 아 찬이가 그렸구나 하는데 보니 그림체도 다르고 평소 쓰는 펜도 아니고 찬이가 그린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지는 게...어..지금하고 같아요.”

김민호가 이해를 못해서 강훈을 쳐다봤다. 강훈은 이찬과 얘기하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여자들은 이찬이 헛소리 한다는 식으로 쳐다봤다. 김종서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이찬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방해 할 수 없었다. 
김민호는 혼자 생각하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림체나 쓰는 펜을 이찬씨 특징이나 오리지날....그래 개성 인가요?”
“...예...”
“그걸 우리가 없애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예.”

강훈이 조그맣게 투덜댔다.
“씨발 우리가 언제 지를 탄압했다고...”
도은혜가 주리빈과 함께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웃겨 지만 피해자야. 우리만 나쁜 년이야.“
김민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짜증났지만 최대한 자제했다.

“이찬씨 만화 좋아하시죠?”
“애니메이션!” 
“…여기선 애니메이션을 볼 수 없어요. 왠지 아시죠?”
“예.”
“여기서는 모든지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애니메이션이든 놀이든, 먹는 거든..원래 사회에서도 모든지 마음대로 할 수 없었잖아요. 여기서는 제한이 더 심해요.”

이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가 들어났다. 
김민호는 이 틈에 쐐기를 박으려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서 살아가려면 우리 모두가 서로 도와야 해요. 밤에 혼자 노래 부르기, 혼자 많이 먹기, 만화 그리기...이거 모두 제한 할 수 밖에 없어요. 현 상황이 나쁘니.”
이찬이 몸을 꼼지락거렸다.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이찬씨 솔직히 여태까지 여기 생활에 맞춰서 하지 않고 자신이 밖에서 하던 거 계속 유지하려 했잖아요. 우리랑 충돌 일으켜 가면서...그리고 사람들 말에 막 생각 없이 4차원적으로 대답하시잖아요.”
김민호는 속내를 다 털어놓아서 인지 기분이 점점 나아졌다. 그리고 감정이 정화되어 오히려 이찬에게 미안함 마음까지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흥미로운 눈으로 이찬의 반응을 기대했다.

“살기 위해 제한하는 우리가 나쁘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우리가 뭘 원하고 모두와 같이 살려면 어떻게 할지 아시죠?”
“...예.”

형광등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며 불안해졌다. 모두 형광등을 바라봤다. 
정전됐다. 누군가 말했다.
“정말 이해 했으려나...”


어둠 속에서 모두가 잠들어 있었다. 
김민호는 옆에 누운 이찬을 톡톡 건드려 주의를 돌렸다.

“어제 저하고 한 얘기 기억하세요?”
“무슨 얘기요?”
“우리가 일부러 찬씨 억누르려는 게 아니라는 거요.”

대답은 오지 않았다. 김민호가 조심스레 다음 말을 이었다.

“뭐 여태까지 찬씨에게 안 좋은 일만 일어난 것 같아서 저도 미안함을 느껴요.”
“괜찮아요.”
“정말요?”
“예.”
“그럼 다행이네요. 찬씨 그래도 속마음은 좋은 분 같네요. 이찬씨 그러고 보니 만화 굉장히 좋아 하네요.”
“만화 보다 애니메이션! 애니메이터가 제 꿈이예요.”
“아. 예. 찬씨는 좋은 애니메이터가 될 거예요.”
“정말요?”
“예 나중에 전쟁 끝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찬씨 만화 기다릴게요.”
“만화 아니고 애니메이션.”
“아..예..애니메이션.”

 김민호는 이제 대화를 끊고, 잠에 들려 하는데 이찬은 신난 기색이었다.

“제가 만들려는 애니메이션은요. 크루세이더에 대한 내용이예요.”
“십자군?”

이찬이 진지하게 엉터리 콩글리쉬를 발음했다. 

“크루으세이더. 그들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위해 싸워요.”
“그래요?”
“악마의 지배하에 사람들 자유를 박탈당했는데... ”
“예.”

단순한 말 넘기기의 대꾸에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이찬은 점점 흥분했다.

“악마의 지배로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되어 백과 흑이 바뀌고 선악이 바뀌었어도 크루세이더들은 끝까지 자신이 선하다는 신념의 길을 가요. 그리고 신념의 길 끝에 악마들을 지옥 불에 몰아넣고 모두 물리쳐요.”
“세상의 선악이 바뀌었다는데 어떻게 십자군들이 좋은 편인걸 알죠?”

이찬은 형편없는 영어발음을 강조하며 대답한다.
“크르우세이더는 당연히 주인공이니까요. 주인공은 당연히 착하죠.” 
김민호는 너무 한심해서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이찬은 김민호의 반응이 칭찬인 것처럼 흥겨웠다.
마치 몰이해 받는 자체가 위대하다는 증거인 것처럼. 
“너 이제 날 지켜봐~내가 만들어 갈 내일을 많은 도전과 어려움들이~우릴 막아서도 언제나 난 주인공이니까~”
김민호가 어둠 속에서 이찬의 기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번에 종이에 쓴 글 말이예요.”
“예?”
“종이에 죽고 싶다. 죽이고 싶다. 이렇게 쓰신 거 말이예요.”
“아...예.”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살려고 해야죠. 그런 말 함부로 쓰면 안돼요.”
“아 그거요. 그때요. 제가 맞아 가지고, 화장실에서 막 아파서 누워있는데...”
“사람 목숨 귀한데 함부로 죽느니 마느니…”
“때릴 수 있었는데 못 때리니까...억울해서..”
“전쟁 끝나고 어서 가족들 만나봐야죠.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김민호는 이찬이 헛소리를 멈추고 말을 진지하게 듣기를 원했다. 계속 말을 잇다가 중간 숨을 고르는 사이.

“야이 자식들아 죽일려면 죽여봐라 이런 심정으로...근데 설마 진짜 죽이겠어요? 그렇죠?”

김민호는 침묵했다. 이찬은 자신의 말이 김민호를 변하게 한 줄 모르고 어리둥절했다. 
형광등이 순간 깜박이며 빛을 드러냈다가 어두워졌다.
이찬이 즐겁게 말했다.

“또 정전.”
“즐겁냐? 씨발 저건 어떻게 고쳐.”

이찬은 김민호의 입에서 욕이 나오자 놀라서 쳐다봤다.
김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찬 옆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누웠다. 


김민호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 글쎄..어이가 없었다니까요. 씨발 놈, 개자식 죽이려면 죽여봐라?”
강훈이 흥분돼서 거들었다.
“맞어 씨발 새끼 맞어. 저건 인간새끼가 아냐. 믿어 주고 잘 해줬더니... 뭐? 진짜 죽이겠어요?”
이찬은 구석에서 잠자고 있었다. 사람들은 흥분돼서 떠들다가 쳐다봤다.
들었을까 하는 걱정이 아니라 제발 들었으면 했다.
도은혜가 사람들 흥분에 용기를 얻어 말했다.
“그 놈은 개돼지예요. 아냐 개도 이 정도로 아니야. 개는 먹이 주는 손은 물지 않아.”
주리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형광등이 긴박하게 깜박였다. 연달아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공호 안에서 공기가 진동되어 윙윙 울렸다. 
천정 배관라인에서 수증기가 새어나오며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람들이 물벼락에 우왕좌왕했다. 
이찬에 대한 험담을 안 듣는 척, 몸을 돌리고 있던 김종석이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
김종석이 식탁을 질질 끌고 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식탁 아래로 숨어 들었다. 
폭발소리가 점점 잦아 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서너 번 크게 쾅쾅 울리고는 사라졌다.

이찬이 화장실에서 나와 사람들이 식탁 밑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폭발음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도은혜와 주리빈이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이찬이 도은혜가 우는 걸 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김민호가 공격적으로 삿대질했다.

“야. 너 뭐하냐?”
“저요?”
“그래. 너!”
“왜 저한테 화내요?”
“씨발 정말 몰라서 묻냐?”

이찬은 왜인지 묻는 시선으로 김민호를 바라봤다. 
김민호는 이찬에게 왜 자신에게 의지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몰라? 정말 모르네 보네. 씨발...”
이찬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에게 적대적인 걸 느끼고 당황했다. 김민호가 물었다.
“너 뭐냐? 아니 너 지금 무슨 생각하냐?”
이찬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 상황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스릴러물이 나올 것 같은데?”
“뭔 개소리야. 병신아!”

김민호가 이찬에게 달려들었다. 이찬과 뒹굴며 몸싸움을 벌였다. 김종석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김민호를 끌어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낮고 무겁게 말한다. 
“이것 봐. 찬.”
이찬은 듣지 않고, 구겨진 옷을 펴고 있었다. 
김종석이 인내심을 가지고 연달아 굵게 불렀다..

“찬, 찬.”
“예.
“똑바로 할 마음 없으면 나가! 이 새끼야!”

김종석의 벼락같은 질타에 이찬은 움츠러들더니 욱하는 기세로 출입문으로 달려가 계기반을 조작해 문을 열었다. 공기 오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쉬이익거렸다. 방사능 계측기가 요동치며, 위험을 가리켰다. 
남자들이 모두 일제히 달려들었다. 김종석이 이찬을 방 중앙으로 내던졌다. 
김민호가 계기반을 서둘러 조작해 문을 닫았다. 자동으로 열리던 문이 갑작스레 수동조작으로 닫히게 되자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강훈이 달려들어 이찬의 멱살을 잡았다.

“야 너 뭐야. 저 문 열어서 방사능 걸려 모두 뒈지라고?!”
“나가래서 나갔잖아!
“인간이 덜 된 새끼야!”

형광등이 정전되려 깜박였다. 남자들 모두 이찬에게 달려들었다. 
어둠 속에서 이찬을 짓밟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모두 바닥에 둘러앉아 비상식량을 먹고 있었다. 김민호가 말했다.
“이 자식 어디 갔지?“
주리빈이 손가락으로 화장실을 가리켰다. 이찬이 쭈그려 앉아있었다.
“야! 찬, 찬 똥찬!! 빨리 와 니가 좋아하는 밥 처먹어.”
강훈이 일부러 과장되게 웃었다. 김민호가 소리질렀다.
“빨리 안 뛰어 개새끼야!”
이찬이 허겁지겁 뛰어와 도은혜 앞에 섰다. 
“뭐 나보고 밥 달라고? 내가 니 엄마야. 꺼내서 처먹어.”
이찬 아무 대꾸도 못하고 식량박스로 갔다. 강훈이 이찬을 놀릴 좋은 건수를 던졌다.
“사람이 말하면 대답 좀 하시죠. 만화 작가님.”
이찬이 뒤돌아 힘없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애.니.메.이.터.”
김민호가 핀잔을 줬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나...”
이찬이 화장실로 가서 온수를 틀어 비상식량 팩을 데웠다. 
홀로 구석에서 먹기 시작했다. 김민호가 문을 가리키며 말한다.
“아무래도 저 문 용접해야 할 것 같은데...설명서를 보니 자동식인데 아까 자동으로 열리는 걸 수동조작으로 닫았더니 틈새가 생긴 것 같아요. 방사능 계측기가 점점 올라가고 있어요. 이거 다 먹고 용접해야 할 것 같아요.”
김종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훈이 이찬을 쏘아봤다. 
몇 번 수저질을 하다가 이찬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리고, 어이 찬씨. 찬군, 찬군.”
“....예.”
“이제부터 사람이 말하면 잘 생각해서 말해. 여자가 울고 있는데 그걸 보며 스릴러 생각이 나와? 왜 그러냐?”

도은혜는 자신 얘기가 나오자 이찬을 흘겨 봤다. 
강훈이 김종석을 흉내 내 굵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대답 좀 하지. 찬.”
“....예.”
“더 크게!”
“예!”

이찬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새된 대답에 모두가 키득키득 웃었다. 
주리빈이 웃다가 이찬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표정을 싸늘하게 바꿨다.
이제는 이찬을 피하지 않았다. 
“째려보면 어쩔 건데? 앙! 나 우는 거 보고 만화를 생각해? 당신은 집에 엄마도 누나도 없어?”
주리빈이 공격적으로 나가자 도은혜가 박수쳤다.

“근데 왜 만화얘기를 했지?”
“오덕후니까. 집에만 처박혀 컴퓨터나 하고 만화책만 뒤적이니 머릿속이 온통 만화 지. 모든지 만화로 보이고...”

강훈의 의문에 김민호가 답했다. 강훈은 이찬과 눈을 마주쳤다.
“아 맞아. 저도 이미지는 떠올렸는데 딱 그 단어가 생각 안 났어요. 그러고 보니 딱이네. 혼자 집에서 처박혀 컴퓨터하고 만화책 붙잡고 씨름하기에...”
이찬은 정색했다.

“아닌데요. 저는 명작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을 보고 감동 받아서 애니메이션을 그려야겠다. 마음먹고...”
“그래서 여자들 우는 거 보고 스릴러를 떠올려?”

도은혜가 칼날같이 말을 잘랐다. 이찬이 입 다물고 있다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닥쳐.”
김민호의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모두가 낄낄거리며 눈빛을 교환했다.
김민호의 기세가 바싹 올랐다.

“제발 묻는 말에 답변 좀 하시죠. 우리가 언제부터 왜 만화 그렸는지 물었어? 여자 우는 거보고 만화 떠올린 잔인한 심성에 대해 물었지.”
 “만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아 지금도 진짜. 제발 말의 맥을 따라가라! 제발 형 말 좀 들어라.”

주리빈은 모두가 이찬을 적대하자 용기를 냈다.  

“제가 보기에는 지능이 진짜 딸린 것 같아요.”
“저능아야. 개똥 초등학교 코스모스반 저능아.”
김민호가 한마디 보탰다.
모두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량팩과 음식물 찌꺼기를 가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주리빈이 걸레를 가지고 와서 식사 자리를 닦았다. 이찬 곁을 지나가는데 이찬이 갑자기 수저를 집어 던졌다. 남자들이 수저소리에 화장실에서 뛰어 나왔다. 김민호가 물었다.

“뭐예요?”
“모모몰라요. 가갑자기 수우저를 던졌어요.”

주리빈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도은혜의 손짓에 재빨리 도은혜에게로 갔다. 
강훈이 이찬에게 다가갔다.
“뭐야?!”
이찬은 강훈의 분노에 방금 전의 기세를 잊어버리고 어쩔 줄 몰랐다. 

“대답 안 해 이 새끼야!”
“제가 먹고 있는데...옆에서 빨리 먹으라고 압박 주니까...”

강훈이 주리빈을 쳐다봤다. 주리빈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라는데?”
“제가 한참 민감하니까....착각했을 수도...”
“뭐 이 새끼야!! 여기 너만 살아? 니네 집이야. 너만 주인이고 우리는 하인이야? 니가 민감하면 뭐든지 해도 돼? 같이 사는 사람들 신경 안 써? 너가 짱이야? 너만 위해 줘야 돼?”

강훈이 이찬의 앞머리를 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대답해. 새끼야.”
이찬은 기에 눌려 대답을 못하고 입만 어버버거렸다. 
강훈이 이찬의 앞머리를 확 밀치자 나가 떨어졌다.
이찬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김민호가 발로 걷어찼다.
김종석이 다가와 짧고 굵게 말했다.
“그만 말로 하게.”
강훈은 허리를 숙여 이찬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야 너 똑바로 들어. 니 마음대로 살고 싶어? 그럼 우리 다 죽이고 해. 우리 다 없어지면 그때 니 마음대로 해.”
주리빈이 이찬의 수저를 집어 던지며 외쳤다.
“집에서 업어 키웠어? 왜 이렇게 자기 생각 뿐야!”
이찬은 고개를 떨구고 주먹을 꽉 쥐었다. 형광등이 깜박였다. 
김종석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진정들 하고 이따 불 들어오면 용접합시다.”
이찬이 몸을 일으켜 자리를 옮기려 했다. 김종석이 손가락으로 이찬을 겨누었다.
“넌 그만 사고치고 거기 있어라.”
정전이 왔다. 김민호가 말했다.
“꼴 좋다. 찌질이.”
이찬은 사람들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만화에서 보던 비극 장면처럼 내면으로 들어가 있었다.

“너 이제 날 지켜봐 내가 만들어 갈...”
“조용히 하시지?”
“내일 많은 도전과 어려움들이 우릴 막아서도....”
“아 씨발 닥치라고...”
“언제나 난 주인공이니까...”
“닥쳐!”
“언제나 넌 병신이니까.”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을 헤치며 방공호 안을 떠돌았다.
형광등이 다시 환해졌다. 사람들이 일어섰다. 
한 쪽 벽면에 이찬이 홀로 쭈그리고 있었다. 김민호가 이찬의 쓸쓸한 모습을 보고 환히 웃었다.
“자 이제 슬슬 용접하죠.”
남자들이 플라스틱 서랍장에서 도구를 챙기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번쩍이는 용접 불빛과 매캐한 연기가 방공호 안을 오갔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 후에 강훈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웃기네. 이것 좀 봐요.”
“무슨 일이예요?”

도은혜가 출입구로 갔다. 주리빈이 따라 가다가 쭈그려 앉은 이찬을 쳐다봤다. 이찬은 자신 안의 내면 세계를 떠돌고 있었다. 주리빈은 몇 발자국 더 걷다가 뒤돌아 이찬을 봤다.
왠지 불안한 예감에….

이찬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출입문에 모여있었다. 
이찬은 살짝 고개를 들어 사람들 위치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일어났다. 
식탁을 조심스레 조용히 천천히 쓰러뜨리고는 사람들 쪽으로 돌렸다. 
형광등 스위치를 끄고 식탁을 사람들 쪽으로 밀며 엄청난 고함을 질렀다. 
 “죽어라! 악마들아!”
당황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 식탁과 강하게 충돌했다. 한데 뭉쳐있던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이찬은 손을 뻗어 계기반을 조작해 출입문을 열었다. 
자동 출입문이 미완성된 용접 부분을 찢으며 열렸다. 이찬은 식탁 다리를 양손으로 잡고 뒤로 후진 시켰다가 다시 강하게 부딪혔다. 사람들이 출입문 안으로 밀려났다. 이찬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사람들이 손으로 닫히는 문을 막으려 하자 우악스럽게 걷어찼다.  
쿵.
출입문이 굳게 닫혔다.

출입문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엄청난 성공에 도취된 이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찬은 정신을 차리고 출입문에 기대어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다. 

 “야이! 개새끼야!”
 “당장 열지 못해?!”
 “죽여 버릴 거야!”

이찬은 입술을 들어올리며 히죽 웃었다. 
계기반을 조작해 방공호 외부 출입문을 열었다. 방사능 계측기가 최대치로 상승했다. 
출입문 밖 목소리들이 비명으로 하나가 됐다.


이찬은 식량박스를 찢어서 만화를 그리고 있다. 만화 그리다가 지치면, 빈둥대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식량 팩을 탁탁 털어 가루를 받아 먹었다. 갑자기 코피를 주르륵 흘렸다.
방사능 계측기가 최상을 가리키고 있지만, 이찬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방공호 벽면 곳곳에 만화 낙서가 그려졌다. 틀린 영어 스펠링으로 크루세이더라 크게 써 놓았다. 형광등이 깜박이며 정전될 기미가 보였다. 이찬은 침낭을 펴고 잘 준비를 했다. 
형광등이 꺼지자 이찬은 침낭으로 들어가 누웠다.
“너 이제 날 지켜봐~내가 만들어 갈 내일을 많은 도전과 어려움들이~우릴 막아서도~언제나 난 주인공이니까~”
즐거운 노래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이찬은 내일 그릴 분량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이었다. 크루세이더가 신념의 길 끝에 악마들을 방사능 지옥 불 속에 몰아넣는 내용이었다. 혼자 상상하며 키득거리다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
이찬의 세상에 대답 할 사람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찬은 잠들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The END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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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길윤 16.12.11 09:33 댓글

    이찬이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움직입니다. 제가 이야기 내에서 이찬과 같은 상황에 놓였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하니 참 씁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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