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정도경 시간 중독자 일기

2015.12.31 19:3112.31

시간 중독자 일기

12.
- 시간 중독은 습관이 아닙니다. 질병입니다.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의 전광판에서 공익광고 문구가 번쩍였다.
- 시간 중독은 방치할 경우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까지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 시간 중독은 치료 가능합니다.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일 경우 바로 전화하세요.
그리고 전광판에는 증상의 묘사가 나타났다.
- 시간이 왠지 빨리 흘러가는 것 같다.
-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해도 성과가 없다.
- 머리가 멍하고 몸이 무겁다.
- 하루가 다 갔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
저런 느낌을 한 번이라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쩔 수 없었다.

73.
밤 하늘은 짙고 무거웠다. 거리에는 눈알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들이 은하수처럼 하얗게 흘러가는 밤의 거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검사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일련의 숫자를 듣고 거꾸로 말하는 문제와 미리 정해진 대로 숫자에 해당하는 다른 단어를 말하는 문제에서 그는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몇몇 문제들은 그냥 포기하기도 했다. 검사를 마치고 나서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물었다.
-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대답하기 위해서 그는 한참 생각해야 했다.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뭔가 입력하는 것을 보고 그는 황급히 대답했다.
- 한, 4개월쯤 전부터요. 4개월, 5개월…
사실은 그보다 더 전부터였을 수도 있다. 시간은 한데 뭉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1개월 전과 1년 전과 1주일 전을 구분하기란 털실 뭉치의 털을 하나씩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복잡한 작업이었다.
- 어떤 증상이 있습니까?
그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짜냈다.
- 멍하구요. 항상 기운이 없어요.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여 입력했다.
- 해야 될 일이 많은데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능률이 떨어지는 것 같구요. 아무리 해도 일이 줄어들지를 않구요.
의사가 다시 격려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뭘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쉬고 싶어요.
-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까?
의사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직장 이외의 사람들은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 혼자서 일을 다 끝내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부탁하고 그러시나요?
의사가 동정적으로 물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의사가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 솔직하게 대답하셔도 됩니다. 여기서 하시는 이야기는 모두 비밀이 보장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대답해 주셔야 제가 정확하게 진단을 할 수가 있어요. 
그가 사정을 설명하기 전에 의사가 다시 물었다.
- 자, 잘 생각해 보세요. 지난 한 달 동안 일을 다 끝내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신 적이 몇 번이나 있나요?
-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수가 없어요.
의사가 진지하게 물었다.
- 어째서죠? 사내 인간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는 설명했다.
- 팀에 저 혼자밖에 없어요. 팀장은 그만뒀고 제 사수는 짤렸거든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 저는 짤리면 안 돼요.
의사는 잠시 뭔가 생각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빠른 속도로 입력한 뒤에 그가 진찰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화면이 아니라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약 처방해드렸으니 매일 아침에 식후 30분 이내에 드시고 한 달 뒤에 다시 오세요. 1층에 내려가시면 정산하고 약 받고 다음 진료 예약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1층으로 내려갔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정산을 하고 약을 받고 예약을 했다. 정산할 때 망설였지만 영수증을 보니 이미 보험 처리가 되어 있었다. 이런 기록이 회사측에 전해지면 득 될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보험 처리를 해서 자기 주머니에서 약값과 진료비를 낼 돈이 그에게는 없었다.

-08.
뭔가 발목을 건드렸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보도블록이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 개미는 어떤 글자를 써야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 걸음 내디디자 그 앞에 놓인 보도블록이 또 고개를 들었다.
- 삼각형에서는 어떤 향기가 나지?
그는 웃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옆에 있던 보도블록이 고개를 들고 끼어들었다.
- 빨랫비누 속에 함유된 안개가 콘크리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분배를 해줘야 하지.
그리고 보도블록들은 일제히 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밤의 산책은 즐거웠다. 이전에는 이런 세계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13ŋ.
약은 붉고 작고 납작했다. 약을 먹고 나서 그는 시간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 시계도 이전보다 느리게 움직였고 그에 따라 사람들도 이전보다 느리고 부드럽고 무해해졌다. 
- 이것만… 가지고… 되겠어?
사장의 호통은 느리게 들으니 오히려 뭔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들렸다.
- 영… 국… 캐나… 다… 미…. 국…. 호…. 주…. 전….부 영….어권….이잖아? 중국… 일본…은… 어쩌고…?
마지막 어절에서 ‘어쩌고’ 뒤에 물음표가 붙으면서 ‘고-?’만 기묘하게 높이 올라가는 어조가 너무 웃겨서 그는 푸훗, 하고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 죄송합니다. 바로 작업해서 올리겠습니다.
- 빨리… 해. 프리젠…테이…션… 내일…이야.
‘빨리 해’라는 말도 반어적으로 느리게 들렸기 때문에 그는 또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일부러 고개를 깊이 숙였다. 
- 이… 새끼… 보게…. 웃… 냐?
마지막 ‘냐-?’가 도 기묘하게 솟아올랐다. 웃음을 참기 힘들어서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래도 온몸이 흔들렸다.
- 이…게… 돌았…. 나. 지금… 웃음이… 나와?
또 다시 솟아오르는 ‘와-?’ 사장이 의문문으로 말을 마칠 때마다 그는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 짤려야… 정신… 차리겠어…?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아… 알…어?
사장의 마지막 ‘알…어?’가 다시 귀를 간지르기 전에 그는 얼른 말을 끊었다.
-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작업하겠습니다.
사장실을 나와서 사무실로 돌아올 때까지 복도에서 그는 내내 혼자서 속으로 끅끅 눌러 참아가며 웃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웃으면서 의자를 끌어당기고, 웃으면서 앉고, 웃으면서 파일을 열었다. 
자신이 본래 영미권 시장조사만 담당하기 위해 채용되었으며 중국어도 일본어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은 많았고, 그는 즐거웠다.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주소창에 주소를 입력하고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그는 계속 킬킬 웃었다. 
-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옆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당연하다. 팀장은 그만뒀고 사수는 잘렸으니까. 이 구멍가게 같은 회사의 해외팀에 남은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그는 승리자였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참지 못하고 사무실이 다 울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텅 빈 사무실에 자신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그는 한참 동안 계속해서 혼자 웃었다.

87ф.
불 꺼진 건물은 고요했다. 다른 층에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층에서, 이 사무실에 그는 혼자였다. 고요와 어둠 속에서 그는 유일하게 하얗게 빛나는 화면을 들여다보며 묵묵히 작업을 계속했다. 
기계 번역기는 두 번에 한 번 꼴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을 내뱉었다. 그런 문장들을 영업에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문장들로 바꾸면서도 그는 중국어도 일본어도 할 줄 모르니 자신이 지금 제대로 수정하고 있는 건지 전혀 다른 말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걸까. 그는 문득 생각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새벽 두 시까지 혼자 앉아서 밤을 새가며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본래 자기 분야가 아닌 걸 떠맡았기 때문에 이렇게 밤을 꼬박 새가며 만들고 있는 자료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료가 실제로 프리젠테이션에 사용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은 프리젠테이션이라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알 수 없었다. 사장은 매일같이 출장을 다니고 바이어를 만났지만 실제로 일을 하는지 놀러 다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매출이 오른다고 해도 사장의 차가 더 크고 더 비싼 종류로 바뀔 뿐 그의 월급이 오르거나 회사에 직원이 한 명이라도 더 채용될 것도 아니었다.
지금 하는 일이 자기 자신에게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어떤 효용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는 작업에서 아무런 의미도 보람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사장이 시켰기 때문에 하고 있을 뿐이었다. 찍히지 않기 위해서, 잘리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찍힌다고 해도 대체 무슨 큰일이 나겠는가?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외팀에 남은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그를 해고시키면 해외팀이 사라지고 그러면 회사의 해외마케팅 부문이 공중분해된다. 회사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그를 자르면 사장이 영미권과 중국, 일본과 유럽까지 혼자서 전부 맡아서 시장조사를 할 것인가? 영어는 고사하고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그 사장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어쩌…고-?’ ‘알…어-?’ 하고 마지막 음절을 기묘하게 끌어올리던 사장의 목소리가 생각나서 다시 큭큭 혼자 웃기 시작했다.
틱,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소리를 따라서 벽을 쳐다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네 시를 가리켰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 눈을 비비고 다시 벽을 바라보았다.
네 시였다.
조금 전까지 두 시였는데.
그는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는 틀림없이 오전 네 시 이 분을 표시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네 시 이 분.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시간은 네 시 삼 분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당황했다. 서둘러 가방을 뒤졌다. 작고 납작하고 붉은 알약을 꺼냈다.
의사는 약을 하루에 한 번, 아침식사 후에 식후 30분 이내에 먹으라고 했다.
그는 다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네 시 칠 분. 
지금은 아침일까 밤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식사를 안 하고 약을 먹으면 어떤 부작용이 있는 걸까?
그러나 지금까지도 대체로 그는 식사를 하지 않고 약을 먹었다. 식사를 제대로 하고 나서 약을 먹은 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아침에 먹었는지 저녁에 먹었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 잠을 안 자게 됐고 잠을 안 자는 동안 그는 화장실에 갈 때와 샤워하고 옷 갈아입을 때만 빼고는 계속 사무실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식사도 웬만하면 사무실로 시켜서 먹었다) 아침이나 저녁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가고 자기만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그는 수시로 약을 꺼내서 먹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휴대폰 화면의 네 시 칠 분이 네 시 팔 분으로 바뀌었다.
이래선 안 된다. 가방에서 약을 꺼냈을 뿐인데 그 사이에 사 분이나 놓쳤다. 멍하니 시계를 보는 사이에 일 분이 더 지나가 버렸다.
그는 허둥지둥 포장을 뜯고 약을 꺼내서 물도 없이 꿀꺽 삼켰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컴퓨터 화면 구석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네 시 팔 분.
그는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2∇7.
작업을 끝냈을 때는 창 밖에 부옇게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최종본을 저장하고 부장과 자기 자신에게 메일로 보낸 뒤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기지개를 켜면서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서 형광등처럼 하얗게 빛을 내며 매달려 있던 뱀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뱀들이 윙크하자 사무실 불빛이 일시에 깜빡였다. 그래서 그도 즐겁게 미소를 지으며 빛나는 형광 뱀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입안이 뻑뻑했다. 세수도 하고 싶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가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숲은 울창했다. 보라색과 분홍색으로 일렁이는 나무 줄기 위에는 불타는 듯 새빨간 이파리가 가득히 우거져 바람을 따라 넘실거리고 있었다. 짙은 풀 냄새, 꽃 향기가 그를 휘감았다.
그는 당황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뒤, 문 안쪽은 그저 평범하게 책상과 의자와 컴퓨터가 있는 메마른 사무실일 뿐이었다.
- 가 봐.
천장의 형광 뱀이 지잉, 소리와 함께 그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 저기엔 진실이 있어.
- 어떤 진실?
그가 물었다.
- 불타는 진실이지.
옆에 매달린 다른 형광 뱀이 대답했다. 그리고 지잉, 지잉 소리를 내며 웃었다.
- 예쁘잖아.
첫 번째 뱀이 다시 유혹했다.
-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 저런 꽃을 볼 수 있겠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현실감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저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프리젠테이션 시간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 어차피 작업은 다 했잖아. 
첫 번째 형광 뱀이 다시 눈을 찡긋거리며 속삭였다.
- 맞아, 네가 할 일은 다 했어.
두 번째 뱀도 맞장구 쳤다.
- 그래. 
사무실 벽의 시계가 분침과 시침을 엇갈려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끼어들었다.
- 가서 좀 구경하다 와. 시간은 내가 붙잡아둘 테니까.
그는 비로소 안심했다.
- 정말로 시간을 붙들어줄 거야?
- 그럼.
시계가 장담했다. 형광 뱀 두 마리가 킥킥 소리 죽여 웃으며 지잉, 지잉 하고 눈을 찡긋거렸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 내가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예쁜 숲을 좀 보는 것도 괜찮겠지.
- 괜찮아, 괜찮아.
형광 뱀과 시계가 합창처럼 말했다.
그래서 그는 붉은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니 숲은 숲이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흐르는 모래 줄기에 불이 붙어서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고 모래 줄기는 주황색, 노란색, 옅은 분홍색, 보라색, 짙은 꽃분홍과 선홍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며 끓어 올랐다. 풀 냄새와 꽃 향기는 숨쉴 때마다 그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아름답다…
그는 가까이 다가갔다. 끝없이 솟아 오르는 모래 줄기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모래 바람이 그를 덮쳤다. 눈과 입과 코로 모래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기침과 재채기를 하며 손으로 모래를 털어내려 했다. 팔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모래는 점점 더 심하게 그를 덮쳤다. 그는 숨이 막혀서 쓰러졌다.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그는 눈을 떴다. 모래 폭풍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일어섰다.
학교의 교실이었다. 빈 교실 안에 에어컨이 열심히 찬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덜덜거리는 선풍기도 감지덕지였는데 요즘 학교는 다르네, 하고 그는 약간의 질투심을 섞어서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무실에서도 에어컨은 틀어주지 않았다. 천장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폭염주의보가 내리지 않는 한 가동되지 않았다. 겨울에도 회사에서는 ? 사장은 ? 난방을 해 주지 않았다. 직원들은 알아서 휴대용 usb 선풍기나 핫팩으로 버텨야 했다. 전기난로나 진짜 선풍기는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다고 회사에서 ? 사장이 ? 금지시켰다.
- 빈 교실인데, 전기 아깝게….
누군가 그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였다. 그 말을 들으니 그도 어쩐지 에어컨이 빈 교실에 찬바람을 뿜는 것이 몹시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는 에어컨을 끄기 위해 벽 쪽으로 다가갔다.
- 안 돼요.
발에 뭔가 걸렸다. 그는 내려다보았다. 의자가 그의 발을 걸고 있었다.
- 끄면 안 돼요.
- 어째서?
그가 의자에게 물었다.
- 더우면 잎사귀가 시들거든요.
- 무슨 잎사귀?
책상이 한 쪽으로 삐딱하게 움직였다. 그는 책상이 움직인 쪽을 바라보았다.
교탁 바로 옆에 거대한 플라스틱 통이 있었다. 짙은 푸른색의 항아리 같이 생긴 통이었다.
- 우리는 저기에 있어요.
의자가 말했다.
그는 푸른 통으로 다가갔다. 뚜껑을 열었다.

푸른 통 안에서 기차가 튀어나왔다. 기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낚아채어 교실 천장을 뚫고 날아올랐다. 동시에 술 냄새 같은 들척지근하고 역겨운 냄새가 사방을 휩쓸었다. 
- 순무는 커다랗고, 커다랗고, 커다랗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기차의 지붕 위에 매달린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차 안에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새하얀 사람들이 리드미컬하게 고개를 흔들며 노래하고 있었다.
- 순무는 커다랗고, 커다랗고, 커다랗게 자라나서…
순무가 뭔지 정확히 몰랐지만 ‘무’라는 단어를 들으니 그는 노래하는 사람들의 하얀 머리통이 어쩐지 진짜로 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를 타고 노래하는 무. 그는 웃기 시작했다.
- 순무는 커다랗고, 커다랗고, 커다랗게 자라나서… 할아버지가 뽑으러 갔었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노래하던 무들은 이제 초록색 잎사귀를 손처럼 뻗어서 손가락을 튀기며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 할아버지 등 뒤에서 할머니가 붙잡고, 할머니 등 뒤에서 손녀가 붙잡고, 손녀의 등 뒤에서 강아지가 붙잡고, 강아지의 등 뒤에서 고양이가 붙잡고...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손가락을 튀기며 신나게 노래하는 하얀 무들의 합창과 그 가사의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 영차 영차 당겼네, 커다란 순무, 커다랗고 커다랗게 자라서…
- 동준씨!
합창 사이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웃다 말고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 동준씨!
노래하는 무들을 태우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아래 까마득하게 낮은 저 아래 검푸르게 보이는 도시의 건물 꼭대기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애타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동준씨!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하게 아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이 있는 건물까지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 동준씨! 다시 생각해 봐!
- 뭘 생각해요!
그가 소리쳤다.
- 생각할 게 뭐가 있어요, 어차피…!

그리고 그는 깨어났다.

7.
당연한 일이지만 회사에서는 산업재해로 처리해 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쓰러진 것이 근무 시간 전이었고 쓰러져 있었던 장소가 사무실 안이 아니라 바깥 복도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회사 일 때문에 퇴근을 하지 못하고 근무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머물러 있어야 했다는 사정이나 사무실 바깥쪽 복도도 어차피 회사 소유의 건물 안이라는 사실이 회사 법무팀이나 인사과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이었다. 회사에서는 그를 돌봐주어야 할 아무 책임이 없었다. 입원한 지 이틀째 되던 날, 그러니까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당일 오후에 그는 회사에서 문자로 해고 통지를 받았다. 
얘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실제로 받아 보니 절망하거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웃겼다. 그는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웃다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도 계속 웃었다. 회사에 남아 있는 그의 소지품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잠시 생각하니 웃음이 잠시 그쳤다. 그러나 곧 책상 제일 아래 서랍에 모아 놓은 빨랫감 ? 나흘 내리 신은 양말과 사흘 입은 속옷, 땀냄새 풍기는 와이셔츠들의 덩어리가 떠올랐기 때문에 그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그 날 오후에 그는 퇴원했다. 사흘 이상 입원하면 환자의 자기부담금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회사에선 잘렸고 산재고 퇴직금이고 없다. 그가 쓰러져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고 소송이나 걸지 않고 당월 월급이나 일한 날까지 제대로 챙겨주면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입원처럼 쓸데없이 누워서 놀고 먹는 일에 낭비할 돈은 없었다.

8-0.
병원에서 나와서 그는 길을 건넜다. 길 건너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소주를 사려다가 그는 가격을 보고 기겁했다. 평소에, 그러니까 회사 잘리기 전에 시켜 먹던 백반집 한끼 가격의 정확히 2.5배였다. 회식이 아니면 혼자서 술 마실 시간이 없어서 편의점에서 술을 사본 지 너무 오래 됐다. 기호식품 가격이 전부 비싸졌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천정부지로 올랐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편의점을 나와서 그는 옆에 있는 허름해 보이는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슈퍼마켓에서는 똑같은 술인데 다만 몇 백 원이라도 더 쌌다. 그는 두 병 사서 비닐봉지에 넣어 들고 나왔다.
슈퍼마켓을 나와서 그는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집에 가 봤자 아무도, 아무 것도 없었다. 텅 빈 냉장고와 먼지 쌓인 식탁이 있을 뿐이었다. 월세는 냈던가? 전기는 안 끊어지고 수도는 계속 나올까? 집에 들어가본 지가 너무 오래 돼서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본가로 돌아가면? 그건 안 된다. 부모님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의 한숨과 어머니의 잔소리는 벌써부터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게 진작 누나네 가게에서 일이나 도와주라니까…’ 그러나 누나의 가게도 다달이 본사와 건물주한테 들어가는 돈을 빼면 남는 게 거의 없다고 했다. 내년에 애들 학교나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누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장가는 언제 들 거냐는 어머니의 푸념에 누나는 옆에서 ‘요즘 같은 세상에는 차라리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는 게 최고야’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서른 일곱이었다. 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나서 이번이 아홉 번째 직장이었다. 그나마 이번이 3년으로 가장 오래 버텼고 다른 직장에서는 일 년이나 이 년, 제일 짧게는 3개월 일하고 잘린 적도 있었다. 
회사에서 경력증명서는 떼 줄까?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을까? 앞으로는 어떡하지? 정규직으로 취직해서 어딘가에서 안정된 삶을 쌓아 올리고 싶다는 소망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이제 시간 중독자라는 딱지까지 붙었으니 비정규직이나마 사무직 취업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새벽에 인력 시장이라도 나가는 쪽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이런 걱정 근심들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 온몸을 뒤덮었다. 사무실에 두고 온 작고 납작하고 붉은 약이 그리웠다. 약을 먹으면 그가 알지 못했던 세상이 열렸고 모든 사물이 그를 위해 웃어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무실에 두고 온 가방 속에 있는 약만은 되찾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를 들여보내 줄까. 쉽사리 소지품을 가져가게 해 줄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그는 회사 근처까지 걸어왔다. 망설이다가 회사 앞 골목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비닐봉투에서 소주를 꺼내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술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빈 속에 마시는 술이라 더 빨리 취기가 올랐다. 한 병을 다 마시고 두 병째를 땄을 때 그는 이미 완전히 취해 있었다.
- 쳐들어가서 가져오지 뭐.
그는 소주병을 향해 중얼거렸다.
- 내 물건 내가 가져오겠다는데 누가 막을 거야? 
약을 먹을 때와는 달리 이제 소주병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말해 보았다.
- 내가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내 가방 내가 가져오겠다는데? 내 약, 내 가방, 내 물건… 내가 가져오겠다는 거잖아?
소주병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주장을 소리 내어 되풀이하다 보니 그는 어쩐지 없던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래, 내 물건인데, 내가 도둑질을 하겠다는 건 아니잖아?
그는 중얼거리면서 소주병을 여전히 소중하게 손에 쥔 채로 일어섰다. 골목을 나와서 당당하게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취해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회사를 향해 걸어갔다.

9.
사람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가 없었다. 사람들은 차도 위를 가득 메우고 걸으면서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 비... ...폐하라!
- 고...정 ....하라!
- 해고는 살인이다!
앞의 두 가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마지막 구호는 그의 귀에 칼날처럼 날아와서 꽂혔다. 동시에 회사 일 때문에 약까지 먹어가며 며칠씩 ? 몇 주, 어쩌면 몇 달일지도 모른다 ? 잠도 못 자고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는데 병원에서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은 자신의 처지가 새삼 쓰라리게 다가왔다. 돈이 없어서 아직 다리가 휘청거리는데도 병원에서 억지로 퇴원해야 했고, 사무실에 남아 있는 자기 물건을 가지러 가는데도 자신을 그토록 착취하고 단물 빠진 껌 뱉듯이 그 회사에서 들여보내줄지 알 수 없어서 용기를 내기 위해 밥보다 비싼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셔야 했다. 
- 비정규직 철폐하라!
행진하는 사람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 고용안정 보장하라!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가 점점 더 명확하게 들렸다.
- 해고는 살인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쳐들며 함께 외쳤다. 
한 손에 소주병을 그대로 든 채 그는 취기와 울분에 떠밀려 홧김에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10.
시위대는 경찰 방패 앞에서 막혔다.
-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도로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습니다. 즉시 해산하십시오.
몹시 거슬리는 목소리가 술에 취한 그의 머리 위쪽 어딘가에서 울렸다.
- 즉시 해산하십시오. 해산 명령 1차 발효합니다. 도로를 불법 점거하고 있습니다. 시위대 여러분은 즉시 해산하십시오.
- 해고는 살인이다!
경찰 방송에 대답하여 누군가 외쳤다. 그도 팔을 쳐들며 함께 외쳤다.
- 해고는 살인이다!
그는 손에 아직도 두 번째 소주병을 들고 있었고, 병에는 소주가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소주병을 든 팔을 치켜 올리자 소주가 튀면서 그의 바로 옆에 서 있던 경찰의 모자를 적셨다. 경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 시위대가 경찰을 공격한다!
누군가 외쳤다.
- 경찰 눈에 염산을 뿌렸다! 
순식간에 방패가 그를 둘러쌌다. 
- 아니야!
그는 외쳤다.
- 아니라고! 그거 소주야! 
그는 팔을 휘둘렀다.
- 이거, 여기 보라고! 소주라니까!
경찰을 향해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테러범으로 긴급 체포되었다.

11.
-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는 과로 끝에 쓰러져서 문자로 해고통보를 당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술에 취해 우발적으로 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지금 실형을 선고하시면 재취업의 꿈이 좌절되니 부디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정에서 국선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초범이었다. 이전에 경찰서 신세를 진 적은 평생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심신미약 상태'였고 계획적으로 시위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으니 테러방지법이 생기기 전에 옛날 같았으면 그냥 훈방되었을 사안이라고 국선 변호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는 훈방되지 못했다. 술에 취해 여중생을 성폭행해서 임신시킨 범죄자도, 술에 취해 지나가던 청년을 이유 없이 벽돌로 찍어서 죽인 범죄자도, 술에 취해 운전하다가 할아버지를 치어 죽인 범죄자도 모두 차례로 석방되었지만 그는 석방되지 못하고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았듯이 이번에도 빈 감방에 혼자 남았다. 똑같이 술에 취해 있었지만, 술에 취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그가 소주병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테러범이기 때문이었다.

12.
- 시간 중독은 습관이 아닙니다. 질병입니다.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의 전광판에서 공익광고 문구가 번쩍였다.
- 시간 중독은 방치할 경우 당신과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까지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 시간 중독은 치료 가능합니다.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일 경우 바로 전화하세요.
그리고 전광판에는 증상의 묘사가 나타났다.
-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해도 성과가 없다.
- 하루가 다 갔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
- 자꾸 다른 사람에게 일을 부탁하게 된다.
- 타인의 시간을 상습적으로 빌려 쓰려 한다.

여기다. 이곳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끝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쩔 수 없었다.

13.
그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제복을 입은 경찰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 무슨 일이십니까?
경찰이 딱딱하게 물었다. 
그는 당황했다. 건물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경찰이 막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머뭇거리자 경찰이 다시 물었다.
- 농성장 관련자이십니까?
- 네.
뭔지 모르지만 그는 어쨌든 대답했다. 경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 가족이 아니면 접견은 금지입니다. 식사 전달입니까?
- 아니, 저기...
그는 말을 더듬었다. 경찰이 강경하게 말했다.
- 식사 전달이 아니면 돌아가십시오. 가족이 아니면 접견은 금지입니다.
- 아니, 나는....
그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경찰이 그의 팔을 잡았다.
- 놔요, 이거! 왜 이래요!
- 돌아가십시오.
- 아, 이것 좀 놓고 말해요!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 야, 동준아!
경찰과 그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가 목소리의 주인공을 완전히 알아보기 전에 초췌한 남자가 말했다.
- 내 동생이에요. 괜찮아요. 놔 주세요.
경찰은 초췌한 남자와 그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 동생이라니까요. 가족이라고요.
청년이 다시 말했다. 경찰은 말없이 그의 팔을 놓아 주었다.
초췌한 남자가 다가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 동준아! 
남자는 반갑게 손을 꽉 잡고 그를 끌고 갔다. 경찰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남자가 그의 손을 놓아주고 속삭였다.
- 진짜 오랜만이네.
그제야 그는 알아보았다.
선배였다. 그가 사무실에 혼자 남기 전에 마지막으로 함께 일했던 그의 사수였다. 선배는 그러다가 입사 3년 11개월차에, 그러니까 정규직 전환되기 한 달 전에 '실적 부진' 명목으로 해고당했다.
- 선배 여기서 뭐 해요?
그가 물었다. 설마 다른 곳도 아닌 국가행복안전보장위원회 건물 옥상에서 선배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고공농성.
선배가 대답하고는 씨익 웃었다.
- 벌써 1193일째다.
말하면서 선배는 옥상에 설치된 전광판 위를 가리켰다. 까마득하게 보이는 전광판 꼭대기에 천막 끝이 언뜻 보였다.
1193일 ... 길다.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그는 순간 감이 오지 않았다. 선배가 다시 웃으며 설명했다.
- 3년 3개월 1주일째 됐어. 그 때 회사 짤린 뒤로 다른 비정규직 해고자 분들 만나서 같이 농성 시작했거든.
3년 3개월. 전혀 몰랐다. 선배가 해고당하고 혼자 팀에 남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업무를 짊어지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이 국가행복안전보장위원회에 와서 진료를 받고 약을 타 가면서도, 바로 그 건물 그 옥상의 전광판 위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그 어떤 언론에서도 보도해주지 않았다.
- 그런데 동준씨는 여기 웬일이야?
선배가 물었다. 
그는 한 순간 말이 막혔다. 
- 회사 짤리고 빵에 갔다 왔어요.
그는 잠시 생각한 뒤에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했다.
선배는 웃었다.
- 무슨 소리야? 빵이라니? 
- 감옥. 저 테러범이에요.
선배는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 동준씨가? 테러?
그는 웃지 않았다. 선배도 웃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 진짜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의 얼굴이 한층 더 진지해졌다.
- 왜요? 어쩌다가?
그래서 그는 이야기했다.

14.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 동지 중에도 시간 중독 판정 받아서 짤린 사람 있어.
선배가 말했다.
- 시간 중독 그거 다 가짜다. 사람이 잠도 자고 밥도 먹고 휴식도 해야지 일을 하는데 쉬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게 하려고 만들어낸 거야. 지쳐서 쉬고 싶은 게 무슨 병이라고...
그는 목이 턱 막혔다.
충격이었다. 사람은 잠도 자고 휴식도 해야 한다. 지쳐서 쉬고 싶은 건 병이 아니다. 그 당연한 생각을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 명색이 국가 '행복안전 보장' 위원회라면서 멀쩡한 사람한테 각성제나 처방하고... 
그는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을 기억했다.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정확하게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환각들, 속삭이던 목소리와 숲에서 피어나던 모래 꽃들...
- 저 새끼들 제일 악독한 게 뭔지 알아? 우리끼리 싸움을 붙이는 거야.
선배는 화가 나서 계속 말했다.
- 사람이 지쳤으면 당연히 쉬게 해 줘야 되는데 그걸 좀 덜 지친 사람한테 더 지친 사람은 시간 중독자다, 병이다, 중독이다, 약 먹으면 치료되는데 저놈이 일부러 치료 안 받고 너한테 달라붙어서 자기 일을 미루면서 네 시간을 빨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속인다고. 
속인다. 나를 속였다. 나는 속았다.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 그 때 우리 팀만 해도 최소한 일고 여덟 사람이 할 일을 우리 둘이서 하고 있었으니까 도저히 기한도 분량도 맞출 수가 없었는데... 나까지 나갔으니까 당연히 동준씨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지. 그러면 사람을 더 뽑아야지 그걸 무슨 시간 중독이라고... 
그는 선배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나는 왜 여태까지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을까. 나는 왜 약까지 먹어가면서 그 일을 혼자서 감당했을까. 나는 왜...
- 우리랑 같이 농성하자.
선배가 웃으며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
- 여기까지 왔으니까 같이 올라가자. 동준씨도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잖아?
마지막 말에 그는 정신이 들었다. 
- 농성이 3년 3개월 1주일째라고요?
그가 물었다. 선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응. 그 동안 경찰이 천막도 찢고 밥도 안 주고 물도 끊고 별 일이 다 있었지만 그래도 부당해고자 연대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그가 선배의 말을 가로막았다.
- 아무도 몰라요.
- 응?
- 여기서 고공농성하는 거 아무도 모른다고요. 방송에서 보도도 절대 안 해 주고, 이 건물 사람들 알 텐데 나 여기 다니던 삼 개월 동안 아무도 고공농성 '고'자도 꺼낸 적이 없어요.
- 그거야 당연하지.
선배가 말했다.
- 기성 언론은 이미 다 장악 당해서 부당해고 당한 우리 근로자쪽 이야기는 아무도 안 들어줘. 그래서 우리가 대신 대안 언론과 인터넷으로...
- 인터넷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 그리고 선배는 부당해고 당한 근로자겠지만 난 테러범이에요. 내가 여기서 농성한다고 복직될 것 같아요?
- 동준씨... 그렇지만...
선배가 뭔가 반박하려는 순간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제복을 입고 방패를 든 경찰이 쏟아져 들어왔다.
- 박동준!
귀에 거슬리는 확성기 음향이 고막을 찢을 듯이 외쳤다.
- 불법 테러 모의 혐의로 너를 체포한다. 너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네가 하는 발언은...
- 미안합니다.
그는 중얼거리면서 선배의 손을 마지막으로 한 번 꽉 잡았다.
그리고 선배가 그를 붙잡기 전에, 경찰이 그를 붙잡기 전에, 그는 옥상 난간으로 달려갔다.
- 동준씨!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선배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는 난간에 기어올랐다.
- 동준씨! 다시 생각해 봐!
그는 몸을 던졌다.
- 생각할 게 뭐가 있어요, 어차피…!
떨어져 내리면서 그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건물 위를 향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댓글 3
  • No Profile
    유이립 16.01.03 22:33 댓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리플을 달아야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하고 조회하더라구요.

    흥행을 위한 리플악역 을 달게요.

  • 유이립님께
    No Profile
    정도경 16.01.04 14:30 댓글

    감사합니다 ㅠㅠㅠ 리플이 너무 슬퍼요 ㅠㅠㅠㅠㅠ 흥행을 위해 ㅠㅠㅠㅠ 으허허헣ㅇ헝

  • No Profile
    오후 16.02.03 18:28 댓글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분류 제목 날짜
아이 아이템 획득2 2016.03.01
유이립 문예창작과 에이스2 2016.03.01
해망재 뺑덕어멈 수난기5 2016.03.01
곽재식 케플러 452B 행성에서 구한 기차표5 2016.01.31
정세랑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10 2016.01.31
pilza2 뚜공! 우리의 지구1 2016.01.31
유이립 우리는 하나1 2016.01.31
미로냥 궁천극지(窮天極地) 2016.01.31
정도경 시간 중독자 일기3 2015.12.31
전삼혜 고요하고 거룩한3 2015.12.31
곽재식 천사가 앉았던 의자(본문 삭제)5 2015.12.31
유이립 화초가5 2015.12.31
곽재식 조용하게 퇴장하기 (본문 삭제)8 2015.11.30
해망재 검은 공익들 2015.11.30
karidasa 아직은 끝이 아니야 2015.11.30
유이립 장난감 졸업식 2015.10.31
곽재식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워2 2015.10.31
해망재 감겨진 눈 아래에 2015.10.31
해망재 명당을 찾아서 2015.09.30
유이립 머니게임 2015.09.30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35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