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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립 전달자

2015.08.31 23:4408.31

 “저는 여러분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저랑 좀 더 논의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전신주 기둥에 한 남자가 묶여 있었다. 오래 전에 파괴된 건물 잔해가 널린 폐허에서 식인종들은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식인종들의 피부는 까무잡잡하거나 이상 할 정도 밝은 황색이었다. 방사능 오염 기형 인들이었다. 거의 대부분 곱슬머리였지만 일부는 가시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기둥에 묶인 남자는 시선을 끌기 위해 과장된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세계 3차 대전 후 통일 대한민국 재건 위원회가 설립됐다는 건 아십니까?”

 식인종들은 대답 없이 칼을 숫돌에 갈거나 커다란 솥에 부지런히 물을 채웠다. 남자는 실망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뜨고 식인종들을 살폈다. 식인종들의 식사 준비하는 손짓이나 턱 방향을 보고는 자신의 얘기가 조금씩 먹히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남자가 입을 벌려 말하려 했다. 상체를 벗은 식인종 하나가 다가왔다. 남자는 공포에 압도당해 입을 뻐끔거렸다. 식인종은 남자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는 남자의 뱃살을 만지고 다시 솥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잠시 눈을 감고 안전하고 평온했던 생활을 떠올렸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불안한 감정이 잦아들었다. 친구나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얘기하듯 크게 혼잣말 했다.

 “예. 저는 통일 대한민국의 특사로 여러분들에게 유익한 제의를 하려 왔습니다. 특사입니다. 특사는 많은 권한이 있습니다.”

 식인종들의 움직임이 허공에 멈춰 섰다. 남자는 자기가 만들어 낸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낙담하지도 않았다. 잠시 눈에 힘을 빼고 넓게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안 좋은 판단이 나오자 남자는 이를 꽉 물고, 발뒤꿈치를 전신주에 바싹 붙였다. 식인종들은 일제히 비명인지 고함인지 분간 못 할 괴성을 질렀다. 남자는 마른입 안을 짜내어 침을 삼켰다. 식인종들은 분을 못 이기고 땅을 박차거나 칼을 휘둘러 저희들끼리 금방이라도 싸울 듯 분위기를 달궜다. 식인종 중 하나가 흥분된 걸음으로 남자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식인종이 휘두른 반달 칼이 남자의 턱 바로 아래에서 멈췄다. 남자는 칼을 잊고 말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을 칼날에서 떼어냈다. 허공을 쳐다보면 거만해 보고, 아래를 쳐다 보면 약해 보인다. 고개를 돌리는 것은 위험했다. 칼을 휘두른 식인종 쪽을 쳐다보되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했다. 상대의 흥분에 감염되지 않으려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겠죠. 여러분은 참 특이하다. 하지만 저와 통일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부는 다르게 생각 합니다. 여러분은 식성에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민이며, 새로 재건 될 정부의 중요한 일원이십니다.”

 칼을 휘두른 식인종이 얼굴을 바싹 들이 밀었다. 식인종의 뱃속 깊은 곳에서 나온 듯한 썩은 입 냄새가 역겨워도 남자는 표정을 절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즈어엉 말이여? 리얼리?”

 사투리도 아니고 어린 애 옹알이도 아닌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남자는 말하는 타이밍에 맞춰 턱 끝을 강하고 빠르게 돌려 식인종과 눈을 똑바로 맞췄다.

 “정부의 대변인으로 하늘에 대고 맹세합니다.”

 식인종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 목에서 치우지 않은 칼끝이 흔들렸다. 식인종이 쳐다본 밤하늘에 핵전쟁 후 남겨진 녹색 핵구름과 둥둥 떠다니는 재들이 보였다. 잿더미가 된 대한민국은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재들이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었다. 식인종이 칼을 든 손을 회수했다. 식인종은 통일 대한민국 특사의 눈을 들여다봤다. 특사는 지금 당장 풀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목소리를 진지하게 낮췄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대해 믿어본 적이 있으시지요? 제가 그 믿음으로 당신을...여러분들을 데려가겠습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은 핵전쟁 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만들어 낸 신조어였다. 부정부패, 타락, 모순, 계층갈등으로 혼란했던 과거는 전쟁 후 모든 게 완벽하고 배가 불러 불평할 일밖에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로 미화됐다.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눈앞의 식인종 뒤에서 울렸다.

 “겅지말! 겅지말! 라이어 라이어!”

 특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계속 욕설이 들려왔다. 식인종은 특사의 얼굴이 구멍이 나도록 빤히 쳐다보다가 욕설이 들려온 쪽으로 외쳤다.

 “이 놈의 눈을 봐아! 오서 봐라고! 진심을 말하고 있어. 트루! 뜨루!”

 눈앞의 식인종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식인종이 나타났다. 붉은 색 가슴털이 너덜너덜한 티셔츠를 뚫고 나와 있었다. 앞니는 기형적으로 크게 발달해 입을 다물어도 아랫입술을 덮을 정도였다.

 “이 새끼 말은 다 거짓. 개새끼. 손 오브 비취!”

 “너 그 따구로 말하면 다이! 죽어!”

 “죽인다! 수어사이드 유어셀프. 짜살!”

 “병신! 바스타드!”

 식인종들은 특사를 놔두고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식인종은 붉은 털보다는 작아도 조금도 지지 않으려 바락바락 대들었고, 붉은 털은 말싸움보다는 특사에게 온 관심이 쏠려 있어서 건성으로 임했다. 붉은 털은 귀찮은 기색으로 식인종을 밀쳤다. 나가떨어진 식인종은 반달칼을 들고 붉은 털을 향해 달려들었다. 붉은 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쪽 팔을 내밀어 반달칼을 막아냈다. 식인종이 전력을 향해 반달칼을 휘둘러도 붉은 털의 팔에 잔 상처만 낼 뿐 깊게 들어가지 못했다. 여유롭게 막아내던 붉은 털도 더 이상 참지 못 하겠다는 듯 허리를 숙이고 식인종에게 태클을 걸었다.

 붉은 털은 식인종을 깔아뭉개고, 양손으로 식인종의 목을 잡았다. 식인종은 반달칼을 휘둘렀지만 붉은 털에게 닿지 않았다. 붉은 털이 팔에 힘을 주자 식인종의 반달칼이 느려졌다. 다른 식인종들은 싸움을 구경하려 우르르 몰려 둥글게 섰다. 특사는 식인종들의 횃불에 비친 흉악한 외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식인종들의 둥글고 커다란 눈들이 휘번덕거렸다. 어떻게든 저들을 대화로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행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붉은 털이 손아귀를 꽉 쥐자 식인종의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붉은 털이 이빨을 드러내며 특사에게 말했다.

 “마이 푸드. 너 죽었어! 다이!”

 특사는 자신이 단칼에 죽지 않기를 빌었다. 입이 가장 마지막으로 해체된다면 죽기 전에 어떻게든 식인종들을 설득하리라 각오했다. 공기를 찢으며 뭔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전신주 근처에 오더니 수많은 불씨를 내뿜으며 폭발했다. 노란 불빛이 사방에 가득 찼다. 식인종들은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숙였다. 특사는 빛을 피해 눈을 낮게 깔며 소리에 집중했다. 폭발음이 아직 공기 중에 떠돌았지만 발자국 소리를 숨길 수 없었다. 누군가가 전신주의 밧줄을 풀고 특사를 잡아 당겼다. 특사는 풀 때부터 기다렸던 달리기를 시작했다. 노란 빛이 점점 사라져 가자 식인종들은 눈을 떴지만 특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누군가는 특사를 데리고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익숙한 듯 빠르게 달렸다. 식인종들에게서 멀어지자 누군가는 걸음을 멈췄다.

 “여기는 전쟁 전 공업지대였지요. 전쟁 후 자체적으로 식량을 생산할 수 없자 생존자들이 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그들의 후손들 역시. 도를 넘은 상황에서 제대로 된 문명이 남을 리 없죠. 저들은 언어도 잃었습니다.”

 특사는 자신을 구해준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어둠을 몰아내려고 부싯돌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지자 누군가가 말렸다.

 “안돼요. 그들은 밤눈이 밝아요. 마치 짐승 같아요. 조그만 빛이라도 금방 찾아냅니다.”

 “저를 구해주신 분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제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삶 의미 따윈 관심 없어요. 하는 일에 관심 있죠. 정부 특사라면서요?”

 “예. 저는 통일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 영토 대통합 임무를 수행하는 특사 입니다.”

 누군가는 대꾸하지 않았다. 특사는 상대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한참동안 관찰하는 것을 느꼈다. 침묵이 계속 이어지자 특사가 입을 열었다.

 “누구 길래. 이 험한 곳에 계십니까?”

 “아까 저들과 별 차이 없는 사람입니다.”

 식인종들과 같다는 말에 특사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부라면 국민을 보호 할 의무가 있지 않나요?”

 특사는 대답 없이 슬그머니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철사로 만든 너클을 찾았다.

 “정부가 재건 됐다면 왜 국민을 보호하지 않습니까? 저들은 한 달에 네 번 꼴로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특히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을 먹는 걸 좋아합니다. 언제까지 저 식인종에게 도망 다녀야 할까요?”

 특사는 너클을 쥔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손짓을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 현재 통일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부는 파괴된 국토 복구와 각 지방과의 원활한 연결을 위해..”

 “국민 보호는 언제 하냐니까?!”

 특사는 눈앞의 누군가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와의 사이에 어둠이 깔려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느껴지는 기척은 바싹 곤두 서 있었다. 특사는 너클 낀 손을 조심스레 주머니에서 빼냈다.

 “반드시 보호할 겁니다. 정말 입니다. 믿어 주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코로 거칠게 숨 쉬는 소리만이 어둠을 건너 특사에게 전해졌다. 특사는 감정을 고양시켜 진실성 있게 들리려 연기했다.

 “통일 대한민국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언제?!”

 누군가는 특사의 말을 가로 막았다. 특사는 대답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대답을 기대하는 느낌을 잡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한 짓을 했군. 공허한 말만 늘어놓는 정부가 있어봐야 뭐 해.”

 누군가는 몸을 돌리고 특사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특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날이 밝자 특사는 잠에서 깨어 주변을 살펴봤다. 사방팔방, 시선이 닿는 모든 방향이 탁 트인 곳이었다. 바닥은 수많은 건물들의 시멘트 부스러기와 철근들이 뒤덮여 있었다. 특사는 전쟁 전 건물의 일부였던 잔해들을 밟으며 나아갔다. 특사는 자신이 맡은 임무에 대해서 후회했다. 이 국토를 언제 회복 시켜 다시 나무와 꽃이 자랄 수 있게 하겠나? 1000년은 더 걸릴 일 같았다. 국토 복구의 전제는 국민 대통합이었다. 사람들을 모아야 통일 대한민국 재건 정부의 정통성을 알릴 수 있지만 어제의 일로 봐서는 이것 또한 1000년은 걸릴 것 같았다.

 특사는 자신의 생각에 집중한 나머지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철근의 날카로운 끝을 피하다가 생각에서 벗어났다. 특사는 자신의 발자국 외 소리를 들었다. 식인종들이 생각나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쪽도, 서쪽도 아무도 없었다. 정면을 바라봤지만 끝없이 깔려진 시멘트 잔돌들밖에 없었다. 특사는 작은 거울 조각을 꺼내 얼굴을 비춰봤다. 피곤해 보이는 붉은 눈과 초췌한 얼굴이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환청이나 이명을 들었다 판단한 순간.

 “예. 드디어 이번 게스트가 저를 눈치 챈 것 같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거울 조각을 떨어뜨렸다. 특사는 얼른 허리를 숙여 귀중한 거울 조각을 들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허리를 숙일 때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지만 주위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을 낮게 쉬며 온 몸의 신경을 집중하며 천천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어디선가 낮은 지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낮추고 시멘트 잔돌들에 귀를 갖다 댔다. 일정하게 낮은 소리로 웅웅거리거나 자자작 튀는 소리가 들렸다. 특사는 침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디선가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전쟁 후 기술을 배웠던 사람들이 문명을 복원시키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사람들인가? 그런데 왜 숨어 있는 것일까?

 특사가 일어났다. 그때 뒤를 쫓아오는 무언가도 움직였다. 특사는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엇인가가 자신을 따라 행동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특사는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뛰면서 고개를 돌려 살폈으나 아무것도 따라오지 않았다. 시멘트 잔돌들은 특사의 걸음에 땅에서 솟아올랐고, 회색 먼지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고개를 재빨리 반대편으로 돌리니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앞을 봤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특사의 이마를 후려쳤다. 특사는 사지를 쫙 펴며 기절했다. 누군가는 커다란 뭔가를 메고 있었는데 그것에는 수많은 전선과 방송 케이블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뭔가의 상단에는 날카롭고 얇은 금속 막대가 솟아 있었다. 안테나였다.

 “청취자 여러분 안테나 상태가 좋지 않아 음질이 좋지 않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동 방송국, 비에이에스 티비에서 디제이의 게스트와의 대담은 오늘 저녁 7시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세 시간에 한번 씩 현재 시간을 방송할 터이니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사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뱃살이 옷 밑으로 튀어나온 사내가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특사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의자에 묶여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방송 전 입니다. 그 의자는 매우 귀한 것이고, 게스트 전용 입니다.”

 디제이는 특사에게 다가가서 솜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누구시고 지금 뭐하시는 거죠?”

 특사가 물어도 디제이는 바쁜 손놀림으로 자신의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특사는 대답을 포기하고 주변을 살펴봤다. 성인 어른 팔뚝만한 마이크 두개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자신의 바로 앞, 디제이 자리로 추정되는 의자 옆에는 조그만 믹서가 놓여 있었다. 디제이는 작업을 마치고 어두운 방구석으로 갔다. 방안에는 마이크 앞에 조그만 촛불이 있을 뿐 다른 조명은 없었다. 구석에 뭔가를 끌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특사는 시야가 어두워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자세히 보려 묶인 몸을 최대한 앞으로 내밀었다. 환하고 노란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와 특사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특사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조용히 하십쇼. 신성한 방송을 하기 전 입니다. 옛날에는 방송을 하기 전 화장을 하고 조명을 비춰 외모를 가꿨습니다. 깔끔한 외모는 전파를 타고 청취자들에게 전해집니다.”

 특사의 눈이 조명 기구에 적응되어 다시 떴을 때, 디제이가 특사를 기절시킬 때 멘 뭔가를 봤다. 그것은 무전기였다. 성인 남자 등 전부를 덮을 만한 크기의 무전 송수신 장치. 디제이는 무전기에서 전선을 하나 빼어 믹서에 물렸다. 마이크 두개의 선이 믹서에 연결됐음을 확인하고 특사에게 주의하라는 듯 손가락 질 했다.

 “방송에서는 절대 비속어, 욕설, 근거 없는 타인 비방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방송 스타트.”

 디제이는 믹서와 무전기를 켰다. 마이크를 끌어다 특사와 디제이 사이에 놓았다.

 “안녕하십니까? 이동 방송국, 비에이에스 티비에서 여러분에게 라디오 방송을 보냅니다. 오늘 제가 잡은 게스트는..”

 “잠깐만요. 티비라면서 왜 라디오 방송을 해요?”

 “게스트 분께서 진행 순서를 어기시는 군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게스트 분. 카메라가 없으니 라디오 방송을 하는 게 당연히 맞지 않아요?”

 “화장과 조명은 왜 했어요?”

 “지금 우리의 몸가짐과 얼굴 상태가 전파를 타고 청취자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방송은 진실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특사는 당당한 대꾸에 할 말을 잃었다. 디제이는 신이 난 듯 마이크 앞에서 입을 열었다.

 “매번 방송 할 때마다 방송이 처음인 게스트 때문에 늘 죄송함으로 먼저 시작하는 군요. 게스트 분에게 묻겠습니까? 누구 십니까?”

 “그걸 묻는 당신은 누구 십니까?”

 디제이는 특사의 행동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동 방송국, 비에이에스 티비의 디제이 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내의 유일한 방송국 입니다.”

 특사도 지지 않으려 차갑게 웃었다.

 “비에이에스의 의미가 뭐니까?”

 “비기닝 어게인 스페셜 방송이라는 뜻 입니다. 마지막 에스는 단어 수를 맞추기 위해 넣은 것입니다. 옛날에 방송은 전부 영어로 세 글자 인 것은 아십니까?”

 “이걸 듣는 사람이 있기나 해요?”

 “고정 청취자 이만 명, 뜨내기 청취자 삼천정도 될 겁니다.”

 특사의 얼굴에 비웃는 웃음이 싹 사라졌다.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하고 침을 삼켜 목 상태를 돌봤다.

 “예. 저는 통일 대한민국 정부의 재건 위원회가 임명한 국민, 영토 대통합 특사 입니다. 비에이에스 방송 청취자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디제이는 마이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들으셨습니까? 잠시 게스트와의 대담을 중단하고 특종을 알려 드립니다. 지금 제 앞에 통일 대한민국 정부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게스트와의 대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정말인가요?”

 특사는 지금까지와 다른 시선으로 디제이를 바라봤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에 대해 품는 호의의 시선이었다. 기품 있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또박또박 말했다.

 “예. 하늘이 도와서 이렇게 멋진 디제이 분과 만나게 되다니 행운 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도 북부 국민이 모여 통일 대한민국 정부를 세웠습니다. 북한도 물론 편입시켰습니다.”

 “어떻게 북한에 가셨나요?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나요?”

 3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였던 북한은 유엔에 가입한 강대국 숫자만큼 핵 공격을 받았다.

 “정부의 행정부원 한명이 강원도를 넘어 북한을 보았답니다. 북한으로 좀 더 들어가 보니 아무것도...남아 있지 않아서..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북한의 주권을 주장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대한민국 정부 재건 위원회는 북한을 편입 시켜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판단했습니다.”

 특사는 자신의 말이 반은 미친 소리라는 것이 양심에 찔렸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주장할 사람이 없다고 전부 다 확인 하셨나요? 북한 안으로 얼마나 가보셨나요?”

 차마 300걸음이라 대답할 수 없었다. 북한 흙들은 멀리서 봐도 오염된 진한 녹색이었고, 팔다리가 하나씩 더 달린 기형 동물들이 강원도로 내려 왔다. 300걸음이면 엄청난 용기였다.

 “그것은 국가 기밀 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일을 함부로 밝힐 수 없습니다.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만 북한은 확실히 통일 대한민국 정부 내에 들어왔습니다.”

 “누가 정부를 뽑았습니까?”

 특사는 자신 있는 부분이 나와 밝게 웃었다. 디제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힘차게 말했다.

 “3차 대전 전에 정부 중요 요인들이 지하 벙커로 피신했습니다. 전쟁 후 30년이나 지나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그 분들은 서울 생존자들을 훌륭한 인재로 교육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전쟁 전에 서울에 집중된 행정, 법률 체계들은 벙커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다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통일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 전 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습니다.”

 “벙커 안에 방송에 관한 책이나 장비는 없었나요?”

 특사는 디제이를 현혹하려 말을 흐렸다.

 “벙커 안에 비상 방송 장비들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뭐 제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어떤 상황에서라도 어디라도 방송 전파를 보낼 수 있다고 하던데...”

 디제이는 입맛을 다셨다. 특사는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디제이를 넘어오게 하려 방송 장비에 대해 더 말을 지어 내려 했다. 입을 연 순간 디제이가 번개 같이 말을 가로 막았다.

 “전 누가 정부를 뽑았냐고 물었지. 정통성에 대해 묻지 않았습니다. 이 전 정부의 무능함은 국민을 제대로 돌보지 못 했습니다. 그런 정부의 유산이 필요할까요?”

 “......인천, 서울, 경기도 북부 지역 국민 3만 5천명이 투표했습니다. 투표율 74.5퍼센트 였습니다. 걸어서 투표할 수 있는 인원은 전부 다 투표에 참가했습니다. 이런 국민의 열망이 필요 없습니까?”

 “당신을 보면 옛날 정치인들이 떠오릅니다. 그들도 하나같이 말을 모호하게 하고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감성을 내세우지 말고 이성으로 청취자들에게 말하십쇼! 전 구 방송국들과 다릅니다. 확실한 팩트와 논리 아니면 방송 안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국민들을 모았고, 어떤 가치를 내세웠는지 말하십쇼. 무능한 전 정부의 후계라서 정부라고 인정하라는 논리는 설득력 없습니다!”

 특사는 입에 침을 모아 물처럼 삼켰다. 디제이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노려보고 있었다.

 “통일 대한민국 정부가 내세운 국가관과 이념, 가치는.....하루 빨리 전 정부의 시스템을 복원하고 대한민국 영토와 국민을 재통합 하는 것 입니다.”

 디제이는 낮게 흥 웃었다. 특사는 눈을 가늘게 하며 턱을 내렸다.

 “디제이씨. 당신은 젊습니다. 전쟁 후 태어난 세대 일 겁니다. 이 전 정부를 본 일이 없을 겁니다. 왜 전 정부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디제이는 자신의 검은 선글라스를 한 손가락으로 쓰윽 올렸다.

 “냉소적인 태도는 언론의 특권이며 자유 입니다.”

 “언론의 정체성은 해당 국가의 정치체계에 따릅니다. 사회주의와 전제주의 국가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습니다. 오로지 민주 정부 통치 아래서 자유를 갖는 것이 가능합니다. 당신의 생각과 태도는 과거 대한민국 민주주의 때 가능했던 일입니다. 혜택을 누리면서 민주 국가의 국민들이 투표로 선택한 대통령과 국가관을 그렇게 비웃을 수 없습니다!”

 디제이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특사 역시 입을 다물고 디제이가 무엇을 말할까 기대했다. 공격이 잘 먹혀서 자신감이 솟았다. 디제이는 마이크로 다가가 말했다.

 “청취자 여러분 잠시 생각 정리의 음악을 듣겠습니다.”

 디제이가 주머니를 뒤져 하모니카를 꺼냈다. 특사의 묻는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이크 가까이서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비슷한 음계의 노래가 한곡, 두곡, 세곡 이어지다가 멈췄다. 디제이가 하모니카를 소매로 문질러 닦고 주머니에 넣었다.

 “청취자 여러분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다시 게스트와의 대담 재개하겠습니다. 특사분? 대통령 득표율이 어떻게 됩니까?”

 “...이십 프로 입니다.”

 디제이는 자신의 뱃살 위로 팔짱을 꼈다.

 “삼만 오천 명 중 겨우 이십 프로? 세상에 그럼 슈퍼 홍씨 본가도 대통령 할 수 있겠네.”

 “....후보가 스무 명이나 나왔습니다. 그 중 이십 프로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대단한 겁니다...”

 “수퍼 홍씨들이 우르르 몰려가 투표하면 가문 전제 정부가 뽑히겠네요. 그러면...본가가 행정부가 되려냐?”

 디제이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르쳐 주지 않고 웃으며 혼잣말 했다. 특사는 디제이의 행동이 유치한 투쟁심에 치우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이 덩치 큰 애송이는 쓸모가 많았다. 어떻게든 재건 위원회로 데려가야 했다. 잘 달래야 했다.

 “이러지 말고, 우리 생산적인 토론을 할까요? 슈퍼 홍씨가 무엇인지 말해 주실래요?”

 디제이의 선글라스 너머 눈동자가 생각하듯 위쪽으로 살짝 움직였다. 특사는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디제이는 자신이 이기고 있는 부분에 대해 가르쳐 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근처를 장악하고 있는 깡패들 입니다.”

 묵중한 고음과 함께 조명 뒤 벽이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사람들이 방송실로 들어왔다.

 “홍길동이 납셨다! 얼른 무릎을 꿇어라!”

 특사가 먼지 속에서 실눈을 떴다. 디제이가 어디서 꺼냈는지 큼직한 단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단검으로 의자에 묶인 특사를 거칠게 풀어 주었다.

 “얼른 가! 슈퍼 홍씨에게 또 게스트를 뺏길 수 없어!”

 “미친 납치범 새끼. 꼴에 방송인이라고!”

 디제이가 뒤에서 달려드는 누군가에게 목이 휘감겼다. 특사가 디제이를 도와주려 하자 디제이는 손사래를 쳤다.

 “오지 마! 마이크를 뛰어넘고 복도로 가! 입구가 있어!”

 특사의 눈에 디제이 뒤에서 달려드는 건장한 장정들이 보였다. 특사는 마이크 뛰어넘고 복도로 달렸다. 고개를 돌려 외쳤다.

 “고마워요. 반드시 구하려 노력할게요!”

 “내가 가질 수 없으면 남도 가질 수 없어! 넌 내 게스트야! 청취자 여러분! 지금 언론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특사는 디제이의 마지막 방송을 들으며 복도를 뛰었다. 복도 끝에 폭이 좁은 나무문이 있었다.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밖으로 나갔다. 특사는 밝은 햇빛 때문에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우리가 이미 늦었군. 디제이 친구는 어떤가?”

 특사는 손을 내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 괴물을 봤다. 그리고 기절했다.


 슈퍼 홍씨가 정말로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정통 있는 가문이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전행 후 홍씨 성을 가진 자들이 작은 촌락을 이루었다. 소규모의 촌락에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홍씨들은 이주민들을 환영했다. 홍씨들은 자신들이 뿌리를 개척한 촌락에서 존중 받기를 원했다. 이주민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따랐으나 점점 세월이 흘러 이주민 수가 늘어나자 홍씨들이 특권을 버리고 자신들처럼 평등해 지기를 요구했다. 홍씨 가문은 당연히 분노했으나 이주민들 수가 더 많았다. 이주민들은 홍씨 가문을 힘으로 압도해 홍씨의 권리와 재산을 뺏었다. 홍씨들은 쫓겨난 지 1년 뒤 광야를 떠돌다가 생계가 힘들어지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촌락으로 돌아왔다. 촌락은 거의 도시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 홍씨에 대한 동정론이 도시를 감싸자 이주민들은 투표를 통해 홍씨들을 다시 받아 들였다. 홍씨들이 다시 정착한 날 밤. 사람들은 그 날을 피의 날로 기억했다. 가장 척박하고 초라한 장소에 주거지를 배당 받은 홍씨들은 낮에는 아무 불만도 없었다. 밤이 오자 짐 속에 숨겨 온 총과 칼을 꺼내 온 도시를 휩쓸었다. 홍씨들은 단순히 광야에서 떠돈 게 아니라 전쟁 전 경찰서나 군대 주둔지를 순례해서 총을 구했다. 홍씨들은 도시의 다양한 가문, 종교, 경제 파벌과 실세들을 제거하고 모든 홍씨들을 도시 지배자로 선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홍씨 수보다 다른 성을 쓰는 사람들의 많아지자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성을 홍씨로 강제 개성시켰다. 기존의 홍씨들은 자신을 홍씨 중의 홍씨, 슈퍼 홍씨라 칭했고, 도시에서 가장 높은 3층 상가 건물에 올라 낡은 족보를 흔들며 자신들이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정통성 있는 가문이라고, 주장했다. 설명을 듣고 특사가 말했다.

 “정말 바보 같은 역사군요. 누가 믿습니까?”

 “바보도 안 믿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합니다. 디제이 그 친구가 용감했죠.”

 특사의 이마에 붕대를 감아주던 홍최씨가 대답했다. 홍씨로 개명하기 전이 최씨라서 슈퍼 홍씨 순혈들과 차별화를 위해 개성 전 성을 홍 뒤에 붙였다.

 “그냥 옛날 언론인 흉내 내던 애송인줄 알았는데 강단이 있군요.”

 “디제이 엄청 용감한 친구 입니다. 라디오로 슈퍼 홍씨를 그렇게 공격하는 사람은 그 친구 밖에 없어요. 디제이는 홍씨에게 압박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웅 입니다.”

 특사는 디제이가 자랑하던 이만 명의 청취자가 떠올렸다.

 “디제이의 할아버지가 피디였대요. 전쟁 전 정부의 반대편에 섰다고 좌천당해 이곳으로 왔다가 세계 삼차 대전을 겪었지요.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뒤를 이어 방송 장비를 모아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는데 디제이가 뒤를 이었어요. 아버지가 낙진 후유증으로 오래 못 사셨대요. 자 치료 다 끝났습니다.”

 특사는 홍최씨의 말이 끝나자 난감한 표정으로 비밀 아지트의 입구를 바라봤다. 입구 쪽에서 괴물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길쭉한 얼굴과 수염은 문화재 책에 나온 동양 용과 비슷했다. 몸통과 팔다리는 가늘고 길쭉했다. 사타구니만 천으로 가렸고 나머지는 알몸이었다. 홍최씨가 치료를 끝내고 자연스럽게 특사를 밀어 괴물에게 인도했다. 특사는 괴물이 무섭지만 내색하지 않고 괴물에게 다가갔다. 괴물은 특사를 데리고 좁고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갔다. 복도 끝에 사방이 원형으로 크게 넓혀진 방이 있었다. 방 끝에 돌로 깎여진 의자에 다른 괴물이 앉아 있었다. 다른 괴물은 머리 위에 철사로 이은 관을 쓰고 있었다.

 “내 이름은 미르라고 하네. 몸은 괜찮은가?”

 특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은 입가를 뒤틀어 미소 지었다. 특사가 겁을 먹고 있는 걸 간파했다.

 “슈퍼 홍씨들이 추격하니 조심하라고 디제이에게 우리가 여러 번 경고했지. 시간대를 알리고 방송하지 말라고 했는데...이렇게 되다니 참 애석한 일이야. 라디오를 들었네. 자네가 통일 대한민국 정부의 특사라고?”

 “...디제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슈퍼 홍씨들이 디제이를 회유했네. 홍씨로 개성하고 자신들을 위한 방송을 하라 했지만 디제이는 언론의 자유와 특권을 들어 거부했네. 홍씨들은 디제이를 도시 중심지 나무에 묶어놨네. 일주일 내로 승락하지 않으면 디제이는.”

 미르는 가늘고 긴 손을 내밀어 목 아래를 그었다.

 “자네 임무에 대해 듣고 싶네.”

 “먼저 스스로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전쟁 후 태어난 신인류라네. 우리 부모들은 자네처럼 정상인이었지. 핵의 장난으로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지만 홀로가 아니기에 외롭지 않으며 나약하지도 않네. 우둔하지 않고 질서와 규칙을 존중하며 모두와 어울리기를 거부하지 않으며 가슴 속에 자네와 같은 사랑이 있지. 그런데.”

 특사는 나머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후 태어난 일부 기형 인들은 절대 일반 인들 사회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생김새로 인해 모든 사람들 위에서 독재하는 홍씨들조차 우리를 거부하고 핍박하네. 그깟 홍씨들 따위야 별 것 아니야. 문제는 우리가 홍씨 외 사람들 대다수에게 거부 받고 있는 것일세. 우리 중의 우두머리 나 미르가 묻겠네. 자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

 “통일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면 누구든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미르는 흐뭇하게 미소 지을 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우리가 생각해 보니 자네에게는 디제이가 필요하겠더라고.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구해 줄 수 있어. 디제이는 좋은 언론이니까 말이지. 하지만 디제이는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 우리가 디제이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네. 그러나 자네가 우리를 위해 힘을 써준다면야 디제이를 구해 줄 수 있지. 자네는 정말 통일 대한민국 정부의 사람인가?”

 특사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특사를 미르의 페이스로 끌어가기 위한 의도적인 침묵이었다. 못 믿는 것처럼 침묵을 끌었다.

 “자네가 정부의 사람이라지만 우리는 못 믿겠네. 정말 정부를 우리 앞에 데려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럴 수야 없지.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렸어. 우리를 인정하고 받아 줄 권위가! 권위는 정당하고 올바르며 선해야 돼. 정말 있는 지도 모르는 자네의 정부에 그것을 기대할 수 없지. 그러나 지금 이 부근에 우리를 적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 자네가 진짜 정부의 사람이라면 그들에게서 우리를 보통 사람들처럼 인정해 주겠다는 결정을 받아오게.”

 “지금 정부보다 더 한 권위가 무엇 입니까?”

 특사가 조급해하자 미르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찼다.

 “전쟁 전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하는 마지막 군대.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정통성과 권위가 있지. 진짜 정부의 관료야. 아직도 살아있네.”


 군부대에는 이미 괴물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특사는 군인들이 만든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기형 식물의 줄기로 얼기설기 만든 감옥은 누구라도 탈출하기 쉬웠다. 하지만 탈출하지 않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대한민국 마지막 군대의 병사들 중 일부도 사람들 뒤를 쫓아 주둔지에서 도망쳤다. 대한민국 마지막 군대가 적과 싸우기도 전에 붕괴됐었다. 특사는 쓰게 웃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오? 처음 이곳에 파견된 소초 중대의 소대장이었소. 핵 공격으로 중대장님이 죽었지. 나와 선임 소대장만이 살아남았소. 정부와 국방부가 붕괴된 지 오년이 지났을까? 선임 소대장이 그러더군. 우리의 무기를 앞세워 생존자들을 모아 군대를 만들자고 자기는 대통령하고 난 사단장 하자고 제안하더군. 난 방아쇠를 당겨 제안을 거부했소. 그 후 난 대한민국 중위로 이십오 년간 나에게 명령을 내려줄 지휘부를 기다렸소. 그 동안 국민 보호의 의무를 다하면서 말이오. 그것은 신앙이었고, 고집이었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나와 내 부하들이 버틸 유일한 길잡이였소. 하지만 어제 저녁 탈영한 병사들과 죄수들에겐 차마 발포 명령을 내릴 수 없었소. 이제 이 노병의 고집도 끝난 거지.”

 대한민국 마지막 군대의 지휘관 중위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중위와 부하들은 주둔지에 접근한 특사가 신분을 밝혔어도 무시하고 다짜고짜 감옥에 가두었다. 특사는 여러 번 자신이 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지만 아무도 들을 척 하지 않았다. 대규모 탈주 후, 중위가 직접 찾아와 얘기하는 것은 특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있는 게 분명했다. 특사가 입을 열려 하자 중위가 손을 들어 막았다.

 “당신과 디제이와의 방송을 들었소. 우리의 무전기에 잡히지. 디제이 그 친구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은 알지만 우리는 슈퍼 홍씨와 미묘한 관계에 있소. 슈퍼 홍씨는 우리의 전술과 무기를 두려워하고 우리는 슈퍼 홍씨의 도시에서 생산되는 생필품이 필요하지.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유지해 왔소. 부도덕한 도적 패와 손을 잡는다 욕하지 마시오. 나는 정부가 내게 맡긴 병력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소. 정말 존재하는지 모르는 정부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수 없소.”

 특사는 차분히 중위의 말을 들으며 반론을 생각했다. 중위의 말이 끝나자 입을 열려 했지만 중위는 또 다시 손을 들어 막았다.

 “듣지 않겠소. 예전에 이 근처 도시의 시장이었다던 사람이 왔지. 공무원과 군인이 힘을 합쳐 임시 정부를 만들어 조국을 재건하자고 말했소. 오랜 기다림에 나는 덥썩 물었지. 어떻게 됐는지 아시오? 시장이라는 사람은 나중에 자기를 왕으로 칭했소. 나는 또 다시 방아쇠를 당겼지. 당신이 속한 통일 대한민국 정부가 시장 같지 않다는 보장이 어디 있소? 나는 무엇도 믿지 못하겠소. 내가 당신을 풀어 주는 것은 공권력을 존중해 탈주하지 않은 것에 대한 사면이오. 잘 가시오.”

 특사가 반응하기도 전에, 중위는 몸을 돌려 감옥을 나갔다. 중위와 같이 온 원사가 특사를 일으켜 세웠다. 중위와 마찬가지로 수염까지 백색으로 탈색됐고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했다. 원사의 모자는 병장 모자였는데 굵은 매직으로 V자를 여러 번 그려 원사 계급장으로 변해 있었다.

 “갑시다. 특사 양반. 바래다주겠소. 우리 중위님은 방어 준비로 바쁘십니다.”

 “지휘관이 왜 중위 계급 입니까?”

 “우리 중위님은 병사들이었던 우리를 진급시킬 수 있지만 중위님 본인은 상급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대위, 소령으로 대장으로 추대해도 강력하게 거부하셨습니다. 그런 분입니다. 우리 대장님.”

 원사가 특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주둔지 입구로 데려갔다. 통나무 두개를 세워 입구를 만들고 옆에 모래 포대를 쌓아 만든 위병소가 보였다. 위병소에는 병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앳된 얼굴에 머리에 맞지 않은 방탄 헬멧을 쓰고 있었다. 전쟁 후 대한민국 마지막 군대는 고아나 걸인들을 데려다 훈련시켜 계속 병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어젯밤 십년이 넘는 노력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서쪽 바다 너머에서 팔이 세 개 달리고 머리가 두개 달린 괴물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흔한 기형 괴물인지 알았다. 그러나 그 괴물들에게 일주일 전 지휘관 중위, 다음 서열인 소위가 이끌던 정찰대가 전멸 당했다.

 놈들의 지능은 단순 괴물이 아니었다. 총과 폭탄을 능숙하게 다뤘다. 군대 전술지식과 나름 군율도 있었다. 괴물들은 정찰대의 지도로 주둔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접근 중이었다. 대한민국 군대는 그 동안 우연히 총을 얻은 도적떼나 소수의 기형 괴물만을 상대해 왔다. 군대 수준의 전문성, 화력과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괴물의 본거지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하루거리에서 괴물 군대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중위의 초창기 부하와 어린 고아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도주했다. 텅 빈 주둔지를 가로 지르던 특사는 원사에게 자신이 본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곳은 무엇 입니까?”

 “우리 형제들이 묻혀 있는 곳 입니다. 나도 저기에 묻힐지 알았소. 우리가 길러낸 아이들이 저 곳에 나를 묻어 줄지 알았지. 봐서 뭐하겠소. 얼른 갑시다.”

 특사는 무덤을 살펴보려 했지만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한 바퀴 돌려야 될 만큼 수많은 묘비가 서 있었다. 위병소 앞에서 특사가 멈춰 섰다. 원사가 팔에 힘을 줬으나 특사는 밀리지 않았다.

 “가지 않겠습니다. 여기 남겠습니다.”

 중위는 다시 돌아온 특사에게 무표정하게 말했다.

 “왜냐고 묻겠소. 성실히 답하시오.”

 “전 정부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현 정부의 관료로써 국방의 의무를 다한 군인들의 무덤을 보고 그냥 갈 수 없습니다. 저도 남아 괴물들과 싸우겠습니다.”

 중위는 웃었다. 정말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럼 내가 고마워 눈물이라도 흘릴지 알았소? 당신은 십 원 만큼 가치도 없는 사람이오. 총을 다뤄 봤소? 그럴 리 없겠지. 체력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우리가 가르친 고아나 걸인들보다 아주 많이 부족하오. 당신에게는 이등병 계급장도 아깝소. 우리에게는 한 순간의 욱한 감정이나 감성보다 튼튼한 팔과 전술을 이해할 머리요. 마지막이오. 가지 않겠다면 쏘겠소.”

 “괴물들이 총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총알받이로 쓰시죠.”

 중위는 주둔지 방어 최전방에 특사를 배치시켰다. 참호에 같이 배치된 상사가 말했다.

 “오금이 질금질금 대면 지금이라도 도망치쇼.”

 특사가 고개를 저었다. 중위가 참호 위에서 발을 털었다.

 “자신의 용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첫 번 째 총성이 들리는 순간 알게 될 것이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약해 보이는 지 거울을 가져다주고 싶소. 당신이 주장하는 통일 정부라는 것도 당신과 똑같겠지. 상사. 이 자가 총을 가지고 도망가면 사살하게. 빈손으로 가면 나대신 웃어주게.”

 특사가 지지 않고 농담으로 대꾸하기 전에 중위는 등을 돌려 다른 참호로 갔다. 상사는 주머니에서 나무껍질을 꺼내어 특사에게 내밀었다. 특사가 고개를 젓자 자신의 입으로 넣어 씹었다. 특사는 상사의 모자를 봤다. 상병 계급장 위에 그려진 v가 세 개인 상사 계급. 전 정부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징병했다. 20대 부터 노년의 지금까지 군인의 의무로 멸망한 조국을 지켜온 상사의 눈에 특사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알았다. 특사는 아무 말 없이 전방을 응시했다.

 1시간 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포격이 시작됐다. 상사는 괴물들이 박격포를 쏘고 있다고 알려줬다. 텅하는 맑고 빈 소리가 나면 1,2초 뒤 폭발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포격 음은 연속으로 이어질 때도 있었고, 갑자기 늘어져 드문드문 나기도 했다. 특사는 상사가 시킨 대로 참호 안에서 귀를 막고 입을 벌려 소리 질렀다. 압력으로 몸 안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막은 귀 사이로 살점이 찢어지듯 땅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상사가 특사의 어깨를 치고 포격이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특사가 참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괴물들이 양손으로 소총을 쥐고 세 번째 손으로 장전 손잡이를 당기며 주둔지로 돌격해왔다. 특사는 소염기에 잔뜩 녹이 슨 소총을 내밀어 괴물을 향해 쐈다. 괴물의 세 번째 손이 뒤로 세게 당겨지듯 떨어져 나갔다. 상사가 웃으며 특사의 등을 두드려 줬다. 다른 참호에서도 사격을 시작했다. 괴물들은 사격을 피해 땅에 엎드리거나 엄폐물에 몸을 숨겼다. 중위가 특사 참호 바로 뒤 지휘 참호에서 사격 중지라 외쳤다. 괴물들은 사격을 줄자 다시 한국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괴물들의 붉고 말라비틀어진 피부가 눈에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중위의 총이 불을 뿜었다. 중위의 의도를 읽고 병사들은 괴물들이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리다 사격했다. 돌격 첫 열이 붕괴되자 한국군 사이 함성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괴물들은 거대한 기관총을 들고 엄폐물 뒤에 숨어서 사격을 시작했다. 기관총을 피해 참호 안으로 병사들이 숨자 괴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격했다. 특사 옆 참호에 괴물이 난입하자 특사와 상사가 괴물을 공격했다. 아군 저격수가 방아쇠를 당겼다. 기관총을 들던 괴물에 명중했다. 상사는 참호 위로 뛰어올라 기관총을 향해 달렸다. 특사는 상사 주위로 괴물이 다가가지 않게 엄호사격을 실시했다. 상사는 자신보다 먼저 도착한 다른 괴물의 옆구리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상사는 기관총을 들고, 지그재그로 달려 참호 안으로 미끄러졌다.

 상사가 탈취한 기관총으로 불을 뿜었다. 괴물들도 빼앗긴 중화기를 되찾기 위해 상사에게 격렬하게 대항했다. 사격이 집중돼도 상사가 겁을 먹지 않자 용기를 얻은 한국군은 참호 위로 모습을 드러내서 조준 사격을 실시했다. 상사가 쉽게 쓰러지지 않자 괴물들은 목표를 다른 병사들로 바꾸었다. 병사들은 괴물들의 공격에 하나, 둘 쓰러졌다. 상사가 참호에서 벗어나 괴물들에게 접근하여 자신에게 주의가 향하게 했다. 괴물 중 하나가 수류탄을 들고 상사에게 달려들었다. 상사는 괴물을 맞추어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수류탄은 제자리에서 폭발해 괴물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상사가 뒤돌아 특사에게 눈을 맞추며 웃었다. 특사는 상사의 용기에 감탄해 손을 높이 들고 휘저었다. 상사의 이마 옆이 터지며, 상사가 쓰러졌다. 상사를 잡은 괴물은 자신의 총을 높이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특사가 괴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 소염기 끝에서 불이 나자마자 괴물이 쓰러졌다. 병사들은 상사의 복수를 갚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괴물들도 승부가 기울어 지지 않게 온 힘을 다해 맞섰다. 쌍방의 격렬한 사격이 재장전 시간 때만 짤막하게 멈출 때만 빼고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가 사격이 뚝 그쳤다. 중위가 피 묻은 얼굴로 특사의 참호 안으로 들어왔다.

 “탄이 떨어졌어. 저 쪽도 마찬가지 군. 당신 제법이야.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하니 어딜 가든 사랑 받을 거야.”

 “이 싸움은 제 일 입니다.”

 “고집 그만 부리시오. 이제 끝났소. 대한민국 마지막 군대가 지금 여기서 끝나오.”

 “아직 방법이 있습니다. 제 생각이 맞다면..”

 “나한테 무엇을 약속하겠소?”

 중위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대화는 단순히 말과 말의 교환이 아니다. 눈빛, 분위기, 말투, 상황이 대화의 9할을 차지했다. 특사는 중위가 자신을 대하는 게 바뀌었음을 감 잡았다.

 “야심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대에 와서 많은 걸 약속했지. 금, 여자, 지위, 명예, 영토 입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했소. 난 그때마다 방아쇠를 당겼지. 당신네 정부는 무엇을 약속하겠소? 겁먹지 말고 말해 보시오. 죽기 전에 정말 궁금해서 물어 보는 거니.”

 중위가 태평하게 말했다. 죽음을 앞두었기에 순수한 말투였다. 특사는 머뭇거렸지만 교섭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일단 정부 특사로 원하는 것은 디제이 구출 작전과 용인간들에 대한 인정 입니다. 향후 처우에 대해서는...약속 드릴 수 없습니다. 재정이 부족합니다. 지금 현재 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두기는 무리 입니다. 쌀이라든 가 다른 걸로 봉급을 지급해..”

 “난 돈을 원하는 게 아니오! 그렇게도 모르겠소? 지금 사람들이 뭘 원하는 지? 정신 나간 디제이 친구와 방송하는 걸 들었소. 왜 전 정부에 냉소적이냐고? 그걸 정말 몰라서 물으시오? 그 친구는 젊기에 자신의 감정과 논리를 펼치기에 혈기가 앞서지. 하지만 난 정확히 말 할 수 있소. 정부에 믿음과 신뢰를 보내면 보답 받을 수 있는가? 전쟁 전 정부처럼 또 배신당하지 않을까? 망가진 현 세상에 정부는 국민과 어떤 약속을 하고 이행할까? 이런 것이오. 나와 디제이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린 정부는! 돈, 명예, 지위가 아닌 가장 인간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말하시오.”

 특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것은 아직 없습니다.”

 중위는 짧고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당신처럼 당신 정부도 의욕만 앞서지 알맹이는 많이 부족하군. 거대한 집단과 집단 구성원 사이의 약속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전 정부의 지도자들 때문에 깨졌소. 이 배신감은 전쟁의 불길도 태우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 대물림 되고 있소. 정부에 대한 불신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분모가 되었소. 배신감과 믿음이 부족한 사회에 무슨 정부가 필요하겠소? 그런 정부의 이념은 무엇이오?”

 “국가 영토, 국민 대통합 입니다. 아니 사실은 재건된 대한민국 정부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 입니다. 그것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서 국민들의 관심을 다시 모을 수 있다면 이번 정부의 역할은 다한 것 입니다. 저와 지금 정부는 전달자 입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 홍보를 하듯 증오하고 미워하더라도 정부가 존재함을 알리고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입니다. 저는 다음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의 관심을 모아 넘겨주는 전달자 입니다. 지금 정부는 저처럼 모자라고 부족할 지라도 다음 정부는 이번 정부의 노력을 발판으로 정말 훌륭한 정부가 나올 겁니다. 그리고 이 싸움 우리가 승산이 있습니다.”

 중위는 특사의 고백을 듣는 내내 혹시나 했던 기대감이 사그라져 마음이 어두웠다가 마지막 말에 정신을 차렸다.

 “무엇이오. 그게?”

 “총을 들고 돌격해야 합니다.”

 “우린 탄이 없소. 가서 입으로 땅,땅 하라는 소리요?”

 “그러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 합니다. 저들의 육체는 무섭게 생겼지만 능력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상사는 저들 중 하나를 간단하게 해치웠습니다. 저들도 우리처럼 총에 의존합니다. 그러기에 탄이 떨어져 지금 얌전한 겁니다. 지금 돌격해서 백병전이라도 할 것처럼 보이면 저들은 겁을 먹고 도망갈 겁니다.”

 중위는 손바닥을 들어 특사를 침묵시키려 했지만 특사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 양쪽 다 총에 의존했기에 총을 쓸 수 없는 지금 이미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됐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금만 용기를 더 내면 이길 수 있습니다.”

 “누가 그런 바보 같은..멈춰!”

 특사는 참호 밖으로 나가 괴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중위가 허둥지둥 말리려 뒤따랐다. 다른 참호에 있던 병사들도 중위를 보고 참호 밖으로 나와 돌격했다. 특사가 고함을 질렀다. 중위는 특사를 말리려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은 중위를 따라 고함을 지르며 땅을 박차며 속도를 냈다. 괴물들은 특사가 바로 앞에 올 때까지 꿈쩍도 않다가 뒤를 이어 오는 중위와 병사들을 보고 등을 돌렸다. 괴물들이 도망갔다. 특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중위가 숨을 헐떡이며 특사를 일으켜 세웠다.

 “바보 같지만 되는군. 당신네 정부 재미있을 것 같소.”

 특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위가 걱정돼 일으켜 세우자 특사는 울고 있었다. 특사가 말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이 기념적인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중위 당신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 합니다.”

 “정말 바보군. 중위 다음은 대위고, 임명은 장군이나 군 총사령관만이 할 수 있소.”

 특사는 소매로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켜 먼지를 털었다. 울음을 삼키고 또박또박 말했다.

 “본인은 통일 대한민국 제 1대 대통령으로써 국민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중위 당신을...”


 디제이는 도시 한 가운데 묶여 매우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방송을 하고 싶지만 몸도 묶여 있고 장비도 없어서 할 수 없었다. 직접 묶여 보니 생각보다 아팠다. 여기서 나가면, 다음 게스트는 묶지 않고 마취하기로 결심했다. 아픔보다 방송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했다. 믿기지 않은 소문이 들어왔기에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슈퍼 홍씨 눈치를 보지 않고 도시 밖으로 몰려갔다. 당황해 하는 슈퍼 홍씨 본가 중요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디제이는 이 모습을 다음 방송 때 풍자로 내보내려고 주의 깊게 관찰했다. 도시 밖에서 군대의 힘찬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온 세상을 진동시켰다. 디제이는 정말 방송하고 싶었다. 대통령을 인터뷰하고 싶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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