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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영 파랑새

2014.07.01 00:2807.01


파랑새
 

1.
 
명화 ‘천사와 악마’를 탄생시킨 거장, 레오날도 바스티타가 이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라오. 늙은 화가가 여행을 떠난 지 3년째의 어느 날이었소. 그가 여행을 하게 된 사유는 변덕쟁이 황제가 당시 궁정화가로 지내던 그에게 예배당에 장식할 그림을 그리라 명했기 때문이라오. ‘천상의 미를 지닌 천사와 악마의 미를 지닌 악마의 대결’이라는 주제에 빚어, 모델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소.
3년 내도록 제국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어느 쪽에도 부합하는 미모의 모델을 찾아낼 수 없었소. 애초에 주제가 가당키나 했을까. 천재 화가인 그도 절대로 그려낼 수 없을 것이라 모두들 생각했다오. 다만 늙은 화가에게 그 그림은, 황제의 명 외에도 인간이 탐할 수 없는 경지에 대한 소망과 염원의 문제이기도 했다오. 정녕 지고한 아름다움은 찾을 수 없는가? 늙은 화가는 낙담과 회의에 젖었지. 그렇게 3년째의 봄, 늙은 화가는 제국 변두리의 작은 어촌 마을까지 흘러갔소.
늙은 화가가 밀려오는 잔잔한 바다 거품을 골똘히 바라보며 해안가를 걷고 있을 때였소. 그 때 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오. ‘파도 거품을 머금고 빛나는 천사가 강림하였다!’ 허름한 옷을 아무렇게나 꿰어 입고 조개를 줍던 소년이었소. 이제 열 두세 살이나 됐을까. 은은한 빛깔의 블론드는 봄 햇살의 베일을 드리운 듯 했고, 색조가 엷은 회색 눈동자는 은의 빛으로 빛났다지. 우윳빛의 티 한 점 없는 살결과 기품이 흐르는 가늘고 자그마한 몸. 날개가 없었을 뿐, 늙은 화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전능한 신께 기도를 올렸소.
소년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늙은 화가를 보며 웃음지었다오.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명해지는 천사의 색채에 늙은 화가는 디딜 곳을 잃고 침몰해 버리고 말았소. 화가로써의 자존심, 신을 따르는 신앙인으로써의 경건함, 오랜 시간 지켜왔던 일련의 잣대를 모두 저버리고 바다에서 태어난 아도니스를 그저 경배하고만 싶었다고 했소.

“아이야, 이름이 뭐지?”

늙은 화가는 치미는 격정을 눌러 죽이길 애쓰며 물었지. 한 사람의 인간이기 이전에 냉혹한 예술가임을 끝없이 되뇌며 자신을 질타했소.

“제 이름은 셀레스티앙이에요.”

셀레스(Celes)가 하늘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소? 화가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며 소년에게 부탁했다오. 아니, 애원했다는 표현이 맞겠지. “제발 너를 그리게 해 다오. 졸렬한 손이나마 너를 화폭에 담도록 허락해다오. 너를 예술가라는 이름의 내가, 시선으로 범하고 욕정의 증거를 새기게 되는 것을, 죄를 범하는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다오.”
소년은 어여쁘게 웃으며 늙은 화가의 두 손을 꼬옥 쥐고서.

“용서해요. 사랑해요.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요?”

천사에게 사면 받은 늙은 화가는 이틀 동안 소년의 모습만 무더기로 스케치 했소. 소년은 마을 어귀에 홀로 살았기에 기꺼이 늙은 화가를 집으로 초대하여 묵도록 했소. 그 동안 소년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아버지는 소년이 태어나기도 전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 어머니는 얼마 전 병으로 타계했다는 것. 이후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 돌보아 주고 있다는 것이었소.

“외롭지는 않으냐?”
“모두가 사랑해 줘서 외롭지 않아요.”

소년의 천진한 말은 그를 사랑할  밖에 없도록 만들었소. 아주 소름 돋는 일이지만 누구나 소년을 보면 아름다움에 취하고, 사랑하게 되었지. 늙은 화가가 소년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마을 이웃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찾아왔었소. 늙은 화가에 대해 처음엔 경계했지만 소년이 허락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순히 의심을 거두었소. 마치 소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거부 없이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처럼 말이오. 늙은 화가는 진정 사랑 받는 아이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소. 그가 다른 이들 보다 냉정한 사람이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사람이었기에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게지.
솔직한 심정으로 늙은 화가는 소년을 데리고 가고 싶었소. 그 때의 어린 모습부터, 늙은 화가의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장하는 하루하루를 화폭 속에 담고 싶었소. 어떻게 자라날지 궁금하니까. 이른 새벽 곤하게 잠든 소년을 내려다보며 몇 번이고 치솟는 충동을 억눌러야 했소.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
늙은 화가는 소년의 아름다움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지를 생각했다오. ‘이런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섣불리 욕망에 져서 데리고 나간다면, 세상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을 납득시키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소. 늙은 화가는 소년이 깨기 전 짐을 꾸리고 소년의 둥지를 나왔소. 옭아매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 한걸음, 한걸음 파도 소리가 닿지 않는 곳을 향해 걸었지.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회귀본능처럼 돌아가고 싶은 기분을 내치며 간신히 그 곳을 떠날 수 있었다오.
늙은 화가는 여행을 일단락 하고 돌아왔소. 악마의 미를 지닌 모델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바다에서 만난 소년을 한시라도 빨리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소. 몇 달을 두문불출하며 평소 일을 돕던 제자들도 마다하고 명화의 천사를 그려냈소. 완성된 천사의 모습은 공개되지 않았다오. 변덕쟁이 황제가 그 새 변덕을 부려 새 그림을 의뢰했기 때문이었지.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르오. 그 때 천사가 세상에 공개되었으면 완벽한 그림이 될 수 없었을 것이오. 저주받은 실력의 천재가 집념으로 그려낸 천사는 정말로 소년을 그대로 옮겨 그려낸 듯 했으니까. 천사의 그림은 화가의 비밀스러운 지하 공방에서 10년을 잠들게 되었소.

 
2.
 
늙은 화가가 떠나고 셀레스티앙은 마을 어른들의 결정 하에 옆 집 노부부의 손에 맡겨졌어요. 인품 좋고 다정한 부부는 셀레스티앙을 또 다른 자식처럼 기뻐하며 맞아들였죠. 그 아이는 하늘이 내려준 천사라고 했으니까. 천사를 마다할 사람은 없었어요. 옆 집 가족은 행복해 보였죠. 셀레스티앙도 정말 친 부모처럼 부부를 따라 잘 지냈고요. 두 내외가 아침 일찍 고기잡이를 나갈 땐 저와 함께 놀기도 했어요. 셀레스티앙은 바닥에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그 늙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언제까지고 평온하리라 생각했던 일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노부부의 남편이 어느 날 셀레스티앙과 함께 자취를 감춰버린 거예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 부인은 울며 괴로워했지요. 사흘 밤낮을 울기만 하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다 환을 얻어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저는 그 귀곡성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요. “당신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둘이서 함께 사랑하자고 했으면서. 천사를 돌려줘! 셀레스티앙을 돌려줘!” 무섭죠? 남편에 대한 원망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셀레스티앙 때문이었던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눈치만 보고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어요.
안타까운 희생양. 네, 그거였죠. 부인이 죽고 난 뒤에야 마을 사람들은 은밀히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직 어렸던 저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셀레스티앙의 존재는…… 치명적이었어요. 너무 아름답고 순수했기 때문에 거기에 매료된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거죠. 불쌍하게도, 노부부는 희생양이 됐고요.
노부부의 남편은 셀레스티앙을 데리고 마을에서 일주일가량 떨어진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어요. 몇 년이 지나고서야 외지로 나갔던 마을 사람에 의해 그들이 살았던 집이 발견되었죠. 일기가 남아 있었어요. 아주 평온하고 행복한 일상에 대한 일들부터 죄책감까지 노인의 다양한 감정의 소산물이에요.
움막을 짓고, 나무를 하고, 과일을 따고, 셀레스티앙을 씻겨주고 함께 잠드는 일련의 일들을 매일같이 일기장에 써둔 거예요. 언젠가 노인이 물었대요.

“날 따라온 걸 후회하지 않니?”

셀레스티앙은 이렇게 답했어요.

“아니오, 이토록 절 사랑해 주시는 걸요!”

그 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불쌍한 아이죠. 글쎄요, 무섭기도 하지만 천사잖아요? 결국 지상의 사람들이 멋대로 사랑해서 그렇게 돼 버린 걸까.
노인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어요. 천사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그는 손 쓸 수 없는 병마와 싸우다 숨을 거두었죠. 셀레스티앙은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병상을 지켰던 것 같아요.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얼마 없었을 테니까요.
일기에는 이런 내용도 적혀 있었어요. 노인은 셀레스티앙의 어머니나 셀레스티앙에 대해 남들 보다 많이 알았어요. 셀레스티앙의 어머니는 에밀리라는 분이셨어요. 단편적인 기억밖에 없지만, 무척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원래 마을 사람은 아니었고 수도에서 와서 정착하게 된 분이셨다는데, 수도에서는 이름 있는 고급 기녀셨다고 해요. 도망치듯 마을까지 건너와서 돌보아준 피에르 씨와 결혼했답니다.
셀레스티앙이 태어나기도 전에 피에르 씨는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머잖아 수도에서 에밀리 아주머니의 친구라는 분이 찾아온 걸 노인이 우연히 목격 했나 봐요. 섬뜩한 내용이지만 들어보세요. 노인은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국 셀레스티앙에게 이야기를 해 줬어요.

“에밀리에게 친구가 찾아왔었지. 매우 잘 차려 입고 말쑥한 여성이었는데, 아름다운 여자였지만 어딘지 무시무시한 구석이 있더구나. 그래, 나는 직감적으로 마녀라고 생각했어. 제국 동쪽의 공화국에서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마녀들이 많다고 하더구나. 본 적은 없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마녀였어. 반가워하는 모습은 아닌지라 숨죽이고 지켜보았지. 에밀리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고, 친구는 악마처럼 웃으며 ‘너는 절대로 내게서 도망칠 수 없어. 네가 감히 행복해 지려고 했단 말이야?’ 이런 말을 했지. 에밀리는 울었고 제발 그만해 달라고, 피에르까지 저주해 죽였으면 됐지 더 뭘 원하냐고 말했어. 친구라는 여자는 한참 에밀리를 모욕하더니, 급기야는 이런 말을 쏟아 붓고 가더구나.”

아! 셀레스티앙은 아마 평생토록 노인의 말을 잊지 못할 거예요.

“‘네 자식도 마찬가지로 저주해주지, 널 닮았으면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이겠지? 하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게 될 거야! 네가 그랬듯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간 죄의 대가를 치러!’ 에밀리는 그만하라고 울부짖었지만 여자는 깔깔거리며 웃었어. 난 너무 무서워서 결국 거기에서 도망치고 말았지. 오, 날 너무 원망하진 말아다오, 셀레스티앙. 네게 미움 받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단다.”

세상에, 마녀래요. 마녀. 셀레스티앙은 저주를 받았던 거예요! 에밀리 아주머니와 마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녀의 화를 돋우는 일을 해버렸나 봐요. 불쌍한 아이! 사랑만 받을 아이가 사랑을 주는 이들을 파멸로 몰아넣다니! 아아, 신은 왜 외면하셨을까요?
이야기를 듣게 된 셀레스티앙은 노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답니다.

“걱정 마세요, 아저씨. 제가 어떻게 아저씨를 미워하겠어요. 사랑해요.”

분명 노인은 더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을 거예요. 스스로 파멸해 버리고 말았지만, 파멸조차도 행복했겠죠.
가여운 셀레스티앙. 또다시 혼자가 되어버렸군요. 움막을 찾았을 땐 이미 없었대요. 혼자 살아가기엔 어리니까, 살아갈 수있는 장소를 찾아 가지 않았을까요? 산 속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전 왠지 살아 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그 아이를 사랑하니까, 맹수들도 무릎을 꿇고 과실나무도 스스로 가지를 드리울 테예요. 천사니까. 그 아이는 천사니까!
이 마을도 이제 끝이에요. 큰 태풍에 전멸해버렸어요. 이제 저 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건 벌이에요. 신의 것을 사랑한 벌이이라고요. 제 몸도 썩고 있어요. 저, 셀레스티앙과 놀았던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정말이에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요, 그 아이를?
 
 
3.
 
자! 내가 그 백작부인의 집에서 본 일을 생생하게 글로 써 냈네. 이제 자네들에게 낭송해 줄 테니 경건한 마음으로 들으라고! 제목은 <천사 소년과 백작부인의 배덕>이라네. 한낱 3류 도색소설로 생각하지 말라고. 심혈을 기울인 내면 묘사에 집중해 보란 말일세, 야한 장면만 찾지 말고, 빌어먹을 놈아!
 
『 손을 뻗어 하얀 시트 위에 흐드러진 긴 갈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부드럽게 흘러 넘쳤다. 천천히 거슬러 올라와 드러난 이마를 한번 쓸어본다. 감은 눈이 드리우는 속눈썹 그림자를 손가락으로 덧그리고 볼을 어루만졌다. 백작부인은 살짝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지었다. 자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자 손을 거뒀다. 대신 그녀가 눈을 뜨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괜찮아요?”

백작부인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소년은 답을 추궁하지 않았다. 애초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궁한 질문이었다. 백작부인은 창백하고 가는 손을 들어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키스 해주지 않으련?”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입술을 포갰다. 짧았던 키스는 격정을 더해 좀 더 농밀해졌다. 백작부인의 입술은 애처로울 정도로 차가워, 소리가 날 정도로 빨고 핥아 온기를 더했다. 혀가 맞물려 얽힌다. 거친 숨이 서로의 얼굴에 닿았다. 백작부인의 몸은 농담이래도 아름답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깡마르고 탄력이 없었다. 이제 막 피어나 젊은 생기에 가득 찬 소년의 몸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무척이나 소중하게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했다. 어디에 어떤 애무를 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것은 백작부인이었다. 소년의 움직임은 헌신적이었다.
백작부인은 부랑아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한 아이를 발견했고, 매료되었다. 공허한 눈동자를 지닌 십대의 소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신의 축복인 마냥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남편을 잃은 지 5년. 자식도 없이 홀로 외로이 저택을 지키던 백작부인은 소년을 양자로 삼았다. 나이 차이는 불과 10년이었다. 사교계에서는 사실상 정부를 들인 것이나 진배없다며 쑥덕였지만, 백작부인은 해명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는 깨끗하게 씻기고 말쑥하게 차려 입히자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백작부인은 소년을 저택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숨겨두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글을 가르쳤고, 예의범절과 처세술을 가르쳤다. 소년은 일말의 반항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것을 수행했다. 백작부인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미 사교계에서의 평판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몸이 되었다. 백작부인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심지어 시중들던 가솔들까지 모두 떠나가 버렸다. 넓은 저택이 조용해지자 백작부인은 소년을 침대로 불러들였다. 가장 본능적이지만 명쾌한 최후의 처세술을 하나씩 가르치며 짐승처럼 욕망에 취했다. 소년과 백작부인은 거추장스러운 옷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배가 고프면 식량창고에서 가져온 말린 음식들을 아무렇게나 주워 먹었다. 체력이 허락하는 한 서로를 탐했다. 침대가 아니라 의자나 책상 위이기도 했고, 복도나 서재, 심지어는 정원 한가운데이기도 했다. 장소나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극도로 말을 아꼈다. 그저 행위에 관련된 말과 아주 일상적인 말만 오갔다. 분수대에서 몸을 씻고 내리는 비를 맞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시간 감각에 무뎌질 무렵 백작부인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죽음은 천천히, 그렇지만 느리지 않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오갔는지 알 수 없는 구멍은 오로지 소년만을 받아들였다. 찌걱대는 젖은 마찰음과 백작부인의 날카로운 교성과 더해 그를 끌어안은 팔의 힘이 강해졌다. 어떨 땐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느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어머니......”

소년은 백작부인을 어머니라 불렀다. 그렇게 부르게 했다. 그럴 때 마다 백작부인은 더 강하게 그를 원했다. “배덕(背德), 그러나 그 또한 사랑이란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백작부인의 교성과 숨소리가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소년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않았다.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소년을 감싸 안았던 장소에는 한기만 어렸다. 소년이 텅 빈 내부에 사정하고 몸을 일으켰다. 백작부인은 절정에 이른 황홀한 표정 그대로 숨을 멈췄다. 소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망가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늘어진 백작부인을 오랜 시간 응시했다. 만지고, 끌어안고, 허리를 흔들었지만 홀로 부르는 소네트일 따름이었다. 감겨지지 않은 눈동자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이제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차가운 새벽의 공기에 비로소 추위를 느꼈다. 소년이 문득 돌아보자 방 한구석을 장식한 커다란 거울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백작부인이 ‘손 댈 부분이 없는 신의 피조물’이라고 한 몸과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허나 도무지 소년은 거울에 비춰진 이가 ‘나’임을 직시할 수 없었다. 거울이 반사하는 상은 신이라는 존재가 엮은 어떤 유기적 존재일 따름이지, 그것이 ‘사람’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아침 햇살의 따스한 은혜가 방을 메울 때까지 소년은 거울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깨달았다.
소년은 촛대를 집어 들어 거울을 깨부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 가고 부서진 조각 속으로 소년의 상 역시 부서졌다. 방을 뒤져 값이 될 만한 물건을 챙기고, 분수대에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백작부인의 저택을 빠져 나왔다.
백작부인은 그를 아들이자 천사로 사랑했다. 거울은 천사를 비추었다. 하지만 소년은 더 이상 백작부인의 아들이며 천사로 남아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괴리가 만들어낸 이질감, 스스로의 손으로 파괴해야 할 껍데기. 마치 거울 속에 가둬진 거울의 유령처럼. 그 세계를 만든 것은 백작부인이었지만 파괴는 소년의 몫이었다. 신이 선사한 만큼 그는 부조리를 걸어가야만 했다.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일 수 없었다. 』
 
빌어먹을, 안 울었어! 그래, 관음증 환자라 놀려라. 놀려도 좋다. 제발 어디 가서 살아 있으면 좋겠어. 신이여 당신의 이름에 맹세코 앞으로 다시는 펜을 손에 잡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나는 이렇게라도 당신의 천사와 자고 싶었단 말입니다!
 
 
4.
 
그는 날개 없는 천사였다. 신의 언문을 그린 스테인드글라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햇살의 색을 닮은 엷은 금발의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흔들렸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의 그림자마저 말할 수 없이 신성했다. 흠이라곤 한군데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의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만약 좀 더 경건한 신도였다면 그의 발에 몸을 던지고 구원을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독실한 신도였다면 아마도 파문당했을지 모를 충동에 시달렸음이 분명했다. 그가 존재하는 장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 보였다. 신이 강림한 순간을 만난 예술가처럼 나는 나의 망막과 뇌리에 그 풍경을 그대로 옮겼다. 19년의 인생 동안 한 번도 신의 존재를 확인한 적 없었던 내가 최초이자 최후로 신을 느낀 순간이었다. 
천사는 인기척에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눈을 돌려 나를 응시했다. 투명한 회색의 눈동자에 비춰지는 내 모습이 너무나 추악해 제대로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있는 동안 천사는 뚜렷한 걸음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가왔고, 이윽고 천천히 지나쳐갔다. 몸을 돌려 그를 잡는다든가 이야기를 건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단지 참을 수 없게 부끄러웠다. 내 존재가 너무나 부질없이 느껴져 쥐구멍이 있다면 숨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자리에 주저앉아 신의 십자가에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맹세컨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렇게 간절히 신을 찾은 적은 없었다. 
며칠 뒤의 학교에서 천사와 재회했다. 전원 기숙사제에 학기 중 편입을 받지 않는 우리 학교에 마차 통학의 편입생이 생겼다. 생길 리 없으리라 믿었던 ‘이단자’였다. 나와 내 친구와 전교생은 당연히 특별한 이단자를 요리할 궁리만 했다. 덜 떨어진 부자나 귀족이 얼마나 기부금을 바쳤을지 가늠하며 웃었다. 아침 미사 후 화려한 마차가 학교 건물 앞에 다다랐고 교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인물을 본 순간 이단자를 처단하기로 했던 이들은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나는 지독하게 재미없는 철학서가 손에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넋을 놓았다. 천사가 온 것이다. 그가 왜 통학을 해야만 했는지 알았다. 불안정하고 조금씩 비틀린 젊은 우리들에게 그의 존재는 견딜 수 없는 자극이었다.
천사는 학교의 금구가 되었다. 누구도 그의 존재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여는 이 없었다. 아무도 그를 좋게 말하지 않았고 나쁘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제정한 법이 아니었음에도 불문율처럼 천사의 사거리에 침범하려 드는 이는 없었다. 천사는 아무에게도 특별히 친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모두를 배제하지도 않았다. 천사는 아침 일찍 마차로 등교해, 해가 지면 마중 나온 마차로 돌아갔다. 학급에선 모두에게 살갑고 다정하게 대했으며 트러블을 만들지 않았다. 신부들은 그를 대할 때 특히나 신중했다. 건드려선 안 될 도자기를 다루듯이 아주아주 신중했다. 나는 늙은 신부들의 그런 모습을 조롱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이해했다. 
비이상적인 거리가 언제까지고 지켜질 순 없었다.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불문율을 지키지 못하는 의지 박약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천사에게 다가갔고 천사의 관심을 얻으려 애썼다. 천사는 그들이 바라는 만큼 관심을 주었다. 한 명이 시작하니 너도 나도 불문율을 깼다. 머잖아 천사의 곁에는 많은 호위가 생겼다. 그들 중에는 평소 나와 친했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변심을 걱정했지만 걱정은 곧 무위가 되고 말았다. 두 달이 가기 전, 나 역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천사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감정에 순응하면 편해진다고 깨달은 것도 그 때였다. 어렴풋한 불안감과 억압을 견디는 만큼이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은 없었다. 마음에 충실하고 감정에 충실하다면, 기꺼이 누군가에게 몸을 던지면, 바로 진실로 편해지는 길이었다. 나는 천사를 갈구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않았다. 천사의 발아래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나의 신이여, 내 천사여. 제발 나를 구원해주세요. 당신의 사랑으로 내 고독을, 슬픔을 치유해줘요. 오로지 당신만을 경배하겠어요. 당신만이 나의 믿음이에요. 날 사랑해줘요.” 그런 말을 지껄이며 천사의 자비를 원했다. 천사는 쓰러진 나를 다정하게 안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천사는 단지 그 말만을 해 주었다. 
학교라는 감옥 안에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죽였다. 죽여가고 있었다. 자유를 억압당했고 존재 자체가 날개가 비틀려 꺾인 새였다. 똑같은 일상, 다를 바 없는 얼굴들을 마주보았다. 어떠한 삶의 의욕과 기쁨조차 누리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군상이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내려온 천사는 마지막 희망이자 기대였고, 빛이었다. 천사는 나와 우리들의 나약하고 어두운 부분에 대한 고해를 들어주었다. 받아들여주었다. 우리들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했다. 나는 더 그를 사랑했다. 신을 경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오로지 어머니의 품 속 만을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확장할 수 없는 세상 속에 하나의 구원과 믿음으로 천사는 존재했다. 
불현듯 나타난 천사는 불현듯 사라졌다. 정말로 느닷없이 천사는 학교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천사를 따르던 이들은 길 잃은 미아처럼 방황했고, 울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허나 일상은 예전의 일상이 될 수 없었다. 잡을 수 없으리라 믿었던 파랑새를 그토록 가까이에서 안아보았기에 더 이상 파랑새를 ‘없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지독한 처사였다. 다시금 천사에 대한 불문율이 시작되었다. 천사가 없었음에도 불문율은 지켜졌다. 이후로 누구도 천사에 대해 언급하는 이 없었다. 몇 해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하여 각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천사의 발밑에 몸을 던진 이들은 몇 해가 지나건 천사를 잊을 수 없었다. 여인을 만나고, 가정을 이루어도 지독히 혼탁했던 시간 속에 유일하게 빛나는 숭고한 빛은 잊히지 않고 시간을 더할수록 그리워져만 갔다. 
나는 1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천사를 따르는데 일조했던 나의 세 동료들은 모두 죽고 없다. 한 명은 졸업 후 술로 하루하루를 지나 보내다 재수 없게도 괴한의 칼을 맞고 죽었다. 한 명은 전쟁에 징집되어졌다 포로로 잡혀 고문당한 후 죽었다. 또 한 명은 성직자가 되었으나 욕망을 추스르지 못하여 파문당했고, 파멸했다. 그 밖에도 천사를 사랑한 이들의 부고를 수도 없이 들었다. 신의 것을 탐하려 한 죄였을까. 허나 나는 믿고 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천사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었으리라. 그립고 그리워서,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서 파랑새의 동경을 놓지 못해 사라져 버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도 어른거리는 천사의 빛을 쫓고만 있다.
쫓고만 있다. 
이제 당신에게로 갑니다. 나의 신이여. 눈을 감으면 그날 아침, 당신의 강림을 보게 됩니다. 지난 시간의 무지 속에서 이제야 개안하여 당신의 모습을 간절히 찾나이다. 나 이제 편안해지렵니다.


5.

이제 악마의 모델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겠군. 10년이 지나 변덕스러운 황제가 늙은 화가를 독촉해 그림을 완성하라 명했소. 늙은 화가는 모델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엔 너무 쇠약했기에 모델을 불러들이는 방법을 선택했지. 황제의 예배당에 장식될 그림의 모델을 찾는다는 소식에 많은 아름다운 이들이 자원했으나, 도무지 천사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 못되어 돌려보내고 말았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가면을 쓴 남자 한 명이 화가를 찾아왔다오. 인적이 끊긴 달도 없는 깊은 밤이었소.

“제가 당신의 그림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 늙은 화가는 모델들이 자신의 미모를 맹신하는 경우를 숱하게 봐 왔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곧 돌아갔네. 진실로 당신이 적임자라 생각한다면 그 가면을 벗어보시오.”

손님은 천천히 모자를 벗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가면을 풀었소. 그 순간, 늙은 화가는 경악에 할 말을 잃었고 이어 통곡하며 신에게 기도했소. 아! 어떤 색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아름다움! 숨 막히는 달콤한 향내! 정녕 이런 존재가 지상에 있단 말인가?

“당신은 신의 사자요?”
“아닙니다. 저는 천사도 아니고, 신의 사자도 아니며, 하물며 악마도 아닐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과 이렇게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당신이라면 눈치 챘을 거요. 그렇소. 악마 역시 그 소년이었소. 10년이 지나 더 늙어버린 화가와 만나게 된 소년이었단 말이오!

“우리는 길고도 짧은 시간을 걸어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신의 은총이 있었다면 그것은 소년이 성년으로 성장할 만큼의 시간일 테지요.”

늙은 화가는 다시금 신의 이름을 빌어 기도를 올리고 작업에 착수했소. 청년은 늙은 화가의 곁에서 악마의 모델로 지냄과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게 됐소. 늙은 화가는 오랜 시간 작업이 힘들 정도로 약해졌지만, 악마의 그림을 그리며 마치 진짜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 것처럼 변모했다오.
반년의 시간이 흘러 그림은 완성되었소. 그림을 완성하자마자 늙은 화가의 생명은 끝났소. 많은 제자를 두지 않았고 또 결혼조차 하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을 오직 늘 가면을 쓰며 묵묵히 작업을 돕던 청년이 지켰소.
천사와 악마가 칼을 맞대고 서로를 바라보는 구도의 그림이었다오. 하얀 날개의 벌거벗은 천사는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잔혹하고 섬뜩한 강건함을 지니고 있었소. 반대로 검은 날개의 붉은 포를 둘러쓴 악마는 아주 유혹적인 아우라를 뿜으며 천사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홀렸소. 천사라 하여 선의 상징이 아니었고, 악마라 하여 악의 상징이 아니었소. 종교화라는 통념을 무참히 부수고 오로지 천사와 악마의 미(美)만을 추구한 그림이었소. 
뒤의 이야기는 당신도 잘 알 것이오. 그림을 가지러 온 황제의 부하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간 후로 그 그림은 제국의 화제가 되었소. 대부분의 사람은 그림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에 눈물을 흘렸지만,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그림에 맹렬한 증오를 퍼붓기도 했소. 또 어떤 이들은 그림 속의 인물에게 연정을 느끼기도 했을 거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사람들의 마음을 강렬하게 뒤흔드는 그 그림을 교회에서는 이단으로 여기고 불태우려고 했소. 하지만 교회의 움직임을 감지한 황제는 종전보다 강렬하게 그림을 원했소. 사람을 시켜 그림을 가져 오게 했으나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영영 실종되고 말았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 그림을 훔쳐갔다는 이야기도,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한 연유는 아무도 모르오. 다만 그림에 미친 자가 저지를 소행임을 막연히 추측한 뿐이오. 
사람들이 그림의 행방을 찾으려 늙은 화가의 화실을 뒤졌지만 일지 몇 권과 초안 스케치 몇 장외엔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었소. 일지에는 그림의 모델이 동일 인물이며, 그림을 그릴 수 있어 행복했다는 말과 유언이 남겨져 있었소. 남은 재산을 마지막 제자에게 넘긴다는 짧은 유언이었소. 스케치는 제국의 세력가들이 거둬들여 그들의 컬렉션으로 삼았고, 일지와 재산은 유언에 따라 마지막 제자에게 돌아가게 되었지. 그렇게 <천사와 악마>를 둘러싼 사건은 일단락되었다오. 내가 아는 것도 여기까지가 전부요. 운 좋게도 늙은 화가의 일지를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소. 
궁금하지 않소? 도대체 천사가 어째서 악마가 되었는지. 세상을 위협할 경국지색이라면 살아온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텐데…… 앞으로 그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위험한 미모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파멸시켰고 그 피로 악마가 되었는지!


6.

좁은 건물이야. 침대 하나, 탁자 하나 간신히 들어갈 작은 방이지. 거기다 벽도 얇아. 옆방 침대가 삐걱대거나 심지어 펜이 사각대는 소리도 잘 들리지.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나는 평소에 옆방 청년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 늘 신기한 가면을 쓰고 다니니까.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마. 듣기 싫어도 들린다니까. 어젯밤의 일이야. 바스티타 선생의 재산 분배가 끝난 날이었지? 제자라고 들었는데.
청년은 자정이 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어. 그 층에는 청년과 나 밖에 살지 않으니까. 오늘은 늦게 들어왔군, 싶었지. 마침 나는 고향에 두고 온 마누라랑 토끼 같은 애새끼들 생각에 한잔 하는 중이었다네.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고, 한동안 덜그럭 거리는 소리도 들렸어. 어느 정도의 소음은 서로 양해를 구하고 사는 편이야. 내가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해 헛소릴 지껄여도 청년은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아무튼 소릴 들으니 그림이라도 그리는가 싶었지. 
가끔 거기서 그림을 그렸을 거야. 목탄이 갉히는 소리가 들리곤 했으니까. 사실 난 그 소리가 좋았어. 묘하게 마음의 두터운 고독을 살살 긁어내는 느낌이거든. 비좁은 방에, 여기 수도처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혼자라는 고독감은 뭔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다고. 타지에서 온 사람은 더 그렇지.
하여간 여느 때처럼 목탄 갉히는 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눈을 감고, 청년의 손짓을 상상해봤지. 자네들도 상상해보게. 첫 소리가 무겁게 긁히면 그건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는 거야. 뭉툭한 소리가 난다면 곡선을, 균일하고 날카롭다면 직선을, 짧게 끊어 치는 소리가 들린다면 세밀하게 찍어냈다는 의미지. 나 같은 목수 나부랭이라도 알만했어. 처녀의 몸처럼 섬세한 그림임을 짐작케 했지.
주저함이 없는 소리였네. 평소보다 강한 필치였어. 단단히 마음먹었군,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노래하듯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지. 나는 깜짝 놀라 귀를 기울였어. 가끔 청년과 지나치며 인사를 나누는데 말이야. 근사한 목소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말하는 걸 들으니 가슴이 다 쿵덕거리더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이었지만 꼭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 앉혀놓고 말하는 것 같았어.

“마음의 더러움을 물로 씻어내진 못합니다. 몸에 묻은 피와 욕망의 증거는 씻어낼 수 있을지언정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어요. 당신들도 질릴 만큼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운명과 시간이라는 세속의 더러움에 젖었다고 생각했었고, 사라지지 않는 더러움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함을 알고 한없이 슬펐습니다. 헌데 그것들이 언제부턴가 더럽다고 생각되지 않게 되었어요.
내게 남겨진 것들은 날 사랑했던 사람들의 흔적이었으니까. 흐드러진 그들의 피도, 욕정도 모두 다른 형태를 지닌 많은 사랑이었으니까. 나는 더럽지 않고 지상의 사랑에 젖어버려 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자(使者)라고 생각했지요.  
나는 지상에서 사랑이라는 금단의 과실을 깨물어 이젠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나는 그저 내게로 향하는 사랑을 끌어안는 방법 외엔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랑, 사랑, 사랑.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존재일 따름으로.”

자조적으로 웃는 목소리가 흔들렸지. 내 마음이 다 아프더군. 청년의 말은 반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괴로워했어. 목탄 갉히는 소리가 한동안 멈췄다네. 침묵에 젖자 나도 숨죽였어. 방해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우습게도 도둑처럼 살금살금 술병을 입에 대고 꿀꺽 소리도 내지 않으며 마셨어. 십여 분이 지나자 다시 그림을 그렸고, 늦은 새벽이 될 동안 계속되었다네. 동이 터올 무렵에 목소리가 또 들렸어.  

“그렇게 사랑한다면 왜 데려가지 않느냐고. 그건 어리석은 말이에요. 진실로 사랑했기에 데려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재미가 없어. 차라리 몰랐다면 괴로워할 수 있었을 테고, 절벽에서 몸이라도 던졌을 테니. 나의 삶이 당신들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되니까. 알아버렸으니까. 누군가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많은 사랑의 형태 속에 나를 죽여 쟁취하는 사랑도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지요. 해 주지 못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천국에 계신지요? 미안해요. 안내해주지 못해서. 하지만 그리 늦진 않을 거예요. 신의 뜻을 거부하고 지상의 사랑에 도취된 천사는 머잖아 큰 벌을 받겠지요. 나는 용서를 바라지 않아. 신께서 진실로 당신의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단지 사랑했기에 파멸한 내 사랑했던 이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셨길.”

처음엔 연애 문제인가 했는데, 말을 듣다보니 아니어 보였어. 사람에겐 각자의 무게도, 고통도 있어. 나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 아직 서른도 안돼 보이던 청년인데, 목소리에 사무친 절망이 깊었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내 몰았을까?

“사랑합니다. 사랑했었습니다. 앞으로도 사랑할게요. 잊지 않겠어요. 나를 사랑하세요.” 

기어코 목소리가 흔들렸다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그에게 너무 큰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지. 그에게 죄를 지게 함으로써 내가 편해지려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사랑하고 싶었어. 그를 사랑하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 자네들도 분명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야.

“전부 용서합니다. 어떻게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청년은 마지막 의무인양 말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네. 아침이 밝아올 때 까지 울고, 또 울었지. 말일세, 나는 그가 천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우리네들 인간의 사랑은 세속적이기 짝이 없어서, 사랑하면서 상처를 받고 동시에 타락하지. 내 생각일 뿐이야. 그런데 어느 날, 눈앞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천사가 내려온 거야. 아름답고 성스러운 천사지. 그를 사랑하면 신을 직접 사랑할 수 있고, 동시에 구원받아. 우리 인간에게 가당치 않은 사랑이어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다 해도, 죽어서 ‘나는 천사를 사랑했다’라고 나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어.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청년은 아마 다시 그 방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짐을 싸는 소릴 들었거든. 다행인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는 마누라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싶거든. 혹시 모를 일이야, 청년의 가면 밑의 얼굴을 보았다면 생각이 바뀌었을지도. 기회는 영원히 날아가 버렸으니 주어진 내 현실에 충실해야지.
아, 그 방에 남겨진 그림. 문이 잠겨있지 않아서 몰래 열고 들어가 봤네. 청년의 그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어. 생각대로 멋진 솜씨였네. 천사가...... 천사가 죽은 악마를 안고 우는 모습이었지. 바스티타 선생의 그림 중에 그런 그림이 있지 않았나? 성모가 신의 아들을 안고 우시는 모습. 아, 그래. 피에타(Pieta). 그런 이름이었지. 천사와 악마의 피에타였어. 그런데, 천사와 악마가 아무리 봐도 동일인물로 보였다네. 이상한 일이지?

pieta.jpg


일단 그림은 그 방에 그대로 놔뒀네. 나중에 호사가들이 알아서 처분하지 않겠나? 내가 가지고 싶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아. 그 그림만 보고 살고 싶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그림 모퉁이에 묘한 글귀가 있었어. 그런데 워낙 흘려 써서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더군. 두 가지 의미로 읽히는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천사는 어디에도 없다(Nowhere).
천사는 지금 여기에 있다(NowHere).


- <한국환상문학단편선 2> 수록작
mirror
댓글 1
  • No Profile
    하산 14.11.30 21:21 댓글

    대단한 필력이십니다. 좋은 작품을 얻으셨음을 깊이 축하드립니다.

    문피아의 제 서재에도 한 번 들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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