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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길 잃은 밤

2015.02.28 23:0002.28

길 잃은 밤

 

 

 

북쪽 숲에는 새하얀 자작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는 요정이 있다고 했다. ‘큰 전쟁이전에 흰 옷을 입은 세 마법사가 요정을 그 곳에 묶어두었다고 했다. 요정은 오로라가 내리는 밤이면 숨이 막힐 정도로 예쁜 모습을 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홀려 죽인다고 했다. 이건 욘이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였다.

마을을 위한 어떠한 의무도 주어지지 않았던 어린 시절, 욘은 친구들과 요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자작나무는 원래 하얀데, 새하얀 자작나무란 어떤 나무일까. 요정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작나무 아래에 묶이고 말았을까. 숨이 막힐 정도로 예쁘다는 요정은 어떤 모습인 걸까.

북쪽 숲에 가보자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계집애들처럼 겁을 먹은 거냐, 어른들의 거짓말이다, 진짜라고 해도 요정 같은 게 뭐가 무섭냐……. 그런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다들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북쪽 숲으로 향했었다.

마을은 거대한 숲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마을 서쪽으로 펼쳐진 거대한 잡목림을 서쪽 숲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을 북쪽으로 개울 너머에 펼쳐진 숲은 북쪽 숲이라고 불렀다.

어른들은 숲을 구분해서 불렀지만, 사실 두 숲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커다란 숲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자작나무 요정 이야기의 말미에 어른들이 덧붙이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북쪽 숲에 들어가선 안 된다. 요정에게 홀려서 붙잡혀버리고 만단다.

북쪽 숲은 아이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들어가길 꺼리는 곳이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매일같이 사냥을 하거나 장작을 모으는 서쪽 숲과 달리, 북쪽 숲에서는 금방 길을 잃고 만다고 했다.

잡목 그루터기와 무성한 덤불을 뚫고 숲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은 모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북쪽 숲의 나무들은 기이하게도 모두 크기나 굵기가 비슷했으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어느 쪽을 돌아 보아도 같은 곳을 보는 것처럼 똑같은 풍경만 펼쳐져 있었다. 평평하게 다듬어진 대지 위로 가로 세로 같은 간격을 두고 자라난 나무들 사이 사이마다 수백 수천의 길이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숲이라는 건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대지는 울퉁불퉁해야 하고, 가지와 바위들은 시야를 가로막아야 하며, 나무들은 가지런하게 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기이한 풍경에 아이들은 겁에 질렸다. 숲에 들어설 때의 호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이들은 모두 한데 뭉쳐 걸었고, 속삭이는 대화조차도 점점 줄어들었다. 걷는 속도도 점점 느려져 갔다.

늘어진 가지가 얼굴을 스친 것인지 나무 뿌리에 발이 걸린 것인지, 한 녀석이 빽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신호로 모두 오던 길을 돌아서 정신 없이 달리기 시작했었다. 욘은 제일 앞서 달리는 겁쟁이는 되지 않도록, 그렇다고 제일 꼴찌가 되는 위험은 피하도록 속도를 조절했었다. 한 번은 달리는 아이들 무리에서 자신의 순서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었다.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 얼핏 보였던 것 같았다. 하얗지도 않고 요정 같아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어린 시절, 무사히 숲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이 숲의 입구에나 겨우 들어섰다 싶을 정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여름의 한낮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욘은 서쪽 숲에서 덫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날 내린 눈 탓에 수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빼빼 마른 겨울 토끼가 한 마리. 다른 짐승에게 뜯어 먹혔는지 덫에 끼인 앞발 하나만 남아있던 여우. 큰 사슴이나 순록을 발견하면 사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언제든 총을 쏠 수 있게 들고서 주변을 살피는데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마을로 향한 방향을 표시해둔 나무를 놓친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멈춰서야 했을지도 모른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더듬어 되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쪽 숲에서 사냥과 덫 살피는 임무를 맡은 지 두 해를 채워가는데,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싫었다. 총이 있다고 하지만 해질 무렵에 맹수가 있는 숲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욘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조금만 걸으면 눈에 익은 바위나, 눈에 익은 나무가 나타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저 바위만 넘어가면 분명히. 그렇게 걷는 동안에 가뜩이나 울창한 가지로 그늘진 숲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버렸다.

욘은 부러진 가지를 주워 다듬고, 각반 삼아 무릎에 둘렀던 낡은 천을 가지 끝에 감아 횃불을 만들었다. 횃불에 의지해 주변을 살핀 그는 가뜩이나 추운 몸에 더욱 차가운 한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몇 시간이나 걸은 끝에 자신이 방향감각마저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가지런하게 늘어선 나무들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느새 북쪽 숲으로 건너와버렸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어머니는 조심하라는 말을 했다. 욘은 서쪽 숲에서는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도 길을 잃고 심지어 북쪽 숲까지 흘러 들어왔다. 대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거지?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무에서 쌓여있던 눈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 소리에 욘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횃불이나 총을 눈 쌓인 땅 위에 떨어뜨릴 뻔 했다.

횃불이야 다시 불을 붙이면 되지만 총은 안 된다. 총은 큰 전쟁이전의 물건이고, 마을에는 이런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총은 몇 년치의 가죽과 같은 값어치를 가진 소중한 물건이다. 절대로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욘은 잠깐 망설이다가 총을 어깨에 메었다. 어차피 한 손으로 횃불을 들고 있는 상황인데다 장갑을 낀 채로 총을 쏠 수는 없다. 맹수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수 밖에.

서쪽 숲에서 북쪽 숲으로 들어온 거라면, 방향만 제대로 짚으면 마을 쪽으로 나갈 수 있을 거였다. 이 곳의 나무들은 서로 간격을 두고 서 있어서 서쪽 숲과는 달리 제법 하늘이 잘 보였다. 욘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오늘은 달이 없는 밤이었다. 마을에는 별을 보고 방위를 알아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개 나무 그늘로 하늘이 가려진 숲에서 일하는 욘은 그런 지식을 굳이 배우지 않았었다.

긴 숨을 쉬자 입김이 연기처럼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하늘로 올라가는 입김 끝에 푸른 빛이 어른거렸다. 곧 그 의미를 깨닫고 욘은 혀를 찼다.

푸른 연기 같은 옅은 빛이 서서히 밤 하늘을 채우고, 이리저리 뭉치는가 싶더니 구불구불 휘어진 빛의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로라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녁을 먹고 잠깐 집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을지도 모른다. 길을 잃고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지금 있는 이 곳이 북쪽 숲이 아니었다면.

새하얀 자작나무 아래에 매여 있는 요정은 오로라가 번지는 밤이면 나타나 사람을 홀린다고 했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자 욘은 다시 혀를 찼다. 십 년도 전에 북쪽 숲에 들어왔다가 겁먹고 도망친 꼬마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한기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을 한 상황이니까 더 바보처럼 굴지는 말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욘은 짐짓 태연한 척 가까운 나무에 손을 올렸다. 무심히 나무껍질을 쓰다듬는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통해서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감촉은 깊게 패인 홈이었다.

욘은 횃불로 나무를 비추었다. 나무 줄기에 패여 있는 홈은 짐승이 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날붙이로 나무에 표식을 해둔 거였다. 마을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길잡이 표식이었다. 살았다! 이건 북쪽 숲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들어오고 나가는 길을 표시해둔 거다. 욘은 누군지 모를 마을의 주민에게 마음 속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마을로 돌아가 집으로 간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춥고 배가 고파졌지만 그건 곧 맞이하게 될 따뜻한 난로와 몹시 늦은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모와 형제들이 떠오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아버지가 욘의 어리석은 행동에 화를 내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아버지는 몇몇 주민들과 함께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욘도 함께 데려가겠다고 약속했었다.

마을 어른들은 겨울이면 남쪽으로 하루를 꼬박 내려가 얼어붙은 호수를 건넜다. 그리고 호수 너머에 있는 마을 주민을 만나 말린 나무열매나 약초, 가죽 등을 넘겨주고 다른 것들을 받아왔다. 아버지가 욘에게 내준 총도 호수 너머 마을에서 온 것이었다.

욘의 마을이 숲 옆에 있듯이, 그 마을은 도시라는 곳 옆에 있다고 했다. 그 마을의 주민들은 도시에서 총이며 거울, 가볍고 매끈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냄비 등을 모은다고 했다. 도시를 본 적 없는 욘은 어릴 적에 억새처럼 자라난 총 덤불이나, 반짝이는 거울이 열리는 나무, 버섯처럼 한데 모여 오글오글 자라나는 냄비 같은 걸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실수를 한 욘에게 실망해서 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래들 중에서는 제일 먼저 여행에 가게 되는 거라고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 우울해져서 걸음이 느려졌다.

어쩌면 아버지 몰래 목걸이 같은 걸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청혼할 때 선물했다던 투명한 파란색 구슬이 들어간 예쁜 목걸이 같은 것을. 그런걸 손에 넣으면 미넷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면 미넷은 어머니가 좋은 날에 하듯이, 항상 걸고 있는 액막이 목걸이 위에 구슬 목걸이를 걸고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짓겠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자 오로라는 더 짙어져 있었다. 안개처럼 옅은 푸른 빛이 얇은 천을 겹쳐 늘어뜨린 것처럼 휘어지며 흔들렸다. 들릴 리 없는 음악에 맞춰 빛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분명히 들렸다. 희미한 음악 소리. 같은 간격을 두고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에 섞여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욘이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지만 음악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욘은 급히 두꺼운 가죽옷 목깃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추위와 습기로 얼어붙은 장갑이 목에 닿자 따끔거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장갑 낀 손가락 끝에, 어머니가 만들어준 액막이 목걸이가 닿았다. 욘은 어릴 적 할머니에게 배운 주문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불도 연기도 재도 검은 안개도 모든 악한 것은 내 곁으로 다가 오지 못하리라.

액막이 주문을 외웠는데도 음악처럼 들리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야만 들리는 가냘픈 소리였다. 바람 소리에 휩쓸려 몇 번이고 끊기면서도 계속해서 들렸다.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맑은 소리였다. 대체 무슨 악기를 쓰면 그런 소리를 만들 수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요정이 사람을 홀리려고 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 큰 바람이 불었다. 가지들이 흔들리고 눈이 쏟아지는 소리가 지나간 이후에 음악 소리는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면 점점 강해지는 바람에 음악이 지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액막이 주문이 사악한 것에게서 욘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 터. 서둘러서 숲을 빠져나가야 한다. 욘은 나무에 새겨진 길잡이 표식을 흘끔 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람과 추위를 피해 고개를 숙인 채 곁눈질로 이따금 표식을 확인하며 걷는다. 그렇게 걷다가 발이 멈춰 섰다. 푹 숙인 시야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타나던 나무 둥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북쪽 숲을 빠져 나온 걸까 싶어 고개를 들었다.

다다른 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마을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눈 앞에는 돌처럼 보이지만 돌이 아닌 것만 같은 튼튼해 보이는 회색 벽이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벽과 벽 사이에 금속 아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치와 연결된 금속 창살 문은 부식되어 여기저기 부스러져 나간 꼴이었지만 반쯤 열려 있었다.

저 곳에서 잠깐 바람을 피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문 쪽으로 다가가는 자신을 향해 욘은 그런 이유를 댔다. 그렇게 생각하며 몇 번째인가 내디딘 걸음에, 눈 쌓인 흙의 감촉이 아닌 단단하고 평평한 무언가가 밟혔다. 움찔 멈춰선 순간, 낡은 금속 아치에 불이 켜지더니 창살 문 앞에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자는 문 너머에서 걸어온 것이 아니었다. 땅 속으로부터 떠오른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욘은 반사적으로 횃불을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이로 물어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허겁지겁 어깨에 멘 총을 내려 여자를 겨누었다.

여자는 욘의 공격적인 태세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여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양 손을 벌려 보이고, 문 안쪽을 가리켰다. 무언가 말하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고 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욘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총의 가늠쇠 너머로 여자를 지켜보았다.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옇게 보일 정도로 하얀 모습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하얗고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눈 내린 숲 속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욘은 한 여름에도 그렇게 짧고 얇은 옷을 입은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하얀 여자의 모습은 아지랑이처럼 흐릿했고, 춤추듯 하늘거리며 움직일 때면 몸의 일부가 진짜 아지랑이처럼 이지러지다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곤 했다.

이것이 바로 그 요정이구나. 공포가 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면서도 욘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는 예뻤다. 욘이 이제껏 본 마을의 그 누구보다도, 상상하거나 꿈에서 본 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동그랗고 하얀 어깨 위로 늘어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워 보였다. 가슴을 겨우 가린 것처럼 깊게 패인 옷은 똑바로 보기 부끄러웠다. 그리고 봄의 어린 가지처럼 가느다랗고 유연해 보이는 허리와 그 아래의…….

나는 지금 요정에게 홀리고 있는 걸까?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미소를 짓거나 손짓을 하는 요정을 정신 없이 바라보다가 이 곳에서 얼어 죽게 되는 걸까? 욘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욘은 소리가 난 쪽으로 총을 돌리려고 했지만 추위에 얼어붙은 채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은 생각만큼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생각한 대로 즉각 움직여 준 것은 눈동자뿐이었다. 눈 밟는 소리가 멈추고 누군가가 낡은 창살 문 안쪽에 모습을 나타냈다. 욘과 비슷한 두꺼운 가죽 옷을 두른 사람이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

 

 

 

난로는 따뜻했다. 욘의 눈 앞에 있는 벽난로는 이제껏 보아온 것처럼 두터운 판자나 통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새하얀 돌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앞에는 불꽃을 휘감은 맹수처럼 생긴 그림이 새겨져 있는 금속 판이 덧대어져 있는 요란한 것이었다. 그래도 난로는 난로였고, 장작불은 장작불이었다. 친숙한 것과 비슷한 점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안도감을 주었다.

남자가 욘에게 컵을 내밀었다. 컵은 욘의 마을에서 흔히 쓰는 것처럼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여행에서 가져온 어머니의 냄비처럼 가볍고 매끈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컵을 받아 들다가 그 낯설고 뜨거운 감촉에 욘은 놀랐다. 하지만 컵 안에 담겨 있는 것은 감기에 걸렸을 때 어머니가 끓여주는 차와 같은 냄새가 났다.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욘은 차를 마셨다. 몇 모금 마시자 뼛속까지 얼어붙은 것 같은 몸이 천천히 녹는 것 같았다. 두꺼운 가죽 코트가 무겁게 느껴져 욘은 코트의 단추와 끈을 풀고 앞자락을 뒤로 젖혀 열었다.

남자는 다른 컵을 들고 와 욘처럼 난로 앞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달싹이면서도 좀처럼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창살 문 앞에서 요정을 지켜보고 있을 때도 그랬다. 남자는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했었다. 들어 와. 쉰 듯도 하고 찢어지는 듯도 한 이상한 목소리였다.

남자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욘은 슬쩍 방 안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있는 방은 언뜻 보기에 약초 채집과 관리의 의무를 맡은 마을 주민의 집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천장에는 약초 다발이 수없이 매달려 있고, 탁자에는 말린 약초잎들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탁자는 나무가 아니라 욘이 들고 있는 컵처럼 매끈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위에는 도무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도구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탁자 곁에 있는 의자는 금속과 가죽으로 만든 기묘한 괴물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어머니의 찬장 같은 것이 벽을 따라 줄지어서 늘어서 있고, 그 안에는 작게 자른 두툼한 나무판자 같은 것이 잔뜩 채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욘도 안다. 책이라는 물건이다. 지난 해에 마을 청년들과 함께 순록 떼를 쫓았을 때 보았었다. 촌장님의 아들이 품 안에서 책을 꺼냈었다. 불쏘시개를 모아 붙여놓은 물건이라고 알려주었었다. 얇고 가벼우면서 금방 불이 붙었던 불쏘시개에는 이상한 무늬가 점점이 찍혀 있었다. 청년들은 그것이 나무결 무늬 같은 걸 거라고 추측했었다. ‘큰 전쟁이전에는 나무를 이렇게 얇게 잘라 불쏘시개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감탄했었다.

밖에서 보았던, 돌처럼 보이지만 돌이 아닌 것 같은 회색 벽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기묘한 형태의 집에 들어와 기묘한 물건이 가득 차 있는 방에서 불을 쬐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섭다기보다는 신기한 기분이 더 컸다.

아마도 이 곳은 큰 전쟁이전에 만들어진 집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쏘시개가 가득 채워져 있는 걸까. 책이라는 것 하나면 한참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이 곳은 큰 전쟁이전에 불쏘시개를 만드는 작업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흰 옷을 입은 세 마법사는 요정을 이곳에 가두어두고 불쏘시개를 만들게 했던 걸까.

 “, 여기 왜?”

겨우 남자가 소리를 입 밖으로 끄집어 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어떻게 찾아온 것인지 묻는 모양이었다. 욘은 자신이 서쪽 숲에서 사냥과 덫 살피는 의무를 맡은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숲에서 길을 잃은 일과, 정신을 차려보니 북쪽 숲까지 흘러 들어와버린 일도 들려주었다. 남자는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으나, 곧 천천히 이야기에 끼어들어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여전히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지만 처음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사정 이야기를 마치자 욘은 그 동안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쪽은 왜 이 곳에 있는 거지요?”

요정에게 홀려서.”

남자는 대답하고는 슬쩍 웃었다. 입술을 비틀어 찡그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 웃음이었다. 문득 이 사람은 요정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새하얀 요정은 이야기와 달리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 역시 이 사람처럼 무언가를 빼앗기고 여기에 묶여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욘은 더럭 겁이 났다.

나도 이제 여기서 떠날 수 없게 되는 건가요?”

남자는 욘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더니 일어났다. 남자는 탁자 위에 놓인 마른 약초잎과 기묘한 도구들을 한쪽으로 밀어 치우기 시작했다. 욘은 탁자로 다가가 남자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탁자에는 얇은 천인지 가죽인지가 깔려 있었다. 반드레한 윤이 나고 질겨 보이는 것을 보면 가죽 같긴 한데,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얇게 손질된 것을 보면 역시 큰 전쟁이전의 물건인 것 같았다. 가죽 위에는 기묘한 문양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남자는 녹색 쐐기 같은 것이 잔뜩 그려진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숲. 서쪽 숲.”

손가락이 조금 이동했다.

이쪽 북쪽 숲. 그리고 여기 지금 있는 곳.”

남자의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작고 섬세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보았던 불쏘시개에 남아있던 기묘한 나뭇결 흔적처럼 보였다.

  “여기 큰 전쟁전에 휴양지였어. 전쟁 피해 없어. 방대한 양의 지식과 유물 남아 있어.”

욘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남자는 급히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욘은 남자의 행동과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해주길 바랬다. 욘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는 이제 여기서 못 떠나나요? 요정에게 홀려서 여기 갇히는 건가요? 당신처럼?”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욘을 보았다. 욘도 간절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수염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홀쭉한 양 볼과 찌푸려진 눈썹은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욘은 그 얼굴 어딘가에 낯익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한참 동안 욘을 보다가 빼곡히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가죽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벽을 따라 책이 가득 채워져 있는 찬장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욘은 대답만을 기다리면서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요정은 네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다.”

 

 

 

길찾기 표식을 거꾸로 따라가면서 스물 네 번째 나무. 그 나무를 왼쪽으로 돌아서 보이는 길을 따라서 쭉 간다. 욘은 남자가 알려준 길을 입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외웠다. 충분히 외웠다고 생각하자 코트의 앞을 단단히 여몄다.

숲의 아침은 추웠다. 하지만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따뜻한 음식도 먹었으니 충분히 걸을 만 했다. 막 회색 돌집의 문을 나선 욘에게 뒤따라 나온 남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예전에 요정에게 홀려 죽은 남자 유물이야. 마을에 전해 줘.”

책에서 떼어낸 얇은 불쏘시개로 감싼 작은 물건이었다. 욘은 코트에 달린 주머니의 단추를 풀고 꾸러미를 넣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는 이미 문을 닫고 들어가버린 후였다. 욘은 잠시 그 문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지난 밤보다는 많이 매끄러워져 있었고, 말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목소리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아서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욘은 나무 하나 없이 잡초들만 무성하게 자라있는 뜰을 지나 어제 지나온 철창 문으로 향했다. 지난 밤에 보았던 요정은 없었다. 아쉬운 마음과 다행이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문을 나서서 몇 걸음을 걷는데 지난 밤에 느꼈던 위화감이 드는 바닥이 또 다시 발에 밟혔다. 철창문 쪽에서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난 밤 오로라가 내릴 때 멀리서 들렸던 그 음악이었다. 곧 음악은 귀를 아프게 하는 찢어지는 소리로 바뀌더니 멈춰버렸다.

욘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요정이 나타나 있었다. 새하얀 요정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방글방글 웃으면서 양 팔을 벌려 보이고 문 안쪽을 가리켰다. 욘은 다시는 볼 수 없을 새하얀 요정의 손짓과 미소를 지켜보았다. 문득 요정이 가리키는 손 끝을 따라 녹슬어 기울어진 아치 위를 보았다. 아치의 중앙에는 새하얗게 칠해진 자작나무가 그려진 둥근 금속 원판이 달려 있었다.

한동안은 잊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요정의 모습을 눈에 새기고, 욘은 걷기 시작했다. 길찾기 표식을 거꾸로 따라가면서 스물 네 번째 나무. 다시는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 깊게 표식을 살피고 표식이 달린 나무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스물 네 번째 나무에 도착하자 욘은 왼쪽으로 돌아섰다. 같은 간격을 두고 늘어선 나무들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남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제 똑바로 걷기만 하면 마을 북쪽으로 흐르는 개울의 하류 쪽으로 나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멀리 마을이 보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욘은 남자의 얼굴에서 느꼈던 낯익은 친근함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욘은 장갑을 벗고 코트 주머니 단추를 열어 남자가 준 꾸러미를 꺼냈다. 얇은 불쏘시개에 싸여 있는 것은 가늘게 자른 가죽을 색실로 감아 만든 액막이 목걸이었다.

어머니들이 만들어주는 액막이 목걸이에는 가문의 문양과 색이 들어간다. 모계를 따라 3대의 문양이 색실로 짜여 순서대로 새겨진다. 욘은 목걸이 안에서 낯익은 문양을 찾아내었다. 남자가 맡긴 목걸이는 욘의 어머니가 늘 목에 걸고 있는 액막이 목걸이와 똑같았으며, 욘의 것과는 두 부분이 같았다.

어릴 적, 북쪽 숲에 몰래 들어갔다가 나온 일은 하루도 못 가서 입 싼 녀석 하나 때문에 온 마을에 알려지고 말았었다. 아버지는 마을의 규칙을 어기고 말을 듣지 않는 녀석은 혼이 나야 한다고 큰 소리로 고함을 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밀어내고는 욘을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욘을 단단히 안은 채 큰 소리로 어린아이처럼 울었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운 것은 욘의 기억 속에 그때 한 번뿐이었다.

욘은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 안에 보이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가지런히 자란 나무로 이루어진 숲뿐이었다. 무언지 모를 안타까운 마음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난 밤 남자가 했던 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으며, 지금은 어서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

욘은 다시 고개를 돌려 눈 앞에 펼쳐진 똑바른 길을 향했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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