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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돌과 별

2015.01.31 22:1501.31

돌과 별

 

 

 

날카로운 경고음이 숲의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두 번째 경고음이 울리기도 전에 벌목 인부들은 모두 멀찌감치 물러났다.

세 번째 경고음이 빼곡하게 늘어선 전나무 사이로 완전히 사라지자 핀은 힘주어 레버를 당겼다. 벌목차에 연결된 세 개의 밀대가 톱질이 끝난 전나무에 달라붙어 밀기 시작했다지름 2미터의 굵은 전나무는 흔들리면서도 한동안 저항하듯 버티다가 결국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굵은 통나무가 둥치에서 떨어져 나와 둘러친 강화섬유 그물에 무사히 걸린 것을 확인하자 핀은 어떠냐는 듯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오래 전그의 아버지는 동료들과 함께 전동 톱을 들고 나무를 베었다벌목꾼들은 벌목차 조종석의 붉은 버튼을 누르는 대신함께 목소리를 높여 경고의 외침을 내질렀다마지막 도끼질을 당한 나무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쓰러져 숲 전체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지나간 과거의 일일 뿐이다지금의 자연산 목재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된다숲은 국가가 관리하며주당 벌목량도 법으로 정해져 있다재벌들도 자연 목재로 만든 가구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큰 돈을 지불하고도 몇 달을 기다려야 하는 시대다나무나 숲을 상하게 할 위험이 있는 옛날 방식의 벌목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핀은 벌목차의 좁은 조종석 입구에서 빠져 나오려 몸을 비틀며 끙 하는 한숨 반 신음 반의 소리를 내었다마누라의 잔소리가 아니더라도 매년 착실하게 늘어나는 체중을 이제 정말 신경 써야 할 지도 모르겠다이대로라면 벌목차 조종석에 배가 끼이고 말겠어.

한껏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면서 그물에 걸린 나무가 상한 데는 없는지 살피던 벌목감독 로완이 핀을 향해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구부려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잘 했어핀 영감잔가지 하나 상한 것 없이 깨끗하군.”

이게 여덟 그루 째지?”

그래오늘 벌목은 이게 끝이야뒤처리는 젊은 애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만 끝내지.”

로완이 젊은 벌목 인부들에게 지시하는 동안핀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젊은이에게 벌목차의 열쇠와 안전모를 던져주었다.

지시를 마친 로완이 서류 몇 장을 얇은 서류철에 대충 구겨 넣고는 핀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저녁에 우리 집에 오지 않겠나에바가 며칠 집을 비운다면서마누라가 자네를 저녁에 초대하라더군시내는 관광객들로 붐빌 테니 우리 집에서 식사하고 카드라도 하는 게 어때?”

핀은 고개를 저었다.

고맙네자네 부인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줘하지만 오늘은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안되겠군.”

무슨 손님이 오길래 싱글벙글이야부인이 없는 틈에 젊은 아가씨라도 끌어들이는 건가?”

자네는 늙을수록 헛소리만 늘어가는군오늘 오는 손님은 에이든이야.”

두 사람은 한동안 입을 다물어야 했다벌목한 나무의 뿌리를 뽑아낸 후 아직 땅을 골라두지 않은 곳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대충 흙을 채워둔 구덩이에 발이 빠지거나끊어져 남은 나무 뿌리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었다.

성기게 흙을 다져놓은 지역을 지나 겨우 숲의 가장자리에 이르자 한걸음 뒤쳐져 있던 로완이 서류철을 휘둘러 핀의 등을 쳤다.

기억났어에이든이라면 자네 사촌이지자네 집에서 몇 년 같이 살았었지자네가 자주 괴롭혔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60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알고 지낸 친구라는 것은 이따금 아주 곤란하다쓸데 없는 기억까지 공유하게 되어버리니까핀은 힘껏 전신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풍겨보았다하지만 로완에게 그 감정은 전혀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로완은 웃으면서 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그래. 에이든. 성냥개비처럼 마르고 볼품없이 생긴 친구였지달리기며 던지기며 싸움이며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었는데.”

  “시끄러워!”

핀은 로완을 향해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어린 시절에는 싸움으로나이가 들어서는 노동으로 단련된 단단하고 큼직한 주먹이 누구에게나 위협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반사적으로 치켜들긴 했지만, 오랜 친구 로완에게 주먹을 날릴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슬그머니 팔을 내려야 했다.

에이든은… 뭐랄까천재라고우리가 쓰는 벌목차를 만드는 그 뭐더라… 그 무슨 큰 회사에 기술 이사로 있단 말이야.”

허어그건 몰랐군하지만 자네와 에이든은 사이가 나빴잖아자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연락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벌목 사무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멀리 보이는 도로 쪽으로 요란한 음악을 튼 스포츠카 두 대가 경쟁하듯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확실히 오늘 밤에 시내는 관광객으로 붐빌 모양이었다.

 

 

 

작달막하고 깡마른 체구에 광택 없는 짙은 회색 양복을 걸친 남자가 검고 커다란 자동차에 기대어 서서 핀의 낡은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핀은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고집스럽게 턱을 내밀고 있는 표정은 아주 오래 전에이든이 핀의 집에 처음 왔던 그 날과 똑같았다차이라면 지금 핀의 시야에 보이는 것이 50여 년 만큼의 세월이 얹혀져 있는 노인이라는 것이었다.

오래 전의 그 날핀의 큰아버지는 이혼이 확정될 때까지만 맡아달라며 아들 에이든을 데려왔었다핀이 태어나서 처음 만난 두 살 많은 사촌은 자기 아버지의 자동차에 기대어 서서 고집스럽고 못마땅한 얼굴로 핀의 집을 노려보고 있었다.

로완의 말이 맞다로완의 기억도 모두 맞다그 첫 만남부터 핀은 에이든이 싫었다온 동네에 소문난 말썽꾼이었던 일곱 살의 핀에게 있어, 자신의 집과 부모를 향해 나쁜 얼굴을 하는 녀석은 물리쳐야 할 적일 뿐이었다그런 녀석에게 어머니가 달려가 끌어안아준 것도 싫었다가엾기도 하지하며 에이든의 손을 잡아준 것도, 뺨을 쓰다듬어 준 것도 싫었다.

마지막으로 에이든을 만났던 것이 언제였더라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신문이며 텔레비전에서 에이든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긴 했었다천재 발명가무슨 기술을 발표하다천재 발명가무슨 회사와 기술 제휴 계약을 맺다무슨 회사에서 발명가 에이든을 차지하다.

신문 기사나 텔레비전 영상에서 보여지는 에이든의 모습에는 핀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만큼 세월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었다하지만 실제로 만났던 마지막 기억 속에는 고집스럽고 얄미운 에이든의 얼굴에 주름 하나 없었다확실한 건 에이든이 핀의 두 자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그 아이들 또한 오래 전에 다 자라 도시로 나갔으며결혼해서 각자 자기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데도.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나 생각하고 나자 서먹함이 강하게 밀려왔다하지만 핀은 일단 활기차게 말을 붙여보기로 했다.

핀은 검은 자동차 옆에 낡은 픽업 트럭을 나란히 세우고 내려섰다.

여어사촌오랜만이야.”

에이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핀을 바라보았다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턱수염이 없고 몇 십 년쯤 젊다고 생각하면 아는 얼굴이라는 판단을 내렸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나직하게 대답했다.

늙었군살쪘고.”

툭 하고 날아온 짧은 두 마디에 핀은 주먹을 날려야 하나 재치 있게 받아 쳐야 하나를 잠시 고민했다하지만 시선을 마주한 에이든의 얼굴을 보자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졌다.

몇 십 년 만에 만난 사촌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마르고 안색이 안 좋은 얼굴에는 거미줄처럼 주름이 번져 있었고움푹 패인 볼과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있었다나이보다 터무니없이 늙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우리 집 앞에 사신이 나타난 줄 알았군.”

핀은 픽 웃고 몸을 돌려 집 쪽을 향했지만 에이든은 검은 자동차 문에 등과 엉덩이를 붙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여기 계속 서 있을 건가?”

집이… 많이 낡았군.”

에이든은 눈을 찌푸린 채 낡은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마도 처음 이 집에 도착했던 때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렀던 때 사이의 언젠가를 생각하고 있겠지.

핀도 새삼 자신의 집을 찬찬히 보았다확실히 집은 많이 낡아 있다핀의 아버지가 이 집을 지었고핀은 이 곳에서 자라났다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는 에바와 결혼하여 이 곳에서 두 아이를 길렀다.

그래낡았지증축도 했고여기저기 수리도 계속 하고 있지만 이 정도 시간이 흐르니 어쩔 수가 없더군그래도 순수한 자연 목재를 원 없이 써서 지은 귀한 집이야나와 마누라가 세상을 뜰 때까지는 버텨주겠지.”

에이든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어떨지 몰라도핀은 오랜만에 만난 사촌과의 사이에서 자꾸 생겨나는 침묵이 불편했다.

그래에이든이제 와서 갑자기 여기는 왜 찾아온 거야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어.”

그 질문에 에이든은 겨우 집에서 눈을 떼고 시선을 땅으로 향했다그리고 고집스러운 턱을 우물거리다가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유성우를 보러 왔다.”

좋아겨우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시내에서는 유성우 축제를 한다고 난리지만조용히 유성우를 보기에는 우리 집 뒷마당만한 곳이 없지들어오라고밤이 되려면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으니까.”

핀은 성큼성큼 앞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하지만 뒤따르는 에이든의 구두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안심이 되었다.

에바는 이웃 도시에 있는 딸의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꼼꼼한 준비를 하고 떠났다냉장고에는 식료품이 가득 차 있었으며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에 대한 메모가 냉장고 문에 몇 개나 붙어 있었다물론 에바는 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솥에 가득 스튜를 끓여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바의 예상 그대로핀은 아내가 없는 동안 느긋하게 요리나 만들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그는 스튜를 데워 큰 접시에 따르고큼직한 빵 덩이를 둘로 쪼개어 그 위에 얹었다식탁에 두 개의 스튜 접시가 준비되자 핀은 사촌을 부르러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낡아빠진 소파에 앉은 에이든의 모습은 불편해 보였다소파나 티테이블이나 쿠션 같은 것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에이든이 불편하다고 말할 것도 같았다에이든은 이 낡은 집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처음부터 그랬다아주 오래 전핀이 일곱 살이었고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셨으며 이 집이 아직 나무 냄새가 가득 배어있는 새 집이었던 그 시절에도 그랬다.

큰아버지가 비행기 시간을 걱정하며 급히 떠나간 후에에이든은 거실 소파에서 다리를 흔들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하얀 셔츠와 어른처럼 주름을 잡은 긴 바지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그 모습은너덜너덜한 티셔츠와 풀 얼룩으로 더럽혀진 반바지를 입은 아이들만 보아왔던 핀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여겨졌다.

에이든은 정말 어른스럽고 착하구나너와 에이든은 형제나 마찬가지란다그러니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해.

어머니가 말했다핀은 어머니 뒤에 숨어 혀를 내밀었지만에이든은 고개를 숙이고 들릴 듯 말 듯하게 네 하고 대답 했다에이든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핀은 그걸 보며 정말 기분 나쁜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다.

식당으로 와에이든밤 늦게까지 깨어 있으려면 뭐라도 먹어야지.”

이제는 늙어버린 사촌이 소파의 팔걸이를 힘주어 누르며 천천히 일어나는 것을 보자핀은 아까 했던 농담이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정말이지 집 안에 사신이라도 나타난 것 같았다.

핀이 스튜를 마시듯 비우고마지막 빵 조각으로 접시를 닦아 입 안에 밀어 넣을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에이든은 별로 먹지 않았다스튜를 두어 스푼 뜨고빵 한 조각을 천천히 오래 씹어 넘긴 것이 전부였다에이든이 접시를 물리자 핀이 물었다.

에바의 요리는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입에 안 맞나?”

그런 건 아니야그냥… 먹기가 힘들어서 그렇다.”

에이든은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 언저리를 누르고 있었다핀은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그 시선을 피하듯 에이든이 일어섰다.

조금… 산책을 하고 오겠다.”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핀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르는 척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어차피 걱정이나 배려 같은 게 어울리는 사이도 아니잖아. 한참의 생각 끝에 핀은 결정을 내렸다남을 배려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핀은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뒤척이다가 팔을 짚은 곳이 허공이었다허둥지둥 휘저은 팔이 다행히 팔걸이를 붙잡아, 굴러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거실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왜 에바가 저녁을 먹으라고 깨우지 않았지핀은 멍한 머리로 잠시 생각했다.

두리번거리다 창문 쪽에 시선이 미쳤다가느다랗고 키가 작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서 있었다.

핀은 겨우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일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그는 아내가 저녁을 먹으라고 깨울 때까지 30여분 정도 소파에 누워 졸곤 했었다오늘은 스튜뿐인 식사도 이미 해버렸고 깨워줄 아내도 없다소파에 누운 채 산책 나간 에이든이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그만 깊이 잠들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좁은 소파에서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에 관절이 뻣뻣했다핀은 길게 기지개를 켜고 손을 뻗어 소파 옆의 스탠드를 켰다.

어이쿠이거 너무 오래 자버렸네지금 몇 시야에이든유성우는?”

아직이야.”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에이든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핀은 길게 하품을 하고잠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차가운 맥주가 필요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에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이 집을 나에게 팔지 않겠어?”

허어?”

핀은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어 돌아왔다티테이블에 한 병을 내려놓고 나서야 스튜도 제대로 못 넘기는 에이든이 맥주를 마셔도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곧 알게 뭐냐 싶어졌다그는 자기 몫의 맥주를 따서 크게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 뭐라던가 하는 큰 기업의 기술 이사께서 이런 낡은 집은 왜 탐내는 거야?”

에이든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고집스러운 턱에 슬쩍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말했듯이 순수한 자연 목재로 지은 귀한 집이잖아.”

나 원미친 소리를 하는군내가 팔겠다면 이 집을 어쩌려고재벌들이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별장으로 쓰도록 팔게아니면 자연 목재는 비싸니까 이 집을 분해해서 팔기라도 하려고?”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에이든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것도 좋을 지도 모르겠군.”

한껏 핀을 깔보는 것 같은 말투의 대답이었다에이든의 아버지가 아들을 기숙학교로 보내기 전까지, 4년 동안 함께 이 집에서 사는 동안 몇 번이나 들은 울림이었다핀은 웃었다.

허어그만큼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하구만사촌넌 뭔가 숨기거나 꿍꿍이가 있을 때는 당당한 척 자신만만한 척했었지그거 진짜 빌어먹게 재수없는데그런 말 해주는 사람 아직 없었나?”

핀은 남은 맥주를 한 입에 다 털어 넣고 벌떡 일어섰다그는 서랍장에서 편지 다발을 꺼내와 티테이블 위에 내던졌다지난 달에 다락방에서 발견되었고몇 시간 전까지 핀의 침대 옆 협탁 서랍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에바가 다락방을 정리하다가 이걸 찾아냈어어머니가 자질구레한 물건을 담아뒀던 상자에서 나왔다고.”

에이든의 어깨가 흔들렸다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돌아서더니 조금 전까지 핀이 앉아있던 자리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그는 가장 위에 올려져 있는 낡은 봉투를 집어 천천히 손가락으로 쓸다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돋보기 안경을 꺼내어 코 위에 걸쳤다.

우리 건방진 사촌께서 어머니와 편지 왕래를 했을 줄은 몰랐어그것도 무려 손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았을 줄이야.”

사실 핀은 소리 내어 비웃어주고 싶었다아주 오래 전부터 재수없고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해왔던 사촌의 얼굴에서 고집스러움과 건방진 당당함을 지우고 당황하는 빛을 띄게 하기 위해서하지만 에이든의 얼굴이 천천히 풀려가는 것을 보자 굳이 웃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를 펼쳐 든 에이든이 몇 문장을 눈으로 좇는가 싶더니 신음 소리를 내며 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을 보니 당황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는데 성공한 듯 했다.

그러나 상황은 재미있게만 굴러가지 않았다에이든은 편지를 떨어뜨리더니 급히 안경을 벗고 엄지와 검지로 감은 두 눈을 눌렀다핀은 당황했다.

어이사촌예전에 자기가 쓴 편지를 보니 쪽 팔려서 죽고 싶은 기분이 들기야 하겠지만울기까지 할 일은 아니잖아.”

에이든은 대답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린애처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오래 전핀에게 야단맞은 어린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그리고 훨씬 더 오래 전추억 속의 아들만큼 어렸던 에이든이 이 집의 계단참에서자신에게 주어진 침실에서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핀은 턱수염을 문지르며 거실을 가로질러조금 전까지 에이든이 서 있던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았다밤하늘에는 조금 구름이 남아 있긴 했지만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아직 유성우는 시작하지 않은 것 같았다.

며칠에 걸쳐서조금씩 그 편지를 다 읽었어그리고 생각하다 보니까 좀 이상하더라고에이든 네가 제일 처음 젊은 천재 발명가로 알려졌던 게 고속 식물 성장 촉진제였지이곳 국영림 관리국에서도 쓰고 있는 그거 말이야네가 우리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더 이상 숲이 작아져 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하는 대목을 적어 보낸 즈음의 일이었지.”

에이든이 뭔가 말하려는 듯 큼큼거리며 잠긴 목을 푸는 소리를 내었지만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창턱에 양 팔을 짚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벌목기 사고로 돌아가신 후에 안정적인 벌목차량을 만들어낸 것도 너였지. 지금 내가 모는 벌목차의 초기형어머니께 보낸 편지에는 좀더 일찍 생각해내지 못해서 죄송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썼었고.”

아니야내가 고안해낸 것은 이전의 것보다 안정적인 무한궤도 시스템뿐이다.”

그래 놓고 어머니 장례식에도 찾아오지 않았지그리고 이제서야 불쑥 나타나서 이 집을 팔지 않겠느냐고별장이 어쩌고 목재가 어째?”

핀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핀은 진정하기 위해 소리 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한숨은 조금 전에 마신 맥주로 인해 걸쭉하고 긴 트림이 되어 흘러나왔다.

젠장미안아무튼 내 얘기는잘난 척 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라는 거야네가 우리 어머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네가 보낸 편지들을 안 봤더라도 잘 알고 있었어칭찬받을 만한 일만 생기면 어머니 옆에서 강아지처럼 빙글빙글 돌았었잖아방귀 냄새가 지독한 숙부랑 악마처럼 구는 사촌이 같이 있긴 했었지만 우리 어머니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집을 갖고 싶었다고 말하면 되잖아.”

핀은 돌아서서 창문에 등을 기대고 섰다에이든의 눈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인지 기대감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럼…….”

아니이 집은 안 팔아절대 못 팔지이 집에 대한 추억이라면 너보다는 내가 몇 십, 몇 백 배나 더 많단 말이야.”

에이든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그는 검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방금떨어졌다.”

핀은 급히 등을 돌려 창 밖을 보았다두리번거리는 동안 시야 끝으로 가냘픈 빛 줄기를 남기며 유성이 흘러갔다.

핀은 허둥지둥 에이든을 일으키고 이끌었다뒷마당으로 나가기 전에 냉장고에 들러 새 맥주 두 병을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뒷마당의 포치로 나가자마자 두 개의 유성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하늘을 내달리는 것이 보였다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유성우 축제를 보기 위해 이 마을로 찾아온 관광객들도 유성우의 시작을 지켜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핀은 맥주 하나를 에이든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맥주를 땄다.

몸이 안 좋은 것 같던데맥주 마셔도 되나?”

위가 좋지 않아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한 병 정도는 괜찮겠지.”

에이든은 맥주병 뚜껑을 땄지만 마시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말해두겠는데나는 숙모님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었다.”

흐음?”

공항에서 다시 돌아갔지이제는 숙모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이 곳으로 올 수가 없었다.”

몇 십 년 전의 추억과 마주해서인지 아니면 울어서인지 에이든은 이제까지의 건방지고 재수없는 작자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핀은 이런 간질간질한 기분이 질색이었다.

그래도 이 집은 절대 못 넘겨줘꿈도 꾸지 마.”

알겠다.”

에이든의 대답은 한숨처럼 들렸다핀은 턱수염을 북북 긁었지만 간질간질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핀은 속으로 혀를 차고 에이든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꼬았다.

가끔 이렇게 찾아오는 건 괜찮아애들이 독립해 나간 이후로는 방도 많이 비어있고……. 잘난 사촌이 만들어낸 발명품들 덕택에 국영림 소속 벌목 기사는 제법 수입도 괜찮다고. 손님 하나쯤은 몇 달이고 먹여줄 수 있을 정도야. 더구나 나는 국가 공인 1급 벌목 기사란 말이지.”

곁눈질로 본 에이든이 조금 웃었던 것도 같았다.

핀은 에이든의 맥주병 주둥이에 자신의 맥주병을 가볍게 부딪치고는 한 모금 마셨다에이든도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가 조금 마셨다.

한 가지 더 말해두겠는데나는 숙모님을 아주 좋아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고!”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내 부모이고그분들과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이야.”

알겠으니 그만하라고우리 어머니는 너보다 내가 훨씬 더 좋아하니 됐어그리고 내 아이들도 다른 놈보다는 나를 제일 좋아할 거라고.”

핀은 자신이 방금 한 말 끝에 마음 속으로 아마도라고 덧붙였다자신 있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이 자신을 좋은 아버지로 생각해주길 바랬다잠깐 생각했지만아무래도 확신이 설 정도는 아니었다그는 하늘로 고개를 돌려 유성이 떨어지길 기다렸다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 전이렇게 유성을 기다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에이든이 이 집에서 같이 살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어머니와 아버지는 포치의 의자에서핀과 에이든은 뒷마당 가운데 깔아둔 캠프 매트에서 다 함께 유성우를 보았었다핀은 간절하게 유성을 기다리고유성이 떨어질 때마다 급히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무슨 소원이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학교에서 제일 귀여운 여자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고말썽부린 일이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엄마별은 왜 떨어져요?

네가 소원을 빌고이루게 하려고 떨어지는 거지.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대답했었다그때 에이든이 불쑥 말했다.

유성은 우주에 떠도는 돌 조각이 지구 중력에 끌려들어오면서 대기권을 지나는 동안 불타는 현상이야저건 별이 아니라 그냥 돌일 뿐이야그것도 몰라?

핀은 에이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주먹을 들어 후려쳤다곧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날아왔다아버지에게 야단 맞고 눈물 범벅이 되어 침실로 쫓겨 올라가던 핀은 2층 창문으로 뒷마당을 보았다캠핑 매트에 앉은 어머니가 울고 있는 에이든의 어깨를 안고 부드럽게 토닥이고 있었다.

그때 때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그랬다면 이후로 조금쯤은 친해졌을지도 모르는데과거의 기억에 슬쩍 미소를 지으며 핀은 계속해서 눈으로 유성을 찾았다.

.”

그만 입 좀 다물어떨어지는 별에 소원을 빌고 싶으니까 잠깐만 조용히 하라고.”

에이든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귀에 익은상대를 우습게 보는 듯한 한숨 소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건 유성이 아니야달 기지와 지구 사이에 쌓인 우주 쓰레기들을 파괴하여 지구 중력권 안으로 떨어뜨린 거다. 5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유성우 축제는 사실 대청소 행사인 거야.”

핀은 에이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그리고 들으라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그때 때린 건 잘 한 일이었어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지그럼 그럼.”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얼굴을 찡그리는 에이든을 보고 핀은 크크큭 웃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사촌의 맥주병에 자신의 맥주병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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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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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윈 15.02.01 15:48 댓글

    엄청... '사내자식들' 같은 이야기네요. 귀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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