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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왕의 행방

2005.08.26 20:2308.26

1.

  총통이 돌아오신다!
  도시에 소리가 울려퍼졌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쥴 뿐이었다. 쥴은 앞으로 나섰다.
  해가 이미 떠올랐고, 도시는 타오르고 있었고, 완성된 유리창들은 빛을 냈고, 복잡하지만 가지런하게 들어찬 골목과, 대로변의 가게들도 활기를 띄고 있었다.
  대로 한가운데의 광장은 아직 광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평평한 공간은 제대로 둥글거나 알아볼 수 있게 주변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약간 높은 단 위에 원반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그 비스듬한 원반 중앙에서부터는 바늘이 하늘을 향해 똑바로 달려 있어서, 그 그림자가 원반에 비추어진다.
  쥴은 바늘을 매만졌다. 그것은 차갑고 확고한 물체였다.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기다렸나?”
  쥴은 돌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죄송합니다.” 쥴은 말했다. “눈이 부셔서요. 도저히 그 쪽을 바라볼 수 없군요.” “괜찮아.” 쥴은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의 주인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곳과 정 반대쪽을 내려다보아야만 했다.
  “돌아오시리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너만이야, 쥴.” “네, 저만입니다.” “나는 왕으로부터 전령을 받았어.” 목소리가 말했다. “이 도시를 왕께 바쳐야 해.”
  “그렇군요.” 쥴은 말했다. “그렇다면 이 도시는 지어져야 하겠군요.”
  목소리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쥴은 마치 그가 다시 가 버린 것처럼 느꼈다. 쥴은 얼른 말했다. “계약을 맺읍시다.” 쥴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전령을 받으셨을 뿐입니다. 당신은 <돌아오신다!> 돌아오실 테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도시가 다 지어질 때가 당신이 돌아올 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돌아온다면, 당신이 여기 도래한다면, 모든 것은 저절로 존재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도시를 지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당신을 도래시키기 위해서 도시를 짓는 것이고, 당신 없이는 우리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약을 합시다. 우리는 당신에게 복종하겠습니다. 우리는 도시를 짓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뜻에 따라 도시를 짓겠습니다. 당신을 꼭 불러들이겠고, 그리하여 당신이 비로소 오셔서 왕께 바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직 그 일에 바치겠습니다.”
  목소리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희미한 침묵이었다.
  쥴은 원반을 내려다보았다. 쥴은 바늘도 내려다보았다. 태양이 움직이면 바늘 그림자는 조금씩 움직인다. 그림자는 원반 가장자리 너머로는 결코 빠져나오지 않으며, 또한 원반 면적을 모두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림자는 원반의 오른쪽 반쪽을 가로지르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왼쪽 반을 가로지를 때 즈음 되면 해는 지고 만다. 원반은 새카매진다. 바늘도 새카매진다.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너는?” “제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쥴이 답했다.
  “제가 어느 하루에도 당신의 것이 되도록, 매일 아침 저의 이름을 불러 깨워주십시오. 결코 결코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제가 그들로 하여금 도시를 짓게 하겠습니다. 이게 저의 계약 조건입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목소리가 말했다.
  “우리는 도시를 지을 것이다.” 목소리가 말했다. 쥴은 원반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자는 이제 거의 왼쪽 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목소리의 여운은 약하게 울렸다. 쥴은 이제 더 이상은 부시지 않은 눈을 들어 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동안 어둠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2.

  바이올린으로부터 시작했다.
  소리나지 않는 바이올린이 연주했다. 신랑 신부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마주 서서 서로 발을 맞대고, 팔짝팔짝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객 역을 맡은 모두가 일어나서 손을 잡고 팔을 쭉 폈다.
  그들이 팔을 쭉 펴고 발 끝을 맞대자 소리나지 않는 오보에가 가세했다. 작은 악단은 박자를 맞추었다. 그들은 팔을 한번 쭉 폈다가 거두어들이며 서로를 잡아당겼다. 뺨들이 스칠 듯 말 듯 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자 모두들 열을 이루어 그 천막 아래에 두 줄로 서 있었다. 신랑 신부 역을 맡은 사람도 열에 가세했다.
  그들 모두 팔을 쭉 폈다가 서로 잡아당겼다. 악단이 잠시 연주를 멈추었다. 그랬다가 다시 곡을 바꿔 연주를 시작했다. 그들 모두는 제자리에서 새카만 망치 소리를 내며 춤추다가, 바퀴처럼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돌고 도는 동안에도 열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두 줄로 서 있었다.
  춤이 복잡해지면서 두 줄은 직선에서 둥그런 모양으로 바뀌었다. 남자가 바깥에 서도 여자가 안에 섰다. 그러다가 여자가 바깥에 서고 남자가 안에 섰다. 서로는 엇갈리게 돌며 짝을 바꾸었다. 여자와 남자는 마주보고 처음에는 여자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구르고, 그 다음에는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양 팔을 올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함께 무릎을 번갈아 굽히고 발 뒤꿈치로 바닥을 탕탕 굴렀다. 그러고 나서는 갑자기 머리를 확 들고 입을 웃는 듯이 일그러뜨렸다. 소리나지 않는 비올라가 장단을 맞추었다.
  쥴은 이 모든 소음을 듣고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이 카덴자를 연주하는 것도 듣고 있었다. 쥴은 웃음지었다. 그는 붉은 음료를 마시면서 웃음지었다. 천막 아래에서 그들은 허리를 붙잡고 춤을 추었다. 누군가가 이 쪽을 보더니 치맛자락을 성큼 들고 다가와서 쥴에게도 말을 걸었다. “쥴.”
  그 사람이 쥴의 손을 끌어당겼다. “쥴, 왜 구석에만 앉아있어? 갖이 추자.” “됐습니다.” 쥴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왜? 같이 춤추자.” “괜찮습니다.” 쥴은 으쓱해보이며 말했다. “몸이 좀 불편해서, 저는 여기 앉아있겠습니다.”
  “빨리 와, 린다!” 누군가가 또 저 쪽에서 불렀다. “그 녀석은 춤을 출 줄을 모르는 거야. 집도 지을 줄 모르는걸.” 여자는 쥴의 손을 어색하게 끌어당기고 있다가 돌아가버렸다.



  “그때 알았던 겁니다.” 쥴이 말했다. “내가 파티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목소리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쥴이 걷는대로 빛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통 나으리. 이 도시는 아직 마을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도시의 미래를 기억합니다. 도시로서의 미래를 말입니다. 사람들 하나하나도, 건물 하나하나도 나는 기억합니다. 어떤 것이 거기 없다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들의 미래를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말입니다. 양쪽 벽이 허물어져 있고 주춧돌만 놓인 건물을 보면 거기 당장이라도 명패를 붙여줄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떤 건물인지 아니까 말입니다. 나는 도시를 모두 압니다. 완벽하게 이루어진 전체에서부터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고, 하나하나를 볼 때 오직 전체에서부터 보고 있으며, 그렇기에 나는 내가 도시 어디에 있건 내가 어디 있는지 압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밤에 피신하기 위해서 집을 지어야 합니다. 또 <여기>에서 깨어나야만 할 테니까요.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무곳에서나 깨어나도 거기가 어디인지 압니다. 그들은 도시 한 지점에 놓인 집에서 매일 아침 구물구물 기어나옵니다. 그러면 비로소 그들은 깨어납니다. 그러나 나는 주인으로서 일어납니다. 내가 일어서면 내 눈앞에 도시가 깨어나는 겁니다.”
  쥴은 계속 걸었다. 그는 대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태양은 대로 끝에서 떠올라 대로 끝으로 집니다. 나는 물론 이 대로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로를 기억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실 겁니다. 사실상 아무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만을 기억하고 있다면, 태양은 떠올라 모든 것을 비출 테고, 모든 것은 자연히 드러날 테니까요. 하지만 태양을 모른다면 나는 대로를 기억해야 하고, 골목을 기억해야 하고, 도시를 기억해야 합니다.”
  쥴은 걸어서 원반 앞에 거의 다다랐다. “그렇게 되면 태양을 모른 채로 자신을 태양이라고 착각하기 십상입니다.” 쥴은 원반 앞에 멈추어 섰다.
  “단 하루만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로를 기억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그 위를 걸을 수 있으면 족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집으로 도망친 다음, 다시 대로로 걸어나오면 족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피난처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자신을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도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그 안에 일으켜세워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도시는 어디에서 왔느냐,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미래에서부터 왔습니다... 이 곳은 아직 마을에 불과합니다. 나의 확고한 기억은 미래에서부터 왔습니다. <도시>는 말입니다. 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미래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도요.” 쥴은 원반 위로 몸을 약간 틀고 바늘을 건드려보았다.
  “이것은 차갑고 확고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총통 나으리, 나는 이 그림자가 움직이며 가리키는 도시를 모두 압니다. 하루의 어느 때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원반의 절반은 밤에 먹혀 있습니다. 바늘 그림자도 원반의 아래 절반은 돌지 못해요. 지금 이렇게 드러나 있는 이 아래 절반만큼의 원반은, 거짓이 아닌가, 저는 그것에 두렵습니다. 그렇게 치면 원반 자체가 거짓이 되어버리고 원반이 그때그때 가리키는 도시도 거짓이 되고 맙니다. 밤이란 것은 시간을 살려 하는 자에게 극복해야 할 적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적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망각입니다. 이 밤이 되면 나는 대로도 건물도 기억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걸요. 도무지 그런 것을 기억할 확신이 사라집니다. 다만 잊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면 내가 잊은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다시피, 뻔한 일입니다. 내가 태양을 기억한다면 나는... 내일이 올 거라는 점을 틀림없이 기억할 텐데요. 다시 낮이 올 거라고을 말입니다.”
  쥴은 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웠다. “그래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목소리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고백을 받는 것을 기분나쁘게 생각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이러는 동안 일이 더뎌지는 걸 좋게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쥴은 점점 더 더워져서 목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쥴은 원반을 지나쳐서 조금 걷다가 멈추었다. “파티에서 나는 이방인 주인입니다. 나는 이 도시의 이방인 주인입니다. 그들은 결혼식 놀이를 하고, 즐거이 춤을 추고 있지만, 나는 구석에 앉아 내가 아니었으면 결국 그런 연극은 공연되지 못했으리라는 점을 압니다. 내가 그들의 결혼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면 말입니다. 내가 그들의 춤을 보고있지 않고, 내가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지 않다면, 내가 바로 결혼에 비추어 그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사가 기념식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념식이 아니고서는 어떤 연극이 성사될 수 있습니까? 골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길들이 다만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길을 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춤을 출 줄 모릅니다. 나는 집을 지을 줄 모릅니다. 나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내가 주인인걸요. 내가 춤을 출 수 있다면 오히려 그 모든 것은 어그러지고 말 겁니다. 나는 무지 속으로 빨려들어가겠지요. 몸을 흔들고, 노동에 땀을 흘리며, 스스로를 잊은 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런 것을 내게 감히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린다!” 쥴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여자는 내 이름을 압니다. 내 이름은 나로서도 우스운 일입니다. 린다!” 쥴은 다시 불렀다. “기분을 망쳤어요. 기분을 망친 채 연극을 나오면서, 나는 무심코 그 여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자 묘한 심정이 되어 왠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소리도 내 귀에 들렸습니다. 음악소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다릅니다. 이것은 소리나는 악기에서 들린 소리입니다. 나 자신 말입니다. 나는 이 소리를 낸 것입니까, 들은 것입니까? ... 나는 내 두 기침소리 사이를 걸었습니다. 그건 결코 여느 때의 산책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걸으려고 애썼지만 휘청거렸습니다. 그 두 기침소리 사이는 결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자의 눈이 자꾸 떠올라서... 손에 온기가 남아있어서... 그래, 그것이 밤 아니겠습니까? 그 두 소리 사이의 거리. 나는, 그 순간 알았던 겁니다. 그들이 춤추고 있던 그 곳, 그곳은 천막 아래, 그림자로 보호받는 곳이었다는 걸. 나는 비로소 태양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쥴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요. 차마 바라볼 수도 없는 것, 그래서 기억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도시는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본다고 생각했지만, 보고 있을지언정, 보이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동일하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나조차도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이름이 있을 수 밖에요. 그런 와중에 내가 어떻게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여자가, 린다가, 젠장! 한번만 더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더 이상 듣거나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 여자의 시선만 신경쓰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굴욕에서 고작 한 사람이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총통 나으리, 내가 당신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취하신다면, 내가 나 아닌 불멸에 바쳐진다면 그 여자는 나를 보되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신다면, 나의 내일은 필연이 됩니다. 마침내 당신이 돌아오신다면 시간은 영원이 될 겁니다.”
  쥴은 원반 주위에서 잠시 걸으며 더 머물렀다. 쥴은 간혹 바늘을 매만졌다. 그는 그것의 확고한 차가움에 자신을 이입하는 듯 했다. 그림자는 다시금 오른쪽 반 편에 머무르고 있었다. 목소리의 침묵이 희미해져갔다. “때가 되면 돌아오실 것을 압니다.” 그는 바늘을 매만지고 있던 손을 추스르며 외쳤다. “일은 더뎌지지 않을 겁니다. 착실히 마련하고 있습니다. 총통...” 바늘 그림자는 차츰 원반 아래쪽에 가까워졌다.
  쥴은 원반이 놓인 대 아래쪽에 기대어 앉았다. 그는 문득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무언가 중얼거리려다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밤이 닥쳐와 그의 이마를 막아버렸다.
  

3.

  쥴은 원반 앞에 서서 서성거렸다. 바늘 그림자는 원반 아래쪽의 사분지 일쯤 되는 지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래도 해는 지지 않았다. 낮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쥴은 바늘 그림자를 보고 있다가 등을 돌렸다. 총통에 대해서, 아무래도 그가 있는 곳을 볼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쥴은 늘 태양의 반대쪽을 보고 이야기한다. 대로를 따라 걸으며 총통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쥴은 총통이 돌아오실 때가 멀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바늘 그림자는 곧 원반 가장 아래쪽에서도 사라지지 않게 될 것이다.
  총통만은 왕에게 가는 길을 알고 있고, 도시는 왕께 바쳐질 것이며, 그러므로 왕만이 도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 전령을 맡은 총통만이 또한 도시의 건축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총통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집을 지을 수 없다. 쥴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며 그 점을 명확히 했다.
  하여간 그렇다고 해서 총통에 대해 이야기한다거나, 태양의 존재를 입에 올린 것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은 쥴을 총통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방인에 불과한 쥴이 도시를 지어라 말아라, 어떻게 지어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데다가 - “당신은 자기 집도 짓지 못하지 않소?” - 쥴이 <도시>를 알고 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이 어째서 도시가 되어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쥴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 그들은 불만을 표했다. “어처구니없는 독선이야. 우리는 오직 자신의 집을 짓고 매일을 즐겁게 살고 있소. 당신이, 이방인이, 우리에게 갑자기 나타나 운명과 숙명을 강요하는 거요?”
  남자가 말을 끊었다. “하기사 당신은 이방인이니까 그게 가능할 거요. 밖에서 보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법이지.”
  “아니, 나는 이방인이 아니예요.” 쥴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방인에서 가장 먼 사람입니다. 신중하느라 오래 당신들을 속여온 것 뿐이예요.” “당신은 이방인이 아니라고?” “네. 저는 이 곳에 속합니다. 당신들 중 누구보다도 강한 필연성에 의해 속하고 있지요.”
  쥴은 일단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미래들 중 몇몇 대수롭지 않은 것들, 다음 놀이 때 누가 무슨 역에 추첨될 거라든가 발등의 리본이 풀려 넘어질 거라는 둥의 얘기로 관심을 끈 다음, 굵직굵직한 운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듣고 있었다. 축복받은 도시의 번창함과 철커덕 철커덕 돌아가는 공장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점점 당당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쥴은, 오히려 점점 피곤해졌다. 쥴은 스스로를 자기 몸뚱아리를 팔아 치워야 하는 장사치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쥴이 힘이 빠진 나머지 입을 다물자 사람들은 재촉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철벽처럼 서 있었다.
  “당신은 미쳤군.” 쥴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사람들 중 남자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돌아가버렸다.
  사람들의 태도가 약간 달라지기는 했다. 쥴에게 미쳤다고 했던 그 남자는 다음번 축제 때에는 린다가 쥴에게 춤을 청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머뭇거리고 있는 린다를 거들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린다가 쥴에게 가도록 길을 비켜주었고, 다시 린다가 쥴을 데리고 오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린다가 손을 내밀자 사람들이 모두 다정한 눈길로 그 둘을 쳐다보았다. 쥴은 버럭 화를 내며 거절했다. 쥴은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가, 린다가 무안한 듯이 쳐다보는 걸 느끼고 천막 밖으로 나가버렸다.
  쥴은 휘청휘청 대로를 따라 걷다가, 원반 근처에 서서 무슨 이름을 중얼거리려다가 자신에게 화를 냈다. 그러고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일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착실히 진행될 거란 말입니다!” 쥴은 그러고나서 중얼거렸다. “약속드립니다. 진실로 약속드립니다. 제 힘을 다해...” 밤이 찾아왔다.
  다음날 사람들은 집을 짓고 있었다. 쥴은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산책을 나섰다. 사람들이 다정스레 인사를 해 왔다. 그들은 쥴이 영 미쳐버릴까봐, 고독 때문에 미쳐버릴까봐, 약간 죄책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린다가 그에게 인사했다. 이 여자는 아무리 거절당해도 그 맑은 눈빛을 잃지 않는다. 쥴은 끄덕하며 대강 인사를 받아넘겼다. 린다의 옆에 있던 남자가 왠지 픽 웃으며 문짝에 다시 못을 박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손가락을 찧었다. “아야!”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린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았다. 쥴이 씩 웃었다. “뭘 웃는거요?” 남자가 불평했다.
  “글세, 내가 왜 웃고 있겠습니까?” 쥴이 받아 말했다. 그러고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 일정한 상징적인 자세를 취한 후, 허공의 한 점을 쏘아보았다. 사람들은 그 오만한 태도에 감화받아, 함께 같은 방향을 보았다. 쥴은 손가락을 탁 튕겼다. 사람 하나가 지붕에서 떨어졌다.
  그는 지붕을 고치고 있던 참이었다. 솜씨가 시원찮아서 매번 지붕 기와가 두어개씩 뒤집혀 금이 가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쥴은 돌아서서 걸어가버렸다.


  4.

  “글쎄, 사람들은 이제 제 말을 잘 듣습니다.” 쥴이 말했다.
  “당신을 사칭하게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건 죄송합니다, 총통. 하지만 저는 이제 정말 완벽한 주인입니다. 이방인 주인이 아닌 진짜 주인입니다. 그들은 내가 미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운명을 믿지 않습니다. 도시도 믿질 않구요. 어쩌겠습니까, 내가 힘이 있다고 믿게 하는 수밖에! 내가 미래를 도래케 하는 힘이 있다고 믿게 하는 수 밖에! 바로 내가 운명이라고! 당신께는 죄송한 일입니다. 그런 것이야 원래 당신의 권위니까요.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 사람들은 이제 내 말을 잘 듣습니다. 나는 주인입니다.” 쥴이 주먹을 쥐어보였다.
  “내가 파티의 주인이라는 걸 이제 모두가 압니다. 진짜 결혼식, 진짜 창업식, 진짜 개설식과 산모들의 해산, 돌잔치가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의식들을 모두 내가 집행했습니다. 해산하는 장면을 보셨나요? 훌륭한 기념식이지요. 태어난 아이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앙앙 발버둥이치며 울다가 숨을 쉬려고 입을 일그러뜨리지요. 곧 돌잔치가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그 곳 천막 아래에서 겹쳐진 톱니 바퀴처럼 춤을 춥니다. 발을 탕탕 구르고, 다리를 올리고, 머리를 숙이다가 가끔 숨을 쉬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지요. 그러고는 도시를 지으러 갑니다. 공장으로 가기도 하고 망치를 들고 현장으로 가기도 하지요. 그들도 페달을 밟고, 망치를 든 손을 발처럼 굴리고, 가끔 내 명령을 받으려고 햇빛 때문에 찡그린 채 나를 올려다봅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들의 눈부신 노동을 보십시오. 그 댓가를 보십시오. 그들은 이제 내가 운명이 아니라 해도 이 일을 계속할 겁니다. 그들은 도시를 보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도시가 가져다 준 혜택에도 만족하고 있어요. 그들도 이제 도시를 알게 되었습니다.”
  쥴은 숨을 내쉬었다. “아아, 그들도 이제 도시를 알게 되었어요.”
  쥴은 원반을 놓은 단 앞에 기대어 서 있었다. 원반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름다운 정원형을 이루고 있었고, 이제는 눈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 먼 허공에 있었다.
  새하얀 원반은, 쥴이 총통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하늘과 평행하게 누워있었지만, 이제 거의 수직으로 기울어진 채 단의 위쪽이라기보다는 측면에 매달려 있었다. 약간의 충격만 가해지면 완전히 측면에 달라붙을 것 같다. 원반을 비스듬히 매달고 높은 단이 솟아있었다. 그 단은 낮이 길어질수록 점점 높아졌다.
  대로는 정방형으로 도시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고, 그 중앙에 광장이 있다. 광장은 넓고 평평하며 원반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정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 중앙에 원반이 매달린 단이 꼿꼿이 서 있다. “이것도 보수해야겠어.” 어느날 쥴은 단 아래쪽의 기둥 네 개를 매만져보며 중얼거렸다. 단이 너무 높아진 바람에 이제 그 기둥은 위태로워 보였다.
  일은 조용히 처리되었다. 밑동을 교체한 다음 자갈이 섞인 시멘트를 발라 가다듬었다. 쥴이 직접 현장에 나와 뒷짐을 진 채 감독했다. 다섯명의 인부들이 돌아가며 자기들이 해 놓은 모양을 감상했다. 쥴은 인부들이 게으르게 굴 때를 대비해 지팡이를 들고 나왔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인부들은 사려깊게 일했다.
  쥴은 원반을 올려다보았다. 바늘의 그림자는 원반의 아래쪽 끄트머리에 다가서고 있었다. 쥴은 문득 주먹을 꽉 쥐었다.
  해가 하늘을 서성이고 있었다. 서쪽으로 간다거나 동쪽으로 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상 동쪽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태양은 마냥 독수리처럼 광장 위를 빙빙 돌았다. 바늘 그림자도 빙빙 돌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상의 어깨에 내려앉았는데, 그러니까 원반 꼭대기 허공에 딱 멈추었던 것이다. 바늘 그림자도 딱 멈추었다.
  바늘 그림자는 오늘 해가 떠올랐던 곳에서 딱 멈추었다. 쥴은 그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인부들도 올려다보았다. 원반이 순간 투명하게 반짝인다 싶더니, 빙그르르 돌아가듯이 여러 층의 빛을 냈고, 반들반들하고 대단히 매끄럽게 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꼿꼿이 서 있던 바늘이 어디로부터인가 끌어당겨진 듯 부르르 떨더니 마침내 원반 위로 쾅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정확히 열 두 번을 울린 뒤, 원반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5.

  “안 돼.” 쥴은 말했다. “이 안건은 무효야. 더 이상 생산할 수는 없다구.” “하지만 우린 모두 그게 더 있었으면 합니다, 시장님.” 남자가 모자를 벗어든 채 말했다. “잠깐 많이 팔리는 것 뿐이야. 더 해댔다가는 재고가 쌓이게 돼. 당신이 다 먹어치울 건가? 응? 그건 이를 닦는 거지 먹는 게 아니야.” “하지만 시장님...” 종 소리가 울렸다.
  정확히 세 번 종이 쳤다. 창문 밖에서, 창문이란 창문은 다 깨부술 듯이 그 소리는 들려오는 것이다. 설명하느라 양 팔을 들고 있던 남자도,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쥴도 입을 다물고 그 소리를 들었다. “자, 식사 시간이군.” 쥴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시장님...” “나가주게. 나가 식사를 하라고.” 쥴은 팔을 내저었다. 남자는 다시금 인사하고는 모자를 돌려쓰고 나갔다. 쥴은 창 너머로 시계탑을 보고 있었다. 시계탑은 상당히 높은 데다가, 이 건물은 광장 바로 옆에 딱 붙어 있어서, 아주 잘 보였다.
  쥴은 여전히 집이 없었다. 그는 적당한 식당에서 식사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이 있었다. 시장 사무실인데, 광장 근처의 거리 4층에 자리하고 있다. 2층과 1층에는 직원들이 일한다. 책상들이 가득 차 있고, 직원들은 눈을 흡뜬 채 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다. 그들은 가끔 책상에서 고개를 들고 시계탑을 보는데, 숨을 들이쉬는 대신 한숨을 내쉴 뿐이다. 쥴은 식사를 하고 올라오면서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시장 사무실로는 수많은 서류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봐,” 쥴이 말했다. “어디다 이만큼을 써먹은 거야?” “광장 부근 공사 때문에요, 시장님.” “무슨 공사?” “움푹 파인 곳이 늘었습니다. 교통량이 늘었으니까요. 최근에 새로 도로를 깔았지요.” “그래, 내게 묻지도 않고 그런 공사를 했단 말이야?” “도로가 그런 상태로는 차들이 다니기 힘듭니다, 시장님.” 남자가 답했다. “차들이 다니기 힘들면 운반이 늦어집니다. 공장도 늦게 돌아가지요. 안전은 말할 것도 없고, 미관상 좋지 않아요. 도로는 보수되어야만 하는 거였습니다. 시장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도시에 대해 잘 아는 분이시잖아요. 도시의 주인이시구요.” “그래, 도시의 주인이지.” 쥴이 비꼬듯이 말했다. “그런데 도시란 대체 뭐냔 말이야?” “네?” “나가봐.” 쥴이 손을 내저었다.
  쥴은 한동안 사무실에 붙어서 일을 더 했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것이 한이 없었다. 쥴은 그날 하루 근무 시간동안 이백번은 더 도장을 찍은 것 같았고 사천마디는 말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지껄인 것의 배로 말을 들었고 청원을 받았다. 마침내 쥴은 시계 종소리를 듣고 외쳤다. “끝!”
  그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끝, 끝이란 말이야! 종소리가 들리지 않나?” 남자는 인사를 해 보이고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쥴은 숨을 돌리며 창 너머로 시계탑을 노려보았다.


6.

  “내가, 주인이라는 것은,” 쥴은 중얼거렸다. “<도시>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어.”
  쥴은 사무실로 들어가려다가 망설였다. 그들은 모두 이 사무실을 알고 있다. 쥴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쥴은 문득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쥴은 관자놀이를 몇 번 꾹꾹 눌렀다. 이 정도로 두려워할 것은 없다. 최근에 일이 하도 많아서 노이로제 증상이 나타나나 보다. 쥴은 걸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았는데, 몸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쥴은 목 부근의 단추 하나를 끄르며 숨을 토해냈다.
  쥴은 책상 위에 양 팔꿈치를 올려놓았다. 그는 땀에 젖은 몸을 느꼈다. 요즘은 계속 날이 덥다. 낮이 꺼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쥴은 대답했다. “들어와.” 그러자 상대는 팔을 쭉 펴서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다시 팔을 구부려 문을 닫았다. 직원은 활기있게 웃으며 쥴에게 다가왔다. 쥴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 아니야.”
  “예?” “내려놓고 사라져.” 직원은 사근사근한 표정으로 서류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쥴이 말했다. “아니, 갖고 사라져.” “예?” “아니, 내려놓아.” 쥴이 고개를 저었다. “빨리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주인님. 젠장.” 쥴은 직원이 나가고 나서 중얼거렸다.
  쥴은 창 밖을 넘겨다보았다. 시계탑의 시침이 방금 움직였다. 쥴은 움찔했다. 째각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금방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종소리는 온 도시의 유리창을 깨부순 다음, 제자리로 돌아가 조용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흘렀지만, 곧 되돌아올 것이다.
  쥴은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얼굴을 양 손에 묻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끝난 것을 알고 있었다. 도시는 완공되었다. 시침은 제 원리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왜 도시여야 했을까?
  왜 그의 기억은 도시여야 했을까? 도시는 누구나 살 수 있는 곳이다. 그가 노예가 되는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가 모든 노동자들과 마찬가지가 되는 건 결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도시란 누구나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쥴의 기억은 더 이상 쥴의 기억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모두의 기억이여야만 하는, 그런 형태가 되어 있다. 모두의 것일 수 있는 상태로 완성된 것이 도시이다.
  쥴은 왜 주인됨을 포기했을까? 그는 왜 도시를 짓기로 했을까? 왜 스스로의 몸과 인간성을 팔아넘기고, 여기 개같은 상태로 앉아있을까? 다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쥴은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기다리자, 문에서 몇 번 더 소리가 났다. “안 계시나?” 그는 혼자 중얼거리는 듯 하더니 가 버렸다.
  “당연한 거 아냐?” 총통이 말했다. 쥴은 책상 위로 들이치고 있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직접 들어오지는 않았다. 밖의 밝은 풍경으로부터 비쳐들 뿐이다. 태양은 늘 원반 꼭대기에 머무르고 있고, 완벽하게 수직으로 내리쬐기 때문에, 사물에 그림자는 적고, 햇살은 건물 안으로 쉬이 들어오지 않는다. 쥴은 눈을 찡그렸다. “뭐가 말입니까?”
  “너는 애초에 주인이 아니었어. 진짜 주인은 태양이지.” “그래, 당신입니다.” “너도 알잖아. 태양은 모든 것을 보이게 한단 말이야. 너 자신도 보이게 하는 거야. 태양에게 너를 바친다는 건 그런 거지. 네 기억과 너 자신 또한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 될 수 밖에. 너는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바로 그것을 소원했어. 너는 너의 기억과, 너 자신이 확고한 것이길 바랬어. 너는 네게 시간이 약속되어 있길 바랬어. 네가 영원하길 바랬어. 네가 언제나 어디서나 너로서 존재하길 바랬고, 소원은 이루어졌어. 그런데 너는 그 보편성에 대해 이제와서 불평하고 있는거야. 이해할 수 없군.”
  “그러면 그 때와 뭐가 다릅니까?” 쥴이 말했다. “그들 모두가 내 이름을 알고, 그 여자...” 쥴은 잠시 더듬거렸다. “그 여자가 내 이름을 불러댈 수 있었던 때와 말입니다...” “네 이름은 이제 시장님이잖아.” 총통이 대꾸했다. “그 놈들이 아무리 네 이름을 불러댄다고 해도 너는 변하지 않아. 너는 완공된 도시의 수호자야.”
  “나는...” 쥴은 항변할 말을 찾으며 더듬거렸다. 마침내 그의 가슴에 몇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도시를 짓고 있을 때, 그 때만은 거리낄 것 없이 내가 주인이라고 느꼈는데.”
  “그 때도 너는 <도시>에 복종하고 있을 뿐이었잖아. 도시는 왕의 것이지.” “세상의 모든 도시가?” “왕의 것이야. 그렇지 않다면 도시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일 수도 없지.” “그렇다면 왕을 죽여버리면 되겠군.” 쥴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 나 자신만의 것이 되겠군.” “왕이 죽는 순간 너는 없어, 쥴.” “그 순간만은 나는 나 자신이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총통이 비웃었다. “어떻게 죽일건데?”
  “너는 태양을 죽이겠다고 지껄이는 거나 마찬가지야, 쥴. 어떻게 죽일건데?” “당신이 왕에게로 가는 길을 알고 있지요.” 쥴이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왕에게 도시를 바칠 거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당신은 나를 결코 버리지 않기로 계약했습니다. 그에게 갈 때 나도 함께 데려가십시오.” “너는 내게 복종하기로 계약했지, 쥴.” “나는 도시를 지었습니다!” 쥴이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내 사명은 끝났어요!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기로...” 쥴은 창가로 다가섰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빛과 함께 더욱 선명한 열기가 들어왔다. “당신은...” 종소리가 쥴의 말끝을 지워버렸다.
  소리는 두 번을 울렸다. 다시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쥴은 입을 꽉 다문 채 시계탑을 보았다. 원반에 한 사람의 형상이 비치고 있었다. 총통의 눈 한쪽이나 목 부근의 단추 따위는 시침에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킬킬대는 입매는 익숙한 것이다.


  7.

  “물론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쥴.” 총통이 킬킬거렸다. “그렇다기보다 네가 날 버리지 않은 것 같지만. 네가 나를 택했지.” 쥴은 침묵을 지켰다.
  총통은 계속 킬킬대고 있었다. 쥴은 짜증이 난 나머지 책상을 내리쳤다. 총통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해 봐, 저 시계탑의 원반도 부숴봐. 시계를 부숴봐. 그럼 다시 종은 치지 않을테고, 시간도 낮도 사라져버리고 도시는 폐허로 돌아갈 거야.” “빌어먹을!” 쥴이 이번에는 벽을 내리쳤다. “언제부터야?” “언제부터라니, 난 언제나 여기 있었는걸. 넌 언제나 날 보고 얘기했고.”
  “나는 태양에게 복종한다고 했어.” “복종하고 있잖아? 태양에게 복종한다는 게 뭐야? 네가, 태양에게 복종하겠다는 게 뭐야? 태양이 비추는 네 모습에 복종하겠다는 거야. 그렇지 않아?” 총통은 턱을 더듬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수염은 좀 잘 다듬는 게 좋겠어. 나는 이런 꼬락서니는 싫다구.” “거기서 나와.” “그럼 어디로 가? 네 방에는 제대로 된 게 없어. 이런 희미한 유리에나 머무를 수 밖에. 다시 시계 원반으로 가고 싶긴 하지만, 네가 너무 멀다면서 짜증을 냈잖아...” “널 쥐어박고 싶어서 그랬지만, 여기 있다고 해서 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안 됐군.” 총통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여간 고마웠어. 계속 그림자로만 사는 건 싫었거든. 네가 시계탑을 닫아주어서 돌아올 수 있었지. 아, 쥴, 내게 화내지 마. 너는 다 알고 계약한 거야. 네가 내일을 약속하는 방법은 간단했어. 그 여자가 너의 내일이였으니까. 하지만 넌 태양을 택했어. 넌 나를 택했어. 넌 그 여자를 기억하는 편을 택했어. 물론 태양이 모든 것을 보이게 해. 하지만, 태양에게 복종하다니, 그 얼마나 우스운 착상이야! 돌아오시는 분이 태양이라니, 그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야! 돌아오는 거야 나지. 몇천번이건 네 눈앞에 돌아올 거야. 하지만 태양은, 글쎄, 대체 어떻게 복종하려구? 태양은 그저 보고 있을 뿐이야. 그건 눈꺼풀 없는 눈이라구. 그걸 어떻게 명령하는 자로 오인할 수 있는 거지?”
  총통이 킥킥거렸다. “너도 어지간한 녀석이야, 쥴.”


  8.

  쥴은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딱히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실망했고, 그가 게을러졌다고 말했다.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각 부서의 사람들은 전문가다. 그들은 제정된 법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부하 직원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1층과 2층의 사무실에는 큰 표어가 붙어 있었다. <우리가 곧 도시다> 그들은 시계를 올려다보지도 않고, 종소리에 따라 일했다.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쥴도 종소리에는 움찔하게 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직원들은 종소리를 들으면 목과 귀를 움찔하며 입을 벌린다. 그들 자신은 그러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아무튼 그들은 적시에는 일어나가서 밥을 먹고, 그렇지 않으면 계속 작업한다. “그들은 시계탑을 잊고 있어.” 쥴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계탑의 명령에 따르고 있어.”
  쥴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들은 도시도 잊어버릴거야. 도시가 되고 있으니까.” 쥴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가 소스라쳐서 일어났다. “나의 기억은...” 쥴은 웃음지었다. “나의 기억...” 쥴은 무언가 이름을 속삭였다. 그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총통이 물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지금 뭘 하고 있는데?” 쥴은 대답하지 않았다.
  쥴은 책상 위로 돌아가, 도장을 찍어야 할 서류를 매만졌다. 쥴은 도장을 집어들었지만, 그 인장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기만 하고서 내려놓았다.
  총통이 불평을 토했다. “이봐, 일 안 해?” 쥴은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갔다. 쥴은 비틀거리다가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를 부딛쳤다. 그가 더듬어 창문을 열자 가벼운 빛이 손끝으로 떨어졌다. 쥴은 찡그린 채 태양을 올려다보려고 애썼다. “또 그 짓이야.” 총통이 비웃었다. 그러나 쥴은 고개를 내리지 않았다. 쥴이 한참동안 태양을 바라보고 있자 총통도 조용해졌다. 쥴은 손을 창 밖으로 내뻗었다가 꽉 쥐었다. 쥴은 비로소 고개를 내렸다.
  “태양을 봤어?” 총통이 물었다. “아니.” 쥴이 답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
  쥴은 비틀거리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총통이 찡그린 채 바라보았다. “맙소사.” 총통은 쥴의 두 눈을 살폈다. “나는 일을 할 수 없어, 총통.” 쥴이 조용히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총통,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
  쥴은 눈을 깜박거렸지만,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총통이 유리 속에서 으쓱해보였다.
  “안 돼, 너는 시장이야.” “인장면은 아직 선명해.” 쥴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름을 줄게, 총통.” “뭐야?” “내 이름을 당신에게 양도하는 바야.”


  9.

  쥴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사실 그는 아직도 사무실 안에 있었지만 그 점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총통이 말했다. “넌 네 이름을 포기하는 거야.”
  “알아.” “낮은 다시 오지 않아. 내일은 다시 오지 않아. 아무도 너를 불러 깨우지 않아.” “알아.” “밤이 오고, 너는 사라질 거야.” “나는 만날 거야.” “무얼?” “태양을.”
  “지금이 낮이야. 지금 태양이 너와 함께 있어. 젠장, 네가 눈이 멀어서 그래.” 총통이 중얼거리는 걸 내버려두고 쥴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창틀을 더듬어 간신히 몸을 기대었다. 쥴은 창틀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책상과 인장이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도시가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태양이 그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눈부신 시선이 그의 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쥴은 무언가 중얼거리고는, 미소를 띄었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냐니까?” “우리는 밤을 죽였어, 총통.” 쥴이 부드럽게 말했다. “유령들이 나를 보잖아. 잊지 말라고. 결코 잊지 말라고. 만나러 가야지. 가서 구해야지.”
  “좋을대로 해.” 총통이 거의 포기한 듯이 말했다. 그들은 옆에 있는 아무 서류나 집어 계약서로 썼고, 총통이 직인을 찍었다. 시장이 된 총통이 조심스레 의자에 앉는 사이 쥴은 가만히 구석에 앉아있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모든 시선도 희미해져갔다. 쥴은 손가락을약간 움직여보였다. 언젠가 그 손을 잡아끌던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너는 이제 도시를 바치러 가겠군.” “이름을 얻었으니까.” 총통이 답했다. “이제 왕이 나를 부르실 테니까. 나는 갈 수 있지.” “그렇군.” “너도 올 거잖아.” 총통이 그에게로 바싹 다가왔다. “왕이 누구라고 생각해? 너는 밤으로 가. 나는 왕에게로 가. 우리는 같은 곳에서 만날 거야. 왕이 누구라고 생각해, 쥴?” 하고 시장은 쥴의 얼마 남지 않은 이름을 불렀다. 쥴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장은 조그맣게 말하고 쥴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자야, 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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