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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452B 행성에서 구한 기차표

 

 

애초에 다음 이야기를 내가 쓰게 된 까닭은 한 잡지에서 명절 맞이를 위해 아주 짤막한 SF 소설 원고 청탁을 해 왔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돈을 대어 발행하는 공공성이 높은 잡지였는데, 명절을 맞아외계 행성 제2의 지구에서 보는 명절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내용으로 짧은 소설을 써 달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분량을 물었고, 어떤 분위기의 소설을 원하는지도 물었다. 그러자, 편집자는 지면 제약상 길지 않은 분량이어야 한다고 했고,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제2의 지구에도 명절이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과학 보다는 상상에 초점을 맞춰서 밝은 분위기로 써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고, 소설을 썼다.

 

그렇게 쓴 소설은 내가 보기에는 무난한 내용이었다. 결말은 밝았고, 명절 분위기도 났고, 대충 SF 다우면서도 과학 보다는 상상에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마감 기한을 넉넉히 남기고 소설을 보내자, 편집자는 괜찮아 보인다는 답을 주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을 듣자, 나는 이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깜빡 방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편집자는이제, 위에 있는 무슨무슨부처 사무관 공무원께도 보여드리고 OK를 받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소설은 무슨무슨부처의 이름도 모르고 직책도 알 수 없는 어떤 공무원의 손에 들어 가게 되었다아마 그 공무원이 담당하고 있었던 무수히 많은 대한민국 정부의 업무 중에 이 얇은 공공성 높은 잡지를관리하는 일도 있었던 모양이고, 사실상 그 잡지 편집자는 거기에 매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작가인 내가 보기에 괜찮은 소설이고, 편집자가 보기에도 무난하다 하더라도, 이 공무원이 싫다면 소설은 실릴 수가 없었다. 짐작하건데, 혹시라도 짬이 생겨 그 공무원의 상관이나 상관의 상관이나 상관의 상관의 상관이 지나가다가 흘깃 그 소설을 보고 좀 그런데라고 두 단어만 말씀하신다면 역시 소설은 실리지 않게 되는 분위기였던 듯 하다.

 

불길했던 예감대로, 그 공무원은이게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편집자가 전해 주었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진짜2의 지구가 구체적으로 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사는 행성의 이름이지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런 행성의 개수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은 그때 껏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인간이 개척한 행성이 이 은하계에 어디에 또 있길래 거기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쓰라는 것인가?

 

어찌된 상황인지 묻자, 편집자는 확인 해 본 뒤에 좀 더 상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옮겨 보자면 이러하다. 그 공무원은 몇 달 전에 신문에 실린 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NASA에서 발견했다는 생명체가 살 만한 먼 외계 행성에 대한 소개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제목이2의 지구가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 그 공무원은 국민들에게 어떤 과학적인 최첨단 지식을 전달하고 싶다는 의도가 있었는지, 다름 아닌 바로 그 기사 속에 나온 행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바랬다는 것이다. 나는 편집자의 도움으로 그 기사를 찾아 보았다. 기사 속에 소개된 행성은 요즘 SF 작가들에게는 꽤 알려진 편인 케플러452B 행성이었다.

 

마감이 남아 있었고, 편집자의 사정이 간곡했던 까닭으로 나는 그렇다면 그 공무원이 제시한 대로 다시 새로 소설을 써서 건내어 주기로 결심했다. 그 때 편집자가 덧붙이기를, 처음 내가 써서 건내 주었던 원고가너무 칙칙하다는 평도 있었다면서, 좀 더 밝고 명랑한 내용을 바란다는 요청까지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때 잡지의 주제가 명절을 맞는 “Fun Fun한 명절, 브라보! 나의 가족” (도대체 이런 이상한 언어 유희는 왜들 이렇게 좋아하는가?)으로 되어 있다는 설명도 같이 해 주었다. 정말로 브라보 뒤의 느낌표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최대한 케플러452B 행성에 대한 지식이 담겨 있고,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나며, 훨씬 더 명랑하고, 심지어 “Fun Fun한 명절, 브라보! 나의 가족에도 어울리는 이야기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서 다시 보냈다. 그 결과물은 처음 소설 보다 더 재미 없어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분량은 채웠다. 그것이 지금 아래에서 소개하는 소설이다.

 

안타깝게도, 다시 소설을 접한 공무원은 이번에도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명절이니까 가족간의 따뜻함이 나타나는 이야기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고, 그리고 그 먼 행성을 배경으로 하는 구체적인 명절 풍경이 나타나지 못했다고 비평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결국 이 소설은 잡지에 실리지 못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공무원의 의도를 인간적으로는 존경 한다. 한번도 소설이 실리지 않았던 공공 잡지에 지식도 감동도 있는 SF를 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와 엮여 있는 모든 다른 일처럼 의사소통 장애의 안개가 상한 우유처럼 끈끈하게 끼어 있는 와중에서도 그런 일을 하려고 실제로 추진했다는 것 만으로도 멋져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공무원이 처음 마음 속에서 상상했던 품었던 그 명절용 SF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짐작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그런 것 치고는 기분 좋게 일은 마무리 되었다. 편집자가 미안하다며 원고가 실리지 않았지만 원고료는 그대로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 - - - - -

 

 

이종국은 설날에 부모님댁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밤을 샜다. 새벽 일찍 준비를 위해  일어나기 보다 차라리 밤을 새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종국은 기차표를 잘 살 방법만 탐구하며 밤 시간을 보냈고, 예매가 시작 되는 시간을 기다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새벽, 이종국처럼 기차표를 사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22천명이 넘어 가고 있었다. 이종국은 22천명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발선에 서서 저 멀리 떨어진 기차표를 향해 달리는 거대한 육상 경주를 상상했다. 그는 조금 표값을 싸게 사겠다고 5% 할인 쿠폰 사이트와 3% 적립 결제 사이트를 이용해서 접속했는데, 그래서인지 예매 화면에 들어 가는 것은 극히 어려 웠다. 한 단계 한 단계를 넘어 가는 것은 얼어붙은 겨울 뻘밭처럼 뻑뻑했다. 한 글자가 더 나오기를 기대하며 새로고침 단추를 수백번씩 눌러야 했다.

 

그 모든 난관 끝에 마침내 기차표의 날짜와 시간을 고르고 신용카드와 비밀번호까지 입력하는데 성공하자, 이종국은 마치 의자 대신 핵무기를 깔고 앉아 있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기차표가 손에 들어 오기까지는 마지막 순간만 남아 있었다. “결제하시겠습니까?” 화면에 질문이 나왔고, “라는 공손한 버튼을 달달 떨며 눌렀다.

 

그런데, 그러자 갑자기 보안프로그램 네 개를 더 설치해야 한다는 화면이 나왔다. 그러더니, 설치를 위해서 컴퓨터를 껐다 켜야 한다는 말도 또 화면에 나왔다. 화면에는확인이라는 버튼 하나만 나왔다. 본능적으로 그 버튼을 누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버튼은 그것 하나 뿐이었다. 누르든지, 아니면 영영 그 자리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그 프로그램은 스스로 컴퓨터를 끄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화면은 훅 꺼지고 말았다.

 

기차표오오오오!”

 

이종국은 원시의 야수와도 같이 길게 비명을 질렀다. 어디일지 모르는 먼 곳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과장이 아니라 정말 정신이 아득해졌고, 잠깐 기절한 기분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이종국은 섬유유연제 광고를 찍으면 어울릴 것 같은 넓고 하얀 방에 와 있었다.

 

정신이 드는가, 지구인이여!”

 

최불암이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한다면 들릴 것 같은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권위 있게 울렸다. 이종국은 소리쳤다.

 

, 기차표, 기차표 어디갔지?”

이곳은 케플러452B라는 지구에서 1400광년 떨어진 행성이다. 우리 행성은 지구보다 15억년 먼저 탄생한 곳이라서, 우리는 지구인들보다 15억년 더 발전한 기술을 갖고 있다. 너를 단숨에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내 기차표는요?”

우리 행성은 너희 지구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도 너희들과 비슷한 과거를 겪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인의 문화와 정신을 잘 이해하며 항상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희망에서 절망으로 네 감정이 추락하는 폭이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강렬하여 너희들을 관찰하던 우리조차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너를 데려온 것이다.”

그러면 기차표는 날아간 건가요?”

지구인이여! 이곳에서 영원히 평화롭게 살며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거라.”

 

이종국은 그때까지도 기차표를 찾느라 무심코 두리번 거렸다. 그러다 바깥 풍경을 보니, 행성은 신비로운 안개로 가득했다. 그 사이를 여러가지 빛을 뿜는 아름다운 새 같은 동물이 날아 다녔고, 다양한 색깔의 무성한 식물이 초원을 이루며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가끔 멀리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역시 발달된 기술로 조절되고 있는지 반짝거리는 불꽃 놀이로 변해 하늘을 장식했다.

 

지구인이여! 우리는 이곳에서 너에게 필요한 모든 물자와 정신적 쾌락을 줄 수 있다. 경기도 화성시 만한 정원이나, 대구시 수성구 만한 궁전을 줄 수도 있다. 네가 원한다면, 우주 함대를 너에게 만들어 주어 다른 지구인을 우주 탐험으로 이끄는 위인이 되게 해 줄 수도 있고, 진정한 세계 평화를 가져 올 위대한 사상을 가르쳐 줄 수도 있다. 지구인이여!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종국은 대답했다.

 

기차표요, 기차표.”

 

잠시 후 이종국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꺼졌던 컴퓨터가 리부팅을 마치고 다시 켜져 있었다. 이종국은 눈을 뜨자마자 허겁지겁 컴퓨터 화면에 얼굴을 들이대고 마우스를 붙잡았다. “기차표, 기차표.”

 

다시 조회해 보았더니, 결제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기차표를 예약했다는 사실 자체는 날아 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결제만 다시 하면 되었다. 이종국은 안도감에 감격하여 울부짖었다.

 

, 내 기차표!”

 

3주일 뒤 이종국은 고향에 와서 오래간만에 부모와 형제를 만났다. 역시 가족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섣달 그믐날 밤, 집 마당에서 조카들과 우주용사 플러그인맨 놀이를 하다 밤하늘을 보자, 지난 번에 밤 새다가 잠깐 졸았을 때 즈음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잊어 버린 것 같다는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혹시 뭔가 놓친 것, 잊고 있는 것이 없는지 곰곰히 스스로를 돌아 보았다.

 

그러다 안주머니에서 서울로 돌아 가는 기차표를 뽑아 놓은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자 뭘 걱정할 게 있겠냐 싶어 다시 어린 조카 앞에서 외계인 흉내를 내는 장난이나 계속 치기로 했다.

 

- 2016,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댓글 5
  • 정도경 16.02.01 20:23 댓글

    으으으 ㅠㅠㅠ 설명절에 떠나시는 분들 (귀성이든 귀경이든 여행이든) 모두 무사히 표 예매하시고 ㅠㅠ 즐겁고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 정도경님께
    No Profile
    곽재식 16.02.02 14:39 댓글

    도경님께서도 즐겁고 안전한 명절, 짬짬히 푹 잘 쉬시기도 하는 연휴 되시기를 빕니다.

  • No Profile
    민경일 16.02.02 10:06 댓글

    내 기차표오오오오! ㅠ_ㅠ

  • 민경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6.02.02 14:38 댓글

    돌아보면 뭔가 외계인과 관련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는데 주인공은 대수롭지 않게 어이없게 넘어 간다는 패턴은, 60년전, 70년전에 아이작 아시모프나, 아서 클라크 초기 시절에도 왕왕 있었던 것 같은데, 급한 김에 저도 그 패턴 그대로 가져 와서 그냥 한국 명절 소재만 하나 끼워 넣어서 맞춰 넣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 No Profile
    Megabrand 16.04.20 20:57 댓글

    ㅋㅋ 그 짤방이 생각나네요. "그는 공인인증서 없는 한국인처럼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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