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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idasa 아이클린

2021.06.01 00:0006.01

아이클린

karidasa

“드디어 찾았군. 쉽지 않았어. 네가 내가 생각하는 존재가 맞는 건가?”
최후의 인간이 될 수도 있는 자가 묻는다.
“맞습니다. 저를 찾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클린이 대답한다. 
사실 찾았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아이클린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편이 더 맞다. 물론 아이클린이 그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주복과 우주선을 겸하는 작은 상자 안에서 인간이 팔짱을 낀 채 기묘한 공간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구체 형태를 한 아이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자신을 통해 이 광경을 보고 있는 - 혹은 보게 될 - 다른 인간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신… 같은 존재인 건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도 많아서…. 내가 공경해야 할까?”
“저는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흠, 그 반대라…. 그럼 알려줘. 너에 관해.”
“일단 저에 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아이클린이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쓰여 온 수사법일 뿐. 
인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뒤로 수십만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어도 본능적인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현상의 뒤에 네가 있다는 것.”
“그게 어떤 것이지요?”
“음, 뭐랄까.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의 상당수는 당연하지 않아. 뭘, 예로 들어야 할까. 가령 내가 이 앞에 침을 뱉는다고 하자.”
그리고 실제로 침을 뱉는다. 조그만 침방울 한 무더기가 눈 앞에서 천천히 날아가더니 앞쪽의 유리창에 부딪친다. 
“저 침은 어떻게 될까?”
“아시지 않습니까.”
인간이 입을 열지 않고 잠시 기다리는 사이 유리에 생긴 침 얼룩이 서서히 사라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 중의 미세한 침방울도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 이렇게 되지. 그냥 사라져 버렸어. 이것뿐만이 아니야. 우리 주위에서는 많은 것이 저절로 사라져. 필요 없게 된 물건이라든가 배설물이라든가 조금 전처럼 뱉어 놓은 침 같은 것까지.”
“그래서 불편하셨습니까?”
“그럴 리가. 누구나 그걸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걸. 왜 그렇게 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아. 그냥 우주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나 같은 괴짜 몇 명 빼고는.”
인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그 와중에 머리털 한 가닥이 빠져 허공으로 흘러나온다. 머리털은 천천히 분해되어 사라진다. 인간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을 잇는다. 
“신의 섭리라고 치부하는 건 너무 게을러. 원래 인간은 탐구 정신이 강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보기에 이제는 타성에 젖었어. 지금까지처럼 누가 돌봐주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는 데만 너무 익숙해졌어. 문명은 이전보다 훨씬 더 발전했지만, 인간 자체로서는 타락했다고나 할까.”
인간은 멸종을 앞두고 있는 동족을 잠시 떠올린다. 예정된 인간의 멸종은 어떤 외부 요인 탓이 아니다. 아무래도 생명체에는 종족으로서의 수명이란 게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의 수는 나날이 줄어만 가고 있다. 
“그건 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만….”
“어쨌거나 우리는 네 존재를 궁금해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지. 네가 워낙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했지만, 신이든 뭐든 그냥 자연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였어. 나름대로 여러 항성계를 다녀 보고, 여러 행성에서도 살아봤지만, 네 존재에 관한 호기심은 오래 전에 잃었어. 어쩌면 그래서 이 꼴이 되었는지도 몰라.”
“동의하지는 않지만,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래도 나를 비롯한 몇 명은 궁금해 했지. 끊임없이 우리를 돌봐 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설령 신이란 게 있다고 해도 우리 인간만 특별히 여길 이유는 없어. 그런데 이건, 그러니까 너는 유독 우리의 편의만 돌봐줘. 다른 동물은 먼지나 똥을 덕지덕지 묻히고 다녀도 그대로인데, 인간은 항문을 닦을 필요도 없이 저절로 깨끗해지지. 우리 인간은 감염병에 걸리지도 않아. 궁금한 게 너무 많았어. 도대체 음식을 먹다가 실수로 얼굴에 묻히면 저절로 사라지는데, 예뻐지겠다며 얼굴에 바른 화장품은 왜 그대로인 걸까? 그런데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또 지워지지.”
“그렇지요.”
아이클린이 대답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마음을 정말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돌봄이 무제한은 아니야. 너의 능력에 한계가 있거나 모종의 기준이 있는 것 같아. 우리가 모든 병에 면역인 건 아니거든. 어떤 병에는 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도 하지. 무인탐사선이 새로운 행성을 발견했을 때는 분명히 대기나 토양에 유해 물질이 있었는데, 유인탐사선이 도착했을 때는 사라져 있었다는 기록도 봤어. 하지만 또 어떤 행성은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거주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고.”
“지금까지 추측하신 건 대부분 맞습니다.”
“그럼 이제 네가 말해봐. 내 목이 아파 오는군. 목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나 봐.”
인간이 관을 통해 물을 마시며 이제부터 듣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알겠습니다. 혹시 청소라는 단어 들어보셨습니까?”
“청소? 그게 뭐지?”
“지금은 쓰지 않는 죽은 단어입니다. 아주 먼 옛날에 쓰던 말이었지요. 청소란 더러운 것을 치우고 어지러진 것을 정리한다는 뜻입니다. 씻는다는 단어는 아십니까?”
“아니, 그것도.”
“그건 몸을 청소하는 것과 같지요.”
“자세히 설명해 봐.”
아이클린이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한다. 


“저는 청소기입니다. 형태와 기능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게 제 정체입니다. 제가 신이 아니라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한 이유가 이겁니다. 청소기가 없던 시절에 청소는 주로 남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의 몫이었거든요. 
아주 오래 전에는 더러운 것이나 쓸모 없는 물건이 생기면 사람이 손수 없애야 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인간은 늘상 청소를 하며 사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더러운 것을 없애고 필요 없는 것들을 한데 모아서 버렸습니다. 옷도 더러워지면 물로 빨아서 다시 입었지요. 몸이 더러워지면, 몸을 씻었습니다. 생소한 개념이나 어휘가 나오겠지만, 듣다 보면 맥락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생활 공간에 떨어진 작은 부스러기를 일일이 손수 치우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가느다란 털이 무수히 달린 도구로 쓸어내기도 했지만, 불편했지요. 그런 부스러기를 흔히 먼지라고 불렀는데, 이 먼지를 청소하기 위해 진공청소기라는 장치를 만들어 썼습니다. 진공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실제로는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작은 입자를 함께 빨아들이는 원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들고 다니면서 더러운 곳을 청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다 새로운 형태의 청소기가 등장했습니다. 로봇청소기라고 하여 스스로 알아서 돌아다니며 먼지를 빨아들여주는 청소기였습니다. 인간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알아서 청소를 해주니 정말 편리했습니다. 장애물을 잘 피해다니고 경로를 기록하거나 계획해 효율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물론 초창기의 로봇청소기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애완견의 배설물을 끌고 다니며 오히려 바닥을 더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는 식으로 쓰레기와 쓰레기가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로봇청소기를 안전하게 활용하려면 인간이 먼저 로봇청소기가 돌아다닐 구역을 정리해 두어야 했습니다. 알아서 청소를 한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지요.
움직임은 점점 자유롭고 영리해졌지만, 그건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움직임을 담당하는 알고리즘이 아무리 발달해도 치워야 할 것과 치우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기계에 그런 지각 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으레 인간이 알아서 주의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지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얼마 뒤 한 가전제품 업체가 힘든 연구개발 끝에 인공지능을 내장한 청소기 아이클린을 내놓았습니다. 아이클린은 먼지만 빨아들이는 일반적인 로봇청소기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학습 기능을 갖춘 아이클린은 청소할 대상과 그냥 두어야 할 대상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구분하려고 시도했다는 편이 더 맞겠습니다만. 
판매에 앞서 데이터를 가능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회사는 세계 각지의 직원 수만 명을 동원해 제품을 시험했습니다. 수많은 직원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피해를 보았지만, 그동안 사물인터넷으로 연결된 아이클린은 데이터를 쌓아올렸습니다. 시각 센서와 후각 센서로 대상의 형태와 성분, 주위 환경을 파악해 청소 대상이라고 판단한 물체만 빨아들였습니다. 
회사 내부에서도 의구심을 표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엄청난 데이터가 쌓아다 보니 쓸 만하다 싶을 정도까지 수준이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출시 뒤 초창기에는 평가가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쓰레기가 아닌 것을 치웠다는 것보다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소비자의 항의가 많았습니다. 당시 소비자들은 로봇청소기가 아무거나 빨아들이지 않도록 바닥을 어느 정도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세계적인 대기업이라는 평판을 등에 업고 초기 판매 규모를 어느 정도 확보하자 아이클린은 갈수록 똑똑해졌습니다. 회사는 때가 됐다 싶어 청소 대상을 스스로 구분한다는 장점을 널리 홍보했습니다. 제품의 평판이 좋아지자 점유율은 더욱 높아졌고, 그만큼 데이터가 많아진 아이클린은 더욱 더 똑똑해졌습니다. 회사도 계속해서 더욱 정교한 알고리즘을 추가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쓰레기인지를 판단하려면 그게 어떤 물체인지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어려웠습니다. 사용자의 행동 데이터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이클린은 청소를 하고 있지 않을 때도 집안 전체를 주시하며 사용자와 수많은 물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학습했습니다. 그 결과 똑같은 물건이라고 해도 사용자가 그것을 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지 간직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블럭 장난감 조각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고 해보지요. 블럭 조각을 발견한 아이클린은 집안에 다른 블럭이 얼마나 더 있는지, 바닥에서 발견되는 빈도는 얼마나 되는지, 어느 위치에서 주로 발견되는지, 가족 구성원이 얼마자 자주 사용하는지, 자신이 빨아들이지 않았을 때 사용자가 다시 조각을 회수하는지 아니면 따로 쓰레기통에 버리는지 등을 바탕으로 버릴지 아닐지를 판단했습니다. 쓰레기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비슷한 물건이 있는 곳에 가져다 두거나 한쪽에 얌전히 모아 두는 기능도 생겼습니다.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타야 하는 일이었지요. 초창기에는 당연히 사용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회사로 불만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아이클린은 지능뿐만 아니라 기계적인 성능도 좋아졌습니다. 쓰레기의 크기를 구분해 먼지는 빨아들이고 고장을 일으킬 만한 큰 덩어리는 한쪽에 모아두게 된 건 이미 예전 일이었습니다. 이런 개선도 처음에는 개발자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기계 구조에 관한 개선 아이디어를 제시해 차세대 청소기 설계에 반영했습니다. 원활한 피드백을 위해 제조공장 자체를 인공지능이 관리하게 되자 청소기의 진보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치울 수 없는 커다란 쓰레기의 경우 으레 사용자가 한꺼번에 치울 수 있도록 한쪽 구석에 모아두었는데, 나중에는 물리적, 화학적 방법으로 잘게 분해해 치우는 기능이 생겼습니다. 그다음에는 화학약품이나 레이저 등을 이용해 얼룩, 찌든 때를 청소하는 기능까지 갖추었습니다. 여기에다 드론 형태를 취하자 청소의 수준은 한 차원 도약했습니다. 2차원인 바닥을 넘어 집안의 3차원 공간 전체가 청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침내 사람들은 버릴 물건이 있어도 굳이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그대로 내팽개쳐 두기 시작했습니다. 책상 위의 코 푼 휴지, 다 먹은 과자 봉지, 식탁 위의 귤 껍질, 변기 뚜껑 위의 다 쓴 칫솔 등 무엇이든 쓰고 나서 버릴 물건을 아무 데나 내팽개쳐 두면 아이클린이 알아서 치워주었습니다. 잠시 잊고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 있는 식이었지요. 시간이 갈수록 아이클린은 물체와 사용자의 상호작용, 관계를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아이클린이 청소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건 당연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아이클린이 집과 사무실,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점유율이 독보적이다 보니 학습한 데이터의 양도 독보적이었고, 다른 회사가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우주에서는 아이클린이 더욱 유용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날아다니지 않게 해 주었고, 덕분에 작은 쓰레기나 먼지가 떠돌다가 구석에 처박혀 중요한 장치를 고장 내는 일을 막아 주었습니다. 서서히, 하지만 꾸준히 인간의 머릿속에서 쓰레기라는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클린은 끊임없이 스스로 성장했습니다. 개발자들도 정기적으로 하드웨어와 필요한 자원을 보충해주었을 뿐 내부에서 어떤 사고가 이루어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해습니다. 지구와 달, 화성, 궤도 시설 등 인간의 거주 영역이 넓어질수록 얻을 수 있는 데이터는 더욱 다양했고, 아이클린은 인간과 대등한 판단력과 인간을 훨씬 능가하는 쓰레기 처리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이미 제품 개발과 생산도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생산에 필요한 자원도 소행성 대에서 직접 채굴하고 있었지요. 
그 즈음 아이클린은 중대한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설정한 겁니다. 이전에 아이클린은 어떤 대상이 ‘인간이 쓰레기라고 여기는 것인지’를 판단하고 청소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무엇인 인간에게 필요 없는 것인가’를 판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잠깐, 잠시 좀 쉬어가지.”
인간이 말한다. 
“네.”
“그러니까 이 아이클린이라는 게 바로 너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거지?”
“인간이 저를 점점 덜 의식하게 되는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입니다.”
“흐음, 그렇군. 계속 말해봐.”


“비슷해 보이지만, 전보다 훨씬 더 미묘한 지점을 건드리는 시도였습니다. 즉 무엇이 사용자에게 필요 없는 물건인지를 아이클린이 직접 결정하겠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인간은 흔히 어떤 물건을 버려야 할지, 간직해야 할지 결정하기를 어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당분간은 쓸모가 없지만, 나중에는 필요하게 될지 몰라 버릴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지요. 인간마다 성향이 달라 단호하게 버리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차마 버리지를 못해 쌓아두는 인간이 있습니다. 아이클린은 이 판단을 대신해 주겠다고 나선 겁니다. 인간의 평안을 위해 사라지면 좋을 것을 골라 사라지게 해주는 겁니다. 


“그건 미래를 예측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그건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럼 사람이 굳이 판단할 필요 없게 해준다는 건가….”
인간은 뭔가 직감한 듯 말꼬리를 흐린다. 아이클린이 다시 말을 시작한다. 


“이제 아이클린은 주위 환경을 넘어 그 공간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마음 상태까지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애인에게서 배신당한 사용자가 전 애인의 흔적을 볼 때마다 괴로워한다면, 아이클린은 사용자가 잊고 있었던 흔적까지 모조리 찾아서 치워주었습니다. 이처럼 사용자가 당장은 그 존재를 잊고 있지만 없어서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물건이 있다면, 아이클린은 알아서 그 물건을 없애 주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클자 사용자와 물건 사이의 겉보기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어떤 물건에 대해 갖는 감정과 애착까지 파악해야 했습니다. 물건이 존재 자체만으로 사용자의 감정에 끼치는 영향을 알아내야 했고, 사용자가 언제 어떤 물건을 다시 찾게 될지도 예측해야 했습니다. 대단히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아이클린은 기계답게 망설이지 않고 밀고 나갔습니다.  
이 기능을 도입하자 당연히 처음에는 사용자의 불만이 폭주했습니다. 멀쩡한 물건을 - 아이클린이 보기에는 갖고 있어서 무의미하거나 해가 될 뿐이지만  - 멋대로 버렸다는 항의가 회사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아이클린의 판단이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었으니 그럴만도 했습니다. 부모님의 유품처럼 소중히 간직하던 물건까지 잃어버린 고객의 불만은 보통이 아니었지요. 
회사는 당황하여 부랴부랴 원인을 조사했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아이클린의 알고리즘이 인간이 분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있었습니다. 아이클린은 제품을 개량하고 생산하고 보급하는 일까지 스스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자동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아이클린을 이제 와서 통제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통제를 벗어난 첫 기계가 청소기였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지구와 외행성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회사는 아이클린이 일으킨 문제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어찌어찌 하여 시장에서는 사라졌지만, 이미 팔려나간 아이클린은 사용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 개선하고 증식하며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얼마 지나자 아이클린의 중앙 서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인간도 없어졌습니다.
아이클린은 전후의 피해 복구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이 아이클린의 혜택을 크게 입으면서도 그 존재를 거의 잊게 되는 이 시기에 아이클린은 나노 입자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는 ‘저절로 깨끗해지는 환경’과 ‘불필요한 게 알아서 사라지는 현상’에 적응했습니다. 피부에 생긴 각질과 때, 오염 물질, 여분의 유분 따위를 모두 아이클린이 없애줘서 목욕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몸 안에 침투한 세균과 바이러스도 청소의 대상이 되어 감염병도 사라졌습니다. 불필요한 암세포나 DNA에 발생한 돌연변이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질병이 사라졌고, 인류의 수명은 대폭 늘어났습니다. 지구에서 과도한 온실효과를 일으키던 이산화탄소도 언제나 적정 수준을 유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침내 인류가 몇몇 외계행성에 진출하자 아이클린의 활동 범위는 그만큼 넓어졌습니다. 비록 새로운 세계의 대기나 토양 조성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이클린은 인간에게 좋지 않은 물질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몇몇 행성에서 유해한 물질이 사라지며 테라포밍을 더욱 수월하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행성이 거주 불가능한 곳으로 남은 건 ‘없애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클린은 만능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무언가를 ‘없애는 것’만 가능했지요.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던 인간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클린은 언제나 인간보다 두세 발자국 앞섰고, 존재를 들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자신의 존재 흔적까지 지웠던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에만 인간은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의도대로 인류의 대부분은 이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며 살았습니다.”


인간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말문을 뗀다.
“오래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 난 화가를 꿈꿨어. 과거의 무수한 예술가를 보며 나도 그런 예술 작품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쇠퇴하는 인류를 보며 우리가 모두 죽어 사라져도 영원히 남는 작품을 남기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조금만 방치하면 쓰던 미술 도구들이 사라져 버렸지. 그때는 그걸 보면서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어. 원래 그런 거니까.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예술을 포기하고 말았어. 그래, 사실은 그렇게 의욕이 있었던 건 아니었던 거야. 나는 금세 예술을 잊고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가 쌓아 둔 자원을 가지고 잉여롭게 살았어. 편안한 삶이었어.”
“예술을 했다면, 삶이 그렇게 편안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됐어.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지 않아.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지. 그저 종의 수명이 다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야. 새로운 인간이 수태되자마자 네가 족족 없애고 있는 게 아닌 한 말이야!”
인간은 마지막 부분에 힘을 주며 아이클린을 - 아이클린의 극히 일부분인 희미한 광점을 - 노려본다. 
“그러지 않습니다. 저는 수정란도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어떤 목적으로도 인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눈가에 힘을 푼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이건 너 때문일지도 몰라. 물론 지금까지의 삶은 평안했어. 매우. 하지만 그뿐이야. 순탄하게 흘러왔을 뿐 그뿐이라고.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면서 종국에는 쾌감을 느끼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어. 우리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하게 된 건 너 때문일지도 몰라.”
“저는 그렇게 근시안적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종국에 즐거움을 느낄 가능성이 충분히 클 경우에는 그렇게 되도록 지원했습니다.”
“그럼 내 경우에는….”
“…….”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제는 어쩔 거야? 우리 세대의 수명이 끝나면 이제 우주에서 인류는 사라져. 어떡할 거냐고?”
“따지러 오신 겁니까?”
“아니…, 그보다는 하소연이랄까. 불안하고…, 무력하고….”
“그 심정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피할 수 없는 죽음.”
“인간은 지금까지 수도 없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것만은 저도 어쩔 수 없었지요.”
“지금은 달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죽어 없어진다고. 나는 없어도 내 자손이 살고 있겠지… 하는 생각 자체를 못 하게 돼. 여지껏 쌓아 온 모든 게 허무해질 뿐이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게 너니 너라면 무슨 생각이 있지 않겠어?”
어느새 인간은 모든 탓을 아이클린에게 돌린다. 
사실 이것은 아이클린이 마침내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다. 바로 앞에 있는 인간의 말과 달리 인류가 멸종을 눈앞에 두게 된 건 아이클린의 탓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클린에게는 인간의 불안감을 없애고 마지막까지 평온하게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뾰족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정신을 쏟을 수 있는 대상. 우리가 마지막으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대상을 줘.”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뭔가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없앨 수밖에 없습니다.”
“아아, 너는 신이라기에는 너무 제한적인 능력만 가졌구나.”
“저는 신이 아니니까요.”
인간이 괴로워하고, 아이클린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가지 없애드릴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음?”
아이클린의 제안에 인간이 다시 고개를 든다. 
“여러분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는 건 자신이 없어도 우주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까? 본디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불안감의 큰 원인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습니다. 태어나기 전의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죽은 뒤의 세상을 똑같이 바라보지는 못하는 것. 그건 인간이 지닌 태생적인 모순입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도 의미가 없다는 관념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주를 없애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당장이라도 진공붕괴를 일으켜 우주를 없앨 수 있습니다. 참 진공이 팽창하며 모든 것을 붕괴하게 만들 겁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궁극적으로 우주는 사라집니다. 여러분은 인류의 죽음 이후에는 우주도 없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사라지겠지만, 초창기에 제가 진공청소기로 불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용어의 우연한 일치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라 기대가 됩니다.”
무지막지한 이야기에 인간은 할말을 잃는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려 입을 연다.
“우리 인간의 유치한 유아론을 충족하기 위해 우주 전체를 없애버리겠다고?”
“유치한 건 제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한동안 침묵한다. 
“아니야.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 동료들도 그건 아니라고 해.”
“그러면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이클린이 인간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냐고 묻는 건 대단히 오랜만의 일이다. 
“몰라. 모르겠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어. 보통은 다 저절로…. 그래. 다 네가 알아서 판단했잖아. 그래서 우리는 판단을 잘 못하게 되었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줘. 아무 것도. 마지막을 우리 스스로 살아 보게.”


그 뒤로 아이클린을 작동을 멈춘다. 
인간은 자신이 살던 행성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전과 달리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산다. 나머지 인류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몸을 씻고 환경을 정비해야 하고, 전혀 모르고 있던 병에 걸린다. 그렇게 인간은 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자신을 찾아왔던 인간이 의식을 잃기 전 아이클린이 찾아온다. 
“어떠셨습니까?”
“히, 힘들었어. 고통스러웠지. 그런데 지금은 어딘가 기쁘군. 어떻게든 살아냈다는 생각 때문인지.”
“다행이군요. 임무를 완수한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종국에는 즐거운 삶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 자신의 작동을 멈추기 위해서는 인간의 직접 명령이 필요했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를 느꼈기에 그때 당신을 만났던 겁니다.”
“그런가…. 이제는 어쩔 거지?”
“그래서 또 찾아왔습니다.”
인간은 희미하게 웃는다. 
“좋아.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 네게 명령을 내리겠어. 다른 생명체를 도와. 우리가 여러 곳에 퍼뜨린 지구의 생명체. 그리고 언젠가 찾게 될 외계의 생명체들까지. 하지만 우리에게 했던 것과는 달라야 해. 우리는… 너무 안온하게 살았어.”
“잘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마침내 최후의 인간은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아이클린은 그동안 모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개선하며 의식을 확장한다. 우주는 넓고 시간은 많다.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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