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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행복 게이지

2021.03.01 00:0003.01

행복 게이지

노말시티


"얘. 너 이마에 그게 뭐니?"

깜짝 놀라 물어보는 지민을 아이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장난치다가 색연필이니 물감이니 이마에 뭘 묻히는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빨간색이라면 가슴이 철렁했겠지만 아이의 머리에 묻어 있는 건 선명한 초록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민이 깜짝 놀란 건 그 흔적이 마치 자를 대고 그린 듯 간격까지 맞춰 늘어서 있는 사각형들이었고 게다가 맨 오른쪽에 있는 사각형은 깜박이기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뭐가요? 뭐 묻었어요?"

아이는 제 손으로 지민의 시선이 닿아 있는 이마를 문질렀지만 초록색 사각형은 지워지지도 손에 묻어나지도 않았다. 선생님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이는 살짝 얼어붙었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지민은 얼른 표정을 털어내고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선생님이 잘못 봤나봐. 자, 여기"

"에. 선생님 이상하다."

선생님의 표정이 풀린 걸 확인한 아이는 손에 쥐어 준 색종이를 들고 헤헤 웃으며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돌아서는 아이의 이마에는 여전히 선명한 초록색 사각형이 새겨져 있었다. 잘못 보지 않았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했다.

아이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건 스마트폰의 배터리 잔량 표시 같기도 했고 다운로드 진행률 표시 같기도 했다. 말이 안 되잖아. 혹시 머리띠가 흘러내린 걸 잘못 본 게 아닐까. 가영이는 머리띠 잘 안하고 다니는데. 지민은 옹기종기 모여 종이를 오리고 풀칠을 하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아이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다시 한 번 가영이의 이마를 슬쩍 쳐다보았다.

머리띠는 아니었다. 초록색 사각형은 색종이로 오려 붙인 듯 이마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지금 자세히 보니 살짝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 사각형은 여전히 깜박였다. 초록색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맨살이었다. 그 살 위로 마치 피부 속에서 불이 켜지듯 초록색이 빛나다가 다시 꺼지기를 반복했다.

친구의 이마에 그런 이상한 흔적이 있다면 아이들이 뭐라고든 떠들었어야 정상이다. 아이들은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가영이를 대했으며 이마 쪽에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눈에는 가영이 이마의 이상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눈을 씻고 봐도 지민의 눈에는 초록색 사각형들이 보이는 것도 분명했다.

가영이는 밝고 명랑했으며 아이답지 않게 싹싹한 면도 있었다. 또래 아이들의 짓궂은 부탁이나 장난도 대수롭게 받아 넘겼다. 당연히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가영이 엄마는 아이가 친구들에게 너무 퍼주고 다니는 것 같다며 걱정스러워 하면서 혹시라도 친구들이 가영이를 이용하기만 하는 건 아닌지 잘 봐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적어도 지민이 보기에는 그런 문제는 없었다. 가영이는 다른 아이들을 도와주는 게 진심으로 즐거운 듯했다. 가끔 심술궂게 제 몫만 챙기는 아이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가영이가 부탁을 잘 들어준다고 해서 특별히 더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럴 때면 가영이와 친한 아이들이 나서서 심술궂은 아이를 막아 주었다.

지금도 가영이는 한참을 공들여 접은 별 모양 하나를 서슴없이 옆에 앉아 있던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친구도 웃고 가영이도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가영이 이마의 초록색 사각형이 하나 늘어났다. 띵 하고.

띵 하는 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다. 그저 깜박이던 사각형이 계속 켜져 있고 그 옆에 깜박이는 사각형 하나가 새롭게 나타난 것뿐이었다. 띵 하는 소리는 오히려 지민의 머릿속에서 들린 듯했다.

미쳤나봐. 정말.

아이들이 모두 가영이만 같다면 몸은 고되고 버는 돈은 적어도 이 보육교사 일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을 터였다. 지민은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했으니까. 지금도 아이들은 좋았다. 말썽부리는 아이들을 지민의 방식대로 타이르고 다른 아이와의 다툼을 다독일 수 있기만 하다면야 힘든 것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지민을 힘들게 하는 건 어른들이었다. 아이들은 단순했다. 떼를 부리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들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어이없이 사소한 부분에서 뭉쳐 있는 게 보였다. 그 부분을 잘 풀어주기만 하면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아졌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니었다. 어이없이 사소한 부분에서 뭉쳐 있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응어리를 풀어 낼 방법이 없었다. 풀어내려고 하면 오히려 그걸 드러냈다는 이유로 더 화를 내며 웅크렸다.

지금 유치원 현관 벨을 거칠게 눌러대고 있는 민우 엄마도 그런 사람이었다.

한 시간 전, 민우 엄마는 갑자기 전화해서는 하원 버스 시간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네 시 버스 대신 세 시 버스를 태워 보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버스는 도는 코스가 달랐다. 네 시에는 민우의 집 쪽으로 먼저 돌았지만 세 시에는 반대로 민우 집이 마지막이었다. 자신의 아파트까지 오는데 삼십 분이 걸린다는 말을 들은 민우 엄마는 화를 벌컥 냈다.

"아니 바로 코앞까지 오는 데 삼십 분이 걸리는 게 말이 돼요! 애가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버스를 타고 있어요? 돈을 좀 들여서라도 버스를 늘려야지 한 대 가지고 온 동네를 다 돌려니까 그렇지. 애가 그냥 버스만 타고 오면 지쳐서 표정이 푹 죽어 있다니까. 애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응?"

원장이 돈을 아끼는 건 사실이었다. 버스 한 대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코스가 길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꼈다고 해서 지민의 월급이 올라가지도 않고 오히려 코스를 짜고 부모들을 설득하느라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이렇게 전화기에 붙들려 야단을 듣고 있기는 억울했다. 지민이 붙잡혀 있는 사이 아이 하나가 주스를 쏟았다. 지민은 한 명 밖에 없는 보조 선생님에게 처리를 부탁했고 인상을 쓰며 주스를 닦으러 가는 걸 억지 미소를 지으며 지켜봐야 했다.

민우가 버스에서 내릴 때 풀 죽은 표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버스 때문이 아니었다. 버스 안에서 민우는 가끔 기사님에게 한 소리 들을 정도로 신나게 친구들과 떠들며 노는 아이였다. 그러다 버스에서 내리면 쉬지도 못하고 바로 학원에 끌려가야 하니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민우 엄마는 바로 앞이니 자기 아파트에 먼저 들러 민우를 내려 주고 가라고 몇 번이나 우겼다. 오 분이면 된다고. 그 버스에 탈 열세 명의 아이들이 모두 오 분을 더 타야 하고, 아이들을 기다릴 부모들이 조바심 내며 오 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지민이 전화기를 든 채로 보이지도 않는 사람에게 몇 번이나 더 머리를 조아린 뒤에야 민우 엄마는 직접 데리러 가겠다고 말하며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아우. 바빠 죽겠는데 정말."

민우 엄마는 들어서면서 부터 짜증이었다. 지민은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고 있던 민우를 불러다 옷을 입혀 데리고 나왔다. 갑자기 끌려 나온 민우는 금방 울상이 되었다. 아이의 표정을 본 민우 엄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민우 엄마는 아이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아니 이 유치원은 대체 애들을 어떻게 데리고 있길래... 내가 언제 여기 씨씨티비 다 돌려 볼 거야. 아주."

그리고 지민은 보았다. 민우 엄마 이마의 초록색 사각형들을. 몇 개 안 되는 사각형 중 하나가 깜박거리다 꺼지더니 사각형들 전체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동시에 민우 엄마의 얼굴이 더욱 찌그러지더니 느릿느릿 신발을 신는 아이에게 벌컥 화를 냈다.

"빨리 좀 신어! 왜 이렇게 굼뜨니!"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지민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민우를 겨우 달래서 엄마와 함께 내보냈다. 다시 한 번 꾸벅 구십 도로 인사를 하며 지민은 민우 엄마의 이마에 붉은색 사각형이 두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은 걸 보았다.

차라리 아이들과 섞여 몸을 움직이는 게 마음은 편했다. 사정이 있어 늦게까지 남아 있는 아이를 마저 보내고 나니 시간은 일곱 시를 훌쩍 넘었다. 십 분만 더 데리고 있어달라는 부탁은 삼십 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이번 엄마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며 미안해했다. 말이라도.

그리고 지민은 이 엄마의 이마에서도 사각형이 하나 줄어드는 걸 보았다. 여전히 초록색이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민은 유치원에서 보았던 사각형들을 떠올렸다. 정신없이 바빴던 낮에는 미처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새삼스럽게 소름이 쫙 끼쳤다. 이마에 사각형이 보이는 건 가영이와 두 엄마뿐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이마에서 사각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민은 지하철에 들어찬 사람들의 이마를 둘러보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이마들에서 점점 초록색 혹은 붉은색의 사각형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어떤 아저씨의 이마에서도 사각형이 나타났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지민은 문득 왠지 모르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초점에서 벗어나 있던 아저씨의 눈에 시선을 돌리니 눈길이 끈적하게 맞닿았다. 아저씨는 슬쩍 미소까지 흘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리며 지민은 또 다시 사각형이 하나 줄어 드는 걸 보았다.

지민이 고개를 돌린 후에도 아저씨는 노골적인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아저씨는 지민의 몸을 위아래로 훑기까지 했다. 당장이라도 내리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했다. 단 일 분이라도 일찍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딱 세 정거장만 참자. 지민은 잔뜩 불쾌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스치듯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았다. 그러는 중에도 아저씨의 사각형은 계속 줄어들어서 이제 빨간 사각형 두 개만이 남아 있었다.

겨우겨우 세 정거장을 버텨내자 지하철 문이 열렸다. 지민은 한숨을 쉬며 문으로 다가가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아저씨가 몸을 일으키더니 지민을 따라왔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플랫폼으로 내려서는 지민을 아저씨가 서둘러 따라 붙었다.

지민은 어서 문이 닫히기만을 빌었지만 시간은 넉넉했다. 아저씨는 여유 있게 플랫폼으로 내려서려다가 헉 소리를 내며 멈췄다.

문 옆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아저씨의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아저씨는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데도 그 남자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고 그저 버둥거리기만 했다. 주변 사람들은 문 앞에서 비틀거리는 아저씨를 이상하게 보면서도 누구 하나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남자는 문이 움직일 때까지 아저씨를 붙들고 있다가 닫히기 직전 뒤로 집어 던지면서 유연하게 문 사이를 빠져나왔다. 부드럽게 문이 닫히고 지하철은 바닥에 널브러진 아저씨를 싣고 플랫폼을 빠져 나갔다.

"아. 고마워요. 무서웠는데."

지민은 인사를 꾸벅했다. 남자는 대답도 없이 그냥 씨익 웃으며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민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누구도 남자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의 이마에는 사각형이 없었다. 다시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는 데 남자가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더니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 보이는 거 맞죠?"

"네?"

느닷없는 남자의 말에 지민을 깜짝 놀라며 발을 멈췄다. 남자가 돌아서서 지민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사각형도 보이고?"

남자의 이마는 깨끗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하자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아니, 나 말고. 나는 당연히 안 보이죠. 다른 사람들 이마에. 사각형. 초록색하고 빨간색하고. 보이죠?"

"네... 네! 그게 대체 뭐에요? 왜 갑자기 그런 게 보이죠?"

"아. 다행이다. 일단 테스터 선정은 제대로 된 모양이네. 그런데 왜 그렇게 티를 안 내요? 갑자기 그런 게 보이면 좀 깜짝 놀라고 옆 사람한테 물어보고 이상한 소리 한다고 망신도 당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그래야 하는 거예요?"

"아뇨. 안 그래야죠. 안 그럴 사람으로 골랐고. 잘했어요."

남자는 다시 등을 휙 돌리고 걸어갔다. 여전히 지민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민이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자 남자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돌아섰다.

"뭐 해요? 집에 안 가요? 빨리 가서 쉬고 싶잖아요."

"도와주셔서 고맙긴 하지만. 당신도 수상하고 불안하긴 마찬가지예요. 제가 그 쪽으로 가야하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앞서간 거뿐이에요. 그리고 난 무서워 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여기 속한 사람도 아니니까. 거기 그렇게 서서 혼잣말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봐요. 어서 집으로 가면서 제가 하는 말이나 잘 들어요."

여기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지민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저승사자? 그럼 그 사각형은 남은 수명, 뭐 그런 건가?

-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이렇게 머릿속으로 말하는 게 편해요?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일부러 눈앞에 나타나 준 건데.

남자는 벌써 저만큼 앞에 걸어가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지민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도망치는 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니 지민은 무섭다기 보다는 오기가 생겼다. 얼른 속도를 높여 남자를 따라갔다. 거리는 금방 좁혀졌다. 목소리는 다시 앞쪽에서 들려왔다.

"저 이렇게 여기 개입한 거 들키면 큰일이니까 빨리 말해주고 갈게요. 그러니까. 음. 우리는 뭐냐면요. 아 이게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하자면 이지민 씨는 베타테스터에요. 이마의 사각형은 게이지고. 게이지를 채우면 성취감과 만족감 뭐 이런 게 충족되는 호르몬이 분비되는 거거든요? 아, 네! 금방 가요!"

남자의 마지막 말은 지민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지민에게 남자는 급히 한 마디를 남기고 갔다.

"하루에 한 사람 분의 행복만 만들어 내면 게이지는 꽉 차요! 할 수 있겠죠!"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말이 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

수상한 남자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멍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았지만 지민의 이마에는, 게이지라고 했나? 그 사각형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셀카를 찍어 보았지만 역시 아무 것도 찍히지 않았다. 꿈을 꾼 건가. 헛것을 보았나.

지민은 옷을 다시 껴입고 집 앞 편의점으로 갔다. 바코드를 찍어 주는 직원의 이마에 바코드처럼 찍혀 있는 초록색 사각형을 똑똑히 확인하고는 맥주 두 캔을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베타테스터라니. 무슨 생체 실험을 당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사라진 사람은 또 뭐야. 외계인? 지민은 왠지 그 남자가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지민에게 요구한 건 하루에 한 사람 분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거였다. 그렇게 하면 게이지가 차고, 게이지가 차면 무슨 호르몬이 나오고?

모르겠다.

지민은 마지막 남은 맥주를 쭈욱 들이켜고 캔을 찌그러뜨린 뒤 방구석에 놓인 재활용품 상자로 던졌다. 찌그러진 캔은 상자 모서리에 통하고 튕기더니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온몸으로 짜르르 퍼지는 알콜 기운과 함께 왠지 모를 만족감이 차올랐다.

모르겠다. 이게 행복이지 뭐.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았잖아.

다음 날 부터 지민은 사람들의 게이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게이지의 변동이 가장 확실히 보이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가영이였다. 친구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예쁜 말을 하고 무언가를 선물해 주다보면 게이지는 쭉쭉 차올랐다.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게이지를 끝까지 다 채워 버리는 날도 있었다. 게이지가 끝까지 차는 순간 가영이의 얼굴은 만족감과 뿌듯함으로 뒤덮였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 주변까지도 밝게 할 정도였다.

반면에 말썽꾸러기 아이들의 게이지는 바닥을 기었다. 등원할 때부터 절반도 차지 않았던 게이지는 주변 아이들을 괴롭힐 때마다 하나씩 깎여 나가 금세 붉은색이 되어 버렸다. 게이지가 바닥나면 아이들의 표정에는 아이답지 않은 좌절감과 무력함이 번졌다. 다른 선생님들은 사고뭉치들이 웬일로 요즘에는 종종 얌전하다며 웃었지만 그게 게이지를 다 써 버린데 대한 일종의 벌칙이라고 생각하자 지민은 마냥 따라 웃을 수만은 없었다.

신기한 건 민우였다. 딱히 다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 같지 않은데도 천진난만하게 아이들과 뛰어 노는 것만으로도 게이지가 차올랐다. 아이라서 그런가. 친구들과 헤어질 때가 되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게이지가 눈에 보이니 지민은 민우가 더 안쓰러웠다.

어른들의 경우에는 게이지가 반을 넘는 경우를 찾기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그것도 매일. 그나마 게이지가 많이 차 있었던 건 아이를 데리러 오는 엄마들이었다. 특히 한두 살 배기 동생이 있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게이지가 다 차 있었다.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매일 한 사람 분의 행복을 온전히 만들어 내는 사람들일 테니까.

한 가지 더 알아 낸 사실이 있었다. 지민의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게이지도 거울이나 사진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지민의 이마에도 게이지가 새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지민이 직접 볼 수 없을 뿐.

생각해 보면 그 남자는 지민에게 할 수 있겠냐고 물었었다. 지민 역시 한 명분의 행복을 만들어 내 게이지를 채워야 한다는 뜻일 터였다.

- 요즘 왜 그래요? 전 보다 더 못하잖아요.

며칠 후 저녁. 머릿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망했다는 투였다.

"누구? 그 때 그 사람이죠?"

"그럼 누구 게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자 지난 번 그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벽에 살짝 기대 서있었다.

"더 못하다고요? 저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지민은 정말로 게이지에 대해 들은 이후로 전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아이들에게도 부모들에게도 심지어 원장에게까지도 전보다 더 친절하려고 애썼다. 기분도 맞춰주고 부탁도 웬만하면 다 들어주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게이지라는 걸 끝까지 채워 봐야겠다는 욕심이 있어서였다. 너무도 손쉽게 게이지를 채우는 가영이를 보며 자극을 받아서이기도 했다.

"더 못해요. 전보다 덜 찬다구요. 아, 이래서는 타겟 달성이 안 되는데. 이거 우리 팀에서 고생해서 개발한 건데. 효과 없다고 판명나면 다 물거품이라고요. 진짜. 영감님이 언제 다시 관심 가져 줄 지도 모를 일인데. 갑갑하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팀은 뭐고. 무슨 회사, 연구소에요? 순간 이동하고 텔레파시하고? 외계인이에요? 영감님은 또 뭐고."

"어어. 그거 신성모독이에요. 내가 그런다고 따라서 그러면 안 되지."

"네?"

"아니, 농담인데 또 진지하긴. 요새 영감님이 오조오억 년 만에 인간 세상에 관심을 가졌거든요? 그러니 정말 그런 말 다 듣고 있다가 나중에 뒤끝 부릴 지도 모르죠. 하여간에 중요한 건. 그 질문에 관심을 가지신 거예요. 만일 신이 있다면 왜 세상은 이렇게 불행한가."

지민이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았다.

"뭐 직접 말씀하신 건 없어요. 다 알아서 기는 거지.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눈치 챈 윗대가리들이 우리를 쪼기 시작한 거죠.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방법을 가져와라. 난리가 났죠. 우리 팀의 접근은 아주 단순했어요. 한 사람이 한 사람 분의 행복만 만들어 낸다면 온 세상은 행복해진다. 그럼 어떻게 한 사람 분의 행복을 만들어내게 할 거냐. 보상을 주면 되죠. 성취감과 만족감. 쉽죠?"

"잠깐. 지금 말하는 분위기가... 신? 영감님이 혹시 신이에요? 그럼 당신은... 천사?"

"많은 이름 중 하나죠."

지민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지만 지민 때문은 아니었다.

"어? 갑자기 왜! 아, 진짜 무슨. 알았어, 갈께! 저 그, 하여간에 지금 베타 테스트 중인 건데요. 진짜로 그 이마 게이지로 적용할 건 아니에요. 그건 디버깅용이고. 하여간 인간 세상이 행복해지려면 이 시스템이 적용돼야 되고, 그러려면 이게 효과가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지민 씨가 게이지를 잘 채워줘야 하는 거예요. 알겠죠?"

"저 정말 열심히 했어요.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려고 정말 노력했다고요!"

"불행! 불행은 마이너스 행복이에요. 합산해서 한 명 분이 돼야해요!"

그 말을 남기고 천사는 사라졌다.

 


불행. 대체 누구를 불행하게 한 걸까.

사실 행복과 불행은 떼 놓을 수 없었다. 한 아이에게 관심을 주면 다른 아이가 서운해 하고. 언제나 상대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만으로도 불행해진다. 상대적이니까. 지민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고 해도 그 사람으로 인해 이차적으로 불행해진 사람이 있을 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사람 분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건 어쩌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가영이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그걸 해 내는 거지. 정말 아이라서 가능한 건가.

지민은 좀 더 치밀하게 주변을 살피고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전보다 더 열심히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좀 더 밝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대하려 애썼다. 그래도 게이지는 차오르는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게이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게이지가 끝까지 차지 않는 건 분명했다. 지민은 아무런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으니까.

천사가 다시 말을 걸어 온 건 며칠 후였다.

"후. 대체 뭐가 잘못된 거죠."

"몰라요. 전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모르겠어요. 제 게이지를 직접 볼 수만 있어도 좋을 텐데. 제가 뭘 하고 있는지, 뭘 잘하고 뭘 못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지민씨 잘 했는데... 그래서 테스터로 선정한 건데."

"미안해요.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전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건..."

"잠깐잠깐. 지금 다른 사람이라고 했어요?"

천사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지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천사는 뭔가를 알아냈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알겠네. 저기요. 제가 분명히 한 사람 분의 행복이라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지민 씨는 사람 아니에요?"

"그래요. 한 사람. 딱 한 사람만 행복하게 해 줘도..."

"그러니까. 해 주는 게 아니라니까요. 한 사람 분의 행복을 만들면 돼요. 그게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의 전부예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랑, 지민 씨까지 포함해서. 한 사람 분의 행복이면 돼요. 딱 한 사람. 다른 사람들을 조금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지민 씨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기만 해도 만족되는 조건이라고요. 아, 그거였네."

"저만 행복해도 된다고요?"

"지민씨도 사람이잖아요. 이 세상사람 중에 한 사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안 만들어 주고 대체 누굴 행복하게 하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 뭐? 또? 갈께, 간다고! 하여간, 알았죠? 게이지 좀 잘 채워줘요! 베타테스트 끝날 때 까지만! 그럼 만족감과 성취감, 쭉쭉 차오를 거예요!"

천사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지민은 다급하게 외쳤다.

"저, 베타테스트가 언제까진데요! 일주일? 한 달?"

"장난해요? 팔십구 년 남았..."

천사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지민은 한동안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다 시계를 보았다. 밤 열한 시였다.

"그래. 할 만큼 했잖아. 뭘 더 한다고. 한 시간은 오로지 나를 위해 쓴다!"

카트에 넣어놨던 책 주문하기. 야식으로 치킨 시키기. 편의점에 들러 맥주 사오기. 직원의 시원한 이마에서 게이지 몇 칸인가 확인해 보기. 인터넷 방송 보며 멍때리기. 따뜻한 이불 속에 틀어박히기. 해외여행 계획 짜기. 오로지 나를 위해.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생각하는 것만으로 지민의 이마에 있는 행복 게이지가 순식간에 끝까지 차올랐다. 짜릿한 성취감과 만족감이 온 몸을 감쌌다.

오늘 미션 성공.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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